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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도량(度量), 선운사(禪雲寺)-
아는 만큼 보이고, 보이는 만큼 느낀다.
“여보, 나 유홍준의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읽고 그 장소에 가 본 다음 레포트 써야해. 근데, 어디 쓰지?”
“가까운데 쓰는 것이 좋지 않아? 부안도 어디 나온 곳이 있을 건데.”
“그렇게 말하지 말고, 확실히 기억나는 내가 가본 곳 없어?”
“선운사 가 봤자나? 그거 아마 1권에 있을 거야. 고창 선운사”
늦은 나이, 이미 졸업했던 대학의 문을 다시 두드렸음에도 익숙함보다 과한 낯설음이 당황스러웠고, 그 당황스러움이 채 가시기도 전, 첫 날부터 받아든 엄청난 양의 과제의 무게는 솔직히 작은 충격으로 나에게 다가왔다.
처음 대학 신입생이었던 1994년과는 전혀 다른 대학의 분위기에 적응은커녕 어리둥절함만 가득 안고 지친 발걸음으로 돌아온 집이었다.
딸아이를 안고 TV 앞에 앉은 남편에게 던진 나의 질문은 저런 식의 눈치 없는 대답이 아니라 따뜻한 위로 한 마디 받고자 하는 맘이 가득 담긴 투정 아닌 투정이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이 눈치 없고 무뚝뚝한 남자는 따뜻한 위로는커녕 영원히 버리지 못할 경상도 특유의 까칠함이 군데군데 묻은 답으로 나의 기대를 무참히 짓밟았다.
확 상해버린 기분, 돌아가는 나의 대답에도 가시가 돋았다.
“고창이 남도야? 고창은 전북이잖아. 남도면 전라남도, 경상남도 이런 곳이겠지. 관심을 가지고 진지하게 대답을 해줘.”
“남도야, 여보. 남도에 부안도 들어가. 전라남도, 경상남도가 남도가 아니라 호남, 영남이 남도야. 그러니 전라도, 경상도가 다 남도야.”
“그래서 선운사가 있어? 확실히 있는 거야? 몇 권에 있는지 정확히 알아야 한다니까. 어쩌면 책을 여러 권 사가지고 봐야 할 것 같은데, 중고라도 살까?”
“뭔 책을 살려고 그래. 부산 집에 가면 있어. 아마 1권부터 5권까지는 있을 거야. 나 대학 때 그 책보고 여러 군데 돌아 봤었어. 지금도 집 책장에 있을 거야.”
“그럼 좀 보내달라고 해봐. 고창이 있는지 보게.”
“알았어. 이야기 해볼게”
그랬다.
때늦은 내 공부에 가장 열성적인 지지자이신 시아버지는 전화가 가자말자 다음날 택배로 4권을 다 내려 보내 주셨고, 열어본 첫 번째 책인 “남도답사 일 번지”편에는 남편 말처럼 고창 선운사에 대한 이야기가 책 후반에 고스란히 소개되어 있었다.
사실 지금 마흔에서 부터 얼추 쉰이 넘어가는 90년대 중 후반 대학을 다닌 우리 세대에 있어서 유홍준의 ‘나의 문화유산답사기’는 전국 모든 대학의 수업 없는 공통 교양 필수의 과목의 참고서와 같은 책이었다. IMF가 터지기 직전인 90년대 중반, 민주 정부가 들어서고 봇물 터지듯 터져 나오기 시작한 자유로움과 풍요로움은 남녀노소 누구를 막론하고 삼삼오오 책을 들고 여행을 즐기는 낭만을 꿈꾸기에 충분한 시대였고, 그 중에서도 아직 산업화가 덜 되었고, 그나마 옛 것의 정취가 고스란히 남은 전라도로의 여행은 이 책의 초판 발행과 함께 엄청난 유행을 가져왔다.
아마 저 남자도 그 때 전라도에 발들인 수많은 경상도 남자들 중의 하나였으리라.
그리고 이 책의 유행과 함께 기억나는 이야기가 있다. 아니 적어도 내 기억에 분명, 이 책의 저자이신 유홍준 교수님이 한 말이라 믿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
“아는 만큼 보이고, 보이는 만큼 느낀다.”
다시 시작한 나의 새로운 공부는 바로 그 아는 만큼 보이는 세상으로의 긴 여정의 첫 발을 땐 느낌이 들었다.
