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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평안의 나날 원문보기 글쓴이: 람미
***간증: 1530. [역경의 열매] 이건숙 (1-30) 등단 40년 만에 PEN문학상 ‘모두 하나님의 계획’
목사 아내로, 교회 사모로, 시댁 식구 등
많은 사람 돌보며 40년간 30권의 책 집필
문학성과 기독교 주제 문학 인정에 감읍
소설가 이건숙 사모가 지난달 26일 서울 서대문구 자택 서재에서 40년 넘게 기독교 문학에 집중한 여정을 말하고 있다. 신석현 인턴기자
문단에 소설가란 이름을 달고 등단한 지 꼭 40년 만에 2021 PEN문학상을 받았다. 수상작인 단편집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구멍’을 심사한 김지연 김유조 소설가는 심사평에서 “남편과 외동딸을 구멍 속에 넣어 묻어버린 뒤에 엄습한 구멍 공포증에서 마침내 벗어나 진짜 아름다운 구멍인 영생의 장소, 천국을 갈망하는 인간의 갈구가 그려져 있는 깊은 사유와 성찰의 내면 심리가 꼼꼼히 기록돼 있다”고 평했다.
순간 이 자리까지 와서 서 있는 내 인생의 뒤안길이 눈앞을 스쳤다. 모질게 불어오는 거친 풍우대작이 없었다면 멀고도 험한 좁은 협로의 절경도 없을 터이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통과하는 역경을 통해 힘차게 살아온 지난날의 뒤안길이 아득하게 눈물로 흐려진 눈앞에서 출렁였다.
목사의 아내로, 교회의 사모로서 성도들 그리고 고구마 줄기처럼 주렁주렁 매달린 시부모와 시동생 시누이 등 많은 사람을 돌보면서 40년간 출판된 책들이 30권에 달한다. 그것도 한곳에 머물면서 집필한 작품들이 아니다. 남편 신성종 목사의 험난한 목회지를 따라서 태평양을 넘나드는 정신없는 생활이었다.
1993년 국민일보에 연재한 대하소설 ‘바람 바람 새바람’은 3부작으로 1부만 규장에서 출판됐다. 목회지를 미국 LA로 옮기는 상황에 나머지 원고는 사라져버려 2부 3부를 애타게 찾다가 포기했다. 이 대하소설은 버리자 하고 잊고 지내던 터에 우연히 그간 끌고 이사 다닌 짐들을 정리하는 중에 세월의 때를 뒤집어쓴 원고 뭉치를 버리려는 쓰레기에서 찾아냈다. 순간 하나님의 손길을 뜨겁게 느끼며 울컥했다. 어떻게 이 원고가 그간 나를 따라다녔는지 신묘한 미스터리이고 기적이었다. 그 순간 내가 왜 소설가가 되었는지 하나님의 줄을 보았다. 내 가슴을 꽁꽁 묶어 끌고 가는 바로 그분의 손이다.
PEN문학상을 받는 내게 모두들 하는 인사말은 이렇다. “벌써 받았어야 하는 상인데 너무 늦었어요.” 만나는 사람마다 이런 말을 하기에 내 나이 팔순이 넘어 상을 받으니 동정으로 하는 말인가 하여 살짝 부끄러움도 있었다.
하지만 이런 인사말에는 힘이 났다. “한국문학에서 크리스천 순수문학으로 가장 큰 문학에게 올리는 상입니다. 그간 애써온 기독교 문학을 일반 문단이 인정한 것이니 당당하게 받으세요.”
내가 고집스레 물고 늘어진 내 작품의 문학성을 인정했다는 유명 소설가의 축하에 드디어 해냈구나 하는 안도감을 느꼈다. 이제 나와 기독교 주제 문학이 인정받았구나 하는 쾌재가 터졌고 이건 순전히 하나님의 계획이라고 고백할 수밖에 없다. 하나님이 그간의 수고를 위로해주기 위해서 한구석에 숨겨진 나를 끌어내 세운 것이라는 확신이 와서 그저 감읍할 뿐이다.
존경하는 평론가 김봉군 교수는 “이건숙 작가는 우리 기독교 소설계의 정금이다. 한국 문학사에서 기독교적 서사에 신실한 기독교 소설가는 손꼽을 정도다”라고 평했다. 많은 위로와 힘이 된다.
약력=1940년생, 서울대 사범대 독어과 졸업, 미국 빌라노바대 도서관학 석사, 1981년 한국일보 신춘문예 당선, 현 크리스천문학나무 주간.
* [역경의 열매] 이건숙 (1) 등단 40년 만에 PEN문학상 '모두 하나님의 계획'
* [역경의 열매] 이건숙 (2) "목사 사모가 소설 작가라니…" 불평과 충고 이어져
* [역경의 열매] 이건숙 (3) 신춘문예 당선 전화에 "신난다, 호두나무 장롱 산다"
* [역경의 열매] 이건숙 (4) 상금이나 받고 끝날 줄 알았던 공모… '소설가' 이름 달다
* [역경의 열매] 이건숙 (5) 소설가로 세우신 주님 뜻 깨달으며 문학세계에 첫발
* [역경의 열매] 이건숙 (6) '문맥' 동인 결성… 고된 훈련이지만 악착같이 배워
* [역경의 열매] 이건숙 (7) 새벽엔 작품 구상, 모두 잠든 후엔 번개 같은 집필
* [역경의 열매] 이건숙 (8) "누가 너더러 교회 나가라고 했어" 호통치며 볼기짝
* [역경의 열매] 이건숙 (9) 유치원 일찍 들어갔다가 아버지의 애물단지 되다
* [역경의 열매] 이건숙 (10) 신앙 두텁고 다재다능 어머니… 자녀 교육에 전심전력
* [역경의 열매] 이건숙 (11) "여자도 많이 배워야"… 남다른 어머니의 교육열
* [역경의 열매] 이건숙 (12) "그 학교 떨어진 건 기적… 하나님의 큰뜻 있는 듯"
* [역경의 열매] 이건숙 (13) 철저한 신앙훈련으로 10대의 나를 예비하신 주님
* [역경의 열매] 이건숙 (14) 성경과 내 삶을 연결… 문학적 기초 닦은 여고시절
* [역경의 열매] 이건숙 (15) 슈바이처처럼 의료선교 꿈꾸다 "험난하게 여자가…"
* [역경의 열매] 이건숙 (16) 친구 따라 성가대 가입… 유치부서 찬송·율동 가르쳐
* [역경의 열매] 이건숙 (17) 사윗감 반대하던 어머니 "귀가 커 장수는 하겠네"
* [역경의 열매] 이건숙 (18) 유학 떠나게 된 신 전도사, 약혼부터 하자고 막무가내
* [역경의 열매] 이건숙 (19) 고단한 생활에 영양부족으로 2.2㎏ 작은 아이 출산
* [역경의 열매] 이건숙 (20) 산욕열로 죽을 고비 넘긴 후 유학간 남편 따라 도미
* [역경의 열매] 이건숙 (21) 군용 가방공장 취직… 시각장애인 틈에서 재봉틀과 씨름
* [역경의 열매] 이건숙 (22) 낮엔 육아와 교회 일, 밤엔 양로원서 간호 보조로
* [역경의 열매] 이건숙 (23) 가발 사업 시작한 지인 "돈 많이 줄 테니 도와줘"
* [역경의 열매] 이건숙 (24) 가게 데리고 나간 아이들 거리에서 "Come in, Try the wig"
* [역경의 열매] 이건숙 (25) 돈 욕심에 "우리 한국 가지 말고 장사나 해요"
* [역경의 열매] 이건숙 (26) 이제 겨우 살만한데… 교수직 버리고 목회 결심한 남편
* [역경의 열매] 이건숙 (27) 목회 현장서 얻은 소중한 글감, 소설로 다시 태어나
* [역경의 열매] 이건숙 (28) 부족한 재정 메우려 몸 혹사… 새벽 기도회 도중 쓰러져
* [역경의 열매] 이건숙 (29) 기독 작가의 글은 생명의 양식… 성도들 삶 문학으로 승화
* [역경의 열매] 이건숙 (30·끝) 주님이 명한 내 소명은 성경과 문학 사이 다리 놓는 것
정리=우성규 기자 mainport@kmib.co.kr
***[역경의 열매] 이건숙 (2) “목사 사모가 소설 작가라니…” 불평과 충고 이어져
교인들, 보수 교단 풍토 속 사모 상 요구
“글은 좋은데 주제가 기독교라…”며 조언
작가 사이서도 작품성 놓고 은근히 훈수
소설가 이건숙(앞줄 왼쪽 세 번째) 사모가 1989년 옛 소련 모스크바에서 열린 국제펜클럽대회에 참석한 문인들과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목사의 아내가 소설을 쓴다니 지청구도 많이 들었다. 사모란 남편의 뒤에 있는 듯 없는 듯 숨어 살아야만 한다는 보수 교단 풍토에서 소설을 쓴다니 부닥치는 저항은 아주 거셌다. 특히 작가들 사이에서도 친해지면 은근히 다가와 아픈 충고를 했다. “이건숙씨, 이번 글도 또 하나님이 어떻게 했다는 결론을 지었지. 그러니 작품성이 없잖아. 문학은 종교성을 띠면 끝장이라고.”
어느 땐 하나님을 믿지 않는 평론가가 신랄하고 신경 거슬리는 평을 쓰기도 했다. 내가 주제로 삼은 기독교의 심오한 진리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참으로 이상한 일은 가톨릭이나 불교문학은 모두 수용하면서도 유독 우리 개신교는 그간 많이 나온 간증 문학 탓인지 문학성이 없다는 선입견을 주면서 수군거림의 대상이 됐다. 너무나 큰 장벽이었다.
교회 안에서도 핍박은 많았다. 중책을 맡은 시무장로 한 분이 교인들 보는 앞에서 당당하게 충고를 했다. “사모님이 소설을 쓰신다고요? 성도들은 삶에 쫓겨서 성경 읽을 시간도 없는 판에 그걸 누가 읽는다고 쓰려고 하셔요.”
그뿐인가. 어느 귀여운 여성 집사는 내게 다가와 생글생글 웃어가면서 이렇게 강요했다. “이 잡지에 실린 소설, 우리 신성종 목사님이 쓰신 걸 사모님 이름으로 내셨지요? 사모님이 어떻게 이런 글을 쓰시겠어요. 그렇지요? 어서 저에게만 맞는 말이라고 살짝 고백하세요.” 너무 엉뚱한 말에 나는 그저 웃기만 했다. 그게 자신의 말에 동의한 거로 아는지 그녀는 아주 신명난 표정을 지었다.
그뿐인가. 내 작품은 대부분 연재물이었는데 큰마음 먹고 ‘예수 씨의 별’이란 장편을 전작으로 써냈다. 글을 쓰면서 스스로 감동해 울면서 쓰는 작품은 많지 않은데, 이 장편은 중간중간 많은 눈물을 흘리며 집필했다. 연재와 전작 쓰기의 차이점을 그제야 알았다. 그런데 이 소설이 사람들에게 잘 읽히지 않았다. 어느 날 사랑하는 젊은 부부 집사가 다가오더니 조용한 카페로 가자고 해서 나는 그들과 대화를 나누려고 따라나섰다. 그들은 충고하기 위해서 나를 데리고 나왔던 것이다.
“사모님! 우리 부부가 이렇게 간청하면서 하는 말이니 신중하게 들어보세요. 사모님이 너무 아까워요.”
“네? 무슨 소린지 모르겠네요.”
“사모님을 위해서 충고합니다. 지난 일주일간 우리 부부는 사모님이 쓰신 장편 ‘예수 씨의 별’을 정독했어요. 그리고 밤새워 우리 부부가 잠을 설쳤어요. 사모님이 아까워서요.”
“전 그게 무슨 소린지 전혀 감이 잡히지 않는데요.”
“사모님은 기독교 주제를 떠나서 작품을 쓰면 대성할 분이에요. 아주 기막히게 글을 잘 쓰시는데 그 달란트가 이렇게 기독교를 중심으로 쓰시니 주목을 못 받는 거라고요. 너무 아까워요. 우리 부부가 내린 결론은 꼭 한 번만이라도 기독교를 떠난 주제를 가지고 써보시면 책도 잘 팔리고 성공할 것입니다. 기독교인들은 소설을 읽지 않아요. 지금 유명세를 타고 있는 작가들 별 것 아니에요. 사모님의 문제점은 바로 이것이니 제발 저희 말을 따라 한 번만 그렇게 써보세요. 히트할 것입니다.”
내겐 땅이 흔들릴 정도의 큰 충격이었다.
***[역경의 열매] 이건숙 (3) 신춘문예 당선 전화에 “신난다, 호두나무 장롱 산다”
생계 위해 가구점 아들 과외 하게 된 후
우연히 가게 들렀다 마음에 드는 농 발견
농 값 마련 궁리하다 신춘문예 공모 도전
소설가 이건숙(오른쪽) 사모가 1981년 한국일보 신춘문예 시상식에서 가족들과 함께 서 있다. 맨 왼쪽이 남편 신성종 목사.
목사의 아내가 어떻게 소설가가 되었는가.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당선할 당시 내 생활은 정말 가난의 구렁텅이였다. 시부모 생활비, 시동생 둘의 대학등록금, 그리고 우리의 생활비까지. 남편이 벌어오는 돈으로는 감당하기 어려웠다. 몽땅 그달 월급을 봉투째 바쳐도 모자라 동네를 돌면서 돈을 꾸러 다녀야 했다.
초등학교에 다니던 아이들은 겨울 간식인 사과를 먹고 싶다고 야단이지만 그걸 살 돈이 없었다. 어쩌다가 딱 한 알, 사과를 사 오면 남편까지 둘러앉아 모두 침을 꼴깍거렸다. 그걸 잘게 저며서 새끼 새들에게 먹이를 주듯 입에 넣어줘야 했다. 그래도 남편은 미국에서 박사학위를 받았고 나는 석사학위를 가지고 왔는데 생활 기반은 없고 너무 많은 식구가 매달리니 생활을 꾸려나갈 수가 없었다. 먼저 십일조를 떼고 시부모 생활비, 우리가 살 최소한의 연탄과 쌀을 사면 그게 전부였다. 친정어머니가 보다 못해 간장 된장을 담가주고 이따금 밑반찬을 해 나르며 그걸로 어떻게든지 살아보라고 했다.
생계를 위해 나는 중·고생 영어 과외를 할 수밖에 없었다. 그 당시 국제가구점은 서울 을지로 입구에 아주 큰 점포였다. 마침 내가 그 집 아들을 가르치고 있었다. 미국 유학에서 돌아오니 신혼 시절 샀던 농은 없어져 버렸고 장롱 살 돈이 없어 벽에 못을 박고 옷을 걸 수밖에 없었다. 그 상황에서 국제가구점에 들렀더니 묵직하고 단단하게 보이는 호두나무 농이 눈에 확 들어왔다.
“이거 비싸지요?”
그러자 주인 여자는 아들의 가정교사가 물으니 배시시 웃으면서 대답했다.
“선생님이 사시면 원가에 드릴게요.”
“그게 얼만데요?”
“팔십만원만 내세요.”
집에 돌아오면서 나는 계속 중얼거렸다. 팔십만원을 어떻게 마련하지. 내겐 너무 큰 돈이었다. 울적해진 나는 옆에 놓인 한국일보를 펴들었다. 거기 팔십만원의 상금을 준다는 기사가 눈에 딱 잡혔다. 어머머! 팔십만원이면 호두나무 농을 살 수 있는 돈인데! 신문의 광고는 내일이 신춘문예 공모 마지막 날이니 내일까지 우체국 소인이 찍히면 받겠다는 광고였다.
그 순간 나는 지체 없이 남편이 쓰고 있는 흑색 원고지를 꺼내 방바닥에 펴놓고 엎드려 단편을 써 내려갔다. 내 무의식의 세계까지 각인된 미국에서 아르바이트해서 익히 잘 알고 있는 양로원 이야기를 쓰기 시작했다. 내일 아침까지라니 원고를 다시 읽어볼 시간적 여유도 없어서 마구 써낸 단편을 아침 우체국 문이 열릴 때 한국일보로 보내고 까맣게 잊어버렸다.
한 달이 지나 성탄절을 앞두고 한국일보에서 전화가 왔다. 신춘문예에 당선됐다는 전갈이었다. 나는 너무 기뻐서 수화기를 놓고 방바닥에 벌렁 누워 두 손을 머리 위로 힘차게 뻗으면서 흥분한 목소리로 크게 외쳤다.
“나 돈 벌었다. 팔십만원! 그 돈으로 호두나무 농을 사게 되었다. 신난다.”
나를 따라서 어린 두 아들도 내 곁에 나란히 누워 깔깔대고 만세를 불렀다. 남편은 그런 우리를 한심하다는 듯 내려다보면서 한마디 했다.
