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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이시습지’는 공자의 논어 첫머리에 나오는”학이시습지 불역열호(學而時習之 不亦說乎)”를 인용한 말이다.
우리나라 최초로 대학교와 지역 트레일 단체가 합심하여 탐사한 이 길은
강릉원주대학교 옆 강릉여행자플랫폼 강릉수월래에서 출발하여
오죽헌과 선교장, 매월당 김시습기념관, 허난설헌 생가마을을 지난다.
죽헌저수지의 물버들 숲길도 그림처럼 아름답지만,
강릉의 자연과 역사와 미래를 함께하는 우리나라 선비문화의 종합 선물세트와 같다. / 바우길
학이시습지 불역열호 學而時習之 不亦說乎
子曰 “學而時習之, 不亦說乎? 有朋自遠方來, 不亦樂乎? 人不知而不慍, 不亦君子乎?”
자왈 “학이시습지, 불역열호? 유붕자원방래, 불역락호? 인부지이불온, 불역군자호?”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배우고 때때로 그것을 익히면 또한 기쁘지 아니한가?
친구가 먼 곳으로부터 찾아온다면 또한 즐겁지 아니한가?
남들이 알아주지 않더라도 성내지 않는다면 또한 군자답지 아니한가?”
구간지기 선유심님의 리딩으로 학이시습지 길 출발... (오전 10:10분)
얼굴을 죄다 가리니....칭런님인지 정말 모르겠다.....ㅎ
강릉원주대 해람지
마명산 능선길을 지나면서...(오전 10:31분)
마명산(馬鳴山)은 마을 뒤에 있는 제일 높은 봉으로 강릉대학 뒷산 주봉.
동원 최문한공의 말에 의하면 말이 이곳에 와서 울었다고 하여
"말이 와서 운 산"이란 뜻에서 생긴 이름이다.
동원공 (東原公)이 전쟁에 나가 싸우다가 전사를 하자 말이 주인인 동원공과 그의 유품을 등에 싣고
이곳에 와 울자 후손들이 공이 타고 다니던 말 울음소리를 알고 달려와 보니
전사한 동원공이 말 위에 있자 그를 이곳에 묻어 묘를 쓰고 유품도 같이 묻었다 한다.
또 죽헌리 마정(馬井 - 말우물)에서 나온 용마가 이산에 와서 울었다고 하여 마명산(馬鳴山)이라 했다.
崔文漢墓碑
강원도 강릉시 지변동의 마명산에 있는 고려 후기 문신인 최문한(崔文漢)의 묘비.
최문한은 충숙왕의 부마이며 고려 말에 국운이 다하자 강릉으로 낙향한 후에 강릉최 씨 시조가 되었다.
[1799년 강릉에 거주하는 최문한의 자손들이 최문한 묘지의 표석으로 묘비를 세웠다.
강원도 강릉시 지변동의 유천재사(楡川齋舍)가 있는 마명산 자락에 있다.
받침돌 위에 높이 180㎝, 두께 13㎝, 폭 90㎝의 몸돌을 세우고 그 위에 머릿돌을 얹었다.
비석 제목은 ‘고려국부마도위최공묘비명병서(高麗國駙馬都尉崔公墓碑銘幷序)’이다.
비문은 정범조(丁範祖)가 지었고, 글씨는 이정운(李鼎運)이 썼다.
느릅내 마을 삼거리에서 잠시 휴식을...
江陵-八名堂
강원도 강릉에 구전되어 내려오는 8곳의 명당터.
강릉의 8명당 터는 모두 내와 산을 끼고 있어 집터로서는 가장 좋은 곳에 위치해 있다.
1. 운정동 배다리에 있는 이통천(李通川)의 집터
현재 선교장(船橋莊)이 있으며, 남향받이로 경포천과 경포의 넓은 들을 바라보며 주산(主山)과 안산(案山)을 끼고 있다.
2. 남문동 경방에 있는 최준집의 집터
남향받이로 강릉 시내로 흐르는 남대천과 내곡동의 넓은 들을 바라보며 성산주령 산줄기 끝에 있다.
