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황 검사를 처음 알게 된 것은 지난해 가을이었다.
아침을 먹고 던전 탐험을 할 양으로 장비를 착용하고 있노라니 수정구 속에서 마스터가 부르셨다.
“오늘 네, 날 따라가 볼래?”
마스터는 차원의 문을 열고 공중부양 마법으로 나오시며 이렇게 물었다.
“어디요?”“저 지리산 지하던전에서 현자가 나와 운명 예측과 카운슬링(-_-;)을 해주는데 아주 재미나단다.”
“싫어요. 마스터나 가슈.”나는 단번에 거절하였다.
“왜, 싫긴?”
“난 던전 탐험할 참인데……”
“것도 좋긴 하지만……. 오늘은 특별히 한번 따라와 봐……. 무슨 운명 예측이나 카운슬링 받는 게 재미나단 말이 아니라, 그런 데서도 배울 게 있느니……. 더구나 거기 모여드는 인물들이란 그대로 "제국의 심벌"들이야.”
“제국의 심벌요?”나는 반쯤 웃는 얼굴로 이렇게 물은즉, 마스터도 따라 웃으며,“그렇지, 심벌이지.”하였다.
이리하여 "제국의 심벌"이란 말에 마음이 솔깃해진 나는 던전 탐험하려던 장비들을 끄르기 시작하였다.
파고다 공중 도시에서 뒷문으로 텔레포트 하면 수도의 중앙 지점치고는 의외로 번거롭지도 않은 넓은 거리가 두 갈래로 갈라져 있고, 바로 그 두 갈래로 갈라지는 길목에 "중앙 여관"이란 간판을 걸고 동남쪽으로 대문이 난 여관이 있고, 이 여관에 소란한 차마 소리와, 사람의 아우성과, 입김과 먼지와, 기계의 비명이 주야로 쉬지 않는 도시의 심장 속에 ― 디바인 랭크 획득 증명서와 , 네크로멘서 협회의 공인 자격증을 간판삼아 내걸고 있는 ‘현자"가 있다.
방안에는 많은 사람이 있었다. 피가 묻고 죽음의 기운이 충만한 옷을 입고, 눈에 핏발을 세우고, 볼에 살이 빠져 광대뼈들이 불거진 불우한 버서커, 테러리스트들이며 마법사, 성직자, 바운티 헌터, 바드, 상인, 암살자 들이 무수히 출입하고, 드워프와 하플링 들이 방구석에 뒹굴고 있었다.
나는 무슨 도둑 길드 속에나 들어온 것처럼 기분이 불쾌했다. 내가 파워워드 킬을 시전하며 마스터를 향해 얼른 다녀 나가자는 눈짓을 했을 때, 그러나 마스터는 나의 눈짓에 응한다느니보다는 파워워드 킬을 가볍게 씹으면서 나를 좌중에 소개를 시키셨다.
바로 그 때,“아, 이분이 김 선생 제자 되시는 분이구랴.”하고, 거무추레한 망토에 얼굴이 누르퉁퉁한, 나이 한 육십 가량 된 영감 하나가 방구석에서 타롯 카드를 뽑다 말고 얼굴을 돌리며 어눌한 음성으로 이렇게 물었다. 그는 하도 살아갈 지모(智謀)가 나지 않아 타롯 카드를 뽑아 보았노라 하면서, 반가운 듯이 마스터의 곁으로 다가앉았다. 그의 까닭 없이 벗겨진 이마 밑의 두 눈엔 불그스럼한 핏물 같은 것이 돌고 있었다. 내가 자리를 고치고 머리를 굽히려니까,“괘, 괜찮우, 거, 거 자리에 앉으우.”하고 손을 내저으며,“나 황일재(黃逸齋)우, 이 와, 완장 선생과는 참 마, 막역지간이우.”하는 것이었다.
좌중의 시선이 모두 나에게 집중된 듯하였다. 바로 그 때였다. 나와 바로 마주 앉은 디바인 랭크 획득, 네크로멘시 마스터의 현자는 그 손톱 자국과도 같이 생긴 조그마한 새빨간 눈으로 몇 번 나의 얼굴을 흘낏흘낏 보고 나더니,“애인과는 일찍 이별할 상이야.”불쑥 이렇게 외쳤다.
