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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점, 1963
<구무소>
역전에는 광장이 있고 광장 주변에는 음식점이나 잡화상이 있게 마련이다. 이어서 옷가지나 식료품을 파는 가게 등등이 죽 나오고, 그것들이 일반 주택으로 이어지게 되어 있다. 작은 마을의 작은 역전도 작은 규모로 이렇게 되어 있다. 그러나 동점역은 이렇게 되어 있지 않다. 역사(驛舍)가 한 동(棟) 덜렁 떨어져 있을 뿐이다. 기차에서 내려 차표를 내고 역사 바깥으로 나가면 기찻길과 나란히 난 도로가 곧바로 나타난다. 역사에서 나와 오른 편으로 가면 봉화 쪽이다. 나는 그 쪽으로 가 본 적이 한 번도 없다. 그 쪽에서 온 적은 한 번 있다. 동점으로 이사올 때 그 쪽에서 왔으니까. 우리가 동점으로 이사온 것은 1961년 아니면 1960년이다. 내가 살던 마을로 가려면 역사에서 나와 왼 편으로 가야 한다. 그러나, 봐라, 반 세기도 더 되지 않았는가? 봉화 쪽으로 가면 뭐가 나오는지 전혀 모르는 반면, 동점 쪽으로 가면 뭐가 나오는지 제법 잘 알지만, 지금 내 머릿 속에서는, 나오는 모든 것이 온통 뿌옇고 희끄므레하게 되어 있다. 모든 풍경이 석탄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어서 그런 것만은 아니다. 기억의 문제다. 빛바랜 흑백사진 같다고 할까? 파스텔톤의 그림 같다고 할까? 돌 벽에 새긴 마애석불 같다고 하는 것이 제일 적절할지 모른다. 50여 년이나 지났으니 잊어버리기도 많이 잊어버렸겠지만, 여섯, 일곱 살 어린 나이에 본 것이니 입력된 내용 자체가 그다지 선명하지 않을 것 같기 때문이다.
역사에서 나와 왼 편으로 길을 잡고 약간의 경사가 있는 내리막길을 한 200미터 정도 걸으면 구무소가 나온다. 소(沼)다. 인터넷을 뒤져봤더니 ‘구무소’가 아니라 ‘구문소’로 되어있다. 한자도 나와 있다. ‘求門沼’ 그러나 한자 글자는 중요하지 않다. ‘구멍’을 나타내기 위해 발음이 비슷한 한자를 끌어온 것일 테니까. 물줄기가 흘러내려오다가 야산을 뚫고 굴을 만들어 흐르는데, 굴이 끝나는 지점에 큰 소(沼)가 만들어진 것이다. 구무소 위로 교량이 놓여있다. 높은 다리 위에서 내려다보면 깊이를 알 수 없는 시커멓고 시퍼런 물이 흰 색 소용돌이를 만들면서 흘러내린다. 나는 그 물과 그 물을 쏟아내는 시커먼 동굴을 볼 때마다 크나큰 공포를 느꼈으며 그날 밤에는 꿈을 꾸곤 하였다. 나는 상류 쪽으로 올라갔다가 물에 빠지고 만다. 강한 물줄기에 휩쓸려 무시무시한 굴속으로 흘러들어간다. 아무 것도 보이지 않고 고막을 찢는 물소리만 들린다. 나는 몇 개의 작은 폭포에서 떨어지기까지 하지만 이상하게 아프지는 않다. 그러다가 ‘쾅’하면서 굴 바깥으로 튀어 나와 소의 소용돌이에 걸려 빙글빙글 돌면서 깊은 물속으로 쑤욱 들어간다. 이런 날은 이불에 오줌을 질렀을지도 모른다. 그 정도로 무서웠던 곳이 구무소다.
아저씨들은 구무소 같은 것은 무섭지도 않나? 아저씨들은 구무소를 등지고 일렬로 쪼그리고 앉아 담배를 피우면서 이야기를 나누곤 하였다. 몇 걸음만 뒤로 가면 30, 40미터 아래로 떨어져 소에 빠질텐데 말이다. 역사에서 나와 구무소 가까이에 오면 도로가 양 쪽으로 갈라진다. 삼거리다. 그래서 그런지, 아니면 거기가 역전 광장 역할을 대신했는지, 그 곳에 어른들이 가끔씩 모여 있곤 하였다. 하여간 나는 그렇게 기억한다. 삼거리에서 왼 쪽으로 가면 장성이다.