3. 사천면 판교리 이설당의 집터
남향받이로 앞에는 사천의 넓은 들(하평들)과 사천천이 흐르고, 뒤에는 지네 형상의 산줄기가 지나간다.
4. 강동면 상시동리 이참봉의 집터
강동면 면소골 위쪽에 있는 집터로 닭 둥지 형국인데, 영동고속도로가 생기면서 집이 없어졌다.
집 앞으로는 시동천[와천]이 지나가고, 집 뒤로는 산줄기가 이어졌다.
5. 유천동 아랫 느릅내에 있는 강재선의 집터
토끼가 달을 바라보는 형국으로 꽃방석 터라고 하는데, 동향인 집터 앞에 위촌천이 흐르고 있다.
6. 사천면 덕실리 박기동(朴起東)의 집터
북향으로 집 뒤에는 산 능선이 이어지고, 앞으로는 덕실리, 노동중리, 석교리, 판교리의 넓은 들과 사천천이 펼쳐지고 있다.
7. 구정면 학산리에 있는 정주교의 집터
동향이며 학산 마을로 흐르는 학산천을 바라보고 있으며, 산자락 끝에 있다.
8. 죽헌동의 핸달에 있는 김복기(金福起)의 집터
북향으로 죽헌의 넓은 들과 죽헌천을 바라보는 집터인데, 죽헌저수지가 생기면서 물에 잠겼다.
느릅내[楡川]
강원도 강릉시 유천동에 있는 자연 마을.
예전에 마을로 흐르는 냇가(위촌천 하류)에 느릅나무가 많이 자라 생긴 이름이다.
이 내는 위촌천으로 성산면 위촌리에서 흘러와 죽헌저수지로 흐른다.
마을은 땅재봉에서 마명산으로 이어지는 산줄기가 있어 이 줄기를 기준으로 윗 느릅내, 아랫 느릅내로 나눴다.
느릅내 한가운데는 강릉의 4주 산과 경포의 4주산 가운데 하나인 땅재봉이 있고,
땅재봉 북쪽 줄기 끝에는 위촌천이 흐른다.
땅재봉은 삿갓을 엎어 놓은 형상으로 생겼는데,
영험한 산이라 하여 다른 지역 사람들이 묘를 쓰기 위해 밤에 몰래 썼으며,
또 급하게 쓰다 보니 봉분도 하지 않고 그냥 땅속에 시신을 묻고 간 묘들도 많이 있었다고 한다.
느릅내 마을로 흐르는 내를 따라 올라가면 성산면 위촌리가 되고,
내를 따라 아래로 내려가면 죽헌동 원퉁이(죽헌저수지), 경포호가 된다.
땅재봉 동쪽 줄기 밑에는 평평한 바위에 새겨진 바둑판이 있고,
그 옆에는 남자의 성기 모양이 붙어 있는 남근석과 여자의 성기 모양이 붙어 있는 여근석이 있는데,
이 바위를 건드리면 느릅내 처녀총각들이 바람이 난다고 하여 이 바위를 건드리지 못하게 하였다고 한다.
느릅내는 윗 느릅내와 아랫느릅내 마을로 나눠졌는데,
아랫느릅내 앞에 있는 죽일에는 논을 메워 거대한 주택단지가 되었다.
위촌천 渭村川
강원도 강릉시 성산면 위촌리로 흐르는 하천.
위촌천(渭村川)은 성산면 위촌리 마을 가운데로 흐르는 하천이어서 생긴 이름이다.
위촌천은 경포호로 흐르는 죽헌천의 상류가 되며 황계(璜溪)라고도 하는데,
황계는 중국 감숙성(甘肅省)에서 발원하여 황하(黃河)로 흐르는 물줄기인데,
마을로 흐르는 물줄기가 이와 비슷하다고 하여 생긴 이름이다.
위촌천의 물줄기는 두 줄기인데, 한 줄기는 위촌리 안쪽에 있는 사실이재 밑에서 발원하여 지재를 지나오고,
또 한 줄기는 멍애재 밑에서 발원하여 골아우를 지나온다.
이 물이 솔안에서 만나 마을 가운데를 지나 수붕구, 웃느릅내(유천동), 죽헌저수지를 지나 경포호로 들어간다.
