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5:7~9 / 38년 된 병자를 고쳐주신 예수님
(요 5:7) 병자가 대답하되 주여 물이 움직일 때에 나를 못에 넣어 주는 사람이 없어 내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가나이다
(요 5:8) 예수께서 이르시되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하시니
(요 5:9) 그 사람이 곧 나아서 자리를 들고 걸어가니라 이 날은 안식일이니
베데스다는 자비의 집이라는 뜻입니다. 당시 베데스다 못은 병자들에게 진정한 자비를 베풀지 않았습니다. 물이 가끔 움직이는데 가장 먼저 들어가는 자만 나을 수 있었습니다. 치열한 경쟁을 해야 했습니다. 그렇게 볼 때 베데스다 연못은 진정한 자비의 집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진정한 자비를 베푸십니다. 예수님 자비의 못은 항상 움직이고 있습니다.
어디에나 예수님은 계시고 누구나 들어갈 수 있습니다. 우리가 진정한 베데스다 되시는 예수님을 소유하면 병이 나을 뿐 아니라 우리가 변화됩니다. 우리가 진정한 베데스다 예수님의 자비를 소유하고 변화됨으로서 하나님의 진정한 자비를 베푸는 자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아멘
7절 예수님이 38년 된 병자에게 네가 낫고자 하느냐 물으셨을 때 38년 된 병자는 “예, 낫고 싶습니다.”라고 대답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물이 움직일 때 자신을 물에 넣어 줄 사람이 없어 자신이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갑니다.”라고 대답하였습니다. 무엇을 배울 수 있나요?
첫째, 내면은 의존심과 절망이 있었습니다.
먼저 의존심이 있었습니다. 자신을 도와주는 사람이 없어서 자신이 낫지 못한다고 하였습니다. 왜 가까운 사람들이 자신을 도와주지 않느냐고 불평했습니다. 그는 사람들에 대한 의존심으로 사람들에 대한 원망과 불평이 있었습니다. 대체로 사람을 의지하는 사람들은 원망과 불평이 많습니다. 출애굽한 사람들은 모세를 의지하였습니다. 그들은 계속 원망하고 불평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을 때 이런 의존심을 극복할 수 있습니다.
또한 그는 절망했습니다. 그는 자신이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간다고 절망하였습니다. 그는 해보았는데 안 된다고 절망하였습니다. 그는 38년 전에 이곳에 왔고 그동안 해마다 한 번씩 물이 움직였다고 하면 그는 38번을 실패한 것입니다. 실패를 반복하면 실패를 믿는 믿음이 생깁니다. 몸이 그 실패를 기억합니다. 그것을 실패 주의라고 합니다.
그는 오래 반복된 실패로 그의 마음에는 해도 안 된다는 패배주의가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물이 움직여도 그의 몸은 두려움으로 마비되어 움직이지를 못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 안에서 절망은 없습니다. 부활의 주님은 죽은 자도 살리십니다.
둘째, 그는 신앙적으로 예수님에게 관심은 없었지만, 예수님께 기도는 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에 대한 관심이 없고 연못에만 관심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그에게 네가 낫고자 하느냐? 물으신 것은 예수님이 그가 원하면 그를 낫게 해주실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는 연못에 소망을 두는 대신에 예수님께 소망을 두어야 했습니다.
“예수님은 저의 병을 고칠 수 있습니다. 예수님, 저를 고쳐주십시오.”라고 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예수님을 통해서 치료하고자 하지 않았습니다. 아직도 연못을 통해서 낫고자 하였습니다. 사람들이 자신을 도와주지 않으니, 예수님이 도와달라고 한 것 같습니다.
예수님이 그곳에 있다가 자신을 못에 넣어 줄 수 있다면 넣어달라고 한 것 같습니다.
이와 같이 예수님을 이렇게 세상에서 성공시켜 주시는 분으로만 생각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세상의 경쟁에서 이기도록 도와 달라고 기도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세상에서 성공하도록 도와주시는 그런 분이 아닙니다.
우리 자신을 변화시켜 주셔서 스스로 성공하도록 도와주시는 분이십니다.
우리에게 하나님께 소망을 두게 하시고 하나님 나라에 소망을 두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8~9절 예수님은 그 사람이 원하는 것처럼 연못에 기다렸다가 그 사람을 못에 넣어 주지 않았습니다. 또 다른 사람을 시켜서 그를 못에 넣어 주도록 돕지도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그에게 한마디 말씀만 하셨습니다.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예수님은 첫 번째로 네가 낫고자 하느냐 물으시고, 두 번째로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손을 잡지도 않으시고 말씀만으로 38년 된 병자를 도우셨습니다.
38년 된 병자는 예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그가 했던 가장 위대한 일은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것입니다. 말씀을 듣는 순간 예수님의 음성이 하나님의 음성으로 들렸습니다. 신기하게 38년 된 병이 곧바로 나았습니다. 그를 변화시켰습니다. 말씀은 치료의 권능이 있고, 변화의 능력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말씀으로 천지를 창조하신 전능하신 주님의 말씀이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있습니다. 날이 선 양날의 검과 같습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빛이 있으라” 하니 빛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그대로 됩니다.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듣는 자는 살아납니다. 지금 오랜 실패로 패배주의에 사로잡혀 절망하는 자는 죽은 자입니다. 키에로케고르가 말한 것처럼 절망은 죽음에 이르는 병입니다.
절망하는 자는 예수님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부활이요 생명이신 예수님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일어나 걸어가라는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으로 들어야 합니다. 말씀이 우리 마음속에 들어가면 믿음이 생기고 우리는 생명을 얻고 소망이 생기고 살아납니다.
그 사람은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 곧 나아서 일어나 자리를 들고 걸어갔습니다.
그냥 걸어가라고 해도 되는데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고 하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38년 동안 누웠던 자리를 청산하라는 것입니다. 원망의 자리, 절망의 자리, 세상에 소망을 두고 살아가는 자리를 청산하고 걸어가라는 것입니다.
이제는 예수님 안에서 감사의 삶, 소망의 삶, 하나님 나라에 소망을 두는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38년 된 병자에게 진정 주신 것은 무엇일까요? 물론 병을 치료하여 주신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꼭 병만을 치료해 주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38년 된 병자에게 예수님 자신을 주시고자 하십니다. 예수님은 38년 된 병자는 병을 치료하여 주셨고 예수님 자신을 주셨습니다. 그 사람이 병이 나았지만, 인생의 모든 문제가 해결된 것은 아닙니다.
그 사람에게 일어날 앞으로의 많은 문제는 예수님을 통해서 스스로 해결할 수 있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