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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작자 미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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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 | 한국 |
분야 | 소설 |
해설자 | 이상구(순천대학교 국어교육과 교수) |
≪유충렬전≫은 ‘영웅의 일생’이라는 서사 구조를 가장 잘 완비한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영웅소설로 평가된다. 그러나 그간 이 작품의 작자와 창작 연대에 대해서는 이견(異見)이 적지 않았다. ≪유충렬전≫은 천자를 정점으로 한 충신과 간신의 대결을 기본 갈등 구조로 삼으면서 충신의 궁극적인 승리와 그 승리를 통한 부귀공명의 실현을 구가하는 작품이다. 즉 이 작품은 충신이 간신의 모함으로 철저하게 몰락했다가 그의 자손이 간신의 반역을 평정하면서 다시 권력과 부귀공명을 획득한다는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 때문에 한때 ≪유충렬전≫의 작자가 몰락 양반으로 거론되기도 했다. ≪유충렬전≫에는 몰락 양반의 권력 회복 의지가 반영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충효와 같은 유교적 이념에 입각해 국가 위기를 해결한다는 이상주의적 면모도 몰락 양반의 의식과 상통하는 측면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근래 ≪유충렬전≫은 조선 후기 소설의 상업화라는 소설 발전의 토대 위에서 독서 대중의 요구에 부응해 이루어진 통속소설이며, 주 향유층이 평민 이하의 계층이라는 견해가 제기되었다. 영웅소설의 향유층이 주로 평민이었을 것이라는 사실은 다음과 같은 기록을 통해서도 어느 정도 확인할 수 있다.
예전에 어떤 남자가 종로의 담배 가게 앞에서 강독사(講讀師)가 패사(稗史) 읽는 것을 듣고 있다가, 영웅이 가장 실의(失意)한 대목에 이르자 갑자기 눈을 부릅뜨고 입에 거품을 내뿜으면서 담배 써는 칼을 뽑아 강독사를 찌르니, 그가 선 채로 죽었다(李德懋, <銀愛傳>, ≪雅亭遺稿≫ 3. 古有一男子 鍾街煙肆 聽人讀稗史 至英雄最失意處 忽裂眦噴沫 提截煙刀 擊讀史人 立斃之).
일견 이 기록은 사실로 보기 어려운 점도 없지 않다. 여기에서 강독사가 낭독했을 작품은 ≪유충렬전≫이나 ≪조웅전(趙雄傳)≫ 같은 영웅소설이며, ‘영웅이 가장 실의한 대목’이란 소설의 주인공이 위기에 처한 대목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 대목을 듣고 있던 남자가 갑자기 흥분해서 강독사를 칼로 찔러 죽였다는 것이니, 이것은 사실적인 기록으로 보기 어려운 측면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조선 후기 상황을 고려한다면, 전혀 개연성 없는 이야기만은 아니다. 조선 후기의 민중은 지배층의 폭정과 가혹한 수탈에 시달렸으며, 이로 인해 정 도령과 같은 영웅이 나타나 자기들을 구제해 주기를 간절하게 소망하고 있었다. 이 기록의 남자는 그러한 소망이 너무나도 간절했던 탓에 순간적으로 허구와 현실 세계를 착각했던 것으로 보인다. 즉 소설 속 영웅을 실존하는 영웅으로, 그리고 그를 위기에 빠뜨린 사람을 강독사라고 착각해 그를 찔러 죽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유의 사건이 먼 옛날에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1970년대에도 이와 유사한 일들이 실제 벌어지곤 했다. 한일전 축구 시합에서 우리나라가 지면 적지 않은 국민들이 이 시합을 중계한 텔레비전을 집어던지곤 했다. 당시 우리나라 국민이 일본에 대한 분노와 적개심을 억제하지 못해 텔레비전을 깨뜨렸듯이, 위 기록의 남자도 비슷한 심리 상태에서 애꿎은 강독사를 칼로 찔러 죽인 것이다. 또한 이 기록은 ≪정조실록(正祖實錄)≫ 14년 8월 무오 조(戊午條)에도 수록되어 있는데, 조선 후기 영웅소설의 주요 향유층이 평민이었으며, 그들이 영웅소설에 열광했던 까닭이 무엇인가를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유충렬전≫의 주요 향유층이 평민 이하의 계층이었으며, ≪유충렬전≫이 주로 이들의 의식 지향을 반영하고 있다는 것은 작품 내부에서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예컨대, 다음과 같은 대목을 들 수 있다.
① “옛날 기자도 나라가 망한 후에 옛터를 지나다가 궁실이 무너져서 쑥대밭이 된 것을 보고 맥수가를 슬피 지어 고정(故情)을 생각했다고 하는데, 이제 유충렬은 물 가운데 부모 잃고 도로에 개걸타가 이내 몸이 장성해 살던 데를 다시 보니 장부 한숨 절로 난다. 우리 부모는 어디 가시고 이런 줄을 모르시는가. 상전벽해한단 말을 곧이 아니 들었더니, 이내 일을 생각하니 백 년 인생 초로(草露) 같고 만세 광음 유수(流水)로다. 부귀영화 본다 하고 부디 사람 경(輕)히 말고 제 복 있어 잘산다고 일가친척 괄시 마소. 고진감래 흥진비래는 고금의 상사로세. 양지가 음지 되고 음지가 양지 되는 줄을 게 뉘라서 알아보리. 권세 좋다 귀하다고 천만년을 믿지 마소.”
② 나졸이 달려들어 한담을 목을 매어 수레 위에 높이 싣고 장안대도(長安大道)로 급히 달려 나오며 외쳐 왈,
“이봐, 백성들아! 만고역적 정한담의 목을 오늘 베려 하니 백성들도 구경하라.”
하니, 성중성외(城中城外) 모든 백성이 한담 죽이러 간단 말을 듣고 남녀노소 상하 없이 그놈의 간을 내어 먹고자 해, 동편 사람은 서편 사람을 부르고 남촌 사람은 북촌 사람을 불러 골목골목 빈틈없이 나오며 서로 이르기를,
“이봐, 벗님네야! 가세 가세 어서 가세. 만고역적 정한담을 우리 원수 장군님이 사로잡아 두 팔 끊고 전후 죄목 물은 후에 백성에게 보이려고 장안시에서 벤다 하니, 바삐 바삐 어서 가서 그놈의 살을 베어 부모 잃은 사람은 부모 원수 갚아주고 자식 잃은 사람은 자식 원수 갚아주세.”