장성은 대처(大處)다. 내가 감기에 걸려 밥을 잘 먹지 못하면 할머니는 합승이라고 불리던 작은 버스에 나를 태워 장성으로 나왔다. 우동을 사 먹이려는 것이다. 할머니, 이게 뭐야? 우동이란다. 한 그릇만 시켰을 것이다. 할머니는 손자가 먹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을 것이다. 기억나지 않지만, 아마 그랬을 것이다. 기억나지 않는 것은, 아이는 중국집 탁자 위에 턱을 올려놓고 서툰 젓가락질을 하느라 정신이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할머니를 따라 어느 중학교의 운동회를 구경간 적도 있는데, 그 중학교도 장성에 있는 학교였던 것 같다. 평평한 돌멩이를 두 개 주어와 깔고 앉았다. 도시락까지 싸 가지고 갔었고 오후 늦은 시간까지 우리는 운동회를 즐겼다. 나는 장성에서 열린 사생대회에 참석한 적도 있다. 물론 국민학교에 입학한 이후의 일일텐데, 그 때 할머니는 나에게, 합승을 타고 갈 수 있게, 차비를 줬지만 나는 다른 아이들과 같이 산을 넘어 걸어서 갔다. 산길 가에, 꽃을 심어 놓고 하얀 차돌들을 깔아 놓은 작은 공원이 있어서 우리는 거기에서 쉬었다 갔다. 혼자서 멀리 가 본 것은 그 때가 처음이라서 겁이 많이 났지만, 아이들을 따라 그 길을 되짚어 잘 돌아왔다.
우리 마을로 가려면 구무소가 있는 삼거리에서 왼 쪽이 아니라 오른 쪽으로 가야 한다. 구무소 위로 난 높은 다리를 건너 한참 가면 작은 마을이 하나 나온다. 한 20분 정도 걸으면 되지 않을까? 지금은 당연히 포장이 되어 있겠지만, 그 당시에는 그 길이 먼지가 폴폴 나는 신작로였다. 나도 그 길 닦는 데에 힘을 보탠 셈이다. 당시에는 부역이라는 것이 있었잖아? 돈 내는 것으로 대신할 수도 있었던 것 같은데, 우리 집은 유휴 노동력이 있어서 부역에 기꺼이 참석하였다. 우리 할머니 말이다. 남자들이 삽질이나 곡괭이질을 할 때 할머니는 하얀 수건을 머리에 쓰고 길 가에 앉아 망치로 돌멩이를 깼으며 그것을 삼태기에 담아 날랐다. 나는 종일토록 할머니 곁에서 돌멩이와 흙을 가지고 놀았다. 그러다가 하루 일과가 끝나면 우리는 시냇물에 들어가 골뱅이를 잡았다. 골뱅이는 이끼가 끼여 미끌미끌한 물 속 바위에 붙어 있었다. 골뱅이 잡는 일이 어째서 그렇게 재미있었는지, 과부 할머니와 어린 손자는 시간 가는 줄 몰랐다. 인터넷에 들어가 보았더니, 이 시냇물이 철암천으로 되어 있더라. 그리고 구무소의 상류는 장성천이더라. 이 두 하천이 구무소 조금 아랫 쪽에서 만나 낙동강이 된다.
<술도가>
우리 마을에는 당시에 20호나 30호 정도의 집이 있었던 것 같다. 신작로를 중심으로 양 쪽에 집이 있었는데, 우리는 처음에 왼 편 쪽에 살다가 오른 편 쪽에 집을 지어 이사를 갔다. 왼 편 쪽에 살 때 우리는 아기를 잃었다. 살았으면 내 둘째 동생이 될 아이였는데, 태어나자마자 죽었다. 그 때 쉬쉬하던 어른들은 내가 모르는 줄 알았겠지만, 나는, 집의 나무 담장을 허무는 공사를 한 탓에 동티가 나서 이렇게 되어버렸다고 할머니가 생각하셨다는 사실을 포함해 모든 것을 다 알고 있었고, 심지어 뒤처리를 할머니가 하셨다는 사실까지 알고 있었지만, 다른 식구들과 마찬가지로, 그와 관련된 일은 입도 벙긋하지도 않았다. 마을에는 눈깔사탕을 파는 점방이 있었고, 술도가가 있었다. 도가는 상당히 컸다. 아이들은 2미터는 족히 되는 철문, 꼭대기에는 뾰족한 창이 여러 개 꽂혀있는 철문을 넘어 들어갔다. 도가 뒷마당에는 갓 쪄내어 김이 모락모락 나는 꼬두밥이 널빤지 위에 널려있었다. 아이들은 그것을 한입씩 털어 넣고 냅다 달려 도로 철문을 넘어왔다. 철문만 넘으면 되는 것이다. 어른들과 우리 사이에는 묵계 같은 것이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도가의 한 어른이 게임의 규칙을 깨고 말았다. 철문을 열고 쫓아나온 것이다. 신작로에서 몇몇 아이들이 잡혀서 얻어맞았다. 나도 잡혔는데, 얻어맞지는 않았다.
