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점, 2014
<순례>
목적지에 도착할 때가 거의 다 되어서야 심각한 우려가 한 가지 떠올랐다. 나는 당연히 동점역에서 출발해서 동점 마을로 들어갈 계획이었다. 그러나 내가 지금 가고 있는 이 길을 따라가면, 거꾸로 철암역전을 지나 동점 마을로 들어가게 되는 것이 아닐까? 그렇게 되면 좋지 않은데...... 나는 원주까지 간 후 거기에서 영동고속도로를 나와 제천으로 내려왔다. 여기까지는 아무 문제도 없다. 그러나 영주까지 계속 남하하였어야 한다. 그리고 영주에서 동쪽으로 길을 잡고 풍기, 봉화, 태백으로 들어갔어야 한다. 내비게이션은 그렇게 안내하지 않았다. 제천 근방에서 이미 동쪽으로 틀어 영월까지 간 후 거기에서 남하하였다. 그러나 내 우려와는 달리 자동차는 철암역전을 지나지 않았다. 자동차는 태백 중심부를 지나 장성을 거쳐 나를 동점역에 대려다 놓았다. 다행이다. 계획한 대로 할 수 있게 것이다. 이제 동점 마을로 들어가면 되는 것이다. 50여년 전 내가 이곳에 살던 시절에도 우리는 항상 이런 식으로 마을로 들어갔으니까.
이 세계의 어떤 명승지도 나를 설레게 할 수 없다. 오직 이름 없는 이 마을이 나를 설레게 하는구나. 물론 나와 관련된 곳이니 그렇겠지. 그러나 나와 관련된 것임에 틀림없지만, 장차 나에게 일어날 일은 나를 설레게 하지 못한다. 오로지 예전에 나에게 일어났던 일이 나를 설레게 한다. 나는 설레는 마음을 자동차에 싣고 안양 집을 출발하였다. 거리상으로는 300 키로 정도가 될까? 300 키로 정도 공간 이동을 하면, 50 년 정도 시간 이동을 할 수 있을까? 운전을 하는 중, 잠깐 동안이지만, 또 다른 우려가 고개를 쳐들었다. 그 곳을 둘러보는 중에도 설렘이 유지될까? 너무 싱거워지고 너무 덤덤하게 되는 것은 아닐까? 거기 가 보았자 별 것이 없을 테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테니 말이다. 그러나 나는 의심 많은 나를 달랬다. 내가 지금 뭔가 크나큰 것을 기대하는 것은 아니니까. 방학 내내 꼼짝하지 않고 들어앉아 있었잖아. 그래서 바람이나 한번 쐬어보자는 것이잖아. 결론부터 털어놓으면 이렇다. 최소한 너무 싱겁지는 않았다. 울컥하고 울음이 터질 뻔했으니까.
마치 순례 길에 나선 듯 동점역 근처의 마을에 차를 세워 놓고 나는 걸었다. 동점역에서 구문소까지는 의외로 멀었다. 1키로가 다 되는 듯했다. 내 기억 속에서 그 거리는 200미터나 그 이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예외에 속한다. 유일한 예외다. 나머지 모든 것은 의외로 가깝고, 작고, 낮고, 그리고 초라했다. 나는 약간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구문소에 다가갔다. 도로에서 기껏 10미터 정도 아랫 쪽에서 물이 흐르고 있었으며 어떤 곳은 바닥이 보일 정도로 얕았다. 물이 쏟아져 나오던 어두운 동굴은 간데없고, 동굴의 뒷 쪽이 훤하게 보였다. 소(沼)의 폭도 좁아져 있었다. 물론 실지로 좁아진 것이 아니라 내 눈에 그렇게 보이는 것이다. 소의 폭을 좁힌 것은 소 위로 난 교량과 주변의 주차장이다. 교량은 2차선의 튼튼한 다리로 교체되어 있었다. 널찍한 주차장도 조성되어 있었다. 관광버스에서 내린 사람들이 주문소의 전설을 읽어 본 후, 소 주변을 떠나지 못하는 내 곁으로 다가왔다. “너무 실망하실 것은 아니예요. 여름철이 되면 수량이 훨씬 많아지거든요.” 이렇게 말하고 싶었다. “내가 어릴 때만 해도, 이 속에 정말로 용이 살았거든요.”
