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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대릉원
소재지 : 경북 경주시 황남동 31-1 번지
경주 대릉원은 경주시 노동동과 황남동에 있는 신라 시대의 고분군을 말하며 노동동 고분군, 노서리 고분군, 황남동 고분군, 황오동 고분군, 인왕동 고분군으로 구성되어 있다. 노동동 고분군은 고신라 시대 무덤들로, 봉황대, 식리총, 금령총 등이 포함되어 있다. 봉황대는 밑둘레 230m, 직경 82m, 높이 22m로 황남대총 다음으로 규모가 큰 무덤으로 덧널을 설치한 돌무지덧널무덤이다. 노서리 고분군은 넓은 평지에 크고 작은 고분 14기가 있다. 노동리의 봉황대 고분과 더불어 규모가 있고 쌍벽을 이루는 제130호 고분을 비롯해 1921년에 금관이 출토된 금관총, 1926년에 일본 방문 길에 스웨덴의 황태자이며 고고학자인 구스타프 6세 아돌프가 들러 발굴을 조사 참관한 서봉총이 있다. 1946년에 고구려 광개토왕의 이름이 새겨진 청동 그릇이 발견됐으며 신라 고분 연대 추정에 도움을 준 호우총과 은평총, 쌍상총, 마총 등도 있다. 쌍상총에서 토기 조각, 마총에서 말뼈와 안장 조각이 출토됐다. 황남동 고분군은 신라초기의 무덤들로 일부가 대릉원 구역 안에 있다. 원형으로 흙을 쌓아 올린 30기의 무덤이다. 큰 무덤은 돌무지덧널무덤이고 주변에는 봉문이 없어진 작은 무덤이 있다. 대릉원 안에는 전 미추왕릉을 비롯하여 천마총과 황남대총 등이 있다. 천마총은 1973년 4월 6일부터 12월 4일까지 발굴조사됐다. 천마총은 지름 47m, 높이 12.7m로 금관을 비롯하여 많은 유물이 나왔다. 당시 천마도가 그려진 말안장 드리개가 출토되었기 때문에 천마총이라 이름 짓고 내부를 공개하고 있다. 황오동 고분군은 크고 작은 신라시대 무덤들이 밀집되어 있다. 오랜 세월 관리가 되지 않아 봉분이 많이 손상되었으나, 고분임을 짐작할 수 있는 것이 10여 기에 이른다. 이 무덤들은 인접 지역에서 발굴된 무덤 구조로 미루어 볼 때 주로 4~5세기경의 왕족 또는 귀족을 묻은 돌무지 덧널무덤으로 추정한다. 인왕동 고분군은 경주 중심부 평야지대에 남아 있는 고분군 중 가장 동편에 위치하고 있다. 일제 강점기 때 13기의 봉토분이 확인되었고 새로 10기의 고분이 더 분포하고 있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고분 중 일부를 발굴조사 했는데, 삼한과 삼국시대의 무덤 양식이 확인됐다. 이른 시기부터 무덤이 축조되기 시작했음을 알 수 있다. 봉토가 남아 있는 삼국시대 고분들은 대부분 돌무지덧널무덤으로 출토유물이나 유구의 크기 등으로 보아 신라 귀족들의 무덤으로 추정된다.
◎ 한류의 매력을 만나는 여행 정보 - 드라마 <20세기 소녀>
<20세기 소녀>에서 보라가 수학여행 자유시간을 보낸 곳으로 고분들이 밀집된 공원이다. 약 20여 기의 큰 고분들이 마치 능선을 그리는 것처럼 몽환적인 분위기를 형성한다. 고분 사이에 목련 나무 한 그루가 서 있는 곳이 포토존으로 유명하다. 유일하게 내부를 공개하는 천마총도 함께 둘러보는 것을 추천한다.
경주 역사유적지구
최근 수정 시각: 2025-09-25 17:45:41
목차
1. 개요
2. 목록
2.1. 남산지구(Mt. Namsan Belt)
2.2. 월성지구(Wolsong Belt)
2.3. 대릉원지구(Tumuli Park Belt)
2.4. 황룡사지구(Hwangnyongsa Belt)
2.5. 산성지구(Sansong (Fortress) Belt)
3. 세계유산 등재 기준
1. 개요
경주역사유적지구는 신라의 1000년 고도인 경상북도 경주의 유적 밀집 지구이다. 2000년 11월 29일 호주 케언즈에서 개최된 제 24차 세계유산위원회(World Heritage Committee)에서 고인돌과 함께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총 5개의 지구로 나눠져 있는데 불교 미술의 보고이자 포석정이 있는 남산 지구, 신라의 궁궐터인 월성 지구, 신라의 고분들이 밀집되어 있는 대릉원 지구, 신라 사찰의 정수인 황룡사 지구, 수도 방어 시설의 핵심인 산성 지구로 구분되며 총 52개의 문화유산을 포함하고 있다.
1995년에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된 불국사와 석굴암, 2010년에 따로 지정된 양동마을은 경주에 있지만 경주역사유적지구에는 포함되지 않는다.
2. 목록
※ 순서와 영문 명칭은 유네스코 공식 홈페이지와 국가유산청 국가유산포털을 참고했다.
2.1. 남산지구(Mt. Namsan Belt)
경주시 남쪽에 있는 남산과 그 주변 지구이다. 경주 남산에는 신라의 건국 설화에 등장하는 경주 나정부터 신라 멸망 시기의 이야기를 담고 있는 경주 포석정지 등이 있으며 또한 산을 따라 수많은 탑과 불상이 분포하고 있다.
경주 남산 일원
경주 남산 미륵곡 석조여래좌상
경주 남산 용장사곡 삼층석탑
경주 남산 용장사곡 석조여래좌상
경주 남산 용장사지 마애여래좌상
경주 남산 천룡사지 삼층석탑
경주 남간사지 당간지주
남간사지석정
경주 남산동 동·서 삼층석탑
경주 배동 석조여래삼존입상
경주 남산 불곡 마애여래좌상
경주 남산 신선암 마애보살반가상
경주 남산 칠불암 마애석불
경주 남산 탑곡 마애조상군
경주 남산 삼릉계 석조여래좌상
삼릉계곡마애관음보살상
삼릉계곡선각육존불
경주남산입곡석불두
경주침식곡석불좌상
경주열암곡석불좌상
경주약수계곡마애입불상
삼릉계곡마애석가여래좌상
삼릉계곡선각여래좌상
경주배리윤을곡마애불좌상
경주 배동 삼릉
경주 일성왕릉
경주 정강왕릉
경주 지마왕릉
경주 경애왕릉
경주 포석정지
경주 남산신성
경주 서출지
경주 나정
경주남산동석조감실
백운대마애불입상
보리사마애석불
2.2. 월성지구(Wolsong Belt)
신라의 왕궁이었던 경주 월성과 그 주변 지역이다. 신라 김씨 왕가의 시조인 김알지가 태어난 경주 계림, 동양 최고(最古)의 천문 시설인 경주 첨성대 등이 분포하고 있다. 유적 외에도 인근에 국립경주박물관이 소재하고 있다.
경주 계림
경주 월성
경주 내물왕릉
경주 동궁과 월지
경주 첨성대
2.3. 대릉원지구(Tumuli Park Belt)
경주시 중심부에 있는 대릉원과 그 주변 지역이다. 신라의 왕과 귀족 같은 고위 계층들의 무덤들이 대규모로 위치하고 있으며 구획 구분에 따라 경주황남리고분군, 경주노동리고분군, 경주노서리고분군으로 나눌 수 있다. 발굴을 통해 신라 문화의 정수를 보여주는 금관, 천마도, 유리잔, 토기 등이 출토되었다.
경주 대릉원 일원
경주 미추왕릉
경주황남리고분군
천마총
황남대총
계림로 고분군
경주노동리고분군
봉황대
금령총
식리총
경주노서리고분군
금관총
서봉총
호우총
경주 오릉
경주 동부 사적지대
경주 재매정
2.4. 황룡사지구(Hwangnyongsa Belt)
경주시 동쪽에 있는 경주 황룡사지와 그 주변 지역이다. 경주 황룡사지와 분황사가 분포하고 있다. 현재는 터만 남았거나 그 규모가 많이 축소되었지만 발굴을 통해 웅장했던 대형 사찰의 흔적이 확인되었으며 약 40,000여 점의 유물이 출토되었다.
경주 황룡사지
경주 분황사 모전석탑
2.5. 산성지구(Sansong (Fortress) Belt)
경주시 동쪽 보문관광단지 인근에 소재하고 있는 경주 명활성 일대다. 왕경 방어 시설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다.
경주 명활성
3. 세계유산 등재 기준
기준 (ⅱ) : 경주역사유적지구에는 불교건축 및 생활 문화와 관련된 뛰어난 기념물과 유적지가 다수 분포해 있다.