“소가 뒷걸음질 치다가 쥐를 잡았네. 당신이 뭔 소설을 써.”
***[역경의 열매] 이건숙 (4) 상금이나 받고 끝날 줄 알았던 공모… ‘소설가’ 이름 달다
가구 살 생각만으로 돈 받기만 기다리다
800편 넘는 정성 들인 원고 뭉치 보면서
신춘문예 대단함 느끼며 당선 새삼 실감
소설가 이건숙(왼쪽) 사모가 1986년 직행버스 앞에서 박완서 작가와 서 있다. 박 작가는 사역에 매인 이 사모가 딱하다며 종종 여행길로 이끌었다.
신문사의 면담 요청을 받고 나는 팔십만원을 받을 욕심에 들떠있었다. 혼자 가기 쑥스러워 옆에 살고 있는 선배 언니와 함께 한국일보사에 갔다. 언니랑 돈을 받아 바로 국제가구로 갈 참이었다.
그런데 으리으리하게 큰 사무실에 들어서면서 나는 잔뜩 주눅이 들었다. 문화부장 앞에 앉으니 기자들이 사진을 찍고 야단이다. 겁이 난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어서 그의 주머니에서 돈이 나오기만을 기다렸다. 문화부장은 날카롭게 나를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거기 좀 앉아있다 가라고 했다. 그리고는 원고 뭉치 8개를 내 앞에 턱턱 던지면서 말했다.
“800명 넘는 사람들이 응모해 끝까지 심사에 올랐던 단편들이니 여기서 다 읽어보고 가세요.”
어리어리한 표정으로 불편하게 의자에 등을 대고 앉자 언니도 내 곁에 앉았다. 첫눈에 놀란 것은 원고들 전부가 나처럼 흑색 원고지가 아니고 반짝반짝하는 흰 원고지였다. 게다가 원고지를 묶은 끈이며 치장이 아주 귀티가 나고 정성이 듬뿍 묻어났다. 안을 들치니 글씨도 얼마나 예쁘게 썼는지 오자 하나 없었다. 나는 한 번에 갈겨쓰느라고 마구 오자를 지우고 덧쓰고 야단을 했는데 이들은 정말 다이아몬드를 빚어놓은 듯 돋보였다.
“두 분이 동시 당선입니다. 한 분은 황충상이라고 김동리 소설가가 뽑았고, 당신은 최인훈 소설가가 붙들고 서로 양보를 아니 해서 시간이 걸렸습니다. 우리 측은 원고지 쓰는 것도 엉망이고 제목인 양로원도 ‘양노원’이라고 쓰니 다음 번에 기회를 주고 김동리 소설가가 뽑은 황충상으로 결정하자고 해도 최인훈 소설가가 양보하지 않았어요. 우리더러 오자(誤字)는 편집실에서 잡으면 된다고 고집을 부리니 어쩔 수 없이 신춘문예 사상에 없던 동시 당선이 나왔어요.”
이렇게 해서 나는 소설가란 이름을 달고 문단에 등장했다. 1981년도엔 신춘문예를 행하는 신문이 7개뿐이었다. 그때 당선된 사람들은 모두 이삼십 대 남자들로 나처럼 사십 대 여자가 나온 경우는 희한한 일이었다. 작가란 늦어도 20대에 발굴하는 법인데 내가 41세에 등단했으니 이상한 눈길을 던졌다.
그다음이 문제였다. 신춘문예가 이렇게 대단한지를 나는 그때까지 몰랐었다. 지금은 신문사가 늘어서 많은 신춘문예 작가들이 배출되지만 내가 등단할 당시만 해도 신춘문예 병에 걸린 사람들이 많았다고 한다. 10년에서 20년을 두고두고 응모하는 경우가 허다하다나. 내가 생각하듯 상금이나 받고 끝나는 일이 아니었다. 문예지에서 주관해 당선자들이 모두 모여 대담이 진행됐다. 누구한테 사사했으며 주제와 구성에 대한 질문이 쏟아지고 얼마나 문학 수행을 했느냐는 질문이 주축을 이뤘다. 사십 대 초반에 들어선 여자가 옷도 허름하게 입고 어릿거리면서 저들 틈에 끼어 앉아 어리바리했던 내 모습을 떠올리면 지금도 웃음이 난다.
연이어 여러 문예지에서 단편 청탁이 들어왔다. 제일 처음 청탁은 현대문학에서였다. 그것도 ‘쓰라면 쓰지요’ 하면서 겁 없이 ‘무거운 짐’이란 단편을 보냈다. 단편이 실리니 원고료도 두둑하게 받았다. 하지만 내가 계속 소설을 쓸 수 있느냐 하는 문제를 놓고 고심하기 시작했다.
***[역경의 열매] 이건숙 (5) 소설가로 세우신 주님 뜻 깨달으며 문학세계에 첫발
여자 소설가에 대한 편견 만연하던 시절
은사 이상보 교수의 도움으로 남편 설득
윤남경 작가 만나 소설작법 등 수업받아
소설가 이건숙(왼쪽 네 번째) 사모가 1986년 소설가 박완서(맨 오른쪽) 윤남경(오른쪽 세 번째) 작가 등과 함께 여성 문인 성경반 모임을 하고 있다.
신춘문예로 등단은 했지만, 그때까지 문학을 연구하고 공부한 적이 없었다. 좋아서 읽은 문학 작품들 말고는 전문적 훈련을 받지 않았다. 대학 시절 독문학을 했다지만 원문으로 독일 소설을 읽느라고 사전을 끼고 살았던 기억뿐이다.
그런 나를 하나님은 우선 소설가로 세워놓고 앞을 막고 있는 난관을 돌파하도록 몰아가셨다. 고된 훈련 기간이었다. 네 단계의 문을 통과하면서 하나님이 나를 소설가로 세우기 위해 나와 동행하고 있다는 확신을 하게 됐다.
첫 단계는 주위에서 내가 소설 쓰는 걸 모두 반대하는 분위기였다. 그걸 해결한 것은 내 고등학교 은사 이상보 교수로 나의 교복 시절 국어 선생님이셨다. 그분은 문단에서 알려진 수필가로 남편 신성종 목사가 당시 속했던 대학에서 함께 교편을 잡고 있었다. 그 은사님이 우리 부부를 식사에 초대하고 나의 소설가 활동을 부정적으로 말하는 남편을 질타했다.
‘아무나 신춘문예에 당선되는 것이 아니다. 이건 고등고시 합격보다 더 어려운 관문을 통과한 것이다. 재능 있는 사람을 얼마나 가둬놨으면 나이 마흔이 넘어 등단했겠느냐’ 하면서 나의 스승님은 일장 연설을 하셨다.
집에 돌아오면서 남편은 “당신 하고 싶으면 글을 써 보라”고 허락했다. 그러나 내심 글을 쓸 수 없을 것이라고 믿는 눈치였다.
하긴 그 시절 여자가 소설을 쓴다면 술 담배를 하고 생활이 난잡하다는 선입관을 지니고 있던 시절이라 성도들, 특히 장로님들의 눈치가 차가웠다.
두 번째 문은 이제는 고인이 된 윤남경 소설가와 만남이었다. 윤 권사님은 신문에 실린 당선 소감을 읽어보고는 크리스천이 분명하니 만나자고 했다.
나는 수화기에 대고 이렇게 답했다.
“윤남경이 누구세요? 뭐 하는 분이세요?”
나의 그런 응답에 놀란 그분은 잠시 침묵했다. 70년대를 주름잡던 단편 작가 윤남경을 모르다니. 이 사람이 정말 소설을 쓰는 사람인가 생각했던 모양이다.
“아무튼, 만납시다. 꼭 할 말이 있어요.”
부자들이 사는 별장 같은 서울 종로구 평창동 집에 그분은 살고 있었다. 윤 권사님을 만난 자리에서 나는 이렇게 따지고 들었다.
“성경에 모든 것이 있는데 나더러 무슨 글을 쓰라고 그러세요. 저는 상금이 필요해서 신춘문예에 단편을 냈을 뿐이에요.”
나의 태도에 놀란 그녀는 이렇게 물어왔다.
“사사한 선생도 없었다면 도대체 써놓은 단편이 몇 편이요?”
“하나도 없어요.”
윤남경 소설가는 황당해서 입을 딱 벌리고 머뭇거렸다. 한참 눈을 감고 깊은 기도를 한 뒤에 조용하고 차분하게 입을 열었다.
“하나님이 이 시대에 필요해서 당신을 강제로 끌어냈군요. 성경을 쉽게 풀어쓰는 역할을 하라고 소설가로 내세우셨네요.”
그리곤 몰아가기 시작했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소설 작법을 공부하자고 했다. 자신은 오영수 소설가에게 몇 년간 사사해서 작가가 되었다고 그분 책들을 여러 권 내주면서 정독하고 매주 단편을 써서 오라고 했다. 해서 매주 단편을 써가지고 드나들면서 하나님의 문화를 확장하는 글을 써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됐다.
***[역경의 열매] 이건숙 (6) ‘문맥’ 동인 결성… 고된 훈련이지만 악착같이 배워
40대 늦은 나이에 등단한 문맥 동인들
보고 쓰는 눈 길러주고 문예지에 길 터줘
월간목회 글 연재하며 목사 사모들 애독
소설가 이건숙(가운데) 사모가 지난해 12월 서울 종로구 수운회관에서 열린 2021 PEN문학상 시상식에서 소설부문 상을 받고 있다.
하나님께서 풀어가는 세 번째 단계는 ‘문맥’ 동인 결성이었다. 40대에 소설을 쓰기 시작한 늦깎이들의 모임이었다. 정건영 김용철 신상성 류순하 등 전부 남자였고 나 혼자만 여자였다. 모두 국문학을 전공한 선생님들로 지금은 소설가로 잘 알려진 분들이다. 매달 단편을 써서 각자의 작품을 놓고 토론하고 각 가정을 돌면서 모이기도 했다. 얼마나 작품 비평이 거셌는지 어떤 때는 화가 치밀어 힘들었으나 나로서는 배우는 것이 참 많았다.
저들은 내 생활이 한쪽으로 너무 치우쳐 있다며 인사동에 모였을 적에는 주점으로 나를 데리고 갔다. 주점 안을 한 바퀴 빙 돌면서 구경시키고 나오며 이런 데도 알아야 글을 쓴다고 킥킥거리면서 훈시를 늘어놨다. 그뿐인가. 모임에서 어쩌다 돌아가면서 유행가를 부르는데 내 차례가 오니 난감했다. 교회 울타리에 갇혀 지낸 나는 한 곡도 아는 유행가가 없어서 강하게 도리질을 했다. 저들이 찬송가라도 부르라고 강요해서 내가 좋아하는 493장 ‘하늘가는 밝은 길이’를 불렀더니 일부는 허밍으로 따라 하면서 배꼽을 잡고 웃어댔다.
그래도 배울 욕심에 나는 악착같이 모임에 나가 앉아 모래처럼 저들의 가르침을 흡입했다. 본격적인 문학 훈련이었다. 게다가 저들은 문학과 거리가 먼 나를 위해 단편을 쓰면 꼼꼼하게 봐주고 평하고는 문예지에 다리를 놔주는 역할도 했다. 지면이 귀했던 시절이라 문예지가 친정이 아니면 신춘문예 출신들은 공중에 내던져진 신세여서 자생해야만 하는 시절이었다. 소설문학 한국문학 문학사상 등 여러 문예지에 길을 터주었다. 되돌아보면 문맥 동인들은 내게 소설을 보고 쓰는 눈을 길러주었다.
네 번째 단계는 내가 등단한 때부터 기독교계 잡지들이 쏟아져 나와 지면이 풍성했다. 목사들의 월간지로 유명한 월간목회엔 매달 수필 연재를 10년 가까이 한 걸로 기억된다. 남자들만 읽었던 월간목회에 내 글이 실리면서 목사의 아내들이 읽기 시작했다. 갑자기 여성 독자층이 많아져서 잡지 부수가 늘어났다는 행복한 비명도 들었다. 내가 끼친 영향은 목사와 성도의 뒤에 꼭꼭 숨어있던 목사의 아내들을 밖으로 끌어내서 많은 수가 글을 쓰겠다고 펜을 들었다는 사실이다. 남편이 대전에서 목회할 당시엔 월간목회에 사모의 핸드북이 실리고 있었다. 목사의 아내들이 대전에서 일부러 기차에서 내려 나를 보고 가려고 기웃거리기도 했다. 심지어 유성온천에 단체로 모여 목욕을 하면서 나를 밤에 불러내 목회와 문학에 관해 토론을 하면서 온밤을 보내기도 했다.
사모 핸드북인 ‘사모가 선 자리는 아름답다’는 사모들과 신학생들에게 길잡이가 됐다. 지금은 ‘사모의 품격’(두란노)이란 제목으로 수정 보완해 출판했다. ‘꼴찌의 간증’ ‘이런 때 사모는 어떻게 말할까’ ‘이런 때 성도는 어떻게 말할까’ 등이 월간목회 연재를 통해 출간됐다. 국민일보와 신앙계 등 많은 매체가 콩트나 짧은 소설을 청탁해와 전부 쓰느라 정신이 없었다. 주로 수필이기는 했지만 10년 동안 하나님은 설익은 나를 강권적으로 기초적 글쓰기 훈련을 시키셨다. 의사로 말하면 인턴과 레지던트 훈련을 거친 셈이다.
***[역경의 열매] 이건숙 (7) 새벽엔 작품 구상, 모두 잠든 후엔 번개 같은 집필
교수직 내던지고 목회 뛰어든 남편과
많은 시댁 식구·아픈 아들 돌보면서
낮에 차분히 앉아서 글쓰기 불가능해
소설가 이건숙(뒷줄 왼쪽) 사모가 2006년 남편 신성종 목사 및 충현교회 장로였던 김영삼 대통령 내외와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문제 있는 교회만 맡아서 목회하는 남편 신성종 목사는 언제나 내게 이렇게 말했다.
“나는 하나님이 쓰시는 스페어타이어야. 문제 있는 교회를 맡아서 해결하면 떠나서 또 다른 문제 있는 교회로 옮겨야 해.”
어떤 때는 견딜 수 없이 너무 힘들어서 나도 따지고 든다.
“그러면 어쩌자고 식구들 다 고생시키면서 40세까지 미국에서 그렇게 힘든 공부를 했어요.”
“그래서 목회하면서 그렇게 받은 박사학위를 버리느라고 얼마나 고생을 하고 있는지 당신은 모를 거야.”
철학박사 학위를 받기까지 그는 고도의 지성으로 날카롭게 비판하고 분석하는 훈련을 받았다. 언어 분석을 전공해 상대방의 말을 들으면 의중까지 찍어내 분석할 수 있는 사람이다. 그러니 교수가 딱 어울리는 사람이다. 미국의 종합대학교에서 제대로 공부하느라 무척 고생했다.
40세까지 오로지 공부만 해서 학위를 받고 정교수로 대학에서 가르치다가 신 목사는 어느 날 갑자기 교수직을 내던지고 목회로 뛰어들었다. 하나님의 강권적 역사라고 본인이 고백하니 불평할 수가 없었다. 지금까지도 나는 남편이 그 다양한 지식을 펴보지 못하고 사장되었다는 점을 안타까워하는 사람에 속한다.
남편의 평탄치 못한 목회, 주렁주렁 매달리는 시댁 식구들, 게다가 아픈 아들까지 데리고 글을 쓰는 일은 불가능했다. 낮에 차분히 시간을 확보해 집필한 경우가 드물다. 100편이 넘는 단편들 대부분 새벽기도 끝나고 교인들이 다 흩어진 뒤에 혼자 남아 기도하며 치밀하게 작품 구성을 하며 시작했다. 작은 공책에 꼼꼼하게 구상을 해서 메모를 하고는 식구들이 모두 잠든 뒤 밤 11시부터가 내 시간이다. 자정을 넘어 대개 1~2시까지 자판을 두드렸다. 만약 등단 당시처럼 원고지에 썼다면 감당 못 했을 터이다. 잠을 줄이면서 쓰는 황금 같은 시간이니 온전히 집중해 빠져들었다. 그래서 지금도 구상을 치밀하게 하고 번개처럼 집필하는 버릇이 있다.
다행히 남편은 종달새라 저녁잠이 많다. 내가 글 쓰는 걸 보지 못해 언제 그 많은 글을 써냈는지 모른다. 참으로 감사한 일은 나는 올빼미라 밤중에 깨어있을 수 있었다. 그리고 서너 시간 자는 잠은 아주 깊이 잤다. 그러니 새벽기도도 나가고 글도 쓸 수 있었다. 이런 수면 습관은 고등학교 시절부터 몸에 익은 것이라 지금도 버리지를 못한다.