하며 백발노구(白髮老嫗) 손자 엎고 홍안소부(紅顔少婦) 자식 품고 전후좌우 나열해, 어떤 사람은 달려들어 한담에게 호령하고 어떤 여인들은 한담의 상투 잡고 신짝 벗어 양 귀밑을 딱딱 치며 이르기를,
“네 이놈, 정한담아! 너 아니면 내 가장이 죽었으며 내 자식이 죽을쏘냐. 덕택이 하해 같은 우리 원수 네놈 목을 진중에서 베었더라면 네놈 고기 맛보지 못할 것이로되, 백성에게 보이려고 산 채로 잡아와 오늘 벤 고로 네 고기를 나눠다가 우리 가장 혼백이나 여한 없이 갚으리라.”
하더라. 나졸들이 수레소를 재촉해 한담의 사지(四肢)를 나눠놓으니, 장안 만민이 벌 떼같이 달려들어 점점이 오려놓고 간도 내어 씹어보고 살도 베어 먹어보며 유 원수의 높은 덕을 칭송했다.
①은 정한담과의 첫 싸움에서 승리해 대원수가 된 유충렬이 폐허가 된 자기 집을 방문해 독백 형태로 말한 것인데, 그 내용이 일국의 권세를 장악한 대원수의 입에서 나올 만한 것과는 거리가 멀다. 즉 “부귀영화 본다 하고 부디 사람 경히 말고 제 복 있어 잘산다고 일가친척 괄시 마소”라거나, “양지가 음지 되고 음지가 양지 되는 줄을 게 뉘라서 알아보리. 권세 좋다 귀하다고 천만년을 믿지 마소”라는 말 등은 권세를 장악한 사람의 입에서 나올 수 있는 말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런 탓에 이 대목은 이야기 전개상 매우 어색한 느낌을 자아낸다. 그러면 이런 어색함은 왜 일어났는가? 그 까닭은 두 가지로 생각해 볼 수 있다. 하나는 작가가 이야기 전개상 유충렬이 권세를 장악한 것을 간과해 버리고 당시 부귀권세가의 행태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유충렬의 입을 통해 표출해 버린 결과라고 할 수 있으며, 다른 하나는 유충렬을 잃었던 권력을 회복한 인물이 아니라 민중의 구원자로 생각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둘 가운데 어떤 것이 원인이었건 간에 여기에는 권력 회복을 추구하는 몰락 양반의 의식보다는 당시 부귀권세가에 대한 민중의 부정적인 인식이 강력하게 반영되어 있는 것만은 분명하다.
②는 유충렬이 정한담을 사로잡아 백성들 앞에서 처형하는 대목인데, 백성들의 반응이 심상치 않다. 정한담을 처형한다는 소식을 듣고 장안의 온 백성이 몰려들 뿐만 아니라, 정한담의 시신에서 간을 꺼내어 씹거나 살을 베어 먹으면서 유충렬의 덕을 칭송한다. 정한담이 아무리 만고의 역적이라고 할지라도 백성들이 그의 인육(人肉)을 먹는다는 상황 설정은 참으로 끔찍하기 그지없으며, 우리나라 고전소설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장면이다. 그런데 ≪유충렬전≫에는 이러한 끔찍한 장면이 장황하게 서술되어 있다. 백성들이 정한담의 간을 꺼내어 씹어 먹은 것을 그가 단순히 반역을 꾀한 역적이거나 주인공 유충렬의 적대자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정한담은 권력을 장악하기 위해 백성을 죽음으로 몰고 가거나 도탄에 빠뜨린 부패한 지배층을 상징하는 인물이라고 할 수 있는데, 백성들은 그를 철천지원수로 여기고 있다. 따라서 여기에는 조선 후기 부패한 지배층에 대한 민중의 분노가 반영되어 있다고 할 수 있으며, 그 분노가 얼마나 심각한 것이었는가는 정한담의 간을 꺼내어 씹어 먹는다는 표현에 단적으로 드러나 있다고 하겠다. 백성들이 유충렬을 칭송했던 것도 그가 나라를 위기에서 구한 충신이라기보다는 자기들을 부패한 지배층의 손아귀에서 벗어나게 해준 민중적 영웅이었기 때문이다. 요컨대, 이 대목에는 부패한 지배층에 대한 조선 후기 민중의 강한 분노와 함께 영웅 대망(待望)이라는 의식이 강하게 반영되어 있다고 하겠다.
위와 같은 사실로 미루어 볼 때, ≪유충렬전≫ 등 조선 후기에 창작된 영웅소설의 주요 향유층이 평민 이하의 계층이었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렇다고 해서 ≪유충렬전≫의 작자를 평민 이하의 계층이었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19세기까지만 해도 대부분의 평민은 한글을 읽거나 쓸 수 있는 능력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이들은, 앞서 인용한 이덕무의 기록에서도 엿볼 수 있듯이, 한글소설이라고 할지라도 눈이 아니라 주로 귀로 향유했던 것이다. 따라서 실제 ≪유충렬전≫의 작자는 평민 가운데서도 한글을 유창하게 사용할 수 있는 사람 또는 몰락 양반이나 중인 계층일 수도 있다. 그러나 작자가 어떤 계층이었건 이들은 조선 후기 민중 의식이나 취향을 잘 알고 있었으며, 이를 상업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 식견을 가진 사람임에는 틀림없다. ≪유충렬전≫ 등 영웅소설은 조선 후기 소설의 상업화라는 소설 발전의 토대 위에서 민중 독자층의 요구에 부응해 창작된 통속소설이기 때문이다.
다음은 ≪유충렬전≫의 창작 연대와 관련된 문제다. 한때 ≪유충렬전≫은 임병양란 직후나 17세기 말에서 18세기 초 사이에 창작되었을 것이라 추정되기도 했다. 그 근거로는 유심과 정한담의 논쟁이 병자호란 당시 주화파(主和派)와 주전파(主戰派)의 정쟁(政爭)과 유사하다는 점, 영웅 일대기의 구조를 가장 잘 구비하고 있다는 점, 중세적 질서의 위기가 심각한 문제로 제기되고 있다는 점 등이 제시되었다. 그러나 위의 근거들은 도리어 ≪유충렬전≫이 19세기 이후에 창작된 것임을 말해주는 것으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유심과 정한담의 논쟁은 병자호란 당시의 정쟁을 사실적으로 반영한 것이라기보다는 당쟁을 비롯해 조선 후기에 만연한 정치 현실이 유형화되고 속화된 형태로 반영된 것이며, 영웅 일대기의 구조를 가장 잘 구비하게 된 것도 이전에 나온 영웅소설의 구조를 바탕으로 더욱 체계화하고 보완한 결과로 판단되기 때문이다. 또한 중세적 질서 위기를 심각한 문제로 제기한 것으로 미루어 보아, 18세기적 상황보다는 19세기적 상황과 부합하는 측면이 강하다. 즉 ≪유충렬전≫은 황실의 미약, 법령의 불이행, 외적의 강성 등에 따른 국가적 위기 상황을 서사적 배경으로 설정하고 있는데, 위의 세 가지는 세도정치에 따른 왕권의 약화, 삼정(三政)의 문란 등 부패한 관료들에 의한 법령의 악용, 오랑캐로 인식되었던 서구 열강의 침입 등 19세기 우리나라의 정치사회적 현실과 부합하고 있다.