신록으로 뒤 덮인 그늘에서 잠시 휴식을....
쉬는 동안 구간지기 선유심님의 친절한 설명이 있었다.
죽헌 저수지....
학이시습지길 중.....공포의 언덕길...
작은 깔딱 고개이지만.....제법 호흡을 거칠게 만드는 언덕이다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과 함께 잠시 휴식을...
동구밖 과수원 길 언덕에 서 있는 듯 한 캡님...
점심 식사 후 일정을 설명해 주고 있는 지기님...(오전 11시 43분)
감자아빠. 캡, 사라 님...
후미에서 수고하신 수정님
강릉오죽한옥마을
한옥은 예로부터 작위적인 형태가 아닌 자연을 관조하며 주위의 환경요소와
어울리도록 지었기 때문에 주위의 경관요소를 거르지 않는 곳에 집을 짓되
그곳에서 나오는 재료를 사용하여 그곳의 지세에 맞는 형태의 것이 되도록 하였다.
초가의 선은 뒷산의 모양을 닮았고 기와의 선은 양끝을 잡은 상태에서 자연스럽게 늘어진 새끼줄의 선을 표현하며,
처마는 후림과 조로를 두고 용마루의 가운데를 처지게 하여 자연스러운 형태를 나타나게 하여 유연성을 품고 있다.
강릉오죽한옥마을은 이러한 한옥의 특징을 최대한 살려 자연스럽고 언제 보아도 정겨운 공간으로 조성하였다.
비록 기교 있는 장식으로 화려하지는 않지만, 재료 본연의 장점을 최대한 살려 담백함과 순수함을 나타내었으며,
마을 곳곳에 심어진 대나무의 경관은 바라보는 것만으로 마음이 차분해지고 심신의 안정을 찾을 수 있다.
또한, 조선의 대표학자 율곡 이이가 태어난 집으로 유명한 오죽헌과
강릉한옥마을을 연계하여 율곡의 사상을 전파할 수 있는 인성 교육장을 운영하며,
다양한 전통문화체험을 통해 전 세계인에게 한옥의 우수성과 전통성을 알리는 매개체가 될 것이다.
옛 선조들의 삶의 지혜를 보존하고 과거와 현대를 잇는 강릉의 대표적인 문화공간으로 자리매김하겠다.
식사 후.... 오죽헌 모임 장소로 가고 있는 칭런, 미수기,용지님 뒷모습...(오후 12:39분)
오죽한옥마을 입구에서...
오만 원과 오천 원이 되고 싶은 두 사람...
강릉 오죽헌(江陵 烏竹軒)
강원도 강릉시 죽헌동에 있는 조선 중기의 주택 별당 건물.
조선 시대 상류 주택의 별당 사랑채로 사용되던 전통 건축물로, 신사임당과 율곡 이이(李珥)가 태어난 곳이다.
‘오죽헌’이라는 이름은 이이의 사촌인 권처균(權處均)의 호에서 유래했다.
권처균은 외할머니인 용인이 씨에게서 집을 물려받았는데,
집 주위에 줄기가 손가락만 하고 색이 검은 대나무[오죽(烏竹)]가 많이 자라는 것을 보고 자신의 호를 오죽헌이라고 정하였다.
그리고 호를 다시 집 이름에 붙이면서 이 집이 오죽헌이 된 것이다.
1963년 1월 21일 보물 제165호로 지정되었고,
2021년 11월 19일 문화재청 고시에 의해 문화재 지정번호가 폐지되어 보물로 재지정되었다.
오죽헌은 조선 세종 때 문신인 최치운(崔致雲)[1390~1440]이 지었다.
오죽헌 뒤쪽에는 원래 고택이 있었으나 정화사업 시 모두 헐어내고 지금은 사랑채 일부만 남아 있다.
사랑채는 5량 팔작지붕 형식으로 행랑과 부엌을 3량 맞배지붕으로 하여 이어 붙였다.
강릉 오죽헌은 신사임당, 이이가 태어난 역사적인 건물로, 우리나라 주택 건축물 중 가장 오래된 건물 중 하나이다.
