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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가슴을 울리는 시 2 / 이종수 시인
내가 내일 떠나리라고 말하지 마세요
오늘도 내가 여전히 도착하고 있으니까요
깊이 들여다 보세요
봄 가지 위의 봉오리가 되기 위해서,
나의 새로 만든 둥우리 안에서 노래하기를 배우며
아직도 날개가 연약한 작은 새가 되기 위해서,
꽃 속의 송충이가 되기 위해서,
돌 속에 숨어 있는 보석이 되기 위해서
매초마다 나는 오고 있습니다
웃고 울기 위해서
두려워하고 희망을 갖기 위해서
나는 아직도 오고 있으며
내 심장의 맥박이
살아있는 모든 것의 탄생이며 죽음입니다
나는 강물 위에서 몸 바꾸는
하루살이며,
봄이 오면 때맞추어 그 하루살이를 잡아먹는
새입니다
나는 맑은 연못에서
즐겁게 헤엄치는 개구리이며
소리 없이 다가와
그 개구리를 잡아먹는
독 없는 뱀입니다
나는 다리가 대나무처럼 가늘고
가죽과 뼈만 남은 우간다의 아이이며
그 우간다에 치명적인 무기를 파는
무기상인입니다
나는 해적에게 강간을 당하고
바다에 투신한
그 작은 보트를 탔던,
12세의 난민 소녀이며,
그의 가슴이 사랑하는 능력을 지니지 못한
그 해적입니다
나는 손아귀에 권력을 쥐고 있는
공산당 정치부의 한 회원이며
강제노동 캠프에서 서서히 죽어가는
내 백성들의 피의 빚을 갚아야 될
그 사람입니다
내 기쁨은 봄과 같아
그 따스함이 우리의 인생 안에서
꽃 피우도록 만들고
내 고통은 눈물의 강과 같아
사해(四海)를 가득 채웁니다
단번에 모든 웃음과 눈물을 들을 수 있으며
내 고통과 내 기쁨이 하나임을 보도록
나를 제발 내 참 이름들로서 불러주세요
나를 깨워
자비의 문인
내 가슴의 문이 활짝 열리도록
나를 내 참 이름들로서 불러주세요
- 틱낫한, <나의 참 이름들로 나를 불러주세요>
오늘은 베트남 출신의 선승 틱낫한의 시로 시작한다. 누구나 해적과 소녀를 구분하고, 선과 악을 가려내기 쉽지만, 만약 내가 해적의 마을에서 태어나 저 12세 난민 소녀에게 총부리를 겨눌 수밖에 없도록 살았다면 어땠을까 생각해 보면 우리 모두가 그러한 현실에 대한 책임이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틱낫한 스님은 명상센터를 통해 많은 이들을 평화로움에 들게 하는 일을 하고 있지만 우리가 서로를 바라보며 서로 안에서 나를 확인할 수 있어야 한다고 했다. 내가 곧 해적이고 난민소녀일 수 있다는 고통에서 진정한 깨달음과 벗어남이 있어야만 꽃과 눈물의 참 이름으로 불릴 수 있다는 것이다. 너무나도 어려운 말이지만 시인이라면 ‘살아있는 모든 것의 탄생이며 죽음’인 저 근원의 물음에 답할 수 있어야 한다고 본다.
시인을 자연으로 돌아가게 하는, ‘느림과 비움’으로 구체화된 시가 있다. 그것이야말로 ‘온갖 생명 있는 것들을 이롭게 하며 더불어 사는 것’이라고 하는 시인의 장광설을 보라.
도시에서 반생을 협궤열차처럼 흘려보냈는데,
어느 날 내 마음을 들여다보았더니
마음은 헐어 누추하고 안쪽으로 몇 개의 궤양과 누공을 안고 있었지요.
생은 대책 없이 가여웠고. 횡격막 아래에서 기쁨의 알들을 부화시키지 못하는
벙어리 종달새 몇 마리는 침울해 했습니다.
마음이 자주 몸을 비우니, 난파선 같은 몸만 반인륜적이고 뻔뻔스럽게 시끄러웠지요.