이외에도 ≪유충렬전≫이 19세기 이후에 창작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근거로는 현존하는 이본이 대부분 1900년대 언저리를 벗어나지 않고 있다는 점, 방각본 중에도 경판본이 없고 완판본만 존재한다는 점, ≪상서기문(象胥記聞)≫의 기록에 ≪유충렬전≫이 나타나지 않는다는 점 등을 들 수 있다. 이 가운데 특히 주목할 것은 ≪상서기문≫의 기록이다. 이 책은 정조 18년(1794)에 대마도 역관인 소전기오랑(小田幾五郞)이 조선의 사신에게 전해들은 이야기를 주로 기록한 책인데, 여기에는 조선의 소설로 ≪장풍운전(張豐雲傳)≫, ≪구운몽(九雲夢)≫, ≪최현전(崔賢傳)≫, ≪장박전(張朴傳)≫, ≪임장군충렬전(林將軍忠烈傳)≫, ≪소대성전(蘇大成傳)≫, ≪소운전(蘇雲傳)≫, ≪최충전(崔忠傳)≫ 등 주로 영웅소설에 해당하는 작품들이 제시되어 있다. 그런데 이 목록에 19세 후반에 가장 인기 영웅소설로 알려진 ≪유충렬전≫이 없다. 따라서 ≪유충렬전≫은 18세기 말까지는 존재하지 않았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지금까지 확인된 ≪유충렬전≫의 이본은 총 58종이다. 이 가운데 필사본이 45종으로 가장 많고, 방각본 6종, 활자본 7종이다. 필사본은 김동욱 소장(27종), 한국중앙연구원 소장(8종), 국립도서관 소장(5종), 서울대학교 소장(2종), 고려대학교 소장(2종), 조동일 소장(2종), 조동필 소장(1종)이 있으며, 방각본은 모두 완판본으로 국립도서관 소장(4종), 한국중앙연구원 소장(2종)이 있다. 활자본은 1913년 덕흥서림을 비롯해 광동서국, 경성서적조합, 회동서관, 광한서림, 대창서원 등에서 간행되었다. 이 가운데 특히 덕흥서림에서는 13판이나 간행했는데, 이는 당시 ≪유충렬전≫이 얼마나 인기였는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라 하겠다. 이렇듯 이본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이본 간에 내용의 차이는 거의 없다. 다만 후대 본일수록 극적인 효과를 강조하는 차원에서 약간의 변개가 이루어지거나 천자에 대한 희화화가 약화되는 경향이 있을 뿐이다.
완판본에 따라 ≪유충렬전≫의 줄거리를 제시하면 다음과 같다.
명나라 영종 황제 때 개국공신의 후예인 유심이라는 신하가 있었는데, 공명은 일대의 제일이요 부귀는 만민이 칭송할 정도였다. 그러나 늦도록 자식이 없어 한탄하던 중 장 부인의 요청에 따라 남악산에 올라가서 기자치성(祈子致誠)을 드린 후, 아들을 낳고 이름을 충렬이라 짓는다. 충렬이 7세가 되자 골격과 지혜가 뛰어났으며, 문장과 무예 등 못하는 것이 없었다.
이때 정한담과 최일귀라는 신하가 있었는데, 이들은 항상 천자를 도모하고자 했으나 유심과 퇴재상 강희주 때문에 실행하지 못했다. 그러던 중 여러 나라 제왕들이 조공을 바쳤으나 오직 토번과 가달이 조공을 바치지 않는 사건이 발생한다. 한담과 일귀가 천자에게 이들을 공격하기 위해 기병(起兵)할 것을 건의하고, 유심은 외적의 강성함 등을 들어 이를 반대하다가 한담의 참소를 받아 연북으로 유배된다. 한담이 유심을 유배시킨 후 천자를 도모하려고 옥관도사에게 계책을 물으니, 도사가 황성 안에 신기한 영웅이 있어 아직 어렵다고 말한다. 한담은 그 신기한 영웅이 유심의 아들 충렬이라는 것을 알고 충렬을 죽이고자 유심의 집을 불태워 버린다. 그러나 장 부인이 꿈에 어떤 선관의 계시를 받고 충렬과 함께 겨우 화재를 피해 달아나 번양 회수에 이른다. 한담이 뒤늦게 이 사실을 알고 군사를 회수로 보내어 장 부인과 충렬을 죽이려고 한다.
장 부인이 충렬과 함께 회수 물가에서 주저하는데, 한담의 명을 받은 수적(水賊) 마룡이 충렬을 물에 빠트리고 장 부인은 아내를 삼기 위해 자기 집으로 데려간다. 장 부인이 결박당한 채 어쩔 수 없이 마룡의 집에 이르러 보니, 벽장에 “대명국 도원수 유충렬은 개탁이라”는 글자가 새겨진 옥함이 하나 있었다. 부인이 기지를 발휘해 옥함을 가지고 달아난다. 마룡이 뒤쫓아 왔지만 장 부인은 한 선녀의 도움으로 위기를 모면하고 천신만고 끝에 물가에 이른다. 그러나 더 이상 살 의욕을 잃은 장 부인은 비단 수건에다 충렬에게 보내는 글을 적은 후 그 수건으로 옥함을 싸고는 물에 빠져 죽으려고 한다. 이때 한 여인이 나타나 함께 가자고 권유해 따라가 보니, 유심의 친척 이인학의 집이었다. 장 부인은 그곳에서 세월을 보낸다.
한편 물에 빠진 충렬은 물속에 있던 바위 덕분에 겨우 목숨을 부지하다가 남경 선인(船人)에게 구제되어 살아난다. 이후 14세가 될 때까지 사방을 유리걸식하며 떠돌다가 멱라수 회사정에 이르렀다. 유심이 유배 가던 도중에 이곳에서 빠져 죽으려고 회사정에 시를 한 수 남겼는데, 충렬이 그 글을 보고 부친이 빠져 죽은 줄 알고 자기도 빠져 죽으려 한다. 이때 퇴재상 강희주가 멱라수에서 청룡이 통곡하는 꿈을 꾸고 멱라수로 달려가 충렬을 만난다. 강 승상은 그가 유심의 아들인 것을 알고 집으로 데려가 사위로 삼은 후에, 유심의 원통함을 풀어주기 위해 황성으로 가서 천자에게 상소를 올린다. 상소를 보고 화가 난 천자는 한담의 말에 따라 강 승상을 옥문관으로 유배 보내고, 그의 가족은 모두 궁노비로 삼으라고 명한다. 강 승상이 충렬에게 편지를 써서 피신하라고 알리니, 충렬은 눈물을 머금고 강 낭자와 이별해 또다시 유랑하는 처지가 된다.
