높드리 / 류영택
골짜기 높은 곳, 높드리를 본다. 돌보지 않은 논은 황무지로 변해 있다. 논을 감싸 안은 두렁은 군데군데 내려 앉아 있고, 벼가 여물던 논바닥엔 잡초가 무성하다.
유년시절, 고향마을은 물난리를 자주 겪었다. 강 하류 저지대인데다 큰 강과 샛강이 만나는 두물머리에 위치해 있어서다. 적은 비에도 내수가 차거나 윗물에 견디지 못하고 제방이 터졌다. 연례행사처럼 물난리를 겪다보니 골짝 논이 상답 대접을 받았다.
나는 가끔 이곳을 찾을 때면 오래전 우리가족의 든든한 생명줄이 돼주었던 높드리에 대한 고마움을 느낀다. 그리고 지금의 내 스스로의 모습을 되돌아보게 된다. 어쩌면 내 삶도 높드리와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오랫동안 함께 일 했던 직장동료 K가 찾아왔다. 내가 펑크가게를 차릴 시기에 섬유공장을 하게 된 그는 나름대로 사업에 성공해 있었다. 그는 마땅한 공장이 나왔다며 내게 섬유업을 하기를 권했다. 나는 일언지하 그의 말을 거절했다. 섬유일보다 힘이 들긴 했지만 벌이도 괜찮았고 무엇보다 지금까지 애써 배운 펑크기술이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쉽지가 않았다. K는 내가 섬유공장을 하지 않으면 무슨 큰일이나 나는 것처럼 집요하게 매달렸다. 그의 성화에 결국 손을 들고 말았다. 서둘러 가게를 정리하고 돌아서려니 마음이 허전했다. 무논 사려고 문전옥답 판 것은 아닌가, 마음 한구석 걱정이 돼왔다.
우리 집 논은 골짜기 다랑논 중 제일 위쪽에 자리 잡고 있었다. 웬만큼 비가 와도 논물을 가둘 수 없었다. 그러다보니 마른하늘에 번개가 치거나 천둥소리만 들려와도 높드리에 마음이 가 있었다. 아버지는 주막에서, 밭을 매시던 어머니는 호미를 든 채 골짜기로 달려갔다.
물을 대느라 서둘러 모이고 보면 왠지 멋쩍었다. 아버지는 입에 문 담배가 비에 젖는 데도 하늘을 바라보고 서 계셨고, 어머니는 고무신 밑창보다 더 두터운 굳은살 발로 논두렁을 다지셨다. 물꼬에 서 있던 나는 두 분의 모습에 웃음을 지었다. 아버지는 낮술을 마시고 온 게 미안해서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 그러시고, 아버지의 뒷모습을 흘깃 훔쳐보시는 어머니는 이렇게라도 달려와 준 게 어디냐며 내심 기쁘기 한량없는 달뜬 모습이었다.
물을 가두려는 마음은 한결같지만 높드리를 바라보는 어머니와 아버지의 마음은 제각각 달랐다.
장마가 물러가고 폭염이 시작되었다. 신작로의 묽은 쇠똥이 이내 바게트 빵처럼 딱딱하게 변했다. 저수지가 없는 골짜기도 다르지 않았다. 빗물을 끌어다 쓰는, 생명줄이나 다름없는 도랑은 무명실로 묶은 막내의 탯줄처럼 말라갔다. 오뉴월 뙤약볕에 땅내를 맡은 벼가 물을 퍼마시듯 하니 가둬놓은 논물도 하루가 다르게 줄어들었다.
달포가 지나도록 비 한 방울 내리지 않자 아버지는 볏짚 낟가리에 숨겨놓은 밀주로 목마름을 달래셨다. 생된장에 쿡 찍은 풋고추를 와작 씹던 아버지는, 연거푸 두 사발 탁배기를 마셨는데도 갈증이 가시지 않는 듯 마른 장작 패는 소리를 하셨다.
"물난리로 쌀 한 톨……."
제방이 터져 들농사를 망쳤는데 이젠 가뭄으로 높드리 농사마저 그르치는 건 아닌가, 이듬해 모를 낼 볍씨 걱정을 했다. 아버지의 넋두리를 묵묵히 듣고만 계시던 어머니도 속이 타는지 한 사발 냉수를 벌꺽 들이켰다.
"돼지새끼 팔아 쌀 팔게 생겼으니……."
조상님 기일에 쓸 제수용 쌀과 누나와 형에게 싸줄 도시락 걱정을 하셨다. 나이가 어려 사태의 심각성을 알지 못했던 나는 가뭄 걱정에 동화되기 보단 잠시 전 어머니의 말을 곱씹었다. 돼지새끼를 내다 파는 것은 알겠는데, 돼지 내다 판돈으로 쌀을 판다는 말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어머니만 그런 게 아니었다. 지난 오일장 콩을 내다팔고 그 돈으로 찹쌀을 사오던 이웃집 아주머니께서도 같은 말을 했었다. 하지만 고개만 갸웃거릴 뿐 그 연유를 물을 수가 없었다. '팔다와 사다' 만큼이나 복잡한, 한숨 끝에 내놓는 두 분의 동문서답 때문이었다. 꽤 오랜 시간 겉돌기만 하던 이야기가 마침내 한목소리를 냈다.
"큰일이네!"
