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 부 종교개혁 전야
1. 교황권
교황권은 13세기를 중심으로 최고로 발전했다. "로마는 세상의 머리로서 둥근하늘의 고삐를 다스린다"라는 말에서 볼수 있듯이 그 세상의 머리를 다스리는 자가 바로 교황이다. 교황권의 근거는 교령집들의 개체로서 그 언어를 어떻게 해석하느냐가 그 시대 특히 로마 교황의 해석하에 모든 백성들이 매여 버렸다. 이러한 교령집의 옹호적인 면은 13세기 T.아퀴나스에 이르러 완성되었다. 교령집으로서 1302년 교황 보니파키우스 8세가 펴낸 우남쌍탐 (Unam Sanctam)이 가장 명백히 교황권에 대한 표현을 한다.
교황은 또한 세속적인 우위권을 주장했는데, 이 권한은 모든 세속세계를 다스리는 권한으로서, 이 권한을 확대시키면 모든 왕들을 폐위시키고, 왕의 영토를 다른 이들에게 하사하는등, 실질적인 모든 영향력을 행사하게 되었다. 교황은 수한금지를 통해서 모든 자신의 실력을 과시했다.
이런한 세속적 우위를 바탕으로 해서 교회는 이 세계안에서의 모든 영적인 우위를 주장했다. 따라서 중세시대의 유형은 개인의 소유로 환원되어있는 듯한 인상을 받는다.영적우위권이라는 세속적인 권한을 포함하기에 모든 권리를 교회는 요구하기에 이르렀다. 특히 교회는 물질적인 면에서 그 능력을 심화시켰는데 세속사회에 대해서 모든 세금을 요구했다. 예를들면 십일조, 첫수입세, 조달비, 팔리움, 공석금, 그리고 특별면제금등 정규 수입원으로 삼았다. 이러한 교황권은 모든 영역에서 우위를 유지하고 그것을 유지키위해서 많은 예산의 소요와 끝없는 낭비를 일삼았는데 이것이 개혁자들의 공개적인 비난의 대상들이었다.
2. 정치적인 상황
기독교권은 7세기 이후부터 급격히 즐어들었다. 그것은 모슬렘교의 확장으로인해서 많은 지역들이 유린당했기 때문이다. 즉 팔레스타인, 시리아, 소아시아, 이집트, 그리고 북아프리카서남으로부터 지브롤터해협에 이르기까지 한때는 기독교국가이던 국가들이 7-8세기동안에 기독교권에서 벗어났다. 그중에 남아있는 기독교국가또한 무수한 영주와 소작인들로 이루어진 봉건시대로 구분되었는데 종교개혁 이전에 이들 대부분의 영주들이 중앙집권적인 국가에 예속되는 경향을 띄었다. 즉 영국, 프랑스, 스페인, 그리고 독일, 이탈리아등으로 구분해서 살펴볼수 있다.
여기서는 독일의 종교개혁을 지켜보아야 하기때문에 독일의 상황을 간단히 언급한다. 독일은 지금의 오스트리아 헝가리에 해당하는 지역의 대부분을 동쪽에 포함시키고 있었다. 명목상으로, 지고한 군주 한사람이 하급기관으로서 대봉건 영주들의 총회 즉 의회를 두고서 제국을 통치하였다.
종교개혁댱시 독일의 지도를 보면 수많은 영주들과 영주들의 영토의 분할로 이루어짐을 볼수 있다. 이들의 다양성 속에서 통일하려는 모습을 우리는 윔즈회의를 통해 볼수있다. 루터시대의 왕을 소개하자면 그는 함스부르크 가문의 후예로써 독일인의 피가흐르는 막시밀리안의 손자가 되었다. 하지만 그의 어머니는 스페인여인으로 필립황제의 피는 독일이 아닌 스페인의 피가 더욱 강하게 흘렀다. 이것은 루터시대의 개혁의지에 단적으로 어려움을 보여준다.
3. 르네상스
르네상스라고 부르는 운동을 가장넓은 의미로 말한다면 중세로부터 근대세계로의 전환이라고 할수있다. 이시기는 근대과학이 시작되고, 자연의 탐구에 적용시킨 시대였다. 또한 지리학적 탐험의 시대였다. 이시기의 교회의 위치는 교령집에 근거한 교회법을 이기고 저스티니안의 법률집에 기초한 시민법을 대치시킴으로 변화의 가장 획기적인 성과를 이루었다. 문학분야도 고전 필사본들의 발견, 희랍연구, 예술은 고대 모델의 발견과 고대건축에댸한 연구, 종이의 제조, 인쇄와 금속인쇄기술의 발견등은 앞으로의 시대에 충분해 부흥하였다.
지적 부흥의 초기단계에서는 기독교나 혹은 중세교회에 대한 아무런 적대감도 없었으며, 르네상스가 신이교도주의를 발전시킨것은 얼마후의 일이었다.
교황청은 문학과 예술의 부흥에 후원자로 스스로 지적 생활운동의 기수로써 군림하였다. 유럽은 교회의 머리되신 분의 지도력에 의해서 신학과 학문과 예술이 상호간에 의존하는 것을 목격하였다. 이탈리아는 르네상스의 탄생을 가져다 주었지만 르네상스는 곧발로 북쪽 지역으로 확산되었다. 아마도 독일이 먼저 그 충격을 느꼈으며 그 다음으로 프랑스였으며 영국이 맨 마지막이었다. 종교개혁을 말하는데 있어서 독일에서의 르네상스운동이 가장 중요하다.
그당시에 공동생활 형제회라는 단체가 게라드 그루트에의해 만들어졌는데,이단체의 목적은 우량도서의 대량증가와 젊은이들에 대한 세심한 훈련을 통하여 동포의 신앙여건을 개선하는데 있었다. 하지만 경건이 없는 학문은 축복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저주라고 하는 격언을 상기시켰다.