충렬이 떠난 후에 금부도사가 내려와 강 승상의 부인 소씨와 낭자를 잡아 황성으로 올라가는데, 도중에 장한이라는 나졸의 도움으로 소 부인과 강 낭자가 탈출해 청수에 이른다. 그러나 소 부인이 낭자에게 후환이 없도록 하기 위해 죽은 흔적을 남겨놓고 청수에 빠져 죽는다. 낭자가 뒤늦게 이를 알고 역시 빠져 죽으려 했으나 때마침 그곳을 지나가던 영릉골 관비(官婢)가 극구 만류하는 바람에 그녀를 따라간다. 그사이 충렬은 정처 없이 다니다가 마침내 중이 되려고 서해 광덕산 백룡사라는 절에 이르러 그곳에서 한 노승을 만나 병법을 익히는 등 기이한 술법을 배운다.
한편 정한담과 최일귀는 유심과 강희주를 멀리 유배 보내고 천자를 도모하고자 했는데, 때마침 남흉노와 북적이 함께 쳐들어온다. 한담과 일귀는 군사를 이끌고 나가 싸우는 척하면서 곧바로 적장에게 항복한 후, 도리어 외적의 선봉장과 중군장이 되어 황성으로 쳐들어온다. 천자는 조정만에게 도성을 맡긴 후 태자를 중군장으로 삼고 직접 후군을 맡아 정한담을 맞아 싸운다. 그러나 적장인 정문걸마저 당하지 못한 채 패전해 금산성으로 도망가 자신의 잘못을 한탄한다. 그사이 한담은 도성을 함락해 조정 대신들의 항복을 받아낸 후 금산성으로 달려들어 천자에게 옥새를 내놓으라고 호령한다. 천자는 조정만과 함께 겨우 북문으로 달아나지만, 황후ㆍ태후ㆍ태자는 사로잡혀 적진으로 끌려간다. 천자는 육국에 구원병을 청해 다시 한담과 대전하지만 역시 문걸에게 패한다.
이때 충렬이 광덕산 백룡사에서 천문(天文)을 살펴보니, 천자의 자미성이 떨어지고 남경에 살기가 가득했다. 충렬이 고국에 전쟁이 일어났는데도 갈 수 없는 신세를 탄식하자, 노승이 몇 년 전에 회수 물가에서 주운 것이라며 비단 수건에 싸인 옥함을 내어주었다. 비단 수건에는 모친이 자기에게 보낸 글이 쓰여 있었으며, 옥함에는 책 한 권에 갑옷, 투구, 장검이 각각 하나씩 들어 있었는데 모두 용궁의 조화가 분명했다. 충렬은 이것들을 소지하고 노승이 오래전에 송림촌 동장자에게 맡겨두었던 천사마를 얻어 타고 순식간에 남경으로 달려간다.
충렬이 금산성에 이르니, 천자가 옥새를 목에 건 채 항복하려고 나오고 있었다. 이를 본 충렬이 적진으로 달려들어 문걸을 한칼에 베고 명진(明陣)으로 돌아와 천자 앞에서 자신의 신분을 밝힌 후, 머리를 땅에 두드리고 통곡하면서 정한담 농간에 충신들을 쫓아낸 일을 거론한다. 천자가 후회막급해 아무런 대답을 못하자, 적진에서 홀로 탈출한 태자가 급히 나서서 충렬을 만류한다. 충렬은 태자가 성군이 될 기상인 것을 보고 천자에게 사죄한 후 충성을 다짐하고, 천자는 충렬을 도원수로 삼아 군사를 총독하게 한다.
원수가 된 충렬은 필마단기로 출천해 적장인 최일귀, 마룡 등을 단칼에 베어 죽이고, 정한담을 사로잡기 위해 적진으로 들어간다. 그러나 정한담은 잡지 못하고 황후와 태후만 구출해 돌아오니, 천자와 모든 군사들이 즐거워하며 원수를 치하한다. 이후 원수와 정한담은 술법과 여러 가지 전술을 구사하는 등 치열한 공방전을 벌이지만 마침내 원수가 정한담을 사로잡아 전옥에 가둔다. 그러나 그사이에 황후ㆍ태후ㆍ태자가 다시 호왕에게 잡혀 오랑캐 땅으로 끌려간다. 이에 원수가 오랑캐 땅으로 달려가서 호국을 함몰시키고, 처형 직전에 놓여 있던 황후 일행을 구해 회군한다. 회군하는 도중 포판에 유배되어 있던 아버지 유심마저 구해 남경으로 돌아온다. 유심이 한담을 끌어내어 그가 저지른 열 가지 죄목을 따져 물은 후에 장안의 저자에서 처형하니, 장안의 온 백성이 달려들어 한담의 간을 꺼내어 씹어보는 등 전란으로 죽은 가족들의 원한을 씻는다. 이어서 천자가 유심과 충렬을 각각 연왕과 위국공에 봉하고 다른 장졸들에게도 전공에 따라 상을 내리니, 천자를 찬양하고 원수를 송덕하는 소리가 천지를 진동한다.
그러나 원수는 모친, 강 승상, 강 낭자와 함께하지 못한 것이 한스러워 이들을 위해 제사라도 올리고자 대군을 이끌고 번국으로 향한다. 번국으로 가는 도중에 서천의 삼십육도 군장들이 모두 원수를 두려워해 옥새와 금은보화 등을 바치며 항복했으나, 가달왕은 마철 삼 형제를 앞세워 대적한다. 이에 원수가 맞서 싸워 순식간에 마철 삼 형제를 죽이고 가달왕의 항복을 받아내며 옥관도사마저 사로잡는다. 또한 그곳에 유배되어 있던 강 승상과 남경에서 끌려간 수많은 미색들을 구한 후, 토번국으로 가서 번왕의 항복을 받아내고 남경으로 회군한다. 돌아오는 도중에 회수에 이르러 모친을 위해 제사를 올리다가 이 처사 집에 머물러 있던 모친과 상봉하며, 영릉에서는 관비의 구박에도 불구하고 굳게 정절을 지키던 강 낭자와 극적으로 해후한다. 원수가 모친과 강 낭자와 강 승상 등을 가마와 수레에 태우고 수많은 미색과 군사들을 좌우에 나열해 승전고를 울리며 황성으로 올라오니, 천자와 태후와 연왕이 백 리 밖까지 나와 원수를 맞이해 그간의 사연을 서로 이야기하며 기뻐한다. 장안의 만민 또한 오랑캐에게 잡혀갔던 가족과 만나 즐거워하면서 원수의 덕을 칭송하고, 원수는 붙잡아온 옥관도사를 장안 저자에서 처형한다.
