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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상평 베트남 야구 대표팀 감독(사진 좌로부터), 베트남 대표팀 4번 타자, 허구연 위원, 레이 마인 둥 호치민야구협회회장. 이들이 베트남 야구의 중심이다(사진=스포츠춘추 박동희 기자) |
미국인 선교사 필립 질레트가 한국에 ‘베이스볼(baseball)’을 전파한 건 1904년이었다. 당시만 해도 한국은 ‘발전 가능성이 제로에 가까운 가난하고, 보잘 것 없는 나라’였다. 가뜩이나 극소수만이 즐기던 ‘베이스볼’이 대중 스포츠로 발전하길 기대한다는 건 꿈같은 소리였다. 그러나 한국은 채 100년이 흐르지 않아 아시아의 강국이 됐고, ‘베이스볼’은 ‘야구’라는 이름으로 토착화해 가장 사랑받는 대중 스포츠가 됐다. 특히나 한국야구는 2008년 베이징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따내며 ‘야구 변방’에서 ‘세계야구의 중심’으로 우뚝 섰다. 여기 ‘110년 전의 질레트처럼 이젠 한국이 나서서 저개발국에 야구를 전파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이를 실천하는 이들이 있다. 그들의 이야기를 베트남 현지에서 취재했다.
야구계에서 그는 ‘허 위원장’으로 불린다. 방송가에선 그를 ‘허 위원’으로 부른다. 야구팬들 사이에선 ‘허프라’로 유명하다. 그러나 지난해 12월 27일. 베트남 호찌민행 항공기를 탈 때 그는 ‘허구연(63)’이라는 자연인이었다.
허 위원(그가 가장 애착을 갖는 직함이다)은 일주일 전 기자에게 “베트남 야구를 취재해볼 생각이 없느냐”고 물었다. 연말 일정이 많았던 터라, 선뜻 답을 하지 못했다. 사실 바쁘기로 따지자면 허 위원이 더했다. 그의 수첩엔 하루 4, 5개 이상의 약속이 잡혀 있었다. 그런 와중에도 그가 3박 4일 일정의 베트남행을 결정한 데 이유가 있었다. 베트남 호찌민시에 들어설 ‘하나은행 스타디움(HanaBank Stadium)’ 건설 현장을 직접 둘러보기 위해서였다.
“‘하나뱅크 스타디움은’은 베트남 최초의 야구장이에요. 하나은행에서 2억 원을 기부해 현재 호찌민에 짓고 있어요. 2011년 하나금융 김정태 회장님을 만났을 때 ‘베트남에 야구장이 없어 야구 꽃이 피기 어려운 실정’이라며 안타까운 사연을 설명해 드리자 김 회장께서 흔쾌히 큰돈을 지원해주셨습니다. 뜻깊은 돈으로 세워지는 의미 있는 야구장인 만큼 내가 직접 현장을 찾아가 건설 상황을 점검하는 게 예의이지 싶어요. 그래 연말에 모든 약속을 깨고 베트남에 가려는 겁니다.”
2012년 4월. 하나금융 김정태 회장은 허 위원으로부터 “베트남에 야구장이 없어 선수들이 공터에서 훈련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야구장 건립 비용으로 써달라”며 2억 원을 쾌척했다. 허 위원은 이 돈을 호찌민시야구협회에 전달하며 “성인 선수들이 사용할 정규 야구장 1면과 어린이 전용 리틀 야구장 1면을 지어달라”고 요청했다. 협회는 하나은행의 기부와 허 위원의 노력에 감사해 하며 “문제없이 야구장 2면을 짓겠다”고 약속했다. 덧붙여 “6개월 정도면 공사가 끝날 것”이라며 “한·베트남 수교 20주년이 되는 2013년엔 베트남 최초의 야구장인 ‘하나뱅크 스타디움’이 완공될 것”이라고 자신했다.
하지만,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2013년이 저물도록 베트남 최초의 야구장은 완공될 기미조차 보이지 않았다. 틈틈이 협회 관계자들과 메신저를 주고받던 허 위원이 “내가 직접 현장을 방문해 공사 진행 상황을 점검하겠다”고 결심한 것도 바로 이 때문이었다.
호찌민 공항에 도착한 허 위원은 휴대전화를 꺼내고선 곧바로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었다.
“어, 정 감독. 고생이 많소. 지금 호찌민공항에 도착했는데 어디요?”
전국에 야구장이 단 한 곳도 없는 ‘야구 불모지’ 베트남 야구장이 없어 축구장과 공터를 돌며 훈련하는 베트남 야구선수들(사진=스포츠춘추 박동희 기자)
정 감독. 1994년부터 20년 동안 그는 줄곧 ‘정 감독’으로 불렸다. ‘정상평(52)’이란 이름이 있지만, 그의 이름을 부르는 이는 20년 전부터 거의 없었다. 그 역시 이름보단 ‘정 감독’으로 불리는 게 익숙했다.
그는 현재 베트남 야구 국가대표팀 감독이다. 한국에선 그를 아는 이가 몇몇 야구인에 불과하지만, 베트남에선 꽤나 인지도가 높다. 그가 초대 베트남 국가대표 야구팀 감독이자 베트남 야구팀이 2011년 동남아시안게임(SEA GAME)에서 말레이시아를 꺾으며 국제대회 첫 승을 거뒀을 때 사령탑을 맡았기 때문이다.
‘하나뱅크 스타디움’ 건립도 그의 하소연에서 시작했다. 2001년 혈혈단신 베트남에 건너와 야구 보급에 힘쓸 때부터 그는 야구장의 필요성을 절감했다.
“처음 베트남에 와서 야구를 전파하려고 무진장 노력했어요. 잘 아시겠지만, 베트남은 축구가 국민 스포츠입니다. 여기선 야구를 ‘봉짜이(bóng chày)’라고 하는데, 봉짜이가 뭔지 잘 모르는 사람이 태반이에요. 여기다 베트남은 미국과 오랫동안 전쟁을 치른 나랍니다. 미국 스포츠인 야구에 거부감이 강했던 편이에요. 상황이 이렇다 보니 야구를 전파한다는 게 보통 힘든 일이 아니었습니다.
특히나 전국에 야구장이 단 한 곳도 없어서 야구가 어떤 스포츠인지 알리기가 쉽지 않았어요. 무엇보다 애써 야구 유망주를 발굴해도 마땅히 연습할 공간이 없는 까닭에 선수를 키워내기도, 실력을 연마하기도 힘들었어요. ‘야구장 하나만 있었어도…’하는 아쉬움을 매일같이 느꼈죠. 그러다 2011년 서울에 갔을 때 무작정 허 위원님을 찾아가 ‘베트남 야구를 도와주십시오’하고 읍소했습니다. 허 위원께서 제 이야기를 잠자코 들으시다가 ‘힘 닿는 데까지 도와주시겠다’고 하시더군요. 솔직히 그때만 해도 반신반의했어요. 하지만, 허 위원님 덕분에 꿈을 이루게 됐습니다. 네, 허 위원님이 하나은행을 통해 2억 원을 받아주신 덕분에 베트남 최초의 야구장이 들어설 수 있게 된 겁니다.”