선운사 가는 길
부안에서 태어나 부안에서 자란 나에게 있어 고창은 지리적으로 매우 가까운 곳이지만, 마음으로는 그다지 가까운 곳이 아닌 지역이었다.
전주와 비교를 하자면 거리상으로는 분명 전주가 더 멀지만 전주는 도시인지라 상대적으로 갈 일도 많았고 또 그만큼 자주 가서 익숙한 곳이었던 반면, 같은 시골에 속하는 고창은 특별히 갈 일이 없는 곳이었고 그렇다고 당시 초등학교 및 중학교의 소풍 장소로도 인기 있는 지역도 아니었다.
그리고 책과 달리 고창은 나에게 선운사보다는 그나마 친척이라도 하나 있던 읍내와 근처의 고창 읍성이, 비싼 풍천장어 보다는 달달한 복분자로 만든 각종 음료들이 나에겐 더 익숙한 곳이기도 했고 말이다.
언제부터인가 당연히 여겨지는 봄철의 미세먼지 가득한 뿌연 하늘이 오랜만에 예전의 봄 하늘처럼 맑은 하늘색으로 물든 4월 초의 주말이었다.
주중엔 학교와 생업에, 주말엔 밀린 숙제와 공부, 거기다 더해서 못한 집안일까지 정신이 없는 피곤한 하루하루지만, 모처럼의 보기 드문 화창한 날에 뉴스에서는 미세먼지마저 적은 좋은 날이라기에 쓰러질 듯이 지친 몸에도 불구하고 남편과 아이와 함께 모처럼의 나들이를 나서기로 했다. 그리고 그 나들이 장소로 가깝고 또 어차피 숙제 때문에 한 번은 다시 들려야했던 고창 선운사로 코스를 정했다.
예전엔 책에서처럼 부안에서 선운사를 가려면 흥덕을 거쳐서 가야했는지 모르겠지만 지금은 시원하게 뻗은 서해안 고속도로를 타고 가다 선운사 IC에서 나오면 바로 22번 국도를 만나고 그 길을 따라 약 10여분을 달리면 곧 선운사를 볼 수 있다. 그러기에 지금은 예쁘게 잘 정비되어 고인돌 박물관으로 거듭난 “고인돌 떼무덤”은 오는 길에 볼 수가 없었다.
주말임에도 불구하고 막히는 길 하나 없이 선운사에 도착한 시간은 집을 출발한지 40분도 채 안되어서였다. 선운사를 들어가는 길은 양쪽이 나지막한 산으로 이루어진 골짜기이다. 그러나 산과 산 사이가 제법 널찍하여 골짜기임에도 답답하고 막힌 느낌보다는 오히려 무엇인가에 둘러 쌓여있는 아늑한 느낌이 든다.
하지만 그런 향수 짙은 생각도 선운사 앞 삼거리에 도착하면서 끝이 나버렸다.
선운사 앞 삼거리가 시작되는 곳은 대한민국 곳곳에서 볼 수 있는 관광지나 별반 다름이 없는 모습이었다. 줄줄이 늘어선 음식점과 호텔, 모텔, 펜션 등의 숙박 시설들로 가득 찬 여느 관광지의 모습과 조금도 다름이 없었다.
특히 대낮에도 불이 환하게 들어와 있는 풍천 장어 식당들은 서로가 원조라 아우성을 치며 길을 따라 줄줄이 늘어서 있지만 막상 식당에 들어가 보면 가격은 담합을 한 듯 어느 식당 할 것 없이 한 끼 점심으로는 부담스런 가격에 지갑 열기가 망설여진다.
또한 “이 집이 좋네. 저 집이 TV에 나온 맛있는 집이네.” 하는 말은 많지만 막상 들어가 보면 어느 집이나 메뉴나 음식의 맛은 큰 차이가 없다.
게다가 조심스레 덧붙이자면, 이제는 진짜 풍천 장어라고 부를 수도 없는 것이 지리적으로 풍천이라 이야기하기엔 깨끗하게 정비된 하천은 물의 유량이 너무 적어 장어는커녕 씨 굵은 피라미도 보기 힘들게 되어버렸고, 아는 사람은 아는 것처럼 이곳 식당들에 들어오는 장어 역시 시중과 다름없이 대부분이 양식이라 유흥준 교수께서 책에 말했던 것처럼 ‘여느 장어보다 싱싱하고 힘이 좋아 기허한 사람에게 좋다’는 말이 무색하게 되어버렸다.