몸을 나간 마음은 어딘가 고아원 복도 같은 차가운 공기가 웅성이는 곳을 떠돌며
쉬지 않고 딸꾹질을 해댔습니다.
(...)
무릇 의로움이란 노동으로 생계를 세워 남에게 폐 끼치지 않고 단순하게 사는 것이며,
땅 위의 온갖 생명 있는 것들을 이롭게 하며 더불어 사는 것이지요.
저는 쓰고 남은 목재 위를 기어가는 민달팽이나
물 속의 띠우묵날도래 한 마리 이롭게 하지도 못하고 고작 투덜거리는 한 헐벗은 영혼을
섬기느라 속진을 뒤집어쓰며, 오욕의 문자로 내 삶의 페이지들을 채웠던 것이지요.
물가에 지은 집에 수졸재라는 이름을 붙였는데, 낮은 자리를 지키며 사는 사람의 집이란 뜻이지요. 수졸재에 와서 비로소 묵은 양말을 벗고 발을 씻어보는 것인데, 그러고 나니 잠은 희고 깨끗했습니다.
(...)
내 심령은 이곳에 내려온 뒤
일급수의 물살을 거슬러 오르는 버들치보다 더 씩씩해졌습니다.
- 장석주, <느림과 비움> 부분
단촐하지 못한 점이 아쉽다. 협궤열차, 난파선, 속진, 오욕이 너무 많이 겹쳐 있어 ‘수졸재’에 걸맞지 않은 듯 늘어졌다. 그에 비해서 조식 선생의 한시는 짧지만 크고 깊은 울림을 준다.
천석들이 종을 보게나! 請看千石鍾
크게 치지 않으면 소리 없다네 非大扣無聲
어떻게 하면 두류산처럼 爭似頭流山
하늘이 울어도 울지 않을 수 있을까? 天鳴猶不鳴
- 조식, <덕산 계정의 기둥에 씀, 題德山溪亭株>
<예기禮記>의 ‘학기學記’에 보면, “질문에 잘 답하는 것은 종을 치는 일과 같다. 작게 치면 작게 울리고, 크게 치면 크게 울린다.”는 말이 있다. 곧 선생은 종이고 학생은 종을 치는 사람이어서 질문을 잘 하면 좋은 대답을 들을 수 있다고 했다. 16세기 성리학에 대세였던 조선조, 형이상학적인 문제에만 몰두해 이론적인 논쟁만을 일삼은 풍조를 우려해 실천적인 학문을 역설한 영남 사림의 거두 조식 선생의 시를 보면, 세상이 자신을 알아 주어 크게 쓰면, 큰 일을 할 능력을 갖고 있다는 뜻이 담겨 있다. 천석들이 돌종을 울릴 수 있는, 세상에 대한 물음과 대답이야말로 시이지 않을까.
이것은 말해야 할 때 침묵하는 것, 침묵해야 할 때 말하는 것이란 톨스토이의 글을 떠올리게 한다.
혀 끝까지 나온 나쁜 말을 내뱉지 않고 삼켜버리는 것,
그것이 세상에서 가장 좋은 음료이다.
언제 어떻게 말하는지 배우는 것도 중요하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언제 어떻게 침묵해야 하는가다.
잘못 말한 것을 후회하는 일은 많다.
하지만 침묵한 것을 후회하는 경우는 없다.
더 많이 말하고 싶어 할수록
하지 말아야 할 말을 해버릴 위험은 커진다.
‘저는 모르겠습니다.’라는 말을
더 자주 하도록 혀를 훈련하라.
등 뒤에서 나를 욕하는 이는
나를 두려워하는 것이다.
면전에서 나를 칭찬하는 이는
나를 미워하는 것이다.
말은 힘이 세다.
말은 사람들을 하나로 만들기도 하지만
때로는 갈라놓기도 한다.
말로 사랑을 만들 수도
적대감을 빚을 수도 있다.
잘못된 생각을 드러내는 두 가지 행동이 있다.