베트남 야구계는 하나은행의 지원 소식을 듣고서 올림픽에서 금메달이라도 딴 듯 기뻐했다. 정 감독 역시 13년간의 노력이 헛되지 않았다는 생각에 눈물을 흘렸다. 그도 그럴 게 야구장 건립은 베트남 야구 발전의 시작을 의미했고, 실력 향상의 지름길을 뜻했다.
하지만, 예상치 못한 악재를 만나며 야구장 건립은 올스톱되고 말았다. 정 감독은 아무 대가 없이 큰돈을 쾌척한 하나은행과 그간 자비를 털어 베트남 야구계를 헌신적으로 지원한 허 위원에게 미안할 뿐이었다.
호찌민공항 입국장을 나오는 허 위원을 보자 정 감독은 “먼 길을 오시게 해 죄송합니다”하고는 고개를 숙였다.
허구연이 야구 저개발국 지원에 나선 이유 캄보디아 야구 선수들과 야구소년들(사진=스포츠춘추 박동희 기자)
그간 허 위원은 ‘먼 길’을 다녔다. 누가 그 길을 가라 한 건 아니었다. 그 길에 ‘금은보화’가 숨겨져 있던 건 더욱 아니었다. 그는 자신이 좋아서 먼 길을 다녔고, 그걸 야구인의 의무이자 보람으로 여겼다.
그가 먼길을 가기 시작한 건 2006년부터였다. 그해 허 위원은 김길현 전 이화여대 약학과 교수를 만났다. 김 교수는 1년 전 ‘잘 나가던’ 명문대 교수 자리를 박차고, “나눔과 섬김을 실천하겠다”며 캄보디아로 떠난 이였다. 캄보디아에 도착한 뒤 그는 한국의 서울대 격인 프놈펜 왕립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다. 그러나 말이 교수지, 그의 월급은 10만 원 남짓에 불과했다.
캄보디아에서 교수와 선교 활동, 인재 양성을 위한 학교 설립에 매진하던 김 교수는 오랜 내전으로 준법의식과 도전의식이 약해진 캄보디아 학생들을 볼 때마다 항상 아쉬움을 느꼈다. 캄보디아의 미래인 학생들이 법과 규칙의 소중함을 깨닫지 못한다면 캄보디아는 언제까지고 무법천지가 될지 모른다고 우려했다. 그때 김 교수가 생각해낸 게 바로 야구였다.
2007년 기자와 만났을 때 김 교수는 “젊은이들에게 법과 규칙을 존중하는 자세와 패기를 키워줄 도구로 야구만 한 스포츠가 없다고 판단했다”며 “야구에만 있는 희생번트야말로 학생들의 협동정신을 키우는데 그만이라 생각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야구를 통한 학생들의 의식 변화’ 구상은 곧바로 현실의 벽에 부딪혔다. 당시까지 캄보디아엔 야구장은 고사하고, 야구 장비마저 구할 데가 없었다. 김 교수가 서울에 있는 대학 동창들에게 전화를 걸어 도움을 청했지만, 캄보디아에 도착한 장비는 턱없이 모자랐다. 그때 김 교수의 딱한 사정을 전해 듣고, 자비를 털어 야구 장비를 캄보디아에 보내준 이가 있었다. 허 위원이었다.
“한국이 선진국 대열에 합류하기까지 여러 나라의 도움이 있었어요. 하지만, 정작 한국은 선진국 대열에 합류하고서도 태권도를 제외하면 저개발국에 전수해준 게 거의 아무것도 없습니다. 김 교수 이야기를 듣고 ‘필립 질레트가 우리나라에 야구를 싹트게 했듯이 우리도 이젠 다른 나라에 야구 씨앗을 뿌리는 제2의 질레트가 돼야 한다’는 생각을 했어요. 그래 캄보디아에서 질레트 역할을 하는 김 교수를 도와야겠다고 다짐했습니다.”
허 위원의 캄보디아 지원은 일회성으로 끝나지 않았다. 그는 2007년 김 교수와 프놈펜 왕립대학 학생선수 4명을 한국으로 초청했고, 자신의 모교인 고려대 야구부에서 숙식하며 선진야구를 배우도록 도와줬다. 캐치볼도 제대로 하지 못했던 캄보디아 학생들은 한 달 뒤 고향으로 돌아갈 땐 어느덧 야구 전술까지 이해하는 어엿한 야구선수가 돼 있었다.
허 위원은 2009년엔 1억 원을 들여 자신의 이름을 딴 ‘허구연 야구장’을 캄보디아 캄퐁스프에 짓기도 했다. 캄보디아 최초의 야구장이 들어서는 순간이었다. 허 위원은 이 구장을 캄보디아야구연명에 아무 조건없이 기부했다.
‘허구연 야구장’이 건립되자 캄보디아 야구는 급속도로 발전했다. 선수들의 실력이 좋아진 건 말할 것도 없고, 야구팀도 늘었다. 여기다 한국에 대한 이미지까지 좋아져 ‘야구’와 ‘교육’하면 캄보디아인들은 곧바로 ‘한국’을 떠올리게 됐다.
허 위원은 사비 1억 원을 털어 캄보디아 최초의 야구장인 '허구연 야구장'을 지었다. 사진은 야구장 완공식 때 허 위원이 시구하는 장면(사진=스포츠춘추 박동희 기자) |
현재도 허 위원은 캄보디아 야구 지원에 열성적이다. 그가 이토록 지원에 열심인 건 사람에 대한 믿음도 한몫했다.
“세상에 많은 신앙인이 있지만, 김 교수는 ‘진짜 신앙인’이에요. 게다가 야구선수 출신들보다 더 야구를 사랑하는 ‘참 야구인’이에요. 캄보디아로 갈 때 자신이 약속했던 걸 모두 지켰습니다. 이런 분을 도울 수 있다는 건 크나큰 영광입니다.”
사실이었다. 김 교수는 프놈펜에서 자동차로 1시간 30분 거리인 스랑 마을에 25만 평의 학교부지를 마련했고, 그곳에 초등학교ㆍ중ㆍ고교ㆍ대학을 짓기 시작했다. 학교 설립을 통해 캄보디아의 미래를 짊어질 인재를 배출하겠다는 애초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였다.
‘극좌 정권’이던 크메르루주는 1970, 80년대에 걸쳐 지식인들을 대학살했다. 그 바람에 캄보디아엔 지금도 음악과 미술 수업을 진행하지 못하는 학교가 태반이다. 그걸 가르칠 만한 교원들이 크메르루주에 이미 학살돼 명맥이 끊겼기 때문이다. 따라서 김 교수의 목표인 ‘인재 양성’은 캄보디아의 미래와 직결되는 중차대한 비전이었다.