집에서 출발하여 선운사까지 오는 내내 차 안에서도 꾸준히 책을 보았다. 이제 막 네 살이 된 어린 딸아이가 있어 현실적으로 도솔산을 오르긴 힘들 것 같았고, 어찌됐던 입구에서 선운사까지 만이라도 차근차근 하나씩 보자는 다짐을 하다 보니 책을 다시 꺼내보게 된 것이었다.
책을 보며, 제일 궁금했던 것 중 하나가 바로 선운사 편 맺음에 나오는 동백 여관이었던 “동백호텔”은 어디인가였다. 저자가 책에서 언급한 건물이다 보니 어찌됐던 옛 정취가 조금이라도 남아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도 있었고, 몇 번이나 와 봤던 선운사임에도 내가 상상하는 모습의 “동백호텔”의 모습이 될 만한 건물이 기억 속에서 쉬이 떠오르지 않아서였다.
선운사 입구에 있다 했고, 또 풍천장어 뒤에 이야기가 나왔으니 으레 삼거리에서 입구 주차장 가는 길에 있겠거니 했지만 수많은 펜션과 호텔, 숙박업소들 사이에서 도무지 “동백호텔”이라는 이름을 찾을 수가 없었다. 책이 나오고도 이미 약 20여년이 지난 시간이다 보니 그 호텔도 사라졌거니 해서 지나가는 말로 신랑에게 물었다.
“책에 나오는 동백호텔은 없어졌나봐. 안보이네”
“아냐 있어. 여기 아니고 주차장 옆에 가면 있어. 근데 동백 호텔은 왜?”
“그냥 보고 싶어서. 옛 양옥 건물을 고쳤다는데 뭐 TV에 나오는 옛 하숙집 같은 그런 건물인가?”
“.......”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자면 “동백호텔”은 내 상상속의 모습과는 전혀 다른 건물이었다.
옛 것도 아니고 새 것도 아닌 어중간한 모습의 건물, 90년대 초반 세상이 변해갈 때 앞을 보지 않고 만든 비슷비슷한 종류의 호텔과 콘도들처럼 특색이라고는 전혀 없는 그냥 그런 거물일 뿐이었다. 그기에 절 앞 주차장에 즐비한 식당과 “사우나”와 “호텔 나이트”까지 있는 건물이 떡 하니 자리한 모습을 보고 있으니 순간 앞서 봤던 모든 것이 다시 새로운 느낌, 하지만 전혀 신선하거나 밝은 느낌이 아닌, 회색으로 덕지덕지 얼룩진 어둡고 지저분한 느낌으로 갑자기 다가왔다.
“이거 진짜 생각과는 다르네. 옛 건물도 아니고, 새 건물도 아니고 보기 참.......”
“뭐 옛날 그 때 지은 건물들이 다 그렇지 뭐. 그래도 깨끗하게 잘 관리한 편 아냐? 다른데 가봐 페인트는 다 벗겨지고 타일은 떨어져 나가고......”
분명 저자가 책을 처음 쓴 시기에 비해 교통도 편해졌고, 주차장도 넓어졌으며, 화장실이나 많은 편의 시설들이 생겨서 여행이나 답사하기에는 지금이 훨씬 더 편리해졌을 것이다. 그리고 우린 그것이 우리의 삶이 과거에 비해 분명 나아졌다고 말 하는 지표로 여기며 그렇게 당연시하고 있다. 그러나 그렇게 해서 얻은 것만 있고 잃은 것은 없을까? 아님 잃은 것은 우리가 얻은 것에 비해 정말 작고 보잘 것 없는 것이었을까?
책에 있는 동백 호텔과 선운사 사이에 있다던 마을은 이미 사라진지 오래고, 당산제나 당산 나무는 어디에 있는지 찾기는커녕 물어보기도 힘들게 되었다. 그리고 그것들이 사라진 자리에 다른 시, 군에서 보내 왔다는 나무들이 어디 먼 곳에서 입양되어 와 아직 적응이 덜 된 강아지 새끼마냥 덩그러니 명판 하나씩 끼고 들어서 있었다.
나무고 꽃이고 다 이름표를 달고 있는 풍경이 나에겐 너무나도 무서운 풍경이었다.