하나님은 10년간 고된 문학 훈련을 시킨 뒤에 믿기지 않을 정도로 연재할 기회를 주면서 밀고 가셨다. 국민일보에 대하소설 ‘바람 바람 새바람’, 기독신보에 장편 ‘이브의 깃발’, 월간 창조문예에는 4편의 장편 ‘빈 배를 타고 하늘까지’ ‘나는 살고 싶다’ ‘남은 사람들’ ‘멀고도 험한 좁은 길’을 연재했다. 월간 새가정엔 장편 ‘장대 위에 달린 여자’를 연재했다. ‘멀고도 험한 좁은 길’은 나중에 ‘예주의 성 이야기’로, ‘장대 위에 달린 여자’는 ‘사람의 딸’로 보완 수정 출판됐다.
쫓기는 시간에 하나님은 이렇게 연재를 시키면서 글을 쓰도록 하셨다. 계속 써야 하니 멈출 수 없도록 하나님은 강하게 장치를 해놓고 나를 쓰신 것이다. 연재가 아니라면 어떻게 그걸 다 쓸 수 있었겠는가.
***[역경의 열매] 이건숙 (8) “누가 너더러 교회 나가라고 했어” 호통치며 볼기짝
평소 책 좋아하고 가정적인 아버지
당시 지성인들 선호하던 무신론자로
성탄절 잔치 대표로 뽑혀 자랑하자
소설가 이건숙 사모가 1941년 첫 돌에 촬영한 기념 사진. 오른쪽은 판사가 된 오빠.
내 유년의 숲에 보이는 아버지의 서재는 바닥부터 천장까지 사면이 책으로 꽉 차 있었다. 책 좋아하고 낙천적인 아버지였다. 법조인 중에서도 검사였다. 그가 산 시대는 가장 격렬한 전쟁을 통과하는 불운의 시대였다.
아버지는 굉장히 가정적이어서 휴일이면 가족들을 데리고 산속의 호수나 냇가로 가서 낚시를 했다. 지독한 낚시꾼으로 신혼 첫날밤 신혼부부가 사라져서 할머니는 일꾼들과 함께 횃불을 들고 찾아다녔더니 깊은 산속 호숫가에서 신랑이 신부를 곁에 앉혀놓고 낚시를 드리고 있더라는 것이다. 그 정도로 아버지는 낚시를 즐겼다. 내 어린 시절 추억에도 어머니가 예쁘게 만들어 입힌 원피스를 입고 챙 넓은 모자를 쓰고는 물가를 어릿댔던 기억이 생생하다. 냇가에 솥을 걸고 어머니는 언제나 아버지가 잡아 올린 물고기로 매운탕을 끓여 온 식구가 물가에 둘러앉아 밥을 먹었던 추억도 많다. 친정어머니의 특식인 붕어조림은 그 맛이 아주 특이해서 그걸 전수 받은 나는 가끔 지금도 그 엇비슷하게 붕어조림을 해내놓으면 식구들이 환호하기도 한다.
아버지와의 추억 중에 제일 강렬한 것은 교회와 연관이 있다. 모두 교회를 나가지 않는 상태에서 나 혼자 동네 교회를 나가게 됐다. 호기심 많은 나는 아이들이 몰려 들어가는 동네 교회에 갔다가 성탄절 어린이 잔치에서 연극 시작 전에 앞에 나가 인사를 하는 순서를 맡게 됐다. 한글을 읽지 못하는 어린 꼬마에게 주일학교 선생님은 아버지나 어머니가 읽어주면 그걸 외워서 하라고 시켰다. 아마도 네 살이나 다섯 살로 귀엽게 옷을 입은 내가 선생님 눈에 띈 모양이다. 많은 학생 중에 내가 뽑혔으니 나는 너무 자랑스러워 아버지 서재인 2층의 가파른 층계를 기어 올라가서 아버지에게 주일학교 선생님이 써준 종이쪽을 자랑스럽게 내밀었다. 그걸 읽어본 아버지는 나를 아버지 무릎 위에 엎드려놓고 볼기짝을 눈물이 나도록 짝짝 때리는 것이 아닌가.
“누가 너더러 교회에 나가라고 했어. 네 엄마도 교회 못 나가게 하는 판에 네가 왜 거기에 가니.”
아버지는 그 당시 지성인들이 선호하는 무신론자로 하나님이 없다고 야단을 치는 분이었다. 반면에 어머니는 독실한 신자로 교회에서 세례까지 받은 분인데 아버지의 고집에 꺾이고 할머니까지 시집살이를 시키니 꼼짝 못 하고 교회에 다니질 못하고 있는 상황인 걸 어린 내가 어찌 알았겠는가. 어머니가 교회에 보낸 것이 아니고 나 스스로 찾아간 교회를 놓고 어머니와 함께 아버지의 지청구를 무섭게 들은 셈이다. 더구나 엉덩이를 맞은 아픔은 너무 깊게 무의식 속에 각인되어 있다.
나와 교회의 관계는 이렇게 시작됐다. 하나님은 어려서부터 나를 쓰시려고 선택하여 강제로 끌어내신 것이다. 아버지가 이러니 나는 어머니에게 매달려 원고를 전부 외워서 성탄절 전야에 무대 앞에 나가 인사말을 했던 것으로 기억된다.
아버지는 교육열이 대단했다. 서울 덕수궁 근처 검사실에 출근할 적엔 꼭 오빠와 나를 황금정 육정목에 있는 서울사대부속초등학교에 데려다주고 가셨다.
***[역경의 열매] 이건숙 (9) 유치원 일찍 들어갔다가 아버지의 애물단지 되다
어려서 얼굴 희고 눈이 맑아 가둬 키워
담 밑에서 혼자 흙만 가지고 놀기 일쑤
유치원 가선 말도 없이 인형처럼 지내
소설가 이건숙(앞줄 오른쪽 두 번째) 사모의 1944년 가족 사진. 뒷줄이 아버지와 어머니다.
아버지는 밀수업자들을 맡은 검사라 무엇이 그리 위험한지 베게 밑에 권총을 감추고 주무셨다. 안방에서 아버지 어머니 옆에 막내 남동생이 눕고 나란히 나와 오빠가 누워서 잤다. 부엌일 하는 처녀는 다른 방에서 자고 진돗개와 더불어 송아지만큼 큰 개가 집을 지켰다.
초등학교 1학년 때인데 적산가옥인 안방 창가에 자색 목련꽃이 핀 봄날이었다. 머리맡 요강에서 오줌을 누던 나는 목련꽃 옆에 서서 방안을 엿보는 검은 모자를 쓰고 검은 천으로 입을 가린 남자를 보았다. 팬츠도 올리지 못하고 고함을 치면서 엄마 아빠 사이의 이불 속으로 비집고 들어가자 아버지는 베게 밑에서 권총을 빼 들고 문을 박차고 나갔다. 개들이 요란하게 짖어대고 동네 사람들이 모두 깨는 바람에 소란했다. 나는 아버지가 권총을 들고 뛰어나가는 모습이 너무 인상적이어서 아주 어릴 적인데도 아버지 흉내내는 걸 좋아했다.
아버지는 내가 지능이 낮을지도 모른다고 걱정했던 모양이다. 넓은 울안에 갇혀 담 밑 흙을 가지고 놀기만 했으니 완전히 갇혀 지낸 꼴이라 저능할 수밖에 없지 아니한가. 그렇게 가둬놓은 이유는 어려서 무척 얼굴이 희고 눈이 맑았다고 한다. 게다가 어머니는 고운 색의 원피스를 손수 재봉질해 만들어 입히고, 언제나 챙이 넓은 모자를 씌워놓으니 사람들 눈에 인형처럼 예뻐서 어쩌다 밖에 데리고 나가면 사람마다 만져보니까 보물처럼 집안에 감추고 살았던 모양이다. 특히 옆집에 살던 변호사 할아버지는 아침마다 출근할 적에 우리 집 대문 앞에서 기다려 나를 보고야 출근을 했다고 한다.
부모님은 내가 다섯 살 되던 해에 유치원에 보냈다. 일꾼이 자전거 뒤에 태우고 나를 유치원 뜰에서 선생님께 인계하고 갔다. 나는 아침마다 유치원에 가기 싫다고 쪼그리고 앉아 울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일본인 선생님에 모두 일본 아이들 틈에 끼어 앉았다. 나는 벙어리처럼 전혀 말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일꾼이 자전거에서 내려놓으면 그 자리에 그냥 앉아 있다가 선생님이 와서 안고 가면 내려놓은 자리에 나무인형처럼 까닥 않고 앉아 있으니 한 달이 지난 뒤에 어머니를 불러 아이의 지능이 아직 어리니 1년 뒤에 다시 유치원에 보내라고 해서 쫓겨났단다.
그래서 아버지는 몸도 왜소한 내 건강을 위해 무용소에도 보내고 가정교사를 배치해 공부도 시켰다. 어머니는 매일 내 옆에 붙어 앉아 동화를 읽히면서 안달을 했다. 사범부속초등학교는 들어가기 어려운 곳이었으나 아버지는 악착같이 오빠와 나를 거기에 보냈다. 첫 학기에 우등상을 받아왔던 밤이다. 어머니와 아버지는 우리가 잠든 늦은 밤에 소곤소곤 대화를 나누면서 양갱을 드셨다. 우리에게는 이빨이 상한다고 숨겨놓고 꼭 밤이면 두 분이 그걸 드시면서 다정한 대화를 나누신다.
“오늘 건숙이가 우등상을 타왔어요.”
어머니가 자랑스럽게 내 우등상장을 내놓는 모양이다. 나는 자는 척하고 두 분의 대화에 귀를 기울였다.
“그럼 지능이 낮은 건 아니란 뜻이지. 아휴! 이제야 마음이 놓인다.”
저 유치원 퇴학 사태로 나는 아버지의 애물단지였나 보다.
***[역경의 열매] 이건숙 (10) 신앙 두텁고 다재다능 어머니… 자녀 교육에 전심전력
명필에 한문 혼자 터득 뜨개질도 수준급
책 좋아하는 남편과 함께 늘 책 끼고 살아
사별 후 사 남매 모두 법관 만들겠다 다짐
소설가 이건숙(왼쪽) 사모가 1963년 서울대 사범대 졸업식에서 어머니와 함께 서 있다.
어머니는 아버지보다 머리가 좋고 총명한 분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붓글씨도 명필이라 전시회에 가끔 출품도 했다. 지금도 우리 형제들 집에는 병풍 액자 족자 심지어 도자기에 쓴 글들이 유물로 남아있다. 뜨개질도 잘해서 내 옷을 시집간 뒤에도 조끼랑 덧옷까지 손수 떠서 입혔다. 눈이 아주 안 보일 때까지 내가 출판한 책이나 사위가 낸 책 모두를 한 권도 빠짐없이 읽고 평을 하셨던 분이다.
어머니는 한문을 혼자 공부해 터득했고 일찍부터 기독교 신앙을 가지고 교회에 열심히 다니면서 학생들을 가르쳤다고 한다. 선교사의 마음에 들어 어머니를 미국 유학 보내 장차 큰 일꾼으로 쓰려고 수속 중이었다. 그런데 문제는 외할머니였다. 그 당시 여자의 결혼 연령은 16세 후반이었는데 어머니는 20세가 넘도록 결혼을 거부하고 이제 미국으로 유학을 떠난다니 집안 망칠 일이 터졌다고 난리가 났다. 김 진사 댁 외손녀가 저 꼴이라고 친척들이 모이면 수군거리니 창피해서 밖에도 못 나간다고 외할머니는 단식하고 누워버리니 어머니 입장은 난감했다. 책상 위에 가져다 놓은 사진은 일본 유학 중인 법대생이라고 했다. 어머니는 이렇게 가정이 난리를 치니 어쩔 수 없이 사진을 슬쩍 봤다고 한다. 사각모를 쓰고 있는 잘생긴 얼굴에 조금 마음이 흔들렸다나.
어머니가 가르치고 있는 학교에 손님이 왔다고 해서 나가보니 사진의 그 남자가 사각모에 망토를 두르고 현관에 서 있는데 어머니가 위아래로 날카롭게 훑어보았더니 남자 쪽이 머리를 푹 숙여버렸단다.
어머니는 전심전력해서 우리를 가르쳤다. 오로지 우리를 돌보는 것이 주된 일이어서 나는 늘 어머니 옆에서 책을 읽었다. 어머니도 책을 끼고 살았다. 내 책꽂이에는 그 당시 나오는 잡지나 어린이 책들이 늘 쌓여있었다. 아버지 서재에도 책들뿐이고 어머니도 책만 끼고 도니 나는 책을 읽을 수 있는 환경에서 자란 셈이다. 남편도 책을 좋아하니 결혼한 뒤 지금까지 책들 속에 묻혀 살고 있다.
어머니는 명필이고 아버지는 악필이었다. 지금 우리 형제 가운데 첫째와 셋째는 어머니를 닮아 명필이고 나와 막내는 아버지를 닮아 악필이다. 어머니는 아버지가 안고 오는 재판에 관한 서류를 모두 대필해주었던 것으로 안다. 나라 형편이 수상하니 미국으로 유학을 가자고 밤마다 영어를 공부하던 아버지와 어머니 모습이 선하다. 어머니는 살림에 지쳐 아버지 앞에서 까닥까닥 졸면서 아버지의 영어 발음을 잘 따라 하지도 못했다. 그때 미국으로 가족을 데리고 유학을 떠났다면 아버지는 한국전쟁에서 희생물이 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역사에는 만약이 없지 아니한가.
아들 셋과 딸 하나를 데리고 전쟁 후 혼자 된 어머니는 더욱 우리 공부시키는 일에 매달렸다. 아버지처럼 네 자녀를 모두 법관을 만들겠다고 우리 앞에서 다짐했다. 첫째와 셋째는 그래서 법대를 나와 오빠는 판사가 되었고 셋째는 미국 샌프란시스코신학교를 나와 거리 목회로 유명한 목사가 됐다. 유복자인 막내는 아버지를 몰라서인지 집안의 말썽꾸러기로 언제나 저지레를 했다. 가정의 기초가 흔들리니 머리 좋고 예민한 막내는 더욱 힘들었을 것이다.
***[역경의 열매] 이건숙 (11) “여자도 많이 배워야”… 남다른 어머니의 교육열
공부방에 나이에 맞는 책들 채워주고
신문 사설 읽게 해 한문·문장력 길러
오빠는 대학 재학 중 고시에 합격해
소설가 이건숙(왼쪽) 사모가 1962년 막냇동생 졸업식에서 어머니(오른쪽)와 함께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어릴 적 내 집은 늘 책을 읽는 분위기였다. 아버지 서재는 마치 도서실 같았고 어머니는 공부방에 내 나이에 맞는 책들로 채워 주셨다. ‘피터 팬’을 읽고 며칠 밤을 자지 못하고 밤에 창문을 열어놓고 주인공을 기다렸던 유년의 숲이 그립다. 그림자를 두르르 말아 칼로 잘라먹는 마귀할멈 이야기는 얼마나 공포심을 안겨주었던지! 나이든 지금도 어둠이 내리면 그 비슷한 무서움이 불시에 엄습한다. 그 당시 방학 책은 우툴두툴 흑색지라 지우고 다시 쓰면 구멍이 뻥 뚫렸다. 어머니는 거기를 두세 번씩 다른 종이로 땜질해서 보충해 주셨다. 방학이 끝나고 개학에 제출할 적엔 가운데가 불룩 튀어나와서 창피했다.
시계 보는 법을 배울 적에는 얼른 이해를 못 한다고 어찌나 지청구를 들었는지! 따스한 볕에 쪼그리고 앉아 울타리 가장자리에 호롱불처럼 빨갛게 익은 꽈리 무리를 바라보면서 훌쩍였던 장면도 내 기억의 필름에 저장되어 있다. 어머니는 식사 준비를 할 적엔 부엌 한구석에 나를 앉히고 그날 신문 사설을 큰 목소리로 읽으라고 주문했다. 그 시절 사설은 한문이 많이 섞여 있어 내게 한문과 문장력을 길러주려는 어머니의 숨겨진 속셈이었다.
오빠는 대학 재학 중 고등고시를 봤다. 1960년대 초반 국제법에 관한 책이 없었던 시절이라 어머니는 일본어책을 구해 두툼한 대학노트 분량으로 번역해 아들의 손에 쥐여주었다. 이게 직방으로 맞아떨어져 대학 재학 중인 아들을 판사로 만든 어머니의 치열함도 생생하다. 그 놀라운 공책이 S대학 도서관에서 많은 고시생의 손에 옮겨 다니다가 어떻게 사라졌는지 없어졌다.
어머니는 자녀들 넷을 앉혀놓고 언제나 이렇게 말했다.
