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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말씀의 향기♣ No2471
7월29일 [성녀 마르타 기념일/연중 제17주간 수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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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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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 오늘 미사**
https://m.youtube.com/watch?v=CBwYArRTt9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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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예수님 앞에 힘들면 힘들다고 말씀드리는 것, 아주 좋은 기도입니다!>
예수님의 주변 인물들 가운데 참으로 특별한 여인이 있었으니, 요즘으로 치면, 열혈 성모 회장님 격인 베타니아의 마르타입니다. 우선 그녀는 성격이 무척이나 활달하고 괄괄했습니다. 적극적이고 헌신적이었습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은 수시로 라자로·마리아·마르타의 집을 드나드셨습니다. 시도 때도 없이 잔뜩 굶주린 장정들이 우르르 나타나면 마르타는 갑자기 바빠지기 시작했습니다.
때로 ‘오신다면 오신다고 미리 기별이라도 해주시면 어디 덧날까?’하며 속으로 투덜거리기도 했지만, 언제나 지극정성으로 예수님과 제자들의 식사며 잠자리를 제공했습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을 위해 마르타가 3년 동안 구워낸 빵만 해도 엄청날 것입니다. 소요된 밀가루만 해도 수십 가마니였을 것입니다. 청소기며 세탁기를 돌리고 또 돌렸을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마르타는 예수님과 허물없이 지내기로 유명했습니다. 마치 가족처럼, 친 오빠처럼 부담없이 예수님을 대했습니다. 하고 싶은 말 있으면 마음에 담아두지 않고 있는 그대로 솔직히 말씀드렸습니다.
한번은 갑작스레 밀어닥친 손님들 대접에 정신없이 바쁘던 마르타가 동생 마리아를 찾아보니 예수님 발치에 넋나간 얼굴로 앉아 있었습니다. 화가 머리 끝까지 난 마르타는 볼맨 목소리로 예수님께 따지기도 했습니다.
“예수님! 이거 너무 불공평한 거 아닙니까? 저는 예수님과 제자들 식사 준비한다고 손이 열 개라도 부족한 형편인데, 마리아 저거 보십시오. 저렇게 속도 없고 눈치도 없습니다. 하루 이틀도 아니고 마리아 때문에 제가 속터져 죽겠습니다. 제발 예수님께서 마리아에게 저를 도와주라고 말씀해주십시오.”
또 다른 예가 있습니다. 사랑하는 오빠 라자로의 죽음 앞에 너무나 속상했던 마르타는 늑장을 부리신 예수님께 서운한 감정을 감추지 않고 있는 그대로 표출했습니다.
“예수님, 대체 뭐 하시다가 이제야 나타나십니까? 다른 사람은 다 고쳐주셔놓고, 왜 절친인 오빠는 그냥 죽게 놔주셨습니까? 그동안 저희 집에 오셔서 드신 끼니가 몇 번이나 되는지 아십니까? 그렇게까지 대접 받아놓고 이거 너무 하신거 아닙니까? 조금만 빨리 와주셨으면 좋았을텐데, 정말이지 해도 해도 너무하십니다.”
보십시오. 마르타는 예수님과 막역지간으로 지냈습니다. 불편한 것이 있으면 불편하다고, 속상한 일이 있으면 속상하다고 솔직하게 예수님께 털어놓았습니다.
어찌보면 예수님과의 관계 안에서 마르타가 보여준 모습은 아주 좋은 기도의 모습입니다. 예수님 앞에 힘들면 힘들다고 말씀드리는 것, 아주 좋은 기도입니다.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일 앞에서 예수님 앞에 어떻게 이럴 수 있냐며 울고 부르짖는 것, 아주 좋은 기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우리에게도 마르타가 취한 태도, 마르타의 솔직한 모습을 지니기를 원하십니다. 마르타에게 예수님은 두려운 분이 아니었습니다. 어렵고 부담스런 분도 아니었습니다. 지극히 편안하고 다정하신 분, 뭐든 털어놔도 싫은 기색하지 않는 따뜻한 친정 오빠 같은 분이었습니다. 이런 마르타였기에 그녀 신앙은 일취월장, 급성장을 거듭합니다. 도통 이해할 수 없었고 억울하기만 했던 오빠 라자로의 죽음에 담긴 의미를 마침내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마르타는 예수님께서 죽음조차 좌지우지할 수 있는 전능하신 주님임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분 앞에 죽음은 더 이상 죽음이 아니요 새로운 삶에로 옮아감이라는 진리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이런 감동적인 신앙 고백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예, 주님! 저는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시기로 되어 있는 메시아시며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믿습니다.”(요한 복음 11장 27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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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감사할 일이 없는데 어떻게 감사하나요?>
(묵상 동영상)
https://youtu.be/EiqmaYUTBX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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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감사해야 더 감사한 일이 많이 생긴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감사는 은총을 받기 위해 우리가 은총을 주시는 분께 내어놓는 손과 같습니다. 크게 벌리고 있어야 더 큰 은총을 주십니다. 그러나 어떤 분들은 감사할 일이 없는데 어떻게 맨날 감사하느냐고 묻습니다. 또 어떤 분들은 당연히 감사해야 할 때는 감사하며 잘살고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가장 고통스러운 상황에서까지 감사할 수 없다면 아직은 잘 감사하며 사는 것은 아닙니다. 나의 죽음 앞에서까지 감사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완전한 믿음일 것입니다.
오늘 축일을 맞는 마르타 성녀는 예수님 당시는 완전한 모습을 보여주지는 못했습니다. 물론 오빠가 죽은 상황에서 감사하기는 어려웠을 것입니다. 마르타가 믿음이 완전했다면 주님께 “주님, 주님께서 여기에 계셨더라면 제 오빠가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라는 원망 섞인 말은 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고, 또 살아서 나를 믿는 모든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당신이 부활이요, 생명이라면 그 은혜를 이 세상에서 더 받고 다른 이들에게도 믿음을 전하는 도구로 쓰이는 것에 감사해야 하지 않느냐는 뜻입니다. 가장 고통스러운 상황에서도 감사할 수 있으려면 주님께서 생명이요 부활이심을 믿어야 합니다. 그러나 인간은 자신의 틀 안에 하느님의 자비를 가두려 합니다.
배우 겸 방송인 문천식 씨가 한 TV 방송에 나와서 뜨거운 눈물을 흘린 적이 있습니다. 어린 아들 때문입니다. 그는 아들이 선천성 화염상모반이라는 희귀질환에 걸렸습니다. 해당 질환은 모세혈관으로 이뤄진 양성종양으로 붉은 반점이 피부에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는 녹내장을 동반하는 병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아이는 태어난 지 6일 만에 수술해야 했고, 수면 마취 12번, 전체 레이저 시술은 17번을 받았습니다. 갓 태어난 작은 아기에게 주사바늘을 꽂아 가면서 전신 마취해 수술하는 모습을 보는 부모 마음은 미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이후에도 소금이 있는 음식을 먹으면 붓거나 혈압이 올라가고 그러면 자연스럽게 안압이 올라가서 온 가족이 음식을 늘 싱겁게 먹을 수밖에 없는 상황입니다. 문천식 부부는 아기 첫 돌 때 이러한 편지를 읽어주었다고 합니다.
“지난 일 년간 엄마아빠가 눈물로 기도하며 깨달은 것이 있단다. 우리가 널 키우고 걷게 하는 줄 알았는데, 오히려 네가 우리를 바로 서게 만들더라. 세상에 널 만드시고 가족으로 만들어주신 하느님께 영광을.”
어떠한 삶의 밭에서도 감사의 보물을 발견할 줄 아는 것이 믿음입니다. 우리 삶의 밭에는 항상 보물이 있습니다. 그것을 발견하지 못하는 이유는 그 밭을 적극적으로 일구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런 돌밭에서 어떻게 농사를 짓느냐고 불평하기 때문입니다. 보물이 있을 것이란 믿음으로 밭을 열심히 갈다 보면 반드시 그 밭에서 보물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 보물이 항상 ‘감사할 수 있는 이유’입니다. 어떠한 상황에서도 감사할 거리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 보물은 믿음이 있어야만 발견이 됩니다. 반드시 있다는 믿음이 있어야 눈에 보입니다. 그 믿음은 바로 하느님께서 역사를 초월해 계시고 그래서 그분께서 주시는 모든 것들은 다 은총이라는 깨달음을 얻게 합니다. 이 믿음이 바탕이 되어야 모든 상황에서 감사를 찾아낼 수 있습니다.