교육에 대한 열망은 도시시민을 사로 잡았으며, 각 도시들은 시 재정에서 선생들이 월급을지불하면서 최상의 학교를 이룩해 보려고 서로 경쟁하였다. 새로운 학문은 대학으로 서서히 파고 들어갔다. 고전을 연구한 학자들에게 강의를 부탁하거나 혹은 대학 도시에서 개인교수로서 거주하도록 부탁했으며 학생들은 로마의 시인들을 연구하였다. 대학내에서 인문주의가 법적으로 인정되었다는 사실은 시학과 웅변학의 강의가 개설되는대서 흔히 알수 있다.
4.사회적 조건들
흔히들 르네상스 시기는 유럽사람들의 사회적 조건과 더불어 지적 조건까지 대변혁을 거친 기간이었다고 한다. 중세의 전체적인 체제의 저변에는 땅이 부에 대한 유일의 경제저긴 근거라는 생각이 깔려 있었다. 하지만 무역,상업,제조업들이 발전하면서 산업의 구조는 바뀌어 가고 있었자. 이러한 시대적 상황은 종교개혁 이전에 몇몇 나라에서 생겼으며 정치가들은 국가적 차원의 무역을 중요시하게 인식하게 되엇으며,이것을 확장시키기 위한 조치를 취하였다. 이러한 시대를 대표하는것으로 "길드"를 들수 있는데 이 길드는 곧바로 정치적인 특성까지 갖게 되었다. 이 길드는 세습적으로 가문의 독차지가 되었으므로 이들이 제'2'의 귀족을 형성하자 이들의 통치에 대해서 대다수의 노동자들이 분개하였다. 이시대에 봉건영주끼리 무역과 안전을 위하여 그리고 유리한 조건들을 확보하기 위하여 동맹을 맺었는데 이것이 '한사동맹'의 기원이 되었다. 한사동맹은 런던,브루게스,베르젠,그리고 심지어는 저 멀리 떨어진 노브고르드에까지 공장을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자국내의 무역의 지리저긴 새로운 무역로를 발견하자 사회 조건의 대 변혁이 있었으며 곧바로 부의 분배에 있어서는 변화가 뒤따르게 되었다.
15세기에는 시작과 더불어 지리적인 대발견이 계속적으로 이었다. 기니아 무역단은 노예,황금,그리고 상아등을 거래하면서 일찌기 1480년에 설립되었고,콜롬부스는 대서양의 중심부를 건너가 바하마의 여러섬과 신대륙을 발견하게 되었다. 이러한 사회적 조류는 길드 중심의 사회를 침체케하여 붕게시키는 원인이 되었다.
그당시의 농민의 상황은 그런되로 요새화된 주거지역에 거주하였다. 부락민들은 마을의 아버비격인 농민의 스승을 4사람을 선발하여 그 지역의 논쟁과 투쟁의 중재를 맞게 했다. 농민등에게 가장 저주스러운 뚜가지의 가장 값진것을 착취하는것은 죽은자의 소유의 동산과 사망세였다고 한다.
시대적인 혼란으로 인하여 농민들의 봉기로 곧바로 들어간다. 14세기말부터 16세기 초에 이르도록 반란자들의 구호나 외침이 서로 다르더라도 성직자들에 대한 증호의 목소리는 끊임없이 있었다는 사실은 꼭 기억해야 한다. 한 스페인 사람은 그리스도의 봉사자들로 부터 돈없이 얻을수 있는것은 전혀 없음을 분명히 보았다도 전한다. 사제들에 대한 이러한 증호에도 불구하고 모든 폭동 운동에는 열광적인 신앙을 추구하려는감정과, 여기에 만일 사제들만 쫓아낸다면 이 땅에 하늘나라가 건설될수 있다는 꿈이 혼합적으로 뒤섞여 있음을 알수 있다. 1431-1432년에는 대규모의 휴스파 전도집회가 전 유럽을 강타하였다.
이 당시 사회에서 자장 저급한 사회적인 신분을 갖고 있는 한스 뵘은 스스로 게시로 인한 은총의 복음 선교자로 나섰다. 그는 로마보다 더 신성한 곳은 니콜라스하우젠의 성모 마리아 예배당이며, 참된 신앙은 동정녀에게 영광을 드리는 있다고 확신하였다. 그는 사제들을 헤아릴수 없는 말로 욕하였다. 한스 자신는 재판은 거친뒤 이단이라는 명목으로 화형을 당하였다. 그는 거룩한 동정녀를 찬양하는 민요를 부르면서 죽었다.
이시기의 사회적 반란은 도시의 지지를 받으면서 농민들은 제국과 교권당국의 폐지,교회 재산의 감소,고리대금으로 살찐 유대인들에 대한 강탈,그리고 사제들의 권한을 제한하라고 요구하였다. 이시기에 분드슈 운동이 일어났는데 이들의 구호는 '하나님앞에서는 오로지 의로운 것만'이었다.
농민들의 상황은 점진적인 변화에 기인했다고 대답할수 있다. 그 당시 사회의 농민은 절망속에서 살았다.그당시 사람들은 로마법에 의해 군주들의 손에 의해 압박되었다. 더구나 자유 농민을 장기간의 임차대에 의한 계약으로 농노로,그리고 마지막에은 노예로 전락시켜서 공동재산으로 삼으려는 수도원장과 농민들 사이에 벌어진 70년의 투쟁에서 볼수 있다.
이렇게 해서 16세기 시작 무렵에 독일의 황폐한 사회적상황은 아무도 이해할수 없는 경제적인 여건안에 크게 기인한다고 보지만,여기에서 야기되는 결과로 몰려드는 더러운 거지떼들에게서 가슴아프게 나타났다. 이들은 몰락한 봉건 귀적과 제대한 용병으로부터 파산한 농민,일자리를 잃은 노동자,걸식탁발수도승,그리고 '떠돌이 학생'에 이르기 까지 다양하였다.
