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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모내기노래- 충성, 효도를 주 내용으로 하며 교환창. 선후창이 있다.
뜻 모르고 듣던 농요를 오랜만에 다시 들으며 모내기 하는 모습을 보니 어릴 적 시골생각이 난다. 강원도가 고향인 나는 농사짓는 시골집에서 태어났다. 우리 집에서 10여년 머슴살이하던 만기아제(이분을 가족처럼 불렀다)를 비롯하여, 동네 어른들이 힘든 노동을 하면서 신세타령을 하는 듯한 구성진 노래는 이제는 어디서도 들을 수 없다.
특히 논밭을 가는 농부들이 일소를 몰며 하던 농요는 노동을 멋으로 승화시키는 조상들의 지혜였던 것 같다. 먼 산에 진달래가 피고 어디선가 뻐꾸기가 울기시작하면, 얼음 녹은 논둑에서 개구리소리가 요란해진다.
온천지에 파릇파릇 새싹이 돋아나고 농수로마다 눈 녹은 물이 찰랑찰랑 흐르면, 집집마다 겨우내 고이고이 간직했던 볍씨(양식이 부족하여 식량으로 쓰는 일도 있다)를 불려서 올챙이 노는 양지바른 논에다가 못자리를 붓는다. 하늘은 높고 농부들은 저마다 희망에 부풀어 가래질하며 겨우내 얼었다 녹은 농수로와 논둑을 다듬고 논밭을 간다.
종달새가 높이 날고, 밭둑에 복숭아꽃(경계 표시)이 수줍게 피어날 때 쯤, 부지런한 사람은 벌써 앞산에 갓 피어난 갈잎을 꺾어 논에 깔고, 밭에는 두엄(거름)을 내며 분주해 지기 시작한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으면 집집마다 어울려서 모내기를 한다.
모내기철이면 의례히 학교를 빼먹고 동생을 보는 아이, 저만한 젖먹이 동생을 업은 아이, 간신히 걸음마하는 아이까지 온 동네 조무래기들이 다모여서 아빠엄마 모심는 뙤약볕아래 논둑에 앉아 모 밥함지 올 때를 눈이 빠지게 기다렸다.
어떤 때는 모심는 일꾼보다 아이들이 더 많을 때도 있었다. 먹을 것이 부족했던 시절이라 옥잠화 잎에 싸인 곰삭은 꽁치 한도막이 곁들인, 팥이 섞인 수북한 모 밥 한 두가리, 얼마나 고대 했던가? 저마다 배터지게 먹을 수 있었던 모심는 날, 아이들에게는 손곱아 기다려지는 날이었다.
정말로 모내기는 농사철의 중요행사중의 하나였다. 모심기철이면 누구나 바빴다. 어른들은 2주 가량 되는 모내기철이면 새벽부터 어둑어둑 할 때까지 눈코 뜰 사이 없이 바빴다.
이때 파종을 못하면 제대로 수확을 할 수 없으므로, 농부들은 물론이고 일소들도 너무 고단하여 밤이면 앓는 소리를 내고 입맛이 없어 여물도 잘 안 먹었다. 농요는 주로 모판에서 모를 찔 때 많이 들을 수 있었다. 논에 엎드리면 피가 얼굴로 몰려 얼굴이 붓고 허리는 끊어질 듯 아프다.
빨리 모를 쪄야(뽑아야) 일꾼들을 놀리지 않고, 모를 찐 자리도 모를 심어야하기에 그날 모내기 논 주인은 두루두루 바쁘다. 모를 찌는 일손을 재촉하려면 빠른 농요를 불렀다. 또 못줄을 빨리 넘길 때도 노래를 빨리했다.