독일의 한 중년 그리스도인이 대학병원의 수술실에서 설암 때문에 혀를 절단하는 수술을 받게 되었습니다. 마취 주사를 손에 든 의사가 잠시 머뭇거리더니 “마지막으로 남길 말씀은 없습니까?”라고 물었습니다. 글로 쓸 수는 있겠지만 혀를 사용하는 언어는 이것이 최후이기 때문이었습니다. 간호원, 조수, 수습 의사들을 비롯하여 둘러선 모든 사람의 표정과 분위기는 심각했습니다. 잠시 침묵과 긴장의 시간이 흘렀습니다. 저마다 만일 나에게 한 마디 언어 밖에 남아 있지 않다면 누구의 이름을 부를 것인가 생각했습니다. 드디어 두 줄기 눈물이 흐르기 시작하더니 환자의 입이 움직였습니다. 그는 같은 말을 세 번 되풀이함으로써 최후의 한 마디를 남겼습니다.
“주 예수님, 감사합니다. 주 예수님, 감사합니다. 주 예수님, 감사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라자로가 죽도록 버려두신 이유는 썩은 몸을 부활시켜서 이스라엘 백성이 믿게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라자로와 그의 누이들은 이 일을 위해 희생제물로 봉헌된 것입니다. 그분이 부활이요, 생명이라고 하신 이유는 내가 죽더라도 은총임을 믿으라는 뜻입니다. 부활이요, 생명이 우리 곁에 있으니 지금 죽어야 한다고 할 때도 그 안에서 감사를 찾아냅시다. 우리 앞에 부활과 영원한 생명이신 분이 기다리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감사할 일이 전혀 없을 때조차 감사할 수 있는 이유는 우리 곁에 계신 분이 부활이요, 생명이시기 때문입니다.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그분보다 소중한 은혜는 없습니다. 그분이 항상 우리 곁에 계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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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요한 11,19-27: 주님께서는 그리스도이시며 하느님의 아들이십니다.
오늘은 성녀 마르타 축일이다. 성경에 보면 예수께서 라자로의 집에 들르셔서 쉬고 계실 때에, 마르타는 부엌에서 열심히 음식 준비를 하고 있었고, 마리아는 예수님 발치에 앉아 예수님의 말씀을 열심히 듣고 있었다. 자기는 부엌에서 고생하고 있는데 예수님 앞에 앉아서 자기를 도와줄 생각도 않고 있는 마리아에게 자기 일 좀 거들어 주게 하라고 예수님께 말하였던 마르타였다.
예수님께서는 마르타를 보고, “너는 많은 일을 염려하고 걱정하는구나. 그러나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다.”(루카 10,41-42)라고 말씀하신 것으로 보아 매우 활동적인 사람이었던 것 같다. 이 때문에 마르타는 활동적인 그리스도인의 상징이고 동생 마리아는 관상생활의 모델로 공경을 받는다. 또한 성녀 마르타는 요리사의 수호성인으로 공경을 받고 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께서는 당신 자신이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25절)라고 하시면서 당신 자신을 드러내신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초기 교회 공동체에서 예수님께 대해서 고백한 신앙 내용이기도 하다. 예수께서 공생활을 하시는 중에 여러 번 죽은 사람을 살리시는 것을 보았다. 회당장 야이로의 딸, 죽은 과부의 외아들 그리고 오늘 복음에 나오는 라자로를 다시 살리시는 장면을 보고 그분이야말로 생명을 주실 수 있는 분임을 체험하였기 때문이다.
그러한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마르타는 “주님, 주님께서 여기에 계셨더라면 제 오빠가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주님께서 청하시는 것은 무엇이나 들어주신다는 것을 저는 지금도 알고 있습니다.”(21-22절)라고 할 수 있었던 것이다. 여기서 예수님은 “네 오빠는 다시 살아날 것이다”(23절) 하시고 라자로를 살려 주시면서 “부활이요 생명이다.”(25절)라는 말씀을 하신 것이다.
오늘의 복음에서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는 메시지는 예수님이 마지막 날에 죽은 자를 살려주시는 분으로서가 아니라, 구원은 “지금 여기서” 주시는 분이시라는 것이다. 구원은 바로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지금 여기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구원이 단지, 내가 죽은 다음에, 하느님의 심판을 받은 다음 결정되는 것이라고 한다면, 이것은 잘못된 생각이다.
구원은 이 세상에서부터 체험되고 누릴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 내가 지금 구원을 체험하지 못한다면, 죽은 다음에 구원을 받을 수 없다. 구원이 무엇인지 모르기 때문이다. 이것은 구원을 주시는 그분을 믿고, 따르면서, 즉 그분의 가르침을 실천하면서 “지금 여기서”부터 살기 시작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주님을 닮아가기 위해 하느님의 뜻 때문에 나 자신을 죽일 수 있는 삶, 죽으려 노력하는 삶을 통해 우리는 부활의 신비를 체험할 수 있다. 이 부활의 신비를 체험하기 전에 이미 고통의 신비를 체험하게 되며, 이를 통해 우리는 우리 자신 안에, 혹은 이웃에게 구체적으로 그리스도를 낳아줄 수 있다. 이때에 우리도 “예, 주님,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시기로 되어 있는 메시아시며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믿습니다.”(27절)라고 고백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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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오늘의 묵상
[서울대교구 허규 베네딕토 신부님]
요한 복음은 다른 복음보다 대화를 중요하게 보여 줍니다. 등장인물 사이에 오가는 대화는 일상적인 대화를 넘어 신앙의 견지에서 예수님을 바라보도록 우리를 초대합니다. 라자로의 죽음에 관한 소식을 들으신 예수님께서는 슬픔에 잠기시어 그가 살고 있던 마을인 베타니아로 가십니다. 그리고 거기에서 마르타를 만나십니다.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마르타의 믿음을 엿볼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여기에 계셨더라면 제 오빠가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 표현은 마르타의 예수님에 대한 믿음과 안타까움을 잘 보여 줍니다. 예수님과 함께라면 죽음을 맞지 않았을 것이라는 마르타의 생각은 예수님에 대한 신뢰와 함께 예수님께서 어떤 분이신지 알려 줍니다.
