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5:30~32 / 하나님의 뜻(공의)대로 심판하시는 예수님
(요 5:30) 내가 아무것도 스스로 할 수 없노라 듣는 대로 심판하노니 나는 나의 뜻대로 하려 하지 않고 나를 보내신 이의 뜻대로 하려 하므로 내 심판은 의로우니라
(요 5:31) 내가 만일 나를 위하여 증언하면 내 증언은 참되지 아니하되
(요 5:32) 나를 위하여 증언하시는 이가 따로 있으니 나를 위하여 증언하시는 그 증언이 참인 줄 아노라
하나님 나라는 성령 안에서 공의와 평화와 기쁨이 있는 나라입니다. 공의가 강물처럼 흐르는 나라, 억울함이 없는 나라입니다. 십자가의 세로 막대가 사랑이라면 가로 막대는 공의입니다. 사랑과 공의는 서로 반대되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처럼 서로 만나는 것입니다.
공의롭다 보면 사랑을 하게 되고, 사랑하다 보면 공의롭게 됩니다.
우리가 어떻게 공의가 강물처럼 흐르는 억울함이 없는 하나님 나라를 만들 수 있을까요?
30절 예수님은 심판자로 오시지만 아무것도 스스로 심판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신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것을 듣고 듣는 대로 심판하십니다. 요한복음에는 보내신 이가 18번 나옵니다. 우리는 스스로 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보내셔 온 것입니다.
자기의 뜻대로 심판하지 않고 보내신 하나님의 뜻대로 심판하십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영접지 않은 사마리아 사람을 곧바로 심판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을 모욕하고 십자가에 못 박은 사람들을 그 자리에서 심판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이 그들이 회개하기를 기다리고 회개치 않으면 재림의 날 심판하시기를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심판은 공의롭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판단하는 것이, 공의로운 것일까요?
첫째, 공의는 하나님의 법대로 판단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법은 십계명에 나타나 있습니다. 우리는 십계명의 말씀에 따라서 판단해야 합니다. 십계명의 속뜻을 알아야 합니다,
탐심도 우상숭배입니다. 미움도 살인입니다. 마음에 음욕을 품어도 간음입니다.
노동하여 자립하지 않으면 도둑질입니다. 진실을 말하지 않는 것은 거짓입니다.
팩트보다 중요한 것은 문맥 속에서 진실을 보고 판단하는 것입니다.
의료대란으로 응급실 뺑뺑이가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의료대란 전에도 빅5 병원에는 응급실 뺑뺑이가 있었습니다. 그때와 비교하여 의료대란 때를 보는 것이, 진실입니다. 우리 교회는 규약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법에 따라서 우리 교회를 운영해야 합니다. 그것이 공의입니다.
둘째, 외모로 판단하지 않고 평등하게 판단하는 것입니다.‘
외모지상주의’라는 말이 있습니다. 똑같은 사람인데 낮과 밤의 외모가 달라집니다. 외모에 따라서 사람들이 대하는 것이 천지 차이입니다. 이것은 공의가 아닙니다. 외모는 생김새입니다. 외모는 학력이나 권력이나 돈도 포함됩니다. 이런 것을 가지고 판단하는 것은 공의가 아닙니다.
어느 나라 사람인가를 보고 판단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일본인이라고 다 악하고 조선이라고 다 선하다는 선입견도 버려야 합니다. 차인표의 소설 ‘언젠가 우리가 같은 별을 바라본다면’에 보면 일본인 중에서 위안부에 끌려가는 가는 것을 반대하는 일본 군인이 나오고 위안부에 끌려가는 것을 도와주는 조선 사람이 나옵니다.
셋째, ‘나’와의 관계보다는 하나님과의 관계로 그 사람을 대우하는 것이 공의입니다.
다윗이 사울 왕을 나와의 관계로 보면 원수입니다. 다윗 중심으로 보면 그를 죽이는 것이 공의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과의 관계로 보면 사울 왕은 하나님이 기름 부은 종입니다.
다윗은 사울 왕을 죽일 수 있는 기회가 두 번 있었지만 죽이지 않고 선대 하였습니다.
공권력이 미치지 못할 때는 하나님이 원수 갚으실 것을 믿고 기다리는 것이 공의입니다.
넷째, 공의는 중심을 보는 것입니다. 동기와 목적을 보아야 합니다. 똑같은 행동도 자신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해서 하는 것이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했는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했는지를 보고 판단해야 합니다. 그 사람의 중심을 보고 판단하는 것입니다.
사울 왕은 중심이 자신에게 있었고 다윗은 중심이 하나님께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사울을 버리고 다윗을 선택하셨습니다. 사람들은 헌금한 액수만 봅니다. 액수가 많으면 많이 헌금하였다고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전 재산 이천 원을 드린 과부가 백만 원을 헌금한 부자보다 더 많이 헌금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요한 계시록에 보면 이름 있는 사대교회를 죽은 교회라고 하고 헌금이 많이 나오는 라오디게아 교회를 토할 것 같다고 하십니다. 작은 교회인 빌라델피아 교회를 큰 교회라고 하고 핍박받는 서마나 교회를 살아 있는 교회라고 하십니다. 한 목동이 자신이 번 돈의 십일조를 드리고 남은 돈의 전부를 헌금하였습니다. 그것은 부자가 몇억을 헌금한 것보다 더 귀한 것입니다.
다섯째, 결과보다 과정을 보는 것입니다. 세상에서는 결과만 보고 판단하지만, 예수님은 과정을 보시고 판단하십니다. 두 달란트나 다섯 달란트 착하고 충성되므로 똑같은 상을 주었습니다. 그러나 한 달란트 받은 자는 악하고 게을러서 심판을 받습니다. 세상은 결과인 열매만 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나무를 보십니다.
한국 최초의 토마스 선교사는 한 사람도 전도하지 못하고 성경책만 던지고 순교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에게 큰 상을 주십니다. 스데반도 한 사람도 전도하지 못하였지만, 하나님을 사랑하였으므로 하나님의 큰 상이 있습니다.
여섯째, 과거보다 현재를 보는 것입니다. 과거에 죄를 지었어도 지금 회개하면 그를 용서하시고 다시 죄를 짓지 않을 것을 믿어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과거로 사람을 판단하지 말고 현재로 판단해야 합니다. 처음보다는 끝을 보아야 합니다. 과거 예수님을 믿었어도 지금 믿지 않으면 소용이 없습니다. 가룟 유다는 과거 예수님을 잘 믿었으나 끝에는 믿지 않았습니다.
세례 마태나 사도바울은 과거 예수님을 잘못 믿었으나 끝에는 잘 믿었습니다.
다윗은 과거 죄를 지었지만 회개하고 새로워졌습니다.
사람들은 한 번 죄를 지은 사람을 영원한 죄인으로 낙인찍어 버립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회개한 그를 의롭다고 하셨습니다. 그를 귀하게 사용하셨습니다. 공의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