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궐의 오른혼 비문과 고구려와의 관계
자유로운 영혼 ・ 2021. 2. 14. 16:59
동서양의 역사가중에 북방 유목민족에 대한 기록을 한 대표적인 역사가는 고대 그리스의 헤로도투스와 중국 한나라의 사마천이라고 할수 있습니다.
스키타이는 고대 그리스의 헤로도토스가 그 존재를 처음 기록했고 흉노에 대해서는 사마천이 사기에서 언급했습니다. 이들이 본 스텝지역의 북방 유목민족은 매우 호전적이고 잔인할 뿐 아니라 더 나아가 비문명과 비문화의 대명사로까지 다루어지기도 했습니다.
북방 유목민족의 대표적인 국가인 스키타이와 흉노는 유목민족 특성상 고유의 문자 및 기록을 가지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오로지 유럽과 중국의 관점으로 기록된 역사관으로만 파악 할수 있기 때문에 이것이 오늘날 유라시아 스텝 유목민족의 역사가 왜곡되고 세계사에서 소홀히 다루어지고 있는 한 원인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그렇지만 돌궐은 유라시아 스텝민족 중에서 최초로 자신들의 문자를 가졌고 기록을 남겼습니다. 몽골북부 오르혼(Orkon) 강 주변에서 720~735년경 세워진 돌궐어 비석이 발견됐는데 이 비석은 후돌궐 (제2돌궐) 지도자들의 업적을 기념하는 것이며 돌궐제국은 물론 유라시아 기마유목민족의 잊혀진 역사를 다시 꺼내 새롭게 보게 만드는 기념비적인 문화유산입니다.
오르혼(Orkon) 강(몽골어: Орхон гол, Orkhon gol)은 몽골의 강으로 셀렝게강의 지류이며 몽골 아르항가이 아이막의 항가이 산맥에서 발원하여 북쪽으로 흐릅니다. 강의 길이는 총 1,124km으로 발원지부터 북쪽의 셀렝게 강에 합류하기 전까지의 길이입니다.
몽골의 셀렝게강 강역 과 몽골 공화국 오르혼 강변의 돌궐비문
이 비석은 1709년 러시아-스웨덴 전쟁에서 포로가 된 스웨덴 장교 슈트라흐렌베르그가 포로 생활 중에 발견해 1730년 학계에 소개함으로써 알려졌으며 19세기말에 본격적 연구가 진행돼 덴마크 학자 톰센(V.Thomsen)이 판독했습니다.
이로써 종래까지 중국 사료에 의존해 중화중심 사관의 관점에서 접근되던 중앙 아시아학 및 스텝 민족의 연구에 본질적인 변화를 가져다 주었습니다. 따라서 북방 스텝 민족들도 문헌의 기록을 소유하여 문화의 근거지로 인정받아 온 인근 농경, 정착 지역의 민족들에 못지 않는 정치, 경제, 사회적 전통을 가졌으며, 스텝 문화도 농경, 정착 문화와 대등한 입장에서 광범위한 횡적인 문화 교류가 이루어졌다는 사실이 강조되기 시작했습니다.
주요한 세 비문의 구성은 다음과 같습니다.(네이버 지식백과 참조)
1. 퀼 테긴 비문 : 자기 형 빌게 카간을 도와 후돌궐의 국가 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한 퀼 테긴의 치적을 기리기 위해 그의 사후 732년 빌게 카간에 의해 세워졌으며 높이 3.75m, 너비 122~132㎝ 크기의 4면체 비문인데, 동남북면은 돌궐어로 서쪽면은 중국어로 표기되어 있습니다.
2. 빌게 카간 비문 : 734년 빌게 카간의 사후 735년 그의 아들에 의해 세워졌다. 비문의 내용은 빌게 카간이 직접 국민들에게 훈시하는 형식으로 되어 있으며 빌게 카간 이후 사건들이 후일 첨가되기도 했습니다. 구조나 형식은 퀼 테긴과 유사하고 서면은 역시 중국어로 표기되어 있습니다.
3. 톤유쿡 비문 : 720년경 노령기에 자신이 직접 건립하였으며 3대 카간에 걸쳐 행정 수반과 군사령관을 역임한 원로로서 재임 중 업적을 적고 있습니다.
오르혼 비문(碑文)들은 725~735년경 후돌궐(제2돌궐)의 마지막 전성기에 건립된 중요한 역사적 유물입니다. 후돌궐의 뛰어난 세 지도자인 퀼 테긴, 빌게 카간, 톤유쿡의 송덕비(頌德碑)를 중심으로 구성된 오르혼 비문군은 돌궐사뿐만 아니라 중앙 아시아 스텝 민족의 역사 인식에 새로운 전기를 마련한 귀중한 문화 유산으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비문의 내용은 스텝 민족 중 최초로 자체 문자로 기록을 남긴 돌궐족에 대한 역사가 주를 이루고 있습니다. 구체적으로는 돌궐 제국의 건립에서부터 역대 카간들의 치적, 중국을 중심으로 한 주변 국가들과의 관계, 군사 정복과 교역, 사회 조직, 법제도, 관습에 이르기까지 중앙 아시아 스텝 사회의 특징과 구성원들의 생활관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만약에 이 비문들이 발견되지 못했다면 중국측의 역사기록에만 전적으로 의존하게 되어 돌궐이 투르크라는 사실을 인지 하지 못한채 별개의 북방 유목민족중 일부종족으로만 치부되어 동서양사 연역사 연결이 되지 않는 잃어버린 역사가 되었을 것이며 당시의 북방 유목민족들은 문화가 없는 호전적이고 야만스런 민족으로만 평가되었을 수도 있습니다.
퀼테킨(왼쪽)과 퀼테킨 비문/사진=카자흐스탄 문화정보부
그런데 이 비문 중 퀼테긴 비문에는 흥미로운 기록이 있습니다.
바로 고구려에 대한 것으로 572년 무한카간이 사망하자 고구려가 사절을 파견했다는 기록이며
이 비문 동쪽 면 40줄 중 네 번째 줄에는 “동쪽의 해 뜨는 곳으로부터 뷔클리
(bükli<bök(köli<mäkkoli(맥코리)로도 읽는다)…에서 문상객이 와서 애도했다’고 적혀 있습니다. ‘뷔클리’는 ‘맥족고구려’라고 해석되기도 하며 이는 투르크족이 서방으로 진출하면서 고구려의 존재를 ‘코리’라는 이름으로 알렸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당시 돌궐과 교류하던 동로마 문헌에 고구려가 등장하는 배경이기도 합니다.
이후 10세기 왕건이 고구려를 계승하여 고려라 이름 했으며, 고려가 남송 및 아랍세계와 교역하면서 ‘코리아’라는 이름으로 널리 소개됨에 따라서 코리아 명칭은 고구려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몽골에서 발견된 돌궐의 황금 유물
[출처] 돌궐의 오른혼 비문과 고구려와의 관계|작성자 자유로운 영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