그러나 마르타의 믿음은 여전히 부활에 대한 믿음까지는 이르지 못하였습니다. 그녀는 “네 오빠는 다시 살아날 것이다.”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마지막 부활 때에 일어날 일로 받아들입니다. ‘지금 여기에서’ 그것이 일어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합니다. 예수님의 설명을 들은 마르타는 믿음으로 그것을 받아들입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마르타의 믿음은 이미 우리에게 대단해 보입니다. 요한 복음은 예수님과의 대화를 통하여 믿음이 한층 더 깊어지는, 예수님을 좀 더 알아 가는 마르타를 보여 줍니다. 이제 예수님께서는 하느님께서 이 세상에 파견하신 당신의 아드님이시자 부활과 생명이신 분으로 표현됩니다. 예수님과의 대화는 이렇게 우리를 더 깊고 굳은 믿음으로 이끌어 줍니다. 믿음은 성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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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마르타가 예수님께 말하였다. ‘주님, 주님께서 여기에 계셨더라면 제 오빠가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주님께서 청하시는 것은 무엇이나 들어주신다는 것을 저는 지금도 알고 있습니다.’"(요한 11,21-22)
“주님, 주님께서 여기에 계셨더라면 제 오빠가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라는 마르타의 말은, 겉으로만 보면 예수님을 원망하는 말로 보이지만, 뒤의 말과 합해서 보면, “예수님께서 너무 늦게 오셔서 오빠가 죽었습니다.”라고 예수님을 탓하는 말은 아니고, 오빠의 죽음을 슬퍼하면서도, 또 예수님께서 계시지 않았던 것에 대해서 아쉬워하면서도 “하느님의 어떤 뜻이 있을 것이라고 믿습니다.” 라는 믿음을 나타낸 말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주님께서 청하시는 것은 무엇이나 들어주신다는 것을”이라는 말은, 예수님께서 죽은 오빠를 살리실 수 있지 않을까, 라는 희망 속에서 조심스럽게 자신의 심정을 나타낸 말입니다. (이 말에는 모든 것을 주님께 맡겨 드린다는 뜻도 들어 있습니다.) 어쩌면 마르타는 ‘야이로’ 라는 회당장이 그랬던 것처럼, 죽은 라자로를 살려 달라고 예수님께 간청하고 싶은 심정이었을지도 모릅니다. “... 한 회당장이 와서 예수님께 엎드려 절하며, ‘제 딸이 방금 죽었습니다. 그러나 가셔서 아이에게 손을 얹으시면 살아날 것입니다.’ 하고 말하였다."(마태 9,18) 마르타가 좀 더 적극적으로 간청하지 못한 것은 라자로가 죽은 지 나흘이나 지났기 때문일 것입니다.(요한 11,39) “저는 지금도 알고 있습니다.” 라는 말은 예수님에 대한 믿음을 고백하는 말인데, ‘지금도’ 라는 말을 한 것은 마르타의 희망을 나타내는 것으로 해석됩니다. 마르타는 ‘지금이라도’ 오빠를 살릴 수 있지 않을까, 라고 희망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마르타에게, ‘네 오빠는 다시 살아날 것이다.’ 하시니, 마르타가 ‘마지막 날 부활 때에 오빠도 다시 살아나리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하였다."(요한 11,23-24)
“네 오빠는 다시 살아날 것이다.”라는 예수님 말씀은, 뜻으로는 “내가 네 오빠를 지금 다시 살리겠다.”입니다. 마르타는 예수님 말씀을 알아듣지 못하고 종말의 부활에 대한 말씀으로만 생각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지금이라도’ 라자로를 살리시기를 희망하면서도 마르타는 왜 예수님 말씀을 알아듣지 못했을까? 아마도 마르타의 희망은 간절하고 강력한 희망이 아니라 그냥 “그랬으면 좋겠다.” 정도의 막연한 희망이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 말씀과 마르타의 말이 조금 어긋나 있습니다. 그렇지만 마르타를 탓할 수는 없습니다. 누구든지 그런 상황에서는 그렇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고, 또 살아서 나를 믿는 모든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 너는 이것을 믿느냐?’ 마르타가 대답하였다. ‘예, 주님! 저는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시기로 되어 있는 메시아시며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믿습니다.’"(요한 11,25-27)
이 대화는 죽은 라자로를 지금 살릴 것인가? 에 관한 대화가 아닙니다. 그것과는 상관없이 예수님의 신원과 권한에 대한 대화입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라는 말씀은, “나는 사람들을 부활시키거나 부활시키지 않을 권한을 가지고 있고, 사람들에게 생명을 주거나 주지 않을 권한을 가지고 있다.”라는 뜻입니다. 우리 입장에서 간단하게 줄이면 “예수님은 생명의 주님이신 분이다.”입니다.
요한복음 5장에 예수님의 권한에 대한 말씀이 나옵니다. “아버지께서 죽은 이들을 일으켜 다시 살리시는 것처럼, 아들도 자기가 원하는 이들을 다시 살린다."(요한 5,21)
“아버지께서는 또 그가 사람의 아들이므로 심판을 하는 권한도 주셨다. 이 말에 놀라지 마라. 무덤 속에 있는 모든 사람이 그의 목소리를 듣는 때가 온다. 그들이 무덤에서 나와, 선을 행한 이들은 부활하여 생명을 얻고 악을 저지른 자들은 부활하여 심판을 받을 것이다."(요한 5,27-29)
예수님께서 생명의 권한을 가지고 계신다는 말은, “생명을 얻기를 바란다면 예수님을 믿어야 한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요한복음 5장 25절에는 “죽은 이들이 하느님 아들의 목소리를 듣고 또 그렇게 들은 이들이 살아날 때가 온다. 지금이 바로 그때다.”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라자로를 살리신 일과 이 말씀을 연결해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라자로는 이 말씀 그대로, 예수님의 목소리를 듣고 무덤에서 일어나서 나왔습니다. 즉 예수님께서는 라자로를 살리심으로써 당신의 말씀이 진리라는 것을 증명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생명의 권한’을 행사하시는 때는 언제인지 모르는 먼 훗날이 아니라, 바로 ‘지금’인데, 여기서 ‘지금’이라는 말은, 글자 그대로 지금입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셔서, 그리고 부활하셔서 우리 가운데 현존하시는 바로 지금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을 믿어야 하는 때도 바로 지금입니다.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고”라는 말씀은, 당신을 믿는 사람을 죽음 속에 버려두지 않겠다는 약속입니다. “살아서 나를 믿는 모든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라는 말씀은, 믿는 사람들은 최후의 심판 때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될 것이라는 약속입니다. “너는 이것을 믿느냐?”라는 질문은, 당신이 생명의 주님이라는 것을 믿어야 한다고 강조하시는 말씀입니다. “예, 주님! 저는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시기로 되어 있는 메시아시며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믿습니다.”라는 마르타의 말은, 예수님에 대한 신앙고백으로서 베드로 사도의 신앙고백과 동등한 가치가 있는 말입니다. <마르타의 신앙고백은 베드로 사도의 “스승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마태 16,16)라는 신앙고백과 같습니다. 표현도 같고, 뜻도 같습니다.>
마르타가 예수님 말씀을 제대로 알아들었는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예수님을 올바르게 믿고 있었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이 대화를 나누는 동안에는 라자로의 일은 잠시 밀려난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라자로의 무덤으로 바로 가셨고, 라자로를 살리셨고, 당신이 생명의 주님이신 분이라는 것을 직접 보여 주셨습니다. 마르타의 입장에서 생각하면, 막연하게 희망하면서도 감히 청하지는 못했던 은총을 받은 셈인데, “예수님은 생명의 주님이신 분”이라는 믿음이 확실했으니, 예수님께서 라자로를 살리시지 않았더라도, 살리는 일을 마지막 날로 미루셨더라도, 신앙이 흔들리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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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동네에 작은 공원이 있습니다. 사람들이 자리를 펴고 책을 읽기도 합니다. 놀이터가 있어서 아이들이 물장난을 치기도 합니다. 중국 사람들은 아침에 독특한 체조를 하기도 합니다. 카드놀이를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저도 매일 두 번은 공원을 찾습니다. 요즘 사람들에게 사랑받는 오리 가족이 있습니다. 엄마 오리와 16마리의 새끼 오리입니다. 처음에는 엄마 오리 곁에만 있었는데 지금은 신나게 호수에서 놀고 있습니다. 엄마 오리는 새끼 오리들을 사랑스러운 모습으로 지켜봅니다. 새끼 오리들이 마음껏 호수를 돌아다닐 수 있는 것은 엄마 오리가 있기 때문입니다. 제법 멀리 떨어져 있다가도 금세 엄마 오리 곁으로 달려오는 새끼 오리들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엄마 오리의 사랑을 받는 새끼 오리들은 여름을 호수에서 보낼 것이고, 가을이오면 먼 여행을 떠날 것입니다. 엄마 오리를 보니 어머니 생각이 났습니다.
탈무드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시는데 모두 돌볼 수가 없어서 하느님과 같은 사랑을 하는 천사를 보내 주셨는데 그 천사가 어머니라고 합니다. 저도 어머니의 사랑을 참 많이 받았습니다. 29년 전에 저는 ‘유행성 출혈열’에 걸렸습니다. 사제서품을 받은 지 보름도 안 되었을 때였습니다. 첫 본당에 간 지 5일 만이었습니다. 중환자실에 있었고, 며칠은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추기경님도 오셔서 기도하셨다고 들었습니다. 저를 치료해준 의사, 간호사님들께 감사드렸습니다. 가장 감사드릴 분은 어머니입니다. 제가 입원한 날부터 퇴원하는 날까지 어머니는 병실에서 저를 돌보셨습니다. 보좌신부를 마치고 첫 본당신부가 되었을 때는 3년 동안 사제관에서 함께 지내셨습니다. 어머니께서는 밥도 차려주시고, 청소도 해 주셨습니다. 건강만 허락되신다면 뉴욕에 오셔서 밥을 차려 주실 겁니다. 언제나 변하지 않는 것이 어머니의 사랑입니다.