“가진 자격증도 많지 않고, 초년은 퍽 고독해야.”하고, 또 인당이 명료하고 미목이 수려하니 학문에 이름이 있으리라 하고, 준두와 관골이 방정해서 중정에 왕운이 있으리라 하고, 끝으로 비록 애인이 없더라도 여자들에게 인기가 많은 마스터가 계셔서 나의 연애 전선 사수에 큰 도움이 되라 하였다.
나는 어쩐지 쑥스럽고거북하여져서 얼굴을 붉히며 그만 자리를 일어나 버렸다. 내 뒤를 이어 마스터가 일어나시고, 마스터를 따라 황일재 황 검사가 밖으로 나왔다.
파고다 공중도시 뒤에서 황 검사는 때 묻은 헝겁 조각 같은 투구를 벗어 쥐고 그저 몇 번이나 절을 하고 나서 공원으로 들어가 버렸다.
“어디루 가우?”마스터가 물으신 즉,“나, 여기 공중도시에서 친구 좀 만나구…….”했다.
해는 오정에 가까웠다. 구름 한점 없이 갠 하늘엔 에픽 던전- 타워 오브 솔로-이 멀리 솟아 있었다. 안타까움에 내 몸은 봄날같이 피곤하였다.
2
나뭇잎이 다 지고 그 해 가을도 깊어졌을 때다. 마스터는 금광에 분주하시느라고 외처에 계시고 없는 어느 날 아침, 막 밥상을 받고 있으려니까, 문밖에서 "에헴" 연달아 헛기침 소리가 나더니,“일 오너라 ――.”하고 부르는 소리가 났다. 밥 숟가락을 놓고 문 밖으로 나가 보니, 어느 날 모험가 길드에서 타롯 카드를 뽑고 있던 그 황 검사였다. 이 날은 처음부터 그 "제국의 심벌"이란 생각을 머릿속에 가지지 않은 탓인지, 처음 보았을 때처럼 그렇게 불쾌하거나 우울하지도 않고, 그보다도 다시 보게 된 것이 나는 오히려 반갑기도 하였다.
“웬일로 이 치운 아침에 이렇게……”인사를 한즉,“괘, 괜찮우. 거 완장 어른 안 계슈?”하는 소리는 전날보다도 더 어눌하였다. 그 푸르죽죽하고 거무스레한 고약때 오른 체인메일 가장자리 밖으로 누런 가죽이 내다뵈는 것으로 보면, 전날보다 재킷 한 벌은 더 입은 모양인데도 그렇게 몹시 추운 기색이었다.
“네, 마스터는 마침 출타하셨어요.”한즉,
“어디 출타하신 곳 모루? 예서 얼마나 머, 멀리 나가셨슈?”“네.”
“언제쯤 도, 돌아오실 예, 예정……”“글쎄올시다, 아마 수일 후라야……”한즉, 갑자기 그는 실망한 듯이,“아아, 이.”하는 소리가 저 목구멍 속에서 육중한 신음과도 같이 들려 왔다.
“어쩐 일로 오셨다가……. 춘데 잠깐 들오시죠.”한즉, 그는 체인메일 옆에 찌르고 있던 손을 빼어 투구를 쥐려다 말고 한참 동안 무엇을 망설이며 내 눈치를 보곤 하더니, 투구를 잡으려던 손으로 콧물을 닦으며 왼편 손은 사뭇 체인메일 속에서 무엇을 더듬어 찾고 있었다.
“이거 대, 대, 댁에 잘 간수해 두.”하며 스크롤에 싼 것을 주는데, 받아서 보니 이는 흙에다 겻가루를 심은 것 같이 보였다.
“……?”내가 잠자코 의아한 낯빛으로 그를 쳐다보려니까, 그는 어느덧 오연(傲然)한 태도를 가지며 위엄 있는 음성으로,“거, 오크 똥 위에 트롤 똥 눈 겐데 아주 며, 며, 명약이유.”한다. 나는 그의 말뜻을 바로 이해할 수 없어 어리둥절해 있으려니까,“허어, 어떻게 귀중한 약인데 그랴!”하며, 그 물이 도는 두 눈에 독리를 띠고 나를 노려보았다. 내가 민망해서“대개 어떤 병에 쓰는 게죠?”하고 물은즉,“아, 거야 만병에 좋은걸, 뭐.”하고 나를 흘겨보고 나서,“거 어떻게 소중한 약이라구……. 필요할 때는 공, 공작가에서도 못 구해서들 쩔 쩔매는 겐데, 괘니…….”그는 목을 내두르며 무척 억울한 듯한 시늉을 하였다. 나는 왜 그가 이렇게 공연히 분개하고 억울해하는지를 알 수 없어, 한순간 내 자신을 좀 반성해 보고 있으려니까, 그도 실쭉해서 잠자코 있더니, 갑자기“괘애니 모르고들 그랴.”또 한 번 고함을 질렀다.
