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치사(佛齒寺)는 부처의 진신치아(眞身齒牙)를 모신 절이다. BC 543년 석가모니 열반 후 다비에서 나온 사리 중에서 어금니 치아 사리 하나가 동부 인도의 칼링카 왕국에 배분된 것을, 칼링카 왕이 꿈의 계시에 따라 공주의 쪽진 머리에 이 치아를 숨겨 스리랑카로 보낸 것이다. 이 불치는 불치함에 소중히 모셔지면서 마치 옥쇄처럼 왕권의 상징으로 또 국민단결의 구심력이 되었고, 수도를 옮길 때마다 함께 이전된 것으로, 16세기 싱할라 왕조가 수도를 캔디로 옮기면서 불치사를 만들고 불치를 안치하였다.
신발을 맡기고 맨발로 불치를 보려고 사원 2층으로 올라갔으나, 불치는 순금 불치함에 들어있어 보지 못했다. 사진촬영을 금하는 아름다운 팔각의 전각 2층의 불치함 앞에는 꽃을 바치며, 무릎을 꿇은 신도들로 가득하며 갓난이를 마루에 누이고 염불을 외는 부모들의 간절한 모습도 보인다. 불치당 뒤는 불교박물관으로 3개 층의 박물관에는 역대 불치사 주지들의 상반신 동판과 불화와 절의 집기 이외도 불치의 모형도 전시되어있다. 포르투갈 지배 시, 침략자가 스리랑카 국민의 정신적 구심점인 불치를 빼앗으러했으나 가짜불치를 급조하여 이것을 공납함으로서 불치를 지켰다 한다. 불치사 자체는 대형사원이 아니고 연륜도 일천하나, 오직 불치를 모신 사원이기에 스리랑카를 대표하는 사원이 되어 존경을 받는다.
어제 캔디로 가던 길목에 놓쳤던 알루 비하라 사원을 보기 위해 길을 거꾸로 디시 북쪽으로 1시간 20분 되돌아가 가다 점심시간이라 길가의 분식집에 들려 사진도 없어 메뉴만 보고 국수를 시켰는데 시간이 오래 걸리는데 나온 걸 보니 볶은 국수다. 얼큰한 국물국수를 기대했었는데,,,,. 물어보니 물 국수는 없다기에 생각해보니 이해가 된다. 손으로 음식을 먹는 이들에게 물 국수는 젓가락이 있어야 되니 국물 있는 음식은 기피가 되었나 보다.
기원전 3세기에 건축되었다는 초기에는 동굴사원만 있었다는데, 이 사원을 놓치면 안 되는 이유는 역사상 가장 위대한 경전이 여기서 문자 화 되었기 때문이다. 구전되면서 조금씩 왜곡될 수도 있고 잊히기도 하던 부처의 말씀을 문헌화 한데는 전해지는 이야기가 있다. 바라감바후 1세가 타밀에 쫓겨 담불라 산으로 피신하여 몸을 숨겼으나 그를 도운 승려 중 일부는 캔디의 마하웰리 강변의 정글로 옮겨 죽은 동물의 시체(승려는 산 짐승을 죽이지 못하니까)와 풀뿌리로 연명하면서, 이런 혹독한 사정에서 행여 ‘구전되던 부처의 말씀이 끊기게 되어 종래는 사라지는 것은 아닐까?’ 하는 걱정을 하던 차에 왕이 마침 타밀을 물리치고 왕위로 복귀하자, 후세를 위해 팔리어 삼장을 문헌화 할 것을 결의 했다.
팔리어는 원래 서인도의 방언이었던 것이, 붓다의 입멸 후 초기 교단이 서인도로 확장됨에 따라 성전의 언어가 되었던 것으로 유추되며, 이 삼장(三藏)은 부처가 직접 설파한 말씀인 경(經)과 출가한 승려가 지켜야하는 율(律)과 이 경과 계율에 대한 주석서 논(論)을 말하며 이전에는 구절에 운율을 더해 암송으로 전승되어 온 것으로, 알루 비하라의 결의에 의해 삼장이 불교사 최초의 문자로 성문화(成文化)작업이 이루어 진 것은, 부처의 말씀을 처음으로 문자로 남긴 것으로, 불교사에서 찬란히 빛날 큰 축복이며 대역사(大役事)였다.
