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소를 절이거나 발효시키는 식품은 다른 나라 문화권에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지만, 우리나라처럼 가족이나 이웃 등 공동체를 중심으로 비슷한 시기에 대량으로 김치를 담그는 일은 드물다. 유네스코가 한국의 김장문화를 인류무형유산으로 등재한 것도 이런 배경 때문이다.
학자들은 대략 3000년 전부터 김치가 있었다고 본다. 고려시대 이규보의 문집인 [동국이상국집]에는 순무 장아찌와 소금 절임에 관한 기록이 있다. 조선시대 이전의 김치는 각종 채소류를 절인 정도의 식품이었다. 고추가 들어온 임진왜란 이후에 본격적으로 고춧가루를 사용한 김치의 흔적이 보인다. 18세기 중반에 나온 [증보산림경제]에는 배추김치를 ‘숭침저’라 하고 무려 34가지의 절임 채소류와 오늘날 같은 빨간 김치에 관한 기록이 있다.
[농가월령가]의 10월 편에는 김장하는 모습이 세세히 기록되어있다. 무, 배추 캐어들어/ 김장을 하오리라/ 앞 냇물에 정히 씻어/ 함담을 막게 하소/(편집자 주: 鹹淡 너무 짜거나 싱거운) 양지에 가가(假家)짓고/ 짚에 싸 깊이 묻고. 중국이나 일본과 달리 불을 덜 사용했던 우리는 튀기는 요리보다 채소 절임요리가 발달했고, 땔감도 귀해서 한 번 담가두면 간편하게 꺼내 먹을 수 있는 김치가 중요한 양식이 됐다.
세계김치연구소의 박채린 박사는 “김장은 품앗이와 나눔 문화를 형성했는데, 우리 밥상에서 밥, 국과 함께 김치가 주식으로서 중요한 역할을 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박 박사는 “길게는 1년, 최소 3개월 이상 먹어야 하는 많은 양의 김치를 추운 11월께 3~4일 만에 한꺼번에 담가야 했다”면서 마을공동체가 나설 수밖에 없는 이유를 설명했다. 부엌살림을 책임지는 부녀자 혼자 치러내기에는 규모가 너무 큰일이었다는 것이다. 노동력을 제공한 이들에게는 자연스럽게 식사를 대접하고 김장김치를 나눠주었다. 김장은 또한 가장의 경제력을 검증 받는 일이었다. 70~90년대 직장인들이 받던 ‘김장 보너스’의 등장도 같은 맥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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