누가 먼저인지 쉬이 구분이 안가는 두 분의 탄식은 훗날 쌍 나발 전축에서 울려나오던 스테레오 소리와도 같았다. 밤이 이슥하도록 모깃불을 떠나지 못하시던 부모님의 걱정, 우리가족의 발등에 떨어진 불을 끄려면 빗물을 많이 가두어 두는 것뿐이라 생각했다.
못이긴 척, 아마도 K의 말에 두 손을 든 것도 물 걱정에 놓여날 수 없는 높드리의 한계 때문이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섬유 일은 생각했던 것보다 잘 풀렸다. 날이 새면 도투마리에 아름드리 베가 감겨있었다. 마치 갈퀴로 돈을 끌어 모우는 듯했다. 내게도 운이 왔다고 생각했다. 나는 베틀 대수를 늘렸다.
하지만 얼마 안가서 괜한 욕심을 부렸다는 것을 알게 됐다. 대수를 늘린 만큼 수입이 늘어나야 하는데 그 반대였다. 가동률은 떨어지고 인건비, 전기세, 각종 공과금은 배로 늘어났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경기까지 좋지가 않았다. 곶감 빼먹듯이 그동안 모아둔 돈을 빼 쓰고 빚까지 지게 됐다. 물을 감당할 논두렁은 생각지 않고 물꼬만 돋운 꼴이었다.
높드리 두렁을 훑어본다. 두렁 중간 쯤 툭 불거진 돌덩이가 눈에 들어온다. 입술사이로 삐져나온 뻐드렁니처럼 보기에 흉하다.
그해 여름, 아버지는 내가 애써 쌓아올린 물꼬를 발로 자근자근 밟으셨다. 나는 못마땅한 표정으로 바라봤다. 원래 높이보다 더 낮아졌다. 고무신자국이 선명한 물꼬 위로 물이 흘러내렸다. 마음이 아팠다.
"안 갈 끼가?"
뒤가 허전했던지 저만치 걸어가던 아버지께서 돌아보셨다. 나는 엉거주춤 산 쪽을 향해 돌아섰다. 다리를 벌린 채 희멀건 웃음을 내놓는 내 모습에 아버지도 같은 웃음을 지으셨다.
산허리를 돌아 아버지의 모습이 보이지 않자 서둘러 물꼬를 돋우었다. 찐득한 논바닥 흙을 끌어다 물꼬를 다지던 나는 잠시 전 아버지의 모습을 떠올렸다. '밤새 씨나락 걱정하시고선!' 이해 할 수 없다는 듯 투덜댔다.
저녁설거지를 마치신 어머니께서 신경통을 호소했다. 한두 번 들어온 게 아닌지라 나는 걱정보다 씩 웃음을 지었다. 일기예보보다 더 잘 알아맞히는, 다른 날보다 심하게 앓는 소리로 보아 한가득 논물을 가둘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침 일찍부터 집안이 분주했다. 아버지는 지게에 가마니와 삽과 괭이를 챙기고는 부리나케 삽짝을 나가셨다. 나는 눈을 비벼대며 똬리와 함지를 챙기시는 어머니를 바라봤다.
"마흔골 논두렁 터졌다."
뒤를 따르던 나는 어머니의 그 말씀에 괜히 마음이 불안해왔다. 낙타 등처럼 볼록 쌓아놓은 물꼬가 눈앞에 어른거렸다.
아버지는 아무 말씀이 없으셨다. 유실된 두렁 안쪽에 임시 물막이를 하고는 흙에 묻힌 벼를 일으켜 세웠다. 하지만 허리가 꺾인 벼는 이내 맥없이 주저앉았다. 불안해했던 마음은 어느새 돌덩이처럼 무거워졌다. 나도 모르게 목구멍너머로 꿀꺽 침이 넘어갔다. 괜히 어머니를 따라나섰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논둑을 쌓기 위해 커다란 돌덩이를 지게에 져 나르는 아버지와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고 일부러 먼 산을 바라봤다.
지금도 섬유 일에 나를 끌어 들이려고 안달했던 K의 속마음을 알 수가 없다. 혼자 그 일을 하는 게 심심해서 그랬는지, 펑크일로 알돈을 버는 게 배가 아파 그랬는지. 가만히 놔뒀으면 지금쯤 정비공장을 차렸을지도 모를 일인데. 정작 내가 섬유 일을 하게 되자 그는 곧바로 직업을 바꿨다.
돌아서 나오려다말고 툭 불거져 나온 돌을 향해 씽긋 미소를 짓는다. 지나친 욕심에 대한 부끄러움이자 반성이다.
물이 귀한 높드리일수록 물꼬가 낮다. 꼭대기 논일수록 그 낮음은 더하다. 굳이 의미부여를 하자면 아래 논임자에게 물 선심을 쓴다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그것은 자신의 논을 지키기 위함이기도 하다.
살아오는 동안 나는 섬유업 말고도 몇 번의 논두렁 터짐을 겪었다. 두렁이 취약한, 나 자신이 높드리와 다르지 않다는 것을 망각하고 물꼬를 돋우기만 했었다.
삶의 치부(恥部)인 돌덩이가 가만히 말을 붙여온다. 비움과 겸손, 낮은 물꼬처럼 살아가기를 새삼 일깨워준다. 지난 날 아버지가 그러셨던 것처럼.
*높드리: 골짜기의 높은 부분. 높고 메말라서 물기가 적은 곳에 있는 논밭
첫댓글 멋진 글 잘 감상했습니다. 땡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