기준 (ⅲ) : 신라 왕실의 역사는 1,000년에 이르며, 남산을 비롯해 수도 경주와 그 인근 지역에서 발견된 유물과 유적은 신라 문화의 탁월함을 보여 준다.
대릉원
위치 : 경상북도 경주시 황남동 53
천마의 영혼을 담는 언덕
40㏊의 넓이에 아담하게 솟아오른 23기의 봉분들은 푸른 잔디로 뒤덮여 부드러운 곡선을 그린다. 너무 크지도 작지도 않은 모습이 무덤이라기보다 마을 뒷동산을 찾는 포근함이 있다. 천 년 신라의 봉분은 그 모습만으로 또 하나의 작품이다. 황홀한 조명이 신비로움을 주는 야간의 모습도 아름답지만 소나무 숲길과 어우러져 너른 터를 산책 삼아 거닐며 아침에 찾아보는 대릉원은 더욱 상쾌하다.
두 겹의 능선이 마치 낙타의 등처럼 보이는 가장 대규모인 황남대총과 《삼국사기》에 ‘대릉원’이란 이름으로 기록된 미추왕릉의 모습도 둘러보기에 좋지만 무엇보다 이곳의 백미는 유일하게 내부를 공개하는 천마총에 있다. 황남대총을 연구하기 위한 발굴에서 엄청난 양의 유물이 쏟아져 나와 세상을 놀라게 만들었다.
신라 고유의 봉분 축조방식인 적석목곽분의 완전한 형태를 보여주며, 지금까지 발견된 신라의 금관 중 최고의 작품으로 평가받는 출(出)자형 금관과 더불어 허리장식과 금반지 등 황금 유물들이 그 모습을 드러내었다. 천마도는 말에 올라탈 때 종아리를 보호하는 가리개로 자작나무 껍질에 백마를 새겨 놓았는데 구름 위를 날아가는 상상 속 말의 모습이 현대적인 아름다움을 느끼게 하며 무르익은 완숙미를 보여주는 고대 미술의 백미이다.
입장요금
어른/개인 3,000원, 어른/단체 2,400원
어린이/개인 1,000원, 어린이/단체 800원
군인.청소년/ 개인 2,000원, 군인.청소년/ 단체 1,600원
황남빵, 경주의 달콤함을 맛보다
일명 경주빵으로도 불리는 황남빵. 3대에 걸쳐 60여 년 동안 오로지 황남빵만을 만들어온 곳이 대릉원 인근에 있다. 얇은 겉옷을 입힌 달콤한 팥소가 자꾸 손이 가게 만든다. 즉석에서 만들어진 갓 구운 빵을 한입에 넣어보자.
문의 054-749-7000
대릉원
소재지 : 경상북도 경주시 노동동 261 등
분류 : 유적건조물/무덤/고분군
면적 : 602,314㎡
지정연도 : 2011년 7월 28일
건축시기 : 신라
유네스코 세계유산 경주역사유적지구(지정번호 : 976, 등재연도 : 1995년)
목차
1. 개요
2. 역사
3. 고분군
3.1. 황남동 고분군
3.2. 계림로 고분군
3.3. 노동동 고분군
3.4. 노서동 고분군
3.5. 황오동 고분군
3.6. 인왕동 고분군
4. 입장료
5. 매체
6. 기타
1. 개요
경상북도 경주시 계림로 9 (황남동)에 위치한 옛 신라의 왕, 왕비, 왕족, 귀족층의 것으로 추정되는 대형 고분 밀집 지역. 2011년 7월 28일 대한민국의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약 150여 개의 무덤이 있다고 한다.
삼국사기에 기록된 '미추 이사금을 대릉(大陵)에 장사 지냈다.'라는 글귀에서 따 와 대릉원(大陵苑)이라고 지었다. 대릉원이라고 하면 좁게는 천마총과 황남대총 등이 있는 황남동 고분군 쪽을, 넓게는 바깥쪽의 금관총이나 봉황대와 같은 노서동, 노동동 고분군 등을 포함한다. 일단 규모가 큼지막한 데다가 경주시 시가지에 있어 접근하기 좋고, 천마총처럼 신라 왕릉 내부를 관람할 수 있는 고분도 있어 경주를 찾는 관광객들은 거의 필수로 찾는 곳이다.
경주역사유적지구의 5개 지구 중 대릉원 지구가 있다. 단, 여기에는 오릉처럼 대릉원에서 약간 거리가 있는 주변 지역이 좀 더 포함되었다.
원래는 지금의 담장 둘러쳐진 구역의 대릉원은 황남리 고분군(40호)으로 지정되어 있었으나 2011년 7월 28일에 문화재청에서 역사성과 특성을 고려하여 노서리 고분군(사적 39호), 황오리 고분군(사적 41호), 인왕리 고분군(사적 42호)을 통합하여 경주 대릉원 일원으로 사적 제512호로 재지정하였다.
넓은 의미의 대릉원 일원에서 현재까지 6개의 황금관이 발견(출토)되었다. 아직 미발굴 고분에서 금관이 추가로 발견될 가능성 또한 매우 높다.
2. 역사
경주 분지 한가운데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데, 신라 당시에도 수도 서라벌 시가지 가운데에 있는 국가 묘역공원 같은 모습이었으리라 추정한다. 대릉원과 바로 옆에 붙은 쪽샘지구에서 발굴 조사해 보니, 신라 당시의 도시 기반 시설과 건물 터가 대릉원 주변 지역에는 빼곡하게 차 있음에도 대릉원 일대에선 거의 확인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즉 시가지로 가득찬 대도시 가운데지만 대릉원부터는 건물을 못 짓게 개발제한구역으로 관리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신라 멸망 이후 오랜 세월이 지나 관리가 부족해지자 조선 시대~일제강점기에는 대릉원 무덤과 무덤 사이까지 사람들의 주거지가 생겼지만 현대에 들어 정비해서 지금과 같은 모습이 되었다.
대릉원의 무덤들은 문자로 표기된 기록이나 비석류가 일절 출토되지 않았기 때문에 구체적인 편년을 알기는 힘들다. 대릉원의 무덤들은 무덤의 주인의 이름을 알 수 있는 지석도 출토되지 않아서 무덤 주인의 이름이 밝혀진 무덤은 이사지왕이라는 명문이 발견된 금관총이 유일하다. 하지만 돌무지덧널무덤의 구조 때문에 도굴이 어려워서 많은 유물들이 별 손실 없이 온전하게 남을 수 있었다. 이 유물들을 측정하여 대략 4-6세기에 걸쳐 조성했다고 추정한다. 6세기 이후에는 왕릉이나 기타 무덤들을 대릉원처럼 서라벌의 중심부가 아닌 산이나 도시 외곽 쪽에 만들었기 때문에, 대릉원은 아무리 늦어도 7세기 초반 이후로는 더 확장되지 않았던 듯하다.
황남대총 등의 왕릉에서 로만글라스, 사산글라스 등의 유리 유물이 발굴되었다. 링크, 기사. 그러한 로만글라스, 사산글라스들의 주요 생산지, 대량 출토지를 따지면 신라가 중동과 교역이 있었다는 증거가 된다.
3. 고분군
가장 좌측 위의 구역이 노동리, 노서리 고분군, 가장 가운데가 지금의 대릉원(황남리 고분군), 대릉원의 동쪽이 황오동 고분군과 쪽샘지구, 가장 아래 쪽의 구역이 인왕동 고분군이다. 노서리 130호가 서봉황대, 노동리 125호가 봉황대라고 불리는 왕릉이며, 가장 가운데의 황남동 98호가 바로 황남대총이다. 그 아래의 106호는 전 미추왕릉이고 지도 가장 아래의 119호가 삼국유사의 기록에 근거하여 내물왕의 무덤으로 거론되는 인왕동 119호이다.
대릉원 일원은 월성로 고분군(또는 구역)부터 만들기 시작했는데, 이미 다른 무덤들에 비해서 출토되는 부장품의 위계가 높아서 왕 내지는 왕족, 귀족들의 무덤군으로 형성되었다고 추정된다. 월성로 구역 및 황오동 일대에서 비교적 먼저 대형 무덤들이 만들어지다가 5세기 중엽부터 봉분의 규모가 독보적이라 왕이 묻혔음이 명백한 황남대총 또는 인왕동 119호분, 전 미추왕릉이 축조되었고, 가장 마지막으로 5세기 후엽-6세기 무렵 노서리, 노동리 고분군이 있는 쪽으로 전개되었다고 추측한다.
노서리, 노동리의 봉황대 고분과 서봉황대 고분을 끝으로 경주 분지 외곽의 서악동 고분군으로 임금들이 묻히는 곳이 이동했다.
3.1. 황남동 고분군
미추왕릉
천마총
황남대총
90호분 - 황남대총 인근에 소재한 연접분. 인교동 119호분에 버금갈 정도의 규모를 자랑하는 초대형분이다. 이종선은 실성 마립간의 왕릉으로 비정했으나 다수설은 아니다.
