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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25 / 복이 있는 자가 되자 (시84:1-12)
오늘 본문을 보다 보면 시편 기자가 강조하려는 것이 ‘복이 있나니’와 ‘복이 있나이다’라는 부분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솔직히 세상 사는 중에 복 싫어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우리가 복과 관련해서 자주 듣거나 혹은 하는 말들은 대개 두 가지로 나누어집니다. “누군 복도 많아.”라거나 “나는 지지리도 복이 없어.”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 말들을 할 때면 그 바탕에 깔린 의도가 전자는 ‘나와 누군가’를 비교하는 말이고, 후자는 ‘나를 누군가’와 비교하는 말입니다. 결국 표현 방식만 다를 뿐 ‘나에겐 복이 없다.’는 결과를 한탄한다는 점에서는 같은 말이라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백날 ‘누군 복도 많아’라고 해봐야 나완 상관없는 일이고 또한 맨날 ‘나는 복도 없지’라고 해봐야 내게 득 될 건 아무것도 없습니다.
여러분은 어떠신가요? 복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어떨 땐 있는 것 같다가도 다시 보면 없는 게 분명하고 그래서 복이 있을 때도 있고 없을 때도 있다 여겨지시나요?
말만 놓고 보자면 우리 인생에 복이 없다는 것도 틀린 말이 아니고 복이 있다는 것도 맞는 말입니다.
그런데 둘 다 맞는 말이라면 우린 그리스도인으로서 내겐 복이 있다고 해야 할까요? 아니면 없다고 해야 할까요?
질문에 제대로 답을 하기 위해서는 먼저 알아야 할 것이 복이 없다고 하는 것과 있다고 하는 것의 차이가 무엇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복이 없다는 세상적인 기준에서 보면 맞는 말이고, 복이 있다는 신앙적으로 보면 맞는 말이라는 차이가 있습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이라면 절대로 ‘나는 복이 없다.’는 말을 해서는 안 됩니다.
또한 복이 있을 때도 있고 없을 때도 있다는 생각도 하지 말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복이 있다, 없다를 따지는 것 자체가 이미 세상적인 기준에서 복의 유무를 판단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복이 있다고 하는 것만이 신앙적인 이유는 무엇일까요?
제자 훈련 시간에 이미 배우셨듯이 성경에서 말하는 ‘복의 개념’이 세상적인 것과 다르기 때문입니다. 세상에서는 처지와 형편, 물질적인 것 등을 기준으로 해서 복의 유무를 판단하지만, 신앙적으로는 ‘하나님이 함께하심’을 기준으로 하기 때문입니다. 즉 성경에서 ‘복이 있다.’고 하는 말을 풀어 쓰면 ‘하나님이 함께하신다.’ 말인 것입니다.
본문에서도 보면 ‘이러이러한 자가 복이 있나니.’라거나 ‘이리저리할 때 복이 있나이다.’라고 한 걸로 봐서는 현재는 ‘복이 없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시편 기자는 복이 없는 형편에서일지라도 ‘이런 자가 복이 있도다.’라고 하면서 누구라도 앞으로는 복이 있게 될 방법이 무엇인지를 가르쳐 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찌해야 할까요? 우리도 복이 있는 자가 되려면?
먼저 4절 말씀을 보세요. “주의 장막에 사는 자들은 복이 있나니.”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생각해 보셨습니까? 주의 장막에 사는 자들이 왜 복이 있는지를?
말 그대로 ‘주의 장막에 사는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즉 앞서 말씀드렸듯이 ‘주의 장막에 사는 자들’은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과 함께 사는 자들’이란 뜻입니다. 그런데 복은 하나님이 함께하심이 복이라 했으니, 누구든 하나님과 함께한다면 거기가 주의 집이 되는 것이고, 거기서 사는 내내 하나님이 주시는 복이 있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도 복이 있는 인생이 되려고 하면 하나님이 계시는 주의 장막에 사는 자가 되어야 할 터인데,
그렇다면 주의 장막은 어디에 있을까요?
일차적으로는 주의 집은 성전이기에 오늘날엔 교회를 말합니다.
본문 1절 말씀도 보면 “만군의 여호와여 주의 장막이 어찌 그리 사랑스러운지요.”라는 말로 시작하고 있는데, ‘주의 장막이’라고 한 것으로 보아 시편 기자는 단순히 ‘장막’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계신 곳’을 사랑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 말인즉 그들은 사람들이 세우고 모이는 장막이 아니라, 거기에 계시는 하나님을 사랑했다는 말입니다.