말해야 할 때 침묵하는 것,
그리고 침묵해야 할 때 말하는 것이다.
- 톨스토이, <좋은 음료>
시에서 필요한 함축에 빗대어 보면 너무 많은 것을 말하려다 실패한 시를 말하고 있는 듯하다. 그것은 곧 ‘뻘에 말뚝 박는 법’과 비슷하다.
뻘에 말뚝을 박으려면
긴 정치망 말이나 김 말도
짧은 새우 그물 말이나 큰 말 잡아 줄 써개말도
말뚝을 잡고 손으로 또는 발로
좌우로 또는 앞뒤로 흔들어야 한다
힘으로 내리 박는 것이 아니라
흔들다보면 뻘이 물러지고 물기에 젖어
뻘이 말뚝을 품어 제 몸으로 빨아들일 때까지
좌우로 또는 앞뒤로 열심히 흔들어야 한다
뻘이 말뚝을 빨아들여 점점 빨리 깊이 빨아주어
정말 외설스럽다는 느낌이 올 때까지
흔들어주어야 한다
수평이 수직을 세워
그물 넝쿨을 걸고
물고기 열매를 주렁주렁 매달 상상을 하며
좌우로 또는 앞뒤로
흔들며 지그시 눌러주기만 하면 된다
- 함민복, <뻘에 말뚝 박는 법>
이것은 다른 시 ‘딱딱하게 발기만 하는 문명에게’에서도 볼 수 있다. “거대한 반죽 뻘은 큰 말씀이다/쉽게 만들 것은/아무 것도 없다는/물컹물컹한 말씀이다/수천 수만 년 밤낮으로/조금 무쉬 한물 두물 사리/소금물 다시 잡으며/반죽을 개고 또 개는/무엇을 만드는 법을 보여주는 게 아니라/함부로 만들지 않는 법을 펼쳐 보여주는/물컹물컹 깊은 말씀이다” “말랑말랑한 흙이 말랑말랑 발을 잡아준다/말랑말랑한 흙이 말랑말랑 가는 길을 잡아준다//말랑말랑한 힘/말랑말랑한 힘”(<뻘>)
오지 않는 잠을 부르러 강가로 나가
물도 베개를 베고 잔다는 것을 안다
물이 베고 잠든 베갯머리에는
오종종 모인 마을이 수놓아져 있다
낮에는 그저 강물이나 흘려보내는
심드렁한 마을이었다가
수묵을 치는 어둠이 번지면 기꺼이
뒤척이는 강물의 베개가 되어주는 마을,
물이 베고 잠든 베갯머리에는
무너진 돌탑과 뿌리만 남은 당산나무와
새끼를 친 암소의 울음소리와
깜빡깜빡 잠을 놓치는 가로등과
물머리집 할머니의 불 꺼진 방이 있다
물이 새근새근 잠든 베갯머리에는
강물이 꾸는 꿈을 궁리하다 잠을 놓친 사내가
강가로 나가고 없는 빈집도 한 땀,
물의 베개에 수놓아져 있다
- 박성우, <물의 베개>
강을 이렇게 한 땀 한 땀 수놓은 베개에 비유하기는 어렵다. 베갯머리에 오종종 모인 마을이 수놓아져 있다는 것은 어릴 적부터 그곳에 살아오거나 강물이 꾸는 꿈을 궁리하다 잠을 놓친 사내의 마음이 되어보지 않고는 쓸 수 없을 것 같다. 물의 베개만으로도 다음 행을 그릴 수 있을 만큼 잘 맞아떨어지는 발견이라고 할 수 있다.