나무가 그냥 나무이면 안 되고 꽃이 그냥 꽃이면 안 되는 걸까? 나무에도 꼭 내가 무슨 나무인지 이름이 있어야 하고 꽃에도 나는 무슨 꽃이며 어떤 효능이 있어야 하는지 알려 줘야만 하는 것일까? 그게 그렇게 중요한 것일까 ?
그러고 보면 어쩌면 예전에 그 인심 좋았다던 마을의 주민들이 바로 저 주차장 앞의 식당 주인들이 되었을지 모른다. 또 저 입구에 줄줄이 늘어서서 서로 원조를 외치는 풍천 장어 식당의 사장님들이 바로 그네들일지도 모른다.
갑자기 이런저런 생각을 하자 마치 세기말 공포 영화의 한 장면처럼 소박한 채색의 수채화 같던 마을과 사람들이 하나 둘 번쩍 번쩍 빛나는 황금색이 되었다가 어느 순간 빛 없는 회색으로 변해버려 무표정하게 변해버리는 세상이 상상되었다.
어쩌면 우리가 잃는 게 얻는 것 보다 많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봄의 선운사, 가을의 선운사
책의 고창 선운사 편의 첫머리는 “선운사 동백꽃”으로 시작한다. 답사를 한 시기가 4월초였고 부안에서는 동백이 흔히 볼 수 있는 꽃은 아닌지라 이번 선운사 방문에서 동백을 볼 수 있을까 하는 데는 회의적인 생각이었다.
오는 길에 차에서 검색을 해보니 이 지역에서 동백은 보통 4월말이나 5월이 되어야 핀다고 해서 분명 동백을 보기엔 이를 것이라 생각했는데 이상기온으로 날씨가 많이 따뜻해서인지 이미 많은 수의 동백꽃이 피어 있었고 오히려 몇몇은 이미 그 붉은 꽃잎이 색채를 잃고 시들시들 지고 있을 정도였다.
결혼을 하고 처음 2년여는 신랑을 따라 여수에서 살았었다. 또한 신랑의 고향이 부산인지라 동백꽃은 심심찮게 봤다고 할 수 있다. 여수에서는 오동도, 부산에서는 동백섬의 동백꽃이 전국적으로 유명한데 선운사의 동백꽃은 이 두 곳과 다른 것이 우선 나무가 내가 알고 있던 동백나무라고 생각이 들지 않을 정도로 크고 오래된 나무였다.
수령이 대략 500년이 넘었다고 하니 그 크기가 짐작이 되는데, 다른 곳이 말 그대로 동백나무 군락이라 부른다면 이곳은 정말 동백나무숲이라고 칭할 만 하였다.
하지만 이런 울창한 숲과 같은 동백나무보다 나는 이제 선운사를 대표하는 것이 꽃무릇과 상사화라 부르는 꽃이 아닌가 싶다. 예전이나 지금이나 봄에 동백꽃 축제를 하기는 하지만, 이제 그 규모나 성대함 면에서 가을의 상사화 축제가 더 크고 관광객도 배는 많은 것 같다.
붉은 꽃무릇과 상사화는 가을에 선운사 입구부터 도솔산의 중턱까지 어느 곳에도 볼 수 있는 꽃이다. 작년 축제기간 방문했던 선운사 올라가는 길은 정말 붉은 꽃무릇과 사이사이에 핀 하얀 상사화로 가득 찬 말 그대로의 꽃밭이었다. 그때에 선운사에 비하면 오히려 동백만 몇몇 피어있고 아직 겨울의 그림자가 그대로 남은 채 앙상한 가지의 속살들을 들어낸 나무들이 가득한 지금의 선운사는 뭐랄까 조금 조용한 샌님 같은 느낌이었다.
선운사를 방문한건 사실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작년에도 그리고 그 전에도 선운사를 자주 찾아 왔었다. 시어머니가 독실한 불교 신자이기도 하거니와 시부모님이 유달리 여행을 좋아하셔서 전국에 안 가본 산사가 없을 정도이다. 그래서인지 남편도 어딜 가자면 유난히 사찰 방문을 좋아한다. 그리고 남편 말을 빌리자면 사찰이 들어선 곳 치고 경치고 산수고 좋지 않은 곳이 없다나. 물론 나도 동의하는 편이지만.......
작년 가을에 시댁과 친정 부모님과 함께 찾아왔던 선운사는 정말 상사화 천지였다.