내가 막 아침 밥상을 받았다 두고 나간 것을 언짢게 생각하고 몇 번이나 힐끔힐끔 밖을 내다보시고는 하던 마스터님의 가디언이(메이드 복장이지만, 혼자서 드래곤 5마리도 잡는다...), 기다리다 못해
“얘, 무얼 밖에서 그러니?”하고, 어지간 하거든 손님을 모시고 안으로 들어오라는 듯이 "밖에서"란 말에 힘을 주어 주의를 시킨다. 바로 그 때였다.
“거, 아침밥 자시고 남앗거든 좀…….”하며, 입가에 비굴한 웃음을 띠고 고개질을 하는 양은 조금 전에 흙가루를 내놓고 호령할 때와는 딴판이었다.
나는 그를 방에 안내한 뒤, 나의 점심밥을 차려 내오게 하였더니, 그는 밥상을 받으며 진정 만족한 얼굴로,“이거 미안하게 됐소구랴.”하였다.
그는 밥을 한입에 삼킬 듯이 부리나케 퍼먹고 스튜 그릇을 긁고 하더니, 숟가락을 놓기가 바쁘게 곧 투구를 쥐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몇 번이나 절을 하곤 했으나, 아까 하던 약말은 아주 잊어버린 듯이 다시는 아무런 말도 없었다.
그 후, 사흘째 되던 날 아침에 또 황 검사가 찾아왔다. 이 번에는 그의 친구라면서, 그보다 키는 더 크고 흰 체인 메일은 입었으되 그에 지지않게 눈과 코와 입이 실룩거리는 위인이었다. 이 흰 체인메일의 친구는 어깨에 먼지투성이가 된 자그마한 마나 입자포를 메고 나왓다.
황 검사는“이거, 댁에 사 두.”하고 거의 명령하듯이 말했다.
“글세올시다, 별루…….”“아아이, 값이 아주 염하니 염려 말구 사 두.”“그래두 별루 소용이 없는걸…….”“아아이, 값이 아주 염하대두 그래.”“…….”
“자, 오십 골드 인 주.”황 검사는 그 누르퉁퉁하고 때가 묻은 손바닥을 내 앞에 펴 보였다.
“글쎄, 온, 소용이…….”“그럼 제에길, 이십 골드만 내구 맡아 두.”“…….”
“것두 싫우?”“…….”
“그럼 꼭 십 골드만 빌려 주.”황 검사는 어느덧 콧구멍을 벌름거리며 애걸을 하였다.
“나 그 날, 댁에서 그렇게 포식한 이래 여태 굶었수다. 여북 시장해서 이 친구를 찾아갔겠수? 아 그랬더니, 이 친구도 사정이 딱했던지 끝장을 보는 이 마나 입자포를 내주는구랴.”그는 손으로 콧물을 닦아 가며 한참 신이 나서 떠들어 대었다. 그의 친구란 사람은 연방 입을 실룩거리며 외면을 하고 서 있었다.
한 오 분 뒤, 내가 안에 들어가 돈 이십 골드를 주선해 나와 그들에게 주었을 때, 그들 두 사람은 무수히 절을 하고 나서 마나 입자포를 도로 메고 가 버렸다.
3
길바닥이 얼어붙고 먼산에 눈이 치고 그 해는 이른 겨울부터 몹시 추웠다. 그 동안 마스터는 몇 번이나 집에 다녀가시고 모험가 길드 출입도 더러 있는 듯하였다. 그러나 황 검사의 얼굴은 그 뒤로 보이지 않았다. 다만, 마스터를 통해서 그의 고향이 다른 차원 어디란 것과, 그의 종족이 강력한 드래곤이란 것과, 그의 조상에는 소드 마스터 따위가 많이 났다는 것과, 그 자신도 현재 검사 구실을 한다는 것과, 그의 머릿속은 자기 가벌에 대한 자존심으로 가득 차 있다는 것들이었다.