식사 후.... 오죽헌 앞에 모여서 오후 발걸음을 시작한다 (오후 1시 : 3분)
메타쉐콰이어 길 앞에서 잠시 설명을 듣는다.
경포생태저류지 (鏡浦生態貯留池)
강원도 강릉시 죽헌동에 있는 경포호 수량 조절을 위해 조성한 생태 저류지.
경포생태저류지 조성은 녹색 도시 조성 사업의 일환으로 경포 습지가 조성되면서
경포 호수로 유입되는 수량을 조절하기 위해 2009년부터 공사가 시작되었다.
2009년부터 2015년까지 경포생태저류지 공사가 진행되었는데,
경포호 유입 하천인 경포천(鏡浦川)[강릉시 죽헌동 일원]에 생태 저류지를 조성하고,
주변 환경을 정비하여 시민 편의 시설인 산책로, 꽃밭 등을 조성하였다.
2010년 31만 9000㎥에 호안 및 토공(土工) 공사를 실시하였고,
2011년 군정교(郡丁橋) 확장, 방류 수문 및 수량 조절보 설치, 2013년 저류지 조성 1단계 공사를 준공하였으며,
2014년부터 2015년 2단계 공사로 친수 공간 조성 공사를 진행하였다.
경포생태저류지는 오죽헌(烏竹軒)과 선교장(船橋莊) 사이에 있는 경포천과 경포천 주변 농경지에 조성한 생태 하천이다.
저류지 중심을 가로질러 메타세콰이어를 심어 산책로를 조성하였다.
산책로 주변으로는 유채꽃과 코스모스 등을 심어 봄가을로 만개한 꽃을 감상할 수 있다.
거북이님을 당겼는데...고물 카메라의 한계이다...
선교장 앞 배다리를 건너오면서...
강릉 선교장( 江陵 船橋莊)
강원도 강릉시 운정동에 있는 고가(古家). 국가민속문화재이다.
1967년 4월 20일 국가민속문화재 제5호로 지정되었다.
이 지방 명문으로 알려진 이내번(李乃蕃)이 처음으로 살기 시작하여 대대로 후손들이 거처하는 집인데,
열화당(悅話堂)·안채·동별당(東別堂)·활래정(活來亭) 등 모두 4채가 있다.
가장 오래된 안채 주옥(住屋)은 당초에 주거를 정한 때의 건물이라고 전하나 확실하지 않다.
사랑채인 열화당은 1815년(순조 15)에 오은거사(鰲隱居士) 이후(李后)가 건립한 것이며,
활래정은 그 이듬해 세운 것을 증손인 이근우(李根宇)가 현재의 건물로 중건하였고,
동별당은 약 50년 전에 새로 건립한 건물이다.
안채는 동편에 있으며 주옥의 평면구조는 ㄱ자형으로서, 동쪽 끝이 부엌이고 건넌방은 서쪽에 있다.
안채와 행랑채 사이에는 담을 쌓아서 막았으며,
행랑채는 남쪽에 있고 서쪽으로 사랑채에 출입하는 솟을대문이 있다.
사랑채는 높은 석축 위에 서있고 동별당은 안채의 동쪽 전면에 있는데 2층으로 된 높은 석축 위에 서있고,
맞은편에 서별당이 있었으나 지금은 터만 남아 있다.
활래정은 대문 밖인 선교장 입구에 있는 큰 연못 옆에 세워진 정자로서,
연못 속에 돌기둥을 세워 주위에 난간을 돌렸으며, 팔작지붕에 겹처마의 납도리집이다.
매월당 기념관을 스쳐지나간다.
기념관 안에는 김시습의 매월당 5언율시 유필이 새겨져 있다.
一鉢卽生涯(일발즉생애) 바랑 하나에 생애를 걸고
隨緣度歲華(수연도세화) 인연 따라 세상을 살아가오.
笠重吳天雪(입중오천설) 삿갓은 오국 하늘의 눈으로 무겁고
鞋香楚地花(혜향초지화) 신발은 초국 땅의 꽃으로 향기롭소.
