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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게시판 스크랩 임진탐매 단신 Ⅲ - 일본 가이라쿠엔 ③ 조성자 도쿠가와 나리아키
눌인 추천 0 조회 119 12.02.28 19:01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임진탐매 단신 Ⅲ - 일본 가이라쿠엔 ③ 조성자 도쿠가와 나리아키

 

 

 

 

 

일본을 대표하는 3대 정원 중 하나인 가이라쿠엔[偕樂園]은 일본 혼슈[本州] 중부의 현(縣)인 이바라키[茨城]현 미토[水戶]시에 있다. 태평양과 접하며 간토 평야[關東平野] 북동부에 있는 이바라키현은 남쪽으로 도네 강[利根川]과 경계를 이루며, 스이고-쓰쿠바[水鄕筑波] 국정공원의 일부를 포함하고 있다. 현내 많은 도시들은 무가시대(武家時代)의 조카마치[城下町]였다. 현청소재지인 미토[水戶]는 도쿠가와 바쿠후[德川幕府] 미토 가[家)의 지배를 받으며 발전했던 곳이었다.

 

도쿠가와 나리아키

 

가이라쿠엔은 미토[水戶]의 도쿠카와가문[?川家] 제9대 번주(藩主)인 도쿠가와 나리아키[?川?昭;1800~1860]가 직접 구상하여 창설한 정원으로, 1842년 7월에 개원하였다. 가이라쿠엔[偕樂園]이라는 명칭은 맹자(孟子)의 ‘古之人與民偕樂 故能樂也[古の人は民と偕に?しむ、故に能く?しむなり)’라는 구절에서 따온 것이라고 한다. 즉 옛 사람은 백성과 더불어 즐겼기 때문에 진정으로 즐길 수 있었다는 뜻으로 다함께 감상하는 정원이라는 뜻이다.

 

도쿠가와 나리아키의 조상은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とよとみひでよし]에 이어 천하 통일을 이룩하고, 에도[江?], 즉 지금의 동경에 막부(幕府)를 세워 막부 체제의 기초를 다진 도꾸가와 이에야스[?川家康;1542~1616]이다. 도꾸가와 초대 쇼군[?軍]이기도 한 이에야스의 11번째 아들인 도쿠가와 요리후사[德川賴房;1603~1661]는 1609년 미토번[水戶藩]의 초대 번주(初代藩主)가 된 사람이다. 그는 1626년 도쿄도 분쿄구에 거대한 정원을 만들기로 하고 공사에 착수하였는데, 이 정원은 다음 대(代)인 도쿠가와 미쓰쿠니[德川光國;1628. 7. 11 ~1701. 1. 14] 때 완성한다. 이 천수정원을 '코이시카와 고라쿠엔'[小石川後?園]이라 부르는데, 일본 3대 정원 중의 하나인 오카야마[岡山]의 고라쿠엔과 구별하기 위해 앞에 코이시카와[小石川]라는 이름을 붙인 것이다. 동경에서 가장 오래된 「카이유시키[回遊式] 정원」이기도 하다.

 

 

도쿠가와 나리아키는 1800년 3월 11일 제7대 미토 번주 토쿠가와 하루토시[?川 治紀;1773~1816]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후지다 도코[藤田東湖], 아이자와 세이시사이[會澤正志齋] 등이 제창한 미토가쿠[水戶學]를 배웠다. 주자학을 배경으로 존왕양이(尊王攘夷)는 왕실을 높이고 오랑캐를 물리친다는 내용의 학문이다. 1829년 맏형인 도쿠가와 나리노부[?川 ?脩]의 뒤를 이어 제9대 번주가 된 그는 시호가 열공(烈公)이듯이 거침없는 성격으로 난세를 헤쳐 가며 살다간 인물이었다.