그런데 그 가운데 한 가지 우스운 것은 그가 곧장 검사 노릇을 한다는 것이다. 그것도 처음 관모험가 길드에서 어느 하플링이 농담삼아 그에게 기초 검술과 검 손질법를 외게 하여 합격을 주고 검사라 부르기 시작한 것인데, 그 후로 만나는 사람마다 반조롱으로 "황 검사", "황 검사" 부르게 되니, 그러나 "황 검사" 자신은 조금도 어색해하지 않고 오히려 그럴싸하게 여겨, 이즘 와서는 아주 뽐내고 검사 행세를 한다는 것이다.
어느 몹시 추운 날이었다. 마나 집열 장치를 이용하여 방구석에 유황불을 피우고 나는 온종일 대 악마전용 기가 블래스터의 손질을 하고 있었다.. 낮이 짐짓했을 때다. 밖에서“일 오너라 ――.”하는 소리가 마치 "사람 살리우"하는 소리같이 바람결에 싸여 들어왔다. 나가 보니 황 검사가 연방 손으로 콧물을 닦고 서 있는 것이다. 나는 대체 얼어 죽지나 않았나 하고 궁금해한던 차라, 이렇게 다시 보게 된 것이 진정 반가웠다.
나는 곧 그를 나의 방에 안내한 뒤,“그런데 그 동안 어떻게 지냈어요?”한즉,
“거야 친구 집에서 지냈지요, 뭐. 흐흐…….”하며, 재미난 듯이 웃었다.
“아 참, 완장 선생은 여태 안 왔시우?” / “수차 다녀가셨지요.”“아, 그렁 거루 난 여태 한 번두 못 뵈었으니 이거 죄송해서, 흐흐…….”그는 유황불을 안고 앉아 또 히히거리고 웃었다.
화이트 드래곤 해츨링을 잡아다 유황불에 구워서 그에게 대접을 하고, 나는 아까 하다 둔 기가 블래스터의 손질을 마저 하려고 동력부르 해체하고 있는데, 그는 바닥에 떨어진 것, 터진 것도 가리지 않고 한참 부지런히 집어먹더니, 그 동안 흥이 났는지 아주 목청을 뽑아서,“관관저령은 재하지주(在河之洲)로다. 요조숙녀는 군자호구로다.”하는 대문을 외곤 하였다.
나는 그 동안 기가 블래스터를 손질 하느라고 모른 체하고 있으니까,“아, 이모탈의 반열에 올라간 영웅도 실수가 있단 말야!”그는 나를 바라보며 이렇게 소리를 질렀다.
“아, 공자님께서 시전에 음군을 두셨거던!”그는 무슨 큰 문제나 발견한 듯이 나 있는 쪽을 옆눈으로 흘겨보며 마구 마나를 뽑아 이렇게 외쳤다.
그래도 내가 모른 체하고 있으려니까 그는 마나 집열 장치 곁에서 일어서더니, 체인 메일 자락을 뒤로 젖히고 레더 아머를 위로 쳐들고 손을 넣어 무엇을 꺼내는 시늉을 하였다. 나는 속으로 옷의 환마충를 잡아 내어 유황불에 넣으려는 겐가 하고 있는데, 그는 또 한 번 나 있는 쪽을 흘겨보고 나서 배를 두르고 있던 때묻은 마법의 주머니 하나를 꺼내었다. 마법의 주머니 속에는 네 귀가 다 이지러지고 종이 빛까지 우중충하게 묵은 모필 사책 한 권과, 백지로 싸서 노끈으로 친친 감아 맨 솔 잎 한 줌과, 휴지 조각 몇 장이 나왔다.
“거, 무슨 책이유?”내가 이렇게 물은즉,“아, 무공 비급이지 그랴.”하고 된소리를 질렀다. 과연 그 이지러진 네 귀마다 넓적넓적한 괘가 그려져 있는 것으로 보아 무공 비급임에 틀림이 없는 모양이었다. 그런데 무공 비급을 왜 하필 마법의 주머니에 넣어서 두르고 다니느냐고 물은즉,“아, 공자님께서도 역은 삼천독을 하셨다는데 그랴.”하고, 된소리를 질러 놓고 나서, 다시 조용히 음성을 낮추어,“아, 여북해 지략의 조종이오? 조화의 근본 아니오?”하였다.