‘사랑’은 추상명사입니다. 무게를 잴 수도 없고, 볼 수도 없고, 돈을 주고 살 수도 없습니다. 그 사랑은 표시가 될 때 구체적으로 드러납니다. 사랑하는 마음을 글로 담으면 우리는 사랑을 볼 수 있습니다. 저도 군에 있을 때, 많은 위문편지를 받았습니다. 저를 기억하고, 저를 아껴주는 분들의 정성이 담긴 글을 읽으면서 군 생활의 지루함과 어려움을 이겨낼 수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마음을 말로 하면 우리는 그 사랑을 느낄 수 있습니다. ‘사랑하면 되지, 굳이 말을 해야 됩니까?’라는 말을 듣곤 합니다. 우리가 말을 할 수 있는 것은 하느님께서 주신 은총입니다. 우리는 말을 할 수 있기 때문에 찬란한 문명을 이룰 수 있었습니다. 사랑한다는 말은 세상을 변화 시킬 수 있는 힘이 있습니다. 사랑한다는 말은 어둠 속에서도 빛을 낼 수 있습니다. 사랑은 행동으로 드러날 때, 비로소 그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짐을 들고 가는 이웃의 짐을 함께 들어드리는 모습, 지친 이웃의 어깨를 두드려주는 손길, 내가 지닌 능력, 재물, 시간을 나누는 모습에서 우리는 사랑이 꽃을 피우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오늘은 마르타 성녀를 기억하는 날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마르타와 가족을 각별하게 사랑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마르타의 집을 찾아가셨습니다. 마르타는 예수님을 위해서 음식을 준비하였고, 동생 마리아는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마르타의 오빠 나자로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마르타와 대화를 나누신 후 죽었던 나자로를 다시 살려주셨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소생이라고 하지, 부활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영원한 생명이란 무엇일까요?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영원한 생명은 ‘생과 사’의 문제가 아닌 것 같습니다. 그것은 깨달음의 문제이고, 차원의 문제인 것 같습니다. 그래서 사마리아 여인에게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주는 물은 곧 다시 목이 마르겠지만 내가 주는 물을 마시면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예수님께서 주시려는 물은 단순히 마시는 물이 아니었습니다. 오늘 복음도 같은 맥락입니다. ‘나를 믿는 자는 죽더라도 살 것이고, 또 살아서 믿는 자는 모두 영원히 살 것이다. 너는 이것을 믿느냐?’ 예수님의 이 말씀은, 영원한 생명은 생과 사의 문제가 아니라, 믿음의 문제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진정한 믿음은 사랑의 실천으로 드러납니다. 오늘 독서는 사랑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서로 사랑합시다. 사랑은 하느님에게서 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이는 모두 하느님에게서 태어났으며 하느님을 압니다.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하느님을 알지 못합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느님께서 우리를 이렇게 사랑하셨으니 우리도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지금까지 하느님을 본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느님께서 우리 안에 머무르시고 그분 사랑이 우리에게서 완성됩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사랑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하느님 안에 머무르고 하느님께서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르십니다.” 사랑하는 마음으로 오늘 하루도 충실하게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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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첫걸음 내딛는 순간>
요한 11,19-27 (부활이요 생명이신 예수님)
그때에 많은 유다인이 마르타와 마리아를 그 오빠 일 때문에 위로하러 와 있었다. 마르타는 예수님께서 오신다는 말을 듣고 그분을 맞으러 나가고, 마리아는 그냥 집에 앉아 있었다. 마르타가 예수님께 말하였다. “주님, 주님께서 여기에 계셨더라면 제 오빠가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주님께서 청하시는 것은 무엇이나 들어주신다는 것을 저는 지금도 알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마르타에게, “네 오빠는 다시 살아날 것이다.” 하시니, 마르타가 “마지막 날 부활 때에 오빠도 다시 살아나리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하였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고, 또 살아서 나를 믿는 모든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 너는 이것을 믿느냐?” 마르타가 대답하였다. “예, 주님! 저는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시기로 되어 있는 메시아시며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믿습니다.”
<첫걸음 내딛는 순간>
마리아는
예수님께서 오신다는 말을 듣고
그분을 맞으러 나갔다.
(요한 11,20ㄱ)
홀로 지쳐 쓰러진 곳에서
내게 오시는 분에게
첫걸음 내딛는 순간
난 이미 더불어함께입니다
절망 가득한 곳에서
희망이신 분에게
첫걸음 내딛는 순간
난 이미 희망입니다
죽음 품은 곳에서
생명이신 분에게
첫걸음 내딛는 순간
난 이미 생명입니다
모든 것이 끝난 곳에서
늘 새로움이신 분에게
첫걸음 내딛는 순간
난 이미 시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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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방종우 야고보 신부님]
<예수님을 위해 식사를 준비하는 아름다운 손길>
+찬미예수님
오늘은 성녀 마르타의 축일입니다. 오늘 우리는 두 가지의 복음 중에 한 가지를 선택해서 읽을 수 있는데 저는 특별히 루카 복음의 마르타와 마리아의 이야기를 소개하고자 합니다. 신학생 시절, 이런저런 이유로 학생회와 자치회, 예비 신학생 담임까지 도맡아야 했던 저에게는 언제나 일이 끊이질 않았습니다. 학업과 일을 함께 병행하다보니 그 양은 언제나 많았고 처음에는 그러려니 했던 일들이 점차 부담으로 다가오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제 마음 속에서 원망이 커져만 갔습니다. 일을 맡지 않고 공부나 기도에 열중하고 있는 동기들이 얄밉게 보였고 왜 나 혼자 이 많은 일을 해야 하나 화가 치밀기도 했습니다. 줄곧 이러한 입장이었던 저에게 있어 오늘의 복음은 매우 석연치 않게 다가옵니다. 예수님께서, 일을 하지 않고 말씀만 경청하고 있는 마리아가 좋은 몫을 선택했다고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다 보니 일을 떠맡고 있는 마르타는 마리아보다 덜 좋은 몫을 선택한 것 같고 미련하게 일에만 집착하는 사람처럼 느껴집니다. 실로 오늘 복음의 마르타는 예수님께 저녁을 대접하기 위해 바쁩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방문하셨고 마르타와 마리아까지 있으니 최소 15인분의 저녁을 준비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의 또 다른 복음, 요한복음 11장을 보면 마르타는 확실한 부활 신앙을 가지고 있었을 정도로 깊은 신심을 갖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와중에 예수님이 제자들과 오셨으니 얼마나 잘 대접하고 싶었겠습니까? 최고의 음식을 선보이기 위해 홀로 동분서주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녀의 동생 마리아는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예수님의 발치에 앉아 있으니 불평이 생길 수밖에 없습니다. 언제나 이웃을 돕고 사랑하라고 예수님이 말씀하시곤 했는데 이를 방치하시는 예수님이 원망스럽기도 했을 것입니다.
누구나 한 번 쯤, 내가 하지 않아도 될 일을 누군가의 술수로 혹은 요청으로 떠맡아 본 경험이 있으실 것입니다. 앞서 말씀드렸듯이 신학생 시절 저 역시 그렇게 바삐 하루하루를 보내다가 어느 날 우연히 가톨릭 잡지에서 이에 관한 어느 수녀님의 글을 보게 되었습니다. 처음으로 마리아와 마르타의 이야기를 수녀님께서 들으신 것은 고등학생 시절이었습니다. 성당에서 보좌 신부님이 읽어 주신 시에 매료되어 어머니에게 그 시 이야기를 했더니 어머니께서 말씀하시길, “너는 마리아가 되렴, 나는 너를 위해 마르타가 되어줄게”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때에 수녀님의 인상에 남은 것은 마리아가 택한 몫은 예수님과 가까운 좋은 몫이었고 마리아가 그 몫을 누릴 수 있도록 희생을 다해 마르타의 몫을 택하는 것이 어머니의 깊은 사랑이라는 점이었습니다.
그렇게 시간이 지났습니다. 수도자가 되어 소임을 받고 본당에 나가 일을 하면서 이 수녀님께서는 자신이 마리아의 몫이 아닌 마르타의 몫으로 불려졌음을 알게 되었고 당혹스러움을 느꼈습니다. 하지만 차츰 마르타의 몫이 마리아보다 못한 몫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새벽에 일어나 미사를 차리고, 제대를 청소하고, 제의를 다리고 하는 일들은 자신에게 주어진 최고로 아름다운 기도였고 예수님의 발치에 앉는 행위였던 것입니다.
