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기】 1920년 10월 21일~10월 26일
【장소】 길림성 연변 화룡현(和龍縣) 삼도구(三道溝)와 이도구(二道溝) 청산리(靑山里) 백운평(白雲坪) 부근의 골짜기, 화룡현에서 서남 방향으로 약 40리 떨어진 곳에 위치
【내역】 청산리전투는 간도에 불법으로 침입한 일본군의 동지대(東支隊)가 길림성 화룡현 삼도구와 이도구에 주둔하고 있는 독립군들을 포위하여 섬멸하려고 들어오다가 도리어 독립군의 반격을 받고 전개된 전투들이다. 첫 전투는 1920년 10월 21일 오전 9시, 삼도구 청산리 백운평(白雲坪) 부근의 골짜기에서 김좌진이 이끄는 북로군정서 독립군과 일본군 동지대의 산전(山田) 토벌연대 사이에서 시작되었다. 여기서 시작된 전투는 이도구 부근으로 옮겨지면서 1920년 10월 26일 새벽까지 약 6일간 10여 차례의 대소전투들이 전개되면서 연속 일본군을 대파했다.
【주요전투】 청산리전투에는 김좌진의 북로군정서와 홍범도의 대한독립군을 주력으로 하여, 국민회군, 의군부, 한민회군, 의민단, 신민단 등 8개 독립운동단체가 참여했다. 백운평전투(북로군정서, 10.21), 완루구전투(홍범도연합부대, 10.21), 천수평전투(북로군정서, 10.22), 어랑촌전투(북로군정서, 홍범도연합부대, 10.22), 맹개골전투(북로군정서, 10.23), 만기구전투(북로군정서, 10.23) 시구전투(북로군정서, 10.24), 천보산전투(홍범도연합부대, 북로군정서, 10.24, 10.25), 고동하곡전투(홍범도연합부대, 10.25, 10.26) 등이다. 이들 전투에서 한국 측 기록에 의하면 일본군 전사자는 1,200명 정도이나 일본 측 기록에서는 확인할 수가 없다. 청산리전투에서의 승리는 지형을 이용한 독립군의 전략 전술, 노령 지역에서 입수한 우수한 무기, 재만동포들의 절대적인 지원하에 이루어진 것이었다.
【현황】 청산리는 백두산 가는 길에 서성에서 용성을 지나 삼도 못 미친 곳에 위치하고 있다. 청산리를 방문할 경우, 백두산으로 가는 길이 화룡으로 가는 길보다 조금 멀다. 한편 용정에서 백두산으로 향하는 경우 서성에서 와룡을 거쳐 어랑촌, 천수평, 갑산촌 등 청산리전투가 벌어진 지역을 방문할 수 있고 노령고개를 지나 삼도를 거쳐 이도백하, 백두산에 도달할 수 있다.
【관련보도】 『문화일보(1999. 8. 26)』 ‘청산리대첩 기념탑 길림성(吉林省)에 세운다’ 항일 무장 독립운동사상 최대의 전과를 올린 청산리전투를 기념하는 탑이 한·중 합작으로 건립된다. 기념탑 건립 장소는 중국 길림(吉林)성 연변(延邊)조선족자치주 내 화룡(和龍)시 동쪽 6㎞ 지점의 전투 현장 입구. 설계도가 완성되는 대로 10월쯤 착공, 내년 10월 21일 청산리전투 80주년에 맞춰 준공할 예정이다. 탑 높이는 전투가 있었던 1920년을 상징하기 위해 19.20m로 할 것으로 알려졌다. 건립 계획을 주도하고 있는 김영광(金永光) 전 국회의원은 25일 최근 중국 방문 때 기념탑 건립에 관한 지린성 정부의 최종 승인을 받았다고 밝히고 곧 한국인과 조선족 동포가 함께 참여하는 ‘청산리 항일 대첩 기념비(가칭)’ 건립추진위원회를 구성할 방침이라고 말했다. 10, 13, 14대 의원을 지낸 김씨가 청산리전투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지난 87년. 자신이 국회에서 발의한 백두산 영유권 결의안과 안중근(安重根)의사 유해봉환 사업 등을 추진하기 위해 자주 만주 지역을 찾다가 청산리 전적지가 한국인들의 무관심 속에 방치돼 있다는 충격적인 제보를 받았다. 실제로 현장에 가보니 빛나는 전공을 기리는 설명문은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었고, 조그마한 각목 표지만이 잡초 속에 파묻혀 있었다. 이래서는 조국 광복을 위해 목숨 바친 선열들을 뵐 낯이 없다고 생각한 김씨는 허룽시 당위원회 주철수(朱哲洙) 서기와 연변자치주 김영만(金永萬) 부주석(현 자치주 국제공공관계협회회장), 연변대 박창욱(朴昌昱) 교수 등을 찾아가 기념탑 건립의 당위성을 설득한 끝에 지난해 화룡시와 자치주정부의 승인을 얻어냈다. 또 국내에서는 강영훈(姜英勳) 전 총리, 서영훈(徐英勳) 전 KBS 사장 등 원로들과 광복회 관계자들에게 취지를 자문해 전폭적인 협조를 다짐받았다. 마지막 관문은 길림성 정부. 한때 최종 허가권을 쥔 길림성 정부가 일본과의 관계 악화나 조선족의 민족 정서 촉발 등을 우려해 기념탑 건립을 불허할지 모른다는 소문이 돌았다. 그러나 자치주 측의 헌신적인 로비 노력에 힘입어 드디어 이달 초 최종 승인이 떨어졌다. 김씨는 1억 원 정도로 예상되는 건립 기금 모금은 한국인과 조선족 양쪽에서 광범위한 참여를 유도하기 위해 십시일반의 ‘소액 다수’를 원칙으로 할 방침이라고 말했다. 특히 대첩을 이끈 김좌진(金佐鎭)·홍범도(洪範圖)·이범석(李範奭) 장군 등 선열의 유족들을 가급적 모금의 전면에 내세울 계획이다. 기념탑은 화룡시에서 백두산으로 가는 길에 세워지기 때문에 민족정기를 고취하는 역사교육 관광코스로도 개발될 수 있다고 김씨는 기대했다. 청산리전투는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 소속 독립군 2천5백 명이 일본군 5만 명을 청산리 백운평계곡 등으로 유인해 3차례에 걸쳐 3천여 명을 사살한 대첩으로 독립전사에 기록돼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