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4. 위만이 집권한 고조선을 무엇이라 부를까?
위만조선
《사기》 등에 전하는 내용을 따르면 조선왕 위만은 옛날 연나라 사람으로, 연왕 노관이 흉노로 망명할 때, 무리 천여 명을 모아 동쪽으로 도망하여 준왕의 신하가 되었다고 한다. 이후 차츰 세력을 확장하여 왕이 되었으며 국호를 그대로 ‘조선’으로 하였다.
위만의 망명
기원전 195년 유방이 건국한 한(漢)나라에는 피바람이 불었다. 유방의 친구이자 개국공신이었던 연왕 노관이 숙청 대상자가 되자, 한나라 영토 안의 제후국인 연(燕) 즉 지방의 하북성 일대에서 큰 동요가 일어났다.
연왕 노관은 살기 위해 흉노로 도망갔고, 그 틈을 이용해 위만이 고조선으로 망명했다. 그는 준왕에게 서쪽 변방에 거주하도록 해주면, 한나라에서 오는 망명자를 거두어 고조선의 안전을 지키는 울타리가 되겠다고 설득했다.
준왕은 그를 믿고 박사라는 직위와 함께 백리의 땅을 다스릴 권한을 주고 서쪽 변경을 지키게 했다. 위만은 한나라에서 고조선으로 오는 무리들이 모아 세력이 커지자, 준왕에게 지금 한나라가 쳐들어오니 궁궐에 들어가서 지키겠다고 속였다. 왕험성으로 간 위만은 준왕을 공격하여 왕위를 빼앗아 버렸다. 준왕은 가까운 신하들과 함께 남쪽 삼한(三韓) 땅으로 도망가야 했다.
연왕 노관이 한나라를 배신하고 흉노로 들어가자 만(滿)도 망명하였다. 무리 천여 인을 모아 북상투에 오랑캐의 복장을 하고서, 동쪽으로 도망하여 요새를 나와 패수를 건너 진나라의 옛 공지인 상하장에 살았다. 점차 진번과 조선의 만이 및 옛 연, 제의 망명자를 복속시켜 거느리고 왕이 되었으며, 왕험에 도읍을 정하였다.
- 《사기》 조선열전.
위만은 옛날 연나라 사람이라고도 하지만, 그의 모습은 북상투에 오랑캐의 복장 즉 고조선 사람의 모습이었다. 이 때문에 위만의 국적은 논란이 되었다. 그가 한족(漢族)의 나라인 옛 연나라 사람이었다면, 고조선은 한족에게 멸망당한 것이 된다.
그런데 그가 기원전 195년 당시에 존재했던 한나라 사람이 아닌 굳이 옛 연나라 출신이었다고 《사기》는 기록하고 있다. 그는 혼자 고조선에 온 것이 아니었다. 그는 자신이 거느리는 집단을 이끌고 온 부족장이었기에 준왕과도 만날 수 있었다. 따라서 그가 북상투에 오랑캐 복장을 했다는 표현은 단지 한 개인의 복장 변신이 아니다. 북상투는 진나라 병마용에서도 발견되는 것으로 반드시 고조선인의 머리모양만은 아니므로, 복장 변신이 그가 곧 고조선 출신은 아니라는 주장도 있었다.
하지만 위만 집단의 복장 변신이라는 측면에서 본다면, 위만 집단은 본래 고조선 사람들로, 연나라 진개가 고조선이 서부 영토를 빼앗았을 때에 연나라로 끌려간 사람들의 자손이었다가, 이때 옛 고향으로 귀환했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위만이 빠르게 권력을 쥘 수 있었던 것은, 그가 한나라에서 고조선으로 망명해온 자들을 대거 흡수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망명해온 자들은 본래 한족이 아닌 원래 고조선 출신이 더 많았다고 할 수 있다. 위만은 고조선의 왕이 된 이후에도 고조선의 풍습이나 제도 등을 바꾸지 않았고, 국호도 변경하지 않고 그냥 조선이라고 불렀다. 역사서술의 편의상 위만 이전의 임금이 다스리던 시기를 고조선, 그 이후를 위만조선이라고 부를 뿐이다. 고조선과 위만조선은 최고 권력자만 바뀐 것일 뿐, 근본적으로 달라진 것이 없다. 위만의 출신 국적에 상관없이 조선의 역사는 계속 지속된 것이다.
위만조선의 세력 확장
위만이 왕이 된 후, 그는 한나라와 협정을 맺어 전쟁을 피하고 안정적으로 나라를 발전시킬 토대를 마련한다. 협정 내용은 한나라의 동쪽 변방의 나라들이 한나라를 공격하는 것을 막아주는 대가로, 한나라의 재물을 얻는 것이다. 위만은 강대국 한나라의 재물을 얻는 실익과 함께, 주변의 소국들을 제압하며 사방 수천 리나 되는 영토를 키웠다.
위만의 손자 우거왕 때에 이르자, 고조선의 세력은 더욱 커졌다. 이 무렵 한나라는 흉노와의 잦은 전쟁으로 외국으로 탈출하는 자들도 많았는데, 우거왕은 이들을 적극 흡수했다. 또한 주변의 진번 등이 한나라와 직접 교역하는 것을 막고, 중계무역의 이익을 크게 올렸다,
당시 고조선은 한나라에 5천 필 이상 선물할 수 있을 정도의 말과 태자가 1만의 군대를 거느릴 정도로 상당수의 기병을 포함한 수만 명의 군사를 갖고 있었다. 또한 튼튼한 왕검성을 비롯한 우수한 방어체제와, 재상, 대신, 장군을 비롯한 행정 조직을 잘 갖춘 발전된 국가였다. 동방 지역의 강대국으로 성장한 고조선은 한나라의 라이벌인 흉노와도 밀접한 관련을 맺으면서, 한나라를 견제하기도 했다.