가끔 보면 ‘예수님은 좋지만, 교회는 싫다.’는 분들이 계시는데, 사실 사람들이 모인 교회이기에 세상 어느 교회도 완벽한 교회는 없습니다. 어디나 나름의 문제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 역시도 건물로 교회를 평가하고 모이는 사람들로 교회를 판단하려 하지 말고 오직 거기서 나를 만나주시는 하나님만 보고 교회 생활을 하려고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자니 교회의 문제점들을 보며 교회를 위해 더 기도하고, 바른 교회를 만들기 위해 나라도 한 알의 밀알이 되려는 분들이라면 그런 교회와 개인은 은혜가 있게 됩니다. 결국엔 하나님의 복이 있게 될 것입니다.
이제부터는 신앙생활을 하는 중에 운치 않은 또는 피하고 싶거나 싫은 것들이 있다 해도 뭔가를 ‘내가 하는’ 자가 되려 하지 말고 오직 인내하는 중에 ‘내가 당하는’ 자가 되려 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행위들 중에 ‘내가 하는 것’들 중에는 인본주의적이거니 불신앙적인 것이 될 요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고난과 어려움일지라도 믿음 안에서 ‘내가 당하는 것’이라고 하면그땐 하나님이 내가 당한 그 모든 것들을 굽어보시고는 결과적으로는 내게 가장 합당한 방법으로 역사하시는 복이 있게 하십니다. 그래서 내 뜻대로 되는 것도 복이지만 내가 원치 않는 자리에서 나가게 하시는 것도 복이라는 것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두 번째로 우리가 사랑해야 할 주의 장막이 어딘고 하니, 고린도전서 3:16절에서 보듯이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고 했던 것처럼 ‘주의 집이 곧 나 자신’이란 사실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여기엔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펏째로 내게는 하나님이 계신다는 확신 있는 믿음과 둘째로 주의 집을 사랑한다면 내가 나를 사랑해야 한다는 교훈도 꼭 기억해야 합니다.
미국의 어떤 부인이 광고를 냈습니다. ‘남편 염가로 급히 양도함. 남편의 골프채와 사냥도구, 그리고 개도 함께 끼워줌.’
그런데 미국이라서 그랬을까요? 의외로 전국 각지에서 문의 전화가 불티나게 왔다고 합니다. 그런 중에 어느 한 분은 직접 손 편지를 써서 보냈답니다. ‘남편이 싫어도 끝까지 포기하지 말고 사랑해 보세요.’라고.
‘싫어도 끝까지 포기하지 말고 사랑해 보자!’
이게 하나님이 거하시는 주의 장으로서의 내가 나에게 해야 할 믿음의 자세입니다.
이제부터는 내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이 말은 우리가 내 안엔 늘 하나님이 계신다는 것을 믿는 걸 의미합니다. 따라서 주위 사람 모두가 포기하고 비난한다 할지라도 나 자신만은 나를 사랑하고 믿어줘야 합니다. 왜냐하면 나는 나인 동시에 나는 하나님이 계신 성전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내가 나를 비난하면 그건 곧 하나님을 비난하는 것이 됩니다. 내가 나를 비하하면 그건 곧 하나님을 비하하는 것입니다. 내가 내게 실망하면 그건 곧 하나님께 실망하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내가 나이기에 때론 실패할 수도 있습니다. 일이 잘 안될 때도 있고, 원하는 대로의 결과가 나타나지 않을 때도 있겠지만, 거기서 멈춰 버리면 안 됩니다. 내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을 고백하는 자리로까지 나가는 여러분의 믿음이 되시기를 권면을 드립니다.