김 교수는 캄보디아의 밝은 미래를 이끌고자 마지막 남은 안락까지 내려놓았다. 바로 한국 국적을 포기하고, 캄보디아 국적을 취득한 것이었다. 미국, 유럽, 일본 국적을 선택하는 건 흔한 일이지만, 캄보디아처럼 저개발국 국적을 취득하는 건 좀체 보기 힘든 장면이다. 김 교수가 그렇게 한 건 그 자신이 캄보디아인이 되지 않는 한, 캄보디아의 아픔과 고통을 100% 이해할 수 없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교회가 기업이 되고, 목회자가 사업가로 둔갑하며, 교인들의 성금이 사업 자금이 되는 현실에서 김 교수는 허 위원의 말대로 ‘참 신앙인’의 표본이라 할 수 있다.
허 위원은 지난해까지 해마다 캄보디아를 찾아 야구 장비를 전달하고, 선수들을 지도했다. 도움을 주는 이도 생겨나 2011년엔 포스코건설(당시 사장 정동화, 현 부회장)이 ‘허구연 야구장’의 미흡한 시설을 보강하는 데 쓰라며 1만 달러를 기부했다.
허 위원의 야구 저개발국 지원은 캄보디아에만 국한한 건 아니었다. 알려지지 않은 선행이 더 많다. 2010년부터 아시아야구연맹(BAF) 기술위원회 위원장을 맡은 허 위원은 ‘야구 저변의 확대없이 아시아 야구의 발전도 없다”는 일념으로 몽골, 파키스탄, 미얀마, 스리랑카 등 야구 저개발국에 소리 소문없이 야구용품을 보냈다.
지난해 1월 스포츠 패션 기업 ‘데상트’가 1억 3천만 원 상당의 야구화를 기증해 이를 대한야구협회가 야구 저개발 8개국에 보낸 것도 막후에서 허 위원이 역할을 한 까닭이었다.
야구 저개발국에 지원을 아끼지 않던 허 위원은 그러나 늘 가슴 한편에서 아쉬움을 느꼈다. ‘동남아시아의 맹주’ 베트남은 여전히 협회도, 대표팀도 없는 ‘야구의 불모지’로 남겨져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던 2011년 4월. 대한야구협회로부터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허 위원을 꼭 만나뵙고 싶어하는 사람이 있다”는 전화였다. 허 위원은 그게 누군지 궁금했다. 협회 관계자는 “베트남의 정상평 감독”이라고 답했다. 허 위원은 “알았다”고 말하고서 ‘정 감독’이 누군지 알아봤다.
야구인들의 의견은 엇갈렸다. 한편에선 “야구 저개발국을 돌며 야구 전파에 온 힘을 쏟아붓는 진실한 야구인”이라고 평했다. 그러나 다른 한편에선 “과거 아마추어 야구계에서 문제를 일으킨 인물”라며 허 위원에게 “조심할 것”을 당부했다.
기자는 허 위원과 베트남에 동행하며 정 감독이 어떤 사람인지 물었다. 허 위원은 “처음 정 감독에 대해 물었을 때 야구계의 평이 정확하게 반으로 갈렸다”며 “3년 동안 내가 지켜보고 내린 결론은 ‘14년 동안 참회하며 살아온 야구인’이라는 것”이라고 답했다.
14년간 속죄하며 동남아시아에 야구를 보급한 사내 정 감독(사진 왼쪽부터)과 허 위원이 포스코건설 관계자로부터 야구장 건립 현황을 설명듣는 장면(사진=스포츠춘추 박동희 기자)
영화 ‘미션’에서 주인공은 가브리엘 신부다. 가브리엘 신부는 사역을 위해 목숨을 걸고서 원주민인 과라니 족에게 다가가고, 마침내 성 카를로스 성당을 세운다. 하지만, 정작 관객의 이목을 끈 건 가브리엘 신부와는 정반대 지형에 있던 전직 노예상 멘도사였다.
멘도사는 과라니 족을 사로잡아 노예로 파는 악명높은 노예상이었다. 여자 문제로 친동생을 죽일 만큼 잔인한 이였다. 하지만, 결투 끝에 동생을 죽인 후, 죄책감에 시달리며 수도원 안에서 반쯤 죽은 채로 살아간다. 그런 멘도사를 가브리엘 신부는 ‘빛의 세상으로 나와 속죄하는 삶을 살 것’을 설득한다. 결국 멘도사는 자신의 갑옷과 무기 등의 짐을 메고 험준한 오지를 뚫는 ‘속죄의 행군’을 통해 과라니 족을 찾아간다.
멘도사의 속죄와 참회의 진정성을 느낀 과라니 족은 한때 자신의 가족을 노예로 판 멘도사를 용서하고, 그를 친구로 받아들인다. 멘도사가 과라니 족의 용서를 받고서 참회의 눈물을 흘리는 장면은 지금도 깊은 울림으로 남아 있다.
정 감독은 멘도사의 심경을 잘 아는 이다. 그와 같은 마음으로 14년을 살았다. 물론 정 감독은 누군가를 노예로 팔지도, 칼로 찌른 적도 없다. 하지만, 그에겐 14년간 속죄해야 할 마음의 짐이 있었다.
전주고-원광대 출신의 정 감독은 1984년 실업야구팀 포철(현 포스코)에 입단했다. 입단 첫해 전국실업선수권대회에서 도루왕을 차지할 만큼 발이 빨랐다. 상무 시절 정 감독의 재능을 눈여겨보던 한 야구 관계자는 “발이 빠르니 프로에 가면 최소한 대주자로도 뛸 수 있을 것”이라며 “마침 빙그레에서 네게 계약금 3천만 원을 제시했다. 두말하지 말고 제대하면 프로에서 뛰라”고 조언했다.
하지만, 정 감독은 이 제안을 정중하게 거절했다.
“당시 포철은 실업야구의 최정상 팀이었어요. 회사도 좋아 야구선수를 그만둬도 포철에서 계속 근무할 수 있었습니다. ‘죄송하지만, 프로에 가는 것도 좋지만, 계속 포철에서 뛰겠습니다’하고 제안을 거절했어요.”
그만큼 포철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했던 그였다. 하지만, 훗날 정 감독은 프로로 가지 못한 걸 땅을 치고 후회했다.
“나중에 지도자가 되고서 뼈저리게 후회했습니다. 역시 야구계는 프로 출신을 우대하더군요. 프로 출신이어야 인정받는 세상이었어요. 저처럼 아마추어 야구에서만 뛴 사람은 인맥 구축에서도 애로가 많았습니다.”
1991년 정 감독은 무릎 인대가 끊어지는 중상으로 현역에서 은퇴했다. 은퇴 뒤 그는 자신의 바람대로 포철에서 평사원으로 일했다. 하지만, 그는 천상 야구인이었다. 한창 진급시험을 준비할 때 모교인 전주고로부터 연락이 왔다. “야구부 감독으로 와달라”는 청이었다.
정 감독은 고민 끝에 정든 포철에서 퇴사하고, 전주고로 향했다. 그때만 해도 포철은 언제든 돌아갈 수 있는 고향이라 생각했다. 전주고에서 팀을 재정비하던 정 감독은 후배에게 감독 자릴 물려주고, 1993년 후반 목포 영흥고 감독으로 자릴 옮겼다.