도가 맞은편의 우리 집 뒤에는 제법 넓은 시내가 흘렀다. 철암천이다. 냇가에는 돼지우리가 늘어서 있었다. 내 기억이 맞다면, 도합 네 칸인데, 그 중 한 칸은 우리 할머니 것이다. 기억하는 사람이 있으려나? 내가 지금까지 쓴 글 중에서 그나마 약간은 마음에 드는 것인데, ‘임송출 여사의 바캉스’라고 제목을 붙인 것이 있다. 어느 해 여름, 할머니는 돼지 쳐서 모아둔 돈을 깨서 손자를 데리고 동해안으로 바캉스를 다녀왔다. 물이 불어나는 여름철이 아니면 시냇가에는 백사장 대신 자갈밭이 넓게 만들어졌다. 아이들은 자갈밭을 돌아다니면서, 땅에 그으면 분필처럼 그려지는 무른 돌멩이를 찾았다. 우리가 그것을 어떤 이름으로 불렀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데, 서울에 올라와보니 서울 아이들은 그것과 유사한 것을 석필이라고 부르더라. 나보다 약간 나이가 많은 재남이, 재동이 형제가 있었다. 그 곳의 동무들 중에 내가 여지껏 이름을 기억할 수 있는 아이들은 이 형제들밖에 없다. 재남이가 시냇물 속에서 똥을 누었다. 약간 이상하지만, 하여간 나는 그 아이가 물속에서 똥을 눈 것으로 기억한다. 똥이 떠내려가는데, 똥 덩어리 속에서 허연 것이 흩어져 나와 꿈틀거리면서 떠내려가는 것이 보였다. 회충이었다.
시내를 따라 조금 더 내려가면 물 흐름이 오른 쪽으로 꺾어지는 곳이 나온다. 큰 바위에 막혀서 물이 꺾어지는 것이다. 그런 곳은 수심도 깊어서 멱감고 놀기가 좋다. 여름철이면 사내아이들은 발가벗은 몸이 새카맣게 타도록 이곳에서 놀았다. 큰 아이들은 시내를 헤엄쳐 건넜으며, 건너간 김에 바위에 올라가 물속으로 뛰어내리기도 하였다. 추워지면 따뜻하게 달구어진 자갈밭에 엎드려 몸을 말렸다. 나는, 언젠가, 나보다 조금 큰 사내아이들이 자기들끼리, 어린 나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하는 것을 보았다고 생각한다. 당시에 내가 이해하지 못한 행동이니 지금도 그것이 무슨 행동이었는지 말할 수 없되, 그저 이해할 수 없는 어떤 것을 보았다는 것만 기억한다. 배가 고파지면 콩서리를 하였다. 콩깍지채로 불에 익혀서 까먹는 것이다. 주둥이에 검댕이 묻어 아이들은 모두 검둥이처럼 되어버린다. 그것이 원추리 뿌리인지, 민들레 뿌리인지, 큰 아이들은 주머니칼로 뿌리를 캐서 물에 씻어주었는데, 의외로 맛이 있었다.
이 물을 따라 조금 더 내려가면 내가 할머니와 골뱅이를 잡던 너른 내가 나오고, 더 내려가면 구무소 물과 합류하는 지점이 나온다. 거꾸로, 이 물을 거슬러 올라가면 내가 다니던 동점국민학교가 나오고, 더 거슬러 올라가면 철암이 나온다. 그러니까 도가를 지나 신작로를 따라 더 들어가면 국민학교가 나오고, 또 철암이 나오는 것이다.