검총 - 100호분. 미추왕릉 지구에 소재한 고분으로, 신라 대릉원 일대의 고분 중 최초로 학술적 조사가 실시되었다. 무덤에서 철검이 출토되어서 검총이라고 명명되었으며, 그 외에도 쇠투겁창, 숫돌, 굽다리긴목항아리 등이 출토되었고 후세에 따로 묻은 것으로 추정되는 토기 몇 점도 출토되었다. 고분 자체는 지름 44.5m, 높이 9.7m 정도로 결코 작은 규모가 아니고, 적석목곽묘로 조성되어 도굴도 매우 힘들었을 텐데 그에 비해 출토 유물이 매우 빈약한 것이 특징이다.
그런데 검총에서 나온 철검은 적석목곽묘보다 이른 토광묘 시기에서나 출토되던 유물로, 기존 신라 적석목곽묘에서 출토된 전례가 전혀 없다. 이 경우 출토 유물의 연대가 오히려 무덤보다 빠르다는 실로 기괴한 결과가 나온다. 그래서 검총을 마립간기 왕들의 선조들 중 하나의 무덤으로 보는 설도 존재한다. 후대 마립간기에 들어 가계 신성화 사업의 일환으로 적석목곽묘가 아니었던 선조들의 무덤을 적석목곽묘 스타일로 개축했다는 것이다. 마침 눌지 마립간 19년에 선대의 능침을 수리했다는 기사가 있으니 개연성도 충분하다.
3.2. 계림로 고분군
지금의 대릉원의 담장 동쪽에 계림로 공사를 하면서 조사된 구역이다. 계림로 고분군이 정식 명칭은 아니지만 이 계림로 공사 구간 발굴 조사에서 확인된 고분들을 계림로 00호라고 지칭한다. 특히 계림로 14호분에서는 유명한 경주 계림로 보검이 출토되었다. 대릉원 담벼락의 길을 거닐다 보면 계림로 14호분이 있던 자리에 작은 안내판이 자리잡아서 황금 보검에 대한 이야기를 전한다.
3.3. 노동동 고분군
봉황대
금령총
식리총 - 노동동 126호분으로, 금동 신발이 출토되어 식리총이라 명명되었다. 고분의 규모와 금동, 은제 위주의 출토품들로 보아선 고위 귀족의 무덤으로 짐작되며, 고리자루큰칼이 출토되어 남성의 무덤으로 추정된다.
3.4. 노서동 고분군
서봉황대 - 노서동 130호분으로, 노서동 고분군 내에서 제일 큰 무덤이자 봉황대 다음 가는 규모의 초대형분이다. 아직 발굴조사는 진행되지 않았지만 대체로 왕릉으로 보는 데 이견이 없다. 무덤의 주인은 소지 마립간 등이 거론된다.
금관총
서봉총
호우총
노서동 134호분 - 서봉황대 근처에 위치한 고분으로, 황남대총, 서봉총, 90호분처럼 두개의 고분이 합쳐진 연접분이다. 대릉원 내에서도 대형고분으로 손꼽히는 119호분, 90호분과 비교해 보아도 딱히 꿇리지 않는 규모의 초대형분이며, 대릉원 왕릉급 고분의 형성 순서로 보아 왕릉 혹은 그에 버금가는 유력자가 묻힌 무덤으로 지목된다. 묘주는 지증왕 정도가 거론되는 편.
은령총 - 노서동 139호분으로, 이 무덤에서 나온 순금 금귀걸이의 은구슬 장식에서 따와 은령총이라고 명명되었다. 호우총과 매우 연접해 소재하고 있어서 연대와 양식은 호우총과 대략 비슷한 것으로 추정된다. 일각에서는 호우총과 연접분이었다고 추정하지만 두 무덤 다 발굴할 당시부터 봉분이 크게 훼손되어 있어서 정확히 알 수는 없다. 가락바퀴가 출토되는 부장품의 내용으로 봤을 때 묘주는 귀족 여성으로 추정되며, 호우총의 묘주와 부부관계라는 설도 있다.
쌍상총 - 노서동 137호분으로, 특이하게도 돌무지덧널무덤이 대부분인 대릉원에서도 인근에 있는 마총과 함께 굴식돌방무덤 양식으로 조성된 몇 안되는 무덤이다. 연대는 대략 7세기 중엽 정도로 비정된다. 굴식돌방무덤 특성상 이미 모조리 도굴되어 나온 유물은 별로 없으며, 내부에서 2개의 덧붙여진 주검 받침대가 발견되어 쌍상총이라고 명명되었다. 묘주의 성별을 알 수 있는 유물이 나오지는 않았으나, 보통 부부합장묘로 간주된다.
마총 - 노서동 133호분으로, 쌍상총과 함께 몇 안되는 굴식돌방무덤이다. 무덤에서 말 뼈와 마구 등이 출토되어 마총이라 명명되었다.
우총 - 노서동 131호분으로, 마총 인근의 횡혈식석실분이다. 이 무덤 역시 도굴되어 특이한 유물은 나오지 않았고, 소 뼈가 출토되어 우총이라 명명되었다. 봉분을 복원하지 않아서 현재는 석실 일부만이 남아 있다.
3.5. 황오동 고분군
옛날 경주군 시절에 지어진 이름 황오리 고분군이라고도 불리며 위의 고분군들에 비하면 별로 유명하지 않다. 오랜 세월을 견디지 못하고 무덤이 일부 깎여나갔고 무덤 바로 옆에 민가가 있고... 인도 사거리 바로 옆에 고분이 있는 진풍경을 볼 수 있다. 사람들이 이 고분군의 존재는 모르고 위의 주요 고분군만 둘러보고 가는 경우가 워낙 많아 인적이 별로 없고 한가하다. 시간이 나면 한 번쯤 산책 삼아 들러보는 것도 좋다. 다만 조금 변두리에 있어서 불편하긴 하다. 국립경주박물관으로 가는 길에서 반대로 걷다 보면 나온다.
일제강점기 때 이곳을 조사한 자료에 의하면 무덤 70여 기가 있었지만, 현재는 봉분이 깎여나가 무덤의 위치를 파악할 수 없어 10여 기 남짓만이 정확히 확인되었다. 발굴 조사된 무덤은 1호분·4호분·5호분·16호분·33호분 등으로, 신라의 일반적인 무덤 형식인 돌무지덧널무덤(적석목곽분)이다. 이 근처도 건물을 지으려고 하면 유물이 계속 나오므로, 무덤의 봉분만 없어졌을 뿐 도굴까지는 당하지 않았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
황오리 39호분 - 황오리 고분군 중에서도 크기가 제일 큰 대형분. 규모는 대략 검총보다 조금 더 큰 정도이다.
월성로 고분군 - 전체 대릉원, 지금의 월성 주변의 경주 시내 가운데서 가장 빨리 만들어진 구역이다. 위의 계림로 고분군과 마찬가지로 팔우정 로타리에서 월성과 국립경주박물관으로 이어지는 구간이 해당한다. 신라토기의 전개 과정상에서 가장 빠르고, 대형 봉토를 갖춘 왕릉들이 만들어지기 시작하는 지점으로도 추정한다.
쪽샘지구 - 황오동 남쪽에는 '쪽샘지구'로 불리는 고분 밀집 지역이 포함된다. 2002년부터 시작하였으며, 2010년부터는 쪽샘지구 44호분의 발굴을 과정을 함께 보여주는 발굴 전시관을 설치하였다. 참고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1999년 당시에는 이 지역이 발굴 조사가 이뤄지지 않은 때여서 경주역사지구에 포함되지 않고 고도제한구역으로만 지정되었다.
쪽샘지구 44호분
황오동 고분군은 경주 시내에 있는 다른 무덤들보다는 규모가 작고, 출토 유물도 적은 편이다. 그러나 돌무지덧널무덤의 전 단계인 덧널무덤(토광목곽묘)를 비롯 다양한 무덤 형식들이 조사되어 경주 무덤들의 형성 과정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유적이다.
3.6. 인왕동 고분군
지금의 인왕동 일대의 고분군으로 위의 지도에서 가장 대릉원의 밖, 가장 아래에 남쪽에 동떨어져 자리하고 있는 고분군이다. 이전에 인왕동 고분군이라고 말하는 지점과 지금 현재 인왕동 고분군이라고 표현된 지점이 다소 차이가 있으며 특히 대릉원의 남쪽 월성의 서북쪽에 해당하는 지점은 원래는 교동 고분군이 존재하고 있었으며 사적은 아니었다. 사적 512호로 일괄 통합 변경되면서 사적 구역에 해당하지 않았던 범위도 일부 포함되고 혼용되기도 하였고 고분군의 명칭이나 일대의 행정구역 명칭이 복잡하다 보니 개편된 명칭을 떠나서 원래 이름대로 부르는 경향 때문에 "인왕동 몇 호분"이라는 식의 명칭은 잘 사용하지 않는 편이다.