사람들은 못줄 넘어가는 속도에 맞추어 모를 심어야 하므로 손놀림이 빠른 사람은 틈틈이 허리를 펴고 쉬지만 느린 사람은 허리한번 펼 수 없이 쉴 참을 기다려야 했다. 너무 바쁘니 다리에 거머리가 붙어 피가 흐르는 줄도 모른다, 거머리가 있는 논에는 여성용 스타킹(구멍 난)이 제일이다.
이런 고통을 농촌사람이면 누구나 거의 보름이상 견디어야 한다. 결석하는 아이가 너무 많은 농촌에선 농번기 방학을 할 때도 있었다. 모만 심으면 반농사는 지었다고 했다. 그러나 이제는 모내기는 이양기가 대신하므로 엎드려 모심는 사람은 보기 드물다.
생장기가 120일-150일 내외의 열대성 식물인 벼농사의 모내기는 위도에 따라 다소 차이는 있지만 중부지역(경기, 강원)은 5월말에서부터 6월 상순까지 약 2주간에, 남부지역(영남, 호남)지역은 그보다도 약 2주정도 늦게 파종하고 수확은 반대로 남부지역이 빠르다.
중국의 영향으로 음력을 쓰던 조상들은 농사를 짓기 위해 24절기라는 중간매체를 만들어 양력을 어림잡았다. 우리나라 기후는 벼농사에 적합하게 4-5월에 비가 좀 오고 7-8월에 연간 강수량의 절반이 내리는데, 비가 제때 오지 않으면 물이 부족해서 밤마다 밤잠을 설치며 논둑의 물고를 지키게 하여 고단한 농민들을 더욱 힘들게 하는 때가 많았다.
오죽하면 아전인수(我田引水)라는 말이 생겼겠는가? 예전에는 천수답이 많아 모내기를 하고 싶어도 비가 안와서 하늘만 처다 보며, 누렇게 떠(변해)가는 모판 앞에 하염없이 앉아 “하지(6월21일)전에는 심어야 먹는(수확하는)데,,,” 하고 걱정만 하시던 동네 어른들,,,,, 이제는 어디서 또 무슨 걱정을 하실까?
2.도리깨소리 - 빠른 리듬에 맞추어 힘차게 빠르게 서로 독려, 조정하는 노래다.
도리깨는 주로 밭농사에서 수확된 작물의 타작에 사용된다. 초여름에 시작되는 보리와 밀, 곧이어 황금빛의 조, 가을 들어서면 콩 과 팥이, 그리고 수수와 장목이 그 뒤를 잇는다.
도리깨질은 탈곡할 곡식을 반복해서 두드려야 하므로, 힘이 좀 드는 일이다. 두 사람이 마주서서 (시선은 곡식을 봄) 리듬을 타면서 번갈아 두드린다. 도리깨질할 때 생기는 소리만으로 리듬을 타기도 하지만, 한사람이 짧고 빠른 한 소절을 선창하면(더러는 욕도 한다) 뒷사람은 복창 하거나 후렴을 하는 식으로 서로를 격려하고, 두드릴 곳을 지정하고 간격을 조정한다.
보리는 긴 겨울을 지나서 초여름에 탈곡을 하므로, 지난해 곡식이 다 떨어진 상태에서 굶주림을 채워주는 첫 번째 곡식이다. 가난한 사람들은 이때 쯤 되면 굶주려서 얼굴이 붓고 심하면 굶어 죽기도 했다.
그래서 보리 고개라는 말이 나왔지만 이제는 격세지감, 실감이 나지 않고 거의 사라진 어휘가 되었다. 밀과 보리는 2년생 식물로 생명력이 강하여 겨울에도 얼어 죽지 않고 지난다.
호남지방에서는 겨울에 보리 싹을 잘라서 국을 끓여 먹기도 하고. 좀 더 자라면 밀, 보리 대궁으로 피리도 만들며, 밀짚으로 지붕을 하면 볏짚 보다 오래간다. 보리가 익어갈 쯤엔 보리밭에 끼어있는 밀 이삭을 찾아 불에 구어 먹고는 숯 검둥이가 된 얼굴을 서로 처다 보고 놀리는 재미도 있었다.