해체 직전까지 몰렸던 영흥고는 정 감독과 선수 그리고 학부모의 의기투합으로 기사회생할 수 있었다. 정 감독은 당시를 떠올리며 “무에서 유를 창조한다는 게 얼마나 어려운지 실감했다”며 “반면 ‘포기하지 않으면 뭐든 할 수 있다’는 걸 실감할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고 회상했다.
1996년 정 감독은 다시 팀을 옮긴다. ‘꼭 한 번 맡고 싶던’ 대학 감독직에 오르게 된 것이다.
“그해 제주전문대에서 연락이 왔어요. 감독을 맡아달라고 하더군요. ‘고교 감독은 좀 했으니 대학 감독을 맡아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하던 차라, 학교 측의 제안을 받아들였습니다.”
제주전문대에서 그는 나름 성과를 냈다. 4년제 명문 야구부도 제주전문대에 쩔쩔 맬 정도로 전력이 탄탄했다. 정 감독은 1998년 탐라대 야구단이 창단하면서 다시 한 번 유니폼을 바꿔 입는다. 고교 감독부터 시작해 2년제 대학 그리고 4년제 감독으로 올라가면서 정 감독은 ‘지도 재미’에 푹 빠졌다.
“탐라대 감독일 때 이재우(두산), 강명구(삼성), 이양기(한화) 등을 스카우트했어요. 세 선수 모두 집안 형편이 좋은 편이 아니었어요. 선수들에게 장학금을 주면서 운동에만 매달리도록 했습니다. 공교롭게 세 선수 모두 고교 시절엔 썩 이름이 알려지지 않았지만, 대학 와서 급성장했어요. 정말 노력하는 선수들이었습니다.”
호치민시야구협회. 옛 경마장 자리에 자리잡은 협회 사무실에 베트남 야구의 꿈이 자라고 있다(사진=스포츠춘추 박동희 기자) |
그러던 2000년 1월. 정 감독은 신문에 이름이 실린다. 스포츠면이 아니었다. 그의 이름이 실린 곳은 사회면이었다. 당시 검찰은 ‘실력이 부족한 고교야구 선수들을 체육특기생으로 대학에 입학시켜주는 대가로 학부모로부터 금품을 챙긴 대학 야구감독들을 적발했다’고 발표했다.
검찰은 입시 부정 연루 지도자로 고려대 조00, 중앙대 정00, 홍익대 박00 감독을 구속기소 하고, 달아난 연세대 김00, 영남대 도00 감독에 대해선 지명 수배를 내렸다. 이 가운데 정 감독도 포함돼 있었다. 구속기소 되거나 지명 수배가 떨어진 감독 대부분이 서울 명문 사립대와 지방 명문대 감독임을 고려할 때 제주 탐라대 정 감독이 입시 부정에 연루된 건 매우 특이한 일이었다.
정 감독은 “14년 전의 일”이라고 말하고서 “지금 와서 사실을 이야기한다는 건 변명밖에 되지 않는다”며 말문을 닫았다. 기자는 서울에 돌아와 당시 사건을 잘 아는 이에게 사건의 실체를 들었다.
“다른 감독들은 ‘억’ 단위 돈이었어요. 개인적으로 착복한 분도 있을 거예요. 그러나 대부분은 스카우트비로 쓴 걸로 압니다. 그때만 해도 ‘잘한다’ 싶은 고교 선수는 몇천만 원 이상의 스카우트비는 줘야 프로 대신 대학을 선택했거든요. 하지만, 그런 큰돈이 대학에 있을 리 만무했죠. 그래서 능력이 떨어지는 아이들의 부모로부터 ‘인사(금품)’을 받고, 그 돈을 바로 잘하는 선수의 스카우트비로 내놓곤 했습니다. 사실 학교의 묵인이 없다면 벌어질 수 없는 일이었죠.
정 감독의 경우는 제주 탐라대라, 솔직히 오려는 고교 선수가 많지 않았어요. 실력 없는 아이들이 오면 성적은 늘 뻔하죠. 그래선지 지방의 고만고만한 대학에선 학교가 감독에게 ‘무슨 수를 써서든 좋은 선수를 데려오라’고 압박합니다. 그렇다고 학교가 스카우트비를 주느냐? 천만에요. 10원도 안 내죠. 어떤 학교는 그돈을 받아서 스카우트비는 고사하고, 학교 통장으로 집어넣기도 했다니까요. 어쨌거나 사실상 학교가 지도자에게 부정을 적극적으로 묵인 또는 유도했던 셈입니다.
탐라대도 마찬가지였는지 알 순 없지만, 정 감독도 비슷한 압박감을 느꼈던 것 같아요. 가뜩이나 탐라대는 야구부 지원이 원활했던 학교는 아니었거든요. 그래서 어느 학부모로부터 얼마를 받고서 그걸 스카우트비로 쓴 걸로 압니다. 나중에 검찰이 모 고교를 조사할 때 정 감독 이름이 나와 다들 깜짝 놀라면서 안타까워한 것도 그 때문이었어요.”
정 감독은 구속되고서 3개월간 구치소 생활을 했다.
“‘구치소’란 곳을 난생 처음 가봤습니다. 지나온 날을 돌아보니 후회만 남더군요. 특히나 ‘부패 지도자’가 된 저 자신이 너무나 밉고, 싫었습니다. 할 말은 많았지만, 제가 깨달은 건 하나였어요. ‘내 잘못을 뉘우치고, 속죄하며 사는 것만이 앞으로 내게 주어진 길’이라고요.”
정 감독이 구치소에 있을 때 한 검사는 “‘서울 주요 대학 지도자들보다 당신의 수뢰액이 한참 낮아 조만간 풀려날 것”이라 말하며 “앞으로는 그렇게 인생을 살지 마라”는 훈계를 한참 동안 들려줬다.
당시 ’검찰의 정치적 중립성‘을 주창하며 ’깨끗한 검사‘의 전형으로 불리던 이 검사는 훗날 정치계에 투신한 뒤 은행으로부터 검찰 감사를 무마해달라는 청탁과 함께 금품을 받은 혐의로 전격 구속됐다.
구치소에서 나온 정 감독은 야구계를 떠도는 대신 가족을 남겨둔 채 베트남으로 떠났다.
“2001년이었어요. 무작정 베트남으로 떠났습니다. 당시 그곳에서 친구가 사업을 하고 있기도 했지만, 1999년 탐라대 감독 시절 전지훈련지 탐색 차 베트남에 갔을 때 왠지 모르게 마음이 편안했던 기억이 있었어요. 특히나 베트남은 사회주의국가라, 그때까지 야구가 생소한 스포츠였죠. 지금도 무슨 힘이 절 이끌었는지 모르겠지만, ‘이곳에 야구를 꽃피우는 게 내 임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정 감독은 호찌민시 체육국에 찾아가 “야구팀을 만들려고 하는데 어떤 절차를 밟아야 하는지 알려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야구팀이 전무한 호찌민시에서 그걸 아는 이가 있을 리 만무했다. 체육국은 “도와줄 방법이 없다”며 되레 “야구팀을 뭐하러 만들려는 것이냐”는 식의 핀잔을 들려줬다. 하지만, 방문 효과는 컸다.