팔리어 삼장의 복사본
야자수 잎을 찐 후 펴서 말려서 이것을 무두질로 부드럽게 만들어 철핀으로 경을 쓰고 잉크를 입히고 문지르면 글씨가 살아나면서 경전은 완성된다. 이렇게 공들여 만들어지는 과정에 500여명의 장로급 승려들이 작업에 참여했으며, 정확한 간경을 위해 인도에서 저명한 불교학자도 초빙되었으며 초고의 완성까지 11년의 인고의 시간이 소요되었다 한다. 경전이 완성되자 후세에 행여 일어날 수 있는 법란에 대비하여 이 사원의 석굴에 넣어 밀봉한 것이 세상에 모습이 나타난 것은 1800년 이상이 지난 후 영국의 식민지 시절이었다.
그들의 수탈로 생활이 궁핍해진 국민들의 반란이 이 지역에서 일어나자, 1848년 영국군은 진입을 명분으로 알루 비하라 사원을 약탈하고 뒤지던 영국병사가 이 보물을 발견하자 영국은 이 삼장을 영국으로 보내서 학회를 구성하여 준비작업을 하여, 1891년부터 50년에 걸친 번역작업으로 영어판 팔리 삼장에 완결되었다. 독립국가가 된 스리랑카의 지속적인 반환요구는 거부되었고, 이 나라는 사본을 토대로 10 년간의 각고 끝에 2001년 자국 승려의 손으로 팔리 삼장이 완경된 것으로 만족해야했다.
알루 비하라 사원의 주차장 바로 위의 박물관에는 팔리 삼장과 동일한 방법으로 근래에 제작된 복사본으로 보이는 두루마리가 전시되어 있고, 나무종이를 무두질하여 만드는 과정을 보여주는 전시품도 눈길을 끈다. 동굴사원으로 올라가면 처음 사원의 규모는 크지가 않으나 누런 금색 칠을 한 와불 뒤 벽과 천정에는 프레스코벽화가 퇴색되어 있으며, 자그마한 둘째석굴의 끔직한 지옥도는 중생에게 ‘죄 짖지 말고 착하게 살라며’, 업보의 무서움을 경고한다.
점심 후에 예약을 해둔 오조(OZO)호텔에 가서 체크인을 하는데, 호수 방향이 아니고 배란다도 없는 산 쪽의 방을 배정해준다. 배란다가 있는 방으로 바꿔 달랬더니 60불을 더 내라고 한다. 돈이 문제가 아니라 예약 시에 에이전트에게 조건을 분명히 알려주었는데도 이런 태도는 받아들일 수가 없어, 상급 매니저를 찾아 “이런 호텔에 묵지 않겠다.”며 화를 내며 항의하자, 미안하다며 추가요금 없이 방을 바꾸어 준다. 자신의 권리행사를 하지 않고 뒷말을 하는 것 보다 번거롭고 귀찮아도 깔끔하게 사는 것 나쁘지 않다.
새벽에 헬스장에서 기구운동을 하고 아무도 없는 수영장에서 약간 차게 느껴지는 물속으로 풍덩, 고급호텔다운 이침 식사를 마치고 2000여m고지의 차 산지인 누와라 엘리아로 출발. 캔디를 벗어나면서 서서히 고도를 높이던 산길은 온 산을 덮고 있는 차 농장 산허리를 관통하는 국도로 이어진다. 공기가 너무 좋아 차창을 내리고 숨을 들이켜도 차(茶)냄새는 나지 않는다. 간간이 직접 채취한 나물을 파는 좌판이 보이는 것은 우리나라 산길의 풍광과 같다. 도중에 만나는 길가에서 보이는 라바나 폭포는 호튼 플레이인에서 발원한 물이 흘러내리는 계단식 폭포로 사진을 찍었다.
라바나 폭포
첫댓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