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 영 숙
보라색 감자꽃!
흰색 꽃도 예쁘지만 난 유달리 보라색을 좋아했다. 꽃이 진 자리, 땅을 파헤치면 보라색 감자가 주렁주렁 달려 나왔다. 되돌아보면 참 행복했던 시절이었다. 시골에서 자라며, 소먹이 풀을 뜯으러 들로 산으로 다니던 그 시절, 난 그런 꿈을 꾸었다.
이다음, 이다음에 내가 결혼을 하면 예쁜 딸을 하나 낳고 싶었다. 하얀 드레스를 입고 피아노 앞에 앉아 뽀얀 손으로 건반을 두드리는 딸. 흙 묻은 손이 아닌 물 한 방울 묻히지 않는 도심 속 공주 같은 딸을 키워보고 싶었다.
하지만 꽃봉오리를 활짝 터뜨리기도 전 23살! 나의 꿈은 공중분해 되었다. 교통사고라는 엄청난 재난 앞에 휠체어와 함께 생활하는 장애인이 되고 말았다. 다시 발버둥을 치며 재활에 도전했고, 어설프지만 당당한 직장인이 되었다.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으며 살아가는 멋진 사회인이 되었다. 그리고 또 하나의 꿈을 꾸었다.
직장생활을 하며 남들 다 하는 결혼이라는 걸 해보고 싶었다. 만약 내가 결혼을 한다면, 야외 예식장에서 5월의 신부가 되고 싶었다. 푸른 초록도 좋지만, 우리 토요학교 발달장애인 친구들을 결혼식장에 꼭 초대하고 싶었다. 실내에서는 혹여나 장애가 될 만한 것들이 많을 테니, 야외에서라면 소리쳐도 되고 어디든 뛰어다녀도 좋으리라. 그리고 무엇보다 그들에게 마음껏 골라 먹을 수 있는 맛있는 뷔페 식사를 대접하고 싶었다. 짝꿍 봉사자 선생님들과 부모님, 그리고 사랑하는 우리 직원들과 함께 말이다.
세월은 참 빨리도 흘러 금년도 벌써 7월 중순이 되었다. 나의 세 번째 스무 살 생일이 되었다. 이제 그 야외결혼식의 꿈은 덮어 두려 한다. 작전을 바꾸었다. 요즘 누가 환갑잔치를 하느냐며 다들 타박하지만, 나는 환갑을 핑계로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맛있는 밥 한 끼 대접하고 싶었다. 이제 어떤 명분을 빌려 식사대접 할 수 있는 시간이 그리 많지 않다는 계산이 들었기 때문이다.
매년 6월이면 대구사회복지사협회에서 주관하는 사회복지사 워크숍이 경주에서 크게 열린다. IM대구뱅크의 후원으로 사회복지인들을 위한 상과 약간의 상금도 수여된다. 이제는 하나둘 정리할 때가 되었다는 생각에, 혹시나 하는 마음에 공적조서를 제출해 보았다. 사실 훌륭한 선배들이 많아 안 될 거란 생각을 했다. 그러나 과분하게 대상을 받게 되었다.
나의 월급으로 감당해도 되지만, 기쁜 일에 기쁜 돈으로 밥값을 충당할 수 있으니 두 배의 기쁨이 되었다. 그렇게 상금은 통장을 스치듯 지나갔고 내 품에 머물지 않았다. 하루 동안 우리 식구들의 따뜻한 점심이 되어 사라졌다.
"아무것도 하지 말고 밥이나 한 그릇 먹자"고 당부했건만, 우리 직원들이 준비해 준 깜짝 환갑잔치는 내 마음을 한없이 부자로 만들어 주었다. 4층 발달장애인들로 구성된 오케스트라단이 내방 사무실로 우르르 몰려왔다. 그들이 들려준 생일축하 연주, 미안하고 부끄러움이 밀려왔다. 과연 내가 이들에게 축하를 받아도 되나부터 순간적으로 만감이 교차했다. 얼굴은 웃고 있었지만, 가슴속 저 밑바닥에서 밀려오는 감동은 눈물을 꿀꺽 삼켜야 했다. 그렇게 나의 생일축하 노래가 첫 출발을 알렸다. 1층 베이커리 식구들이 직접 만든 2단 장미꽃 케이크, 커다란 봉지의 새우깡 과자와 초코파이를 품에 안겨주는 또 다른 우리 장애인 가족들의 사랑은 아름다웠다. 무엇보다 우리 직원들의 센스가 돋보였다. 식사 장소에 커다랗게 걸려있는 현수막 문구가 너무 예뻤다. “국장님의 세 번째 20살, 나이가 뭐 중요 환갑?”
돌아보면 참 많은 것이 달라졌다. 처음 장애를 마주했을 때. 난 딱 예순 살까지만 살고 싶었다. 그 나이가 넘으면 내 힘으로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것 같았고, 나 때문에 누군가에게 피해를 주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생명은 물론이거니와 지금까지 직장 생활을 하고 있다. 월급을 받고 있다. 그것도 시설장이 되어 최고의 급여를 받으면서 말이다.
어느 한 무명인의 기도가 생각난다.
"나는 즐길 수 있는 모든것을 내게 달라고 하나님께 간구했으나, 생명을 주시어 모든것을 누릴 수 있게 하셨다. 내가 달라는 것은 하나도 주시지 않았지만, 생명을 주시어 이 모든것을 누리게 하셨다.”
참 착한 우리 직원들을 만나 함께 일할 수 있도록 도와 주었고, 사랑하는 많은 이들을 통해 나의 부족한 부분들을 채워주셨다. "한 달에 오만 원만 벌게 해달라"고 눈물 쏟으며 했던 기도는 백 배의 열매를 이루게 하셨다. 앞으로 남은 삶이 또 어떻게 펼쳐질지 궁금하다. 하얀 드레스를 달라고 기도했더니, 내 곁에는 하얀 날개를 단 천사들이 수도 없이 머물고 있다.
황순원 작가의 「소나기」에서 주인공 소녀는 도라지꽃 중에 보랏빛이 좋다고 했다. 소녀는 사라졌지만, 소년의 마음속에 진한 사랑으로 남았다. 보라색 감자꽃은 지고 없지만, 단단한 감자가 숨어 있었다. 돌아보니 꽃이 진 자리마다 더 큰 열매를 숨겨 두셨다. 이제 나는 안다. 꽃이 지는 것이 끝이 아니라는 것을. 그래서 오늘도 내 삶의 다음 계절을 기다려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