 

오이토리가리행렬도(부분) 이바라키현립역사관 소장

 

나리아키는 취임 즉시 영지 내의 정치개혁, 검소함의 철저화, 군정개혁과 오이토리가리(군사연습) 실시, 영지 내 측량조사, 고도칸과 가이라쿠엔 조성 등 다양한 정책을 추진하였다. 여색을 밝혀 아들인 도쿠가와 요시노부의 쇼군 계승에도 어려움을 주었다고 한다. 나리아키는 37명의 자녀를 두었지만 대부분이 다른 집안의 양자가 되거나 다른 가문으로 시집보냈다. 미토학파의 영향을 받아 개국에는 반대했지만, 서양 문물에는 흥미를 보였다고 한다. 인재가 부족했던 막부 말 토쿠가와가에서 카리스마와 행동력을 겸비한 유일한 인물이었다. 1844년 정치 개혁이 지나쳤다는 이유로 에도막부로부터 근신처분을 받았지만, 1858년 페리가 거느리는 미군함대가 일본에 오자 해군참모로 막부정치에 참여하게 되었다. 그 후 쇼군 후계자 문제와 미국과의 수호통상조약 체결 문제를 두고 다시 처분을 받기도 하였는데, 1860년 가택연금 중이었던 미토성 내에서 심근경색으로 사망했다. 향년 61세. 그의 죽음은 막부의 큰 타격이었고, 죽은 후 미토 번에는 내분이 일어나고 그가 발굴해낸 인재 모두도 자멸하게 된다.

 

생전 아들인 도쿠가와 요시노부[?川慶喜; 1837년 10월 28일 - 1913년 11월 22일]를 막부 제13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사다[德川家定]의 후계자를 만들기 위해 노력했으나, 다이로인 이이 나오스케[井伊直弼]가 일으킨 안세이 대옥에 연루되어 이루지 못하였다. 그러나 사후인 1867년 도쿠가와 요시노부는 도쿠가와 막부의 마지막 쇼군(제15대 재임 1867년 ~ 1868년)이 되었다. 그렇지만 반막부세력(反幕府勢力)과의 대립 끝에 패배하였음을 깨닫고, 통치권을 일본 천황에게 반환하는 대정봉환(大政奉還)을 통해 300여 년 내려오던 막부의 막을 스스로 내린다. 이로써 일본은 왕정복고가 이루어져 부국강병의 기치하에 근대화를 추진하는 메이지 유신이 이루어져 새 시대를 맞게 된다.

나리아키의 아들이자 도쿠가와 막부의 마지막 쇼군 도쿠가와 요시노부[?川慶喜]

    

 

도키와진자[常磐神社]

도키와진자[常磐神社]  

도키와진자[常磐神社]

 

도키와진자[常磐神社]

 

나리아키는 카이라쿠엔 입구 도키와진자[常磐神社] 경내 의열관(義烈館,ぎれつかん)에 모셔있다. 의열관은 그의 선조인 의공(義公), 즉 도쿠가와 미쓰쿠니[德川光國]와 열공(烈公), 즉 나리아키[齊昭]에 관한 자료-遺品?遺墨을 전시하고있으며, 水戶藩에 관한 역사자료가 전시되어 있다.

 

 

도쿠가와 미쓰쿠니[德川光國]는 앞에서 언급하였듯이 도쿠가와 바쿠후[德川幕府]의 첫번째 쇼군[將軍]인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의 손자였으며, 미토번[水戶藩]의 초대번주(初代藩主) 도쿠가와 요리후사[德川賴房]에 이어 번주가 된 사람이다. 미토 코몬(水戶黃門)이라는 별칭으로 불리기도 하며 도쿄 방송에서 방영한 '파나소닉 드라마 시어터'에 속하는 TV 시대극 『미토 코몬』은 미쓰쿠니를 모델로 한 것이다.

