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바라기
손진은
몰랐다 하늘 아래 끝도 안 보이는 해바라기들이 피고 진다는 걸
제 생을 피우느라 울고 웃고 찡그리고 벅찼을
사내들 노오란 하늘 떨려나갈 때까지
까만 씨앗 저무는 하루 건사하는 걸
기도 흉내만 내며 벙긋벙긋 웃는 가녀린 줄기였다가
제법 그 피가 차오르고
근육이, 뼈가 단단해지는 걸
누가 루마니아 평원에서 찍어보낸, 세상 눈알 다 모아놓은 둘레로
불을 지고 흔들리는 족속 보고서야 알았다
사내라면 누구든 수천 평 씨앗 뿌리고 먹여 살리는 멀쑥한 꽃대
물 샐 틈 없는 피와 근육, 뼈 거느린
둥근 얼굴에 검은 씨들 앉히고
웃고 울고 찢기고 넘어지며 등 굽은 박수나 치다가
언 발 바람 든 뼈로 구름 덜컹이는 창문 곁에 눕거나
종소리도 없이 목 꺾인 줄기가 우수수수, 저문 언덕 넘어가는 것을
해바라기들, 구직란 보느라 핸드폰 액정에 빠져 사는
일 하나 받을까, 온종일 이 사람 저 사람 찾아 연명하는
앞도 옆도 뒤도 빽빽히 굵은 소금 같은 소낙비 맞고 있는
그러고 보니 나도 해바라기 힘줄의 물샐 틈 없는 소년을
격렬한 각오의, 떨어진 단추 뒹구는 모래 언덕의 청년을
일터 전전하는 수 천 평 그 밭의 아비를 느리게 건너
환한 겉과 쪼그라진 심장 매단 초로가 되었다
『현대시학』, 2022. 9-10월호]
곰
도서관에서 나와 잠깐 쉰다는 게
공원 벤치에 큰대자로 곯아떨어진 사내
행인들 인기척 담배 연기에도 기침 한 개비 없이
이마에 땀 흥건해질 때까지 자다
천둥 번개가 후려쳐 한참을 멍하니 앉은,
어느새 몸속에 덩치 큰 곰이 들어와 앉은 사내
그래도 그는 좋다, 초록 외엔 아무도 없는 공원
빗방울만 후두둑 몸을 깨우는 숲이!
무얼까?
곰, 그쪽과 맞닥뜨린 세월도 없는데
긴 공용의자, 그 노상침실에 그를 눕히고 비끄러맨 건,
그 사이, 생로병사 네 글자가 우지끈 끊어지며
마디마디 곰의 사지를 이어준 건,
그렇담 어떻게 덩치 큰 저 곰을 끄집어내나?
풀잎부터 가지 열매 들짐승
잡식의 그를 무슨 힘으로?
일단 오늘은
열람실까지 놈 잘 밀어넣고
착해진 몸으로 야생의 열맬 훑어먹는 걸 지긋이 바라보다가
슬슬 가방을 싸고 냄샐 맡으며 동굴로 향하는
놈의 짧고 굵은 다리를 따라 어슬렁
저물어보기로 한다
큰 덩치의 놈을 따르는 일이 어딘가?
오소리 들쥐가 아니어서 다행이야! 잠의 기억을 털며 돌아가는 길
『신생』 2022. 가을호.
손진은 시인
1987년 《동아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1995년 《매일신문》 신춘문예 문학평론 당선
시집 『저 눈들을 밤의 창이라 부른다』외 3권. 저서 『시창작교육론』외 8권.
금복문화상, 시와경계문학상, 대구시인협회상 외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