천자가 연왕에게는 산동 육국에서 들어오는 조세를 모두 받게 하고, 원수에게는 남평과 여원 양국의 옥새를 주어 남만 오국을 차지하게 하고 또 승상의 인수를 주어 나라의 모든 일을 다 맡겼으며, 장 부인은 정렬부인 겸 연국왕후에 봉하고, 강 승상에게는 달왕의 직첩을 주었으며, 강 부인은 정숙부인 겸 언성왕후에 봉하고, 이 처사 등과 남은 제장들의 벼슬을 차례로 돋우니, 온 천하가 태평성대를 이루고 상하 인민이 천자와 원수를 송덕하는 소리가 천지를 진동한다.
≪유충렬전≫은 유심과 정한담의 대결에서 드러나듯이, 충간의 대결을 기본적인 갈등 구조로 삼으면서 충신의 궁극적인 승리와 그 승리를 통한 부귀공명의 실현을 구가하는 작품이다. 이로 인해 ≪유충렬전≫의 주제는, ‘충신의 궁극적인 승리’에 주안점을 두느냐, 아니면 ‘그 승리를 통한 부귀공명의 실현’에 주안점을 두느냐에 따라 각각 달리 파악되어 왔다. 전자의 경우는 ‘유교의 근본 사상의 하나인 충’을, 후자는 ‘충이나 의용을 가장한 개인의 영달’을 ≪유충렬전≫의 주제로 이해했던 것이다.
≪유충렬전≫은 주인공 이름이 ‘충렬(忠烈)’인 것에서도 알 수 있듯이 관념적인 지향 가치로서의 ‘충’을 작품 전면에 표방하고 있다. 주인공의 부친인 유심은 “지하에 돌아가더라도 오자서의 충혼에 부끄럽게 하지 말라”든가, “대명국 유심은 간신 정한담과 최일귀의 참소를 만나 연경으로 적거하던 중에, 일월같이 밝은 마음 변박할 길 전혀 없고 빙설같이 맑은 절개 보일 곳이 바이없어 멱라수를 지나다가 굴삼려의 충혼 만나 물에 빠져 죽으니라”며 충을 위해 목숨 바치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그런가 하면 간신인 정한담은 “도성에 들어가 천자에게 항복받고 옥새를 앗아버리면 충렬이 비록 천신이라고 한들 제 인군이 죽었는데 무슨 면목으로 싸우리까.”라며 유충렬의 충성심을 빌미로 삼아 전략을 구사하기도 한다.
이렇듯 ≪유충렬전≫은 봉건적 관념인 충을 절대적 가치로 표방하고 있다. 이런 점에서 ≪유충렬전≫의 주제를 ‘충’으로 이해하는 것은 일면 타당성이 있다고 하겠다. 그러나 ≪유충렬전≫은 조선 후기 소설의 상업화라는 토대 위에 평민 대중의 통속적 욕구에 부응해 지어진 통속소설이다. 따라서 ‘영웅소설의 수용 계층이 그토록 영웅소설에 몰입한 이유가 중세적 이념의 낭만적 승리가 가져다주는 쾌감이라고 보기에는 아무래도 작품 해석의 중심을 잘못 잡은 것 같다’는 지적이 있었듯이, ‘유교의 근본 사상의 하나인 충’을 ≪유충렬전≫의 주제로 이해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
이러한 문제점으로 근래 영웅소설의 통속적 측면이 중시되면서 ‘충이나 의용을 가장한 개인의 영달’이 ≪유충렬전≫의 주제라는 견해가 설득력을 얻고 있다. 즉 ≪유충렬전≫에서 표방된, 황제를 향한 주인공의 충성심은 그 자체로서 의의가 있는 것이 아니라 권력의 획득에 집착해 개인의 영달을 꾀하는 주인공의 욕망을 성취시키기 위한 하나의 수단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영웅소설에서는 표면적으로는 충의라는 관념적 지향 가치를 내세우지만, 실상 그것은 주인공과 그 가문의 개인적인 지향 가치 실현을 목표로 하고 있다거나, 영웅소설의 핵심적 창작-수용 의식은 중세적 질서 자체의 도덕적 보수가 아니라 중세적 질서 내에서 꿈꿀 수 있는 중세적 특권의 획득이라는 견해도 같은 맥락에서 나온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견해 역시 전자와 마찬가지로 ≪유충렬전≫의 한 측면만을 부각시켜 논의하고 있다는 점에서 문제가 있다. 과연 ≪유충렬전≫에서 개인적인 지향 가치의 실현이 관념적 지향 가치인 충과 분리될 수 있는가 하는 문제가 남는 것이다. ≪유충렬전≫은 분명 충신의 궁극적인 승리와 그 승리를 통한 부귀공명의 실현을 구가한 작품이며, 이 두 가지는 상호 유기적인 것으로 분리될 수 없기 때문이다. 즉 유충렬이라는 주인공(충신)을 통해 추구하는 개인적 지향 가치가 중세적 특권의 획득이라고 할 때, 이 특권은 오로지 충이라는 관념적 지향 가치의 구현을 통해서만 실현될 수 있는 것이라고 하겠다.
그런데 근래 후자의 입장을 견지하면서 이 문제를 ‘중층적 서술 시각’과 관련지어 이해한 견해가 제기되어 주목된다. ‘≪춘향전≫ 등의 판소리계 소설에서는 갈등 구조가 하층민의 애정, 삶 등에 나타나는 현실적 질곡에서 배태된 것이기 때문에 현실적 성격이 주조적으로 드러나게 되는 반면, ≪유충렬전≫에서는 서사세계의 갈등 구조가 명분론적 이념을 전제로 한 정적 사이의 대결 형식을 취하면서도, 그것에서 야기되는 주인공의 처지를 하층민의 삶으로 바라보려는 시각이 강하게 나타나기 때문에 서술 시각의 중층성 문제가 한층 심각하게 부각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견해는 ‘주인공의 삶을 민중적 삶의 관점에서 바라보려는 기저적인 서술 시각과 정적 사이의 대결 구조 및 그것에 의해 획득되는 관념적 지향 가치 사이의 거리감을 소설 향유층의 의식과 관련시켜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의 문제를 총체적으로 해명하기 위한 고충에서 나온 것으로 생각한다. 다시 말해서 ‘충이라고 하는 명분론적 이념이 ≪유충렬전≫의 주요 향유층이라고 할 수 있는 민중적 독자들에게 어떤 의미로 수용되었는가’라는 문제라고 하겠다.