 

도쿄도 분쿄구에‘코이시카와 고라쿠엔[小石川後?園]’이라 부르는 거대한 정원을 완성한 인물이기도 하다. 『의공행실(義公行?)』등 각종 전기사료에 의하면 미토 도쿠가와 가문의 세자(世子)로서 교육을 받은 청년시대의 미쓰쿠니는 비행도 많이 저질렀지만, 쇼호[正保] 2년(1645년)에 『사기』「백이(伯夷)전」을 읽고 백이?숙제의 고사에 감명을 받아 자신의 비행을 반성하고 학문에 정진하여 사서 편찬에 뜻을 두었다고 한다. 세자 시대인 메이와[明和] 3년[1656년)에는 메이레키 대화재[明?の大火]로 고이시카와[小石川] 번저(藩邸)가 소실되어 고마고메[駒?]의 별저(別邸)로 옮겨, 여기에 사국(史局)을 설치하고 편찬사업을 개시하였다. 처음에 미토 번 부지(도쿄대학 농학부 부지)의 다옥[茶屋)을 이용하였고, 후에 코이시카와 고라쿠엔[小石川後?園] 안에 역사편찬국[修史局)인 쇼코칸[彰考館]으로 옮겼다. 이곳에서 미쓰쿠니는 중국의 왕조사를 모범으로 삼아 일본 역사를 포괄적으로 기술한 『다이니혼시[大日本史]』의 편찬을 시작하였고, 사후에도 미토 번[水?藩)의 사업으로 계속되어 메이지 시대에 완성되었다.

 

도키와진자[常磐神社] 경내 의열관(義烈館,ぎれつかん)

 

그의 편찬 사업은 일본에서 유학(儒學)이 뿌리를 내리고, 일본의 민족정신과 천황에 대한 충성심을 다시 일깨우는 데 이바지했다. 『다이니혼시[大日本史]』의 체제는 12세기 중국의 주희(朱熹)가 한 역사연구와 비슷하다. 주희처럼 자신의 연구가 과거의 인물들을 평가하고 당대의 사람들에게 '덕'(德)을 가르침으로써 도덕적·교훈적인 것이 되기를 희망했는데, 다행히 훌륭한 학자들의 많은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다. 특히 중국 명(明)의 유신(遺臣)인 주순수(朱舜水)의 도움은 이 책의 편찬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일본 황실의 역사와 천황의 권력이 바쿠후로 넘어가게 된 과정들을 밝혀냄으로써 그는 천황에 대한 충성심을 일깨웠다. 그결과 그의 영지인 미토 한은 존왕운동(尊王運動)의 중심지가 되었으며 이 운동은 바쿠후를 무너뜨리고 왕정복고를 이룩한 1868년 메이지 유신[明治維新]으로 귀결되었다.

 

도키와진자[常磐神社] 내 의열관(義烈館)앞에는 의공(義公), 즉 도쿠가와 미쓰쿠니[德川光國]가 심은 매화가 있다. <浪華の梅>이다.

 

 

浪華の梅

 

그 앞에는 <浪華の梅> 라는 제목의 시비가 있는데, 도쿠가와 나리아키[德川齊昭]간 시를 도쿠가와 막부의 마지막 쇼군 도쿠가와 요시노부德川慶喜가 글을 쓴 것이다. 만요가나(万葉?名), 즉 가나의 일종으로, 주로 고대 일본어를 표기하기 위해서 한자의 음을 빌려 쓴 문자로 지은 가사이라 그 정확한 뜻은 모르겠다. 원문은 다음과 같다.

 

 

「家乃風伊万母?理乃都伎奴爾存   不美古能武起乃佐可梨知良流?

( いえのかぜ いまもかおりのつきぬにぞ ふみこのむきのさかりしらるる )」이를 다시 쓰면

「家の風いまも?りのつきぬにぞ 文このむ木のさかりしらるる가 된다.

 

 

 

 

 

 

도쿠가와 미쓰쿠니[德川光國]를 기리는 <의공찬앙비(義公讚仰碑)>

도쿠가와 미쓰쿠니[德川光國]를 기리는 <의공찬앙비(義公讚仰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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