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독서
"나는 새 계약을 맺고 죄를 기억하지 않겠다."
<예레미야서의 말씀 31,31-34>
31 보라, 그날이 온다. 주님의 말씀이다.
그때에 나는 이스라엘 집안과 유다 집안과 새 계약을 맺겠다.
32 그것은 내가 그 조상들의 손을 잡고 이집트 땅에서 이끌고 나올 때에 그들과 맺었던 계약과는 다르다.
그들은 내가 저희 남편인데도 내 계약을 깨뜨렸다.
주님의 말씀이다.
33 그 시대가 지난 뒤에 내가 이스라엘 집안과 맺어 줄 계약은 이러하다.
주님의 말씀이다.
나는 그들의 가슴에 내 법을 넣어 주고, 그들의 마음에 그 법을 새겨 주겠다.
그리하여 나는 그들의 하느님이 되고 그들은 나의 백성이 될 것이다.
34 그때에는 더 이상 아무도 자기 이웃에게, 아무도 자기 형제에게 “주님을 알아라.” 하고 가르치지 않을 것이다.
그들이 낮은 사람부터 높은 사람까지 모두 나를 알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주님의 말씀이다.
나는 그들의 허물을 용서하고, 그들의 죄를 더 이상 기억하지 않겠다.
제2독서
"예수님께서는 순종을 배우셨고,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셨습니다."
<히브리서의 말씀 5,7-9>
7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에 계실 때,
당신을 죽음에서 구하실 수 있는 분께 큰 소리로 부르짖고 눈물을 흘리며 기도와 탄원을 올리셨고,
하느님께서는 그 경외심 때문에 들어 주셨습니다.
8 예수님께서는 아드님이시지만 고난을 겪으심으로써 순종을 배우셨습니다.
9 그리고 완전하게 되신 뒤에는 당신께 순종하는 모든 이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셨습니다.
복음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 12,20-33>
20 축제 때에 예배를 드리러 올라온 이들 가운데 그리스 사람도 몇 명 있었다.
21 그들은 갈릴래아의 벳사이다 출신 필립보에게 다가가, “선생님, 예수님을 뵙고 싶습니다.” 하고 청하였다.
22 필립보가 안드레아에게 가서 말하고 안드레아와 필립보가 예수님께 가서 말씀드리자,
23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 사람의 아들이 영광스럽게 될 때가 왔다.
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25 자기 목숨을 사랑하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이 세상에서 자기 목숨을 미워하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에 이르도록 목숨을 간직할 것이다.
26 누구든지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라야 한다.
내가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사람도 함께 있을 것이다.
누구든지 나를 섬기면 아버지께서 그를 존중해 주실 것이다.”
27 “이제 제 마음이 산란합니다.
무슨 말씀을 드려야 합니까?
‘아버지, 이때를 벗어나게 해 주십시오.’ 하고 말할까요?
그러나 저는 바로 이때를 위하여 온 것입니다.
28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십시오.”
그러자 하늘에서 “나는 이미 그것을 영광스럽게 하였고 또다시 영광스럽게 하겠다.”는 소리가 들려왔다.
29 그곳에 서 있다가 이 소리를 들은 군중은 천둥이 울렸다고 하였다.
그러나 “천사가 저분에게 말하였다.” 하는 이들도 있었다.
30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 그 소리는 내가 아니라 너희를 위하여 내린 것이다.
31 이제 이 세상은 심판을 받는다.
이제 이 세상의 우두머리가 밖으로 쫓겨날 것이다.
32 나는 땅에서 들어 올려지면 모든 사람을 나에게 이끌어 들일 것이다.”
33 예수님께서는 이 말씀으로, 당신께서 어떻게 죽임을 당하실 것인지 가리키신 것이다.
♣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의 묵상글
4세기 박해시기가 끝나자 그리스도의 삶을 온전히 따르고자 하는 이들은 어려움을 겪게 됩니다.
그리스도를 가장 잘 본받는 길은 십자가 위의 죽음을 따르는 순교라고 여겼는데, 이제 순교가 불가능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성직자와 수도자들의 지위가 올라가면서 교회는 세속화에 빠집니다.
돈을 주고서 성직을 사고파는 성직매매까지 이루어지면서 주님께서 경고하셨던 부와 명예만 추구하는 장사하는 집이 된 것입니다.
교회의 부패가 나타나기 시작했던 것이지요.
많은 이들은 교회가 사라질 수 있는 커다란 위기로 생각했습니다.