나는 처음 모험가 길드에서 그를 보았을 때부터 “하도 지모가 나지 않아 타롯 카드를 뽑아 보았노라,”한 것을 들은 일이 있어서, 그가 평소 얼마나 이 "지략"과 "조화"를 부려 보고 싶어하는 위인인가를 짐작은 할 수 있었지만, 이와 같이 언제나 몸에 지닌 솔잎 한 줌과 네 귀 모지라진 무공 비급 속에서 우러난 음양 오행의 지모 조화가 겨우 "오크 똥 위에 트롤 똥 눈" 흙가루 약과, 친구의 마나 입자포를 들리고 다니는 것쯤인가 하고 생각할 때, 나 자신도 모르게 한숨이 새어 나왔다.
저녁때가 되어 그는 마법의 주머니를 다시 배에 두르고 돌아갔다. 종종 오라고 한즉, 매양 신세를 끼쳐서 미안하다고 하며, 절을 몇 번이나 하였다.
그 해 겨울, 그는 내가 성이 가시도록 자주 나를, 아니 마스터를 찾아 왔다. 그는 언제나 나를 볼 때마다 오랫동안 마스터를 못 뵈어 죄송하다고 하였다.
그는 나에게 에픽 마법을 만들어 달라면서 스크롤이나 빈 포션통을 가지고 왔다. 어디 쓰느냐고 물으면 친구의 복수 혈전에 대노라고 한다. 친구가 누구냐고 물으면, 이 백작, 윤 공작 , 무슨 대신, 어디 남작 하고 모조리 수도에서도 유수한 대가와 부자들의 이름만 꼽지만, 거리에서 그가 어울려 다니는 것을 보나 가끔 친구라고 데리고 오는 것을 보면, 그의 말과는 딴 판으로 황 검사 자신보다 별로, 유여한 축들도 아니었다.
좋은 규수가 있으니 장가를 들지 않겠느냐고 그는 여러 차례 나를 졸랐다. "좋은 규수"가 어딨느냐고 물으면, 단번에 친구의 딸이라 하고, 어떤 친구냐고 하면 무슨 공작, 무슨 자작 하는 예의 귀족가 따위를 꼽았다. 색시 얼굴이 어떻게 생겼더냐고 하면 매양 자기의 누르퉁퉁하게 부은 얼굴을 가리키며 이렇게 아주 유복스럽게 생겼다고 한다. 내가 웃으며, 색시가 일재 선생 같아서야 좀 재미 적다고 하면,“아, 일등 규수라는데 그랴.”하고 화를 내었다.
“그렇지만 너무 육중해서야.”하면,
“아, 거기 식록이 들었는걸 그랴. 아, 여북해 일등 규수라는데 그래도 못 믿어서 그랴.”하고 기마나를 분출 하곤 하였다.
4
눈에 고인 물이 눈물이라면 황 검사의 두 눈에는 언제나 눈물이 있었다. 그는 가끔 나에게 그가 혈육 없는 것을 한탄하였다. "친구"집 복수 혈전 같은 데서 미스릴 조각이나 몇 개 주워서 불법적인 향정신성 의약품 관리법에 위반되는 포션 따위에 취해서 돌아오는 날에는“아, 드래곤의 혈통으로 혈육 한이 점 없다니, 천도가 무심하지 그랴.”대개 이런 말을 했다.
“혼담이 사방 있지만, 어디 천량이 있어야지.”이런 말도 하였다.
언젠가 숙모님이 그의 맘에 제일 드는 규수의 나이와 이름을 물었더니, 하나는 190 살이고 하나는 갓 200인데, 190짜리는 다크 엘프이고, 갓 200짜리는 하이 엘프라고 하였다.
“190 살?”듣던 사람이 놀라니,“아, 자식을 봐야지유.”하였다.
마스터의 가디언이“좀 나이 짐짓해두 넉넉할걸 뭐.”하니,
“그야 그렇지유. 허지만, 암만하면 젊은 규수를 당할라고.”하는 것이, 아무래도 그 190 살인가 갓 200인가 난 규수에게 마음이 가는 모양이었다.