“아버지 없이 너희를 키우는 일이 참으로 힘들다. 그러니 너희들은 공부를 잘해야 한다. 공부만이 이 가정을 살릴 길이다.”
우리 네 자녀는 그래서 공부에 전력했다. 오빠는 경기고등학교 1학년 당시 학교를 그만두고 검정고시에 응시해 대학시험을 바로 보겠다고 했지만, 어머니는 강경하게 말렸다.
“우리가 아무리 어려워도 그건 허락 못 한다. 네 나이에 맞는 친구들을 사귀는 것이 일생 중요하다.”
고등학교 시절 사귄 오빠의 친구들이 지금까지 서로 어울리는 걸 보면 우리 어머니는 참으로 현명한 분이셨다. 홀로 되어서 딸자식까지 학교에 보내느냐고 친척들의 입방아에 오를 적에 어머니는 내게 강하게 말했다.
“여자도 배워야 한다. 남자보다 더 많이 배워야 한다.”
어린 시절 부모님이 단단히 기저를 닦아준 탓에 오빠와 나는 어려운 환경에서도 공부를 잘했다. 6·25전쟁으로 우리 가정은 터진 웅덩이가 되었지만 나는 갇혀 살던 고인 물에서 흘러나와 냇물을 거치고 강을 따라 넓은 바다로 가서 세상을 배워가며 완전히 놀라운 변신을 했다. 친척들을 만나면 모두 이런 말을 했다.
“어머머! 인형처럼 앙증맞게 예뻤던 저 애가 지금 이렇게 컸어요. 튼실한 여장부가 되었네요.”
그렇다. 나는 전쟁 이후 풀어놓은 망아지처럼 뛰면서 키도 크고 건강하고 몸도 우람해졌기 때문이다.
***[역경의 열매] 이건숙 (12) “그 학교 떨어진 건 기적… 하나님의 큰뜻 있는 듯”
전쟁 중 6학년 월반 후반기엔 성적 일등
모두 경기여중 합격 장담했지만 떨어져
성경 배우는 믿음의 동산 정신여중 입학
소설가 이건숙(오른쪽) 사모가 1955년 서울 정신여중 교정에서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6·25전쟁 당시엔 부서진 창고에서 가마니를 깔고 모두 양반다리를 하고 공부했다. 피난 시절 초등학생이었던 나는 1년 반을 월반하여 6학년이 되었다. 피난민들 틈에 끼어 학업을 중단하고 있다가 내 나이에 맞게 뛰어오른 셈이다. 구구단을 배우지 못하고 6학년에 들어갔으니 산수 시간은 곤혹 그 자체였다. 오빠는 내가 구구단을 못 외운다고 어찌나 머리에 알밤을 먹이는지 머리가 온통 부어올랐다. 3살 위의 오빠는 자신도 월반해서 힘든 판에 내가 가르쳐달라고 자꾸 매달리니 골이 아팠을 것이다.
6학년 담임은 60대 할아버지로 전쟁에 처한 한국의 현실에 어찌나 많이 우시는지 우리도 따라서 우는 날이 많았다. 그 당시의 추억을 살려 쓴 ‘스승의 눈물’이란 단편이 주간조선에 게재되어 호평을 받은 적이 있다.
6학년 후반기에는 일등을 할 정도로 공부가 제 궤도에 올라섰다. 위에서 의논 끝에 공부를 잘한다고 경기여중에 원서를 넣었다. 선생님은 “너는 경기여중에 꼭 붙을 것”이라고 장담을 했는데 발표에 보니 이름이 없었다.
선생님은 나를 앞에 앉혀놓고 이렇게 말했다.
“네가 그 학교에 떨어진 건 기적에 속한다. 2차에서 제일 좋은 정신여중에 가거라. 하나님의 크신 뜻이 있는 모양이다.”
그 선생님은 지금 생각해보니 크리스천이었던 모양이다. 그 뒤 나는 구박 덩어리가 되었다. 오빠의 들볶음이 어찌나 심한지 밥도 함께 먹는 걸 막아서 부엌에서 혼자 먹으면서 늘 울었다. 서울에 있는 학교에 입학한 모든 학생이 한강 도강이 허락되지 않아 종합피난 중학교에 모여 남녀공학으로 공부했다. 중학교 1학년 모의고사에서 내가 전교 수석을 하고 돌아온 날, 오빠의 친구들이 몰려와 내 칭찬을 했다. 나는 방안에서 책을 읽고 있었다.
“네 동생 대단하다. 남녀를 통틀어 일등을 하다니!”
그러자 오빠는 지체 없이 이렇게 말하는 것이 아닌가.
“어쩌다 소가 뒷걸음질 치다 쥐를 잡은 꼴이야. 그 애 경기여중도 떨어졌어.”
‘소가 뒷걸음질 치다 쥐를 잡았다.’ 나는 이 말을 신춘문예에 소설이 당선됐을 당시 남편의 입에서도 들었다. 어려서 혼자 교회를 찾아갔고 중학교를 믿음의 동산인 정신학교로 간 것은 예정돼 있었다. 주님의 줄에 내 가슴이 꽁꽁 묶여 끌려가고 있다는 걸 그때는 몰랐다. 한강 도강이 허락되어 서울 종로5가에 있는 정신여중에 들어가니 철저한 기독교 교육의 현장이었다.
매주 성경 시간이 있어 교목 선생님이 들어와 성경 과목을 가르치셨다. 이를 바탕으로 시험을 보고 학교 성적 제일 상단에 넣을 정도로 철저하게 성경 교육을 했다. 처음 성경 시간에 배운 것이 모세가 나일강에 버려진 사건이었다. 동화처럼 재미있었다. 주기도문을 쓰는 시험에서 나는 간략하게 요약해서 답안지를 써냈다가 교무실에 불려가서 지청구를 듣기도 했다. 그 뒤부터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일점일획도 틀림없이 줄줄 암송해야 한다는 교육을 받았다. 그때부터 이미 하나님은 나를 목사의 아내감으로, 또 소설가로 훈련시키고 있었던 셈이다.
***[역경의 열매] 이건숙 (13) 철저한 신앙훈련으로 10대의 나를 예비하신 주님
매주 성경공부, 사경회, 전교생 예배로
중·고등학교 6년 동안 신앙으로 중무장
동급생에 영어 가르치며 교수법도 터득
소설가 이건숙(오른쪽) 사모가 1957년 서울 정신여고 교정에서 친구 손을 잡고 계단에 서 있다.
정신여중에 들어가서야 친구들 대부분이 장로나 목사 딸인 걸 알게 됐다. 부모가 교회에 나가는 크리스천 가정에서 이 학교를 선택해 보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하나님은 10대 초반에 나를 여기에 데려다 놓고 장차 쓸 인물로 훈련을 시키셨다. 그 당시에는 그걸 모르고 고등학교는 반드시 경기여고로 가서 오빠에게 보란 듯이 고개에 힘을 주겠다는 결심을 하기도 했었다.
정신여중·고는 아무래도 하나님의 딸들이 모인 곳이라 다정한 분위기였다. 여기서 나는 중·고등학교 6년을 신앙으로 중무장했다. 봄가을에 열리는 사경회에는 모든 수업이 중단돼 온종일 강당에 모여 성경을 배우고 기도를 했다. 각 학년이 2학급이니 전교생이 강당에 모여 기도하고 성경을 배웠다. 강당의 2층 입구에는 기도실도 있어 나도 거기 가끔 들어가 훌쩍이며 기도를 했다. 6년간 매주 배우는 성경 시간과 사경회, 일주일에 한 번씩 모이는 전교생 예배는 십대의 나를 완전히 신앙교육으로 무장하고 다져지게 했다. 지금은 그렇게 철저하게 신앙교육을 하는 학교가 없다.
정신여중·고 시절에 나는 팔방미인의 훈련을 받았다. 신앙훈련에 겸하여 타인을 가르치는 교수법을 터득했다. 고등학교에 들어가서는 김필례 교장 선생님이 나에게는 영어를, 김정자(나중에 서울치대를 나와 치과의사가 됨)에게는 수학을 동급생에게 가르치게 했다. 영어와 수학을 잘 따라오지 못하는 급우들을 교실에 모아놓고 강단에 서서 가르치게 하고는 교장 선생님이 뒤에 가끔 들어와서 참관했다. 고인 웅덩이에 갇혔던 내가 터진 웅덩이 물을 따라 흘러가면서 강하게 훈련을 받은 현장이었다.
게다가 기막힌 행운은 친한 동급생이 근로 장학생으로 학교도서실을 관리한다는 점이었다. 나는 생쥐가 알밤이 담긴 방구리를 드나들듯 책을 빌려다 읽었다. 서가에 꽂힌 책을 빠짐없이 모조리 빌려다 보았을 정도였다. 교장 선생님이 미국 뉴욕 컬럼비아대학에서 공부하신 분이어서 전후 물자 부족의 시대였지만 다양한 책들이 상당히 많았다.
내 가정 사정이 넉넉하지 못한 걸 알고 담임 선생님은 나를 근로 장학생으로 판매부에 배치했다. 아침 수업시간 전과 점심시간 그리고 방과 후까지 아르바이트했다. 어머니는 시골에서 장사하셨고 나는 오빠와 동생을 데리고 자취를 했다. 오빠는 부잣집 상주가정교사로 들어가서 자취방에 머무는 경우는 많지 않았다. 초등학교 다니는 동생의 밥을 해주고 판매부 일을 하고 내가 좋아하는 도서관 책들을 모조리 읽느라고 나는 친구들과 교제할 여유가 없었다.
어머니의 돈벌이가 시원찮아서 꼬박꼬박 식비를 대주지 못해 제때 음식을 해먹을 수가 없었다. 문간방에 세 들어 살면서 풍로에 숯불을 피워 음식을 하던 시절이었다. 나는 앞 개울에서 채소 장수들이 버리고 간 것들을 주워와 삶아서 소금을 쳐서 동생을 먹이기도 했다. 내가 그런 생활을 하면서 버틸 수 있었던 것은 학교 친구 덕분이다. 항상 내 곁에 있어 내가 굶으면 자신의 도시락을 아꼈다가 나를 먹이는 친구였다. 그녀는 지금 어디 살고 있는지 도저히 찾을 수가 없어 안타깝다.
***[역경의 열매] 이건숙 (14) 성경과 내 삶을 연결… 문학적 기초 닦은 여고시절
일기를 과제로 내준 김필례 교장 선생님
성경 말씀과 신앙에 관한 글 쓰도록 장려
하룻밤에 단편 써낼 수 있는 원동력 돼
기독 여성 교육에 힘쓴 서울 종로구 옛 정신여학교 본관 건물. 국민일보DB
나는 학교도서실 책들을 조금이라도 자투리 시간이 나면 열심히 읽었다. 비 오는 날이나 험한 날씨엔 교실에서 체육 수업을 했다. 정말 재미없었다. 그런 날은 소설을 책상 밑에서 감추고 읽곤 했었다. 한번은 심훈의 ‘상록수’ 끝부분을 읽다가 도저히 참을 수 없어 흐느끼고 말았다. 당황한 체육 선생님은 어디가 아프냐고 다가왔고 내가 소설을 읽다가 우는 것을 안 급우들은 배가 아파 운다고 합창해서 양호실로 쫓겨나 아픈 척 몇 시간을 누워 있던 적도 있었다.
눈코 뜰 새 없이 쫓기는 생활이라 수업시간에는 남들보다 더 집중해 수업을 들어 배운 것이 머리에 거의 녹아 들어가야 했다. 어머니 말씀대로 공부하는 길이 나와 내 가족이 사는 길이란 말에 나는 온전히 배우고 책을 읽는 일에 전념했다. 도서실 책들을 서가에서 차례차례 빌려다 몽땅 읽어버릴 정도였다. 어려서부터 집안에 책이 넘쳐나고 책 속에 묻혀 살아온 습관이 어려운 환경에서도 위로와 힘이 됐다.
전쟁 직후라 유명한 분들이 정신여학교에 오셨다. 소설가 최정희, 시인 박목월 선생이 국어 시간을 담당하기도 했다. 내가 소설가가 된 뒤 모교에 들려 제일 먼저 도서실에 갔더니 빛바랜 교지에서 내가 그때 써낸 글들을 찾을 수가 있었다. ‘지심(地心)으로 돌아앉았다’ 라고 무덤을 표현한 시를 읽으면서 그 시절 상당히 예민했구나 하고 감탄했다. 또 단편이 실린 교지를 보고 ‘어머! 십대에 이미 단편을 썼구나!’하는 놀라움으로 입을 딱 벌렸다. 이건 까맣게 잊고 있던 일이다.
제복 시절 가장 특이한 일은 매일 일기를 써야 했다. 고등학교 3년간 도덕을 담당한 김필례 교장 선생님은 매주 일기장을 모아가서 빨간 볼펜으로 오자도 고쳐주고 성경 말씀이나 신앙에 관한 글을 꼭 쓰도록 장려했다. 교장 선생님이 들어오는 요일에는 급우들이 모두 일찍 등교해 일제히 일기 대신 주기(週記)를 쓰느라고 바빴다. 똑같은 볼펜으로 쓰면 들킬 것이 걱정돼 서로 볼펜을 바꿔가면서 주기를 써서 제출하느라고 모두 진땀을 흘렸다. 아무튼 일기를 쓰든 6일 치의 주기를 쓰든 3년간 그런 훈련을 받고 보니 글을 쓸 수 있는 기능을 익힌 결과를 낳았다. 되돌아보면 내가 하룻밤에 단편을 써낼 수 있었던 것은 이미 그 시절에 훈련을 받은 탓이고 그렇게라도 쓴 글이 성경과 내 삶을 연결하는 문학적 기초를 닦았다.
고3 마지막 도덕 시간에 교장 선생님은 이런 질문을 던졌다.
“너희들은 내가 행복하다고 생각하느냐?”
미국 컬럼비아대학에서 공부했고 학교에 드나드는 미국 선교사들과 자유로이 영어로 대화를 나누는 교장 선생님은 우리 모두의 롤모델이었기 때문에 우리는 입을 모아 그렇다고 외쳤다. 우리 앞에 한참 침묵하시던 선생님은 무겁게 입을 열었다.
“여자란 가정으로 돌아가야 한다. 너희들은 나처럼 되는 것보다는 가정으로 돌아가서 가정의 제사장들이 되어라.”
그 말이 씨가 되어 정신여학교 출신들은 대부분 가정에 충실하고 교회에 충성하는 장로 부인이나 목사의 아내들을 많이 배출했다. 다른 학교 출신에 비해 이혼율이 낮아 연구 대상이 되기도 했다.
***[역경의 열매] 이건숙 (15) 슈바이처처럼 의료선교 꿈꾸다 “험난하게 여자가…”
하얀 가운 입은 의대생들의 모습에 매료
필수 독일어 독학으로 입시 준비했지만
학비 압박과 가족들 반대에 사범대 선택
소설가 이건숙(왼쪽 세 번째) 사모가 서울대 사범대 재학 중이던 1960년 서울 동도교회 교회학교 아이들과 소풍을 떠나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나의 제복 시절 꿈은 오직 하나였다. 의사가 되고 싶었다. 정신학교 근처에는 서울대학병원과 의과대학이 있었다. 그 앞을 지날 적마다 하얀 가운을 입어 눈에 띄는 의사들과 학생들 모습은 나를 황홀하게 만들었다. 나는 이과로 가서 의대를 목표로 공부를 했다. 급우들은 거의 이화여대나 숙명여대 쪽으로 지원해 서울대, 특히 의대의 시험 과목과 완전히 달랐다. 이과에서 3명이 의대를 가려고 준비했다. 한 사람은 서울 치대에 들어갔고 다른 한 사람은 여자의대로 가서 모두 의사가 되었으나 나만 홀로 그 꿈을 이루지 못했다.
당시 누가 무어라든 나의 목표는 서울의대였다. 그래서 필수과목인 독일어를 준비했다. 독일어 선생님을 따라다니며 배우고 나름대로 독학을 해서 원문으로 ‘호반’이나 ‘황태자의 첫사랑’을 읽어냈다. 혼자서 서울의대 시험과목을 파고들면서 입시 준비를 했다. 의사가 되어 알베르트 슈바이처처럼 아프리카로 가서 선교한다는 꿈을 꾸었다. 돌이켜보니 그 꿈이 있어 우리나라 최초의 여의사인 김점동을 실감 나게 다룬 소설 ‘예수 씨의 별’을 쓸 수 있었다.
그렇게 준비한 내 꿈은 어머니와 오빠로 인해 무참하게 무너져 내렸다. 그들의 주장은 아주 확연했다. “여자란 그런 직업을 가지면 인생길이 험난한 법이다. 여자란 애를 끼고 따뜻한 구들 위에 누워 뒹구는 것이 행복한 삶이다.”
