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일(消日)
이 수 영
코로나 19 덕분에 하루 종일 집콕하고 지내면서도 마음만은 우왕좌왕 바쁘게 살아간다. 핸드폰을 손에 쥐고 집안을 뺑뺑이 돌다가 책을 마주하고 앉는다. 얼마 안 있으면 눈이 가물가물 해 진다. 책장을 덮고 컴퓨터를 연다. 메일도 검색하고 수필교실의 작품 세계를 넘나들며 이글저글에 댓글을 달아본다. 댓글을 쓸 때마다 그 글이 담고 있는 내용의 정곡에서 벗어난 듯하여 마음에 들지 않는다.
눈이 점점 피로해 진다. 컴퓨터 화면이 뿌옇게 흐려지면 그냥 끄고 만다.
시계를 쳐다본다. 시계는 느림보다. 시계바늘은 언제나 내 생각보다 늦장을 부린다.
먹을 갈고 붓을 든다. 화선지에 늘 쓰던 글씨부터 호기롭게 써본다. 눈이 한결 밝아진 듯하고 큰 글씨를 쓴 덕분일까. 마음이 편안해 진다. 서예공부를 처음 시작하면서부터 늘 서서 쓰던 버릇이 계속되다보니 앉아서 쓰거나 다른 자세로 쓰는 것은 오히려 몸과 마음이 편치 못해서 배운 버릇대로 서서 쓰다보면 이 또한 오래 버티지 못한다.
앉아서 쉬다가 서서 쓰다가, 중간 중간 칠체자전(七體字典)이나 옥편(玉篇)을 뒤적이다보면 시간이 물 흐르듯 흘러간다. 하지만 변덕이 죽 끓는 듯하다는 말처럼 그 일 또한 그리 오래 가지는 못 한다.
책 읽는다고 눈을 혹사시키고, 글씨 쓴다고 허리가 뻣뻣해지고 이러다 안 돼겠다 싶어 폼나게 등산 스틱을 들고 집을 나선다.
늘 다니는 산책로에 들어선다. 눈을 감고도 길이 훤하다. 어디쯤이면 오름이 있고, 돌아가면 내림길 한 켠에 아름드리 전나무가 있고 그 아래쪽 양지마른 비탈에는 반듯한 상석이 놓인 이 마을 당나무가 위용을 자랑하고 있다. 나무를 껴안아 본다. 나무는 종류에 따라, 크기와 날씨에 따라 안을 때마다 느낌이 다르다.
차분한 마음으로 팔을 한껏 벌려 나무를 껴안고 나무껍질에 귀를 대고 있으면 나무속에서 무슨 소리가 들려오는 듯하다. 나무줄기를 오르는 물소리일까? 아니면 바람이 지나가는 진동일까. 아무튼 그 소리 또한 그때마다 다른 것은 그냥 나의 환청 탓일까?
다시 길을 나선다. 지나가는 사람들은 얼굴도 짐작 안 되게 마스크를 꾹 눌러쓰고 있다. 그들이 지나갈 때마다. “안녕 하세요.” “날씨가 좋네요.” 실없이 말을 걸어본다. 대부분 말도 없이 그냥 지나치지만 더러는 “건강하세요” “감사합니다” 라고 큰 소리로 화답하는 사람도 있다. 볼 수는 없어도 마스크 속에서 웃고 있으리라. 어쩌다 이 지경이 되었느냐고 세상 탓을 해 본다. 그도 나와 같은 마음일까? 시간은 그렇게 무료하게 흘러가는데 기분은 늘 뭔가를 잃어버린 것 같은 허전함으로 메말라 있다.
며칠에 한 번씩은 산책로 저쪽 그늘 좋은 나무 밑에 단골 친구 두 명이 기다리고 있다. 미리 연락을 해 둔 터다. 각자 등산 가방에 넣어 온 일인 일품을 꺼내 놓는다. 막걸리 밖에 못 마시는 친구를 위한 막걸리 두 통, 두 명이 같이 먹을 소주 세 병, 식사 겸 안주로 김밥 세줄, 그리고 약간의 과일과 간식들을 펼쳐 놓으니 이만한 술자리면 어디에 내 놓아도 모자라지 않는 진수 성찬이다. 괜히 식당에서 비싼 돈 내고 남들의 눈치를 봐가며 마스크를 올렸다 내렸다 하는 불편도 없다. 우리만의 넓은 공간에서 마음 편히 술 한 잔을 나눌 수 있는 이 순간이 바로 행복이 아니겠는가. 산이 있고 나무가 있고 친구가 있고 거기서 내려다 보이는 아래쪽 계곡에는 어제 온 비로 제법 개울 모습을 갖춘 계곡의 물소리가 정겹다. 그리고 나뭇잎을 스치는 바람소리가 온 몸을 시원하게 한다.
소일에는 건망증이 도움이 된다. 어제와 똑같은 일상이 반복되는 데도 지루함을 느끼지 않고 늘 새로울 수 있는 비결은 그렇게 잊을 수 있는 망각의 나이가 도움이 되는 것 같다.
오늘은 자연 속에서 친구들의 얼굴을 마주 보고 하산주 한잔에 마음껏 정담을 나누었으니 코로나 19의 덕분이 아니겠는가? 이보다 더 좋은 소일이 또 있을까. 신명나는(?) 하루가 느린 듯 빠르게 지나가고 있다.
2020. 9. 11
첫댓글 코로나 때문에 소일 거리가 더 즐거운가 봅니다. 마음의 여유가 중요한 것 같습니다. 일체 유심조라 했으니 마음먹기에 따라 코로나도 친구가 되겠습니다. 유유자적. 하루하루 잘 보내시기 바랍니다.
코로나 세상에 맞추어 지혜롭게 여유롭게 하루를 즐기시는 모습이 참 좋습니다. 글을 읽는 저의 마음마저 편안해집니다. 난생 처음 맞이하는 언택트 시대입니다. 마음 방역을 잘 하는 지혜가 필요해 보입니다. 건강하십시오.
한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코로나 세상이지만 사람들은 나름의 지혜를 발휘해서 스스로를 잘 관리하고 있는 것으로 보였습니다. 저만 허둥지둥 시간만 흘려보내고 있습니다. 선생님께서는 같은 듯 매일 다르게, 아름답고 건강하게 소일하고 계신 것 같습니다.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역시 仙遊의 모습입니다. 코로나도 감히 범하지 못하는 선생님의 消日이 신선들이 노니는 모습 같습니다. 글을 읽고 글을 쓰시다 횅하니 밖을나와 물소리 바람소리 벗을 삼아 나무를 안고 사랑을 속삭이며 김밥 한줄과 술한잔으로 친구들과 어울려 코로나도 머거리도 개의치 않으시고 보내시는 일상이 부럽습니다. 좋은 글 잘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