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에 사무실에 있는 3단 서랍장을 정리했다.
대부분의 서류는 파쇄했고 약간의 문구류, 용품들만 남겼다.
그런데 그 서랍장 안에서 2003년도에 썼던 '큐티노트'가 나왔다.
24년 전에 내가 새벽마다 메모했던 기도와 간구의 내용들이었다.
작은 수첩 안에 빼곡하게 적혀 있는 큐티 내용을 훑어보니 감회가 새로웠다.
오래된 나의 '기도문'이었고 마음에 새겼던 '비망록'이었다.
과거부터 지금까지 36년간 중단 없이 '큐티'를 진행했다.
하나님께 간절하게 기도했다.
아무도 간섭하지 않는 고요한 새벽시간에 묵상으로 하루를 시작했다.
그러면서 내 삶의 좌표를 시시때때로 점검했다.
'큐티'를 계속했다고 해서 성직자 같은 삶을 살았던 건 아니었다.
또한 내 인생이 거룩해진 것도 아니었다.
나는 그냥 평범한 필부에 불과했다.
하지만 끝까지 고수했던 '원칙'은 있었다.
부초처럼 물결치는 대로 이리저리 흔들리지는 않았다.
나는 세상에 '빚진 자'였다.
나의 노력, 나의 땀, 나의 눈물보다 내가 받았던 은혜와 축복이 너무 크고 많았다.
그래서 가능한 한 보답하는 삶을 살고자 했다.
나누는 삶을 살고 싶었다.
아니다.
'살고 싶었다'가 아니라 '살아야 한다'고 기도했다.
그건 당위였고 미션이었다.
수십년 간의 '큐티시간'마다 그렇게 간구했고 그렇게 다짐했다.
또 하나는 내가 소유할 수 있는 '재산'과 '부의 크기'를 미리 정해두고 싶었다.
물론, 살다보니 100% 마음먹은 대로 되는 것은 아니었다.
그래도 어느 정도는 가이드라인을 정해 둔 채 살고 싶었다.
내 영혼 속에 미리 설정해 둔 재물의 울타리, 그 너머의 것들은 내 것이 아니라는 생각으로 살고자 노력했다.
완벽하게 그렇게 산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힘써 노력했던 건 사실이었다.
고이면 필경 썩었다.
쉼 없이 흘러야 청정할 수 있었다.
'공수래 공수거'의 인생에서 우리가 필히 견지해야 할 덕목은 '재산'이나 '명성'이 아니라 '사랑과 감사' 그리고 '헌신과 배려'라고 믿었다.
그건 눈에 보이지 않았다.
측량할 수도 없었다.
그러나 내 영혼 깊숙한 곳에 각인되어 있었다.
그것은 '스피릿'과 '마인드'의 영역이었다.
아직 내 삶에 '죽음'이 임박한 것은 아니지만 '죽음'이 임박했을 때, 진정으로 헛되지 않을 그 무엇을 위해 진솔하게 땀을 쏟고 싶었다.
타인의 이목이나 평가는 중요하지 않았다.
10년 전이나, 30년 전이나, 고교시절에도 나의 기도는 대개 비슷했다.
63세인 지금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내가 소망했던 원칙 중 하나는 가족이었다.
특히 자녀들의 '균형 잡힌 양육'이었다.
그것은 대화였고 소통이었다.
또한 공감이자 추억이었다.
입은 밥을 먹는 '신체기관'이 아니라 '소통과 공감'을 위한 최고의 도구라고 생각했다.
너무 많은 대화 때문에 때때로 불필요한 언쟁이 야기될지라도 소통과 공감을 위한 우리들의 노력과 열정은 조금도 식을 줄을 몰랐다.
가정에선 그것이 최상의 덕목이자 최고의 재능이라고 강조했다.
그래서 '소,공,추'는 우리 가족의 전부였다.
이미 자녀들은 장성했고, 각자 결혼하여 자신들만의 삶을 열정적으로 살고 있다.
이제는 먼 곳에서 소리 없이 청년들의 삶을 위해 기도할 뿐이다.
아직도 가야할 길은 멀었고 할 일도 많다.
한마디로 '임중도원'이다.
어제도, 오늘도 나는 큐티를 지속했다.
내일도 할 것이다.
그러면서 내가 찍어왔던 어지러운 발자국들을 돌아볼 것이다.
신에게 자백하고 때로는 용서를 구하며 새롭게 거듭나기 위해 성심을 다 할 것이다.
집과 사무실을 대대적으로 정리하고 있다.
인생 2막에 대한 사전작업이다.
사무실 3단 서랍장에서 우연찮게 2003년도의 '큐티노트'가 나왔다.
사진을 몇 장 남기고 바로 파쇄했다.
24년 전 새벽시간마다 주로 이런 기도와 서원을 했었구나 싶다.
새로운 감회에 느낌표 몇 줄을 글로 적었다.
오늘도 하루해가 저문다.
수고하신 모든 분들께 격려의 박수를 보낸다.
편안한 저녁시간 보내시길 빈다.
브라보.
살며 사랑하며 배우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