산골짝 오월 밭뙈기가
빨강 분홍 목단꽃이불을 덮고 있다
가만 들여다볼수록
어쩐지 촌스럽기 짝이 없어
아슴아슴 예쁜 목단꽃, 벙글벙글하다
엄니 아부지도 촌스럽게
저 목단꽃이불 뒤집어쓰고
발가락에 힘을 줘가며 끙끙 피어났겠지
큰누나 큰성도 함박, 누이들도 나도 막내도 함박
시큼시큼 피워냈을 것을 생각하면
목단꽃을 한낱 촌스럽기 짝이 없는 꽃이라
함부로 말하면 안 되겠구나, 생각하다가
목단꽃은 어째 촌스러웠으면 좋겠다고
어쩐지 더 더 더 촌스럽기 짝이 없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다가
목단꽃이불을 흠씬 당겨보는 것인데
뻔한 세간 옮길 때마다 꾸려지던
목단꽃이불은 언제 사라진 걸까?
가까운 오래전 명절 밤,
목단꽃이불을 코끝까지 당겨 앉은 나는
툭 불거져 나온 발의 개수를 가만가만 세어본다
- 박성우, <목단꽃 이불>
눈을 감을라치면 번쩍이는 잔상이 느껴질 만큼 ‘물의 베개’와 닮은 시다. 산골짝 오월 밭뙈기를 보고서 식구들이 함께 덥던 목단꽃 이불을 생각해내는 자연스러운 시골마음(?)이 그대로 드러난다.
그녀, 이불 속 혈맥을 누빔질하다
그녀의 헐벗은 둔덕을 덮어주는 새 홑청
빈몸을 깨우는 꽃수가 류마티스다
앙가조촘 다문 몸을 간지럼 먹이는 손에 군살지다
심상치 않다, 몽울 터지는 이 봄, 매듭 풀려 곁길까지 애붉다
집중해도 어느 사이 어칠비칠 손을 찔린다
침 맞은 셈이라고 입술로 쪽쪽 제 살 빨지만
잘못 본 것이다, 황사의 시력을 공구르기 한다
바로 걸어도 발자국은 들면날면, 울다 웃다 눈발이 곤두박이다
잘못 들은 것이다, 환청이라고 가재걸음 치는 제 몸을 접합해도
이미 길은 맹지로 갇혀 있다, 업보다
가위질한 길 앞에서 그녀 다시 바늘귀를 꿴다
애초 없던 꽃자리이니 채울 것 없다는데
시(詩)마저 시접도 없이 실밥만 늘어진다
빨고 다림질해 말짱해진 들판도 들여다보면
앙다문 땀 땀에서 열꽃이 솟는다, 그 해
설레발레 실 엉키던 겨울은 춘분 한식 지나도록
시퍼런 바늘 반란, 그 중심에 서 있노라니
추위도 무서움도 없어졌다며 그렇게 그녀
매대기친 자락 다시 집어 바느질한다
이왕지사 선걸음이니 내처 가자
올매듭 짓지 않은 시침질이란 올을 풀리는 길목을 잠시 막는 방편
그해 꽃밭의 미완을 류마티스 앓는 봄비는 알고 있다.
- 김유선, <봄비의 외연과 내포 사이>
그에 비해서 규중칠우쟁론기(척부인(자)·교두각시(가위)·세요각시(바늘)·청홍각시(실)·감투할미(골무)·인화낭자(인두)·울낭자(다리미) 등이 자기가 없으면 옷을 어떻게 지을 수 있겠느냐고 공을 다투는 가전체 국문수필)의 한 대목을 보는 듯 섬세한 여인의 손길이 느껴지는 시도 있다. 식구들을 먹이는 한 끼의 식사와 가사노동을 통해서 접목해 볼 수 있는 외연과 내포(내포는 한 명사나 개념의 형식적 정의(定義)를 이루는 내재적 내용을 가리키며, 외연은 한 명사나 개념이 적용되는 특수한 대상들의 범위를 가리킨다. 예를 들면 '배'라는 명사의 내포는 '물 위에서 운반할 수 있도록 만들어진 용기'인 반면에 외연은 화물선·여객선·전함·돛단배와 같은 대상들을 포괄한다. 내포와 외연의 구별은 함축(connotation)과 지칭(denotation)의 구별과는 다르다.)가 섬세한 노동을 통해 비춰지고 있다. 이런 점은 꼭 여성시의 전형쯤으로 여기지 말고 충분히 써 볼만 한 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