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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종은 비 원경왕후 민씨 사이에 4명의 아들을 두었다.
첫째 아들인 양녕대군은 어려서부터 영리해서
총애를 받았다.
태종 4년에 11세의 나이로 왕세자로 책봉되었다.
그런데 이 양녕대군은 왕세자의 예의범절이라든가,
딱딱한 유교적인 교육과 엄격한 궁중생활 등에
잘 적응을 하지 못하였다.
몰래 궁중을 빠져나와 사냥을 하고 자유분방한
풍류생활을 즐겼다.
양녕대군은 태종이 첫 번째 부인인 자신의 어머니를
소외시키고, 또 자신의 든든한 후원자인 외삼촌
민무구 4형제를 죽인 것에 대해 정신적 타격을 많이
받았다.
그래서인지 태종에게 반항하는 행동을 끊임없이
한 것인지도 모를 일이었다.
어릴 때는 총명하여 글을 잘 읽었으나 양녕은 점차
학문을 멀리하고 노는 것에 몰두했다.
궁궐을 돌아다니며 참새를 잡고 동궁 후원으로
아이들을 불러들여 매 부르는 소리를 내며 돌아다녔다.
그리고 자신의 글공부를 위해 태종이 지어준
연당 지붕의 기왓장을 깨버리고
활로 연당 기둥을 맞추는 놀이를 하기도 했다.
하루는 태종이 강원도 평강으로 사냥을 나갈 때
왕세자는 복통을 핑계로 따라가지 않더니
그 길로 성 밖에 나가 밤새 놀다 들어오기도 하였다.
게다가 학문을 멀리하고 동궁 안에 기생을 불러
음주가무를 즐기는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태종은 여러 번 훈계를 하였으나 그때뿐이었다.
태종은 방탕한 생활을 즐기는 양녕을 두고 마음을
달리 결심을 하였다.
그래서 결혼을 시키면 마음을 잡고 공부할 것인가
싶어 양녕의 나이 14세기 되던해 김한로의 딸과
결혼을 시켰다. 그리고 다음해엔 명나라 사신으로
보내기도 했다. 그런데 양녕은 명나라에 가서
배워 온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조선에 돌아온 양녕은 동궁을 빠져나가 산 속을
쏘다니며 사냥에만 여념이 없었다.
그때 중추부사 곽정의 소실인 어리라는 여자가 빼어난
미인이란 소문이 돌았다.
양녕은 그길로 곽정의 소실 어리를 빼내기로
획책하였다.
어리라는 여자는 그 후 왕세자의 아이를 임신하게
되어 대궐로 들어오게 되었다.
왕세자가 어리에게 빠져 학문을 소홀히 하는 것을
못마땅해 한 태종은 그길로
어리라는 여자를 대궐에서 쫓아내버렸다.
사랑하는 여인이 쫓겨나자 양녕대군은 어리가 없으면
왕세자도 장래의 왕도 필요 없다며
더욱 흥청망청거렸다.
태종은 양녕이 마음을 잡아 빨리 세자 노릇을 하길
바랐으나 뜻대로 되지 않았다..
상황이 이 지경까지 이르자 태종은 몹시 심기가
불편하고 자기 뜻대로 되지 않는
양녕을 세자의 자리에 그대로 둘 것인가,
아니면 폐할 것인가 고민하게 되었다.
그리고 셋째 아들인 충녕대군을 왕세자로
책봉할 생각을 하게 되었다.
한편, 둘째 아들인 효령대군은 양녕에 이어 자기가
왕세자가 될 것으로 짐작하고 부지런히 공부에
열중하였다.
효령은 세자가 폐위되면 당연히 지신이 다음
세자가 될 것이라고 판단했던 것이다.
그래서 행동을 주의하며 글 읽는 일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양녕은 이런 효령을 보고 이야기 했다.
"네가 왕세자가 될 준비를 하는가 보구나.
충녕이 됨됨이도 좋고 공부도 잘 하니
그가 임금감이다. 지금까지 글 읽기보다 노는 일에
시간을 많이 보낸 네가
한 나라를 다스리는 임금이 되겠다고?
제발 정신 차리거라!"
양녕에 실망을 한 태종 또한 효령의 행동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그러나 효령은 마음이 약하고 유순하여 굳센 데라고는
없다고 생각하며 탄식하였다.
태종은 효령 또한 나라를 이끌어가지 못할 것이라는
판단을 내렸다.
그리고 어전 회의를 열어 중신들의 의견을 들었다.
"충녕은 어려서부터 성품이 원만하고 학문을
게을리하지 않으며 부지런하여 왕자로서의 덕을
다 갖추었다고 보는데 경들의 의견은 어떠하오?"
태종이 묻자 모든 중신들이 충녕을 칭찬하였다.
이렇게 하여 양녕대군은 1418년에 폐위당하고
태종의 셋째 아들 충녕이 세자가 되었다.
이 소식을 들은 효령은 그 길로 절로 들어가 불교를
연구하였다.
그는 불도에 전념하여 1465년 을
번역했고, 세종, 문종, 단종, 세조,예종, 성종 등
여섯 왕을 거쳐 91세까지 살면서 불교의 발전을 위해
힘썼다.
대궐에서 쫓겨난 양녕은 여전히 천하를 주유하며
주색을 일삼았다.
한 번은 효령이 양녕의 생활을 걱정하며 공양을
드리고자 양녕을 절로 불렀다.
그때도 양녕은 절 주위에서 고기를 구워 먹는 등
그의 태도는 조금도 변함이 없었다.
효령이 질책하자 양녕은
"내 처지가 남부러울 것이 없어 기쁘기 한량없네.
살아서는 왕의 형이고,
죽어서는 부처의 형인데 이야말로 더할 것이 없지
않느냐!"며 호탕하게 웃었다.
양녕대군은 동생인 세종(충녕대군)이 즉위한 후에도
세종과 극히 우애가 깊었다.
대신들로부터 수십 차례 탄핵을 받았지만,
세종의 각별한 배려로 처벌을 받은 적은 없었다.
태종에 대한 원망으로 광기 속에서 살다간
비운의 왕세자 양녕대군.
그는 우리 역사에서 왕세자 자리를 스스로 내던진
유일한 사람이었다.
양녕은 후에 나이가 들어 종친의 일에 관여하면서
한양 근처 경치가 좋은 곳을
주유하다가 67세로 일생을 마쳤다.
-조선왕조야사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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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아는 내용였지만 재밌게 복습했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