이런 일이 있은 지 며칠 뒤, 마스터의 가디언(이후 가디언으로 통칭)이 황 검사의 중매를 들게 되었다. 그 즈음 황 검사는 거의 날마다 우리 집에 들르게 되어 그의 딱한 형편을 은근히 걱정하고 있던 가디언은, 그 때 마침 집에 돌아와 계시던 마스터와 의논하고, 그를 바로 옆 차원의 젊은 과부에게 장가를 들게 해 주자고 하였다. 나는 물론 그리 되기를 원했다. 마스터도 웃는 얼굴로,“몰라, 허기야 저도 과부지만 그렇게 늙은 하프 드래곤과 잘 살라구 할는지.”하셨다. 그러나 가디언이“젊고 예븐 홀아비가 어딨어요? 딸린 자식 없구 한 것만 해도…….”하고 자신 있게 말하는 것을 듣고 나도 적이 안심이 되었다.
그 날 저녁때 황 검사가 온 것을 보고, 마스터가 “일재, 여기 젊고 돈 있는 색시가 있는데, 장가 안 들라우?”하고 물어본즉,“아, 들면야 좋지만 선생도 아시다시피 천량이 있어야지.”하는 그의 얼굴에는 완연히 희색이 넘쳤다.
그의 얼굴에 희색이 넘침을 보신 가디언은, 돈이 없어도 장가를 들 수 있다는 것과 장가만 들게 되면 깨끗한 의복에 좋은 음식도 먹을 수 있으리라 하는 것을 일러 주신즉,“아, 그럼야 여북 좋갔수? 규수 나이 몇 살이고……? 집안도 이름 있구……?”그는 연방 입이 벌어져 침을 흘리며 두 눈에 난데없는 광채를 띠고 가디언에게로 대드는 판이었다.
“과부래야 이름이 아깝지, 뭐. 이제 나이 300도 다 못 된걸…….”가디언도 신명이 나는 모양으로 이렇게 자랑삼아 말한즉, 황 검사는 낯빛이 확 변하며,“아 규, 규수가, 시방 말씀한 그 규수가 과, 과, 과부란 말씀유?”이렇게 물었다.
“왜 그류?”한 순간, 침묵이 흘렀다. 황 검사의 닫힌 입 가장자리에 미미한 경련이 일어나며, 힘없이 두 무르팍 위에 놓인 그의 두 손은 불불불 떨리고 있었다. 벽에 걸린 시계 소리가 "뚝딱뚝딱"하고 들리었다. 그는 조용히 고개질부터 좌우로 돌렸다.
“당찮은 말씀유……. 흥, 과, 과부라니 당치 않은 말씀을…….”그는 곧 호령이라도 내릴 듯이 누렇게 부은 두 볼이 꿈적꿈적하며 노기 띤 눈을 부라리곤 하더니, 엄숙한 목소리로“황후암 육대 종손이유.”하고 다시,“황후암 육대 손이 그래 남의 가문에 출가했던 여자한테 장갈 들다니 당하기나 한 소리요……? 선생도 너무나 과도한 말씀이유.”그는 분함을 누르느라고 목소리에 강한 굴곡이 울리었고, 낯에는 비통한 오뇌의 경련이 일어나 있었다.
“내일이래두 그럼 어린 규수 골라 혼인하시지요, 뭐…….”하고, 가디언도 무안해서 일어났다.
마스터도 딱했던지,“일재, 일재. 염려 말우. 농담했수. 그럼 일재 되구야 한번 타문에 출가했던 사람 과 혼인을 하다니 될 말이유? 내가 어디 황후암을 모루, 황익당을 모루?”한즉, 그 때야 그도“아, 아무렴 그랴 그렇지, 거 어디라구, 함부루 어림없이들……. 황후암이 누구며 황익당이 누군데 그랴?”얼굴을 펴고 이렇게 높은 소리로 외쳤다.
5
해가 바뀌고 새해가 되었다.
마스터는 사뭇 금광에 계시느라고 새해맞이까지도 가디언과 나와 단둘이서 쓸쓸히 하게 되었다. 섣달 중순 즈음에서 한 보름 동안은 일금 얼굴을 뵈지 않던 황 검사가 정월 초하룻날 아침에 대문 밖에서,“일 오너라.”하고, 언제보다도 호기 있게 불렀다. 그 핏물이 채 마르지 않은 체인 메일을 손질하여 입은 위에 어이한 적외선 시야의 안경까지 시커먼 걸로 하나 쓰고는, 마스터에게 새해 인사를 드리러 왔노라고 하였다. 가디언이 안 계신다고 하니, 그러면 가디언이나 뵙고 가겠다고 하였다.
