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소설가 카뮈(Albert Camus)는 “가을은 나뭇잎이 온통 꽃으로 변하는 두 번 째 봄이다(Autumn Is A Second Spring When Every Leaf Is A Flower)”라며 가을을 찬양한다. 그런가 하면 시인 김영랑은 [오메 단풍 들것네]라는 시에서 이렇게 노래한다.
오메 단풍 들것네 장광에 골 붉은 감잎 날러오아 누이는 놀란 듯이 치어다보며 오메 단풍 들것네 추석이 내일모레 기둘리니 바람이 잦이어서 걱정이리 누이의 마음아 나를 보아라 오메 단풍 들 것네 이렇게 아름다운 가을단풍이 울어대는 문풍지 같은 소리를 나는 듣는다. 애덤 S. 맥휴가 쓴 [경청, 영혼의 치료제]라는 책은 [듣는다]는 것이 무엇이기에 영혼을 치유하는 힘이 있을까? 라고 물으면서 답한다. 먼저 하나님은 들으시는 분이라고 선포한다. 구원의 역사는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의 신음소리를 들으심으로 시작됐다. [듣는 마음]을 가진 사람은 하나님과 자기 내면의 소리에, 또 다른 이들에게 귀 기울일 줄 아는 사람이다. 이렇게 아름답고 저렇게 화려한 단풍을 보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단풍의 소리를 듣는다는 것은 귀하고 귀하다. 옷감은 겉에서 염료가 더해질 때 물들여진다. 단풍은 잎 속의 색소가 겉으로 드러나면서 물들여진다. 나뭇잎은 엽록소란 색소 때문에 봄과 여름엔 초록색을 띤다. 가을이 되고 기온이 내려가면 엽록소는 분해돼 사라진다. [안토시안]이란 색소가 있는 나뭇잎은 붉게 물들고 [카로틴]이란 색소가 있는 나뭇잎은 노랗게 물든다. 사람도 그렇다. 겉만 그럴듯하게 물들어 있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내면의 좋은 성품이 겉으로 드러나는 사람이 있다. 신앙도 마찬가지. 겉만 신앙의 모습을 가진 사람이 아니라 우리 안에 계신 예수님의 아름다운 성품이 겉으로 드러나 예수님으로 물들어가야 하는 법이다. 똑같은 단풍나무라도 단풍잎의 빛깔은 해마다 달라진다. 일조량과 일교차가 해마다 다르기 때문이다. 일조량이 많고 일교차가 커야 단풍은 더 곱게 물든다. 단풍잎이 햇볕을 많이 받아야 하듯, 우리 신앙의 빛깔도 하나님을 더 많이 바라볼 때 더 아름다워진다. 단풍잎이 아침저녁으로 쌀쌀해야 더 붉게 물들 듯 우리 신앙도 고난과 역경을 잘 견딜 때, 예수님의 보혈처럼 더욱 곱게 물든다. 나는 단풍 나무의 소리를 듣는다.
겨울을 위해 헌 옷을 벗어 던지는 나무들의 마지막 치장, 그것이 단풍이 아닐까? 나뭇잎들은 조금 있으면 낙엽으로 떨어져 다시 흙으로 돌아가야 하기 때문에 헐벗은 나무는 앙상한 가지만으로 추운 겨울을 나야 한다. 그러나 그 마지막 이별은 참 예쁘다.
화려한 단풍으로 마지막을 마무리하며 아름답게 이별하는 나무의 몸체와 잎의 모습이 가을을 쓸쓸하게 하지만 동시에 아름답게 한다. 마지막이기에 더 절실하게 표현되는 아름다운 빛깔의 단풍의 소리가 들린다. 우리는 보통 나체(裸體)하면 사람의 벌거벗은 몸을 연상하지만 원래는 나무를 의미하는 것이다. 한자로 [나](裸 벗을 나)자는 나무에 잎사귀가 낙엽이 되어 다 떨어졌다는 뜻이다. 한자 [적](赤)자도 [벌거벗은]이라는 뜻이 있어, 적나(赤裸)나 적신(赤身)도 같은 의미로 쓰이나 근래에는 사용 빈도가 적지만 한자어 [적나라(赤裸裸)하다]는 것은 [다 벗다]라는 의미로 사용한다. 영어로는 [Naked]와 [누드](Nude)가 있다. 둘 다 나체라는 의미이기는 하나 세부적으로는 차이가 있다. [Naked]는 자연 그대로의 나체를 뜻하고, [Nude]는 예술이라는 옷을 입은 나체를 뜻한다. 하나님이 창조한 피조 세계의 순리를 보면 봄꽃은 남에서부터 물들어 올라가고 가을에는 북에서부터 물들어 내려온다. 단풍이 남쪽으로 내려오는 속도는 초속 30cm라고 한다. 단풍이 드는 속도는 다르게 나타난다. 성목 보다는 묘목이 빠르고, 맨땅 보다는 화분이 빠르게 물들기 시작한다. 원인은 뿌리 온도와 관계된 것이라고 한다. 뿌리가 추위를 느끼면 더 빠른 단풍이 들게 된다. 성목보다 묘목의 흙이 뿌리의 온도변화를 더 빨리 느끼고 맨땅 보다는 화분이 더 민감하기 마련이다. 우리 성도의 삶도 마찬가지다. 믿음의 뿌리가 깊고 말씀의 흙이 많은 성도는 세상에 쉽게 물들지 않고 자신을 지켜나간다. 그러나 그렇지 못한 사람은 세상에 쉽게 동화되어 세속적인 사람으로 변하게 되는 것이다. 바울은 이런 원리를 알기 때문에 에베소 교회를 위하여 기도할 때에 [교인들이 믿음으로 말미암은 사랑의 뿌리가 깊이 내려지기를](엡 3:17) 간절히 원했던 것이다. 나의 신앙의 삶은 얼마나 변색, 세속화되었는가? 겉만 깨끗하게 하는 것을 세속화라면, 속을 깨끗하게 하는 것을 복음화라고 할 수 있다. 형식적인 헌금을 세속화라면, 마음에서 우러나는 의로움과 자비의 예물을 바치는 것을 복음화라고 할 수 있다. 탐욕을 추구하는 것을 세속화라면 사랑을 실천하는 것을 복음화라고 할 수 있다. 기독교인은 세상과 구별되어 살아가야 한다. 세상의 즐거움과 거룩함 두 가지를 동시에 추구할 수 없기에 결국은 하나님이 만드신 세상에서 하나님이 주신 것을 가지고 나를 위해 쓰는가, 아니면 하나님을 위해 쓰는가가 중요한 지표이다. 나의 삶을 누구를 위해 더 많이 사용하고 있는지 살펴보아야 한다. 단풍을 보지만 말고 단풍의 소리를 들어보자. 오메 단풍 들것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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