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지 부여전을 보면
부여는 여러가지에서 북방의 여러 세력과 유사한 풍습을 갖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먼저 은정월에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풍습이 그것이다.
은(殷)정월이 12월이란 주장도 있지만, 어찌되었든 기존의 1월과 다른 시점을 한 해의 시작으로 본다는 점에서는 독특하다. 그런데 이런 시점의 차이는 흉노의 경우에도 보인다. 그들의 시작은 천기의 돌아가는 시간, 즉 음의 정점이자 양의 시작인 동지에서 첫 해를 시작하는 것이 아니다. 사기 흉노전에는 그들이 세번 천신에 제사를 지내는 데, 정월, 오월과 9월이라고 했다. 이 가운데 가을에는 대림대제(足+帶 林大祭)인데, 이는 간혹 음력 8월 중이라고도 기록되기도 한다. 음력 8월에서 9월의 시점은 야생의 풀이 다 고사되어 가는 시점, 즉 여름에서 겨울로 변하는 시점이기 때문이다. 5월 롱성대제(籠城大祭)는 초지가 활성화되기 시작하는 때이자, 말젖술이 산출되는 시기로 실질적인 봄의 축제이며, 새해의 시작을 맞는 축제라고 할 수 있다.
대림대제와 유사한 시점에 열리는 은정월의 동맹 축제도 같은 성격을 지니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즉 이 축제는 한 해를 마무리하는 축제다.
고구려의 동맹, 예의 무천 등의 제천 축제는 분명 북방문화와 많이 선이 닿아있다. 하지만 시점 면에서는 다소 차이가 존재한다. 이 문제는 다시 거론해보겠다.
영고나 동맹에서 중요한 것은 이때 나라 안의 모든 사람들이 모여서 날마다 술 마시고 노래하고 춤추는 한바탕의 광란의 패스티발이 열린다는 점이다. 이런 전통은 중원지역에는 분명 없는 종교문화다. 원시도가와도 관련없는 이 문화의 전통이 북방 종족들의 샤마니즘(정확한 호칭은 아닐지라도, 현재 학계에서 통용되는 말이므로, 북방 종족들의 종교는 흔히 샤마니즘으로 통칭해도 크게 문제는 안된다. 종종 이 문제에 있어서 걸리는 것은 따로 거론을 하기로 하자)과 직접 관련이 된다. 도가와 관련성보다 샤마니즘과 관련이 있는 제천행사. 하지만 제천행사를 오직 샤마니즘만으로 해석할 수는 없다. 이 문제는 다시 또 거론하기로 하자.
부여의 종교 풍습에서 가장 중요한 것 가나운데 하나는 군사의 일이 있으면 역시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데, 이때 소를 잡아 그 발을 보고 길하고 흉한 것을 점친다는 점이다. 이미 이형구의 연구에 의해 동방지역에도 무갑골이 대량 출토되었음을 알려져 있다.
소발가락이 째지고 합하고를 놓고 길흉을 점치고, 우골을 이용한 것은 은(상)에서도 이미 찾아볼 수 있다. 은나라와 부여와의 관련성은 우선은 뒤로 차지하기로 하고,
부여의 종교 풍습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흉년이 들었을 때 그 죄를 왕에게 돌려 왕을 갈아치우거나 죽일 수도 있다는 점이다. 흔히 이것을 부여에서는 아직 왕권이 확립되지 않아서 운운하지만, 이는 잘못이다. 같은 삼국지 부여전에 당시 부여에는 순장풍습이 있었는데, 이때 100여명까지도 함께 죽여서 묻힌다고 했다. 이 정도면 당시 부여왕의 권력을 상당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부여가 고구려 대무신왕의 공격을 받아 대소왕이 죽자, 약해진 것은 왕의 권위가 그 만큼 막강했기 때문에 그 중심이 흔들려서 약해진 것이지, 왕권이 미약해서 흉년이 들면 왕을 갈아치우기했다는 것과 직접 관련이 있을지는 의문이다.