계곡을 따라 절로 올라가는 길 가 곳곳이 붉은 꽃무릇으로 카펫을 깔아 놓은 듯 꽃이 피어있었고 찌는 듯한 더위가 한 풀 꺾인 초가을의 맑은 햇살과 시원한 바람의 축제는 고즈넉한 절간의 정취와는 약간 거리가 있지만, 어찌됐던 보는 것만으로도 아름다움과 생동감이 넘치는 광경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래서인가 이른 봄의 뭔가 덜 피어난 동백꽃보다는 화려했던 지난 가을의 붉은 꽃밭이 더 생각나는 시간이었다.
죽음에 남겨진 살아 있는 글씨
주차장을 지나 계곡 옆으로 잘 정비된 길을 따라 오르다 보면 제일 먼저 볼 수 있는 것이 선운사에서 입적하신 승려들의 부도와 탑비로 가득 찬 밭이다.
보통 승탑(僧塔) 또는 부도(浮屠/浮圖)라고 부르는 것은 불교에서 승려의 유골이나 사리를 봉안한 묘탑을 일컫는다. 불교에서는 세 가지 성스러운 보배인 불(佛), 법(法), 승(僧)을 모시는데 이 가운데 승보(僧寶)로 공경 받는 덕망 높은 고승들이 입적(入寂:승려의 죽음)하시면 화장 할 때 나온 사리와 유골을 넣어 탑비를 세운다고 한다.
그런데 보통 탑비의 비문은 당대 제일의 문장가가 글을 짓고 명필가가 글을 써서 비석에 승려의 행적을 새기는데, 선운사엔 조선 최고의 명필이자 문장가의 한 사람인 추사 김정희가 새긴 백파선사의 비문이 있다.
선운사를 몇 번이나 왔음에도 전에는 한 번도 이쪽 길로 들어선 적이 없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여기가 어딘지를 모른다고 해야 맞을 것이다.
어느 절을 가도 있는 그냥 그런 비석들의 무덤인 줄로만 알고 있었는데, 태어나서 처음으로 ‘승탑밭’ 이라는 곳에 들어가 보았다.
주말이라 산사에 제법 많은 사람들이 몰린 날임에도 길 바로 옆 승탑밭을 들어가는 길은 사람 하나 없이 정말 한적하였다. 불과 20여 미터 떨어진 곳임에도 사람들로 북적거리는 길을 떠나 너무나도 조용한 것이 흔히 말하는 속세를 떠났다는 느낌이 이걸 것일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딸아이와 손을 잡고 오래된 노송들 사이로 난 길을 조금 걸어 들어가자 낮은 기와 담벼락에 너머로 승탑밭이 보이기 시작하였다. 내 가슴께 오는 낮은 담벼락이 아기자기하게 이어져 있고 그 담벼락과는 사이에 어여쁘게 자리한 단아한 원형 모양의 입구는 눈썰미가 낮은 내 눈에도 참으로 소박하고 예쁘게 보였다.
그리고 무엇보다 반가운건 선운사 승보박물관으로 옮겨 갔다기에 빈자리만 덩그러니 남아있으리라 생각한 백파선사비가 비록 모작인지는 몰라도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는 것이었다.
덕분에 비록 서예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까막눈이지만 그 글씨가 주는 느낌이 어떠한지 자세히 살펴 볼 수가 있었다.
추사 김정희에 대해서는 어린 시절부터 학교에서 꾸준히 들어왔고 또 종종 책에서 그의 그림과 글씨를 사진으로 봐왔으나 이렇게 눈으로 직접 보고 만져볼 수 있기는 처음이었다. 물론 진본 비석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기에 책에서 이야기하는 추사체를 살렸다는 감탄스러운 도공의 숨결까지는 느낄 수 없었지만 힘 있어 보이는 획과 언뜻 무질서하게 보이지만 한 걸음 떨어져 보면 석비 전체를 가득 메워 단단한 느낌을 주는 글씨들의 향연이 이른 봄날의 햇살처럼 나를 눈을 부시게 만들었다.