매일 새벽 성당 문을 열고, 미사를 차릴 때마다 “예수님, 오늘 아침 내가 처음 부르는 이름은 당신입니다”라고 기도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본당에서 함께 봉사하는 이들, 더위와 추위와 싸워가며 설겆이를 하고 음식을 장만하는 신자분들의 손길을 바라보며 이들의 몫이 마리아와 다름없이 깊이 있고 품위 있는 것임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얼핏 보면 오늘 복음은 마르타와 마리아의 관계를 자매간의 질투 혹은 예수님의 사랑을 놓고 벌이는 삼각관계처럼 보이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우리들의 인간적인 관점입니다.
결국, 앞서 말씀드린 수녀님의 관점에서 이 복음을 바라보면, 우리가 각자의 자리에서 맡겨진 소임을 다 하고 서로의 직분을 이해할 때 우리는 서로를 사랑하게 되며 주님께 다가갈 수 있음을 강조하는 예수님의 마음을 이해하게 됩니다. 우리는 성당 안에서, 가정 안에서, 직장 안에서, 인간관계 안에서 각자의 몫을 차지하고 살아갑니다. 그것은 어떤 때는 앉아서 하는 일일 수도 있고 남들보다 더 노동을 요하는 일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우리가 그 자리에서 최선을 다 할 때 지혜로운 예수님은 우리의 노고를 살펴주시고 그것이 좋은 몫이 될 수 있도록 배려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이런저런 일에 휩싸여 고민하던 저의 신학생 시절을 다시금 떠올려 봅니다. 그 시간이 있었으므로 저는 남들보다 행정적인 일들을 빠르게 처리할 수 있게 되었고 다른 사람과 소통할 수 있는 법을 배웠습니다.
무엇보다, 예수님을 위한 존경과 사랑으로 그분의 식사를 준비하는 마르타의 마음을 몸소 체험할 수 있는 경험도 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다시금 깨닫습니다. 여러 가지 소임을 하며 뒤편에서 일하시는 본당의 봉사자 분들, 묵묵히 사제를 뒷받침해 주시는 수녀님들의 모습들이 제가 본받아야 할 아름다운 모습이며 저 또한 그와 같은 모습으로 정성들여 예수님의 식탁을 준비해야 한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봉사와 사랑을 계속하다 보면 분명 지치는 날이 다가오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럴 때는 쓰러지지 말고 오늘 복음의 예수님의 자애로운 눈빛을 기억하시길 바랍니다. 언제나 우리와 함께 하시는 예수님께서는, 정성들여 각자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는 우리를 사랑의 눈빛으로 돌보아 주십니다.
“얘야, 너무 많은 일을 염려하고 걱정하지 말으렴, 네가 가진 몫도 참 좋은 몫이란다”라는 사랑의 속삭임과 함께 말입니다. 결국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예수님을 우리의 집에 모시고 그분을 위해 정성을 다하는 일입니다.
“예수님께서 어떤 마을에 들어가셨다. 그러자 마르타라는 여자가 예수님을 자기 집으로 모셔 들였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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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요한11,25)
예수님께서 죽은 라자로를 찾아가십니다. 마르타는 자신의 집을 찾아오신 예수님께 "주님, 주님께서 여기에 계셨더라면 제 오빠가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라고 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런 마르타에게 "네 오빠는 다시 살아날 것이다."라고 말씀하시자, 마르타는 "마지막 날 부활 때에 오빠가 다시 살아나리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라고 말합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마르타에게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고, 또 살아서 나를 믿는 모든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마르타에게 "너는 이것을 믿느냐?"라고 물으시자, 마르타는 "예, 주님! 저는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시기로 되어 있는 메시아시며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믿습니다."라고 대답합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우리를 살려내시는 주님이시고, 메시아이시고,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라는 것과 이에 대한 단순한 앎이 아니라, 이에 대한 굳은 믿음이 지금 나를 다시 살게하고, 나를 영원히 살게한다는 메시지입니다.
부활이요 생명이신 예수님께서는 언제나 '지금 여기에서 부활'하기를 바라십니다. 믿는 이들의 궁극적인 목적인 '영원한 생명'은 지금 여기에서 부활하는 이들에게 주어지는 '하느님의 선물'입니다.
오늘 독서는 지금 여기에서 부활한 이들의 모습을 전하고 있는데, 그것은 바로 '서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1요한4,16)라고 고백한 사랑의 사도인 요한은 이 사랑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그 사랑은 이렇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그분께서 우리를 사랑하시어 당신의 아드님을 우리 죄를 위한 속죄 제물로 보내 주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느님께서 우리를 이렇게 사랑하셨으니 우리도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1요한4,10-11)
지금 굳게 믿고,
지금 부활합시다!
지금 사랑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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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김준철 토마스 아퀴나스 신부님]
마르타는 동기간인 마리아, 라자로와 함께 예수님의 사랑을 많이 받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라자로가 죽어 무덤에 묻힌 지 나흘이나 지났을 때에야 도착하신 것입니다. (요한 11,17 참조)
마르타는 예수님을 맞으러 나가 아쉬운 마음을 표현합니다.
“주님께서 여기에 계셨더라면 제 오빠가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예수님에 대한 믿음을 토로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주님께서 청하시는 것은 무엇이나 들어주신다는 것을 저는 지금도 알고 있습니다.”
마르타는 아직도 예수님의 정체를 정확히 파악하지는 못하였지요. 예수님께서 “네 오빠는 다시 살아날 것이다.”라고 말씀하시자 “부활 때에 오빠도 다시 살아나리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라고 대답했기 때문입니다.
당시 사두가이들은 부활을 믿지 않았지만 바리사이들은 부활을 믿었습니다. 마르타는 라자로가 살아날 것이라는 예수님 말씀을 바리사이들처럼 세상 마지막 날 부활한다는 의미로 받아들인 것이지요.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생명의 주관자, 죽은 이마저도 살리실 수 있는 분이심을 명확히 밝히십니다.
이제 마르타는 확고한 신앙을 고백합니다.
“저는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시기로 되어 있는 메시아시며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믿습니다.”
그런 마르타의 신앙을 보시고 예수님께서는 죽은 라자로를 살려 내십니다.(요한 11,43-44 참조)
결국, 하느님에 대한 확고한 믿음은 우리가 상상하지 못하는 기적을 만들어 내지 않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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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염철호 요한 신부님]
마르타는 예수님께서 사랑하시던 라자로와 마리아의 누이로 예수님을 극진히 모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파스카 축제 엿새 전 당신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일으키신 라자로의 집을 방문하시는데(요한 12,2 참조), 그때부터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서 잡히시던 날까지 그분을 모셨던 이가 바로 마르타였습니다.
오늘 복음은 바로 그 마르타의 믿음을 보시고 예수님께서 라자로를 되살려 주시는 이야기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라자로의 죽음을 슬퍼하시며 그들 집, 곧 베타니아로 가십니다. 그러자 마르타는 주님이 계셨더라면 라자로가 죽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하며 오빠를 살려 달라고 청합니다. 그러면서 마르타는 예수님이야말로 메시아이자 하느님의 아들이심을 깊이 믿고 있다고 고백합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마르타의 믿음을 보시고 라자로에게 생명을 되돌려 주십니다. 이렇게 보니 마르타는 예수님에 대한 믿음과 봉사로 똘똘 뭉친 여인이 분명합니다.
주님을 믿는 이들은 누구나 영원한 생명을 얻을 뿐만 아니라, 다른 이들도 살릴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되돌려 주시는 것은 단순한 육신의 숨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되찾아 주시고자 하는 것은 우리가 잃어버린 영원한 생명입니다.
그 생명은 창조 이전부터 우리에게 계획된 생명으로 이 땅에서 이미 우리 모두가 누리고 있는 생명이며 육신의 숨이 끊어진다 하더라도 계속 이어지는 그런 생명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라자로에게 되돌려 주시고자 하는 생명은 육신의 숨이 아니라 바로 이 영원한 생명이었습니다.
라자로가 되돌려 받은 육신의 생명은 다시 끊겼지만 그가 되돌려 받은 영원한 생명은 세상 종말이 오더라도 영원히 이어질 것입니다.