인교동 119호 - 인왕동 고분군 군집의 가장 대형분이자 경주 시내 신라 왕릉들 가운데서도 빼박 왕릉으로 손에 꼽히는 고분이다. 대릉원 주차장에 들어가기 전에 대릉원 안쪽은 아닌데 엄청나게 큰 고분이 보이는 데 그것이 바로 이 119호분이다.
학계에서는 황남대총의 묘주가 내물왕인가 눌지왕인가에 대한 논의가 많았었다. "황남대총의 묘주가 눌지라면 내물왕의 무덤은 어디인가"라고 했을 때 거론되는 것이 바로 인교동 119호분이다. 삼국유사에서도 내물왕을 첨성대의 남쪽에 장사 지냈다는 기록이 있으며 실제로 인교동 119호분도 첨성대의 남쪽편에 위치하기 때문이다. 비록 발굴되지는 않은 고분이지만 황남대총의 묘주 문제로 인하여 생각보다 학계에서 자주 거론된 고분이기도 하다.
전 내물왕릉 - 위의 인교동 119호와는 별개로 내물왕의 무덤으로 추정되는 무덤 중 하나다. 하지만 이 비정은 조선시대 전승이나 종친회의 결정, 문화재의 관리 차원 등에서 정해진 것으로 실제로 역사고고학적 맥락에서 보면 인교동 119호분이 내물왕릉일 가능성이 훨씬 높다. 지금의 경주 시내 왕릉들은 대부분 5세기를 전후하여 축조된 것으로 5세기 신라 왕릉은 매우 크다. 전 내물왕릉의 크기로서는 상대적으로 너무 작은 규모라는 점에서 진짜 내물왕릉으로 보기엔 무리가 있다. 또한 전 내물왕릉의 봉분에는 삐져나온 호석들이 일부 보이는데, 이와 같은 현상은 서악동 고분군에서 보이는 것으로 비교적 늦은 시기인 6세기 신라 왕릉에서 보이는 특징이다.
교동 64번지 고분 - 정확하게 교동 64번지 고분이 어떠한 것인지는 알 수 없다. 64번지 고분은 정식 발굴된 고분이 아니라 과거 도굴꾼이 소형 금관과 귀걸이, 환두대도 등을 도굴하였던 경찰이 압수하면서 취조 후 대략적인 위치를 알아낸 것이기 때문이다. 한때 이 도굴품들의 진위 여부에 대해서 논쟁이 있었으나 지금의 대세론적인 결론은 진품으로 보는 편이며, 진품이라는 전제 아래에 금관의 크기로 보았을 때 왕족 남자아이의 무덤에서 도굴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4. 입장료
입장료는 무료이며, 내부 관람이 가능한 천마총만 요금을 받는데, 입장료는 2023년 성인 기준 3천원.
2023년 5월부터 첨성대처럼 무료 입장이 가능하다. 다만 내부 관람이 가능한 천마총만 예외적으로 요금을 받는데, 요금은 아래와 같다.
성인 3,000원
청소년/군인 2,000원
어린이 1,000원
경주시민(신분증 제시), 장애인복지카드, 국가유공자증 소지자는 입장료가 면제된다.
대릉원은 무료 해설사가 정해진 시간별로 해설을 한다. 단, 코로나19로 임시 중단하는 경우가 많다.
2024년 5월 17일 국가유산청 출범을 맞아 15~19일 닷새간 무료 개방이 되었다.
5. 매체
-덴마 - 대릉원: 한자로는 大陵園이라고 쓴다.
-알아두면 쓸데없는 신비한 잡학사전 - 4회: 경주가 고향인 유시민의 어린 시절 이야기에서 언급되었다. 당시엔 대릉원이 유적지도 아니었으며, 여기 산치고는 작지 않냐면서 놀았다고 한다. 당시에는 문화재에 대한 인식이나 관리가 미비해서, 어린 유시민이 고분 위에 올라가서 뒹굴며 논 적이 많았다고 한다. 후반엔 접시 같은 유물들도 사람들이 막 썼다고 말했다. 그때는 그렇게 해도 물건들이 버틸 수 있었지만 지금은 보러 오는 사람이 많아지면서 관리를 할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고분 위에서 동네 애들 몇 명 노는 거랑 각지에서 모인 수많은 사람들이 올라가서 셀카 찍는 거랑 다르기 때문이다.
-어서와~ 한국은 처음이지?: 7회에서 다니엘 린데만이 친구들을 데리고 우여곡절 끝에 경주시에 갔을 때 이곳을 방문했다.
6. 기타
황남대총의 뒷쪽, 정확하게는 황남대총 동쪽 포인트가 대릉원에서 인기 있는 사진 찍는 장소로 유명해졌다. 원래는 역사 유적 전문 사진작가의 작품으로서 그 구도가 알려졌는데, 이후 신라 고고학과 관련된 연구 저서의 표지에도 같은 앵글에 밤에 찍은 사진이 사용되기도 하였다. 그러고 한참 후에 SNS를 통해서 사진찍는 포인트로 유명해져 줄 서면서까지 찍는 포인트가 되었다. 황남대총이 너무 유명하다 보니 많은 사람들이 이 황남대총을 경주 지역에서 가장 큰 고분이라고 생각하곤 한다. 하지만 대릉원 지구 내에서도 황남대총보다 큰 봉황대가 있고, 외곽 지역에도 서악동 고분군, 금척리 고분군 등 다양한 유적지에 황남대총과 크기가 비슷한 왕릉들이 꽤 있다. 다만 이중에서 현재까지 발굴한 곳이 황남대총 하나뿐이라 다른 곳은 다 듣보잡이 되어서 그렇다. 황남대총도 4공 시절 국가 규모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지 못했다면 발굴하기가 힘들었을 것이다. 돌무지덧널무덤 특성상 컨베이어 벨트까지 동원해서 봉분을 통째로 다 들어내야 하기 때문.
조선시대 당시 파견온 러시아 군인의 기록을 보면 대릉원 역시 그 시절 조선 내에 많이 퍼져 있는 고려장 전설로 알려진 듯하다.[20]
경주근교에는 나무들로 둘러싸인 커다란 고분들이 있어 우리의 관심을 끌었다. 이 고분들은 2천 년 전에 만들어졌다고 한다. 아주 오랜 옛날에 노인의 나이가 일흔 살이 되면 이곳에 산 채로 매장했다고 한다. 우리가 보았던 무덤 열기 안에는 분명 불쌍한 노인들이 적잖이 매장되었으리라 -V.P 파르네프 <<내가 본 조선, 조선인>>
봄이나 여름에 가면 꼬꼬마 텔레토비의 동산에 온 듯한 느낌이 들게 한다. 대릉원을 보고 텔레토비 동산을 떠올리는 아이들이 많았다. 게다가 천마총의 경우에는 그 안에 들어갈 수 있게 되어 더더욱 텔레토비를 연상시켰다. 외국인들도 대릉원의 사진들을 보고 텔레토비 동산을 떠올렸다.
경주시 홈페이지에서 인근 카페에서 판매하는 '대릉원 타르트'를 소개해 놨다. 이는 무덤을 녹차가루 등으로 재연한 것이다. 숟가락도 삽 모양이다※ 이후 영화 파묘가 뜨자 관련 드립이 간간이 나오고 있다.
천마총(天馬塚)
이칭 : 황남동 제155호분
목차
정의
개설
분구(墳丘: 封土)
내부시설
껴묻거리(副葬品)
장법(葬法)
피장자(被葬者)와 연대
정의
경상북도 경주시에 있는 삼국시대 신라 시기의 돌무지덧널무덤. 적석목곽분. 세계문화유산.
개설
천마총(天馬塚)은 경상북도 경주시 황남동에 조성한 고분공원[大陵苑] 안 서북쪽에 위치하고 있고, 황남동 제155호분으로 관리되어 왔다. 당시 정부의 경주종합개발계획에 의거 황남동 제98호 고분의 내부를 공개하여 관광자원으로 활용한다는 계획을 수립하였다. 제98호분은 한국 최대형 고분이므로, 이를 발굴하기 위해서는 이 고분보다 소형의 고분을 발굴하여 경험과 정보를 얻은 후, 제98호분을 본격적으로 발굴한다는 방침을 세워 제155호분을 먼저 발굴하게 되었다. 1973년 문화공보부 문화재관리국(현, 국가유산청) 조사단에 의해 발굴조사를 실시하였다. 그러나 제155호분 천마총도 대형에 속하는 고분이고, 당시까지 발굴조사된 고분 가운데 가장 규모가 크고 거의 완형에 가까운 고분이어서 신라의 왕릉급 대형고분에 관한 새로운 정보를 많이 제공하였다.
고분이 소재한 곳은 경주분지 내의 거의 중심지이며, 주위는 논과 밭, 그리고 민가가 밀집되어 있는 평탄지에 속하고, 서천(西川)과 남천(南川)의 퇴적으로 이루어진 지형으로 토질은 사질토(沙質土)와 냇돌로 이루어졌다. 고분의 형식은 돌무지덧널무덤[적석목곽분(積石木槨墳)]으로 분류된다. 천마총에서 발굴된 금관(金冠) · 금제관모(金製冠帽) · 금제과대(金製銙帶)가 1978년 각기 국보로 지정되었다.