이런 걸 보면 예술의 힘이란 긴 세월이라는 물리적인 시간과 시대에서 시대를 관통하여 도도하게 흐르는 그 장대한 힘을 느낄 수 있게 해준다. 누군가의 죽음으로 만들어진 이 탑비가 후대의 우리에겐 기나긴 시간을 건너 온 문화 예술의 실체적인 모습으로 직접 체험 할 수 있게 하는 이 아이러니한 진실이 참 재미있게 느껴졌다. 그리고 굳이 이 탑비에 새겨진 것과 같은 이름 있는 누군가의 뛰어난 예술작품이 아니더라도 “시간”이라는 정과 “자연”이라는 망치에 세공되어 세월의 흔적을 자연스럽게 보여주는 돌탑과 비석들을 보고 있노라면 “색즉시공 공즉시생(色卽是空 空卽是色)”이라는 반야심경(般若心經) 한 구절이 고승의 해박한 설명 없이도 가슴에 살며시 스며드는 기분이었다.
아는 만큼 보이는 선운사
승탑밭을 다시 돌아서 나와 계곡을 따라 오르니 길 왼편으로 곧 선운사를 만날 수 있었다.
지금의 선운사는 잘 정비된 계곡을 중심으로 양쪽에 산책로가 참 예쁘게 만들어져 있다. 선운사로 올라가는 쪽에서 보자면 오른편으로는 옛 흙길을 깨끗하게 정비해 놓아 산길을 오르는 즐거움을 느낄 수 있고 다리 건너 왼쪽의 길은 주위보다 약간 높게 풀 밭 위로 나무로 만든 낮은 다리와 같은 길을 만들어 걷는 사람도 산뜻하고 또 자연도 보호 할 수 있게 해 놓았다.
특히 왼쪽 산책로는 가을에 오면 앞서 이야기 했던 붉은 꽃무릇과 상사화, 그리고 이름 모를 들꽃들이 길 좌우에 가득 차서 흔히 말하는 꽃길을 걷는 기분이 든다.
그러고 보면 어린 시절의 기억에는 여름이면 형제들이랑 고창에 사는 사촌들과 같이 이 선운사 계곡에 와서 몸 담그고 놀며 시원한 수박도 먹고 밥도 해 먹고 고기도 구워 먹으면서 놀았던 기억이 있다. 절 옆에서 고기를 구워 먹었다니, 지금 생각하면 참 어이없는 일이기는 하지만 그 때엔 어렸던 나도, 그리고 어른들도 여름철 계곡 옆 취사에 대해 별다른 경각심 없이 당연한 듯이 생각했던 것 같다.
그러나 그 시절에 비해 지금은 교통도 편해졌고 또한 계곡도 훨씬 깨끗하게 잘 정비 되어 있지만 허락되지 않은 곳에서 취사하며 노는 것은 삼가야 할 행위라는 인식이 우리 모두에게 잘 갖춰져 있는 것 같다. 아마도 이런 점 하나 하나가 우리의 시민의식이 점점 선진화 되어가고 있다는 증거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오른편에 높은 담장이 나타나고 그 담장 위 다람쥐를 보며 오랜만에 산책을 즐기다보니 어느 듯 선운사 입구라 할 수 있는 천왕문(天王門)이 나왔다.
천왕문은 불교에서 부처님의 세계를 지키는 사천왕(四天王)을 모신 곳으로 일종의 모든 사찰의 대문이라 부를 수 있는 곳이다. 동쪽의 持國天王(지국천왕), 서쪽의 광목천왕(廣目天王), 남쪽의 증장천왕(增長天王), 북쪽의 다문천왕(多聞天王)이 있고 앞서 이야기한 불교의 삼보(三寶)를 지키시는 문이라 한다. 맞배지붕이고, 2층 구조로 되어 있어 특이했다.
나는 선운사의 천왕문 바로 옆에는 천왕문을 지나지 않고 경내로 들어갈 수 있는 샛길이 하나 있는데 거기로 들어간다. 예전에 딸아이가 좀 더 어렸을 땐 무섭게 보이는 천왕문으로 들어가는 걸 싫어해서 그 옆길로 들어갔었는데 계단이 없어 유모차를 끌고 들어가기에 편했고 또 그 길로 담을 지나서 들어가면 널찍한 너덜바위가 놓여 있어 지친 발걸음을 멈추고 잠시 앉아서 쉬기에도 참 좋다. 나는 천왕문 보다는 늘 이 조그만 샛길을 애용하는 편이다.
선운사 경내로 들어서면 제일 먼저 볼 수 있는 건물이 바로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 53호인 만세루이다. 앞면 9칸, 옆면 2칸 규모의 민흘림기둥이 받친 맞배지붕집인데 특이하게 산사의 정문 쪽이 아니라 대웅전 쪽을 바라보며 서 있고 앞이 벽 없이 트여있는 낮은 누각 형식의 강당 건물이다. 여기에는 별도로 천장을 만들지 않고 서까래를 그대로 노출시켜 만든 연등천장으로 지어졌다.