5.종교개혁 직전의 수십 년 사이의 가정과 대중의 신앙생활
표면상으로 중세교회와 그 교회의 머리인 교황에게 종교개혁 이전 반세기전에 독일이 보였던 것처럼 크게 헌신한 나라는 없는듯보였다. 교황청은 독일인들의 헌신을 결코 줄어들지 않는 원천으로 삼았다.헤아릴수 없이 많은 수도원과 수녀원에 우굴거렸던 많은 수도승과 수녀 이외에도 주민의 상당수는 대부분 교회의 부속기관에서 일을 하였다.
이당시에는 대중적인 설교와 교회의 이름을 빙자한 수많은 축제가 주민들의 생활을 점령하였다. 여러 전기작가들에 의해서 볼수 있는 그당시의 가정의신앙생활은 많은 부분에서 신앙의 너울에 싸여 살았음을 보여주고 있다. 교회의 각종 신조,십계명, 주기도문,등등의 수많은 교회의 암송과 찬미송이 있었다. 이러한 노래와 찬송들은 종교개혁 이전에 널리 퍼졌으며 로마와 결별한 이후에도 많이 불리어졌다.
이시기의 신앙생활의 특징을 말하라면 로마교회의 신앙 안에서 모두가 엄격하고 무시무시한 두려움속에서 신앙생활을 하여랴 했다는 것이다.이러한 신앙의 두려움은 수많은 순례의길에 참여케 했는데 "로마의 명소들","성야곱으로 가는길"등등의 많은 지리적인 연구의 책자가 나돌았다.
이시기에는 단순히 로마교회에 속해 신앙을 갖는것 이외의 다른 비교권적인 신앙의 유형들을 살펴볼수가 있다."교회내의 작은교회","하나님의 친구들","11,000동정녀들의 형제회"등뜽의 많은 공동체가 존재했다. 이시기에 인쇄공들사이에 또다른 유형의 단체가 성장했는데 이름하여"형제회"였다. 이들은 15세기 마지막10년사이와 16세기의 후반 25년사이에 가장 활발해졌다.
6.인문주의와 종교개혁
종교개혁과 연관해서 살펴볼수있는 인문주의자는 사보나롤라이다.그는 위대한 설교자가 되어서 사람들이 마음과 양심을 뒤흔들어놓았다고 해도, 그의 교리적인 가르침은 토마스 아퀴나의의 신학에 의지해서 행하여 졌다. 그는 플라톤 주의자가 부르는 '영광의사도'라는 성 바울을 져버렸다.
두번째로 살펴보아야 할 이는 요한 콜렛인데 그는 시장을 여러번 지낸 부유한 상인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그당시 교회를 파괴시키는 많은 악행들을 보고 비난하였다. 따라서 그는 진정한 개혁이란 낱낱의 개인으로부터 시작해야 한다고 보았다. 그의 개혁은 맨먼저 주교로부터 시작해서 일단한번 시작되면 사제로 확산되고 따라서 평신도까지 확산되어야 한다고 말하였다.
마지막으로 에라스무스는 흔히 말하는 대로 '홀로 있는인간'이었으나 그러면서도 기독교 인문주의의 유형을 대변하는 한 사람, 그것도 가장 빈번하게 대변하는 사람이었다. 그는 기독교라 무엇보다도 실천적인 어떤것이라고 확실히 믿었다. "나는 거룩한 성서가 평민들의 언얼로 좀 무식하게라도 번역되더라도 모든 사람에게 읽혀져야 한다는데 반대하는 사람들을 이해할수 없읍니다"라고 그는 말하였다. 그는 또한 아테네의 순교자를 생각하면서 거룩한 성 소크라테스여,우리를 위하여 받으소서라고 찬양하지 않을수 없다고 하였다. 이러한 모든면을 감안할때 에라스무스는 개혁자로서의 일을 수행함에 있어서 어떠한 가능성과 제약성을 가지고 있음을 분명히 말해준다. 그는 초기에 비교적 알려지지 않았을때 이러한 주장을 하였다. 그는 학문의 영역에서 군림했을때 이러한 주장을 고수하였다.
제2부 종교개혁
1.면죄부 논쟁이 일어나기까지의 루터
루터는 그 당시 사람들이 개인 경건의 전현적인 모습이었다. 그가 수도원 안에 파문혀 있울 때에도 영혼의 고통으로부터 구원 얻기 이전과 이후를 막론하고 동료들은 그를 경건의 모델로 생각했다. 루터가 또다른 힘을 갇게 된 근원은 그가 개혁을 차근츠근하게 한발짜국씩 추진함으로써 백성들이 너무나 급격한 병하로 인하여 놀라지 않고 생각하면서 그를 따르게 한데에 있다. 그는 자신에게 하나님을 신뢰하는 사람이면 교황이나 성직자의 비난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고 가르쳤다. 신앙에 의한 의인 이라는 루터의 이론은 본인이'기독교인의 자유'라는 소책자에서 밝힌대로 중세 교화가 항상 주장하던 무한정한 권리란 전혀 있을수 없다고 간단하게 반박하였다.