분구(墳丘: 封土)
고분의 규모는 분구 높이 12m 70cm, 분구의 바닥지름 47m인 원형의 봉토분(封土墳)이다. 분구의 자락에는 돌로 쌓아 만든 호석(護石)이 돌담 형식으로 돌려 있다. 호석은 현 지표로부터 1.2m 높이에 있고, 직경은 약 20cm 내외의 냇돌[천원석(川原石)]를 사용하였다. 분구의 토층은 황갈색 점토를 지표에서 75cm까지 쌓고, 그 위부터 4m 높이까지는 황갈색 흙과 직경 약 10cm 정도의 자갈이 섞였다. 분구의 4m 이상부터 정상부까지의 적토(積土)는 흙과 자갈이 혼합된 층인데, 이 층은 내부 중심을 향해 경사지고 높이 올라갈수록 경사도가 급해졌다. 적석부(積石部) 상위 봉토의 두께는 6.2m이다.
적석부는 냇돌로 형성되었으며, 상단은 동서 15.5m, 남북 13m의 타원형이었고, 그 중앙에 동서 8.8m, 남북 7.5m의 함몰부(陷沒部)가 있다. 적석부 표면은 분구 정점에서 2.6m 높이까지 약 15∼20cm 두께로 점토층이 피복되었고, 외면의 경사도는 50∼60° 정도로 다소 급한 편이다. 적석부의 측벽 바닥의 너비는 동서에서 각각 8m 50cm이고, 전체 적석부의 바닥 직경은 23.6m이고, 높이는 6m로 적석부 위 봉토 두께와 같다. 적석부의 평면은 대체로 방형(方形)을 띠고 있는데, 전체 형상은 절두방추형(截頭方錐形)으로 마치 고구려의 돌무지무덤[積石塚]과 비슷하다. 적석부의 바닥은 목곽(木槨)의 바닥보다 38∼39cm 정도 낮다.
내부시설
목곽부(木槨部)는 분구의 중심부 적석의 하부에 설치되었고, 무덤의 핵심부를 이룬다. 규모는 장변 6.6m, 단변 4.2m, 높이 약 2.1m(복원치)로 벽과 천정이 목재로 짜여진 목실(木室)이다. 목곽의 밑은 두께 40cm를 인두대의 냇돌과 자갈을 깔아 상면을 고르게 하고, 그 위에 목재로 관대를 마련하였다. 벽면은 판재가 아닌 통나무[原木]를 통째로 사용하였는지 또는 쪼갠 것을 사용하였는지 자세히 알 수 없지만, 벽면이 서로 접하는 네 귀퉁이는 귀틀짜기 식으로 결구(結構)하였다.
그리고 당초에는 목곽의 전체에 붉은 옻칠을 한 것으로 생각되었는데, 그것은 목곽의 상면(床面) 판재를 붉은 옻칠을 하였고, 또 목곽 주위의 냇돌에서 붉은 옻칠 흔적이 다수 발견되는 점으로 추측할 수 있다. 목곽의 바닥 유물층에 도달하기 직전에 쇠막대기[환두철봉(丸頭鐵棒)] 2개가 동서 길이 2.2m, 남북 너비 1.2m의 범위로 발견되었는데, 이 범위가 천정부에 설치한 출입문[開口部] 시설이고, 쇠막대기는 문의 빗장으로 사용된 것으로 추측된다. 따라서 목곽은 목실 형식이고, 이 출입문을 통하여 관과 궤(櫃)를 격납하고, 작업 인부(人夫)가 출입한 것으로 보인다.
목곽 내에는 목관과 껴묻거리수장궤[副葬品收藏櫃]가 안치되었는데, 목관은 목곽의 중심에 동서 축선에 길이로 놓이고, 그 동쪽에 수장궤를 남북으로 놓아 관과 T자형을 이루게 하였다. 목관의 크기는 유물의 배치 등으로 미루어 보아 동서 길이 2.2m, 남북 너비 80cm로 추정된다. 수장궤는 남북 길이 1.8m, 동서 너비 1m, 높이 약 80cm이다.
껴묻거리(副葬品)
고분 내에서 유물이 출토된 곳은 ①분구 내부, ②목곽 상부, ③목관의 주위와 내부, ④껴묻거리수장궤 안 등 4곳이다. ①과 ②의 유물은 껴묻거리라기보다는 고분축조와 관련된 의식용(儀式用) 유물이라고 할 수 있고, ③과 ④의 유물이 시체매장과 수반된 유물로 진정한 의미의 껴묻거리, 이른바 부장품이다.
①에서는 분구 정상부의 표토 아래 1.9m 지점에서 마구류(馬具類) 일괄유물과 유자철기(有刺鐵器) 철제낫 · 철모 · 유리옥 등이 발견되었다. ②에서는 적석부의 함몰 부분 아래의 목곽 측벽 위에서 철제 공부(銎斧)와 일렬로 배치된 토기들이 발견되었다. 그리고 남측 벽에서 금제태환이식(金製太環耳飾) 2쌍, 금제세환이식(金製細環耳飾) 3쌍이 출토되었다.
③에서는 우선 목곽 주위에서는 환두철봉(環頭鐵棒) 2개, 관모(冠帽) · 과대(銙帶) 및 요패(腰佩) · 옥류(玉類) 등 장신구류, 자작나무껍질[白樺樹皮]관모, 은제이형요패(銀製異形腰佩), 은제우각형구(銀製牛角形具), 대형은제요패(大形銀製腰佩) 2조, 은제과판(銀製銙板) 32개, 대소(大小) 옥류 5,000여개 등 장신구와 대형 철정(鐵鋌), 소형 철정, 대도(大刀), 측도부은도(側刀付銀刀), 삼지모(三枝矛), 유경삼각형철촉(有莖三角形鐵鏃), 금은장삼환대도(金銀裝三鐶大刀) 등 무기류와 철제등자(鐵製鐙子), 교구(鉸具), 금동제복륜(金銅製覆輪), 금동제선형구(金銅製扇形具) 등의 마구류가 발견되었다. 목관 내부에서는 금관(金冠)은 삼수지형입식(三樹枝形立飾) 3개와 녹각형입식(鹿角形立飾) 2개 및 수식이 달려 있었다. 금제세환이식, 목걸이[頸飾], 금제과대(金製銙帶), 금제팔찌[金製釧], 은제팔찌[銀製釧], 금제가락지[金製環], 금동투조조형수식(金銅透彫鳥形垂飾) 등 장신구와 봉황두식금동제대도(鳳凰頭飾金銅製大刀) 등이 출토되었다.
④에서는 금제조익형관식(金製鳥翼形冠飾), 금제나비형관식, 금동관(金銅冠), 금동투조금동관모(金銅透彫金銅冠帽), 금동경갑(金銅頸甲), 금동투조신발[金銅透彫靴] 등 장신구류와 은장복륜(銀裝覆輪), 청동제마탁(靑銅製馬鐸), 금동투조판식죽제장니(金銅透彫板飾竹製障泥), 자작나무껍질천마도장니[白樺樹皮天馬圖障泥], 서조도채화판(瑞鳥圖彩畵板), 기마인물도채화판(騎馬人物圖彩畵板), 금동판피말안장[金銅板被鞍橋], 목심금동판피발걸이[木心金銅板被鐙子], 금동경판(金銅經板), 말재갈[馬銜], 운주, 옥개형금동구 등과 청동제초두(靑銅製鐎斗), 철제솥[鐵製鼎], 은제대합(銀製大盒), 금동제대합(金銅製大盒), 금동제소합(金銅製小盒), 금동제대형고배(金銅製大形高杯), 우각형금동잔(牛角形金銅盞), 국자형칠기, 칠기잔류(漆器盞類), 찬합칠기(饌盒漆器), 토제구슬[土製玉] 159개 등 마장식구류(馬裝飾具類)와 기기류(器機類)의 많은 유물이 출토되었다.
이상의 유물의 수량은 장신구류 8,767개, 무기류 1,234개, 마구류 504개, 용기류 226개, 기타 796개, 총합 11,526개이다.
위의 껴묻거리 중에서 금관은 실용관이라기보다 의식용관(매장용 등)이라 할 수 있고, 금모(金帽)는 실용관이라 할 수 있다. 천마도장니(天馬圖障泥)의 천마는 비상하는 모습으로 고구려벽화의 무용총(舞踊塚) 수렵도(狩獵圖)의 그것과 매우 유사한 점을 보여주고 있다. 천마의 말꼬리와 천마 주위의 당초문(唐草文)과 운문(雲文) 등은 고구려벽화와 양식적인 면에서 분명 유사한 점이 많다. 신라 지역의 거의 유일한 영주 태장리의 고분벽화와 함께 고구려벽화고분의 영향을 잘 나타내 준다. 고구려나 백제와는 달리 고분벽화가 별로 없는 신라의 회화자료로서 천마총의 천마도는 매우 귀중하다고 하겠다. 근자에 천마에 대하여 기린이라는 이견이 제시되기도 하였다.