나는 구문소 다리를 건너서 동점 쪽으로 걸었다. 동점역에서 월남 거상 홍순이 살던 철암으로 연결되는 철로가 나타났고, 역시 미니어추어 작품처럼 왜소하게 보이는 철교가 나타났다. 할머니와 골뱅이를 잡을 때 철교 밑까지 간 적도 있었다. 어째서 저것이 저렇게 작아졌지? 경사가 80도는 되어 보이는 산비탈이 오른 편으로 나타났다. 왼 편도 산이다. 좁은 계곡에 도로가 뚫리고 마을이 형성되었던 것이다. 구문소에서 5분쯤 걷자 내가 살던 마을이 나타났다. 이차선 도로의 오른 쪽으로 작은 연립주택이 한 채 들어서 있었고 왼 쪽으로 민박집 분위기를 풍기는 단독주택이 서 있었다. 가만히 있거라. 이 곳이 그 곳이 맞나? 도가 건물은 남아있을지도 모르는데...... 우리 집은 그 맞은 편에 있었으니까......
<시간>
그 곳이 맞는 것 같았다. 도가 건물이 있어야 할 자리에는 ‘태백시 민속 문화원’이라는 간판을 단 이층 건물이 들어서 있었다. 그리고 우리 집 터에는 교회가 들어서 있었다. 교회 뒤쪽으로 가보니 시내가 흐르고 있었으며 자갈밭이 펼쳐져 있었다. 그래 저 냇물이 그 냇물이야. 냇가의 저 자갈밭이 그 자갈밭이고. 그렇다면 할머니가 돼지를 치던 돼지우리는 이 쯤에 있었을텐데...... 돼지우리 근처인데도 여름철이면 반딧불이 참 많았는데...... 우리 집과 시내 사이의 거리가 너무 짧았다. 나는 멱감고 놀던 바위를 찾아보았다. 녹슨 콘테이너 박스가 방치되어 있는 공터 건너 편에 시커먼 바위가 보였는데, 그것이 그 바위인 것 같기도 하였다.
이곳이 맞기는 맞는 것 같은데, 아무 것도 남아있지 않구나. 나는 혼잣말을 하였다. 국민학교 가까이에 가니 행인이 보였다. “예전에 저 쪽에 도가가 있었는데요. 양조장 말이예요.” 70대로 보이는 노인은, 자기는 이 곳으로 이사온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잘 모른다고 말하였다. 세 번째로 만난 노인은 알고 있었다. “없어진지 10년도 더 됐드래요. 10년이 뭐래요?” “소주를 만들었잖아요?” “그렇지요. 이름이 천천주(穿泉酒)래요.” 나는 이 노인을 붙들고 도가와 마을 이야기를 더 나누고 싶었지만, 이 노인은 애틋한 내 심정을 알아주기에는 너무 바빴는지 종종걸음으로 떠나버렸다. “여기에 오래 사신 것 같은데, 혹시 조씨네 모르시나요? 도가 맞은 편 집이었는데.” 가는 노인을 붙들고 이렇게 물었다면 어떤 대답을 들었을까? “동점국민학교 나오셨나요? 저는 62년도에 입학했는데. 혹시 저 모르시겠어요?”
내가 울컥한 것은, 물론, 모든 것이 작아지고 초라해졌기 때문이 아니다. 내가 울컥한 것은, 아무 것도 남아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무엇이 남아있지 않았다고, 저러고 있는가? 남아있지 않은 것은, 물론, 도가 건물이나 옛 집만이 아니다. 시간 속에 있는 모든 존재는 슬프다. 나는, 조끼 난닝구를 입고 반바지를 차림에 파란 고무신을 신고 상고머리를 나폴거리며 걸었던 길을, 파카를 입고 등산화를 신고 걸어 동점국민학교까지 갔다 왔다.
