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가 살던 곳이 예리입니다.
저의집 집위에 산동산을 많이 올라다녔는데
그곳에 저 비문이 있는것을 본 것 같습니다.
지금 기상대있는 곳에서 산 줄기를 타고내려오다 보면 예리 동골마을 앞에서 끝납니다.
그 산줄기 끝무렵에 묘가 두군대 형성되어 있는데 그곳에 저 비문이 있는것으로 기억합니다.
그곳은 예리 조씨집안의 산소입니다.
흑산면장.수협장을 하셨던 조정관씨.흑산철공소하신 조순천씨.지금자제로는 조길호가 아들입니다.
예리 조흥봉. 그런분들이 그 산소의 후손들이 되겠습니다.
저가 젊어서 어느날 풍수학에 흥미를 느끼던 시절이 있었을적
묘역을 돌아본적이 있습니다. 흑산도의 명당이라 꼽히는 베랑기미 김씨집안묘 라든지
지금 말하신 예리 조씨집안 묘소.등등
그 당시 저 조씨집안 묘소를 만들게 된 동기를 들은 적이 있는데
그러니까 흑산면장을 하셨던 조정관씨 할머님이 저 묘소아래 밭에서 김을 메는데
태풍으로 인해 중국에서 우리나라 육지로 무역을 하던배가 예리 항구에 피난해 있는동안
그 분들이 그 산에 올라와서 그 산줄기를 올라갔다 내려갔다 하더니 계란같은 동그란 돌맹이로
이리놓고 저리놓고 하며 자기들끼리 누워보기도하며 뭐라고 서로 지꺼리기에 중국사람은 참별나다고 생각....
밭에서 일을 끝내고 집에와서 밤에 자기 영감님에게 중국사람들의 얘기를 하였는데 그 영감님이
그 밤중에 어디냐며 간솔나무에 불을붙여 그 산에 올라와 보고 그 자리에 조씨 선산묘를 쓰게 된것이라고 합니다.
사실 그곳에 묘를 쓰고 조씨집안이 상당히 번영했었던 것은 사실인데 나중에 좀 시들어지는 일이있는데
그것은 예전에는 예리 우체국길로 산등선을넘어 대목으로 넘어가는 산길 정상에 비문이 또있습니다.
그 비문은 1960년대말인가 70년초인가 흑산도 조기잡이왔다가 돌풍으로 몇척의 배가 침몰하여 많은 사람들이
죽었는데 그 당시 삼천포에서 온 분들이 많아 삼천포어선협회에서 그곳에 비문을 세우게 해달라고 수협장에게
햇는데 그 당시 수협장이 조정관씨로 어쩔수없이 자기조씨 산인 그곳에 비문을 세우게 된것입니다.
풍수학에선 그곳에 비문을 세운것을 두고 상당히 비관적으로 얘기했습니다.
날개에 무게를 달았느니 날지못할것이라고...등등..
어떻든지 그 산은 조씨집안 산입니다.
지금 푸르미님이 찾고자하는 백암동은 우체국에서 죽항리로 넘어가는 산길 뒷대목 앞까지 조씨 산중입니다.
저가 흑산도를 16년만에 자녀와서 기억이 아련하지만. 우체국위 산정상에 예전에 높은 통신탑이 있었습니다.
그 산꼭대기 정상에서 줄기를 따라 조금만 내여오면 묘가 나오는데 그곳도 조씨집안 묘소이며 풍수학에서
말하는 명당중의 작은 명당자리입니다. 저는 그곳이 아닌가 싶고, 또한 대목(죽항리) 뒷대목 위 산쪽에도
묘소가있었는 것같은데 아뭇튼 조씨집안 산소로 예리 우체국뒷산에서 죽항리 뒷대목 앞까지 조씨집안 산이므로
그곳이 찾고자하는 곳일 가능성이 크다고 저는 봅니다. 그산길 비문 주위가 하얀바위로 넓게 덮어져 있어서 하얀바위(백암)
이라면 그곳일거라고 생각합니다.
저희들이 국민하교 중학교 다닐때 지금처럼 해안도로가 없고 그 산길로 다녔는데 그 지금 비문주위가 하얀바위로
덮어있어서 꼭 곳에 앉아 쉬었던 장소입니다.
혹 도움이 될지몰라 기억나는 대로 적어봅니다.
또한 추가로 광소 선배님 해설에 울목이 나오는데 지금 죽항리에서 진리로넘어가는 곳에 조씨 선산이 있고 그곳에
조씨들 묘소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조씨선산에서 아래쪽에 한전 발전소가 있는데 그곳을 예전에 물음목이라 불렀습니다.
이광소 선배님의 해설에 장소가 비슷하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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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 흑산도 갈지 모르지만 고향을 위해 고생하는 푸르미하구 한잔도 해야하는데....
서울대 잔디밭에서 홍어회에 한 잔 한지도 한 8년이 넘은 것같은데....
항상 고향을 마음속에 넣고 살았는데 형의 사고로 이젠 차츰 가슴속에서 멀어져가는 것같애
어짜피 집안묘소 이전 문제도있고 하여 흑산도 가게되면 한번 만나자. 푸르미 그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