마틴 루터는 1483년 11월10일 아이스레벤에서 태어나서 만스펠트의 조그마한 광산촌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는 어려서부터 상상력이 충부하고 생각이 깊은 아이였으며, 항상 보이지 않는 세계에 대해서 골똘핟게 생각하였다. 그는 그시대 사람이면 누구나 느끼는 대로의 예수님이 무지개 위에 불붙은 칼을 손에 들고서 언젠가인가는 알수 없으나 자신을 심판하러 오시는 것 같아서 쳐다볼때마다 오싹거리는 두려움을 느끼곤 했다. 그는 아이제나하에서 3년을 보낸뒤에 그당시 독일에서 가장 이름이 있었던 에르푸르트대학에 입학하였다.이 대학의 신학은 더 근대적인 스콜라학문을 수용했으며,이대학의 철학은 오캄이 유명론을 수용하였는데, 그의 위대한 선생은 가브리엘 비엘이었다. 루터는 인문주의자 모임에는 결코 가담을 하지 않았으며, 그는 신앙적인 문제에 너무나도 진지하게 매달리는 편이었으며, 마음을 바꾸기에 너무도 실천적인 신앙을 가진 학생이었다. 루터 자신이 수도원에 들어간 것은 자신에 대한 의심이었다고하는데,그의 경우에는 '의심이 수도사를 만든다'는 속담이 들어 맞았다.
2. 면죄부 논쟁에서부터 윔즈의회까지
면죄부의 관례는 중세후기 교회의 참회제도에 전반적으로 파고 들었으며 13세기가 시작되면서부터 이렇게 실시되기에 이르렀다. 면죄부의 시작은 루터의 시대보다 천년이나 올라간다. 처음에는 천체 회중에게 고백하던 공고백이 사제에게 개인적으로하는 사고백으로 변하였다. 사제에게 고백하는 고백이 회중전체에게 하는 공고백을 대신하게 되었던 것이다. 맨처음에는 죄의 댓가로 부과된 고행을 교회의 회중의 위임을 맡은 사제들에게 있었으나 점점 이것이 악용됨으로 주교에게로 마지막으로 교황에게로 사면권이 주어졌다.이러한 면죄부의 개념은 공로의보화,제도가 참회의 성례전으로 변하는것,그리고 하나님이 참된 참회자에게 요구하시는 통회의 종류로써 아트리찌오아 콘뜨리찌오의 구별이었다.
이러한 면죄부에 대한 루터의 논재는 신학교수에게 기대할수 있는 그것과는 다른 논리의 정연함이나 쉽게 피할수 있었던 사항들도 강조로써 반복하는 평이한 것이었다. 루터의 논제는 독일의 수많은 가정에서 조용히 신앙생활하는 모든 사람에게는 좀처럼 버리기 어려운 것이었다. 95개로의 중요한 논제의 핵심은 이것이다. 즉 면죄부는 교회으이 단순한 처벌에 대항해서 사면하고 사면할수 있다. 교회는 교회가 부과한 것만 사면할수 있다. 면죄부는 하나님이 부과한것은 사면할수 없다는 논리이다. 이러한 루터의 논제에 대해 즉각적으로 엑크의 논박이 따랐고 로마로부터의 호송명령이 따랐다. 루터는 로마로 소환되어서 면죄부제도에 대한 공격을 해명하도록 되어 있었다. 하지만 여기에 순응한다는것은 죽음과 별반 다름이없다.
루터는 독일 국민들로 하여금 자신을 신뢰케하는 데 큰힘을 기울였는데 그 일완책으로서 자신이 가졌던 중요한 면담을 책자로 편찬하여서 사람들이 자신을 뒤 따라 오는데 너무나 앞장서서 가지 않아 멀리서도 자신의 발자국을 볼수 있도록 했다는 점이다. 그는 계속해서 로마의 교령집을 연구함으로 놀라움과 분노가 엇갈리는 가운데교황의 절대권이 허위로 가득차 있음을 발견하였다.그는 이후에 라이프니쯔 신학논쟁을 벌였는데그가 거기서 행한 연설은 우리 시대에 까지 이르도록 제도에 대한 근대적 역사적 비평의 기초가 된다고 볼수 있다.
그는 랑이프니쯔신학ㄴㄴ쟁이후에 1520년에 3개의 위대한 종교개혁 논문이라고 불리는 논문을 발표하였는데 기독교인의 자유,독일 기독교 귀족에게 보내는 글,교회의 바빌론 포로에 관하여등이다.그 책에서 루터는 자유에 대해서,오직 믿음에 의한 의인을 말하고, 만인 사제직을 표방했으며,성례전의 효용의 문제들을 주장하여 성려전을 2개로 간소화 하자고 했고, 특히 결혼에 대한 문제를 집증적으로 논한것을 우리는 본다.
이러한 반제에 대해서 로마의 교황청은 '엑스우루게 도미네"란 교서를 발행했다. 하지만 루터도 이한 교서에 대항해서 그의 소책자'적 그리스도의 저주스러운 교서를 반대해서'를 발표하기를 꺼리지 않았다.
3.윔즈의회
윔즈 독일내에서 자장 오래된 도시중의 하나였다. 이도시의주믽=들은 무척이나 거칠었으며 자유로운 황제령의 도시로서의 권리를 주민들이 주장함으로써 주교와 끊임없는 논쟁을 벌려온 곳이다. 주민들은 수찬정지를 끊임없이견디어 냄으로,뜨거운 반 성직자적인 저신을 가지고서 루터의 편에 서 있었다. 이러한 윔즈 회의에서 루터에 대한 소환명령이 떨어졌는데 그당시 루터는 만일 의회에 소환되어서 단순하게 자신이 의견을 취소하라는 명령을 받는것이 아니고, 자신의 의견ㄴ을 옹호할수 있는 완전한 연설의 자유를 갖는다면 의회에 갈 마음이 전혀 없는 것이 아니였다. 그는 결국 의회로 가게 되었으,며 떠나면서 멜랑히톤에게 '내 사랑하는 혀제에 만일 내가 돌아오지 않는다면, 만일 나의 원수들의 송네 의해 죽거든 자네가 가르침을 계속하고 진리에 바르게 서 주게나.자네가 살아 있다면 나의 죽음은 아무것도 아니네"라고 말하였다.