그러나 그 쪽 이야기까지 하면 너무 길어지겠지? 아니 이미 너무 길어졌지? 이런 시시한 이야기, 놀랄 만한 사건도 없고, 논란이 될 만한 주장도 없으며, 고개를 끄덕거리게 할 만한 통찰도 없는, 이런 시시한 이야기를 무엇 때문에 하는가? 그나마 기억도 분명하지 않아 뿌옇고 희미하게밖에 말할 수 없는 이런 이야기를 무엇 때문에 하는가? 그러게 말이다. 그러나 나는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이 좋다. 나는 옛날이야기 하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인 모양이다. 옛날이야기 하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 그렇게 많지 않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어머니는 옛날이야기 하는 것을 별로 즐기지 않으신다. 선친도 당신 쪽에서 옛날이야기를 먼저 꺼낸 적은 별로 없었던 것 같다. 다만 할머니는 옛날이야기 하는 것을 즐기셨던 것 같다.
사실은 엊그제가 내 생일이었다. 생일에 즈음하여 옛날 일이 떠올랐던 것이지만, 요즈음 나는 옛날이야기 하는 것이 좋은 일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한다. 50년 전의 마을이건, 30년 전의 마을이건, 그곳이 내가 원래 있었던 곳이거나, 내가 원래 있었던 곳에서 가까운 곳이 아닌가? 장차 내가 머리를 눕힐 곳도 그 쪽이 아닌가? 그래서 그런지, 옛날 일을 생각하거나 옛날이야기를 하면, 그 동안만이라도 사람이 순수해지는 것 같다. 굵어지고 늙어버린 머리 통 속에서 온갖 헛된 욕심이 뱀처럼 또아리를 틀고 이유 없는 시샘과 질투, 악의가 용암처럼 뿜어져 나올 때, 그리하여, 그 비좁은 머리 통 속에 자기혐오와 자기연민까지 끼어들어 갈 때, 이 때 옛날이야기는, 잘 듣는 진통제가 두통을 없애주듯, 잠깐일지언정 머리통을 깨끗하게 비워준다. 우리 가족이 동점을 떠난 것은 1963년 여름, 그러니까 내가 국민학교 2학년이던 때의 여름방학이다. 그 곳에 며칠을 두고 폭설이 내렸다고 한다. 눈에 덮인 마을 풍경은 어떨지...... 지금 풍경과 50여 년 전 풍경이 같지는 않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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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
동점 구문소...
내가 국민학교 5학년 때 소풍 갔던 곳.
영태를 통해 글로 만나네
초등학교 들어가기 전, 어렴풋 기억이 나니 1960년 무렵....우리는 철암에 살았는데 피네골? 혹은 피냇골이라고 불렀던거 같아. 앞에는 내가 흐르고 쇠줄와이어로 엮어 널판지로 만든 출렁다리가 있었어. 거기 일이년 살다가, 내가 학교에 갈 나이쯤 부모님이 황지로 이사를 하면서 나를 할머니할아버지께 보내서 맡겼던거 같다. 철암 개울에 가재가 엄청 많았었지.... 영태가 대처라고 말한 장성, 거긴 도립병원이 있어서 많이 아프거나 다치면 갔었어.
앗, 봉화 황태자와 베트남 거상께서...... 우리는 구무소라고 했지만, 구문소가 맞구나. 철암보다 장성이 큰 게 맞지? 우리가 가까운 곳에서 유년을 보냈구나. ㅎㅎ
그 때 황지를 가려면 기차를 타고 동점 철암을 지나 통리라는 곳에 내려서 버스를 탔다. 강원여객이었나? 영암운수? 판자로 얼기설기 지은 통리역사를 나오면 정면에....로타리다방이던가? 암튼 다방이 있었는데 우리 아부지는 꼭 거길 들려서 다방레지하구 앉아서 커피한잔하면서 내게는 미루꾸를 시켜주셨어. 함석으로 만든 손잡이를 씌운 유리컵에 담긴 따뜻하고 달콤한 미루꾸...
으이구 이 촌놈들 것보리 서말 팔아 서울 올라와서 참 출세들 했다..ㅎㅎㅎ
영진에게 두 형님이 있었구나. 참 조숙하게 처신하셨네. 시시콜콜 옛 추억 더듬어내는게 진통제구나. 나도 해봐야겠다.
문득 주위를 돌아보니 나는 나이가 꽤 많은 사람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