장법(葬法)
천마총은 분구의 지름이 47m나 되고 높이도 12.7m가 되는 거대고분에 속한다. 고분의 형식은 돌무지덧널무덤으로 장법은 바로뉘어묻기[앙와직지신전장(仰臥直肢伸展葬)]를 채택하였고, 홀로묻기[單葬]이다. 순장(殉葬)의 흔적도 찾을 수 없다. 다만 발굴보고서에서는 분구 중에서 발견된 마구는 말 순장의 전통을, 목관 위의 세환이식(細鐶耳飾)과 수장궤(收藏櫃) 위의 태환이식(太環耳飾)은 남녀 순장의 전통을 상징하는 것으로 이해한 바 있다. 그러나 이 경우『삼국사기(三國史記)』지증왕(智證王) 3년조에 순장금지 기사가 있어 연대가 맞지 않는다는 점과 많은 고분에서 출토되는 이식의 과다한 수량을 해석할 수 없다는 난점이 있다.
그리고 목곽(장변 6.6m, 단변 4.2m, 높이 2.1m)의 공간이 그 안에 안치한 목관(동서 2.2m, 남북 80cm)과 수장궤(동서 길이 1m, 남북 너비 1.8m, 높이 약 80cm)가 들어가고도 과도하게 넓은 공간이 남아 있는 점, 목곽 안벽에 잇대어 돌담이 돌아가면서 축조되었고 다시 목관의 주위에도 석단이 돌려 있는 점, 돌담과 석단 그리고 목관과 수장궤 상면의 공간 등 여러 점으로 미루어 볼 때, 목곽은 적석부 봉토와 같은 단순한 목관 보호의 외피시설의 기능만을 위하여 설치한 것이 아니라고 본다. 즉 이 목곽은 당초 목관을 안치하고 빈전(殯殿)으로 사용하다가 빈장(殯葬)기간 후에 적석과 봉토를 올려 분구를 완성한 것으로 생각된다. 목곽을 지하로 내려가지 않고 지상에 묘단을 축조하고 그 위에 설치한 점은 더욱 더 빈전이었을 개연성을 높여주고 있다.
피장자(被葬者)와 연대
이 고분의 축조 연대에 관하여 잠시 말하여 두고자 한다. 목관편(木棺片)의 방사성탄소측정(원자력연구소 검사) 연대는 서기 340년±70년이므로 축조 연대는 서기 270년∼410년 사이에 들어간다. 이 연대는 다소 이른 감이 드는데, 그것은 아마도 목관재료 자체의 연대 때문이 아닌가 생각된다. 발굴보고서에서는 소지마립간(炤知麻立干)과 지증왕을 이 고분의 피장자로 추정하고 있다.
경주분지에서의 돌무지덧널무덤이 지증왕대까지 축조되고, 그 다음 법흥왕(法興王)대부터는 서악동 무열왕릉(武烈王陵)의 후방 왕릉군(王陵群)으로 옮겨가기 때문에 황남동에서의 돌무지덧널무덤의 연대는 6세기에 끝났다고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또 천마총의 묘단 · 목곽부 · 적석부 · 분구 등 구성요소의 규모가 합리적 비례를 취하고 있고, 목곽 · 수장궤 및 천마도 · 금관이식 등은 다른 무덤에서 볼 수 없는 발달된 양식을 보여 준다는 점에서 황남동에서는 최후 단계인 6세기 초의 무덤으로 추정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잠정적으로 지증왕의 왕릉으로 추정하여 둔다.
입장요금
어른(개인) 3,000원, 어른(단체) 2,400원
군인/청소년(개인) 2,000원, 군인/청소년(단체) 1,600원
어린이(개인) 1,000원, 어린이(단체) 800원
황남대총(皇南大塚)
이칭 황남동 98호분
목차
정의
개설
내용
의의와 평가
정의
경상북도 경주시 황남동 일대에 있는 삼국시대 신라 왕족의 것으로 추정되는 능. 돌무지덧널무덤·쌍무덤.
개설
황남동고분군은 1963년 1월 21일에 사적으로 지정되었으며 면적은 42만 2,908㎡이다. 이 고분군 내에 있는 황남대총의 일련번호는 ‘황남동 98호분’이다. 황남대총은 1973년 7월과 1975년 10월에 문화재관리국(현, 국가유산청) 조사단이 발굴조사하고, 1980년 문화재위원회(현, 문화유산위원회) 회의에서 붙여진 별칭으로 황남동에 소재한 신라 최대의 고분이라는 의미다.
내용
현재 외형이 복원되어 있는 황남대총은 2개의 원분(圓墳)이 남북으로 연접된 표형분(瓢形墳)으로 동서 지름 80m, 남북 지름 120m, 남분 높이 22m, 북분 높이 23m에 이르는 신라 최대의 봉토분(封土墳)이다. 황남대총 남분의 피장자는 남자, 북분의 피장자는 여자이며 신라왕족의 무덤으로 추정된다.
봉토와 봉토의 기저부(基底部) 주위에 쌓은 바깥 둘레돌[護石]의 남 · 북분 연접상태로 볼 때, 먼저 남분이 축조되었고 뒤에 북분이 남분에 잇닿아 축조되었던 것으로 밝혀졌다. 남 · 북분 각각 봉토의 중심부에 덧널과 돌무지[積石]가 설치된 고신라 특유의 돌무지덧널무덤[積石木槨墳]이다.
두 고분 모두 돌무지 부분 내부에서 나무기둥을 줄지어 세웠던 기둥구멍과 기둥 사이를 연결했던 횡가목(橫架木)의 흔적이 발견되었다. 이로써 목조가구(木組架構)를 먼저 설치하고 그에 맞춰 돌을 쌓았음을 알 수 있다. 돌무지 부분 안에 설치된 이러한 목조가구는 고신라의 돌무지덧널무덤을 계보상으로 북아시아 덧널무덤과 더욱 가깝게 접근시키는 중요한 근거로서 주목받고 있다.
남분의 돌무지 부분 안에는 으뜸덧널[主槨]과 딸린덧널[副槨]이 동서로 배치되어 T자형을 이루고 있었다. 장축방향은 으뜸덧널이 동서로, 딸린덧널은 남북으로 두었다.
으뜸덧널은 원지표를 약 45㎝ 파고 냇돌과 잔자갈을 깔아 구축한 바닥 위에 세운 내외 2중의 덧널으로 되어 있었다. 바깥덧널[外槨]은 동서 길이 6.5m, 남북 너비 4.1m, 높이 약 3.5m이고, 안덧널[內槨]은 동서 길이 4.7m, 남북 너비 2.3m, 높이 약 1.8m이다. 안 · 바깥덧널 사이에는 잔자갈이 채워져 있었다.
안덧널의 가운데에는 내외 이중의 널[木棺]이 동서로 놓여 있었다. 바깥널[外棺]은 동서 길이 3.6m, 남북 너비 1m, 높이 약 0.8m이다. 안에 칸막이를 세워 동쪽은 껴묻거리 수장부[副葬品收藏部]로 되어 있었고, 서쪽에는 안널[內棺]이 안치되어 있었다.
안널 안에서는 60세 전후의 남자로 판단되는 피장자의 유골 일부가 출토되었다. 또한 이와 함께 피장자가 착장했던 금동관 · 금제관드리개[金製冠垂飾] · 금제목걸이 · 유리구슬을 꿰어 만든 가슴장식, 금제허리띠[銙帶]와 띠드리개[腰佩]등의 장신구, 금동장고리자루큰칼[金銅裝環頭大刀]1개가 출토되었다.
껴묻거리 수장부에는 윗부분에 금제관식 · 금동관 · 은관(銀冠) · 은모(銀帽) · 금동신 · 은제허리띠와 띠드리개 · 금은반지 · 금귀걸이 등의 장신구와 10여 개의 금은장고리자루큰칼, 은제정강이가리개[銀製脛甲]가 놓여 있었다.
그 밑에는 각종 금속용기, 칠기(漆器), 봉황머리모양병[鳳首形甁]등의 유리용기 등이 담겨 있었다. 바닥부분에는 쇠솥과 각종 토기들이 놓여 있었다.
껴묻거리 수장부 · 윗부분의 바깥널 뚜껑 위에도 금동제 정강이가리개, 비단벌레날개로 장식된 금동허리띠 등이 놓여 있었다. 바깥널과 안덧널 사이의 잔자갈층 위에서도 각종 토기와 철기가 출토되었다.
으뜸덧널 내부에서는 순장(殉葬)된 것으로 보이는 20대 여자의 유골 일부도 발견되었다. 바깥덧널의 뚜껑부분에도 금제귀걸이를 비롯한 각종 장신구와 토기, 철제무기, 마구류가 배치되어 있었고, 새무늬[鳥文]가 새겨진 청동제거울 1점도 출토되었다.