뤁는 자유 독일인으로서 정정당ㅈ당하게 우뚝서서 조극이 사랑하는 아들에게 귀를 기울여 줄수 있는 가장 눈부신 청중들 앞에서 자신의신앙을 호소하였다. "본인의 양심은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전율을 느끼며,이러한 양심을 거스리면서 행동한다는 것은 정직하지도 모사며 또한 안전하지도 못합니다. 하나님이ㅣ여, 나를 도우소서! 아멘"
시간이지나면서 루터는 의히석상에서 보다 더 과감하게 말하지 못했음을 아쉬워했다. 마찬가지로 죽음을 눈앞에 두고 황제는 후에 고집스러운 이단을 화형에 처하지 못했음을 유감이라고 말하였다.루터는 연설을 한후에 많은 소문과 억측을 뿌리면서 사라졌다. 루터는 선제후와 그 동생이 안전하게 바르트부르크에안전히 피신해 있었다. 이곳에서는 루터에게 '밧모섬'과 같았는데,그는 수도사의 의복을 벗어 버리고 대머리부분을 완전히 덮을정도로 머리를 기르고 기사복을입고 융커 게오르규라는 이름으로 행세하였다.
루터의 종교개혁 이후에 수많은 세속의 작가들이 이러한 새로운 신앙에 ㄱ대한 글들을 발표 하였다. 루터의 가르침은 점점 더욱 확산되어서 독일 전역에 퍼지게 되었다. 이러한 시기를 틈다서 칼슈타트와 같은 인물이 나오기도 했다. 그는 루터의 개혁보다 좀더 과격한 개혁을 몰아갔으며,그의 설교이후에는 복음주의식의 주의 만찬을 시행하였다. 그는 비텐베르크시에 흐르고 있던 흥분을 이용해서 주인들과 상인에게 자신의 개혁안을 강압적으로 요청한였으며,1522년 1월24일 비텐 베르크의 시당국은 유명한 법령을 공포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소요와 분열은 루터의 비텐베르크의 돌아옴으로 다시 잠잠해 졌다.
4.윔즈 의회로부터 농민전쟁이 끝날때까지
루터는 "독일 기독교 귀족에게 보내는 글"에서 독일의 모든 원한을 대변 하였으며 시대가 다 아는 공개적인 아픔을 터뜨렸으며,그렇게 멀지않은 재난을 예고 하였다. 농민들이 요구하는 것은 딴순하였다. 농민들은 각 부락 공동체마다 자신들의 목회자를 자유롭게 선택할수 있는 권리를 선언했으며, 하나님이 사람을 자유롭게 만드셨으므로 농노제도는 폐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농민들은 삼림,목초지,그리고 경작지가 한때는 마을 공동체의 소유였다가 지주에게 빼았겼기 때문에 다시금 찾아와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농민들은 시골지역에도 공평한 재판소의 설치를 호소하였다.
농민전쟁은 독일의 종교개혁 운동에 가장 깊은, 지속적인 그러면서도 비참한 결과를 안겨다 주었다. 루터 개인에게도 영향을 미쳤으며 급기야는 자신이 이끌려고 했던 방향에 치명적인 결과를 안겨다 주었으며 농민전쟁은 종교개혁운동의 주도권을 보금적 제후들의 손에 안겨다 주었으며, 개혁적인 독일 국가교회의 꿈을 깨뜨리고 말았다.
5. 1520년 스파이어의회에서 1555년 아우크스부르크 종교 평화까지
독일이 1525년 사회적 혁명으로부터 벗어나서 제졍신을 차리고 일어서자 신앙적인 문제가 아직껏 확정되지 못했음이 분명하게 드러났으며, 이로인해서 나라가 두개의 서로 다른 파당으로 나누어져 각자의 독특성을 강조했으며, 이러한 긴장의 주된 원인은 로마주의 제후들의 반란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보여준 태도 때문이었다. 이처럼 긴장이 고조된이유는 로마주의 제후들이 반란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보여준 태도에 있었다고 할수 있다. 많은 사람들이 재산을 압수 당하고 사형선고를 받았는데, 봉기에 전혀 참가하지 않은 사람들까지 반란을 이유삼기보다는 루터의가르침을 따랐다는 이유만으로 처형하였다.
기념비적인 스파이어의회(1529년)에서는 굳게 뭉친 로마 카톨릭측의 대다수가 힘이풀린 소수파를 공격하였다. 루터파들이 지역 교회를 수립할 수 있다는 1526년의 법령의 근거조항을 폐지시킨다고 선언하면서 그 조항은 '오해의 악용'이었다고 하였다. 그리스도의 참된 몸과 피를 부인하는 분파(쯔빙글리파)는 쟤세례파와 마찬가지로 용서받을수 없다고 하였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모든 교회단체는 권위와 세금징수의 권한을 상실하지 않는다는 선언이었다. 바로 이 마지막조항에 의해서 푸터파 교회의 설립 가능성은 산산이 부서졌는데 그것은 중세 교회의 제도가 모든 곳에서 복구된다는 뜻이며, 주교는 권한에 의해서 교구내에 있는 설교자들을 다룰수 있음을 뜻했기 때문이다.