정 감독이 체육국을 찾아간 사실이 베트남 신문을 통해 알려진 것이었다. 신문은 정 감독을 ‘새로운 스포츠 야구를 전파하려고 한국에서 온 지도자’라고 소개했는데, 이 기사를 본 호찌민대학교 야구클럽 학생들은 한걸음에 정 감독을 찾아왔다.
학생들은 “우린 돈도 없고, 가진 장비도 없지만, 야구를 배우고 싶은 마음은 누구보다 강하다”며 정 감독에게 지도를 부탁했다. 정 감독은 흔쾌히 “주말마다 야구를 지도해주겠다”고 약속했고, 실제로 그 약속을 지켰다.
정 감독의 지도 소식이 알려진 후 야구강습회엔 평균 20, 30명의 베트남 학생이 몰렸다. 정 감독은 자신의 이름을 딴 야구팀 ‘상평비나(Vina, 베트남을 부르는 애칭)’을 만들어 체계적으로 선수들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하지만, 한계는 명확했다. 베트남은 야구협회가 존재하지 않아 국제대회에 출전할 수가 없었다. 설령 협회가 있다손 쳐도 지원을 기대하기 어려웠다. ‘국제대회 출전’이라는 확실한 동기부여를 제공해주지 못하다 보니 대학을 졸업한 선수들은 이내 야구를 포기하게 마련이었다. ‘미제 스포츠’를 가르치는 정 감독에 대한 베트남 당국의 곱지 않은 시선도 그를 힘들게 했다.
허 위원이 베트남 대표팀 에이스에게 투구폼을 설명하는 장면. 제구가 좋지 않았던 이 선수는 허 위원으로부터 피칭 지도를 받고서 몰라보게 달라졌다. 그만큼 베트남 야구는 누군가 조금만 도와주면 몇 배 성장이 가능할만큼 잠재력이 뛰어나다(사진=스포츠춘추 박동희 기자) |
그렇다고 정 감독이 한국으로 돌아온 건 아니었다. 정 감독은 “아직 속죄의 시간이 남았다”며 2009년 베트남을 떠나 말레이시아에 도착했다. 3년간 정 감독은 말레이시아, 싱가포르, 필리핀을 돌며 선수들을 지도했다. 이 나라들도 ‘야구 불모지’이긴 마찬가지였지만, 어엿한 협회도 있고, 주변의 시선도 호의적이라 야구 지도를 하기엔 편했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베트남을 그리워했다. 자신의 사명을 완수하지 못한 게 마음에도 걸렸다.
2011년. 정 감독은 자신이 지도하던 베트남 학생으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그는 들뜬 목소리지만, 어설픈 한국어로 정 감독에게 이렇게 말했다.
“가암독니임(감독님). 이제 비에트남에서도 야구 하알 수 이써요(이제 베트남에서도 야구할 수 있어요). 가암독니임. 어서 도라오세요.(감독님 어서 돌아오세요)”
정 감독은 제자의 전화를 받고서 베트남으로 돌아갔다.
“베트남으로 돌아가자마자 호찌민시 체육국장을 만났습니다. 예전 국장보다 훨씬 열린 사람이었어요. ‘도와줄 게 없겠느냐’고 묻더군요. 그래 ‘두 가지만 도와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정 감독의 첫 번째 부탁은 베트남야구협회 설립이었다.
“국장님. 나라를 대표하는 협회가 있어야 국제대회에 참가할 수 있습니다. 그래야 선수들도 동기부여가 되고, 베트남 국민들도 야구에 대한 관심을 갖게 됩니다.”
그리고 두 번째로 부탁한 게 야구장 건립이었다.
“국장님. 야구장이 있어야 선수들이 마음 놓고 야구를 배우고 즐길 수 있습니다. 지금처럼 전국에 야구장이 한 곳도 없는 상태에선 국제대회에 나가면 망신만 당할 뿐입니다. 10년 전부터 계속 부탁한 겁니다만, 이번엔 꼭 야구장을 지어주십시오.”
정 감독의 부탁을 잠자코 듣던 국장은 “협회 구성은 당장 확답을 드리기 어렵습니다. 수도 하노이 쪽과도 이야기가 돼야 하니까요. 우선 호찌민야구협회를 만들고, 당분간 그 협회 이름으로 국제대회에 참가하는 게 어떻겠습니까”하며 절충안을 제시했다.
정 감독이 “알겠다”고 고개를 끄덕이자, 국장은 자리에서 일어나 벽에 걸린 호찌민시 지도로 다가가 손가락으로 한 곳을 가리켰다.
“여기가 호찌민시 11구입니다. 고급 주택과 주상복합 건물이 들어선 지역입니다. 마침 이곳에 과거 프랑스 식민지 시절 경마장 터가 있습니다. 지금은 축구장 몇 면이 들어서 있어요. 이쪽에 빈터가 있으니 여기다 야구장을 지으면 어떻겠습니까.”
정 감독은 뛸 듯이 기뻤다. 11구는 요지 가운데 요지였다. 한국으로 치자면 잠실에 해당했다. 교통 접근성이 뛰어나고, 이미 축구장이 있어 선수들이 여타 훈련을 하기에도 쉬웠다. 문제는 돈이었다. 야구장 부지는 시로부터 받지만, 건립 비용까지 시가 부담하긴 어려운 실정이었다.
족히 1억 원 이상 소요되는 야구장 건립 비용을 정 감독으로선 해결할 방법이 없었다. 고민 끝에 그는 대한야구협회에 전화를 걸었다. 협회 관계자는 “우리도 예산 문제로 도와줄 길이 없다”며 “혹시 허구연 해설위원을 아느냐”고 물었다.
‘작은 기적’ 국제대회 첫 출전에 첫 승리를 맛본 베트남 야구팀 2011년 동남아시아게임에 출전한 베트남 선수들. 베트남 야구 사상 첫 국제대회 출전이었다(사진=스포츠춘추 박동희 기자)
정 감독은 허 위원을 알았지만, 허 위원은 정 감독을 잘 몰랐다. 프로 출신이 아닌데다 정 감독이 오랫동안 베트남, 말레이시아, 싱가포르, 필리핀 등에서 활동한 터라, ‘정상평’이란 이름이 낯설었다. 그저 주변의 엇갈린 평만 들었을 뿐이었다.
2011년 8월. 프로야구 중계를 앞두고 잠실구장에 찾아온 정 감독을 허 위원은 담담한 눈빛으로 바라봤다.
정 감독도 이를 모를 리 없었다. 정 감독은 자신을 “이번 SEA GAME(동남아시안게임)에 출전할 베트남 야구대표팀 감독”이라고 소개하며 준비해온 서류와 계획서를 꺼냈다. 그리곤 한참동안 베트남 야구 현황과 야구장 건립에 대해 설명했다.