오늘 마르타는 믿음으로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된 많은 인물들 가운데 한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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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한 달 피정 때의 일이 생각납니다. 서품을 앞두고 임했던 피정이어서 더욱더 필사적으로 피정에 집중했습니다. 하루에 7시간 이상을 성당에서 묵상하면서 하느님과 나의 관계를 정립하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런데 일주일 정도 지나니 세상일이 궁금해지는 것입니다. 그때가 대통령 선거 직전이라 정치판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세상에 특별한 일이 생기지는 않았는지 너무나 궁금했습니다. 그러면서 지금 자리가 불편해지는 것입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궁금증이 사라지고 편안해질 수 있었습니다. 세상의 일이 내 삶에 득이 되지 않음을 비로소 깨달을 수 있었지요. 그보다 섣부른 판단을 버리고 온전히 자기 자신을 되돌아보는 일이 제일 중요했습니다.
사회가 복잡하면 그만큼 불편함을 느끼게 됩니다. 특히 잘했다, 잘못했다, 틀렸다 등의 말이 넘치는 세상 안에서 나 역시 여기에 물들어 많은 말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더 중요한 것은 나의 변화인데, 남의 변화만을 이야기합니다. 그만큼 내가 불편해집니다. 이런 이유로 요즘에는 휴대전화를 끌 때가 많습니다. 그래야 세상과의 접촉을 끊고 대신 주님과의 만남에 집중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에 관심을 가질수록 주님과의 관계는 멀어지면서 힘들어지는 것은 언제나 나 자신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사랑하는 사람인 ‘라자로’가 죽었습니다. 무덤에 묻힌 지 나흘이나 지났다는 사실에서 세상의 눈으로는 분명히 죽었다고 단정 지을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함께 계셨더라면 라자로가 죽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는 마르타였습니다. 그럼에도 예수님의 행동에 대해 비난하지 않습니다. 오빠의 죽음에 큰 아픔을 겪었지만, 예수님께 대한 사랑이 크기 때문에 믿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녀는 이렇게 신앙 고백을 할 수 있었습니다.
“저는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시기로 되어있는 메시아시며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믿습니다.”
이렇게 그녀는 세상의 관점보다는 주님의 관점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습니다. 제1독서의 요한 사도가 말하고 있듯이, 사랑 안에 머무르고 있었던 성녀 마르타는 하느님 안에 머무르고, 하느님께서도 그 사랑 안에 머무르실 수 있었던 것입니다.(1요한 4,16 참조) 세상 안에 매여서 사는 삶보다는 주님과 함께 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세상의 기준만을 내세우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기준이 내 삶의 바탕이 될 수 있어야 합니다. 옳고 그름을 따지는 세상의 원칙보다는, 무조건 받아들이는 사랑의 원칙을 따라야 합니다. 그때 주님 안에서 커다란 위로와 힘을 얻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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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대상이신 부모님.>
연세 많은 노인에게는 세 가지 본질적인 욕구가 있다고 합니다. 그것은 보호받고 싶은 욕구, 자신의 가치를 인정받고 싶은 욕구, 그리고 사랑받고 싶은 욕구입니다. 저 역시 어르신들을 보며 많이 느끼게 됩니다. 사실 이 세 가지 욕구는 인간이라면 모두 간직하고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나이가 들면서 불안감이 커지고 그래서 더 많이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연로하신 부모님은 사랑의 대상이 되어야 합니다. 과거에 부모로부터 받은 사랑을 되돌려 드려야 할 대상인 것입니다. 이를 위해 부모님과의 관계를 다시금 묵상할 수 있어야 합니다. 내가 받지 못한 것이 아닌 내가 받은 것을, 내가 지금 드릴 수 있는 것을 생각할 수 있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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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평생 공부>
-주님 중심의 사랑 공동체-
우리 필생의 평생공부가 뭔지 아십니까? 너무나 잘 잊고 지내는 것입니다. 바로 사랑공부입니다. 정말 중요한 평생공부는 사랑뿐이 없습니다. 평생 사랑을 배워 실천해야 하는 평생학인인 우리들입니다.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한 사랑 공부입니다. 아무리 공부해도 기도처럼, 사랑에도 영원한 초보자인 우리들입니다. 물론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포함된 경천애인敬天愛人의 사랑입니다.
사랑-삶-사람, 같은 어원입니다. 사랑의 삶을 살아야 비로소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사람이 되는 길도, 행복도 사랑뿐입니다. 참으로 행복한 삶을 위해서는 사랑해야 합니다. 사랑을 보고 배워 실천하라고 주님 중심의 사랑 공동체입니다. 사랑도 보고 배워야 합니다. 혼자 사랑은 환상이고 착각이요 불가능합니다. 하여 인생은 '사랑의 학교'라 정의하기도 합니다.
사랑의 학교에 평생 재학중인 우리들입니다. 평생 졸업이 없는 죽어야 졸업인 평생 사랑의 학인인 우리들입니다. 정말 공동체가 모든 것을 다 갖췄는데 사랑이, 기쁨이, 평화가 없다면 얼마나 삭막하고 허전하겠는지요. 삶의 무지와 무의미와 허무에 대한 유일한 답도 사랑뿐입니다. 우리의 끊임없는 기도도 결국은 사랑을 잘 하기 위한 것입니다.
사랑은 모두입니다. 사랑의 관상, 사랑의 신비, 사랑의 수행, 사랑의 성사, 사랑의 기적, 사랑의 겸손, 사랑의 순종, 사랑의 섬김, 사랑의 환대, 사랑의 찬미, 사랑의 분별, 사랑의 지혜, 사랑의 순수등 끝이 없습니다. 율법의 완성도 사랑이요 분별의 잣대도 사랑입니다. 도대체 사랑이 들어가지 않는 덕목이 하나도 없습니다. 마지막 하느님 최후 심판의 잣대도 사랑입니다. 바로 이런 사랑의 중심에 하느님이 계십니다. 예수님이 계십니다. 예수님을 통해 환히 드러난 하느님 사랑입니다.
오늘 말씀은 요한복음에 요한1서입니다. 사랑의 사도 요한의 작품입니다. 역시 강조하는바 사랑입니다. 요한1서에 사랑이란 단어가 대충 헤아리니 18회입니다. 사랑이 빠지면 문장이 성립되지 않듯이 사랑이 빠지면 인생도 성립되지 않습니다. 무지와 허무의 어둠 속에 잠겨 버립니다. 무지와 허무의 어둠을 몰아내는 사랑의 빛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서로 사랑합시다. 사랑은 하느님에게서 오는 것이며, 사랑하는 이는 모두 하느님에게서 태어났으며 하느님을 압니다.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하느님을 알지 못합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공부많이 하고 기도 많이 해도 사랑하지 않으면 하느님을 모릅니다. 헛공부, 헛기도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이렇게 나타났습니다. 곧 하느님께서 당신 외아드님을 세상에 보내시어 우리가 그분을 통하여 살게 해 주셨습니다. 바로 이 거룩한 사랑의 미사은총입니다. 참으로 그분의 말씀과 성체를 모심으로 그분의 사랑을 통해서 살게 된 우리들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느님께서 우리를 이렇게 사랑하셨으니 우리도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서로 사랑하라고 불러 주신 공동체의 형제들입니다. 사랑의 학교 공동체입니다. 바로 이런 사랑의 공동체의 모범이 바로 오늘 복음의 베타니아 사랑의 공동체입니다. 병자로 앓다가 죽었다가 예수님을 만나 살아 난 라자로, 마르타, 마리아, 삼남매의 사랑의 공동체입니다. 바로 여기에 근거해 인접해 있는 라자로의 집, 마리아의 집, 마르타의 집 우리 수도원 피정집들입니다.
예수님이 피곤하고 지쳤을 때 마다 참 편하게 수시로 찾아 머물렀던 베타니아 사랑의 공동체입니다. 그대로 예수님 중심의 사랑의 환대 공동체로 우리 수도공동체의 모델입니다. 오늘 복음 분위기를 통해 얼마나 주님을 사랑한 삼남매요 삼남매를 사랑한 주님인지 알 수 있습니다. 삼남매 간의 형제애의 사랑도 얼마나 깊은지 깨닫습니다.