아마도 두 분은 의대 학비 때문에 나를 밀쳐냈을 터이다. 오빠가 법대에서 공부하고 있는데 둘이 대학을 다니면 엄청난 학비 감당이 힘들었기 때문이다. 할 수 없이 서울사대에 가기로 했다. 국립대학에다 사범대학이니 등록금이 싸고 졸업하면 모두 중·고등학교 교사가 되니 취직이 하늘의 별 따기이던 시절 기막히게 좋은 조건이었다.
어머니는 내가 훌쩍이는 걸 보고 오빠가 고등고시에 붙으면 사범대에서 의대로 편입해 공부할 수 있다고 하셨다. 영문과에 지원했는데 독문과가 신설되니 거기 갈 사람은 고쳐 쓰라고 해서 입시 당일 나는 독문과로 정했다. 다른 나라 소설보다 독일소설이 무척 매력이 있어서였다. 의대에 가려고 준비한 독일어가 이렇게 나의 대학 전공이 되어버렸다. 해서 나는 서울사대 독문과 제1회 졸업생이다. 얼마나 독문과가 치열했는지 서울법대 수준과 비슷했다는 후문이다. 전쟁 뒤끝이라 시골의 머리 좋은 학생들이 돈이 적게 드는 사대로 많이 몰렸기 때문이다.
대학을 다니는 동안 정말 재미없었다. 원서를 읽느라고 독일어사전을 끼고 살았다. 유학파 교수들이 가르쳤는데 내가 문학을 하고 보니 그 시절 배운 학문이 상당히 열악했다고 느낀다. 남녀공학이니 여자들 세계에서 자란 내가 남자들 틈에서 숨을 제대로 쉴 수가 없었다. 여름에는 앞에 뒤에 옆에 남학생들이 빼곡히 앉아서 교양과목 시간엔 어찌나 졸아대는지! 땀내는 진동하고 나는 저들의 조는 머리를 피해 몸을 앙당그려야 했다. 더 힘든 것은 수업이 끝나는 종소리에 눈을 뜬 그들은 예의도 없이 내 노트를 잡아채서 베끼느라고 야단이니 기가 막혔다. 집에 오면 언제나 녹초가 되어 파김치였다.
***[역경의 열매] 이건숙 (16) 친구 따라 성가대 가입… 유치부서 찬송·율동 가르쳐
신성종·길자연 목사 등과 성가대 활동
아버지 때문에 교회 못 나갔던 어머니
사흘 악몽 꾸다 주님 부름 깨닫고 출석
소설가 이건숙(앞줄 왼쪽) 사모가 1957년 서울대 사범대 재학 중인 정신여중고 동문들과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정신여고 시절엔 서울 미아리 천막 교회에 다녔고, 대학교 1학년부터 다닌 교회는 동도교회였다. 1959년 청량리는 그냥 시골이었다. 서울대 사범대학은 당시 용두동에 있었고 나는 학교 근처에서 살고 있었다. 고등학교 단짝이 나를 그 교회로 데려갔다. 성가대가 그때 처음 조직돼 나도 친구를 따라 성가대에 섰다. 교인들은 가마니 바닥에 앉아서 예배를 드렸고, 최훈 강도사님이 목회하고 있었다. 청량리 시장 곁에 있어 몹시 가난한 동네 교회였다.
나는 주일학교 유치부 교사를 했다. 좁은 교회에서 성탄절 준비 율동을 가르칠 곳이 없어 입구 얼음판에 10여명의 꼬마들을 모아 놓고 애들과 폴짝폴짝 뛰면서 찬송과 율동을 했다. 바로 옆에는 화장실이 있고 겨울바람이 거세서 아이들 코가 모두 새파랗게 얼어붙었다. 성가대 가운도 없어 성탄절 성가를 부를 적에는 집에서 각자 흰 한복을 입고 오라고 했다. 석탄 난로 냄새가 자욱하고 흰 한복은 얇아서 어찌나 추운지 오들오들 떨면서 성가를 불렀고 새벽송을 흰 한복을 속에 입고 돌았다. 성도들의 집 문 앞에서 성가를 부르면 주로 사탕과 과자를 주었고, 잘 사는 집은 우리를 집안으로 들여 떡국을 먹이기도 했다. 제일 튼실한 남자 대원이 자루를 메고 다니면서 집집마다 내미는 사탕이나 과자를 받아 한 자루가 되면 교회로 지고 와서 전 교인이 둘러앉아 잔치를 했다. 배고픈 시절 교회의 성탄절은 콩알도 나눠 먹는 사랑의 공동체였다.
그 당시 나와 함께 성가대에 앉았던 대학생으로 나중에 목사가 된 길자연이 있었다. 나중 내 남편이 된 신성종은 군대에서 제대해 연세대에 복학한 상태로 교육부 전도사로 함께 성가대에 섰다.
아버지 때문에 교회를 중단했던 어머니는 나를 따라 동도교회에 등록했다. 어머니가 교회에 나오게 된 사연은 기막힌 체험으로 두고두고 간증 거리였다. 주일에 나는 일찍 교회에 가려고 나가는데 어머님이 따라나섰다. 의아해 바라보니 어머니가 웃으면서 말했다.
“요 며칠 아주 이상한 꿈을 반복해서 꾸었다. 비가 세차게 쏟아져 창호지 문을 마구 적셔 구멍이 뻥뻥 뚫리는데 시커먼 양복을 입은 머리가 긴 남자가 내 목을 세차게 조여서 숨을 쉴 수가 없었다. 버둥거리면서 고함을 치는데 밖에서 네가 우렁차게 찬송을 부르면서 문 쪽으로 다가오니 그 마귀가 슬그머니 손을 놓고 가버리더라. 연속 사흘을 두고 밤마다 똑같은 꿈이 반복돼서 너를 따라 교회로 나오라는 하나님의 부름인 걸 깨달았다.”
어머니는 동도교회 초창기부터 다녀 권사 직분을 받았다. 최훈 동도교회 목사를 도와 많은 일을 해서 최 목사는 ‘나의 동역자, 김의순 권사님’이란 말을 많이 했다. 성경 암송을 어찌나 잘하셨는지 노년에는 우리 부부에게 암송대회 상으로 받은 석 돈짜리 금반지를 각각 끼워주기도 했다. 칠순 넘어 하나님 앞에 기도할 적에 자식들만 기르다 왔다고 하나님께 보고서 내는 것이 부끄럽다고 신학교를 다니며 교회를 섬길 정도였다.
동도교회 최훈 목사님은 나를 보면 늘 이렇게 말했다. “딸이 어머니를 못 따라가. 어머니가 훨씬 똑똑하다니까.”
***[역경의 열매] 이건숙 (17) 사윗감 반대하던 어머니 “귀가 커 장수는 하겠네”
끈질기게 따라다니는 신 전도사에게
“내 딸은 사모 감이 아니다”며 반대하다
일찍 혼자 된 삶 닮지 않길 바라며 허락
소설가 이건숙(오른쪽) 사모가 1965년 서울의 한 음식점에서 신성종 목사와 약혼식 도중 인사하고 있다.
대학 졸업 후 충남 논산여고에 배치돼 부임했다. 1963년도엔 취직이 하늘의 별 따기였다. 서울사대에서 학비를 싸게 받고 공부를 시킨 대신 배치된 학교에서 3년을 근무하는 것이 의무였다. 논산여고는 연무대가 가까워서 훈련병들이 많았다. 군인들의 도시이기에 여학교는 학생들 보호에 만전을 기했다. 방과 후엔 선생님들이 조를 짜서 논산극장과 시내를 순찰하며 학생들을 감시했다.
여학생들은 어찌나 영화 보기를 좋아하는지, 논산극장에 들어가보면 어머니의 허름한 한복을 빌려 입고 머리에 수건을 쓰고 온 학생들이 눈에 띄었다. 이들은 영화가 끝나고 불이 켜짐과 동시에 서로 아는 체를 하면서 수다를 떠는 통에 모두 잡혀서 다음 날엔 교실 밖 복도에서 수업을 듣는 벌을 받았다. 내가 맡았던 반의 절반 이상이 영화관에서 적발돼 교장 선생님은 담임인 내게 심하게 굴었다.
당시 개봉한 ‘폭풍의 언덕’이 명작이므로 꼭 봐야 한다는 내 주장에 전교생 단체관람을 시켰는데, 그 내용을 두고 교장이 한바탕 난리를 친 뒤끝이라 더 심했다. 영화에서 총각이 유부녀를 사랑하는 내용이라고 성화였다. 지금 생각하면 참으로 호랑이 담배 먹던 시절의 이야기다.
내가 처음 강단에 섰을 때 나와 가르친 학생들과의 나이 차는 서너 살 정도였다. 이젠 나와 함께 백발 할머니가 된 제자들인데 지금도 나를 찾아와서 그 시절 이야기를 하면서 즐긴다. 거기서 3년 연속으로 담임교사로 근무한 뒤 대전여고로 전근을 가게 됐다.
그 기간 토요일엔 서울로 올라갔다. 주일엔 동도교회에 나가 맡은 일을 계속했다. 신성종 전도사는 나를 끈질기게 따라다녔다. 남학생들 틈에서 대학 생활을 한 내 눈에는 결혼 상대가 아니었다. 키도 작아 보였다. 어머니도 그걸 알고 엄청나게 반대를 했다. 어머니는 직접 신 전도사를 앉혀 놓고 조건이 하나도 맞지 않는다고 머리를 흔들었다. 더구나 신학을 한다니 “내 딸은 사모 감이 아니다, 그냥 내 딸하고 교회에서 함께 일하니 교제는 해도 더 이상을 허락 안 하겠다”고 못을 박았다.
내가 충남에 내려가 있는 동안 그는 매일 나에게 편지를 보냈다. 학교로 편지가 오니 동료 교사들도 눈치를 챌 정도였다. 신 전도사는 매일 새벽기도가 끝나면 어머니 뒤를 따라 우리 집에 가서 어머니 앞에서 신앙 얘기를 나누며 가깝게 지내기 시작했다. 이런 신 전도사를 앞에 두고 어머니는 이렇게 한탄했다고 한다.
“가정이 어려워도 키라도 좀 크면 얼마나 좋아. 그 몸에 깡패가 덤비면 여자를 보호할 수 있겠어.”
오빠나 동생들이 장신이라 나도 작은 키의 남자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어머니는 한숨을 쉬면서 신 전도사에게 이렇게 말했단다. “그래도 귀가 크니 장수하겠군. 그거 하나 마음에 드네.”
6·25전쟁 중에 돌아가신 아버지로 인해 일찍 혼자가 된 어머니는 딸만큼은 그런 삶을 살지 않기를 바란 모양이다.
아무튼 동도교회 성가대에서는 길자연과 신성종 두 커플이 나오게 된 곳이다. 지금도 그 시절을 되돌아보면 미인이었던 길자연 목사의 사모님이 눈에 선하다.
***[역경의 열매] 이건숙 (18) 유학 떠나게 된 신 전도사, 약혼부터 하자고 막무가내
약혼식 앞두고 거세게 반대하던 오빠
가정 편할 것이란 어머니 말씀 받아들여
유학 시험 통과해 남편 근처 서울로 전근
소설가 이건숙(오른쪽) 사모가 1967년 서울 충현교회에서 열린 결혼식에서 남편 신성종 목사와 행진하고 있다.
어머니는 신성종 전도사의 가정을 파악하기 위해 집배원을 따라 어렵게 달동네에 사는 그의 집을 방문하고는 기절할 정도로 놀라셨다. 결혼은 절대 아니라고 못을 박았다. 그렇게 가난한 가정을 본 적이 없다고 어머니는 머리를 세차게 흔들었다.
그럴 즈음 신 전도사는 미국 국무부 초청으로 왕복 비행기 삯과 2년간 모든 학비와 식비를 받고 유학을 떠나게 됐다. 그러자 약혼을 하고 떠나겠다고 강하게 주장하기 시작했다. 그 시험에 합격한 사람은 딱 두 사람이라고 기억된다. 시험에 붙고 신 전도사는 어머니께 “가난한 나의 집안과 관계없이 미국으로 가서 살 터이니 걱정하지 마세요”라고 다짐했단다. 목사의 아내가 될 수 없다고 거절하는 내게는 “목사는 안 하고 박사가 되어 교수가 될 터이니 걱정하지 말라”고 아주 단단한 표정으로 말했다.
내가 바느질도 못 하고 음식도 못 한다고 걱정하는 어머니 앞에서 신 전도사는 “바느질은 침모를 시키고, 집안일은 식모를 두고 할 터이니 걱정하지 마세요”라고 농담을 주고받은 모양이다.
약혼식을 앞두고 오빠의 반대는 기가 막혔다. 식이 끝나고 오빠는 밖에 나가 눈물을 닦고 있었다. 이런 결정을 내린 어머니를 원망했다. 오빠의 주장이 아주 거셌다. “너 정도면 내 친구 중 은행원이나 의사나 판검사를 소개해도 되는데, 그 사람은 아니다. 너 그 집에 시집가서 어쩌려고 그러느냐. 고생문이 훤하다.” 남동생들도 신 전도사가 들어오면 머리를 돌리면서 인사를 하지 않을 정도로 반대를 했다.
어머니는 아버지가 법조계에 있어 정치와 연결돼 전쟁 통에 돌아가셨으므로 신학을 하는 남자는 장수하고 하나님을 모셨으니 가정이 편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나는 어머니에게 절대적으로 순종하는 딸이었다.
대전여고로 전근한 나는 미국 유학시험을 패스하고 신 전도사가 있는 대학 근처의 대학원 교육과에 입학 허락을 받아 곧 미국으로 떠날 수속을 밟고 있었다. 대전여고는 충남에서는 알려진 명문 학교이고, 대전고 남학생들이 대입준비 독일어를 단체로 내게 와서 배우고 있었다. 내가 결혼을 한다고 하니 대전여고 교장이 ‘어떻게 신혼에 떨어져 사느냐’면서 서울 중앙여고로 전근하도록 길을 열어주었다.
황신애 중앙여고 교장은 독일어 시간만으로는 채용이 안 되니 영어와 함께 맡을 수 있는지 물었다. 면접에서 노벨상 수상 작가 펄 S 벅의 소설 ‘대지’를 펴놓고 질문을 했다. 또박또박 다 읽고 번역을 했더니 영어와 독일어를 가르치는 조건으로 임용했다. 대전여고 교장의 강한 추천에 힘입어 명문 공립학교에서 서울의 사립학교로 전근이 된 셈이다.
신혼여행에서 돌아오니 시아버님이 막내 시누이를 데려와 하나뿐인 신혼 방에 넣으면서 공부를 시키라고 했다.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집에서 3년을 쉰 시누이는 검정고시를 치르기 위해 학원에 보내고 남편은 신학교에 다녔다. 얼떨결에 나는 두 명의 학생을 거느린 학부모가 되었다. 미국에서 2년 공부하고 온 남편은 충현교회에서 나와 함께 주일학교 고등부 교사로 1년 있다가 신학교 졸업반에야 간신히 고등부 전도사로 일하게 되었다.
***[역경의 열매] 이건숙 (19) 고단한 생활에 영양부족으로 2.2㎏ 작은 아이 출산
새벽부터 가족들 도시락 싸주며 출퇴근
임신 중 너무 못 먹어 몸 상태 나빠져
가사 실습하고 남은 음식 얻어 먹기도
소설가 이건숙 사모와 신성종 목사의 1967년 서울 충현교회 결혼식 기념사진.
서울 사당동 총신대는 ‘헐떡고개’라고 부를 정도로 가파른 곳에 있었다. 아스팔트가 깔리지 않은 진흙 길이라 비라도 오는 날이면 구두끈만 남겨놓고 온통 진흙으로 뒤범벅이 될 정도였다. 누가 보면 간첩이 산야를 헤맨 것 같다고 의심할 지경이었다.
쌀을 봉지로 사 나르면서 주로 밑반찬으로 살아가야 했다. 시누이와 남편 신성종 전도사의 등록금을 내고 살자니 무조건 아껴야 했다. 고추를 소금에 삭혀 잘게 썰어 먹고, 꼴뚜기를 상자째 사다가 소금에 삭혀 그걸 한두 개씩 다져서 고춧가루에 묻혀 먹는 것이 주식이었다. 단칸방 셋방살이는 문간방이라 쪽마루 밑 연탄아궁이에 밥도 하고 국도 끓이고 더운물도 데워 써야 했다. 남편의 급우들은 점심 도시락을 못 싸 올 정도로 어려웠고 식당에서 파는 멀건 콩나물국에 밥을 사 먹을 돈이 없어 굶는 학생들이 허다했다. 남편의 사촌 여동생 남편도 그때 함께 공부했는데 도시락을 쌀 수 없어 아내가 메뚜기를 잡아서 볶아 가루를 내주면 그걸 한두 수저씩 먹으며 허기를 채웠다. 새벽에 일어나 도시락을 싸주고 학교로 출퇴근하는 나는 거의 죽을 지경으로 지쳐가고 있었다. 그래도 남편은 내가 싸주는, 열악하지만 굶지 않을 정도의 도시락을 매일 지참할 수 있었다.
