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연된 정의’ 또 되풀이돼선 안 된다
지난 몇 년간 정치판을 뒤덮은 어두움이 마침내 걷히고 있다. 이른바 ‘이재명 사법 리스크’가 현실화되기 시작한 덕분이다. 더불어민주당 이 대표는 지난주 공직선거법 위반 사건 1심에서 징역 1년,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았다. 의원직 상실형이다. 10년간 피선거권 박탈은 덤이고, 민주당은 보전받은 대선 비용 434억 원을 토해 내야 한다. 무죄를 주장하며 최악의 경우라도 의원직이 유지되는 100만 원 미만 벌금형을 기대했던 이 대표와 민주당은 예상 밖의 중형에 거의 공황 상태다. 2심과 3심이 남아 있지만 차기 대선 선두 주자인 이 대표의 정치 생명이 백척간두에 놓이며 정치권의 지각 변동이 초읽기에 들어갔다.
불복은 예상했던 바다. 겸허한 반성이나 진솔한 사과는 눈곱만치도 없다. 이 대표는 “현실의 법정은 아직 2번 더 남아 있다”며 항소할 뜻을 밝혔고, 민주당은 “정치 판결”이라며 항소심을 당 차원에서 대응하기로 했다. 이 대표는 선고 이튿날 서울 광화문에서 열린 정권 퇴진 촉구 집회에서 “이재명은 결코 죽지 않는다”고 외쳤고, 박찬대 원내대표는 “미친 정권의 미친 판결”로 몰아붙였다. 하지만 어째 ‘마지막 발악’ 같은 느낌이 짙다. 아무리 ‘헌법 위에 떼법’인 대한민국이라지만 대세는 이미 기울었다.
이 대표는 법망을 빠져나가려고 온갖 주장을 폈으나 말짱 꽝이었다. 4년 전 대법원 판례 적용부터 그랬다. 이 대표는 당시 ‘소극적 거짓말’이란 희한한 논리로 후보자토론회의 거짓 답변을 무죄로 몰고 간 권순일 대법관 덕분에 기사회생했다. 이번에는 그러나 고(故) 김문기 성남도시개발공사 개발1처장과의 골프 관련 발언은 토론회가 아닌 일방적 발언 형식이란 이유로 해당 법리가 배제됐다. 백현동 부지 용도 변경이 국토교통부 협박 때문이란 경기지사 시절 국정감사 답변과 관련한 이 대표의 논리도 모조리 기각됐다. 그는 “국정감사 답변 때 말이 좀 꼬였다”고 둘러댔으나 재판부는 “미리 패널까지 준비해 설명한 것”이라며 일축했다.
다만 이 대표가 김 처장을 몰랐다는 주장이 무죄라는 판단은 논란거리다. 외국에 10일 동안 함께 출장 가서 같이 골프 치고 낚시까지 한 사람을 모른다는 주장이 터무니없다는 건 골프나 낚시 해 본 사람은 다 안다. 그것도 대장동 개발사업 실무책임자인 김 처장을 모른다는 건 말이 안 된다. “하위 직원이라 몰랐다”지만 역점 사업의 핵심 실무자도 모르면서 어떻게 시장직을 수행한단 말인가! “개인적으로 몰랐다”고 우기는 이 대표의 항소 가능성을 차단하려는 재판부의 고육지책이란 해석도 나왔으나 법률 문외한인 탓인지 도무지 이해가 안 된다.
판·검사 겁박, 장외 투쟁, ‘100만 명 무죄 탄원 서명’ 등의 비법률적 대응은 이번 판결로 약발이 안 먹히는 걸로 판명됐는데도 민주당은 그만둘 생각이 없다. 하긴 ‘이재명 일극 체제’ 민주당으로선 이 대표 방탄의 당의 사활을 걸 수밖에 없겠지만 그럴수록 더 깊은 수렁에 빠지고 기다리는 건 공멸뿐이다. 민주당이 간절히 바라는 항소심 무죄 내지 감형 판결은 가능성이 매우 낮다. 1심이 대법원 양형기준(10개월)보다 더 높은 형을 때린 이유(높은 전파성과 동종 전과 등)를 헤아려야 한다. 감형은 혐의 인정과 반성이 전제돼야 하나 지금으로선 반성의 기미가 전혀 안 보인다.
이 대표 사법 리스크는 이제 첫발을 뗐을 뿐 갈수록 첩첩산중이다. 오는 25일 위증 교사 혐의 사건 1심이 예정돼 있는 데다 대장동·백현동·성남FC 비리, 쌍방울 대북 불법 송금, 경기도 법인카드 유용 의혹 등의 재판도 줄줄이 대기 중이다. 위증 교사 혐의는 지난해 9월 국회에서 어렵사리 통과된 이 대표 체포동의안에 따른 구속영장을 기각한 좌파 판사조차 “소명되는 것으로 보인다”고 밝힌 만큼 유죄 판결이 유력하다. 철통같아 보이는 일극 체제도 사법 리스크 현실화와 더불어 금가기 시작하면 무너지는 건 한순간이다. 지금은 “비명계가 움직이면 죽일 것”이라는 끔찍한 막말도 서슴지 않으며 충성 경쟁을 벌이지만 ‘이재명호’ 침몰 조짐이 엿보이기만 하면 저마다 먼저 탈출하려고 아귀다툼을 벌일 게 뻔하다.
문제는 시간이다. 위안부 후원금 횡령 혐의로 기소된 윤미향 전 의원은 지난주에야 의원직 상실형이 확정됐으니 하나 마나 한 판결이다. 이 대표 역시 2년 2개월 만에 겨우 1심 판결이 나왔다. 공직선거법 재판은 1심 6개월, 2·3심은 각각 3개월 이내에 판결해야 하는 강행 규정, 즉 ‘6·3·3 규정’이 제대로 지켜졌다면 이 대표는 국회의원도, ‘여의도 대통령’도 못됐을 게다. 재판 지연은 진영논리에 갇힌 김명수 사법부 때 특히 심했다. ‘지연된 정의는 정의가 아니다’고 했다. ‘지연된 정의’가 이 대표 재판에서 또 되풀이돼선 안 된다. 이 대표 방탄용 저질 정치가 나라를 더이상 망치게 할 수는 없다는 얘기다. 6·3·3 규정 준수를 강조한 조희대 사법부에 거는 기대가 자못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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