바로 이법령이 유명한 항거(Protest)를 불러 일으켰으며, 여기에서 개신교(Pro-
testant)라는 이름이 나왔다. 이 항거서는 루터파에게서 허용되었던 모든 양보가 철회된 그날 의회에서 낭독 되었다. 스파이어의 항거는 독일 제후국 가운데 소수가 다수에 의해서 억압을 당할 경우에는 제국의 법을 떠나서 자신들을 보호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항거의 지도자인 훌드하이히 쯔빙글리는 기질, 교육, 그리고 성장환경이 루터와는 너무나도 달랐다. 쯔빙글리는 루터를 루터 되게 했던 그리고 루터의 삶에서 가장 특징이었다고 할수 있는 처절한 영적 갈등을 겪지 않았다. 개인적인 죄에대한 깊은 이시그로 괴로워했던 영적인 경헙도 없었으며,성년이 되던 시기에서도 이러한 죄의식으로 크게 부담을 느끼지 않았다. 개혁자로서 인정을 받고 난 후부터 오랜 기기간이 지나서 그는 비로서 강한 도덕적 책임으로써 자신의 문란했던 사생활을 볼수 있었다. 모든 개혁자 가운데서 루터가 가장 중세적 방법으로 신앙을 보았던 인물이라고 한다면, 쯔빙글리는 중세적 방법에서 가장 멀리 떨어져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쯔빙글리는 취리히 시 권위 당국의 지지를 있을 때 까지는 한 발자국도 앞으로 움직이지 않았다. 쯔빙글리는 한 발 앞으로 갈 때마다 세심한 계산을 하였다.
루터와 쯔빙글리의 회담 즉,마르부르크대담(Marburg Colloguy)은 헤세의 필립의 기대에는 못미친 성공작은 아니었지만 중요한 결론을 가져왔다. 중세 교회는 주의 만찬이라는 주의 만찬의 성례전을 두개의 구별된 부분으로, 즉 미사와 성체성사로 나뉘었다. 이 둘이 이견의 일치를 보지 못했던 하나의 주제는 그리스도의 몸이 주의 만찬에 놓인 떡과 포도주라는 성물과어떠한 관계를 갖느냐는 것이었다. 그와 같이 왯동안 그렇게도 격렬하게 온란이 되어 온 이론적인 사항에 의견이 일치가 이루어지리라는것은 무리였을 것이다. 루터는 이 문제를 중세적 기독교인이 입장에서 공격하는 것으로 만족했는데 이 한가지 성찬식의 오류를 척결한다면 나머지는 그대로 나 두어도 괜찮다고 생각하였다. 쯔빙글리는 인문주의자로서 접근했는데 그의 근본적인 원칙은 중세 신학을 전체적으로 뛰어넘어서 초대교회의 교부들의 도움을 받음으로싸 이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였다. 이렇게 해서 두 사람의 개신교 적대자들은 결코 얼굴을 맞대고 앉아 있을 수 없었다.
찰스 5세는 권력의 정상에 있었다. 그는 가능한 모든 설득력을 동원해서 자신의 양심이 허럭하는 범위 내에서 협상함으로써 평화를 정착시키고자 했다.볼로나에 머무는 동안에 제국내의 모든 선제후, 제후, 그리고 의회원들이 다같이 1530년 4월 8일 아우크스부르크에 모이라는 의회를 소집하였다. 아우크스부르크 신앙고백은 그 문서 자체가 주장하는 대로 견해와 항의의 선언문으로서 이론적인 교리를 완벽하게 해석하려는 의도는 처음부터 없었다. 두부분으로 나누는데 첫째부분에서는, 중세교회와 어느 정도까지 많이 공통되어 이는가를 서방의 위대한 신학자인 성 어거스틴의 가르침에 어느정도 충실하고 있는가를 그리고 쯔빙글리파 같은 보다 더 과격한 개신교들과 어떻게 다른가를 밝히면서 재세례주의자들은 가르침을 반박하였다. 두번째는 중세교회의 견해와 행습가운데서 자신들이 불일치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 무엇이었는지를 밝혔는데 성직자의 강요적인 독신제도, 미사의 희생적 이해, 구두 고백의 필요성, 수도원 서약, 그리고 독일 교구내에까지 미친 영적인 권위와 세속적 권위의 혼돈을 지적하였다.
6 루터파 교회의 조직
루터가 기독교인의 교제를 묶어서 교회로 좆직하기 위해서 행한 모든 행동이나 말의 근저에는 두 개의 개념이,두번째는 첫 번째로부터 나온 것이지만,놓여 있었다. 최우선 적이며 가장 핵심을 이루는 이론은,또한 이 이론은 나머지 이론의 근거가 되었지만 모든 신자의 영적 사제설이었다. 두번째의 개념은 세속 정부는 하나님이 정해 주신 제도 이므로 로마 교황이 성직과 겅직과 세속직을 다스릴수 있다는 주장을 하나님이 세속의 권위 당국에게 허락하신 권하늘 탈취하는 것이라고 보는 생각이다. 루터는 믿는 무리들이 수행해야 할 많은 의무 가운데서 목회와 관련된 것으로 설교와 성례전의 집행, 기독교인의 자비베품, 공동체에 속한 어린아이들을 보살피는 것이었다. 이것은 공동체와 행정관이 하나로 묶어져서 공동예배, 간난한자 구제, 그리고 교육을 책임지고 있음을 알수 있다.
루터는 적당한 시기에 교회의 생활과 예배에 평화로운 변화가 오리라고 생각했다. 루터를 위시한 개혁자들은 말씀의 선포, 성례전의 집행, 훈련강화등등을 요구할때 지금까지의 몸담고 있던 가시적인 보편적 교회와 단절하고서 새로운 교회를 설립하겠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1526년 스파이어의회 이후 복음적인 군주들과 도시들이 각자의 영토안에 교회조직을 가지게 되면서 루터에게 협조와 충고를 요청하였다. 그래서 선제후국 삭소니의 영토를 방문하고서 훈령집을 내게됬는데, 이것이 선제후령 삭소니의 복음주의 교회를 재조직하는 첫걸음이 되었다. 1532년이후에 복음주의 교회의 교리, 예전, 예배도 최종적인 골격으로 확립되었으며, 각종 소송사건의 처리를 위해 신학자와 교회법률가로 구성된 교회 법원이 설립되었다. 이상이 루터파 교회의 독특한 특징을 이룬 교회 법원제도의 시작인에, 이것은 루터의 개성을 어느정도 나타냈다고 할수 있다.