참으로 조화로운 사랑의 공동체입니다. 서로 다르다는 것이 공동체의 풍요요 축복임을 깨닫습니다. 병자였던 라자로, 관상가 마리아. 활동가 마르타가 조화를 이룬 다양성의 일치를 이룬 공동체의 모습임을 이미 성 벨라도가 언급했습니다. 관상가 마리아와 활동가 마르타는 우열의 관계이기 보다는 상호보완의 관계입니다. 관상도 활동도 결국은 각자의 은사요 하느님께 대한 사랑에서 일치를 이루기 때문입니다. 삼남매는 제가 보기엔 우리 수도공동체 형제들처럼 사랑의 대가요 달인입니다.
우리 수도공동체나 어제 모임을 가졌던 예수 성심 자매회 역시 다양함이 공동체의 풍요요 축복임을 깨닫습니다. “보물 사진을 찍겠습니다.” 하고 사진도 찍었습니다. 지난 주일 참보물이란 강론을 한 후로는 형제자매들이 진짜 하느님의 선물이자 보물임을 깨닫습니다. 세월이 흐르면서 향기와 맛을 더해가는 술처럼, 하느님 사랑의 살아있는 참보물인 형제자매들입니다.
정말 하느님이 보내주신 선물이자 참 보물이 형제자매들입니다. 어제도 공동체 형제에 대한 고마움을 깊이 체험했던 날입니다. 제가 기계에는 참 약한 편입니다. 토마스 머튼도 거의 기계치에 속했고 삽질하나 제대로 못했습니다. 이상에는 강했지만 현실에는 약했던 토마스 머튼입니다. 프린터기를 손봐 고쳐준 수도형제와 주고 받은 메시지를 소개합니다.
-“참으로 감사합니다. 사랑하는 수사님! 전번 휴대폰에 이어 프린터기도 고쳐 주었네요. 수사님이 나에겐 천사요 보물입니다. 달맞이꽃 청초한 사랑! 축복인사 받으시고 행복하세요!”
“감사합니다. 신부님! 이 꽃처럼 저도 주님 사랑의 향기를 전하는 수도승이 되어야겠습니다.”-
오늘 복음을 보십시오. 마르타의 사랑의 환대에 감격하신 주님은 마르타는 물론 우리 모두에게 참 귀한 진리를 알려 주시며 묻습니다. 오늘 복음의 핵심입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고, 또 살아서 믿는 모든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 너는 이것을 믿느냐?”
마르타는 물론 우리 모두에 대한 물음이며 우리 또한 마르타와 같이 대답합시다.
“예, 주님! 저는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시기로 되어 있는 메시아이시며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믿습니다.”
베드로를 능가하는 신앙고백입니다. 바로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이런 주님을 모심으로 영원한 삶을 살게 된 우리들입니다. 저절로 솟아나는 주님 찬미입니다.
“내 언제나 주님을 찬미하리니, 내 입에 늘 찬양이 있으리라. 내 영혼 주님을 자랑하리니, 가난한 이는 듣고 기뻐하여라.”(시편34,2-3).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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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청주성모병원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
주님께 대한 사랑고백은 삶으로 해야한다>
사랑을 고백하려면 진지해야 합니다. 그래야 그 마음을 제대로 읽을 수 있습니다. 또 마음은 있지만 표현하지 않으면 그 진심을 놓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기회가 되면 적극적으로 마음을 표현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야 상대방도 깊이 헤아려 볼 것입니다. 꼭 말을 해야 하느냐? 할 때는 해야 합니다. 이심전심을 확인하는 순간이 될 것입니다.
마르타는 마리아보다 더 활동적이고 적극적인 사람으로 묘사되고 있습니다. 식탁에서 시중을 드는 일(루카10,40)에 있어서도 그랬고, 오늘 “주님, 주님께서 여기에 계셨더라면 제 오빠가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하고 말하는 것을 봐도 그렇습니다. 마르타는 “하느님께서는 주님께서 청하는 것은 무엇이나 들어주신다는 것을 저는 지금도 알고 있습니다” 하며 오빠를 구지 낫게 해 달라고 청하지 않으면서도 주님의 특별한 개입을 희망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해서든 핏줄인 라자로를 살려내고자 하는 절박한 심정이 그 안에 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마르타에게 “네 오빠는 다시 살아날 것이다”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마르타는 마지막 날 부활 때에 다시 살아나는 것을 생각했고 여전히 예수님께서 라자로가 죽기 전에 함께 계셨더라면 하는 아쉬움을 담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다시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고, 또 살아서 나를 믿는 모든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라는 말씀은 부활이 현재 사건이며 그것은 그리스도와 동일하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믿음 안에 있는 한 영원한 생명은 죽은 다음에만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을 포함하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과 함께하고 있다면 오늘로부터 생명을 누리는 것이요, 지금 구원을 이루는 것입니다. 오늘의 생명 없이 영원한 생명은 결코 있을 수 없습니다.
마르타는 “주님, 저는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시기로 되어 있는 메시아이시며 하느님의 아들이심을 믿습니다” 고백함으로써 베드로를 비롯한 제자들에게 신앙고백의 표양을 보여 주었습니다. 여기서 잊지 말아야할 것은 ‘믿었습니다.’의 고백이 아니라 ‘믿습니다.’하는 현재의 고백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를 사랑하시는 주님께 나의 믿음을 고백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러나 좀 더 적극적으로 했으면 좋겠습니다. 주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주님께서 가장 원하시는 사랑의 실천에 더디게 움직이고 있는 것을 보면 아직도 입술에 익숙한 믿음의 고백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삶으로 말해야합니다. 주님께서 나의 삶을 통해서 말씀하시도록 해야 합니다. 스스로 행하지 않으면서 주님을 전한다고 하면 오히려 예수님께 다가가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장애가 되기 때문입니다.
“믿음이 없이는 하느님을 기쁘게 해 드릴 수 없다”(히브11,6)고 했습니다. 우리의 믿음을 사랑의 실천으로 고백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성 루치아노는 “나는 그리스도교 신자입니다. 이것이 최고의 명예이며 또 하느님께 받은 최대의 은혜입니다” 하고 고백했습니다. 우리도 신자임을 자랑스럽게 여기는 만큼 사랑해야 합니다! 우리 믿음의 고백은 말로나 혀가 아니라 진리 안에서 사랑을 실천하는데 있습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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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알타반의 말씀 사랑♡
오늘 미사는 예수님과 특별한 관계를 맺었던 베타니아의 삼남매 중 마르타 성녀를 기념합니다. 미사의 말씀을 통해 마르타의 매력에 푹 빠져봅시다.
"마르타는 예수님께서 오신다는 말을 듣고 그분을 맞으러 나가고,,,"(요한 11,20)
마르타는 환대의 아이콘입니다. 예수님은 종종 마르타의 집에 들러 함께 시간을 보내며 지친 여정을 잠시 뒤로 하고 쉬셨던 것 같습니다. 초대하고 맞이하고 대접하고 불편함을 살피고 섬기는 마르타는 행동하는 사랑입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주님께서 청하시는 것은 무엇이나 들어주신다는 것을 저는 지금도 알고 있습니다."(요한 11,2)
오빠를 병으로 잃어가는 동안 마르타가 얼마나 예수님을 기다렸을지 짐작이 갑니다. 예수님만 곁에 계시면 라자로는 죽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했으니까요. 그렇지만 속절없이 오빠를 잃고 나흘이나 지난 지금까지도 그녀는 그 희망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그녀는 예수님께 완곡하면서도 강력히 자신의 바람을 표현합니다. 그녀에게는 예수님만이 오빠를 죽음에서 되돌려 세울 수 있는 분이니까요 그녀는 자신이 "알고 있는" 바를 예수님께 주저하지 않고, 거침없이, 확고히 고백합니다.
"너는 이것을 믿느냐?"(요한 11,26)
마르타는 부활 신앙을 "알고" 있습니다. 그런 마르타에게 예수님께서 단도직입적으로 물으십니다. 네가 알고 희망하는 바를 믿느냐고요. 사실 머리로 알고 또 요행처럼 바라기도 하지만, 진짜로 진짜로 믿고 있지는 않을 수도 있으니까요.
"예, 주님! 저는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시기로 되어 있는 메시아시며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믿습니다."(요한 11,27)
마르타의 입에서 어느 학자나 영성가 못지않은 신앙 고백이 튀어나옵니다. 구원 역사의 핵심을 찌르는 그리스도론의 정수라 할 수 있는 내용이지요.