이와 관련해 주목해야 할 것은 대체 왕을 누가 갈아치우거나 책임을 물게 하느냐는 것이다. 그자는 바로 무(巫)일 수 밖에 없다. 물론 무의 개인적 판단이 아닌, 왕을 견제하는 작자가 무의 말을 빌어 말했던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어찌되었든 왕을 갈아치울 수도 있다는 말이 전해오는 것 자체가 이미 무의 말이 왕도 쉽게 어쩌지 못하는 사회가 부여였음을 말해준다.
이와 관련해 주목해야 할 기사는 사기 흉노전의 이광리 피살 사건 기록이다.
흉노군을 이끌고 한나라를 공격해온 호록고(狐鹿姑)선우(서기전 96-85)는 한나라 이광리장군을 붙잡았는데, 그에게 자기 딸을 주는 등 크게 후대한다. 이에 정령왕인 위률이 자신보다 이광리를 더 대접하는데 앙심을 품었다. 얼마 후 대선우의 부인이자, 호록고선우의 모친인 알씨가 중병에 걸리자, 위률은 알씨의 발병원인이 적장인 이광리를 흉노의 군신에게 희생물로 바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는데, 결국 선우를 비롯한 그 누구고 감히 이의제시를 하지 못할 정도여서 이광리는 죽고 말았다. 호록고선우가 이후 자연재해를 핑게로 이광리 사당을 건립하는 정도에서 저항을 그칠 정도였다. 위률이 샤마니즘을 이용한 이러한 정치공세는 흉노사회에서는 충분히 가능했던 것이다.
흉노에서 왕도 저항못할 샤만의 권능이 곧 부여에서도 자주 보인다.
삼국사기 유리명왕 28년조에 고구려의 무휼왕자가 '누란이 있으니 만일 부여의 대왕이 그 알을 헐지 않으면 섬길 것이요, 그렇지 아니하면 섬기지 않겠다 하라'는 말을 한 것을 부여왕이 듣고 이를 여러 신하에게 두루 물을 때에 대답한 것은 한 노구(老嫗)였다. 이 노구야 말로 샤만으로 부여의 정치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한다.
대무신왕 3년조에 나오는 부여에서 까마귀를 얻었을 때, 이를 해석하여 고구려에 사신을 보내도록 만든 자도 실상은 샤만이었다.
이는 부여만이 아니라, 고구려도 같다. 고구려에서 샤만이란 존재가 얼마나 막강한 위치에 있었던 가는 고국천왕이 자신의 무덤 앞에 소나무를 심어달라는 부탁을 샤만을 통해서 하고, 샤만이 이를 왕에게 직접 고하고, 왕이 이를 시행했다는데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645년 요동성 추모왕의 사당에서 미녀을 뽑아 제사를 지내게 하고, 요동성민들에게 추모왕이 기뻐하시는 성이 보존되리라고 했던 자도 무당이었다. 그런 만큼 당나라는 무당의 말에도 불구하고 요동성이 함락되었으니 고구려 신보다 당나라 황제가 더 강하다는 것을 선전하여 고구려 백성들을 공포로 떨게 만들려는 이유로 이 이야기를 퍼뜨렸던 것이다.
하지만, 차대왕 3년조에 왕이 흰여우를 잡지 못해 이에 대한 해석을 무사(巫師)에게 물었을 때, 무사가 길흉이 왕의 마음가짐에 달렸다는 말을 하자, 차대왕이 길한 것이면 길한 것이지, 앞에서 요망하다고 하고, 나중에 복이 될 수 있다는 것이 무슨 거짓말이냐며 그를 죽인 것으로 볼 때, 고구려는 왕권이 샤만을 크게 압도했음을 알 수가 있다.
샤만의 기능은 사제(司祭), 의무(醫巫), 예언자 로 나누기도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治病, 卜占, 죽음과 혼을 취급, 저주하기, 祈雨 등의 기능으로 보기도 한다. 이러한 샤먄의 신앙은 고대 7국에 깊이 퍼져있었으니, 이를 제외하고 고대종교사상사를 논할 수는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