이 문제에 대해 답하는 것은 쉬운 일은 아니지만 ‘중층적 서술 시각’이라는 분석틀을 이용할 만큼 복잡한 것도 아니다. 위의 견해가 안고 있는 맹점은 ≪유충렬전≫ 서술자의 시각을 ‘주인공의 처지를 개인이 처하는 비극적 상황으로 표현하는 주정적 시각과 추상적 명분론에 입각한 대결 구조를 이끌어 나가는 관념적 시각 사이의 괴리’로 이해한 데 있다. 여기서 ‘서술 시각 사이의 괴리’는 곧 민중적 소설 향유층의 삶의 관점과 충이라고 하는 명분론 사이의 괴리라고 할 수 있는데, 이 둘의 관계가 항상 괴리의 관계에 있는 것만은 아니다. 때로는 도리어 이 둘의 관계가 서로 상승 작용을 하는 경우도 없지 않다. 실제로 19세기 후반 변란 주도층이 내건 진인(眞人)의 출현에 의한 왕조 타도라는 구호는 일반 농민들의 정서 및 현실적 요구와는 괴리가 큰 지나치게 추상적이고 공허한 것이었으며, 오히려 생각조차 할 수 없는 ‘흉측한 말’로 인식되기도 했던 것이다.
오늘날 우리 대부분은 봉건적 이념으로서의 ‘충’을 추상적인 명분에 불과한 것으로 이해한다. 그러나 봉건적 질곡의 본질을 인식할 수 없었던 조선 후기 대다수의 농민 대중에게는 그것이 도리어 정서적으로나 실질적으로 절대적 가치로서 의의를 지닌 것으로 이해되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특히 현실적 질곡의 원인을 간신의 발호 등 ‘충의 부재’에 따른 결과로 인식할 경우, 현실적 질곡에 따른 비극적 상황을 표현하는 주정적 시각이 강화되면 될수록 명분론에 입각한 관념적 서술 시각 역시 강화된다고 할 수 있다. 이때 ‘충’이라는 명분은 현실적 질곡을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하면서도 실질적인 방안으로 떠오르며, 그만큼 또 강하게 요구된다. ≪유충렬전≫이 바로 이러한 경우에 해당하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즉 현실적 질곡의 본질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그 원인을 간신의 발호에 따른 결과로 이해할 수밖에 없었던 ≪유충렬전≫의 향유층에게 충이라는 명분은 현실적 질곡을 극복할 수 있는 실질적이면서도 유일한 방안으로 인식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은 ≪유충렬전≫의 곳곳에 엿보인다. 이 중 대표적인 것이 바로 정한담을 참시하는 장면이다. 유충렬이 정한담을 장안 저자에서 처형하자 장안의 온 백성이 나와 정한담의 간을 꺼내어 씹어 먹는 등 분노를 표출하는데, 어떤 연구자는 이를 ‘반봉건적 흥분상’으로 이해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 장면에서는 물론 ≪유충렬전≫의 어디에서도 ‘반봉건적 성격’을 찾아볼 수 없다. 백성들이 간신 정한담에게 보인 반응은 당시의 봉건적 지배층에 대한 민중의 분노가 반영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당시 민중이 현실적 질곡을 간신의 발호나 통치자의 무능 등으로 이해한 결과이지, 봉건적 모순이나 질곡 그 자체를 문제 삼은 것으로 볼 수 없다. 물론 여기에 표출된 참화상의 근본 원인은 봉건적 모순에 따른 것이며, ‘참화상 자체에 대한 백성의 인식과 원망’은 계기만 주어지면 얼마든지 반봉건적 지향으로 전화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위로는 임금의 총명을 가리고 매관매직을 일삼으며 국권을 농락하는 자들을 모두 쫓아낼 것’을 요구했던 동학농민군도 이를 실현하기 위해 구체적인 투쟁을 전개하면서 반봉건적 지향과 의식을 획득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유충렬전≫에 표출된 현실적 질곡에 대한 흥분상은 분명 반봉건적 지향으로 전화되기 이전 단계의 의식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다시 말해, 정한담 처형 장면에 표출된 백성들의 흥분상은 ‘현실적 질곡을 간신의 발호에 따른 결과로 인식한 데서 비롯된 흥분상’이지 ‘반봉건적 흥분상’은 아니라고 하겠다.
이렇듯 ≪유충렬전≫의 향유층은 현실적 질곡을 간신의 발호에 따른 결과로 이해하고 있다. 주인공 유충렬은 현실적 질곡의 원인인 간신을 척결하는 ‘충의 화신’인 셈이다. 바로 이러한 이유로 백성들은 유충렬을 칭송했던 것이다. 요컨대, ≪유충렬전≫이 표방하는 충은 현실적 질곡을 극복할 수 있는 명분으로서의 성격을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점에서 ≪유충렬전≫이 표방하는 ‘충’은 ‘유교적 근본 사상으로서의 충’과 일정하게 구분할 필요가 있다. 물론 여기서 ‘충’ 역시 기본적으로 봉건적 관념으로서의 한계를 벗어날 수는 없다. 그러나 ≪유충렬전≫에서의 충이 봉건적 이념을 고수하거나 고양하기 위해 표방된 것은 아니며, 또 봉건적 지배계급이 자신들의 계급적 이익을 고수하기 위해서 내세운 유교적 관념으로서의 충과도 다르다고 해야 할 것이다. 봉건적 지배계급이 자신들의 이익을 고수하기 위해서 내세운 충은 왕에 대한 절대적 복종을 근간으로 삼고 있다. 그런데 ≪유충렬전≫은 충을 내세워 왕의 무능을 통박한다. 즉 유충렬이 천자를 통박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 ‘충’이라는 명분 아래 가능했던 바, 우리는 충이라는 관념 자체를 놓고 체제 긍정적이거나 보수적이라고 평가해서는 안 될 것이다. 똑같은 관념이라 할지라도 그것이 역사적 시공과 상황에 따라, 또는 계급적 입장에 따라 함축하고 있는 의미가 다르며 역할 또한 다르기 때문이다. ‘동학농민군의 창의문’은 똑같은 관념이라 할지라도 상황에 따라 함축하고 있는 의미와 역할이 얼마나 다른가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사람이 세상에서 가장 귀하게 여겨지는 까닭은 바로 사람에게 인륜이 있기 때문이다. 군신부자는 바로 인륜의 요체로, 임금은 어질고 신하된 자는 정직해야 하며, 아버지는 자애롭고 아들된 자는 효성스러워야 하는 것이다. 그런 후에야 비로소 가정과 국가가 이루어지고 끝없는 행복을 누릴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지금 우리 임금께서는 인자해 효성스러우며 자애롭고 총명한 정신과 뛰어난 예지를 겸비하신 분으로 만약 현명하고 정직한 신하가 보필한다면 요순의 덕화와 한나라 문제와 경제의 정치에 도달하는 것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신하된 자들은 국가의 은혜에 보답할 것을 생각하지 않고 한갓 벼슬자리만 탐내며 우리 임금의 총명을 가린 채 아첨을 일삼고 있다. … 우리들은 비록 시골에 사는 이름 없는 백성들이지만 임금의 땅에서 먹고 입고 사는 까닭에 이러한 위급함을 모르는 척할 수 없어 팔도가 마음을 합치고 만백성들이 뜻을 같이해 지금 의(義)의 깃발을 치켜들고 ‘보국안민(輔國安民)’으로 죽음의 맹세를 했다. 금일 이러한 광경은 놀랄 만한 것이지만 절대로 두려워하지 말고 각자 자신의 생업에 종사해 모두 태평성대를 축원해 다 함께 임금의 은덕을 입을 수 있다면 천만다행이겠음.(황현 저, 김종익 옮김, ≪오하기문≫, 1994, 72∼73쪽)
이 창의문은 동학혁명의 초기 단계인 무장봉기 시에 전봉준이 작성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위에서 볼 수 있듯이, ‘임금에 대한 충성’을 비롯해 봉건적 관념인 유교적 세계관이 글 전체를 지배하고 있다. 즉 동학농민군은 ≪유충렬전≫의 향유층과 마찬가지로 국가적 위기와 현실적 질곡을 해결하기 위한 방안으로 유교적 명분을 내세우고 있는 것이다. 과연 우리는 이 창의문을 두고 체제 긍정적이거나 보수적이라고 평가해야 할 것인가. 더구나 이 창의문은 중세적 구국정신을 강하게 드러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혁명적 목적을 수행하는 데 문제가 없었다고 한다. 즉 이 글이 세상에 알려지자 농민들은 ‘옳다, 인제는 되었다. 하늘이 어찌 무심하랴. 이놈의 세상은 얼른 망해야 한다. 망할 것은 얼른 망해버리고 새 세상이 와야 한다’는 반응을 보였다고 한다. 우리는 이러한 사실에서 ‘똑같은 관념이라 할지라도 그것이 역사적 시공과 상황에 따라, 또는 계급적 입장에 따라 함축하고 있는 의미가 다르며 역할 또한 다르다’는 것을 분명하게 확인할 수 있다.