딸린덧널은 으뜸덧널과 3m 두께의 냇돌벽을 사이에 두고 그 서쪽에 설치되었으며, 규모는 남북 길이 5.2m, 동서 너비 3.8m, 높이 약 1.3m이다. 흙바닥에는 각종 껴묻거리가 여러 겹으로 쌓여 있었다. 딸린덧널 안에서는 7구분의 안장틀[鞍橋]과 거기에 부속된 각종 마구류, 300여 점의 철제무기와 이기(利器), 1,500여 점의 각종 토기가 출토되었다.
그 중 안장틀을 비롯한 1세트의 마구는 모두 용(龍)무늬가 투조된 금동판 밑에 비단벌레 날개를 깔아 장식한 호화찬란한 것이었다. 500여 점에 달하는 쇠투겁창[鐵矛]는 형식이 10여 종이었다. 쇠스랑 · 가래끝 등의 농기구도 30여 점 포함되어 있었다.
북분은 남분의 북쪽 끝 봉토 일부를 절개하고 축조한 돌무지 부분 가운데에 장축을 동서로 둔 덧널이 하나만 설치되어 있었다. 동서 길이 6.8m, 남북 너비 4.6m, 높이 약 4m 규모의 외덧널[單槨]로 되어 있는 덧널의 바닥은 지반을 약 50㎝ 파고 냇돌과 잔자갈을 깔아 구축되었다.
덧널 안에는 동쪽을 제외하고 잔자갈로 쌓은 너비 80㎝, 높이 55㎝의 ‘ㄷ’자형 석단(石壇)이 돌려지고 그 안에 널이 놓여 있었다. 널은 남분과 같은 구조의 이중 널으로 길이 3.3m, 너비 80㎝, 높이 약 80㎝였다.
바깥널의 서쪽 부분에 안치된 안널 안에서는 동쪽에서부터 금관과 3쌍의 금제관드리개, 금구슬과 유리구슬로 된 목걸이, 금제허리띠와 띠드리개, 11개의 금팔찌, 12개의 금반지 등 피장자가 착장했던 각종 장신구가 출토되었다. 안널에서는 장신구만 출토되었으며, 허리띠의 좌우 양편에 5쌍의 귀걸이형 장신구가 띠드리개와 함께 수장되어 있어 이채로웠다.
바깥널의 동쪽 부분인 껴묻거리 수장부에서는 윗단에서 각종 장신구, 그 아래에서 금은장고리자루큰칼, 타출무늬은잔[打出文銀杯]등의 금속용기, 4개의 유리잔, 중국 육조시대의 흑갈유자기소병(黑褐釉磁器小甁) 등이, 바닥부분에서 쇠솥과 각종 토기, 그림이 그려진 가락바퀴[紡錘車]가 출토되었다. 타출문은잔
덧널 뚜껑부분에도 각종 장신구, 토기, 비단벌레 날개로 장식된 마구류 등이 부장되어 있었다. 북분의 출토유물은 남분에 비해 장신구가 월등히 많은 반면, 무기와 마구가 적었다. 또한 피장자가 큰칼을 착장하지 않은 대신 덧널 내에서 가락바퀴가 출토되어 피장자가 여자였던 것으로 추정되었다.
껴묻거리 수장부에서 ‘부인대(夫人帶)’의 명문(銘文)이 있는 은제허리띠의 끝장식이 출토된 것도 이 고분의 피장자가 여자였음을 뒷받침해준다. 결국, 이 표형분은 부부총(夫婦塚)임을 알 수 있다.
남 · 북분 모두 봉분 정상부에 마구류를 위주로 하는 일괄유물이 매장되어 있었다. 이것은 고분조성 마지막 단계에서 의도적으로 매장한 것이다. 이와 같은 유물의 출토상태는 고분 조성 당시 덧널 내부, 덧널 상부, 봉분 정상부 등 당시의 장의절차에 따라 단계적으로 부장행위가 이루어졌던 것을 보여 준다.
의의와 평가
황남대총은 그 형태가 표형분에 속하는 부부총으로서 어울무덤[合葬墳]이다. 이 고분의 축조연대는 신라에 있어서 대형 돌무지덧널무덤의 축조 상한연대를 결정하는데 중요한 기준이 된다. 발굴조사자는 무덤덧널 형식의 변천, 고식(古式) 마구(馬具)의 등장시기, 신라토기의 편년, 북분에서 출토된 중국제 흑갈유자기소병(黑褐釉磁器小甁)의 매납시기 등을 근거로 남분은 4세기 중엽경, 북분은 4세기 말∼5세기 초경으로 추정하였다.
이에 반하여 고구려남정설이라는 고대사 연구성과를 근거로 삼는 연구자나 중국에서의 고식 마구 출현에 대한 다른 해석을 근거로 삼는 연구자들은 황남대총 남분을 5세기 중 · 후반, 북분을 6세기 초로 편년하기도 한다. 이밖에 또 다른 해석으로는 사료상에 나오는 왕세계와 혼인관계 등을 비교하여 남분의 피장자를 나물마립간(내물마립간)이나 눌지마립간으로 비정하는 견해도 제시되어 있다.
전 미추왕릉
지정명 : 신라미추왕릉(新羅味鄒王陵)
지정번호 : 사적
소재지 : 경북 경주시 황남동(皇南洞) 89-2
일반정보
미추왕릉은 『삼국유사』에서 죽현릉(竹現陵)․죽장릉(竹長陵)이라고도 부른다고 하였다. 현재 신라 제13대 미추왕의 능으로 전해지고 있는 고분은 경주고분공원으로 조성한 대릉원(大陵苑) 내의 106호분이다. 내부구조는 적석목곽분(積石木槨墳)으로 여겨지는데, 당시에 적석목곽분이 조성될 수 있었는지에 대해서 논란이 있다.
전문정보
『삼국사기』 권2 신라본기2 미추이사금 23년조에서는 “왕이 재위 23년에 돌아가니 대릉(大陵)(또는 죽장릉(竹長陵)이라고도 함)에 장사지냈다(二十三年 冬十月 王薨 葬大陵(一云竹長陵))”고 하였다. 『삼국유사』 권1 기이1 미추왕(味鄒王) 죽엽군조(竹葉軍條)에서는 미추왕이 “왕위에 있은 지 23년 만에 죽었으며 능(陵)은 흥륜사(興輪寺) 동쪽에 있다(在位二十三年而崩 陵在興輪寺東)”고 하였다. 또한, 14대 유례이사금 14년에 이서고국(伊西古國: 지금의 청도(淸道))이 금성(金城)을 쳐들어왔을 때 귀에 대나무잎을 꽂은 죽엽군(竹葉軍)이 갑자기 신라군을 도와 이들을 물리친 일이 있는데, 이들 병사들이 돌아간 곳을 찾아보니 미추왕릉 위에 대나무잎이 쌓여 있어 선왕(先王)의 음덕이라는 것을 알았다고 한다. 이 설화 때문에 미추왕릉은 대묘(大廟) 혹은 대릉(大陵)․죽장릉(竹長陵)․죽현릉(竹現陵)이라 칭한다고 한다. 이에 따르면 경주시내 평지고분군 가운데 미추왕릉이 있음을 알 수 있다.
기록을 통해서는 “대릉(大陵)”의 자세한 내부구조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알 수 없다. 그러나 상식적인 수준에서 문자 그대로 고총고분(高塚古墳)을 의미한다는 추론은 가능하다.
현재 제13대 미추왕의 능이라 전해오는 왕릉은 경주 분지내 마립간시기의 집단묘역인 노서동고분군, 노동동고분군, 황남동고분군 내에 있으며, 왕성인 월성과는 남북으로 근접하였다. 주변에 대형분이 밀집하여 있으며, 천마총과 황남대총은 그 북쪽으로 약간 떨어져 있다. 봉분 직경은 56.7m, 높이 12.4m로 경주시내 평지고분 가운데에서도 대형분에 속한다. 능 앞에는 화강석으로 만든 혼유석이 있고, 남쪽에는 삼문(三門)이 있으며, 이 삼문을 따라 담장이 돌려져 무덤 전체를 보호하고 있으나 모두 후대에 설치한 것이다. 또 능 전방 가까운 곳에 왕을 제사하기 위한 숭혜전(崇惠殿)이 있는데, 임진왜란 때에 불탄 것을 조선 정조 18년(1794)에 다시 세운 것이다.
이러한 표면상의 특징은 전미추왕릉의 묘제가 대릉원내의 다른 대형분들과 마찬가지로 적석목곽분(積石木槨墳)이며, 규모로 보아 피장자의 신분은 최상위 계층을 형성하고 있는 왕 또는 왕족임을 의미한다. 그런데 이 능이 실제 미추왕의 능인지에 대해서는 의심의 여지가 있다. 무엇보다도 미추왕릉의 조영시기인 3세기말에 과연 적석목곽분이 발생하였는지의 여부가 먼저 검토되어야 한다.