2절 말씀을 보세요. “내 영혼이 여호와의 궁정을 사모하여 쇠약함이여 내 마음과 육체가 생존하시는 하나님께 부르짖나이다.”라고 했듯이 주의 집인 내 형편이 때론 만족 되지 않아도 희망과 소망을 잃지 말고 그럴수록 더욱 바른 교회의 바른 교인이 되기 위해 성전 된 나를 위해 더 간절히 기도하고, 주의 집인 내가 잘되기 위해 더 땀 흘려 수고하고 애쓰는 인생을 살아가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시편 기자는 주의 장막이 편하고 웅장하고 멋져서가 아니라, 거기에 하나님이 계시다는 이유만으로 교회를 사모한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여러분 각자가 내 안에 하나님이 계신다는 이유만으로 ‘내게 복이 있나이다’라고 간증할 날만을 확신하며 기도하는 하루하루를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행여라도 나는 교회 갈 환경이 못 된다거나 예배드릴 형편이 안 된다고 속상해하고 고민하시는 분들이라 할지라도 이젠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주의 장막이 교회인 동시에 내 자신인 것을 아셨다면 건물인 교회네는 못 가도 내 자신인 성전에는 갈 수 있다는 것과 모이는 교회에서의 예배는 못 드려도 나 있는 곳에서의 성전에서의 예배는 드릴 수 있음을 아시고 그렇게 하려 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이 계신 곳이 교회이기에 내가 교회에 가지 못한다면 하나님이 내게로 와 내가 교회가 되게 해 주신다는 것을 믿으셔서 비록 교회는 못 간다고 할지라도 있는 그 형편에서 남들이 유행가 들을 때 찬송을 들으시고, 남들이 드라마 볼 때 성경 말씀을 보시고, 남들이 웃고 떠들 때 하나님을 만나 기도할 수 있다면, 거기가 어디든 거기가 주의 장막이기에 거기에 하나님의 복이 있게 될 것입니다.
또 한편, 어떤 자가 복이 있는가 하면 5절에서 보시듯이 “주께 힘을 얻고 그 마음에 시온의 대로가 있는 자.”가 복이 있습니다.
사람은 무엇에서 힘을 얻느냐에 따라 그 인생이 달라지고 인격이 달라집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어디서 힘을 얻으려 합니까?
본문 2절을 보면 “내 영혼이 여호와의 궁정을 사모하여 쇠약함이여.”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세상에서의 사람들은 세상 것 중에서, 특히나 돈으로 힘을 얻으려고 합니다.
물론 직접적으로 그런 말을 하는 사람은 없을지라도 사는 모습을 보면 그렇게들 삽니다. 여러 고상한 핑계와 변명과 이유를 대지만 거의가 다 돈 문제 때문입니다.
이는 불신자만 그런 게 아니고 교인 중에서도 돈을 사모하여 쇠약해지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단지 다른 게 있다면 세상 사람들은 자기 힘으로 돈을 벌려고 하고, 교인들은 하나님의 힘을 빌려 돈을 벌려고 한다는 차이일 뿐입니다.
이제 우리는 사모하는 힘의 원천을 바꾸어야 합니다.
성경에서 “내 영혼이 여호와의 궁정을 사모하여 쇠약함이여.” 함과 같이, 같은 논리로 성경대로라면 돈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결과는 ‘내 영혼이 돈을 사모하여 쇠약함이여.’가 됩니다.
이때 하나님을 사모하다 쇠약해지면 하나님이 새 힘을 주시되 독수리가 날개 치며 올라감 같게 하시고 달음박질하여도 곤비하지 아니하고 걸어가도 피곤하지 아니하게 하시겠지만, 돈을 사모하다 쇠약해지면 그땐 그저 실패자가 되고 말 뿐입니다.
형편이 그리되면 사람들은 다른 어디에선가라도 힘을 얻으려고 이곳저곳을 기웃거리지만, 우린 그리스도인이기에 우린 세상을 “주께 힘을 얻는 자”답게 살아가야만 합니다.
그렇다면 생각해 봐야 할 것이, 어떻게 해야 우리가 주께 힘을 얻는 자로 살 수 있을까요?
본문 12절에 답이 나옵니다. “만군의 여호와여 주께 의지하는 자는 복이 있나이다.”
그랬기에 고라 자손은 8절로 9절에서처럼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여 내 기도를 들으소서. 야곱의 하나님이여 귀를 기울이소서. 우리 방패이신 하나님이여. 주께서 기름 부으신 자의 얼굴을 살펴보옵소서.”라고 기도하고 또 기도했던 것입니다.
이 부분을 정리하자면 이렇습니다.
누가 복이 있나?
주의 장막에 거하는 자가 복이 있습니다.
주의 장막에 거하는 자가 왜 복이 있나?
거기에 하나님이 계시기에 복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주의 장막에 거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첫째론 모이는 성전인 교회에서 하나님께 예배드리면 됩니다.
둘째로 흩어져서는 성전 된 나 자신이 하나님께 기도하면 됩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인생을 주께 의지하여 날마다 새 힘을 얻는 주인공으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바라기는 이제 우리도 이왕에 하나님을 믿을진대 이제부터는 더 소중한 것을 사모하며 살아야 합니다. 이에 고라 자손은 또 고백하고 있습니다. 본문 3절 말씀을 보세요. “나의 왕, 나의 하나님, 만군의 여호와여 주의 제단에서 참새도 제 집을 얻고 제비도 새끼 둘 보금자리를 얻었나이다.”라고 했습니다.