≪유충렬전≫은 분명 ‘충간의 대결을 기본적인 갈등 구조로 삼으면서 충신의 궁극적인 승리와 그 승리를 통한 부귀공명의 실현’을 구가하는 작품이다. 따라서 ≪유충렬전≫의 주제는 ‘충’이라는 명분론적 가치 지향과 그 가치의 구현을 통한 개인적 가치의 실현으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다만, 여기에서 명분론적 가치 지향으로서의 ‘충’은 봉건적 이념을 보수하거나 고양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바로 봉건적 모순에 따른 현실적 질곡을 극복하기 위해 천명된 것이라고 하겠다. 봉건적 질곡의 본질을 인식할 수 없었던 소설 향유층에게 있어서 명분론적 관념으로서의 ‘충’은 현실적 질곡을 극복하기 위한 도덕적 당위나 절대적 가치 개념으로 추구되었던 것이다. ≪유충렬전≫ 향유층이 소설에 몰입했던 주요 이유 가운데 하나가 바로 이러한 도덕적 당위나 절대적 가치 개념으로서의 ‘충’의 구현을 통해 가혹한 현실의 변화나 개혁을 이루고자 했던 간절한 욕구였을 것으로 생각한다.
≪유충렬전≫ 등 영웅소설에 유형화된 갈등은 당대의 일상적 정치 현실을 직접 반영하고 있는 것은 아니며, 오히려 그것은 구조나 공식 등의 형식이 현실의 약호로서 받아들여지는 방식이라는 지적이 있다. 예컨대, 영웅소설 속에서 국가적 위기의 구체적 내용은 현실과 상관없지만 그 위기의 형식은 현실적 불만이나 불안감의 약호로서 이해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지적은 ≪유충렬전≫을 비롯한 대부분의 영웅소설이 당대의 사회적 현실이나 모순을 사실적이거나 직접적으로 또는 심각하게 문제 삼은 작품이 아니라, 독자 대중의 취향에 부합해 창작한 통속소설이라는 점에서 당연한 지적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영웅소설이 초월적인 존재의 구원이나 원조를 문제 해결의 주요 계기로 삼는 등 상투적이고 공식적인 구성에 따라 당대인의 낭만적 이상을 그린, 일종의 로망으로서의 성격을 강하게 지니고 있다는 점에서 더욱 그렇다. 따라서 영웅소설이 서사화하는 국가적 차원의 갈등을 당대의 정치 현실과 직접적으로 관련시켜 이해하는 태도는 분명 바람직하지 않다.
그러나 19세기에 본격적으로 전개된 영웅소설의 통속화는 기본적으로 역사의 진보의 코스인 대중화를 토대로 하고 있으며 봉건 해체기라는 역사적 현실에 대한 일정한 인식을 기반으로 해 형성되었다는 사실 또한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이와 관련해 ≪유충렬전≫의 서두는 여러 모로 주목을 요한다.
대명국(大明國) 영종 황제 즉위 초에 황실이 미약하고 법령이 불행한 중에, 남만과 북적과 서역이 강성해 모역할 뜻을 두었다. 이런 까닭에 천자 남경에 있을 뜻이 없어 다른 데로 도읍을 옮기고자 하시었는데…
≪유충렬전≫은 천자가 도읍을 옮겨야 할 정도로 심각한 국가적 위기 상황을 서사적 배경으로 설정하고 있다. 이러한 사건의 배경 설정은 일단 기존의 조화로운 질서가 깨지고 그로 인해 현실적 박탈감이 생겨난 것을 문젯거리로 던져놓고 있다는 점에서 봉건 해체기의 위기의식이 팽배하던 상황을 반영한 것으로 이해될 수 있다. 그러나 ≪유충렬전≫의 서두가 함축하는 문제적 성격은 단순히 봉건 해체기의 위기의식이 팽배하던 상황을 반영한 정도에 그치지 않는다. 위에서 볼 수 있듯이, ≪유충렬전≫은 국가적 위기의 구체적 내용으로 황실의 미약과 법령의 불이행, 그리고 외적의 강성을 거론하고 있다. 일견 이것은 사건 배경을 국가적 위기 상황으로 설정함에 따라 자연스럽게 수반되는 일종의 상투적인 표현으로 생각될 수도 있다. 그러나 ≪유충렬전≫의 경우 위와 같은 문제의식은 상투적인 것만으로 보기 어려운 점이 있다. ≪유충렬전≫의 서두에 설정된 문제적 상황은 소설 향유층에게 현재의 상태이면서 동시에 타개되거나 극복되어야 할 현실이라는 성격을 갖고 있는데, 그 현실이 봉건 해체기로서의 조선 후기의 문제적 역사 현실과 매우 흡사하기 때문이다.