하필 그때 임신했다. 내 옆에 앉은 가정과목 선생님은 나보다 두 살 많았는데 내가 임신 상태로 너무 못 먹어 영양 상태가 좋지 않다면서 가사 실습을 하고 남은 음식을 몰래 식당 구석에 감춰놓고 메모를 남겼다. 비는 시간에 내려가서 먹으라고. 그래도 너무 고단한 생활과 영양 부족으로 2.2㎏의 작은 아이를 출산했다. 아이를 그런 험악한 셋방살이에서 낳을 거냐고 오빠의 걱정은 화풀이가 되어 돌아왔다. 나는 어쩔 수 없이 고학년 가정교사를 해서 서울 정릉동 산꼭대기에 13평짜리 연탄 아파트를 분양받고 월부를 넣으면서 거기서 아이를 낳았다.
아기를 낳고 병원비가 부족해 하루도 머물지 못하고 퇴원한 나를 찾아온 친정어머니는 오빠 몰래 도우미를 데려다주었다. 이런 상황에 시어머니는 도우미를 보고는 놀라서 미역국이라도 끓여주는 것이 아니라 야단을 쳤다.
“나는 아이를 낳고 금방 일어나서 밭일했고 물을 길어다 밥을 해서 대가족 식사를 준비했다. 너는 이렇게 편안하게 누워서 일하는 사람까지 부리면 이상하다.”
시어머니는 그날로 도우미를 시집간 둘째 시누이 집으로 데려가 버렸다. 서울대 나온 며느리를 보았다고 충청도 산골 신씨 집성촌 사람들이 모두 시어머니 주위에 둘러앉아 울음바다였다고 한다. 대학 나온 며느리가 밥 한 끼를 차려주겠느냐고 불쌍하다고 그렇게 울었다나. 해서 다홍치마 시절부터 길을 들인다고 도우미를 데려간 모양이다.
고등학교 여교장이 내가 아기를 낳고 누워있으니 정릉 산꼭대기까지 방문했다. 학교와 집 거리가 너무 멀고, 산 높이 자리 잡은 아파트에 오르고는 힘이 들었는지 신학교에서 돌아온 신 전도사를 앞에 놓고 마구 호통을 쳤다.
“나도 목사의 아내지만 이거 너무 한다. 이렇게 하고 어떻게 목회자가 된다고 신학교를 다닐 수 있느냐!”
남편은 그런 힘든 과정을 거쳐 드디어 신학교를 졸업했다.
***[역경의 열매] 이건숙 (20) 산욕열로 죽을 고비 넘긴 후 유학간 남편 따라 도미
혼수상태 빠져… 친어머니가 아이 양육
미국 건너가 성공회 교회 사찰일
교회 사택 방 한칸서 힘겹게 생활
소설가 이건숙 사모의 아들을 돌봐주신 친정어머니가 1969년 서울 정릉의 아파트 앞에서 손자를 안고 있다.
시어머니는 17세에 남편 신성종 전도사를 낳았지만, 나는 서른이 가까운 노산이었다. 그런데도 시어머니의 충고를 따라 기저귀도 빨고 찬물에 목욕도 했다. 하루는 학교에서 돌아온 남편이 혼수상태에 빠져 누워있는 나를 보고 장모에게 전화했다. 일이 이렇게 되니 오빠는 어쩔 수 없이 친정어머니를 내게 보내면서 투덜댔다.
“이러다가 내 동생 죽이겠다. 어쩔 수 없지. 어머니가 가서 돌볼 수밖에 없네요.”
급히 간 병원의 진단은 산욕열이었다. 옛날에는 거의가 이 병으로 산모가 죽었으나 페니실린이 나오고는 생존율이 높다고 했다. 나는 치료를 받으면서 아이는 친정어머니가 돌봐서 한 달의 산후조리가 끝나고 다시 학교로 돌아갔다. 그 당시 고2 담임을 했는데 모두 8학급에 여자 담임은 나 혼자였다. 학생들 인기투표에서 내가 제일 표를 많이 받아서 손목시계를 상으로 탔고 학교의 인정을 받아 가장 힘든 자리에 배치됐다. 영문법과 독일어를 가르치면서 대입으로 고2부터 학생들은 초비상이라, 나는 정릉에서 별을 보고 나와서 별을 보고 귀가했다. 다행히 친정어머니가 아기를 기르면서 살림을 도맡아서 편안한 생활을 할 수 있었다. 결혼 후 죽음의 첫 고비를 넘긴 나는 이런 고비를 앞으로 수없이 넘어야 한다는 걸 형광등처럼 그때는 짐작도 못 했다.
남편은 충현교회 고등부 교육전도사로 사역하다가 다시 미국 필라델피아 웨스트민스터신학대학원에서 학장이 비행기 표를 보내오자 박사 학위를 따겠다고 다시 미국행 비행기에 올랐다. 그 시절에는 한국은행에서 딱 100달러만 유학생에게 바꿔주는데 그 돈도 없어 70달러를 환전했다. 남편은 김포 비행장에서 아기와 나를 두고 혼자 미국 유학을 떠나버렸다.
1년 뒤 나는 아기를 친정어머니에게 맡기고 미국으로 갔다. 갓 돌을 지난 아들을 데리고 가야 하는데 남편은 혼자 오라고 주장했다. 가보니 내가 돈을 벌어야 공부할 수 있는 형편이었다. 방도 못 얻고 친구의 거실 바닥에서 잠을 자는 남편은 학교에 다니면서 막노동을 하고 있었다. 당시 유학생들은 다 그랬다. 밤에 학교 건물을 청소하거나 아니면 야간 공장의 막노동을 하면서 공부를 했다. 1960년대 한국은 너무 가난했고 미국도 부자는 아니었다.
다행히 학교 인근 성공회 교회의 사찰로 취직이 돼서 우리 부부는 교회 교육관의 방 한 칸 사택에서 생활을 시작했다. 집세를 내지 않았고 초라하지만 부엌과 거실도 있어 좋았다. 한 달에 수고비로 주는 100달러로는 한 주에 25달러씩 식비를 쓸 수 있었다. 문제는 남편의 학비와 책값, 기타 비용이었다. 자동차도 고물로 샀는데 보험은 들지 못했다. 미국 생활에서 자동차는 두 다리와 같아 차가 없으면 꼼짝 못 하니 그건 필수품이었다.
직업을 구해야 했다. 학비가 없으면 남편의 공부는 중단이다. 낮에는 남편이 학교 간 사이 나 혼자 교회의 사찰 일을 했다. 성공회는 미국의 상류층 사람들이 모이는 교회라 정원도 아름답고 예배당도 환상적이다. 그들은 날마다 모여 놀았고 나는 그들이 모일 적마다 지시에 따라 의자와 책상 배치를 하고 청소도 했다.
***[역경의 열매] 이건숙 (21) 군용 가방공장 취직… 시각장애인 틈에서 재봉틀과 씨름
학비 마련하려 유학생 부인들 구직 나서
고급 양복점서 재봉 테스트 망쳐버리고
실패 경험 살려 기술 배워가며 취직 성공
소설가 이건숙(왼쪽) 사모가 1971년 미국 필라델피아의 출석 교회에서 남편 신성종 목사와 두 아들을 안고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미국 필라델피아에 와있던 유학생 부인 셋이서 직장을 구하러 다운타운으로 나갔다. 도시락으로 감자를 삶아 핸드백에 넣고 셋이서 무조건 직장 구하기 작전에 뭉쳤다. 1960년대 한국은 너무 가난했다. 얼마 안 되는 유학생과 그 아내들은 모두 막노동을 해야 할 지경이었다. 아침 집을 나설 적에 남편 신성종 목사는 내게 이렇게 말했다.
“당신 무조건 ‘예스, 아이 캔’(Yes, I can)이라고 대답해. 그래야 능력이 있다고 인정하고 채용하는 곳이 미국이니 이거 꼭 기억하라고.”
셋이서 처음 도착한 곳이 고급 양복을 만드는 곳이었다. 내가 제일 용감해 그들이 묻는 말에 남편이 일러준 대로 ‘예스, 아이 캔’을 씩씩하게 말했다. 해서 내게 맡겨진 일은 남자 양복의 어깨를 잘라가면서 박는 고난도의 일이었다. 한국에서 친정어머니는 내가 수를 놓거나 재봉틀 앞에 앉는 걸 금했다. 공부만 잘하라고 다그쳐서 교사 생활을 할 때까지 손수 내 옷을 지어서 입힌 분이다. 자신은 그렇게 하면서 딸인 나에게는 공부만 하라고 했으니 이 일이 큰 위기로 다가왔다. 더구나 여긴 전기 재봉틀이라 무릎으로 탁탁 치면 드르륵드르륵 속도가 엄청 빨랐다. 나는 다 지어놓은 남자 양복 어깨를 뭉텅 잘라내면서 망쳐버렸다. 주인은 머리를 흔들면서 오만상을 찌푸렸다. 세 사람 중에 재봉 일에 달인인 나이 많은 사모님은 쉬운 박음질을 시켜서 그분만 합격했다. 그러자 그 사모님은 겁에 질려 우리를 따라 나왔다. 영어도 못 하는데 한국 사람이 한 명도 없는 곳에서 일할 수 없다고 했다.
우리는 큰길가 벤치에 앉아 핸드백 속 감자로 요기를 하고 다시 큰길을 따라 걷다가 허름하게 보이는 ‘워킹 블라인드’(Working Blind)란 건물의 구인광고를 보고 들어갔다. 여기는 시각 장애인들만 일하는 곳으로 주정부에서 군인들이 메는 가방을 만드는 곳이었다. 시각 장애인들이 손으로 더듬어 다 하는데 눈뜬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정교한 재봉 일을 할 사람을 구하고 있었다. 우리 세 사람 모두 취직이 됐다. 군인들의 가방은 어찌나 크고 무거운지! 마지막 마무리로 정교하게 박음질을 하는 일이라 고난도 기술이 필요했다. 나는 양복점의 경험을 살려 재봉틀 고치는 기술자에게 살살 물어가면서 재봉틀 돌리는 법과 해야 할 일을 꼼꼼하게 묻고 배워 드디어 터득하게 됐다. 우리 셋만 앞이 보이니 어느 정도 자유로웠다. 기차를 타고 다운타운에 나와 공장 일을 하는데 나는 그때 둘째를 임신 중이었다.
한국을 떠나기 전날 오빠는 ‘넌 미국에서 네 남편 공부시킬 돈을 벌려고 막노동하러 가는 것’이라고 핀잔을 주었는데 그 말이 너무 맞아떨어져서 한숨만 나왔다. 하지만 이곳은 ‘피스 워크’라는 제도를 두고 있어 일하는 대로 피스 당 돈을 더 주었다. 일한 양만큼 돈을 주니까 속도를 내서 많이 만들면 돈을 더 많이 주었다. 그 욕심에 빠져서 우리 셋은 눈에 핏발이 서도록 전기 재봉틀을 돌려가며 무거운 군인 가방과 씨름을 했다. 그렇게 공부시킨 남편들이 성공해 귀국했고 훗날 신학교 총장이 된 분도 있다.
***[역경의 열매] 이건숙 (22) 낮엔 육아와 교회 일, 밤엔 양로원서 간호 보조로
육아 병행할 수 있는 일 찾으니 양로원뿐
힘든 근무환경에 남편 몰래 숨어 울기도
항의 기도에 “딸아, 남편 크게 쓸것이다”
소설가 이건숙(왼쪽) 사모가 1981년 한국일보 신춘문예 시상식에서 단편 ‘양로원’으로 소설부문 상을 수상하고 있다.
둘째 아들을 낳고는 워킹 블라인드에서 시각 장애인들과 일할 수가 없어 나는 남편 신성종 목사와 의논해 한국에 두고 온 큰아들을 데려오기로 했다. 연년생의 두 아들을 낮에는 내가 교회 일을 하면서 돌보고, 학교에서 돌아온 남편이 밤에 교회 일을 하면서 아이들을 돌보는 시간에는 내가 또 밤에만 일하는 직업을 구하기로 했다. 그 방법이 아니면 우리는 귀국할 수밖에 없었다.
신문 구인광고를 보니 밤에만 일할 수 있는 곳은 양로원뿐이었다. 30대 초반이니 건강이 버텨줄 것이라고 기도하면서 들어갔다. 밤잠을 자지 않으면서 일한 것이 결국 나중에 건강에 큰 문제로 남긴 했지만, 당시엔 그 길만이 우리 부부의 살길이었다. 아이 기저귀를 손으로 빨아가면서 돈을 아껴 남편의 학비를 마련하느라고 애가 탔다.
미국 대학 등록금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비쌌다. 책 욕심이 많은 남편은 어느 때는 대책 없이 책을 사들였다. ‘Great Books of the Western World’는 당시 54권 장서로 호메로스부터 지그문트 프로이트까지 저작을 다뤘으며 도서관에선 참고도서실에 배치하는 귀한 책이었다. 나는 열심히 양로원 일을 하면서 통장에 1000달러를 학비에 쓰려고 푼푼이 모았는데 남편은 그걸 몽땅 지불하고 그 책을 사들였다. 그 황당함은 정말 참을 수 없을 지경이라 무조건 길을 따라 한 시간을 걷다가 마음을 진정하고 다시 되돌아오면서 나는 하나님을 향해 마구 항의 기도를 했다. 나를 왜 신학생과 결혼시켜 이런 지경까지 몰아넣어 고생을 시키느냐고 울부짖는 중 하나님은 내 일생 처음으로 음성으로 다가왔다. 이렇게 다정한 음성으로 응답을 듣기는 일생 처음이었다.
“딸아! 내가 너를 축복하여 노년에는 냉장고가 넘치도록 먹을 것을 줄 것이며 물질로 인해 고생시키지 않을 터이니 인내해라. 네 남편은 내가 크게 들어 쓸 것이다.”
하나님은 단점도 많은 남편을 무조건 사랑하고 지명하여 불러서 앞으로 쓸 계획으로 이 가정을 이끌어가고 있음을 확신했다.
양로병원에서도 자격증 가진 간호사는 머리에 검은 줄 두 개를 두른 모자를 썼는데 아주 권위가 당당했다. 나는 간호보조원으로 밤에만 일하니 주로 기저귀를 갈아주며 치매 노인들을 돌보는 일을 했다. 얼마나 기저귀를 많이 갈아주었으면 침대의 가드 라인에 닿은 내 흰 가운의 가슴팍이 한 줄로 닳아서 나긋나긋해질 정도였다. 특히 죽어가는 노인들 옆을 지키는 건 인생을 깊게 보는 심안을 길러주었다. 밤 11시에서 아침 7시까지 근무하니 남편이 아침에 나를 픽업하면 집에 와 샤워를 하면서 많이 울었다. 내겐 너무 힘든 현장이었기 때문이다. 내 울음소리로 남편이 공부를 중단할 것이 두려워 나는 물을 더 세차게 틀고 소리가 밖에 새지 않도록 했다.
한 사람의 목회자요 신학자를 길러내는 길이 이렇게 힘들고 희생이 따르는 고난의 길인 걸 어찌 사람들이 알겠는가. 그러나 이 고행의 길이 나를 소설가로 만들었다. 귀국 후 양로원에서 일한 체험이 속에서 곰삭아 터져 나와 쓴 단편 ‘양로원’이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되었으니 말이다.
***[역경의 열매] 이건숙 (23) 가발 사업 시작한 지인 “돈 많이 줄 테니 도와줘”
함께 일하다 전도해 예수 믿게 된 P여사
은혜 갚을 기회라며 가게 나와달라 부탁
돈·세금 관리 도맡아 사업 기반 닦아줘
소설가 이건숙 사모가 미국 유학 중이던 1973년 필라델피아의 가발가게에서 선반을 배경으로 웃고 있다.
아이 둘을 거느린 가난한 유학생 부부는 그야말로 사면이 꽉 막힌 상태였다. 그냥 귀국하느냐 아니면 하나님의 도움을 간구하여 열린 문을 찾아야 하느냐 하는 갈림길에 서게 됐다. 그 시기에 뜬금없이 워킹 블라인드에서 함께 일하며 내가 전도해 예수를 믿게 된 P여사가 전화했다.
“밤에 양로원에서 일하니 건강도 버리고, 돈도 밑바닥 수당을 받으니 어떻게 살아. 내가 은혜를 입었으니 갚아야지. 가발 가게를 열었는데 손이 모자라니 가장 바쁜 주말에만 나와서 도와줘. 양로원에서 받는 돈 3배를 줄 터이니 요번 금요일부터 와라.”