잠자코 듣던 허 위원은 “알겠어요. 내가 한 번 가보겠습니다”하곤 중계 부스로 돌아갔다. 정 감독은 ‘이야기가 잘 안 됐구나’ 싶었다.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허 위원이 시즌 중 베트남에 올 리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니었다. 허 위원은 얼마 후, 베트남 호찌민을 찾아 정 감독을 만났다. 그리고 정 감독과 함께 야구장 부지를 답사하고서 베트남 국가대표 선수들의 훈련을 지켜봤다.
“야구장 부지가 참 좋았어요. 성인 야구장과 리틀 야구장을 만들면 오랫동안 쓸 수 있을 것처럼 보였습니다. 특히나 베트남 국가대표 선수들이 진지하게 훈련하는 태도가 인상적이었어요. ‘야구 장비를 지원해주고, 야구장을 만들어주면 선수들의 실력이 몰라보게 향상할 것’이란 자신감이 생기더군요”
허 위원은 베트남을 떠나면서 “내 힘이 닿는 데까지 야구장 건립비용을 마련해보도록 노력할 테니 선수들을 계속 잘 지도해달라”고 당부했다.
이때가 자신감이 생긴 시간이라면, 그해 11월은 자신감이 확신으로 바뀐 시간이었다. 그즈음 정 감독은 호찌민 대학생들이 주축인 베트남 국가대표 야구팀을 이끌고 인도네시아에서 열리는 동남아시안게임에 참가했다. 베트남 야구대표팀의 사상 첫 국제대회 출전이었다.
정 감독은 당시를 떠올리며 “우리 선수들이 인도네시아 야구장 그라운드를 밟고서 다들 흥분했다”며 “어찌나 흥분했는지 일부 선수는 긴장이 지나쳐 호흡 곤란 증상이 오기도 했다”고 회상했다.
아시아야구연맹 기술위원장 자격으로 동남아시안게임 야구 경기 진행을 위해 인도네시아에 도착한 허 위원장은 이 장면을 보고 파안대소했다. 한편으론 걱정이 됐는지 정 감독에게 “이러다 전패하는 게 아니냐”는 농담 아닌 농담을 던졌다.
“허 위원님께서 걱정하시기에 제가 그랬습니다. ‘두고 보십시오. 아마 깜짝 놀라실 겁니다’라고요.”
정 감독의 호언장담은 사실이었다. 1차전 필리핀전에서 베트남은 경기 중반까지 대등한 경기를 펼쳐 아시아야구연맹 관계자들을 깜짝 놀라게 했다. 비록 패하긴 했지만, 콜드게임을 당하지 않는 저력을 보여줬다. 이후 인도네시아, 타이 등 동남아시아 야구 강국과의 경기에서도 베트남은 좋은 경기력을 선보였다. 남은 일전은 말레이시아였다.
“대회 전부터 말레이시아는 꼭 이기겠다고 마음먹었습니다. 여기서 이기면 4강에 진출하고, 4강전 결과와 관계없이 동메달을 딸 수 있었어요. 동남아시안게임의 인기가 원체 높기에 야구에서 동메달을 따면 베트남인들의 야구 관심도가 크게 늘 것이라 예상했어요.”
그러나 정 감독의 예상은 1회 보기 좋게 빗나갔다. 말레이시아에 대거 4점을 내주며 0대 4로 뒤지기 시작했다.
“선수들이 포기하려고 하더군요. 그래 제가 그랬습니다. ‘비가 오고, 태풍이 몰아쳐도 그 흙바닥에서 뒹굴며 연습한 걸 잊지 마라’고요. ‘여기서 포기하면 우린 아무것도 이룰 수 없을 것’이라고요.”
기적은 경기 중반부터 연출됐다. 오기로 똘똘 뭉친 베트남 선수들의 방망이가 불을 뿜었다. 루상에 출루한 주자들도 두려움없이 도루를 시도했다. 베트남 타선이 대거 10점을 내자 전세는 역전됐다. 베트남 투수들의 분전도 눈에 띄었다. 베트남 배터리는 말레이시아 선수들의 기본기가 떨어진다는 걸 눈치채고선 루상에 주자가 있을 때마다 과감한 견제를 시도했다. 이날 말레이시아는 견제사로 번번이 기회를 날려버렸다.
결국 이 경기에서 베트남은 말레이시아에 10대 4 대승을 거두며 사상 첫 국제대회 승리를 맛봤다.
“동남아시아 야구대표팀 감독은 저 빼곤 죄다 일본인들이에요. 말레이시아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그 경기에서 우리한테 지고서 일본인 감독이 분해하는 장면이 지금도 눈에 선합니다.”
말레이시아를 10대 4로 꺾고서 베트남 대표팀 선수들이 허 위원(사진 가운데)과 함께 기뻐하는 장면. 한국의 '스포츠토토'는 베트남 대표팀 선수들의 유니폼을 만들어줬다(사진=스포츠춘추 박동희 기자) |
베트남 선수들은 그라운드에서 서로를 껴안고 진한 눈물을 흘렸다. 경기위원장으로 그 장면을 지켜보던 허 위원도 눈시울이 붉어졌다.
“베트남에서 처음 봤을 땐 솔직히 팀도 아니었어요. 캐치볼 할 때도 제대로 공을 주고받는 선수보단 공이 뒤로 빠져 그걸 주우려고 달려가는 선수가 더 많았으니까(웃음). ‘아이고, 4경기 모두 콜드게임만 당하지 않으면 다행이다’ 싶었죠. 아, 그런데 경기마다 팽팽한 승부를 펼치더군요. ‘난적’ 말레이시아한텐 대역전승까지 거두고(웃음). 베트남 사람들이 영리하고, 근면하니 조금만 환경을 갖춰주면 다음 동남아시안게임에선 틀림없이 금메달을 따리란 확신이 들었어요.”
말레이시아전에서 승리했으니 동메달을 목에 거는 건 당연했다. 그러나 베트남 선수들은 국제대회 첫 승으로 만족해야 했다.
“예정대로라면 4강전과 관계없이 동메달을 받아야 했어요. 하지만, 갑자기 대회 요강이 바뀌었다면서 3위 팀에게만 메달을 주겠다고 하지 뭡니까. 속으로 다짐했죠. ‘다음 대회 땐 꼭 금메달을 딸 테니 두고 보라’고요.” 정 감독의 말이다.
국제대회 첫 출전에서 첫 승리를 따낸 베트남 야구대표팀의 활약상은 베트남 국영 TV를 통해 상세히 소개됐다.
“베트남으로 돌아와서 호찌민시로부터 공로상을 받았습니다. 방송으로 야구대표팀 이야기가 나가고서 절 알아보는 분들도 많아졌어요. 길거리에서 쌀국수 파시는 분이 절 보고선 ‘봉짜이(야구) 감독’하고 인사를 건네더군요. 아마 그때 이후 베트남인들의 봉짜이에 대한 관심이 폭발적으로 증가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동남아시안게임이 끝나고, 허 위원은 귀국 비행기를 타기 전 정 감독에게 “무슨 일이 있어도 야구장을 지어줄 테니 초심을 잃지 말고, 베트남 야구 발전을 위해 헌신해달라”고 당부했다. 그리고 정확히 몇 개월 후. 허 위원은 또다시 약속을 지켰다.