익히 알고 있듯이, 순조의 등극으로 시작되는 19세기는 조선 후기 이래의 사회경제적 발전 과정에서 생겨난 온갖 문제들이 다양한 형태로 표출된 시기였다. 정치적으로는 18세기 이래 심화되어 온 중앙 정치 세력의 집중 현상이 최고조에 달해 안동 김씨를 비롯한 서울에 거주하는 소수의 유력한 거대 가문이 정치권력을 독점적으로 장악했으며, 이들의 세도정치로 국왕의 권력은 약화될 대로 약화되었다. 이런 와중에 통치권의 부패는 더욱 가속화되어 민중의 저항을 무마하기 위한 여러 가지 법령들이 제정되었지만 시행되지 않거나, 시행되었다 하더라도 오히려 부패한 관료들의 착취 수단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게다가 18세기 말부터 서구 자본주의 열강들의 이양선이 출몰하기 시작했으며, 이런 배들은 상품을 싣고 와서 통상을 요구했을 뿐만 아니라 군사적 침략 행위까지도 서슴없이 감행했다. 즉 조선은 19세기 벽두부터 서구 자본주의 열강의 침략적 야욕 앞에 무방비 상태로 놓여 있는 급박한 형세였다고 하겠다.
이러한 조선 후기의 역사적 현실을 고려해 볼 때, ≪유충렬전≫의 서두에 제기된 세 가지의 문제를 단순히 상투적인 표현으로 이해해서는 안 될 것으로 생각한다. 더욱이 황실의 미약과 법령의 불이행을 간신의 발호에 따른 결과로만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천자의 무능과 연계시키고 있다는 점에서, ≪유충렬전≫의 서두에는 조선 후기의 문제적 현실에 대한 인식이 비교적 사실적으로 반영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나아가 이는 ≪유충렬전≫의 작가 및 향유층이 당대의 사회 현실을 온당하면서도 정치(精緻)하게 이해했음을 보여준 것으로 생각된다. 물론 이러한 인식은 당대의 문제적 사회 현실을 현상적인 차원에서 문제 삼은 것으로, 봉건 지배 체제의 근본적 한계나 본질적 모순을 간파한 데까지 이른 것은 아니다. 그러나 현상적인 차원에서나마 역사의 현장 안에서 당대 사회 현실의 문제점을 왕권의 미약과 간신의 발호, 그리고 외적의 강성이라고 구체적이면서도 정확하게 지적해 내기란 쉽지 않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유충렬전≫의 근간을 이루는, 천자를 정점으로 이루어지는 국가적 차원의 정치적 갈등은 영웅소설의 주요 향유층으로 거론되는 평민층의 현실적 처지와 거리가 먼 것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적어도 ≪유충렬전≫은 이러한 봉건 해체기의 문제적 사회 현실을 비교적 구체적으로 인식한 기반 위에서 창작된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요컨대, ≪유충렬전≫이 영웅 개인의 고난과 극복 및 가족의 재회와 부귀의 실현에 초점을 맞추어 서술하고 또 봉건 지배 체제의 질서 내에서 중세적 특권의 획득을 환상적으로 형상화하고 있지만, 그 밑바탕에는 당대 사회 현실에 대한 비교적 구체적이면서도 상세한 이해가 깔려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유충렬전≫의 통속성에 함유된 향유층의 현실 인식과 의식 지향을 역사적 맥락에서 구체적으로 따져보고 또 그 성격을 명확히 할 필요가 있다.
≪유충렬전≫을 비롯한 조선 후기의 영웅소설은 소설의 상업화라는 소설 발전의 토대 위에서 독서 대중의 요구에 부응해 이루어진 통속소설이다. 그러나 통속소설이라고 해서 이들 작품이 우리 소설사에서 차지하는 위상이 폄하되거나 간과되어서는 안 된다. 조선시대의 영웅소설은 문자 문화를 향유하지 못하던 민중이 이제 대규모로 자신들의 문자 문화를 향유해 문화 의식을 확보해 나가는 매체로서 중대한 문화사적 의미를 지니는 소설 양식이었으며, 영웅소설의 성행은 민중의 성장과 밀접하게 연계되어 있기 때문이다. 특히 ≪유충렬전≫의 경우에는 영웅소설 중에서도 ‘희화화된 천자의 형상’을 비롯해 판소리계 소설과 유사한 ‘운문적 문체’와 ‘민중적 시각 및 목소리의 직접적 반영과 개입’ 등 소설사적으로 주목할 만한 현상을 표출하고 있다.
≪유충렬전≫에 대한 기존의 이해는 조선 후기의 역사적 현실과 관련지어 ≪유충렬전≫을 논의한다고 전제하고 있음에도, 실제 분석에서는 ≪유충렬전≫이 중세 해체기로서의 역동적인 역사 현장 속에 구체적으로 존재했던 작품이었다는 사실을 간과하기 일쑤였다. 예컨대, ‘충’이라는 봉건적 관념을 표방했다고 해서 이를 곧바로 봉건적 이념의 보수나 옹호로 이해하거나 ‘희화화된 천자의 형상’을 반봉건적 의식과 관련지어 이해하려는 태도 등이 그것이다. 이러한 태도는 역사적인 시각에 입각해 있다고 보기 어렵다. 조선 후기 일반 민중이 영웅소설을 애독했던 이유를 ‘현실적 질곡에 대한 통속적 보상 심리’나 ‘사건의 극단화에 다른 소설적 흥미’ 등에서 찾는 것 역시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기본적으로 ≪유충렬전≫을 비롯한 조선 후기 영웅소설의 상업화는 ‘통속적 보상 심리’나 ‘소설적 재미’와 무관한 것일 수 없다. 그러나 ‘영웅이 가장 실의한 대목에 이르러서 담배 써는 칼로 패사 읽는 사람을 찔러 죽였던 독자의 (열)광적인 행위’는 ‘통속적 보상 심리’라는 소극적 자세와는 거리가 멀다. 이러한 (열)광적 행위는 ‘사건의 극단화에 따른 소설적 흥미’와는 일정하게 관계가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선악의 극단화, 고난과 행복의 극단화, 패배와 승리의 극단화가 이루어지면 독자의 긴장된 관심을 모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소설적 흥미’란 시공을 초월해 항상 동일하게 느껴지거나 작용하는 것은 아니다. 이는 오늘날 우리가 영웅소설에서 별다른 소설적 흥미나 감흥을 받지 못하는 것에서도 알 수 있다. 즉 ‘소설적 흥미’란 사회적 상황과 처지, 계급적 입장 등에 따라, 나아가서는 동일한 개인에게도 성장 과정과 연령에 따라 각각 다르게 느껴질 수 있다. 따라서 ≪유충렬전≫을 비롯한 영웅소설에 대한 이해는 중세 해체기로서의 조선 후기라는 역동적인 역사적 상황과 그러한 역사적 현실에 처해 있는 민중 독자들의 특수성이 가능한 한 철저하게 고려되는 가운데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