가디언은 마침 있는 음식에 반갑게 구시며, 해츨링 구이와 활력 포션 상을 차려 내주셨다. 그는 몇 번이나 완장 선생을 못 뵈어 죄송스럽다고 유감의 뜻을 표하고는, 포션을 몇 잔을 들이켜고 나더니,“일배 일배 부일배로 우리 군자 사람끼리 설 쇰을 이렇게 해야지.”흥취에 못 배기겠다는 듯이 손으로 무르팍을 치곤하였다.
가디언이“새해에는 장…….”하다가 말끝을 움츠러들여 버리자, 그는 그 말끝을 잡아서,“금년 신운은 청룡이 농주랬지만, 아 천량이 생겨야 장갈 들지.”하였다.
이튿날도 찾아왔다. 사흘째도 왔다. 이리하여 정월 한 달 동안을 거의 매일 같이 마스터에게 새해 인사를 드려야 할 것이라면서 찾아왔다. 그러나 그는 결국 마스터에게 새해 인사를 드리지 못하고 말았다.
그 뒤 한철 동안을 그는 아주 우리 집에 발길을 끊고 나타나지 않았다. 검은 둥치에 새움이 트고 버들가지에 물기가 흐르는 봄 한철을 나는 궁금한 가운데 보내었다.
봄도 지나 여름이 되었다. 새는 녹음 속에 늙고, 물은 산골을 울리며 흘렀다.
그 때 돌연히 마스터가 어떤 사건으로 봉인 주문에 당하게 되자, 나는 어비스의 전초기지에 가 지내려던 피서 계획을 포기하고, 괴로운 여름 한철을 수도에서 나게 되었다. 물론, 마스터의 사건이란 건 당시 나도 잘 몰랐는데, 세상에서 들리는 말로는 만주에서 발단된 "커플 기사단 사건"의 연루라는 것으로, 마스터 검거, 금광 채굴 중지, 가택 수색, 이 세 가지를 한꺼번에 당하게 되었던 것이었다.
어느 날은 서대문 밖에 마스터를 면회하고 돌아오는 길에 광화문 워프 터널을 지나오려니까,“아, 이건 노상 해후로구랴!”하는 소리가 났다. 고개를 들어 보니, 연록색 엘븐 체인 메일에 마법 안경을 쓴 황 검사가 손질한 체인 메일을 왼쪽 팔에 걸고, 해 묵힌 누렁 헬멧을 뒤통수에 잦혀 쓰고, 그 벗겨진 앞 이마를 햇살에 번쩍거리며 제국 왕성 쪽에서 걸어오고 있는 것이다.
“네, 일재 선생 오래간만이올시다.”하고 내가 인사를 한즉,“댁에서들 모두 태평하시구, 완장 선생께도 소식 자주 듣고……. 아, 이건 참 노 상 해후로구랴!”또 한 번 감탄하고 나더니,“이리 잠깐 오, 날 좀 보.”하고, 그는 나를 한쪽 구석에 불러 놓고, 지극히 중대한 사실을 발견했노라고 한다. 나는 사정이 전과 다른 형편에 있는 터이라, 혹시나 이런 데서 무슨 자세한 내용이나 알게 되나 하여 두근거리는 가슴을 누르며 긴장한 낯으로 그를 쳐다보고 있는 것인데, 그는“아, 내 조상께서는 모르고 지낸 윗대 조상을 근일에 와서 상고했구랴.”나는 너무 어이없어 어리둥절해 있노라니,“왜 그루? 어디 편찮우?”한다. 괜찮으니 얼른 마저 이야기하라고 하니,“아, 이럴 수가……. 온, 내 조상이 대체 로드를 연임한 레드 드래곤이라는구랴!”하고 혼자 감개해서 못 견디는 모양이었다. 그건 또 어떻게 알아 냈느냐고 한즉, 근일에 여러 가지 서적을 상고하던 중 우연히 발견하게 된 것이라 하였다.
황 검사를 광화문 워프터널에서 만난 뒤, 두 달이 지난 어느날, 나는 가디언을 모시고 상위차원에 갔다가 제국 왕성 앞에서 전함을 워프 아웃 하여 필운동으로 들어가노라니 "모루히네" 환자 치료소 옆에서 조금하면 못 보고 지나칠 뻔하다가 그를 보게 되었다.
