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비밀교시 4호 -
단풍이 물들어 관악의 만추가 처연하고 아름답다. 봄처녀 제오신 신록이 초여름 산들바람으로 쑥쑥 자라 칠팔월 삼복더위까지 꿀꺽 삼키더니만 울창해진 그 기개 열매로 떨어뜨리고 가벼워진 삶의 무게를 그대로 내려놓기가 아쉽기라도 한 듯 막바지 절창의 모습으로 산 굽이굽이마다 불타오르고 있다. 이제 이 절정을 다하면 산천은 나뭇잎과 함께 그저 방해받지 않고 흰 눈이 내리고 또 내려 푹푹 쌓이는 평화롭고 온화한 세상을 맞이할 것이다.
나도 그렇게 살고 싶다. 돌이켜보건대 나의 생은 한 번도 대중의 앞에 나서 여기 나를 보아라고 외쳐 본 적이 없다. 육신이 풍요로운 집에서 태어났고 나의 영혼이 거기에 접함으로써 인간의 탈을 쓰게 되었지만, 일제 36년을 100년은 족히 갈 거라고 오산한 조부며 일족들이 조선 땅에서 부를 축적하며 친일을 하였다는 멍애가 관악캠퍼스에서 훈장이나 하면서 은둔의 미학을 즐기는데 족하라고 팔꿈치를 슬쩍 건드리는 '넛지'를 하였기 때문이었으리라.
선택지를 없애버린 그 넛지로 인하여 그림자처럼 조용히 숨 쉬며 살아갈 수밖에 없었지만 대신 거기에 상응하는 복수의 칼을 갈고 닦는데 결코 소흘하지 않았다. 그런 점에서 '다원적 무지'는 나의 보검이었다. 다행히 무지한 대중은 이 용어 자체를 잘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써먹기가 딱 맞았다.
'다원적 무지'라는 용어는 리처드 탈러가 '넛지 파이널 에디션' 이라는 책에서 인용하였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사회적 쟁점에 대하여 소수 의견을 다수 의견으로, 혹은 다수 의견을 소수 의견으로 잘못 인식하는 현상을 말하는 것이다. 사람들이 어떤 관행이나 전통을 따르는 이유는 그것을 좋아하거나 그것을 옹호할 가치가 있어서가 아니라 다른 사람들 대부분 그것을 좋아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많은 사회적 관행이 바로 이런 이유로 존립하는데, 이는 거꾸로 작은 충격이나 넛지 하나만으로도 관행을 없애버릴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저들이 우리를 종북좌파라고 멸칭하는데 그런 우리가 가장 싫어하는 사례가 있다. 구소련의 공산주의다. 볼셰비키로부터 시작된 구소련의 공산주의가 70여 년간 지속될 수 있었던 이유 중의 하나는 그 체제 아래 살던 사람들이 공산주의 체제를 경멸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몰랐다는 것이다. 자기 이외의 사람들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게 되면서 체제는 무너졌던 것이다.
엊그제 이재명이 실형을 선고받았다. 극우파 판사들이 우리가 그동안 철저히 이용해 왔던 '다원적 무지'를 민중이 깨닫게 되는 계기를 만들고 만 것이다. 재판은 계속되겠지만 과연 제2의 권순일이 나타날 수 있을지 의문이고 우리가 원하는 바대로 진보적 대중이 압도적이고 윤석열, 김건희의 탄핵은 시간문제라는 여론 조성을 과연 성공적으로 지속시킬 수 있을지 약간은 회의가 든다. 민중은 한 번 의심하면 믿지 않는 습성이 자라기 때문이다.
우리는 탄핵이 인용되지 않을 경우를 대비하여야 한다. 다행히 바이든과 가깝게 지냈던 윤석열은 트럼프에게는 심드렁하다. 이제 주한미군 주둔비를 클로즈업시켜야 한다. 국방부 장관도 트럼프 앵무새로 미군 철수에 있어 미국의 이익을 우선시하는 방송국 앵커 출신이 임명되었다. 호기다. 사실 트럼프는 박근혜와의 접촉에서 주한미군 주둔비 요구는 내심 NATO와 일본의 무임승차를 겨냥한 것이라며 한국은 최대 6조 원을 부담하더라도 본인이 지원할 방산무기 수출로 수십 배의 더 큰 경제적 이익을 볼 수 있다고 귀띔한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K방산 무기 수출은 트럼프 말대로 세계를 경악하게 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에도 다원적 무지의 개념을 써먹어야 한다. "앞으로 우리가 내게 될 분담금은 6조 원에 그치지 않는다. 트럼프는 취임하자마자 유지비까지 들먹이며 10조 원을 말할 것이다. 이것은 터키의 1년 국방예산 9조7천억을 상회하는 금액이다"라고 떠들게 해야 한다.
명태균과 김영선도 감옥에 갔으니, 무언가 더 윤석열과 김건희에 관련된 스토리를 '카더라'라도 좋으니 창출해 퍼뜨려야 한다. 이재명을 지켜야 우리가 산다. 그러나 만에 하나의 확률도 대비해야 한다. 조국은 끝났고, 조만간 원탁회의에서 이 문제를 다루어야겠다. 그러면 김경수? 김부겸? 이낙연? 아, 이재명의 뻔뻔함이 가장 빛을 발할 시점에···.
80대 중반을 넘어섰거늘 평안한 안식처를 염원하는 것은 아직 나의 꿈에 불과한가. 노란 은행잎이 한 잎 두 잎 바람도 없는 하늘에서 수직의 파문을 내이며 꽃처럼 살랑 떨어진다.
2024년 11월 17일
개딸들이여 더욱 분발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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