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걸 의심하는 판사의 직업병
엄상익(변호사) 2024-11-12, 05:49
"아내나 부모의 말도 증거가 있나 살피고 믿지 않을 때가 있어요."
<삶이란 다 그런 게 아닐까>
화려한 무대 위에서 춤과 노래로 수많은 사람들을 흥분시키는 스타를 보면 다른 세계의 사람 같은 느낌을 받는다.
또 근엄한 법정에서 검은 법복을 입고 점잖게 앉아 있는 판사를 보면 보통 사람같이 보이지 않는다. 사람들은 그런 직업을 우러러보고 부러워한다. 변호사를 하다 보면 더러 화려한 무대의 이면을 들여다보기도 한다. 무대의 이면은 의외로 못이 튀어나온 거친 각목이나 페인트칠을 한 베니어판 같은 초라한 모습이었다. 전혀 환상적이 아니었다.
인기있는 젊은 미남 가수가 자신의 괴로움을 솔직하게 털어놓은 적이 있다. 대충의 내용은 이랬다.
“한번 출연하는 데 억대의 돈을 받는 대신 피를 말려요. 소속한 기획사에서는 저한테 투자한 비용을 뽑기 위해 스케줄을 엄청 빡빡하게 잡아요. 교통체증에 걸리면 방송에 늦지 않으려고 퀵서비스 오토바이를 타기도 하고 병원 앰뷸런스를 이용하기도 하죠. 그런 걸 타고 바로 방송국 안으로 들어갈 수 있나요? 멀리서 내려서 옷과 분장도구를 들고 정신없이 뛰어가야 해요. 제가 늦잠 잔 것도 아니고 일부러 늦게 간 것도 아닌데 사람들은 내가 인기가 올라 건방져졌다고 욕하기도 하더라구요. 그렇게 바삐 가도 삼사 분 노래하기 위해 그때부터 열 시간을 기다린 적도 많아요.
이 방송 저 방송 프로에 출연하려면 아예 차에서 쪽잠을 자고 밥도 굶은 적이 많아요. 남들은 제가 엄청난 개런티를 받는 걸로 아는데 돈구경 못한 적도 많아요. 움직이려면 차에 기름도 필요하고 밥도 사먹어야 하는데 소속사에서 받은 방송국 출연료를 저에게 주지 않는 거예요. 그 돈은 따로 거마비로 썼다면서요. 방송국에서 공연이 끝나고 밤이 되면 나이트클럽을 뛰어야 했어요. 나이트클럽마다 삼십 회 공연계약을 맺고 여러 군데를 뛰면 정말 그건 사람이 할 일이 아니었어요. 한번은 배가 아파서 입원을 했었는데 그때가 가장 행복했어요. 병원에서 아무것도 먹지 못하고 죽만 먹고 있는데 이번에는 나보고 음식 방송을 하라는 거예요. 이게 잘나간다는 가수의 현실이예요.”
나는 그의 노예계약을 풀어주기 위해 소송을 했었다. 겉으로 화려해 보일수록 이면의 그림자가 짙었다. 그러면 법정이라는 무대에 서는 판사는 어떨까. 막강한 권한을 가지고 존경만 받는 것일까. 한 판사는 내게 이런 말을 했었다.
“법정은 거짓말 대회장이예요. 진실과 허위가 싸우는 게 아니라 큰 거짓말과 작은 거짓말들이 부딪치는 공간이죠. 민사사건에서도 서로가 편을 갈라 증인까지 입만 열면 거짓말이예요. 나는 아예 증인의 말은 믿지 않아요. 형사사건도 검사는 유죄라고 강변하고 변호사는 의뢰인의 말만 믿고 그게 사실이든 아니든 그냥 무죄로 밀고 나가는 거예요. 진실을 아는 사람은 판사가 아니라 당사자인데 왜 판사에게 책임을 전가하는지 모르겠어요.
어떤 때는 판사가 하는 역할이 세상 사람들이 토하거나 배설한 물건을 치우는 쓰레기 청소부 같다는 느낌이 들기도 해요. 판사를 하다 보니까 병에 걸린 것 같을 때가 있어요. 마음속에 저울을 달고 살면서 모든 걸 의심하는 겁니다. 대인관계에서 만나는 모두를 의심하는 병에 걸린 거죠. 심지어는 아내나 부모의 말도 증거가 있나 살피고 믿지 않을 때가 있어요. 직업병이죠.”
거짓말이 떠내려가는 시궁창에서 살면 걸리는 병이었다. 그런 직업병에 걸리지 않으려는 고교 동기가 있었다. 대학시절 최연소로 고시에 합격한 능력이 탁월한 친구였다. 그는 세상이 부러워하는 여러 직업을 전전했다. 그런 그의 경험담은 이랬다.
“김앤장이라는 최고의 로펌에 스카웃이 됐었지. 가보니까 하는 일이 외국 계약서를 검토하고 법률 의견을 내는 일이야. 색다른 경험이긴 했지만 뭔가 부족함이 느껴졌어. 그 무렵 특수부 검사로 이름이 신문에 나는 걸 보면 멋있어 보였어. 그래서 다음은 검사가 됐지. 그런데 해보니까 검사동일체라고 해서 위에서 방침이 정해지면 내 마음대로 일을 할 수 있는 게 아니더라구.
그래서 개인 법률사무소를 차리고 소송변호사가 됐어. 찾아오는 의뢰인들에게 법을 아무리 설명을 해도 믿지를 않는 거야. 그러면서 판검사와 잘 통하느냐 로비가 되느냐고 그것만 묻는 거야. 사회의식을 바꿔야 하겠더라구. 그래서 법조현실을 그대로 반영한 최초의 소설을 썼지. 그러니까 이번에는 내부고발자 취급을 하더라구. 그 다음은 농사를 지었지. 땅 파고 채소를 가꾸는 게 내게 맞는 것 같더라구. 그러다가 의문이 들었어. 도대체 나의 정체성이 뭔지 말이야. 인생이란 죽을 때까지 그걸 찾아가는 과정인 것 같아.”
성공했다는 사람들의 인생을 멀리서 보면 아름다운 숲 같다. 그러나 가까이 다가가 그 숲 안으로 들어가면 어느새 나는 평범한 나무들 사이에 가만히 서 있다. 삶이란 그런 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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