머리가 더부록한 용병 몇 놈과, 악마 숭배자 몇과 그 밖에 서큐버스, 데몬, 뱀파이어들이 몇 둘러싼 가운데에 한 두어 뼘 길이쯤 되는 무슨 미스릴 상자를 거꾸로 엎어 놓고, 그 위에 삐쩍 마른 살라맨더 한 마리와, 그 옆의 똥그란 양철통에 흙빛 연고약을 넣어 두고 약 쓰는 법을 설명하는 위인이 있다.
“살라맨더 기름, 살라맨더 기름, 에헴, 살라맨더 기름이올시다. 옻 오른 데도 쓰고, 옴 오른 데도 쓰고, 등창, 둔창, 화상, 동상, 충치, 풍치, 이 앓는 데도 쓰고, 어린애 귀젓 앓는 데, 머리가 자꾸 헐어 "하게 아다마" 되랴는 데, 남녀 노소, 어른 애, 계집 사내 할 것 없이, 거저 누구든지 헌 데는 독물을 빼고, 벌레가 먹는 데는 벌레를 내고, 고름이 생기는 데는 고름 뿌리를 빼고, 살이 썩는 데는 거구 생신을 하고, 자, 깊이깊이 감춰 두면 반드시 한 번씩은 찾게 되는 약, 첩첩이 싸서 깊이깊이 넣어 두면 언제든지 한 번은 보배가 되는 약! 자아, 살라맨더 기름이올시다. 살라맨더 코에서 짠 살라맨더 기름. 자, 그러면 이 살라맨더가 얼마나 무서운 신효가 있는가를 여러분의 두 눈 앞에 보여 드릴 터이니까 단단히 보시오.”그는 약물에다 흙빛 고약을 찍어 넣어서 저으며,“자아, 단단히 보시오. 우리 몸에 있는 썩은 피가 살라맨더의 코끝만 들어가면 그만 이렇게 홍로일점설, 봄철의 눈과 같이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립니다!”하고, 약물 접시를 들어 여러 사람 앞에서 한 번 내두르고 나서 기침을 한 번 새로 하더니,“여러분, 여기 계시는 이분은 우리 제국에서 유명한 선생이올시다. 그런데 선생께서는 두 달 전부터 충치를 앓으셔서 병석에 누워 계시다가 이 약으로 말미암아 어저께 벌레를 내고 오늘부터 이렇게 이 곳까지 나와 주시게 되었습니다.”하고, 궐자가 손으로 가리키는 바로 그 곁에는 전날에 보던 그 마법 안경을 쓴 우리 황 검사가 점잖게 먼산을 바라보고 앉아 있었다.
궐자는 다시 말을 이어,“선생께서는 또 이 방면에 연구가 대단히 깊으실 뿐 아니라, 버그베어의 쓸개, 와이번의 혀, 맨티스 오줌, 움버헐크의 똥, 비홀더의 간 같은 걸로 훌륭한 약을 지어서 일만 가지 병마를 퇴치시킬 수도 있는, 말하자면 이인과 같은 능력을 가지신 어른이올시다.”할 즈음에 천사가 강림했다. 에워싸고 있던 용병, 악마 숭배자, 뱀파이어들은 각기 제구석을 찾아 헤어졌다.
이 꼴을 보신 가디언은 나에게 눈짓을 하시며 앞서 가셨다. 나도 가디언 뒤를 쫓아 한참 오다 돌아본즉, 아까 연설을 하던 작자는 빈 미스릴 상자에 비쩍 마른 살라맨더와 고약통을 담아 가슴에 안고, 황 검사는 점잖게 두 손을 체인 메일 옆구리에 찌른 채 천사를 따라 다른 차원의 재판정을 향해 날아가고 있었다.
-------------------------------------------------------------------------------
로타에르가 활동하고 있는 다른 곳에서, ~ 위에 나온 데로 ksodien 님께서 쓰신 건데 너무 멋져서-_- 퍼왔습니다.
"화랑의 후예"를 읽어 보신 분이라면, 이 "화룡의 후예"가 원작을 어떻게 패러디했는지 쉽게 아시리라고 생각합니다-ㅅ-
첫댓글 쿨럭. 원츄.-ㅅ-)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