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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곧 교회다 순례의 축제인 유월절을 지키려고 수많은 인파가 예루살렘에 몰려 있었습니다. 로마의 식민지로 전락한 지 이미 오래였습니다. 그렇기에 예루살렘은 슬픔의 땅이었습니다. 메시야가 오시면 그런 상황이 끝나고, 이스라엘이 세계의 중심으로 우뚝 설 거라는 민중들의 기대와 소망이 최고조로 증폭되는 것이 바로 유월절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나귀를 타고 기드론 시내를 건너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셨습니다. 나귀는 작고 볼품없는 짐승이지만 팔레스타인 사람들에게는 가족이나 마찬가지인 짐승입니다. 무거운 짐을 등에 짊어지고 끄덕뜨덕 앞으로 나아가는 나귀를 보면 측은한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예수님이 평소에 나귀를 타고 다녔다는 말이 없는 것을 보면 유월절에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들어가신 것은 고도로 연출된 의례임을 알 수 있습니다. 상징 행위였다는 말입니다. 예수는 평화의 왕으로 예루살렘에 들어가셨습니다. 나귀 혹은 노새를 탄다는 것은 뭘 의미하는 것일까요? 즉위하는 왕이 통치하는 동안 안정과 평화가 깃들기를 기원하는 것일 겁니다. 급할 게 하나도 없다는 듯이 노량으로 걸어가는 나귀를 보노라면 우리 마음의 리듬도 절로 고요해집니다. 일종의 무력 시위인 그 행렬은 사람들의 내면에 공포감을 주입하는 동시에, 반역은 꿈도 꾸지 말라는 무언의 경고였던 것입니다. 나귀를 타신 예수님의 행렬은 그 행렬에 대한 부정 혹은 조롱입니다. 예수님은 폭력이 아니라 비폭력이, 지배가 아니라 섬김이, 경쟁이 아니라 협동이 참 삶의 원리임을 몸으로 보여주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요? 제국의 길과 하나님 나라의 길은 이렇게 어긋나고 있습니다. 하지만 제자들도, 예수를 보고 환호했던 군중들도 그 행진의 참 의미를 이해하지는 못했던 것 같습니다. 그 때문에 예수님은 외로우셨습니다. 무슬림들이 세계 어디에 있든지 메카를 향해 엎드리는 것처럼 이스라엘 사람들은 어떤 처지에 있든지 성전을 바라보며 기도를 올렸습니다. 다니엘은 다리우스 임금 이외의 어떤 신에게도 기도를 올리면 안 된다는 칙령이 내려졌음에도 불구하고 자기 집 다락방에 올라가 예루살렘 쪽으로 나 있는 창문 앞에 앉아 하루에 세 번씩 무릎을 꿇고 기도를 드렸습니다(단6:10). 그 때문에 그는 사자굴 속에 던져지기도 했지만 하나님의 보호하심으로 살아날 수 있었습니다. 시편 시인도 "내가 눈을 들어 산을 본다. 내 도움이 어디에서 오는가? 내 도움은 하늘과 땅을 만드신 주님에게서 온다"(시121:1-2)고 노래했습니다. 이때 그가 말하는 '산'은 북한산 도봉산 설악산 같은 산을 말하는 게 아닙니다. 그 산은 '시온산'입니다. 하나님의 성전이 있는 예루살렘이라는 말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로비 자금이 필요했고, 그 돈은 순박한 이들의 주머니에서 나올 수밖에 없었습니다. 높아지기 위해 돈을 쓰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인가 봅니다. 그것도 하나님을 섬긴다는 이들이 말입니다. 그것은 믿음의 배신이요 자기기만일 뿐입니다. 기득권에 연연하는 이들은 일쑤 '말末'을 붙잡느라 '본本'을 버립니다. 타락은 그렇게 시작됩니다. 성전은 공간의 구성 자체가 매우 위계적입니다. 대제사장이 일 년에 한 번 들어갈 수 있는 지성소, 제사장들이 희생제물을 바치는 성소, 유대인들이 머무는 뜰, 이방인이 머무는 뜰로 나뉘어져 있었습니다. 일종의 칸막이가 있었던 셈입니다. 성전에 들어서는 순간 사람들은 저절로 사제 계급의 권위 앞에 엎드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의궤란 왕실이나 국가행사가 끝난 후에 그 준비과정, 의식의 진행 절차, 논공행상 등에 관하여 기록해놓은 책입니다. 