세상에는 일심동체를 이루는 것이 많다. 어느 것 하나만 없어도 외팔이나 다름없다. 부엌에서 사용하는 칼과 도마는 늘 단짝처럼 등장하여 미식가들의 입맛을 돋우는 일에 솔선수범을 한다. 칼은 도마의 희생이 따라야 온전히 제구실을 수행할 수 있다.
도마는 뭐니 뭐니 해도 단단한 박달나무가 최고요, 칼은 대장장이가 풀무질로 담금질한 무쇠 칼이 일품이다. 그 옛날 시골 부엌에서 끼니를 준비하던 어머니가 무쇠칼로 둔탁하게 도마를 치던 소리가 지금도 가끔 귓가에 들려오는 듯하다. 어머니가 오랫동안 사용했던 박달나무 도마는 무수한 칼질에 의해 한가운데에 골이 파였다. 그것은 오로지 가족을 위해 희생한 어머니의 가슴 아픈 생이라고도 할 수 있다. 어머니의 칼 놀림은 그 어떤 기계보다도 정교하였다. 사랑을 요리하던 그런 아내를 위해 아버지는 숫돌에다 정성 들여 칼을 갈아 날을 세워 주었다.
요즘 매장에 가면 용도가 다양한 도마와 식칼 제품들이 주부들의 눈길을 사로잡는다. 도마는 여러 가지 색으로 식자재 쓰임에 맞게 쓸 수 있게 만들어졌다. 파란색은 생선, 빨간색은 육류, 초록색은 야채, 흰색은 익힌 것으로 골라 사용할 수 있다. 또한, 요리 경연대회에서 요리사들에게 음식은 곧 예술 작품이다. 각종, 재료들을 아름답게 요리하는 그 모든 임무를 도마와 칼이 완벽하게 해준다.
뭉툭하게 문드러진 칼과 도마가 필부필부(匹夫匹婦)와 어울린다면, 날렵하게 생긴 스테인리스 칼과 항균 작용까지 한다는 다양하게 디자인 되어진 신식 도마는, 막 결혼한 젊은 부부에게 잘 어울린다.
그동안 여자들이 남편과 자식을 위해 희생하는 도마였다면 이제는 그 역할이 바뀌는 세상이 되어가고 있다. 요즘 여성들은 사회진출이 늘어나 각 분야에서 당당히 능력을 인정받으면서 오히려 남편들의 적극적인 외조를 받게 되었다. 심지어 능력 있는 아내를 위해 전업주부의 일을 도맡아 하는 남성들 또한 늘어나는 추세다. 맞벌이 가정일수록 부부가 서로 역할을 분담함으로써 가정의 행복을 추구하는 초석이 될 수도 있다. 옛날 남편들은 아내 사랑을 마음에 담아 내색하지 못하고 권위주의로 살았지만, 지금의 남편들은 아내 사랑을 적절하게 표현한다. 그동안 식탁에 앉아 숟가락! 물! 하면 즉각 식탁 위에 올려야 했다. 그러던 권위주의 남편도 간혹 직접 물을 챙기기까지 하니 변해가는 세상을 실감한다.
예전에 어른들은 남자가 부엌에 들어가면 은밀한 부위가 어찌 된다는 말로 가부장적 남성 우월주의를 내세웠다. 그러나 지금은 아내를 도와 주방일을 도맡아 해주는 사위일수록 사랑을 듬뿍 받는다. 가히 혁신적인 변천사가 아닐 수 없다. 옛 조상들이 그 모양새를 듣고 보았다면 분노가 하늘을 찌를 일이다.
어쩜 칼과 도마는 세상 모든 부부들의 삶이라고 보여 진다. 그림만은 포기할 수 없다고 단호하게 말한 남편이었다. 모든 사람들이 염원하는 건 평생 동안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지내는 것이다. 그림이 남편의 행복한 삶이라면 그것 또한 아내인 나의 행복이기 때문이다. 예술가의 뒷바라지는 보통 사람들이 이해할 수 없는 생활의 연속이었다. 그러나 나는 기꺼이 남편의 도마가 되어주었다.
하지만 정작 남편 곁에서 희생하면서 나보다 더 많은 시간을 같이하는 도마가 따로 있다. 그것은 팔레트다. 그 팔레트 위에서 남편의 손에 주어진 붓과 나이프가 여러 가지 물감을 혼합하여 만들어내는 색이 캔버스에 덧칠했을 때 독창적인 색의 예술을 만들어낸다. 그러다 보니 그림을 그릴 때만은 나는 언제나 그의 세컨드다. ‘뭔가에 미쳐 있는 사람은 곁에 있는 사람이 외롭다.’ 했다. 그림에 미쳐 있는 남편의 등 뒤에서 조용한 그의 그림자가 된다.
칼도 때론 잘못 사용하는 사람의 손에 쥐어지면 끔찍한 흉기로 돌변하여 세상을 떠들썩하게 하는 주범이 될 수도 있지만, 어떤 사람의 손에서는 칼이 삶의 전부가 되는 것이다. 또 칼만 흉기가 되는 것은 아니다. 잘못 뱉은 말 한 마디가 비수가 되어 상대의 가슴에 영원히 지울 수 없는 큰 아픔의 상처를 남겨 주기도 한다.
나는 늦은 퇴근길에 자갈치 시장에 자주 들린다. 직장에서 가깝다는 이유도 있지만 싸고 싱싱한 생선을 살 수도 있고, 매서운 갯바람을 견디며 꽁꽁 언 손으로 도마 위에 생선을 올려놓고 무뎌진 칼로 모진 세월을 자르듯 생선을 내리치는 자갈치 아지매들의 억센 삶을 보면서, 직장에서 하루의 팍팍하고 긴장된 마음을 풀어보기도 한다.
우리나라에서도 이혼이 부쩍 늘어나는 추세다. 도마가 판판이 받쳐주어야 칼날이 옹이지는 걸 방지해준다. 늘 여자가 참고 희생만 하라는 그런 뜻은 아니다. 흔히 부부싸움은 칼로 물 베기라고 한다. 그러니 칼과 도마처럼 서로 이해하면서 조화롭게 살았으면 한다.
살아오면서 나는 타인의 가슴에 비수가 되었던 적이 있었던가? 아니면 든든한 받침목이 되어준 도마였던가? 저녁 준비를 하다 문득 지난 세월을 반추해 본다.
첫댓글 어느 듯 이 해가 막바지에 들었습니다. 최 작가님 그간 별고없으셨는지요.' 칼과 도마' 잘 읽었습니다. 마디 마디 옳으신 말씀 .........
검강하셔셔 좋은 글 많이 쓰 주시길 마라마지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