우선 밤에 잠을 잘 수 있었고 금요일과 토요일이면 남편 신성종 목사의 수업이 없으니 아이들을 맡기고 갈 수가 있었다.
선반에 셀 수 없이 놓인 가발들은 한국에서 수입해오는 것으로 우리나라에서도 판로를 찾고 있던 시절이었다. 인공 머리는 진짜 머리보다 스타일을 내기도 쉬웠고 그냥 비닐 백에서 꺼내 탁탁 털어서 머리에 써도 자연스러운 웨이브가 환상적이었다. 인간의 머리보다 인공적으로 만든 머리털이 더 반짝이고 윤기가 흘렀으며 값도 쌌다.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의 머리는 고불고불해서 포크로 북북 잡아 뜯어야 빗겨질 정도로 거칠었다. 그들은 금요일 오후 주급을 받는 순간 가발가게로 달려왔다. 먹을 것이 떨어져도 우선 가발을 사고 나머지 돈으로 슈퍼마켓에 갈 정도로 완전히 인공가발에 미쳐있었다. 선반에 툭툭 털어서 걸어놓을 시간이 없을 정도로 주말은 바빴다. 돈이 홍수처럼 밀려들어 오니 P여사는 그 돈 관리며 세금 계산이 만만치 않아 이 분야를 내가 움직여야 했다. 미국은 세금을 속이면 살인자보다 더한 형량을 받을 수 있으니 속이지 말고 꼬박꼬박 보고해야만 했다.
한국인으로선 드물게 미국에서 비즈니스를 개척해 사업을 시작한 그녀에게 내가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세무사를 만나 세금 보고하는 형식도 알아오고 사업을 할 수 있는 기반을 닦아주어야 했다. 아프리카계 도우미를 써서 일손도 줄이고 같은 인종끼리 거래하니 손님은 구름처럼 꼬였다.
“이제 이 정도면 나 혼자 가발가게를 운영할 수 있겠어. 내가 미시즈 신을 공부하도록 길을 열어주고 싶다는 마음을 억누르지 못하겠어. 똑똑한 사람이 막노동만 하면 우리나라의 손해지.”
“남편의 종합대학 등록금도 숨이 찬데 어떻게 나까지 공부를 할 수 있겠어.”
“남쪽 필라델피아에 내 이름으로 가발 구멍가게를 내줄 터이니 거기 이득금은 전부 미시즈 신이 가지도록 해. 그 가게를 열어주는 건 미시즈 신이 석사 학위라도 받을 공부를 한다는 조건이야.”
그 친구의 이름으로 가게를 열기로 하고 남쪽 필라델피아 리하이 거리를 우리 부부는 들쑤시고 다녔다. 굉장히 위험한 곳이었다. 조그마한 가게를 연 사람도 허리에 권총을 차고 있을 정도로 권총 강도가 많은 슬럼가였다. 차를 타고 가면서 쏴대는 통에 무고한 희생자가 많이 나온 지역이었다. 절대 가지 말아야 할 정도로 위험한 곳이었으나 가발은 아프리카계 미국인이 주 고객이니 거기로 파고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사방이 꽉 막힌 상태에서 하나님이 열어준 틈새였다.
***[역경의 열매] 이건숙 (24) 가게 데리고 나간 아이들 거리에서 “Come in, Try the wig”
나쁜 환경에서 자녀교육 망치겠다 싶어
베이비시터 구해 낮 동안 아이들 맡겨
친구와 약속 지키려 야간대학원 입학
소설가 이건숙 사모가 1988년 남편 신성종 목사, 두 아들과 가족사진을 촬영하고 있다.
우리 부부는 겁도 없이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에게 물어물어 선반을 샀다. 하나씩 둘러메고 와서 사방에 선반을 매달고는 가발을 진열했다. 필라델피아 남쪽에 처음 들어선 가발 가게였다. 금요일 오후와 토요일에 손님이 밀려와서 선반에 진열해놓은 가발이 하나도 남지를 않았다. 몽땅 팔려 돈이 소쿠리에 수북했다. 주말에 팔리는 것이 그 주간의 80%를 차지했다.
주중에는 아이 둘을 데리고 기차와 버스를 번갈아 갈아타고 가발가게에 와서 장사했다. 손님이 적어 아이들을 돌볼 수 있었고 한국 수출업자들이 직접 가발을 가져와서 그 주간에 팔릴 양만큼 주문도 해야 했다. 아이들은 좁은 가발가게에 갇혀 지내기 답답해서 내가 다용도실에서 고객들이 맡긴 가발을 세탁하는 잠깐 사이 길거리로 나갔다. 놀라서 쫓아나가니 두 아이는 지나가는 흑인 여자들을 향해 이렇게 외치고 있었다.
“Come in, come in. Try the wig. You look so gorgeous.”(어서 들어오세요. 가발을 써보세요. 당신 정말 예뻐요.)
나는 그 자리에서 얼어붙었다. 여기서 아이들 교육을 한다는 건 차라리 유학 생활을 접는 편이 낫겠다는 생각이 퍼뜩 스쳤다.
수입이 많으니 교회 사찰 직은 남편 신성종 목사의 친구 유학생에게 넘기고 아파트를 얻어 나갔다. 그리고 그 시절 그리 흔하지 않은 일이지만 아이들을 낮에 맡아 돌봐줄 베이비시터를 구했다. 남편의 직장을 따라 플로리다에서 이사 온 백인 여자는 흔쾌히 우리 아이들과 자신의 아이들 모두 함께 돌보기 시작했다. 그래도 걱정이 되어 하루는 살짝 숨어서 그 집을 찾아 나섰다. 넓은 마당에 아이들 다섯이 뛰어놀고 있었다. 백인 여자는 기다란 막대기를 들고 계단 위에 서서 아이들이 위험하게 움직이거나 싸우든지 울타리 밖으로 나가면 막대기를 휘두르면서 사령관처럼 호령했다. 베이비시터와 눈을 맞추면서 점심을 먹는 현장에 몰래 숨어 들어가 우리 아이들을 살폈다. 세상에! 이건 완전 군대 교육이었다. 밥을 먹은 접시엔 절대로 음식이 남아서는 안 되는 모양이다. 우리 아이들은 콩을 싫어하는데 절반은 콩이라 걱정을 했지만 다른 아이들과 함께 음식을 싹싹 먹어치우고는 나란히 서서 접시를 싱크대에 올려놓았다. 마음이 놓이기는 했지만 가슴이 찡하니 아팠다.
야간대학원을 알아보기 시작했다. 미국 도서관은 자유 개가식 시스템이라 호기심을 자극했다. 게다가 도서관학과는 석사 코스로 자신의 전공 분야의 책들을 분류하는 작업을 해도 된단다. 내 경우는 독문학과 한국 도서를 분류하면 방에 갇혀 책만 분류하고 돈도 벌 수 있다니 마음에 쏙 들었다. 필라델피아에서 가톨릭 계통의 사립대학으로 흑인 학생이 없는 부자들만 다닌다는 빌라노바대학의 입학 허가를 받았다. 입학시험을 통과하고 야간에 가발가게를 닫고 일주일에 두 번 수업에 들어가야 했다. 남편의 지청구는 대단했다. 어린아이 둘을 두고 공부한다는 것이 억지라고 어찌나 잔소리를 하고 투덜대는지 주눅이 들었지만, 친구가 제시한 조건을 어길 수 없었다.
***[역경의 열매] 이건숙 (25) 돈 욕심에 “우리 한국 가지 말고 장사나 해요”
가발가게 잘 되자 슬그머니 탐심 생겨
모교 교수로 청빙 받은 남편은 단호하게
“먼저 갈테니 학업 마치고 바로 귀국해”
소설가 이건숙 사모가 1989년 대전중앙교회에서 목회하던 남편 신성종 목사와 나란히 서 있다.
우리 부부가 가발가게를 시작한 2년간은 초창기 개척 시기라 호황이었다. 남편 신성종 목사는 돈이 들어오니 오로지 공부에만 전념할 수 있었다. 좋은 타자기도 사고 책도 마음대로 사서 공부하는 속도가 빨라 급 스피드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가발가게를 하는 동안 내겐 엄청난 유혹이 다가왔다. 세상에! 돈이 술술 들어오니 돈으로 무엇이나 할 수 있었다.
“여보! 우리 교수니 목사니 신학자니 다 팽개치고 장사를 합시다. 돈이 이렇게 술술 들어오는데 뭣 하려고 그 고생을 해요. 영주권을 신청하고 다운타운 좋은 곳에 큰 가게를 차리고 돈을 왕창 벌어요. 목사보다 장로가 되어서 헌신하면 되잖아요.”
이렇게 돈독에 빠진 나를 남편은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단호한 어조로 강하게 말했다.
“나 오늘 모교 교수로 청빙 받았어. 내가 아이들 데리고 귀국할 터이니 당신은 가게를 정리하고 학업 마치고 바로 귀국해.”
“난 안 갈 거야. 여기서 돈 벌 거야. 세상에! 이 좋은 돈!”
“우리 두 사람 공부 끝나면 하나님께서 바로 걷어간다고 했어. 내가 기도 응답 그렇게 받았으니 빨리 가게를 정리하라고.”
그는 바로 아이들을 데리고 귀국 준비를 하고 내가 다니는 대학 근처에 방 하나를 얻어주면서 자동차는 바로 팔아버려 내 발을 묶어버렸다. 겁이 많았던 나는 운전대를 잡지 못하게 해서 운전을 못 하니 꼼짝할 수가 없었다. 가발가게를 정리한 돈은 남편과 아이들의 귀국 비행기 표와 책을 부치는 데 쓰고 나의 일 년 학비와 식비를 남겨둔 채 말이다. 필라델피아 남쪽은 위험한 곳으로 두어 번 권총 강도를 당했으나 함께 일하던 흑인 여자의 기지로 살아났다. 하나님은 딱 우리 부부가 공부할 만큼만 물질을 주셨다.
백인들 틈에서 그들 음식만 먹으면서 일 년을 사는 것은 참으로 힘들었다. 아무튼 정상으로는 1년 반이 걸릴 코스를 집중해 1년 안에 다 마치고 다행히 단번에 졸업시험에 통과해 곧바로 귀국했다.
돌아와 보니 아이들도 남편도 엉망이었다. 우리의 도움을 받은 신학생이 이상한 편지를 보내놔서 신학교에서 교편을 잡을 수가 없었다. 소속된 교회가 이북파이고 신학교는 경상도파라 그렇다고 했다. 친정어머니 혼자 사는 집으로 아이들을 데리고 들어가서 남편은 전도사 생활비를 받으며 고생하고 있었다.
박사 학위를 받고 귀국해 충현교회에서 존경하는 K목사에게 목사 안수를 받을 정도로 그는 원로목사를 사랑했다. 그분의 첫 번째 세례자이고 결혼 주례와 목사 안수까지 같은 목사에게 받았으니 남편의 일생을 함께한 교회와 목사였다. 그러나 단 한 번의 학비 도움도 비행기표 도움도 받은 일이 없었다. 내가 미국에서 돌아온다고 얻어준 교회의 사택은 살 수 있는 환경이 아니었다. 청계천 고가도로와 나란히 자리 잡은 상가아파트여서 소음과 먼지로 공기가 탁했다. 빨래해서 베란다에 널면 고가도로를 달리는 차량이 뿌리는 먼지로 새까맣게 되어 문을 닫고 살아야 할 정도였다. 학위를 받고 귀국하면 모든 고난이 끝나는 것으로 알았던 나는 낙망하여 쓰러져 고려병원에 2개월간 입원했다.
***[역경의 열매] 이건숙 (26) 이제 겨우 살만한데… 교수직 버리고 목회 결심한 남편
아이들 학업에 중요한 시기라 반대하자
“영혼 구하는 일이 내 사명”이라며 고집
40대 사모로 내조하며 겪었던 일 출간
소설가 이건숙(가운데) 사모가 2004년 남편 신성종(오른쪽) 목사와 교회 수련회에서 피에로와 함께 서 있다.
남편 신성종 목사는 늦은 나이에 안수를 받고 충현교회 대학부를 인도하다가 사임했다. 명지대 교수 겸 대학교회 목회를 했다. 두 가지 사역 모두 전임이라 드디어 강단 위에서 쓰러지는 사건이 나고 하나님은 그제야 귀국할 적에 원했던 그 신학교로 보냈다. 거기서 부교수를 거처 정교수가 되고 대학원장이 되었다. 시동생들도 자립하고 이제 시부모님만 남아 숨통이 트이는데 남편은 갑자기 학교를 버리고 목회를 하겠다는 결심을 했다. 나도 어느 정도 안정을 하고 서강대와 서울여대 등에서 도서관학을 강의하고 있었다. 나는 요번에는 못 따라가겠다고 고집을 부렸다. 이제야 겨우 삶의 궤도에 올랐는데 목회라니! 남편은 어찌나 고집이 센지 본인이 결정한 일은 막무가내로 밀고 나갔다.
“신학교에 있다가는 나는 숨을 쉴 수가 없어. 정치판이야. 사회의 정치도 식상한데 여기도 마찬가지야. 차라리 목회를 하면서 영혼을 구하는 일이 하나님이 내게 명한 일이야.”
나는 반기를 들었다.
“그간 고생한 식구들도 생각하셔요. 큰애가 지금 고3이니 대학을 가야 하고 작은 애도 고2니 가장 중요한 시기에 처한 아이들을 버리고 어떻게 대전으로 간다고 해요.”
아이들은 하나님께서 다 키워주신다는 주장을 했다. 목사인 남편이 주장하는 것이 하나님의 일로 여겨 감히 내가 막을 수 없었다. 거기서부터 시작된 목회는 온전히 하나님의 손에 쥐어진 삶이었다.
마흔이 넘어 나는 사모의 자리에 서니 전부 이상하게 보였다. 더구나 문제 있는 곳이라고 떠들썩하게 소문난 교회로, 목사 장로 교인들이 육탄전을 벌이다가 재판정까지 가서 판결문을 교회 입구에 붙여놓은 그런 교회였다. 우리 부부의 고생은 여태 살아온 삶보다 더 힘들었다. 이 경험은 내가 최근에 펴낸 장편 ‘예주의 성 이야기’에서 일부 소설화했다.
거기서 목회하면서 월간목회에 연재한 사모 핸드북 ‘사모가 선 자리는 아름답다’는 많은 사모와 신학생들 그리고 성도들에게 길잡이로 읽힌 책이다. 싸우고 나간 사람들이 주일마다 와서 학생들을 버스로 태워가는 바람에 따라가지 못하는 영아들을 모아놓고 영아부를 시작했다. 부모교육을 매주 했는데 아이들을 맡겨놓고 하는 수업이라 손자를 보러온 할머니 할아버지까지 참석해 만원이었다. 여기서 강의한 내용이 홍성사에서 ‘엄마, 난 하나님의 선물이에요’로 출간, 이 책도 영아부가 많은 교회에 길잡이 교재로 사용됐다.
그뿐인가. 월간목회에 연재된 40대 사모로서 겪었던 ‘꼴찌의 간증’이란 수필도 홍성사에서 출판, 지금도 목사들을 만나면 회자되기도 한다. 다홍치마 적부터 사모가 된 분들이 느끼지 못하는 것을 나는 마흔이 넘어 소설가가 되어 써 내려갔다. 그 외에 월간목회 연재 출판물은 ‘이런 때 성도는 어떻게 말할까’와 ‘이런 때 사모는 어떻게 말할까’가 있다. 교회 안에 난무하는 상처 주는 말들을 성화시키는 대화법을 썼다. 그렇게 목회 현장에서 소설이 아닌 산문을 쓰다가 10년 세월이 흐른 뒤에 나는 모든 걸 털어내고 본격적인 소설 쓰기로 돌아섰다.
***[역경의 열매] 이건숙 (27) 목회 현장서 얻은 소중한 글감, 소설로 다시 태어나
심방 통해 이야기 들으며 성도들과 교감
남편의 신념 따라 다시 미국 LA로 목회
상처투성이 이민자들 돌보며 어루만져
소설가 이건숙(왼쪽 두 번째) 사모가 2000년 남편 신성종(왼쪽) 목사 및 친정어머니(왼쪽 세 번째)와 미국 LA에서 기념촬영을 했다.