是山皆有寺(시산개유사) 이 산 어디에나 절이 있을 터이니
何處不爲家(하처부위가) 어디인들 내 집이 아니겠느냐.
他年訪禪室(타년방선실) 다른 해에 선실(禪室)을 찾을 때에
寧禪路岐賖(영선로기사) 어찌 길이 멀고 험하다고 탓하겠느냐.
강릉 해운정 (江陵海雲亭)
강원도 강릉시 운정동(雲亭洞)에 있는 조선 중기의 정자.
해운정은 1530년(중종 25) 어촌 심언광이 강원도감찰사로 있을 때 건축한 상류 주택의 별당이다.
자연석 초석 위에 25㎝의 네모기둥을 세우고 초익공의 포작을 얹은 후 팔작 기와지붕의 해운정을 완성하였다.
강릉 해운정은 1963년 1월 21일에 보물 제183호로 지정되었고,
2021년 11월 19일 문화재청 고시에 의해 문화재 지정번호가 폐지되어 보물로 재지정되었다.
海雲亭詩
조선 중종조 문신인 어촌 심언광의 별당에 걸려 있는 시문 현판.
해운정에는 명나라 사신인 공용경(龔用卿), 이이(李珥), 송시열(宋時烈), 박광우(朴光佑),
김창흡(金昌翕) 권숙(權潚), 심순택(沈舜澤), 이 허위(李憲瑋), 한정유(韓廷維),
윤봉구(尹鳳九), 채지홍(蔡之洪), 이민서(李敏叙), 일완(日暖) 낙중(樂仲), 조경망(趙景望),
김진상(金鎭商), 송규렴(宋奎濂), 송익필(宋翼弼) 등 유명 인사들이 지은 시 40수가 현판에 새겨져 있다.
[창작경위]
공용경은 사신으로 왔다가 어촌공에게 해운정의 경치를 읊은 시를 지었고,
이이는 외향으로 자주 강릉에 와 어촌공과 교류하면서 지었으며,
송시열·김창흡 등의 경우도 강릉 해운정에 와 어촌공의 행적과 주변경치를 시로 읊었다.
[내용]
첫째, 해운정 주변의 경치를 읊은 시,
둘째, 어촌 심언광의 행적을 기리는 시,
셋째, 해운정을 방문했었던 유명 인사들의 시를 차운한 시,
넷째, 명나라 사신과 그가 지은 시를 차운한 시 등이다.
대표적인 한시는 다음과 같다.
해운정 승지에서 술잔을 드니 勝地逢盃酒
흥겨운 이 자리 싫지를 않네 斯遊也不嫌
그 누가 알았으랴 천리밖에서 那知千里外
어진 주인 훌륭한 손 함께 얻을 줄 得値二難兼
안개는 서서히 걷히어 가고 海色初收霧
솔바람 사르르 더위 삭히네 松風不受炎
한퇴지 옛 일을 생각하면서 何須韓吏部
가냘픈 찻잔을 살며시 드네 茗盌捧纖纖 ― 이이(李珥) ―
거울같이 해맑은 평평한 호수 湖水平如鏡
아스라이 바다로 흘러 들어가 冥冥滄海通
호수빛 되비치어 언덕 뿌옇고 潮光迷岸白
고기잡이 불빛은 파도를 타네 漁火射波鴻
난간에 의지해 새들을 보고 依檻看歸鳥
기슭에 다다르니 기러기 나네 臨磯數去鴻
시골에 머물며 얻는 것 많아 村居原自得
갈매기야 늙은이의 뜻을 알 테지 知是對鷗翁 ― 공용경(龔用卿) ―
임영이라 부르는 신선땅에는 臨瀛爲號是仙城
세상을 등저도 정만은 살아 掉脫平生在世情
발아래 별이 있고 천상에는 글 脚下有星天有句
안중에는 흙도 없고 땅도 없어라 眼中無土地無成
잔잔한 물결 위엔 가을 머물고 波光瀲灩秋長住