사실은 내가 이곳을 50여 년 만에 처음으로 찾은 것은 아니다. 교육개발원 연구원이던 30대 초반에 연구 핑계를 대고 동점국민학교에 출장을 온 적이 있었고, 40대 초반 경에 식구들을 태우고 동해안으로 피서 여행을 가는 중에 일부러 이쪽을 경유한 적이 있다. 그러니 이 곳 풍경에 대한 내 기억은 50여 년 전의 것이라기보다 25년 전의 것이나 15년 전의 것이라고 말해야 한다. 그런데도 그 모든 것이 그토록 아련하다니, 내 기억력이라는 것이 얼마나 신통치 못한지 잘 알 수 있다.
그러나 기억력이 좋은가, 나쁜가 하는 것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그곳을 떠난 지 25년 만에, 35년 만에, 그리고 이렇게 50년 만에 내가 그곳을 찾는다는 사실이다. 시간 속에 있는 모든 존재는 슬프다. 시간 속에 있는 모든 존재는 슬프지만, 그래서 또한 아름답기도 하다. 내가 동점을 둘러보고 오겠다고 하자, 어머니는 “가지 않는 게 좋겠는데.”라고 엄중하게 말씀하셨다. 평소에 그런 식으로 말씀하시는 분이 아니다. 어머니는 “원래 이사 떠나온 곳은 찾아가 보는 것이 아니야.”라고 말하기도 하셨다. 내 짐작에, 어머니는 너무 연로하셔서 지나간 것의 아름다움을 느끼기 힘든 것이 아닌가 싶다. 지나간 것, 다시 돌아오지 못할 것이 주는 슬프고 아픈 아름다움이 있다. 10년이나 15년 뒤에 다시 동점을 찾아 그 때에는 내가 무엇을 느낄지 확인해 보아야 하겠다.
첫댓글 나도 몇년 전, 집사람과 동해안에서 돌아오는 길에 일부러 황지, 태백시내엘 들어가 옛 기억을 더듬어 본 적이 있다. 난 꽤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다고 생각했었지만 막상 가보니 도무지.... 가끔 옛모습과 연결되는 것들은 모두가 작고 초라허고 볼품없는....내 기억 속의 모습과가는 전혀 다른 모양을 하고 있었다. 옛 생각만 하면 난 왜이렇게 가슴이 아려오는지...
그러고보니 내가 졸업한 종암국민학교 근처조차 졸업후 한번도 가지 않았네. 별안간 제기동 성당근처에 살던 양호선생님이 생각난다. 나를 귀여워해주고 또래 딸들과 어울렸는데...과부였던 선생님의 애인도 떠오르고...한번 답사해야겠다는 생각이지만 어머니 말씀처럼 찾아가는 게 쓸데없는 일 같다.
제목을 보고 무슨 점수 이야기인 줄 알았다. 두 편의 동점을 읽고 나니 나의 어린 시절이 저절로 그려진다. 순수해지고 깨끗해지는 느낌이다. 민형이가 종암이구나. 지금은 성일중학교인가? 넓은 운동장이 있었고, 자전거를 빌려 탈 수 있었지---아무런 장식도 없고 두 바퀴만 있는 초 간편 자전거--- 영태 고맙고, 쇠북의 종 민형이 고맙습니다.
목사님도 종암이신가? 우리 홍파 아이들도 종암에 많이 놀러갔었어. 운동장도 엄청 넓었고......
사람은 누구나 아스라해지는 기억을 더듬어 문득 그 흔적을 찾아보고 싶어하는데, 멀리도 다녀 왔구먼. 기억속에 머물러 있는 사라짐에 대한 단상이구먼. 마치 신기루를 찾아 나서듯이 홀로 떠나는 로버(Rover)처럼....
옛추억이 마음에 위안이 되네. 두해전 서울 방문때 아버지와 단 둘이서 옛 살던 곳을 하루종일 돌아다니던 기억이 있네. 그 때 적은 노트를 보면 아마 조교수 글과 감흥이 비슷하려나..
재밌을 것 같은데 오랜만에 들어오는 바람에 일단 내용도 모르고 댓글부터 단다 ㅎㅎ~
나는 자네 어머님 말씀이 맞는 것 같아..뭐 그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