"믿습니다!"
이로써 마르타의 앎과 희망은 믿음으로 끌어올려집니다. 믿음은 지식이나 감성을 넘어서는 신비의 관문입니다. 고통의 시간을 지낸 마르타의 영혼은 앎과 희망과 믿음에 예수님 향한 사랑까지 더하여 완성되어 갑니다.
제1독서는 온통 사랑 이야기입니다. "사랑"이란 단어가 무려 열여덟 번이나 반복되고 있지요.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사랑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하느님 안에 머무르고 하느님께서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르십니다."(1요한 4,16)
우리가 사랑해야 하는 이유는, 하느님이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또 하느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이지요. 사랑에서 나온 우리는 사랑에 싸여 살다가 사랑으로 돌아갑니다. 그 과정 안에 사랑 아닌 것들이 가라지처럼 집요하게 끼어들어 우리를 끌어내리지만, 그래도 사랑을 외면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사랑이신 분의 사랑이니, 사랑 쪽으로 기우는 것이 본성적으로 가장 자연스럽기 때문입니다.
마르타는 마음 속 열정을 행동하고 말하고 표현하는 사랑입니다. 시원시원하게, 적극적이고 능동적으로, 솔직하고 개방적이며 단순하고 순박한, 사랑의 표현가이자 사랑의 활동가라 할 수 있지요.
사실 깊고 뜨거운 사랑의 관상가 마리아의 그늘에 잠시 가려지긴 하지만, 그마저도 개의치 않고 팔을 걷어부치며 사랑하는 일에 용감무쌍히 뛰어드는, 예수님의 매력 만점 친구지요.
사랑하는 벗님! 마르타 성녀를 기리는 오늘, 우리도 그 사랑과 믿음을 닮을 수 있기를 청해 봅니다. 언제나 두 팔을 활짝 펼쳐, 지치신 예수님을 밝고 힘차게 맞아들였던 마르타처럼 용기 내어 사랑의 문을 열어 젖힙시다. 때로는 마르타처럼 행동하는 사랑으로, 때로는 마리아처럼 머무르는 사랑으로 예수님과 우리의 관계는 더 친밀해지고 깊어지리라 믿습니다.
베타니아의 마르타, 저희를 위하여 빌어주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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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대교구 김홍언 요한보스코 신부님]
※김홍언 신부님의 영성의 샘물※
♥마음공부하고 깨달아 내 건강하지 못한 생각을 바꾸기
마음을 바로잡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우선 내가 가진 생각이 건강하지 않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마음을 공부하는 겁니다. 기도만 하면 되지 않느냐고요? 천만에요. 공부하고 깨달아 내 생각을 바꿔야 합니다.
그래야 기도도 건강해집니다. 생각이 건강하지 않고 우울한 상태일 때 기도를 해 봤자 건강하지 못한 생각만이 부풀어 올라 우울감이 짙어집니다. 때문에 생각을 바꾸는 일이 참 중요합니다. 내가 가진 생각들을 적어 보시고, 하나씩 점검해 보세요. 생각을 바꿀 수 있는 가장 쉬운 첫 걸음입니다.
-「나는 생각보다 괜찮은 사람」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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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그리스도의 향기가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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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수도회 양주분회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오늘 <복음>은 부활의 믿음에 대한 초대입니다. 그것은 “나는 안다”에서, “나는 믿는다.”에로의 초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빠 라자로의 죽음을 슬퍼하고 있는 마르타와 마리아에게 찾아오십니다. 마르타가 집밖으로 뛰쳐나와 예수님께 말합니다.
“주님, 주님께서 여기에 계셨더라면, 제 오빠가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요한 11,21)
이 인사말에는 예수님께 대한 마르타의 원망과 섭섭함이 묻어납니다. 마치 오빠가 죽은 이유가 예수님이 여기에 계시지 않은 까닭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사실 그럴 법도 할 것입니다. 임종 때에도, 장례식 때에도 오시지 않고 사흘이 지나서 이제야 찾아오시는 예수님이 섭섭하기도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는 예수님께 대한 확신에 대한 고백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마르타는 하느님의 권능을 알고 있다고 고백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주님께서 청하시는 것은 무엇이나 들어주신다는 것을 저는 지금도 알고 있습니다.”(요한 11,22)
그러나 그분의 권능을 ‘알고 있다’고 고백할 뿐, ‘믿는다.’고 고백하지는 않습니다. 곧 예수님께서 그렇게 해주실 수 있는 분이심을 “압니다.”(οιδα)라고 고백하지만, 예수님께서 그렇게 해주실 것을 “믿습니다.”(πιστιω)라고 고백하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네 오빠는 다시 살아날 것이다.”(요한 11,23)
그러나 마르타는 여전히 “마지막 날 부활 때에 오빠도 다시 살아나리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요한 11,23) 하고, 또 다시 “압니다.”라고 고백할 뿐, 여전히 “믿습니다.”라고 고백하지는 않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마르타에게 부활에 대한 믿음을 일깨우십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고, 또 나를 믿는 모든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 너는 이것을 믿느냐?”(요한 11,26)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내가 부활과 생명을 너에게 준다.”라고 말씀하지 않으시고, “너는 이것을 믿느냐?”고 물으십니다. 이는 믿을 때라야, 그 믿음 안에서 부활과 생명이 부여된다는 말씀입니다. 곧 부활과 생명은 믿는 이에게 주어진다는 말씀입니다. 그러기에, 믿는 이들은 그 믿음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이 땅에서 이미 소유하게 됩니다. 믿는 이들은 비록 이 땅에서는 육체적인 죽음을 겪을지라도, 그 생명은 영원히 죽지 않게 됩니다.
마침내 마르타는 믿음을 고백합니다.
“예, 주님! 저는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시기로 되어있는 메시아이시며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믿습니다.”(요한 11,27)
그러나 이 믿음 역시 주님께서 메시아이시며 하느님의 아드님임을 믿는 고백일 뿐, 부활에 대한 믿음은 아닙니다. 그래서 라자로의 무덤 앞에서 다시 한 번 믿음에 대한 일깨움이 있게 됩니다.
“네가 믿으면 하느님의 영광을 보리라고 내가 말하지 않았느냐?”(요한 11,40)
주님!
오늘 저는 당신이 부활이요 생명임을 “알고 있습니다.”라고 고백하는 것이 아니라, “믿습니다.” 라고 고백합니다. 하오니, 오늘 제가 당신의 생명(부활)을 살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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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살아서 나를 믿는 모든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요한 11,26)
주님!
부활을 믿게 하소서!
제 생명이 죽고, 당신 생명이 피어나게 하소서!
제 안에 살아계신 당신 생명을 보게 하소서!
제가 사라지고 당신이 드러나게 하소서!
믿음으로 당신의 영광을 보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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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소보둥지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www.youtube.com/watch?v=C6XgsHUHpcI&feature=youtu.b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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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너는 이것을 믿느냐?"(요한 11, 26)
붙잡고
울어야 하는
사랑의 간절한
이름이 있습니다.
사랑 때문에
아프고
사랑 때문에
간절한 기도가
울려퍼집니다.
믿음은
이와같이
사랑하는
사람들의 고유한
몫이 됩니다.
라자로를 잃은
가장 아픈 곳에서
예수님을 다시
만납니다.
상처와 믿음
죽음과 부활로
이어지는
삶 속에서
우리에게는 아직도
애절히 부를 이름이
남아 있습니다.
서로를
부르는 것이
살아있는 우리의
믿음입니다.
예수님에 대한
깊은 신뢰에서
변하지 않는
사랑을 만납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찾아온
믿음을 결코
박대하지
않으십니다.
믿음이 있기에
고통이 있고
고통이 있기에
믿음이 있있습니다.
죽음 맞은편에
서 있는 부활을
진심으로 믿습니다.
믿음에 대해
아무 것도 몰랐던
우리들에게
고통과 죽음을 통해
믿음을 다시
보여주십니다.
성녀 마르타의
눈에서
새로운 믿음의
기쁨을 만나는
시간 되십시오.
고통과 죽음을
채워주는 믿음을
진실로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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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묵상글 나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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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자로 보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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