의궤에는 화공들의 정묘한 그림이 첨가되어 있어 그 당시의 풍습을 눈에 보일 듯 알 수 있기에 매우 중요한 자료입니다. 봉수당진찬도奉壽堂進饌圖(1795년)는 그 가운데서도 아주 유명한 것입니다. 정조가 화성에 가서 어머니 혜경궁 홍씨의 화갑을 기념한 잔치를 그린 것입니다. 의궤를 보면 잔치 공간은 문이나 휘장을 쳐서 구별되어 있었고, 참석자들은 신분에 따라 일정한 자리에 배치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신분질서의 강고함이 그대로 드러나고 있습니다. 마가는 그러한 율법학자들을 경계하라는 교훈에 이어 과부의 헌금 이야기를 배치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무리가 헌금함에 돈을 넣는 것을 보고 계셨습니다. 많이 넣는 부자들이 여럿 있었습니다. 그런데 가난한 과부 한 사람이 와서 렙돈 두 닢 곧 한 고드란트를 넣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불러놓고 말씀하셨습니다. 하지만 이 대목은 마가복음 12장 전체의 맥락에서 살펴야 합니다. 앞에서 우리는 예수님이 율법학자들을 경계하시면서 "그들은 과부의 가산을 삼킨다"고 말씀하셨음을 보았습니다. 여인은 절박한 심정으로 자기 생활비 전부를 봉헌했습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복을 받는 비결이라고 배웠겠지요. 여인은 그런 신심 행위를 통해 자기 삶도 좀 활짝 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을 겁니다. 여인의 행위를 기복적이라고 비난하면 안 됩니다. 나는 하나님께서 절박한 그 여인의 마음을 받으셨으리라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 가난한 과부의 헌금은 결국 제사장들과 율법학자들의 배를 채우는 데 사용되었을 것입니다. 과부의 가산을 삼킨다는 말이 가리키는 바가 바로 이것입니다. 예배는 세상의 창조자이시고 구원자이신 하나님을 기리는 행위입니다. 동시에 예배는 우리의 조각난 마음을 하나님 앞에 내려놓음으로써 하나님의 치유를 기다리는 행위입니다. 신앙의 벗들과 함께 드리는 예배를 통해 우리는 홀로가 아니라는 사실을 재확인하기도 합니다. 그렇기에 모이는 교회는 중요합니다. 하지만 교회는 흩어지는 교회이기도 해야 합니다. 신자들은 각자의 삶의 자리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손과 발이 되어야 합니다. 주님의 마음으로 이웃들의 생명을 풍성하게 하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믿음의 사람들은 삶을 통해 하나님의 현존을 드러내는 일에 부름을 받았습니다. 각자의 삶의 자리가 곧 교회입니다. 지금도 예루살렘에 있는 '통곡의 벽'에 가보면 벽을 세우는 데 사용한 돌 크기에 놀라게 됩니다. 기중기도 없던 시절에 그런 돌을 옮기고 또 그것을 돌 위에 겹쳐 놓는다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 제자는 예수님도 맞장구쳐주기를 바랐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주님의 대꾸는 냉랭합니다. "너는 이 큰 건물들을 보고 있느냐? 여기에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질 것이다"(13:2). 같은 대상을 보아도 보는 눈에 따라 다른 게 보이는 법입니다. 제자의 눈에는 웅장한 건물이 보였지만 예수님의 눈에는 본질을 잃어버린 성전의 퇴락이 보였습니다. 그러나 자기만족에 빠진 채 십자가의 길을 외면하는 교회는 아무리 많은 사람들이 모인다 해도 무너진 교회입니다. 우리는 근본적 질문 앞에 서 있습니다. '우리 교회는 참 교회인가?' '우리는 각자의 삶의 자리에서 그리스도의 몸으로 살고 있는가?' 순례길의 막바지에 우리는 이 질문에 삶으로 응답해야 합니다. 큰 건물로서의 교회당은 많지만 참다운 의미의 교회는 많지 않습니다. 지금이야말로 우리가 참 교회가 되어야 할 때입니다. 주님의 은총이 우리 가운데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아멘.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