호찌민의 약속 "야구장 건립과 협회 구성에 노력하겠다."
하나은행 스타디움 공사 현장에서 포스코건설 관계자로부터 설명을 듣는 허 위원
2012년 4월. 하나은행은 ‘아시아 야구의 저변 확대와 베트남 야구발전을 위해 베트남 야구장 건립에 드는 예산 2억 원을 지원하기로 했다’고 발표했다. 하나은행의 조건 없는 기부로 호찌민 11구에선 본격적인 야구장 건립 공사가 시작됐다.
공사는 순조롭게 진행됐다. 지반 정지작업을 비롯한 각종 작업을 통해 그라운드의 윤곽이 잡혔다. 하지만, 그물망 설치를 위해 기둥 작업과 홈플레이트 뒤 관중석 설치를 하며 문제가 생겼다. 군할 구청인 11구는 “기둥 설치와 고정 관중석 설치는 협의한 내용과 다르다”며 갑자기 전면 공사 중단을 명령했다.
야구장 건설이 처음이라, 구장 설치물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기도 했지만, 11구는 요지에 야구장이 들어서는 걸 처음부터 반기지 않았다. 일각에선 “11구 공무원들이 ‘진행비를 바라는 것 같다’며 베트남 공직사회의 특성을 고려해 소정의 사례비를 건네면 공사가 재개될 것”이라고 조언했다.
그러나 허 위원과 정 감독은 이에 응하지 않았다. 허 위원은 “하나은행이 마련해준 돈을 뇌물로 쓸 순 없다”고 버텼고, 정 감독 역시 “‘페어플레이’를 구현하는 야구장을 뇌물로 지을 순 없다”며 허 위원의 뜻에 동조했다.
결과는 예상대로였다. 전면 중단된 공사는 재개가 불투명했다. 호찌민 체육국이 중재에 나섰으나, 11구는 공사 재개 일정을 알려주지 않은 채 차일피일 미뤘다. 해가 넘어 2013년이 되도록 공사는 중단됐고, 그해 연말이 될 때까지 11구의 태도는 변하지 않았다.
베트남 사회 특성상 힘 있는 정치가나 사업가가 야구협회장을 맡았더라면 공사 재개는 쉽게 이뤄졌을 일이었다. 하지만, 현 호찌민야구협회 회장은 정 감독의 제자로, 30대의 젊은이였다. 고위 공직자와 만나 사태 해결을 모색하기엔 역부족이었다.
허 위원이 지난해 연말 바쁜 일정을 뒤로하고 베트남을 찾은 것도 시 관계자들을 만나 공사 재개를 요청하기 위해서였다.
호찌민시 체육국장과 환담하는 장면(사진=스포츠춘추 박동희 기자) |
허 위원은 호찌민에 도착한 다음날. 호찌민시 체육국을 찾았다. 야구장 건립을 적극 지원했던 체육국장은 허 위원을 보자마자 “미안하다”고 사과했다.
허 위원은 “공사금 60%를 지급한 가운데 1년 6개월 동안 공사가 전면 중단된 바람에 야구장 건립이 답보 상태에 있다”고 지적하고서 “지금 이 상태로라면 더는 야구장 건립도, 베트남 야구계에 대한 지원도 해줄 수 없다”며 배수진을 쳤다.
허 위원의 강경한 자세에 체육국장은 “최근 11구와 ‘2014년 1월부터 공사 재개를 허락한다’는 내용의 협의를 마쳤다”며 “야구장이 2014년 2월까지 완공될 수 있도록 노력을 아끼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허 위원은 공사 재개 약속을 받아낸 뒤 “2014년 인천 아시안게임에 참가하려면 현재처럼 호찌민야구협회같은 지역 협회로는 안 된다”며 “베트남을 대표하는 ‘베트남야구협회’를 창설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이에 대해 체육국장은 “최대한 빨리 베트남야구협회가 창립되도록 노력하겠다”며 “인천 대회까지 시간이 촉박하므로 일단 호찌민야구협회가 베트남을 대표할 수 있는 협회가 되도록 지원을 아끼지 않겠다”고 밝혔다.
호찌민시 체육국장은 하노이시 체육국장과 함께 베트남의 체육행정을 이끄는 핵심 인물이기에 그의 약속은 다른 이들의 약속과는 무게감이 달랐다.
허 위원의 호찌민시 체육국 방문으로 그동안 답보상태에 있던 야구장 건립과 협회 창설이 한꺼번에 해결되자 정 감독과 호찌민야구협회장은 연방 고개를 숙여 감사를 표했다.
허 위원은 “하나은행도 하나은행이지만, 무료로 공사 감리를 맡아주고, 틈틈이 공사 현장을 챙겨준 포스코건설에 감사하다”며 “‘하나뱅크 스타디움’이 한국기업의 적극적인 베트남 사회 기부에 좋은 표본이 됐으면 좋겠다”는 뜻을 밝혔다.
저개발국 야구 지원, 단순히 야구 전파만 하는 게 아니다. 베트남 대표팀과 베트남 한국인 사회인 야구팀과의 친선경기를 베트남 대학생들이 지켜보는 장면(사진=스포츠춘추 박동희 기자)
허 위원과 정 감독의 목표는 두 가지다. 야구가 베트남에 꽃을 피워 대중 스포츠로 자리매김하는 것과 ‘야구’라는 공놀이를 통해 베트남 청소년들이 건강하게 성장하는 것이다. 이 목표를 위해 두 이는 ‘동남아시안게임 금메달과 인천 아시안게임의 참가’를 실현하려 한다.
먼저 정 감독의 말이다.
“베트남은 사회주의의 영향 때문인지, 전반적인 스포츠 행정이 개인 종목을 통한 메달 획득에만 국한하고 있어요. 요즘 들어 축구를 필두로 단체 종목 육성에도 열을 올리지만, 아무래도 예산상의 문제로 한계가 있습니다. 전 베트남 선수들의 무한 가능성을 고려할 때 동남아시안게임 야구 금메달 획득은 꿈이 아니라고 봅니다. 아시안게임에 출전해서도 한국, 일본, 타이완과는 견주기 힘들겠지만, 중국과는 대등한 경기를 펼칠 수 있다고 자부해요.
베트남은 중국을 라이벌로 생각하기에 만약 동남아시안게임에서 금메달을 따고, 아시안게임에서 중국을 잡는다면 야구는 베트남인들의 사랑과 관심을 받는 대중 스포츠로 급성장할 게 확실합니다. 만약 그렇게만 된다면 14년간 동남아시아에서 속죄와 참회의 삶을 산 저를 가족들도 이해해주리라 봅니다. 조만간 야구장이 들어서면 베트남에 뼈를 묶을 각오로 열심히 선수들을 지도할 계획입니다.“
허 위원은 “동남아시아 야구에 대한 지원이 곧 한국 야구와 세계 야구 발전의 초석”이라며 다음과 같이 이야기했다.