한쪽이 시원스레 다 트여있고 다탁이 놓여 있다. 아마 차도 팔고 그러는 것 같은데 한 번도 여기서 차를 마셔본 적은 없지만 대웅전을 바라보고 있는 곳이라 꽤 차를 마시는 운치는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든다.
보물 제 290호인 선운사 대웅보전은 신라 진흥왕 때 처음 세워진 것으로 전한다. 그 후 신라와 고려 시대를 거치면서 절의 흔적만 남은 것을 조선 성종 3년(1472)에 행호선사라는 분이 다시 일으켰는데 그것이 정유재란 때 불타 그 후 광해군 5년(1613)에 새로 지은 것이라고 한다.
그러고 보면 올해가 2017년이니 건물 나이가 최소한 400살은 되었다는 것이다.
지붕처마를 받치기 위해 만든 얇은 기둥 위의 장식구조가 기둥과 기둥사이에도 다포양식으로 꾸며져 있고, 모로단청까지는 문양이 부재 전체를 채우지 않으며, 서까래의 경우 끝부분, 보나 창방, 평방 등의 가로부재는 부재의 양쪽부분에만 머리초 문양이 들어갔고, 가운데는 긋기단청으로 마감된 단청이다. 색이 바래고 화려하진 않지만 아름답다.
내부에는 소조비로자나삼불좌상이 있는데, 보물 제 1752호이다. 비로자나불을 중앙으로 좌측에는 약사불과 우측에는 아미타불의 삼불상이다.
비로자나불은 원래 왼손의 집게손가락을 펴서 바른손으로 감싸 쥐고 바른손의 엄지손가락과 왼손의 집게손가락을 서로 대는 지권인 모양인데 여기에 있는 비로자나불은 지권인의 한 형태인 듯 하다. 좌우에 있는 아미타불은 중생의 신앙심이나 성품의 깊이에 따라 9등급으로 나누어 교화하여 구제한다는 의미의 9품인 수인형태를 하고 있다.
대웅보전에서 가장 유명한 것은 바로 “대웅보전(大雄寶殿)” 글씨가 쓰인 현판이다. 이 현판은 대웅전이 새로이 지어진지 1년 후인 광해군 6년(1614)에 선운사를 재건하는데 후원을 하신 원준(元俊)이란 분이 쓰신 것으로 석봉체의 글씨로 현존하는 조선시대 대웅전의 편액 중 최고의 작품으로 평가 받는 것이라고 한다. 확실히 앞서 탑비에서 봤던 추사체에 비해 한석봉 특유의 각체에 따른 정직함과 엄격함이 보이는 글씨였다.
그 그런 엄격함이 대웅보전의 위치와 품위에 잘 어울리는 것 같아 여러모로 다시 보게 되는 현판이었다. 아래에 대웅전 현판 너머로 얼굴만 보이는 불상은 보물 제 1752호인 소조비로자나삼불좌상이다.(좌).(6층석탑:우측)- 기단의 4면과 답신부의 각 몸돌 모서리마다 기둥모양이 새겨져있다.
유형문화재 제29호로 지붕돌 밑면에 5단씩의 받침이 있고 처마 끝이 가볍게 들려있다. 원래는 9층이었다는데 3층이 소실되었다고 한다. 안타까운 우리나라 문화재를 우리가 잘 보존할 의무가 있어야겠다고 느꼈다.
관음전 – 대웅보전 옆에 있는 것으로 정면3칸, 측면 3칸의 맞배지붕으로 꾸미지 않은 자연목 그대로의 배흘림기둥을 가진 건물이다. 내부에는 보물 279호로 지정된 금동지장보상좌상이 있다.
조사전- 정면 5칸, 측면 3칸의 자연목 배흘림기 둥으로 받쳐진 맞배지붕 건물이다.
단조로운 주심포양식으로 주화문양과
화문양이 섞여 그려진 모로단청이며
세살창이다.
영산전- 정면 5칸, 측면 3칸의 자연목 배흘림기 둥, 자연석 장주기단, 맞배지붕을 가지며 빗살창이다. 사방으로 얇은 자연목 기둥이 처마를 받치고 있는 것이 아슬해 보이기도 했다. 주불은 석가모니부처님.