7. 독일 밖의 루터파 종교 개혁
루터의 영향력은 영국, 프랑스, 스코틀랜드, 네덜란드, 폴란드, 스칸디나비아 등에까지 파급되었으나 결국 루터의 종교개혁은 스칸디나비아로 한정되었다. 이들 스칸다나비아 지역에서는 다른 지역보다도 신앙적인 대각성이 정치적이며 사회적인 운동과 긴밀한 관계를 맺었다. 이들 종교개혁은 루터의 가르침과 글들을 통해서 일어났으며, 보수적인 루터파 노선에의해 수행되었는데, 옛의식은 대부분 보전하였다.
8. 종교개혁을 고취시킨 신앙의 원리들
루터의 신앙생활의 역사는 전체적으로 에르푸르트(Erfurt)에 있는 은둔수도원에돌아가는 날부터 아우크스부르크 신앙고백의 출판에 이르기까지, 지금가지 자신이핵이 되고 정신적 지주가 되었던 이 운동이 중세 교회에 대한 단순한 지성적인 비평에서 야기된 것이아니었으며, 더 나아가서 이러한 지적 비평의 산물로서 교리적 개념을 체계적으로 쉬정하거나 혹은 재구성하는 데 있지 않았음을 보여 준다. 루터는 너무나도 사리가 분명한 사람이었으며, 그의 영적 감각은 너무나도 예리했으므로 자신이 고뇌하고 있는 이 모든 사항들이 현세적으로, 그리고 내세적으로 영원히 자신에게 확실한 평안을 가져다 줄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못숨을 바칠 정도로 진실하게 매달렸다. 그러나 결국에가서 성서의 걸림돌에 넘어지는 형식으로, 특히 시편과 로마서와 사도신조와 동료 수도사들을 통해서 루터는 하나님의 의는 (롬1:7) 하나님께서 불의한 자와 죄인을 처벌하시는 그러한 공의가 아니고, 자비로우신 하나님께서 믿음을 통해서 우리를 의롭게 하시는 것임을 알게 되었다. 기독교를 요약하면 (1) 그리스도 안에 나타나신 하나님, 사랑스런 은혜의 하나님에겡 기독교인이라면 누구든지 남녀를 막론하고 가까이 나아갈수 있으며, (2)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자신을 내어주신 하나님에 대한 흔들리지 않는 신뢰인데, 흔들리지 않는다는 뜻은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사역을 통해서 우리의 연약함을 짊어지시고 고난을 당하셨기 때문이다. 기독교를 이렇게 이해한 개념은 곧바로 종교개혁 신앙의 혼이었다. 이 개념은 종교개혁의 모든 신앙원리를 내포하였다. 이걔넘을 교리라고는 결코 부를 수 없었다. 이 개념은 경험이며, 이 개념이 펼치는 표현은 인간의 영혼이 겪게 되는 경험을 진술한 것이다. 종교개혁은 이처럼 신앙하는 기독교인의개인적 경험으로부터 시작했으며, 이 경험은 논증에 의해서 증명되거나 혹은 사색을 통해서 와해될 수 없는 기독교의 가장 본질적인 요소라고 선언하였다. 바울의 마지막 말은 항상 "하나님께서 내안에 아들을 계시하시기를 즐거워하셨다."로 끝맺었는데, 이것은 바울 자신이 사도로서의 사역을 시작하게 된 개인적인 경험으로서, 자신의 선포의 기초적인 사실이며 도한 모든 것을 총괄하는 것이었다. 아타나시우스(Athanasius)는 신학자로서는 크게 알려져 있으나 위대한 신앙의 지도자였다는 사실은 쉽게 잊혀져 있었다.그의 중심적인 보뤼는 나의 구세쥐는 하늘과 땅을 만드신 한님이심을 나는 안다고 하는 그의 영적인 직관이었다.
2. 만인사제직
루터의 신앙체험은, 즉 자신은 죄인이었으나 구세주이신 그리스도예수 안에 계시하신 하나님에게 자신을 단순하게 투신함으로써 죄의 용서를 받았다는 사실은 글로 옮기기에는 너무나도 벅찬 계시로써 자신에게 업습하였다. 그는 이 체험을 다양한 방법으로 표현하려고 했으나 이 모든 글들이 자신의 경허마을 표현해 주기에는 너무나도 부적합할뿐임을 알았다. 우리는 루터가 1521년에서 1517년에 이르기까지 자신의 경혐을 나타내 보려고 무척이나 고심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그의 고심은 지자르(Ziesar)의 교회궁전에서 모인 성직자 총회에서 (1521년 6월5일) 모든 개혁은 개별적인 사람의 마음속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고 강론할 때부터 숨어 있었다. 의인(Justifidatio)은 활기 있게 함(vivificatio)이며, 구속을 받는 사람측에서 아무런 공로가 없다고 하더라도 죄로부터 구속을 받는다는 뜻이다. 그러나 루터에게 있어서 특기할 만한 사항은 자신에게 엄습해 온 어떠한 중대한 폐습을 자신이 참된 기독교라고 확신하는 시금석에 맞추어 보아서 그릇되었다고 판단되기까지 중세적인 몽든 것들을 완전히 버리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하나님께서는 신자들에게 자신을 하나님께 투신할 수 있는 능력을 주신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은 중세 교회에서 가장 널리 확산되어 있으며, 또한 가장 강력하게 주장되어 온 믿음과 위배되었으며 이처럼 상반된 두 생각이 마주치면 충돌할 수 밖에 었었다. 그것은 구원에 있어서 필수적이라고 중세의 경건체계에서 보편적으로 받아들였던 사제의 중재(mediation of apriest)라는 개념이었다. 성례전은 사제가 베풀거나 보류할수 있었다. 