남편과 목회하는 동안 기독교 전래 100여년 역사에 켜켜이 스며있는 인물들이 소설 글감으로 넘쳐났다. 목회 현장에서 교인들이 전해주는 선조들의 신앙 이야기를 짧은 스마트 소설 형식으로 월간 새가정에 ‘민초들의 이야기’ 제목으로 연재했다. 세월 속에 살아오고 있는 이들의 믿음은 반드시 남겨야 할 글감들이었다. 나는 심방을 가면 그 집안의 선조들 이야기를 들으려고 귀를 세웠다. 그들은 신이 나서 풀어놓는 통에 사랑과 소통의 줄이 탱탱하게 당겨져 성도들과의 관계가 더 돈독하고 깊어졌다.
대전 목회에서 가장 나를 힘들게 했던 사건은 작은아들의 발병이었다. 머리가 좋고 다재다능하게 태어난 아들은 우리의 멀고도 험한 좁은 길을 따라오면서 드디어 병으로 쓰러져 버렸다. 우리 부부는 사탄과의 최전선에 나설 어느 정도의 준비가 되어있었지만, 막내아들은 유리 어항 속 삶을 견디질 못했다. 이 아들의 투병은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다. 이런 고난으로 점철된 남편의 목회와 아들의 병을 씨줄과 날줄로 엮어 월간 창조문예에 ‘멀고도 험한 좁은 길’로 연재했다. 일부 자전적 소설이라 출판을 꺼리다 결국 ‘예주의 성 이야기’란 제목으로 펴냈다. 그 책을 읽은 독자들은 다른 소설보다 영성이 깊어 감동을 받았다고 전화를 하면서 흐느끼기도 한다.
남편 신성종 목사가 서울 충현교회를 거쳐 다시 미국으로 태평양을 건너 목회지를 LA로 옮기는 날 친정어머니는 울부짖었다. 지금도 이따금 귀청을 찢는 친정어머니의 통곡이 비가 오는 날이나 우울할 적에 아직도 나를 힘들게 한다.
“기막히게 고생하며 자라고 키워낸 이 귀한 싹을 어떻게 이렇게 무참하게 짓밟아 뭉갤 수가 있는가! 이건 아니다. 너무 잔인하다. 목사와 신학자로 서기까지의 세월이 가슴 아프다.”
그런 장모를 향해 신 목사는 이렇게 말했다.
“이 교회를 향해 돌을 던지지 말라고 하나님이 제게 명하셨어요. 저를 하나님이 강제로 이 교회에서 빼내셨다고요. 제가 미국으로 가는 것은 교회를 보호하기 위해서입니다.”
이것은 대형교회인 충현교회가 아들에게 목사직을 세습하는 효시가 되었다. 그래도 감사할 일이 많다. 조용기 목사님은 빈손으로 나온 우리 가정을 위해 기도하고 위로하는 전화를 미국까지 해주셨고 옥한흠 목사님은 당분간 살라고 생활비까지 주셨다. 하용조 목사님과 이형기 사모님께도 늘 감사하다. 특히 이 사모님의 사랑은 잊을 수 없다. 수없이 전화로 기도해주셨던 김상복 목사님과 이재철 목사님, 특히 일주일이나 단식하며 우리 가정을 위해 기도해주시고 시부모 병원비에 더해 2년간 우리를 보살폈던 기독교선교횃불재단의 이형자 권사님께도 늘 감사하다.
다른 좋은 목회지가 나왔는데도 남편은 자신의 신념을 따라 고생 많은 미국 LA 목회를 시작했다. 하나님은 문제 있는 교회만 골라 병든 교회에 마지막 카드로 그를 배치했다. 참으로 험난하고 특이한 소명이었다. 이민 목회는 남의 땅에서 살아가는 상처투성이 이민자들을 돌보는 목회다. 삶의 굴곡이 아주 심해서 저들이 끌어내리는 밑바닥까지 그들의 원초적인 몸부림을 접하는 생활이었다.
***[역경의 열매] 이건숙 (28) 부족한 재정 메우려 몸 혹사… 새벽 기도회 도중 쓰러져
교인들과 함께 길거리 나가 헌 옷 팔며
성전과 양로원 지을 돈 마련 중 병 얻어
몸 추스른 후 고국서 치료 받기위해 귀국
소설가 이건숙(왼쪽 두번째) 사모가 남편 신성종(왼쪽 세번째) 목사와 함께 2004년 서울 여의도순복음교회를 방문해 이영훈(오른쪽 두번째) 목사와 환담하고 있다.
몸을 짓누르는 무게에 눌려 간신히 눈을 뜨니 남편 신성종 목사가 내 옆에 엎드려 있었다. 한의사도 다녀갔는지 목 뒤에 자잘한 일회용 침이 꽂혀 있었다. 온몸에 생명구조 장치가 주렁주렁 달렸고 입을 열 수가 없었다. 의식이 돌아와 눈을 뜬 나를 보더니 남편은 흐느꼈다.
“살아났군. 하나님이 내 기도를 들어주셨어. 이제 우리 고국으로 돌아가서 치료를 받자. 온전히 당신을 위해서 내가 살 거야.”
말을 못 했으나 귀는 열려서 그의 말을 다 들을 수가 있었다.
“하나님이 생명만 건져주시면 똥오줌을 싸도 좋으니 살려달라고 기도했어. 하나님은 내 기도를 들어주신 거야. 이제 됐다.”
나는 새벽기도회 도중 쓰러졌다. 늦게 배운 운전으로 이웃에 사는 권사님을 모시고 새벽기도회를 다녔는데 모두가 다 나와도 사모가 보이지 않자 가보니 내가 의식이 없었다고 했다. 권사님이 사람 살리라고 악을 쓰며 고함을 치니 마침 남아 있던 부목사가 듣고 바로 구급차를 불러 중환자실로 옮겨졌다고 한다.
이민 목회는 재정까지 부족해 나는 교인들과 길거리에 나가 ‘우노 달러(1$)’를 외치며 헌 옷을 팔아 성전 짓는 일을 도왔다. 몸을 혹사하며 병을 얻긴 했지만, 그 시기 맺었던 그들과의 사랑에서 교회란 건물이 아니라 거기 모인 성도들이 바로 교회라는 큰 교훈을 얻었다.
나는 말도 어눌하고 왼쪽을 잘 쓰질 못했다. 그렇게 몇 개월 어느 정도 몸을 움직이기 시작하자 남편은 LA에서 귀국을 서둘렀다.
“여기 있다가는 당신이 살아남지 못하겠어. 무조건 돌아가자. 내가 오늘 마지막 고별설교를 할 터이니 당신은 맨 뒷줄에 앉아 있다가 송영이 울려 퍼지는 동안 내가 나오면서 등을 칠 터이니 나를 따라 나오라고.”
새로 지은 성전에 자리가 모자라도록 운집한 성도들은 행복에 가득 차서 그게 마지막 설교인지도 모르고 문 앞에 나와 신 목사와 악수하기를 고대할 것이다. 우리는 그 모든 걸 뒤로 하고 교회를 등지고 빠져나왔다. 남편은 서서히 차를 몰아 교회를 한 바퀴 돌기 시작했다. 미국에서 손꼽을 정도로 큰 터를 잡은 교회다. 성전도 크게 지었고 교회 울타리 안에 노인 성도들이 살 160유닛(Unit)의 양로원을 지을 돈도 마련됐다. 다 이뤄놓고 고생만 하고 떠나는 것이다. 항상 남편은 그랬다.
운전대를 잡은 남편을 보니 눈물이 줄줄 흘러 내리고 있었다. 차는 성전을 한 바퀴 돌고 고속도로로 진입했다. 남편은 말이 없었다. 서울을 떠날 적의 막막함과 7년간 이 교회 터를 사서 성전을 지은 모든 일이 주마등처럼 스치는 모양이다. 매일 새벽마다 설교를 했고 울부짖던 기도를 내려놓고 우리는 떠나고 있었다. 이런 그를 향해 나는 가만가만 천천히 말했다.
“수고했어요. 너무나 훌륭하게 당신은 해냈어요. 전 당신을 존경해요. 당신만큼 훌륭한 목사가 이 세상에 몇이나 될까 하는 생각을 하고 있어요.”
굳어있던 남편의 얼굴이 활짝 펴졌다.
“애들이랑 당신, 그동안 너무 고생했어.”
우리 부부는 교회 덩치만 한 큰 짐을 주님의 무릎 위에 올려놓고 가뿐한 몸으로 성전을 벗어났다.
***[역경의 열매] 이건숙 (29) 기독 작가의 글은 생명의 양식… 성도들 삶 문학으로 승화
목회 현장서 듣고 본 일 모두 좋은 글감
효과적인 문학적 장치·기교 동원해 표현
흥미보단 아프도록 생각할 수 있게 해야
소설가 이건숙(앞줄 왼쪽) 사모가 1998년 남편 신성종 목사, 두 아들, 며느리 및 손주와 함께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교회는 하나님의 나라다. 한 국가처럼 세상 모든 층의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이다. 영아 거지 사기꾼 부자 낙오자 정치가 교수 의사 등 모든 층의 사람들이 모인 나라이다.
낙심하고 가난한 병든 사람들을 사랑으로 돌봐야 하고, 거드름을 피우는 가진 자들을 이끌고 천국을 향해 대행진을 하는 곳이다. 사모의 자리는 그 나라의 퍼스트레이디이지만, 존경을 받고 위함을 받는 자리가 아니다. 오히려 맨 밑바닥의 사람들을 섬기며 맨 위의 귀족들까지 다 돌봐야 하는 자리다.
이런 사모의 자리는 정말 많은 글감을 얻을 수 있는 위치다. 내게 문학을 배우는 사모들은 늘 너무 바빠서 글을 쓸 수 없다고 고민을 털어놓는다. 맞는 말이기도 하고 틀린 말이기도 하다. 글감의 바다에 던져져서 저들을 돌보며 문학으로 승화할 수 있도록 도우라는 것이 내 소명이었다. 나는 사모들에게 하나님의 문화 속에서 예술 작품으로 삶을 써보라고 권한다.
유튜브에 낭송한 내 단편소설 중에 ‘황홀한 나들이’란 작품을 많은 이들이 듣는다. 이 작품은 목회 현장에 흔한 성도들을 모델로 쓴 작품이다. 돈으로 목이 굳은 사장 부인, 교수 부인, 시어머니와 남편을 미워하는 등의 삶을 문학으로 승화한 작품이다. 문학이란 다수에게 공감을 주는 포장된 예술품이라 저들은 자신의 이야기인 줄 모른다. 그들 이야기를 썼다가 목회에서 쫓겨난다고 걱정을 하는 사모들을 만나면 효과적인 문학적 장치를 하라고 말해준다. 상징, 은유, 환유, 비유, 상상, 함축된 표현 등의 장치와 기교를 동원하라고 말이다. 문학은 바로 그런 예술성을 살리기 위해 긴 시간 전문성을 요하는 훈련과 노력이 필요하다. 우리 기독교에 산문 작가가 귀한 것은 이런 긴 시간의 훈련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크리스천 작가인 내가 쓰는 글은 생명의 양식이 돼야 한다. 총 칼 독과 같이 사람의 영혼을 유린하는 흉악한 수단이 돼서는 안 된다. 원수도 감동하도록 써야 한다. 잘 쓴 작품은 독자가 아프도록 생각하게 하는 무엇을 내포하고 있는 법이다. 화롯가의 이야기처럼 흥미만 자극하는 것이 아니고 독자가 묵상할 수 있을 만한 적절한 소통 지연의 장치가 필요하다.
내가 소설가로 등단하자 오랜 기간 소설을 써서 알려진 분이 진지하게 이런 충고를 해주었다.
“단편을 몇 편 썼다고 소설가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적어도 50편의 단편을 쓰고 나서 소설가란 명패를 달아야지요.”
맞는 말이다. 작가로 등단해 꾸준히 10년을 써야 신인이란 타이틀을 벗을 수 있는 자리가 바로 글 쓰는 사람들의 위치이다. 그만큼 오랜 인고와 수련 시간이 필요한 법이다. 자신이 겪은 체험이 작가들의 큰 밑천이지만 책을 통해 만나는 간접 체험도 중요하다. 그러기 위해서는 역사 심리학 철학 자연과학 생태학 신화 외에도 많은 문학 작품을 꾸준히 읽어야 한다.
문학이 죽은 시대라고 하는데 나는 아니라고 본다. 문학은 인류의 양심이요 가치관이기 때문이다. 새 바벨탑을 쌓고 있는 인공지능 메타버스를 거치면 시대의 마지막 주자로 영성을, 문학과 기독교를 다시 찾게 될 것으로 확신한다.
***[역경의 열매] 이건숙 (30·끝) 주님이 명한 내 소명은 성경과 문학 사이 다리 놓는 것
목사로 가시밭길 걸어온 남편 동행하며
힘들 때마다 글 쓰면서 위로와 힘 얻어
하나님 문화 넓혀간다는 소명감에 보람
소설가 이건숙(앞줄 오른쪽 세 번째) 사모가 2018년 크리스천문학나무에서 등단한 작가들과 함께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다음 시는 내 아들이 아버지 신성종 목사를 어떻게 보았는지 쓴 글이다. 제목은 ‘아버지가 숨겨놓은 리어카’이다.
‘내 앞에서는/ 항상 새 양복을 입으시던 아버지/ 용돈을 왜 이리 많이 주시나/ 아버지께 물어도 대답이 없으시네./ “아버지 부자 상자를 가지셨지요?”/ 말없이 헤어진 아버지를/ 어느 날 길에서 보았네./ 흙 묻은 헌 옷차림으로/ 붕어빵 장사를 하시는 아버지/ 내 앞에서 나쁜 사람이 리어카를 엎어버렸네./ 아버지는 그걸 세워놓으시고 무법자에게 비시네./ 내일도 나의 아버지는 새 양복을 입으시고/ 부자 상자를 가지신 듯 용돈을 주시겠네.’
시란 상징성을 띠고 비유와 환유하며 쓰는 것인데 아들의 눈에 비친 목사 아버지의 고통을 이해한 시라 나는 이 시를 읽으면 만감이 교차한다. 아버지는 양복을 입고 아들과 성도들 앞에 언제나 의젓하게 서서 모두 앞에 지극히 겸손하고 사랑이 넘치는 평안한 얼굴로 우뚝 서 있지만 속으로 앓는다. 아들은 철들어 아버지의 속앓이를 꿰뚫어 보았다. 따지고 보면 목사의 자녀들은 숨 막히는 자리임이 분명하다. 부모를 따라 사탄과의 최전선에 임해야 하니 말이다. 처음 목회지로 나설 적에 작은아들은 이렇게 절규했다.
“아빠! 목사 하지 말자. 그냥 교수로 지낼 수 없어? 아빠가 목사가 되면 난 동물원 원숭이 꼴이 된단 말이야. 제발 그냥 교수 하자.”
뒤돌아보면 아픈 상처들이 내가 걸어온 멀고도 험한 좁은 길에 흔적을 남기고 있다. 이제 내 등에 주렁주렁 매달렸던 무거운 짐들이 다 떨어져 나가서 날고프지만, 날개가 휘어서 멀리 높게 날 수가 없다.
하지만 문학이란 엄청난 바다를 앞에 놓고 나는 그저 감사할 따름이다. 내 손을 잡아끌어 펜을 쥐여주면서 글을 쓰게 하신 하나님의 놀라운 소명에 글쓰기 전 묵상기도를 할 적마다 눈물이 난다. 아마도 펜이 내 손에 없었다면 나는 거친 풍파에 벌써 쓰러졌을 것이다. 글을 쓰면서 위로받았고 치유되었고 힘을 얻었기 때문이다. 더구나 하나님의 문화를 넓혀간다는 소명감에 보람을 느낀다. 결국 하나님이 명한 내 소명은 성경과 문학 사이에 다리를 놓아 하나님의 문화를 확장하며 저들의 가치관을 변하게 하는 일이다.
영화 ‘죽은 시인의 사회’에 나오는 ‘카르페 디엠’을 외치며 죽음을 앞둔 나이에 내가 하고픈 일을 하리라. 읽고 싶었던 책들을 맘껏 읽고 계속 글을 쓰고 깊이 있게 사색하리라.
남편의 신학교 동기동창 목사님이 최근 동창회에서 모두의 수고를 위해 쓴 시로 ‘역경의 열매’ 기고를 마무리한다. 제목은 ‘멋진 당신의 인생’이다.
‘폭설이 내린 머리에는/ 머리카락보다/ 많은 사연이 있고/ 주름이 깊은 이마에는/ 고뇌하며 견딘/ 세월의 흔적이 있고/ 휘어진 허리는/ 알차게 살았다는/ 인생의 징표인데/ 그 값진 삶을 산 당신에게/ 누가 함부로 말하겠는가/ 남은 삶은 짧아도/ 그 깊은 삶의 무게를 누가 가볍다 하겠는가/ 당신이 남긴 수많은 발자국/ 그 값진 인생은/ 박수받아 마땅하지 않은가/ 꿈이 있는 한 나이는 없다/ 멋진 당신의 인생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