예전 우리가 IMF를 겪을 때, 고아원에는 고아 아닌 고아들이 가득 찼었다고 합니다. 부모들이 먹고살기 힘드니까 아이를 버린 겁니다. 당시 방송국 기자가 6살 난 아이에게 물었습니다. ‘너는 왜 여기에 들어오게 됐니?’ 그러자 아이가 울먹이며 대답하기를 ‘엄마가 이곳에 있으면 과자 사 올 테니까 잠깐만 있으라고 해서 있었는데 서른 밤이 넘도록 오지 않아요.’라고 했답니다.
밤에 원장이 둘러보면 다들 자는 척은 하는데 다음 날 아침이면 베개가 눈물로 흥건히 젖어 있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보금자리를 잃어버린 모습처럼 불쌍하고 가련한 모습은 없습니다. 그런데 육신의 보금자리보다 더 중요한 것이 우리 영혼의 보금자리입니다.
세상에서 집은 있을지언정 자신이 안식하고, 사랑하고, 섬길 교회가 없는 것처럼 큰 불행은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에 못지않게 내가 내게 하나님이 계시는 교회인 것을 모르고 살아가는 것처럼 안타까운 일도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모이게 되면 거기가 교회가 되게 하셨고 흩어지면 내가 교회가 되게 하심으로 언제 어디서든 우리가 성전 안에 있을 수 있게 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이 친히 그곳에 함께 계셔 주심으로 그리 되게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일이면 교회에 모여 예배드리기에 힘쓰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흩어지게 되면 각자가 있는 그곳에서 말씀 보며 찬양하며 기도함으로써 있는 그곳을 교회가 되게 하셔야 합니다.
하나님은 그런 사람에게 확실한 복을 약속하고 계십니다.
본문 4절을 보세요. “주의 집에 사는 자들은 복이 있나니.”
강남의 어느 교회에서 오지 선교를 하면서 교회 지어주기 운동을 펼쳤습니다. 그때 한 사업가가 자신도 교회 하나를 짓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하필이면 사업이 부도가 나서 손에 쥔 돈이 5백만 원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오히려 마지막 남은 돈이기에 더더욱 교회 짓는데 쓰기로 결정하고 그 돈을 선뜻 하나님 앞에 내놓았습니다.
덕분에 필리핀의 파나이섬 나무 그늘에 모여 예배를 드리던 원주민들이 조그맣게나마 교회를 건축하고 예배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그리고는 교회에 모일 때마다 교회를 지어준 한국의 사업가를 위해 전 교인이 매달려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한편 강남의 교회에서도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부도났던 사업가의 사업이 다시 번창 하기 시작하더니 신기하게도 모든 막혔던 문제들이 하나둘씩 풀려가기 시작했습니다.
처음엔 우연인 줄 알았답니다. 그래도 믿음이 있었기에 하나님의 은혜라고 감사한 마음을 가졌었는데, 파나이섬에서 온 선교 편지를 보고는 전후 사정을 알게 되었답니다. 그곳 교인들이 교회를 지어준 사업가를 위해 전심으로 기도했다는 사실을.
교회가 마련되기 전에 파나이섬 교회 교인들은 성전 마련을 위해 얼마나 간절하게 기도했겠습니까?
그랬더니 교회 건축의 복이 있게 됐습니다. 기적 같은 일 아닙니까?
그리고 성전이 마련된 후에는 교회를 지어준 독지가를 위해 전심으로 기도했습니다.
그랬더니 교회 건축 헌금을 한 사업가에게는 사업이 다시 번창하는 복이 있게 되었습니다. 이 역시 기적 같은 일입니다.
이렇듯 주의 집에 거하는 자들 곧 하나님의 복이 있는 자들의 가장 큰 특징은 기도에 진심이었고 전심이었다는 겁니다.
주님의 교회는 ‘성도들의 기도’를 먹고 부흥되며, 몸으로 주님의 성전 된 나는 ‘나의 기도’를 먹고 성장합니다.
모쪼록 여러분은 섬기는 교회만이 아니라 여러분의 몸 된 교회를 위해서도 더욱 사랑하고 헌신하고 기도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이 반드시 여러분을 축복하실 것입니다.
이후로는 여러분 모두에게 소망했던 복이 있게 되고, 어려웠던 여러분 인생이 다시 재기하고 번성케 되는 ‘복이 있는 자’가 다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