나그네 물에 비쳐 거꾸로 가는 듯 橋影橫斜客倒行
이곳에서 개벽의 뜻 깨치고 나니 到此始知開闢意
인심과 물색이란 허명뿐인걸 人心物色總虛明 ― 송익필(宋翼弼) ―
농사짓는 궁벽한 시골이지만 稼穡村居僻
고기가 뛰노는 바다와 이웃해 魚蝦海市通
가까이엔 맑고 푸른 호수가 있고 近臨湖水碧
곁에는 우뚝 솟은 정자도 있어 高起畵堂紅
구름처럼 산허리 감돌고 싶고 欲與雲歸峀
기러기 사모하는 마음 알고파 寧知弋慕鴻
한평생 계획을 못다 이룬 채 未成終老計
이내몸 늙었음을 슬퍼하노라 悲殺主人翁 ― 박광우(朴光佑) ―
듣건대 해운정이 뛰어났다지 聞說湖亭勝
그 언제 사절들과 서로 통했나 何年漢節通
별들은 바다에서 반짝거리고 星從少海耀
구름은 해를 안아 붉그레 하네 雲擁太微紅
남긴 글 있어서 더욱 즐겁고 賸喜留珠唾
치렁한 물가에서 읊조려 보네 還敎咏渚鴻
그 어찌 사신을 다시 볼 건가 黃華那復見
한 세상 다 보냈을 늙은 일 텐데 天地一衰翁 ― 송시열(宋時烈) ―
궁궐 앞 별들이 반짝거리고 紫極前星耀
신선이 노닌 땅 사신이 밟아 靑丘使節通
정자에 다다라 바다를 보니 亭臨滄海碧
무지개 타고서 신선이 오네 仙降霓雲紅
북녘에는 봉황이 날아 내리고 北落空施鳳
동산에는 몇 번이나 큰 글 지었나 東山幾賦鴻
사선의 발자취 아득도 한데 皇華今寂寞
글하는 늙은이 세월 슬퍼해 千古泣騷翁 ― 송규렴(宋奎濂) ―
해운정이 영동에 있음을 아는데 亭在嶺東表
사신과의 인연은 어찌 맺었나 何緣華使通
청수 한 시문과 호수의 달빛 淸詞湖月白
편액에는 바닷구름 붉게 비치네 彩扁海雲紅
세상은 어지럽기 짝이 없는데 天地今胡羯
소식이 끊어진 지 몇 해 이런가 星霜幾塞鴻
비통한 마음을 누를 길 없어 摩挲悲慨意
제일 먼저 우암을 떠올려 보네 先獲有尤翁 ― 김진상(金鎭商) ―
학동에서 여장을 준비한 지가 鶴洞雙巾屢
어느덧 네 해가 흘러갔구나 居然四歲違
바닷구름 가린 곳서 옛 집 찾으니 海雲尋舊舘
호수에 비친 달 산 넘어가네 湖月送新輝
등불을 밝히고 정담 나누며 敍濶靑燈灺
늙음을 논하자니 흰머리뿐이네 論衰黑髮稀
돌아갈 기약 하니 꽃이 지잖아 廻期桃未落
살이 오른 붕어 떼만 외로이 쫓네 好趁鯽魚肥 ― 김창흡(金昌翕) ―
어촌 심언광과 그 후손들의 인적 교류의 대체적인 윤곽을 확인할 수 있으므로
강릉 지방에서 하남서원 건립 과정에서 빚어진 재지사족 간의 시비(是非)에 대한 실상을 파악하는데 자료적 가치가 있다.
경포천을 지나면서...
鏡浦川
강원도 강릉시 경포호로 흐르는 하천.
경포천은 성산면 위촌리 골아우에서 발원하여 죽헌동 북평촌[뒷뜨루]의 넓은 들을 지나
7번 국도가 지나가는 군정교 쪽에 와서 홍제동 개실 저수지에서 흘러온 물과 만나
운정동의 해운정 앞으로 흘러 이곳에서 성산면 송암리에서 흘러온 운정천(뒷내)과 만나 경포호로 흐른다.
경포천(鏡浦川)은 경포의 중심지로 흐르는 내여서 생긴 이름인데, 죽헌천·앞 내(前川)·정동천(丁洞川)이라고도 한다.