지금까지 미추왕대 고총고분이 조성되었다는 연구들은 다음과 같이 크게 구별할 수 있다.
첫째, 『삼국사기』의 대릉(大陵) 기사를 토대로 미추왕릉을 가장 초기의 적석목곽분으로 보는 견해이다. 여기서는 미추왕의 즉위, 곧 김씨족의 출현이 신라가 실질적인 왕국 단계에 도달한 것을 반영하는 것으로 생각하였다. 이는 적석목곽분의 발생을 미추왕릉과 연계시키는 것으로서 이 묘제가 김씨계의 왕들과 관련이 있다는 것을 시사하고 있다. 즉, 미추왕, 나물왕 등 김씨왕이 나타나면서 교동과 황남동을 왕릉지로 사용하기 시작했고, 이것이 노서동․노동동으로 점차 확대되었다고 보고 있다. 이에 따라 현 경주 중심지 남부 일대의 거대한 봉토묘군은 미추왕대인 3세기 말경에서부터 조성된 김씨계 왕족의 분묘임이 분명하다고 보았다. 그러면서 적석목곽분의 기원은 시베리아 적석총-신석기시대 적석총-영남지방의 다곽식지석묘-경주 적석목곽분이라고 하는 일련의 계통을 정립하여 외래적 요소를 강조하였다.(김원룡, 1986)
둘째, 적석목곽분을 김씨족과 연관된 외래적인 요소로 보고 그 기원을 추적하여, 김씨족을 소백산맥의 재지세력으로 보면서, 이들이 경주에 진출하는 시점 즉 3세기 중반 미추왕대에 경주 지역에서 적석목곽이 출현하였다고 본 견해가 있다. 여기서는 적석목곽을 말갈과 연결지으면서, 그 전파경로를 동해안을 중심으로 말갈 침입기사와 연계시켰다.(박영복, 1992)
셋째, 적석목곽분이 미추왕대에 활발히 보급․전파되었다는 견해이다. 이는 탈해조의 석총(石塚) 기사와 예맥과의 접촉기사를 근거로 당시 압록강 연안의 고구려 적석총이 신라에 전파되었으며, 이것이 3세기 경에 이르러 활발히 보급되었다는 입장이다.(강인구, 1984)
넷째, 미추왕이 죽었을 때 비로소 “대릉”(고총고분)이 조성되었다면, 이는 당시 신장된 왕권을 반영하는 것이며, 또한 대외적으로 고구려와의 폭넓은 문화교류도 상정해볼 수 있다는 견해가 있다. 곧, 당시 고구려에서 왕실을 중심으로 일반적으로 조성되었던 고총고분의 묘제가 3세기 중엽을 전후하여 신라에 본격적으로 전파되었다는 것이다. 특히 문화전파의 경로였던 소문국을 지배하고 있었던 구도-미추 세력이 이를 적극적으로 흡수․동화시킨 것으로 보았다.(박순교, 1993)
다섯째, 미추왕대에 적석목곽분이 조성되었다고 보는 것은 위와 동일하나, 미추왕의 재위년대인 262년-283년을 부정하고 미추를 나물마립간과 동일하게 보는 견해이다. 곧, 적석목곽분을 4세기 무렵 즉 나물왕대에서부터 6세기 지증왕대에 이르는 마립간 시기의 묘제로 보아, 적석목곽분의 개시 시기를 마립간 시기의 시작과 일치시키기 위해 미추를 나물마립간과 동일하게 보는 것이다. 경주일원에만 존재한 적석목곽분의 기원에 대해서는 시베리아 쿠르간 계통의 묘제로 보고 있다.(최병현, 1992)
이 견해에 의하면, 적석목곽분은 대형일수록 시기가 빠르고 시기가 내려올수록 규모가 축소되면서 세부구조가 간략화되는 과정을 거치고 있다고 한다. 따라서 전 미추왕릉은 5세기말 6세기 전후로 보고 있는 천마총과(이종선, 2000) 비슷한 규모를 보이고 있으므로, 그 시기를 크게 벗어나지 않을 것으로 생각된다고 한다.
그렇다면 3세기말 경주분지에 실재한 미추왕의 묘제는 봉분이 전혀 남아있지 않는 목곽묘 단계이므로, 실제 미추왕릉은 찾기가 어려워진다. 이처럼 문헌과 고고학적 상황이 일치하지 않기 때문에, 그동안 고고학계에서는 『삼국사기』 권3 신라본기3 눌지마립간 19년조의 “19년(435) 봄 정월에 큰 바람이 불어 나무가 뽑혔다. 2월에 역대(歷代)의 왕릉을 수리하였다. 여름 4월에 시조묘에 제사지냈다(十九年春正月 大風拔木 二月 修葺歷代園陵 夏四月 祀始祖廟)”는 기사를 참고하여, 전 미추왕릉이 3세기말에 일단 만들어졌다가 후대에 개축 또는 개수된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먼저 2월의 기사를 “역대 왕릉에 새로이 봉토를 입혔다”고 해석한 후, 이를 토대로 당시에 눌지왕 이전의 18대에 이르는 왕과 왕비들의 능 30여기를 오늘날과 같은 외형을 가진 고총고분으로 개조하였을 가능성이 높다고 추정하기도 하고,(강인구, 1984) 원래 미추왕릉은 목곽묘 단계로서 봉분의 규모가 크지 않았는데, 151년 후인 435년에 와서 정변으로 왕위에 오른 눌지왕이 내물계의 직계 조상묘들에 대해 당시의 묘제인 적석목곽분과 같은 외형으로 수축하였다고 보기도 한다.(최병현, 1992)
경주분지 고분군 내에 존재하는 30여기의 대형분 가운데에서, 밑지름 56.7m, 높이 12.4m인 중형급인 106호분만 피장자가 미추왕이라는 분명한 전승과정을 지키고 있다면, 『삼국유사』 권1 기이1 미추왕(味鄒王) 죽엽군조(竹葉軍條)에 따라 전 미추왕릉과 동서방향을 이루고 있는 경주공업고등학교 일원의 절터가 흥륜사지일 가능성이 높아진다.
『삼국사기』에서 법흥왕 이전 왕들의 장지 관련 기록을 보면, 박․석․김 3성 시조왕들에 대해서만 한정적으로 관련기사가 등장함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시조 혁거세부터 통일초 어느 시점에 이르기까지는 왕들의 장지가 기록으로 남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통일기에 이르면 사서 편찬 과정에서 왕들의 장지를 기록할 필요성이 제기되었을 것이다.
미추왕릉의 장지를 언급한 ‘대릉(大陵)’ 역시 구체성이 결여된 표현인 점으로 미루어 보아, 후대의 필요에 의해 소급되어 기록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그 시기는 대체로 신라 하대 또는 고려 초일 것으로 생각되나, 현재의 미추왕릉은 중대에 지정되었을 것으로 보기도 한다. 이유는 혜공왕대에 이르러 오묘제(五廟制)를 개정하면서 미추왕이 김성 시조의 자격으로 오묘의 수위(首位)로 모셔지기 시작한 것과 아울러 미추왕릉을 “대묘(大廟)”라 칭했다는 점이(『삼국유사』 권1 기이1 미추왕 죽엽군) 주목되기 때문이다. 즉, 신라 중대에 이르러 전대의 역사를 새롭게 편찬하는 과정에서 미추왕을 실질적인 김성 시조로 결정하면서부터 미추왕릉의 필요성이 제기되었다는 것이다. 이에 따라 8세기 중엽에 이르러, 3세기말의 고고학적 상황과 무관하게 미추왕릉이 고총고분 가운데 지정되었고, 곧이어 왕실에 의해 “대묘(大廟)”로 추숭(追崇)되었다고 보았다.(이근직, 2002) 조선 전기 경주지역에 전해오던 신라 왕릉을 직접 조사한 후에 기록한 『경상도속찬지리지(慶尙道續撰地理誌)』(1469) 능침조에서는 혁거세릉․미추왕릉․법흥왕릉․진흥왕릉․선덕여왕릉․효소왕릉․성덕왕릉․헌덕왕릉․흥덕왕릉 등 9기의 왕릉과 김유신묘 등 모두 10기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다. 따라서 미추왕릉에 대한 전승은 『삼국유사』 권1 기이1 미추왕 죽엽군조 이후 조선전기를 거쳐 오늘날까지 변함없이 전승되고 있는 것이다.
경주 관광안내도
경주시
[경주읍성&대릉원&첨성대&동궁과 월지&
국립경주박물관&월정교]
지도
경주 [계림&교촌마을&월정교&국립경주박물관] 지도
[경주 노동리고분군(봉황대)&대릉원] 지도
경주 금장대 위치도
경주 서출지 위치도
경주 감은사지동서삼층석탑 위치도
경주 보문호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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