명부전- 선운사에 있는 대부분의 지붕형태가 맞배지붕이다. 정면5칸 측면3칸의 주심포양식의 맞배지붕이다. 이 곳은 죽은자가 심판을 받는 곳으로 내부에는 지장보살이 있다.
보이는 만큼 느낀 선운사
비록 두 시간 정도의 짧은 나들이를 겸한 선운사 탐방이었지만 참으로 많은 것을 새롭게 보고 느낄 수 있는 시간이었다. 거의 매년 찾아오다 시피 했던 선운사이고 어쩌면 가장 짧게 머물다 간 시간이지만 그 어느 해 보다 많은 것을 본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아직 덜 깨어난 계절은 잎이 나지 않은 마른 가지로 충분히 느낄 수 있었지만 수줍게 꽃무리를 맺기 시작하는 벚꽃과 자라나는 풀들은 아우성은 이미 겨울은 지나가고 이제 봄이 활짝 기지개를 필 시기임을 여실히 깨닫게 해주었다.
일주문을 뒤로하고 주차장으로 오는 길에 다시 길게 늘어선 노점상을 보게 되었다. 저마다 먹을 것과 마실 것을 파느라고 시끌벅적하고 뒤편으로는 모아 놓은 쓰레기들이 눈을 찌푸리게 하였다. 산사에 별로 어울리지 않는 광경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는데 남편이 그랬다
“너무 각박하게 그렇게 생각 하지만. 절간이 원래 그래야 하는 거야. 종교란 것도 결국 사람이 잘 살자고 하는 것인데 저들도 먹고 살자고 하는 거잖아. 그러면 되는 거 아냐? 그리고 원래 절 앞에는 일부러 걸인이 머물던 자리를 만들어 주었다고 하잖아. 절을 찾는 불자들이 한 푼이라도 시주하여 현생에 덕을 쌓을 수 있게 말이야. 그게 불교가 다른 종교랑 다른 점이기도 하고 말이야. 당신도 덕 쌓는 것이라 생각해.”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곰곰이 이런저런 생각을 해 보았다. 예전의 있었음직한 고즈넉함과 평화로움을 이제 산사에서 찾기는 힘들지만, 어찌되었던 여전히 절은 그 자리에 있었고 많은 것을 품고 있었다.
비록 불교를 종교로 삼지 않더라도 절이라는 곳은 이 땅에 사는 우리들에게 매우 친숙하고 가까운 곳임에 틀림없다. 지금 내가 살고 있는 부안에서만 하더라도 때가 되면 벚꽃을 보러, 산책을 하러, 맑은 공기를 마시러 등등 이런 저런 이유와 함께 내소사와 개암사를 찾지 않는가!...
특히 옛것의 정취를 고스란히 간직한 산사는 회색빛 나는 시멘트의 거친 숲에서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보다 많은 것을 돌아볼 수 있게 해주는 것 같다.
집에서 가까워서 자주 다녔던 선운사였지만 그때는 그저 산과 사찰의 향기를 맡고자함이 컸었다. 하지만, 한국역사와 문화의 수업을 듣고 다시 찾은 선운사는 내게 마치 영화 ‘마이너리티 리포트’의 탐크루즈처럼 내 눈이 가는 곳마다 내 뇌가 스캔하여 여기는 다포양식을 한 대웅보전이라고 세세하게 설명이라도 해주듯 나에게 아주 친근하게 다가오는 것이 나 자신을 감탄하게 만들었던 시간이었다. 4월 첫째 주여서 조금의 동백꽃은 보았지만, 그래도 올 가을이 되어 꽃무릇과 상사화가 붉게 물들 계절이 오면 나는 다시 선운사를 찾고 싶다. 그땐 좀 더 여유를 가지고 도솔산 등반도 해 볼 예정이다. 그때는 도솔암의 내원궁, 마애불, 극락보전도 꼭 보고 와야겠다. 그땐 더 많이 보이고 더 많이 느낄 수 있게 되기를 희망해본다.
첫댓글 네 좋습니다. 사진을 못올려서 아쉽지만..
도량은 마음 씀의 크기라는 뜻으로 썼네요..ㅎㅎ
도량(道場)은 도장이라 쓰고 도량으로 읽는답니다.
교수님, 진짜 사진이 안올라가네요. 헉!!
블로그는 올라가던데.... 다음에는 블로그로 해야 할까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