“동남아시아 야구계를 보세요. 베트남을 제외하면 거의 전부가 일본 지도자들이 감독이에요. 그게 가능했던 건 일본 야구계가 동남아시아 야구 발전을 위해 전폭적인 지원을 해왔기 때문이에요. 어쩌면 그 덕분에 아시안게임에서 야구가 정식 종목으로 살아남을 수 있었을지 몰라요. 허나 우리는 어땠습니까. 병역 문제 때문에 야구가 아시안게임 정식 종목으로 남길 가장 바라는 나라이면서도 야구 저개발국 지원과 관련해선 대단히 미온적이었어요. 솔직히 그간 한 게 아무것도 없습니다. 야구가 ‘동네 스포츠’로 남는 이상 한국 야구의 미래도 어둡다는 걸 모두가 알아야 해요.
여기다 일본이 동남아시아에 전달한 게 야구뿐일까요? 아니에요. 일본은 야구를 전파하면서 ‘일본’이라는 브랜드를 알렸어요.
지금부터라도 우리가 야구를 통해 받은 사랑과 은혜를 야구 불모지에 그대로 전달해줘야 합니다. 그게 진정한 야구 강국입니다.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땄다고 야구 강국이 되는 게 아니라는 걸 많은 이가 알았으면 좋겠어요.”
사실이다. 일본은 야구 저개발국에 대한 지원에 매우 적극적이다. 야구 저개발국에 지도자를 파견하고, 그 나라에 야구 장비를 보내주는 ‘보급 사업’을 적극적으로 펼쳐왔다. 그렇게 하는 것이 ‘야구의 세계화와 세계의 야구화’를 위한 출발점이고, ‘일본’이란 국가 브랜드 이미지 향상에도 도움이 되리라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이 가능했던 건 일본국제협력단(JICA)이 야구 지도자를 저개발국에 파견하는데 앞장 서며 이들의 급여를 책임진 까닭이었다.
하지만, 한국은 어떤가. 한국은 최근까지 ‘허구연’이라는 한 개인이 나서 야구 저개발국 지원에 헌신했을 뿐이었다. 2010년 허 위원의 소개로 한국국제협력단(KOICA)이 캄보디아에서 야구 봉사활동을 펼칠 야구전문가를 모집해 1명을 파견했지만, 2011년 10월 스리랑카에서 활동 중이던 국제협력요원이 낙뢰 사고로 숨지면서 국회는 2016년부터 ‘국제협력요원’ 제도 자체를 없애기로 결의했다.
'하나은행 스타디움' 조감도. 성인 야구장 1면과 리틀 야구장 1면 건립이 기본 계획이다(사진=스포츠춘추 박동희 기자) |
정 감독은 지난해 KOICA의 해외봉사단원이 되려고 신청서를 냈다. 말이 베트남 국가대표 감독이지, 소득이 전무한 그로선 KOICA의 지원비가 절실했다. 하지만, 그는 신체검사에서 떨어졌다. ‘허리 디스크가 있다’는 게 이유였다.
정 감독은 “대학 때 허리를 다친 이후 디스크 증세가 있던 건 사실이지만, 그 이후로도 계속 현역으로 뛰었다”며 “지도자가 되고서 하루도 빠짐없이 1천개 이상의 펑고를 쳐왔는데, ‘허리 디스크 때문에 지원해줄 수 없다’는 게 무슨 뜻인지 모르겠다”고 아쉬워했다.
기자는 베트남 현지에서 정 감독이 베트남 대표선수들을 훈련시키는 장면을 봤다. 그는 30대 지도자보다 더 정열적이고 활동적으로 선수들에게 펑고를 쳤고, 주루 훈련 시엔 슬라이딩을 직접 시범 보였다. 허리 디스크 중증 환자라면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훈련이었다.
허 위원은 “현재 파키스탄에서 활동 중인 한국인 야구 지도자가 있다”며 “치안이 몹시 불안한 파키스탄에서 그래도 한국을 알리고, 야구꽃을 피우겠다고 ‘목숨 걸고 활동하는’ 지도자들을 이젠 우리 사회와 야구계가 보호하고 격려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허 위원이 베트남을 떠나고. ‘하나은행 스타디움’의 공사는 다시 재개됐다. 베트남에 야구가 꽃을필 날도 얼마 남지 않아 보인다(끝).
베트남 대표팀 에이스는 구속은 빠르지만, 제구가 좋지 않았다. 경기 초반 베트남 한국인 사회인 야구팀에게 많은 안타와 볼넷을 허용했다. 그러나 2회가 끝나고서 허구연 위원의 피칭 레슨을 받고 몰라보게 달라졌다. 허 위원은 "늘 하체의 이동을 신경 쓰라"며 "일단 발을 들어올렸을 때 1초 정도 쉰 상태에서 공을 던져보라"고 조언했다.
허위원의 지도를 받고서 베트남 대표팀 에이스의 투구는 확연히 달려졌다. 볼넷은 거의 내주지 않았고, 안타도 줄었다. 무엇보다 안정적인 투구로 인해 자신감이 생긴 듯 보였다. 베트남의 야구 미래가 밝은 것도 누군가 관심을 갖고 작은 도움을 주면 그 도움을 받아 언제든 강팀이 될 수 있는 저력이 있기 때문이다. 아마도 110년 전 질레트 역시 같은 마음으로 한국인들에게 야구를 가르쳐줬을 것이다.
+ 정상평 감독은 경마장 스탠드 안에 마련된 2평짜리 방에서 기거한다. 그는 여전히 무급으로 베트남 대표팀을 지도하고 있으며, 가족에게 떳떳한 아빠가 돼 한국으로 돌아가기 위해 베트남 야구발전에 애쓰고 있다.
허구연 위원은 방학 기간에 베트남 대표 선수 4~6명을 한국으로 초청할 계획이다. 한국 프로야구 2, 3군 선수들과 함께 숙식하며 야구를 배울 기회를 제공할 생각이다. 몇몇 프로야구팀에서 ‘적극 도와주겠다’고 나서며 베트남 선수들의 ‘한국야구 연수’는 조만간 이뤄질 전망이다. 최근 스리랑카, 파키스탄 야구협회 관계자들은 허 위원에게 “우리도 도와달라”는 ‘SOS'를 보낸 것으로 알려졌다.
베트남 호찌민에 지점을 설립하려고 6년간 노력했던 하나은행은 드디어 올해부터 현지 영업에 나설 수 있게 됐다. 지난해 박근혜 대통령이 베트남에 국빈 방문했을 때 하나은행의 사정을 이야기한 게 결정적 도움이 됐다는 후문이다. 하나은행은 현지 영업 전부터 야구장 건립 지원 및 다문화 가정 지원 등의 적극적인 사회 기부로 베트남에서 좋은 평판을 들어왔다.
‘하나은행 스타디움’의 무료 감리를 맡은 포스코건설은 지난해 베트남에서 4번째로 큰 건설사로 우뚝 섰다. 다양한 기부활동과 현지 지원으로 포스코는 베트남인들로부터 가장 사랑받는 외국 기업이란 평을 듣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