과자가 귀하던 시절이라 통밀을 한입 물고 잘 씹어 껌을 만들기도 했다. 어쨌든 보리를 타작 할 때쯤이면 이젠 살았다는 희망과 함께 양식을 빌릴 때 설움 주던, 얄미운 누군가를 상상하며 도리깨로 후려친다고 한다.
타작을 마치고 나면 보릿겨가 먼지와 함께 땀 흘린 옷 속에 들어가 얼마나 껄끄러운지, 하지만 배고픈 시절이라 그런 것쯤은 아랑곳 하지 않았다.
3.삼 삼기 노래 - 한겨울 긴긴밤에 호롱불 밑에서 여성들이 부르며, 느리고 구성지다.
요즘엔 대마초로 더 널리 알려진 삼나무는 열대성 1년생 식물로 줄기가 사각지고 잎은 인삼 잎 (사람손바닥)처럼 갈라졌으며, 사람 키보다 더 크게 자란다.
삼나무는 줄기만을 사용하게 되므로 잎은 여름철에 모깃불을 피우고, 담배 떨어진 일꾼들은 담배에 섞어 피우기도 하였으니 이것이 대마초의 시초일 게다.
가을이 되기 전에 베어서 말렸다가 물에 삶아 껍질을 벗기면 긴 끈처럼 되는데 이것을 서리서리 타래를 만들어서 보관했다가 (머리숱이 많은 사람을 삼단 같은 머리라고 했다) 한겨울이 되면 이것을 물에 불려서 되도록 가늘게 (가늘수록 고운 베를 짤 수 있다)
갈기갈기 찢어서 양끝을 입술로 침을 발라가며 끝을 뾰족하게 하여 아녀자들 넓적다리에 올려놓고 맞붙게 하여 손바닥으로 비비면 서로 이어져서 긴 실을 만들 수 있는데, 이 작업을 삼삼기라고 한다.
이것은 섬세한 작업이므로 부녀자들의 몫이었다. 주로 농한기인 겨울에, 가물거리는 호롱불 밑에서 이루어진다. 긴긴 겨울밤에 소복소복 눈이 쌓이는 밤이면 아낙네들은 밤을 밝혀 정해진 할당량을 채워야 잠을 잘 수 있었다.
멀리 떠나간 서방님을 그리며, 혹은 과부가 된 젊은 아낙들은 그리움이나 신세타령하면서 밤을 지새웠을 것이다. 이때 부르는 노래가 삼 삼기 노래인데, 우리조상 들의 고된 삶이 엿보이는 대목이다.
삼삼기가 끝나면 바로 삼베 짜기로 이어진다. 더욱이, 우리 집은 고조부모님이 양식을 아끼려고 빈 솥에 불을 때며, 삼베로 살림을 일으켜서 주변에서 제일가는 부자가 되었다니 얼마나 힘들었을까? 숙연해진다.
4.논(김)매기노래 - 남정네들 들판에서 피나 잡초를 제거하면서 부르는 노래다.
힘들게 모내기를 마치고 나서 한 보름쯤 지나면 모살이가 끝나서 논이 제법연록 색으로 물결치고, 또다시 보름쯤 지나면 이제부터는 김매기가 시작된다.
논김매기는 논바닥에 있는 수생식물, 즉 잡초 와 벼의 원조격인 피를 제거하는 것인데( 논김매기가 끝나야 논에 거름을 주게 된다.) 농부들이 논에 엎드려서 네발로 기어가면서 손가락을 갈퀴삼아 논바닥을 후벼 파서 잡초를 뽑아 깊이 묻는다.