경포천은 경포 지역으로 흐르는 물줄기 가운데 제일 큰 물줄기로
성산면 위촌리 골아우 안쪽에 있는 사실이재와 멍애재에서 발원한다.
이 물줄기가 위촌리의 옥천폭포, 방학교, 수붕구, 유천동의 느릅내, 죽헌동의 원퉁이[죽헌 저수지],
핸달, 지변동의 못올 등을 지나 죽헌동의 넓은 들로 온다. 죽헌의 넓은 들을 지난 경포천은 경포호로 빠진다.
경포천의 상류에는 죽헌 저수지와 못올의 넓은 들이 있고, 하류에는 7번 국도가 지나가고,
그 아래쪽에는 경포호와 못안이 등의 넓은 들과 초당의 숲, 죽도봉, 강문포구가 있다.
경포천 하류 주변에는 사람이 걷는 산책로와 자동차가 다니는 경포로, 난설헌로가 있다.
경포대 -김홍도
뒷바대
강원도 강릉시 운정동에 있는 습지.
뒷바대는 경포호 동쪽에 있는 초당동 사람들이 경포호 주변의 넓은 밭(현 경포호 습지지역)을
‘마을 뒤에 있는 밭’이라는 뜻에서, ‘뒷밭에’가 ‘뒷바대’로 변하여 생긴 이름이다.
뒷바대는 운정천과 경포천이 합친 하류지역에 있고, 운정동의 해운정과 경포호 사이에 있다.
뒷바대에서 조금 내려가면 깨밭둔지·경포대가 되고,
운정천을 따라 서쪽으로 가면 배달이가 되고, 남쪽으로 가면 포남동·교동이 된다.
뒷바대는 죽헌천과 운정천이 합쳐져 경포호로 들어가는 지역으로 땅이 기름져 벼 수확량이 풍부하다.
오후 햇살이 상당히 따가웠다.
소나무 숲길이 인상적인 달빛 산책로....
허난설헌 생가 숲 속에서 인형극을 관람하고 있던 아이들과 부모님들....
그 이름도 거룩한 홍길동전 인형극이었다. (아이들 틈에 함께 하고 싶었다)
멍~하니 서 있는 수정님을 몰래 당겨 본다.
하늘에서 내려다본.... 초당동 사진 (펌)
草堂洞
강원도 강릉시에 속하는 초당동·강문동을 관할하는 행정동.
조선 시대 광해군 때에 초당 허엽은 당파 싸움에 휘말려 화를 입을 때
산수가 수려하고 풍경이 좋은 현 안초당 연화지 자리인
강원도 강릉시 난설헌로 193번 길 1-16 [초당동 475-3] 지역에 기거하였다.
여기서 조선 시대의 유명한 여류 시인 허난설헌과 최초의 한글 소설을 쓴 허균이 태어났다.
마을이 번성하자 허엽 선생의 호를 붙여 초당이라 칭하게 되었다고 전한다.
후에 초당동은 강릉 최 씨 성을 가진 사람들이 많이 살게 되었는데,
강릉 최 씨는 이곳 초당동이 최 씨 선조들이 “초당(草堂)”을 짓고 살았다 하여 초당으로 불리게 되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또 조선 시대 선조 때 공조참의를 지낸 유동양(柳東陽)이
이곳에 초당을 짓고 후진을 가르쳤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도 한다.
이와 같이 ‘초당’의 명칭 유래는 여러 가지로 전하고 있으나
일반인들이 가장 널리 받아들이는 유래는 초당 허엽과 허균, 허난설헌 등 허 씨 집안과 관련된 것이다.
초당동은 상고 시대에는 예의 속국으로 있었으며
기원전 127년에 창해군으로 편입되었고, 한무제 때에는 임둔의 땅이었다.
기원전 30년에 동예의 땅으로 계승되어 고구려 때에는 하슬라, 신라 때에는 하서소경의 땅에 속하였다.
고려 때에는 동원경의 속현으로 이어져 조선 시대에는 진관부에 속하게 되었다.
초당동은 원래 남일리면에 속하였다가 1913년 건너말, 골하, 안초당을 합하여 초당리라 하여 군내면에 편입되었다.