인간은 세례에서 다시 태어나며, 나이가 들면 견진(confirmation)에서 영적으로 성장하며, 혼배성사의 성례전으로 결혼해서 정욕의 죄로부터 씻음을 받고, 고해성사(penance)는 죄로 인하여 죽음당한 영적 삶을 회복시켜 주고, 성체성사(the Eucharist)는 신자가 삶이라는 여정에서 여행할 때 양식이 되어주고, 종유(extreme unction)는 임종시의 은총을 부여해 준다. 그래서 루터는 모든 신자의 영적 사제직을 큰소리로 외쳤다. 그는 이 주장을 자신의 사상의 진수가 담겨 있는 [기도교인의 자유에 관하여](Concerning Christian Liberty)라는 논문에서 평상시의 생생한 열변으로 전개하였다. 루터는 남자나 여자가 가정생활이나 일터에서나 시정의 일자리를 막론하고, 그 자리에서 일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인간의 연약함을 불쌍히 여기심을 이용해서 일종의 간접적인 허락을 하나님으로부터 얻어낸 것이 아니라 사람을 부르는 것 같은 직접적인 부르심(소명)에 의해서 하나님이 부르신 것인데, 인간은 그것도 잘못 이해해서 '신앙생활'만 부르심으로 알았다. 이와같은 모든 신자들의 사제적 원리야말로 사람들을 성직자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으로부터 구해 냈으며, 그렇게도 절실하게 요구되던 굥회의 개혁을 추진하도록 박차를 가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것은 또한 종교개혁운동 전반에 놓인 가장 위대한 신앙원리였다. 이것은 또한 비개혁교회와 재연합을 꾀하던 모든 노력이 산산이 부서지곤 했던 암초이기도 했다. 이것은 종교개혁 신앙과 중세 신앙 사이를 갈라놓는 두드러진 차이였다. 두 종류의 신앙이 있다고 생각했는데, 하나는 자기 자신이 스스로 체득해야 하는 것으로서 일정한 종류의 교리에 동의할 수 있게 되는 것이며, 도 다른 하나는 루터가 강력하게 주장하는 것으로서 하나님의 순수한 선물을 말하너다. 첫째는 비교적 덜 중요하다고 생각했으나 후자는 모는 것의 모든 것일 만큼 중요했다. 개혁자들이 신앙에 의한 의인이라고 말할 때의 신앙이란 항상 이러한 후자의 의미이다. 종교개혁과 중세가 이해하는 의인의 가장 두드러진 차이점은: (1) 종교개혁 사상은 신자들의 일을 선행이라고 인정하면서도 항상 상대적인 불완전으로 간주한다. 반면에 중세 신학자들은 신자들의 선행이 지닌 본래적인 가치를 무시하라고 사람들에게 말하면서도, 이 선행의 상대적인 완전을 항상 기대한다. (2) 개혁자들은 하나님의 은총에 대해서 -고유하고,특수하고,유일한 어떤 것이다. (3)이러한 견해는 루터와 개혁자들로 하여금 신앙을 단순히 그리스도를 통한 의인을 획득하고 받아들이는 수용기관으로 보게하였을 뿐만 아니라, 여기에 첨가해서 기교인의 모든 일에 있어서 능동적인 도구로 본다. (4)종교개혁자들에게는 그리스도를 통한 의인을 믿는 신앙의 행동은 신자에게 죄의 고통과 죄책감이 여전히 남아 있다고 하더라도 자신의 죄의 사면과 구원을 확신할수 있는 근거가 된다.
루터,쯔빙글리,칼빈을 막론하고 모든 개혁자들은 하나님께서 일찍이 선지자들과 사도들에게 말씀하셨던 것과 동일한 방법으로 성경 속에서 말씀하신다고 생각하였다. 개혁자들은 일반 사람들이라고 할지라도 알아 즐을수 있는 언어로 된 성서를 가진다면 그들은 또한 하나님께서 직접적으로 말씀하실수 있으며, 하나님의 위로와 훈계와 지도를 받을수 있다고 생각하였으며, 성서에서 뜨사는 바는 모든 신자들이 하나님의 현존에 접근하는 또 다른 방법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종교개혁의 성서관은 변함없이 16세기 사람들이가졌던 신앙적인 측면을 제거시키는 방향으로 지향하였다. 개혁자들은 무오한 책인 성서를 무오한 교회위에 항상 두었다. 그리고 지금까지 교회에 예속되어 있다고 보았던 동일한 무오성을 이 책으로 돌렸다.
루터는 "우리는 모두 사도신경,옛 교회의 신앙과 일치하게 모든 것을 주장하고,믿고,노래하고,고백할 뿐이다. 그래서 우리는 거기에서 새로운것을 첨가시키지 않음으로써 우리가 옛 교회에 속하며, 옛교회와 하나라는 사실을 어느 누구라도 부인하지 않는다"고 말하였다.
루터는 "기독교인의 교회는 하나님의 모든 말씀을 마음속에 깊히 간지가며, 그말씀을 게속적으로 맴돌며 서로서로 그리고 성서와의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에 관한 어떤 것이라도 알기를 원한다면 자신을 신뢰하지 말아야 하며, 자신의 이성으로써 자기와 하늘사이릐 다리를 놓아서도 안돼며,먼저 교회를 찾아가서 자신의 추구하는 질문을 조용히 던져야 한다. 그러므로 교회는 나무나 돌이 아니며,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드르이 무리인 것이다. 이렇게 연합함으로써 우리는 그리스도를 모시고서 확신있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어떻게 믿으며,살며,가르치는것인가를 알수 있게 된다. 그리스도인이 모인 교회를 떠니서는 아무런 진리도 없고,그리스도도 없고,축복도 없다"고 하였다. 이러한 이유에서 교회는 모든 신자들의 어머니이고,또한 어머니라고 불리어져 마땅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