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짜유기(鍮器)
안골은빛수필문학회
양희선
여름방학이 되어 독일에서 4,5년 만에 손녀 자매가 왔다. 손녀는
오랜만에 한국의 요모조모를 눈여겨보면서 모든 게 새롭고 신기하다며, 시장사람들도 반갑단다. 시내 이곳저곳을 둘러보고 전주한옥마을도 구경했다.
점심때가 되자 비빔밥이 먹고 싶다 하여 비빔밥전문식당으로 데리고 갔다. 홀 안에 들어서니, 부를 상징하는 황금빛 놋그릇 수 십 벌이 위아래로
차곡차곡 쌓여있었다. 우리의 전통밥상문화를 전해온 유기그릇들이 마치 손님을 마중하는 것 같았다.
예약석에 미리 차려놓은 깔끔한 밑반찬을 이것저것 맛보더니 손녀들은
맛있다며 먹었다. 주문한 비빔밥이 나왔다. 홀에서 보았던 금빛놋대접에 오방색나물과 황포묵, 육회, 계란을 곁들인 맛깔스런 비빔밥이다. 손녀들은
묵직하고 따끈한 놋그릇에 담긴 비빔밥을 보더니, 독일에 가서 자랑할 요량인지 스마트폰에 담았다. 음식은 맛이 우선이지만, 요리를 담는 식기와
조화를 이룰 때, 고품격 음식이 되는 법이다. 호기심을 유발한 유기의 특성에 대해 설명해 주었더니 귀를 기우려 들었다. 뜨겁게 달궈진 유기는
밥이 쉬 식지 않을 뿐더러, 청결을 꾀하기도 한다. 독성에 민감하여 조금이라도 독기가 있으면 놋그릇이 검게 변한다. 농약성분이나 식중독균을
없애주는 작용도 한다. 유기반상기는 예부터 왕실과 사대부가에서 대물림할 정도로 위생적인 고품격 그릇으로 인정받았다. 손녀들은 한국인의 식기문화와
음식조화를 조금은 알 것 같았는지 비빔밥을 맛있게 먹었다.
유기는 우리의 전통 식기였다. 주물을 어떻게 합금하여 다루느냐에
따라 방짜유기, 반 방짜유기, 주물유기로 구분된다. 방짜유기는 구리와 주석을 78:22 비율로 합금해 1,000°C가 넘는 고열에 달군 쇳물을,
거푸집에서 틀을 잡는다. 대장간에서 벌겋게 달궈진 쇳덩이를 망치로 두들겨 완전제품으로 인정될 때까지 수 천 수 만 번, 쉴 새 없는 손놀림으로
두드려야 고품격 방짜가 탄생되는 것이다. 고뇌를 초월한 끝없는 담금질로 비 오듯 쏟은 땀의 대가로 얻은 창조물이 아니던가. 정신력으로 육체의
고통을 다스리지 못하면 최고의 장인이 될 수 없을 것이다.
유기는 청동기시대부터 사용했으며, 고려시대는 생활용기와 사찰에서
촛대, 제기 등 많은 용도로 쓰였다. 조선 말기에 유기가 발달하여 활성화를 이루면서 안성유기가 유명해졌다. 양반가에서는 뚜껑을 모두 덮은
유기반상기로 밥상을 차려 밥상문화를 장식했다. 놋그릇은 품위 있는 양반가의그릇이었으나, 변색이 잘되고 관리하기에 까다로워 어머니들은 노상 유기를
닦아야 했다. 지금처럼 닦는 약품과 수세미와 고무장갑도 없는 때라, 마당에 멍석을 깔고, 기와가루를 지푸라기에 묻혀 닦으면 손바닥에 새까만
기와물이 들어 한동안 지워지지도 않았다. 수많은 반상기를 반짝반짝 윤나게 닦으면서 얼마나 어깨가 아팠겠는가. 그 뒤 놋쇠는 모두 왜놈들에게
약탈당하여 놋그릇은 차츰 자취를 감추었다.
일제강점기에 왜놈들은 큰 마대를 들고 집집마다 놋쇠로 만든 물건은
모조리 쓸어갔다. 놋대야, 놋화로, 요강, 놋그릇, 심지어 수저까지 모두 빼앗기고 울분을 삭이느라 눈물을 훔치며 원통해하시던 어머니의 모습이
생생하다. 내가 쓰던 하찮은 부지깽이도 없으면 아쉬운데, 밥그릇까지 몰수당하고 얼마나 속상했을까. 철없는 나였지만, 일본사람들이 미웠다.
일본순사들은 보란 듯이 옆구리에 칼을 차고, 두셋씩 짝지어 동네 집집을 마구 뒤져 쇠붙이를 찾아갔다. 그뿐인가. 추수 때가 되면 뼈아프게 지은
곡식을 공출이란 명목으로 모두 빼앗기고 허탈해 하시던 부모님이 가여웠다. 나라를 빼앗긴 약소민족의 서러운 울분을 눈물로 삭일뿐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 중, 패망의 위기에 선 일본은 실탄과 탄피를 만들 놋쇠가 필요했던 것이다. 우리나라를 얕보고, 쇠붙이를 모조리 쓸어다가 전쟁무기를
만들려는 수작이었다.
일제의 약탈로 유기는 쇠퇴기를 맞게 되었다. 대체(代替) 그릇으로
스텐과 플라스틱이 새로 나왔다. 유기그릇 닦기에 고생했던 터라, 변색되지 않는 스텐그릇과 가볍고 질긴 플라스틱 용기가 한때 큰 인기를 끌었다.
식기문화가 새로워져 도자기와 사기, 유리그릇이 주방을 장식하고 있다. 고풍스런 도자기에 맛깔스런 음식을 담아내니 볼품 있고 먹음직스럽다. 요리는
어떤 그릇에 담아내느냐에 따라 품격이 달라진다.
귀품 있는 유기는 다루기에 무겁고, 관리하기에 불편하여 잘 쓰지
않고 특별한 경우에만 씌어왔었다. 생활이 넉넉해지고 살기가 편해져서 요즘은 건강을 최우선으로 치는 때이다. 먹거리를 담는 식기가 건강지킴이라
하여, 불편하다고 쓰지 않던 놋그릇을 몸에 좋다는 이유로 다시 우리밥상에 올리고 있다.
(2015. 9.
17.)
첫댓글 방짜유기를 알게하고 역사성과 건강지킴이로서 우수성을 느끼게 하는 글입니다. 손녀들에게 한국문화를 알려주어 할머니의 노릇을 다 하신 모습이 참 좋습니다. 감사합니다 . 정석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