한나라와의 전쟁
그러자 한나라도 고조선에 대항하다가 한나라에 항복해온 예족의 족장 남려를 크게 환영하고, 그곳에 기원전 128년에 창해군을 두며 조선을 견제했다. 그러나 불과 3년 만에 폐지될 만큼, 한나라의 고조선 견제는 쉽지 않았다. 한나라 무제는 흉노를 완전히 제압한 후인 기원전 109년 고조선에 사신을 보내 위협을 가해왔다. 그러나 우거왕이 한나라의 요구를 거절했다. 그런데 한나라 사신 섭하가 돌아가는 길에 고조선의 장군을 찔러 죽이고 도망갔다. 우거왕은 즉시 군사를 일으켜 한나라를 공격하여 섭하를 죽였고, 이를 계기로 한나라와 전쟁이 시작되었다.
1년간 계속된 전쟁에서 고조선군은 한나라 육군 5만, 수군 7천을 맞이하여 선봉부대를 물리치고, 적의 수군을 대파하는 등 전쟁 초반에는 계속 승리를 거두었다. 하지만 국력에서 월등한 한나라가 계속해서 왕검성을 포위하며 맹렬히 공격하자, 고조선의 대신들과 장군들 가운데 배신자가 생겨났다. 기원전 108년에 배신자들이 우거왕을 죽이고 항복을 했다. 대신 성기가 끝까지 왕검성에서 저항을 계속했지만, 그 마저 배신자들에 의해 죽으면서 고조선은 멸망했다.
위만조선의 멸망과 한사군 설치
한나라는 그 땅에 4군을 설치하고자 했으나, 실제로 설치되어 기능을 한 것은 낙랑군과 현도군뿐 이었다. 고조선의 유민들과 주변 여러 나라가 한나라의 침략에 대항하여 계속 싸운 탓에 현도군은 계속 서쪽으로 옮겨갔고, 임둔군과 진번군은 곧 폐지되었다. 다만 낙랑군만이 잦은 변화를 거치면서도 중국문물의 동방지역에 대한 수출 창구 역할을 하며 오래 존재할 수 있었다. 한나라의 문물과 제도, 문화의 전파는 동방사회에 신선한 자극이 되었다.
또한 고조선의 멸망은 만주와 한반도의 여러 작은 나라들에게 자립과 성장의 동기를 부여했다. 고조선 유민들이 신라를 비롯한 여러 나라에 퍼지면서 고조선의 앞선 국가적 경험이 여러 나라의 발전을 자극했다. 고조선의 멸망은 한국 고대사에 중요한 변곡점이라고 하겠다.
tip 중국의 한사군 설치 기록
기원전 108년 여름, 니계상 삼이 사람을 조선왕 우거를 죽이고 항복하여 왔으나, 왕험성은 함락되지 않았다. 죽은 우거의 대신 성기가 다시 한나라에 반대하여 군리들을 공격했다. …… 성기를 죽였다. 이로써 조선을 평정하고 사군을 설치하였다.
- 《사기》 조선열전
첫댓글 옛 고향으로 돌아온 것일 것이다라고 추측은 할 수 있겠지만 옳은 것이다라고 단정까지 하는 것은 과한 해석아닐까요?
또 임둔.진번군이 설치되지 않았다는 것은 잘못 해석한 것 아닙니까?
서기전 75 년에 임둔.진번을 낙랑.현토에 합쳤다고 하는데 어찌 설치되지 않았다고 단정할 수 있습니까?
위만에 대해서는 과한 해석이라고 생각되지는 않습니다. 임둔, 진번에 대해서는 다시 위 글을 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임둔 진번이 낙랑, 현도와 합쳐진 것은 기원전 82년 입니다. 임둔, 진번은 계획상의 군으로 이때 설치 계획이 무산된 것으로 본 것입니다.
위만은 1차 사료에 연나라 사람이라고 명확하게 나와있으니 이 기록이 우선입니다. 의혹은 제기할수있겠지만 근본적으로 이 기록을 뒤집어 엎자면 명확한 증거가 필요합니다. 물론 옛날 연나라 사람이라고 나와있으니 위만의 선조중 누군가가 고조선 사람일 가능성도 있을 테고 말씀 해주신 대로 돌아온 것일 가능성도 있기는 하겠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가능성이고 추측이 아닐까요? 이는 제 개인적인 관점이지만 저는 위만의 출자가 고조선이라는 국가의 정체성을 확정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국가 구성원 다수의 자아인식이고 더욱 중요한 것은 위만이 고조선에서 고조선의 왕으로 살았다는 사실이 아닐까요?
이 글에 대한 답글로 제가 적은 것이 있습니다만, 내용의 골자가 '故燕人'을 '옛날 연나라 사람'으로 풀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본문에 충분히 적었으므로 재론하지 않겠습니다. 위만의 개인적 출자가 (고)조선 국가의 정체성을 확정하지 않는다는 점은 저 역시 동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