1916년 군내면이 강릉면으로 개칭되었고, 1931년 강릉읍으로 개칭되었다.
1955년 9월 1일 강릉읍이 경포면, 성덕면과 병합하여 강릉시로 승격됨에 따라
행정동인 초당동으로 되면서 초당, 강문 2개의 법정동을 관할하게 되었다.
초당동은 허난설헌의 생가가 있는 마을로 알려져 있으며 허균이 어렸을 때 자란 동리로 그 역사적 의미가 깊다.
현재 허균의 생가라고 전하는 한옥이 있고,
허균의 누나이며 여류 시인인 허난설헌을 추모하여 1992년에 세운 ‘허난설헌 시비’가 있다.
주요 문화 유적으로는 허균 생가터(강원도 문화재 자료 제59호)와
최상순 가옥(강원도 문화재 자료 제61호)이 있으며, 철기 시대 고분과 신라 고분군도 분포하고 있다.
초당두부와 강문 진또배기가 유명하다.
초당동에서 만드는 두부를 ‘초당 두부’라고 하여 품질 좋고 맛있기로 유명한데,
만들 때 간수로 소금 대신에 바닷물을 이용하는 점이 특징이다.
매년 음력 설날에는 마을 어르신을 모시고 합동 도배식을 하며,
4월에는 난설헌 허초희 문화제, 9월에는 교산 허균 문화제를 개최한다.
現 초당동 거리
강릉원주대학 홍보관에 도착해서....(오후 2:31분)
초당 미식로드 축제에서 1시간을 함께 참여하고 추첨도 했는데...
어케 앞 54.뒤 56은 당첨이 되면서 내 번호 55번은 절묘하게 지나 가는지....
꽝이 된 추첨권을 국장님에게 선물로 주었다
따가운 햇살과 기온이 30도까지 올라 간 제법 무덥 던 날씨....
불구하고 웃으면서 즐겁게 함께 한 바우님들 모두 수고하셨습니다.
슬픔도 지나고 나면 (참좋은시절OST) - 이문세 어디쯤 와있는 걸까 가던 길 뒤돌아 본다 저 멀리 두고 온 기억들이 나의 가슴에 말을 걸어 온다 그토록 아파 하고도 마음이 서성이는 건 슬픔도 지나고 나면 봄볕 꽃망울 같은 추억이 되기에 서글퍼도 그대가 있어 눈부신 시간을 살았지 오래전 내 그리움에게 가만히 안부를 묻는다 서러워도 그대가 있어 눈부신 시간을 살았지 오래전 내 그리움에게 가만히 안부를 묻는다 다시 내게 불어온 바람 잘지낸다는 대답이려나 흐느끼는 내 어깨 위에 한참을 머물다 간다 또다시 내 곁에 와줄까 봄처럼 찬란한 그 시절 가난한 내 마음속에도 가득히 머물러 주기를 어디쯤 와있는 걸까 가던 길 뒤돌아 본다 저멀리 두고 온 기억들이 나의 가슴에 말을 걸어 온다 그대를 만나 따뜻했노라고 그대가 있어 참 좋았노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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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일찍 찾아 온 여름 더위에도 즐거운 걸음이 느껴집니다
저는 지금 이탈리아 피렌체에서
이 글을 봅니다 ^^
감사합니다~걷자님 ^^
즐겁고 건강한 여행 무사히 마치시고...
편히 돌아 오시길....^^
허브님~♡
부러움을 한아름 안고오소서~♡
보고싶고 궁금했던 후기~
눈팅만 하고
이제사 인사를 남기네요~
꽤 더웠던 날씨였는데
수고 많으셨어요~^^
이번 구간 걷는 내내 카메라가 말썽을 부려
카메라를 경포천에 던지고 싶었다는...ㅎ
어르고 달래서 겨우 찍을 수 있었습니다.
무더워 지는 날....건강 잘 챙기시길....
걷자님~!
많은글들로
유식하게 하심에 박수를 보냅니다~^^
함께 걷는 발 걸음.....언제나 즐겁습니다.
즐거이 봐 주시고 댓글에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