두벌김을 맬 때쯤이면 벼는 자라서 눈을 찌르고 거친 벼 잎사귀는 얼굴과 팔뚝을 스쳐 쓰라리게 하고, 손톱은 닳아서 손끝마다 피가 흐른다. 한여름의 태양아래서 푹푹 찌는 논배미에 머리를 처박고 하루 종일 기어 다니는 이작업도 어렵기는 모내기에 버금간다.
다만 모내기와 좀 다른 것은 사람들이 일하면서 부근에 흙탕물이 생겨서 꾀를 부려도 금방은 알 수가 없다. 시간이 지나면 더 알 수없는 데 이것은 여럿이 공동으로 작업을 했기 때문이다.
(이런 논매기는 세 차례나 반복된다.) 제법 욱어진 나무 그늘에 쉬기도 하고, 참참이 농주도 한잔씩 하면서 협동으로 이루어지는 이 작업이야 말로 제법 여유도 있고 남정네들의 구성진 목소리가 들판에 퍼지는, 농요가 가장 잘 어울리는 작업 일게다.
그러나 이제는 제초제로 대신하지만, 더러는 오리를 키워 잡초를 제거하는 농가(유기농)에서는 오리소리가 농요를 대신하는 세상이 되었다.
5.물레노래- 고달픈 몸과 마음, 배고픔, 그리움 ,물레소리가 합쳐 서서 만들어진 가락
초등학교 시절 수업시간에, 고려 말엽에 문익점 이라는 분이 중국에서 목화씨를 붓 뚜껑에 숨겨가지고 들여왔다는 대목을 듣고 참으로 황당하였다.
그렇다면 그때까지 한겨울에도 우리 조상들은 삼베옷 만 입고 벌벌 떨며 살았다는 얘기가 아닌가?
이 대목을 배울 때쯤에 우리 동네에도 목화밭이 꽤 있었다. 어린 나로서는 열매가 익으면서 그 속에서 새 한얀 솜뭉치가 나오는 것이 그렇게 신기할 수 없었다. 게다가 노란 목화 꽃이 지고 열매가 익기시작하면 이 또한 달콤한 먹을 거리였다.
목화열매를 따먹다 혼나기도 했지만 먹을 것이 없던 시절에 먹던 달콤한 목화 열매 맛은 50년이 지난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어쨌든 우리조상들은 문익점 덕택에 목화에서 솜을 따서 솜바지저고리를 만들어 입고 따뜻하게 겨울을 날수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분 후손 중에 문례라는 분이 목화에서 실을 뽑는 기계를 만들었는데 이것이 문래라고 한단다. 갓 시집온 어린새댁이 한겨울(농한기)에 가물거리는 호롱불 밑에서 혼자서 외롭게 솜을 펴서 물레로 실을 뽑노라면 배도 고프고, 허리도 아프고, 어머니가 계신 친정집 생각이 절로 났을 것이다.
또 물레는 나무로 만든 회전하는 기계이므로 돌아갈 때 “쌔액” “쌔액” 하는 소리를 낸다. 고달픈 몸과 마음, 배고픔, 그리움, 그리고 기계소리가 합쳐져서 나오는 가락, 이것이 물레노래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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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농요에 대해 자상하게도 잘 기록해 두셨네요.
아마 인터넷 검색하면 학습자료로도 잘 쓰일 것같습니다.
오라비님 아무래두 옛 우리 고등학교 역사샘같어유
근데 나는 역사는 잘 몰러유. 옛날엔 수학만 잘알았는데
이제는 수학두 잘 모르고, 이젠 그저 멍청하게 산답니다.
@오라비 에구 기술사님이 그케 말하시면 누가 믿나유.
요즘은 또 다른 거 공부하시는 중 아닐까 몰러유
@스칼릿 감사합니다. 말씀이라도 그렇게 해주시니.. 사실요즘은
업무가 바빠서 다른공부는 더 못하구 영어 중국어 일본어등
복습만 해도 숨이 가쁩니다. 숫한단어를 새로 찾아야 하는데
게을러서 대충 짐작으로 문서를 읽는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