이러한 상태를 어떻게 극복했기에 지금 현재까지 교회를 유지할 수 있었을까요?
바로 기도하는 사람들의 힘이었습니다.
당시의 교부들은 실제 피를 흘리는 순교도 중요하지만, 평생 하느님을 따르기 위해 자신과 싸우는 의지의 순교도 매우 중요하다고 강조했습니다.
그 결과 많은 수도자들의 헌신이 생겼습니다.
수도자들은 척박한 땅으로 들어가서 오로지 하느님만을 따르기 위해 자신과 싸웠습니다.
끔찍하다고 말할 수 있을 만큼, 극기와 보속을 실천하면서 기도와 묵상에 전념했습니다.
그래서 다시 하느님의 집인 교회가 은총을 파는 거룩한 곳이 될 수 있도록 했습니다.
교회 안에서 커다란 위기가 다가왔을 때에 이렇게 늘 영웅이 있었습니다.
바로 기도를 통해서 하느님과 함께 하는 사람들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지금까지도 교회가 유지될 수 있는 커다란 힘이었습니다.
지금 현재 교회의 큰 위기가 왔다고 말합니다.
아니 교회를 뛰어넘어 이 세상에 커다란 위기가 찾아오고 있다면서 사람들은 불안해합니다.
누구는 몇몇의 잘못으로 인해서 교회나 세상이 혼란과 위기를 가져왔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몇몇의 영웅으로 인해서 교회나 세상이 다시 변화되어 성장될 수 있다는 것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주님께서도 원하시는 모습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요한 12,24)
라고 말씀하시면서
“자기 목숨을 사랑하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이 세상에서 자기 목숨을 미워하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에 이르도록 목숨을 간직할 것이다.”
라고 하셨습니다.
이 세상 안에서 한 알의 밀알이 되어 많은 열매를 맺을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이를 직접 모범으로 보여주셨습니다.
당신의 십자가 죽음을 통해서 얼마나 많은 열매가 맺을 수 있었습니까?
제2독서의 히브리어 저자가 말한 것처럼,
하느님의 외아드님이시지만 직접 고난을 겪으심으로써 순종을 보여주셨고
이로 인해 하느님의 뜻인 구원이 우리 곁에 다가올 수 있었습니다(히브 5,8-9 참조).
이것이 바로 오늘의 제1독서의 예레미야 예언자가 말한 새계약이 완성되는 것이었습니다.
머리에 재를 뿌린 재의 수요일로 시작한 사순 시기가 벌써 5주의 시간을 보냈습니다.
주님의 수난과 죽음을 묵상하는 사순시기에 우리는 얼마나 주님과 함께하고 있었을까요?
아직도 내 자신만을 사랑하면서 주님으로부터 받은 밀알 하나를 소중하게 간직만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싶습니다.
주님의 뜻이 많은 열매를 맺지 못하고 그래서 이 세상 안에 힘들어하는 줄어들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요?
인생의 목적이 자기만의 편안과 유익을 위한다면 길을 잃게 됩니다.
자기만을 위해 산다면 많은 돈을 벌고 높은 지위를 얻는다고 해도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편안함이 좋은 것 같지만 항상 좋은 것만은 아닙니다.
맑은 날만 있으면 세상은 사막이 된다고 하지요.
우리의 인생 역시 좋은 날만 있으면 영혼이 메마르면서 지루함을 느끼게 됩니다.
그래서 자극적인 것을 찾게 되고, 이 안에서 죄의 굴레에 빠지고 마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나 혼자만의 편안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평화입니다.
내 자신을 버리고 주님의 뜻에 맞게 살아가는 모습.
그래서 주님으로부터 받은 한 알의 밀알이 죽어서 많은 열매를 맺을 수 있을 때
주님께서 주시는 진정한 평화와 기쁨을 얻게 될 것입니다.
- 인천교구 갑곶순교성지
♣ 전삼용 요셉 신부님의 묵상글
<"불의한 재물로 친구를 사귀어라">
미국 남북 전쟁이 있을 때의 일입니다.
북군에서 전쟁에 나갈 군인을 징발할 때에 전쟁에 나갈 만한 사람들을 제비 뽑았는데
설상가상으로 가족도 많고 부모도 계시고 전쟁에 나가면 그 가족을 전혀 부양할 사람이 없는 사람이 그만 제비에 뽑혀서 나갈 수밖에 없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런 광경을 보고 그 친구 가운데, 부모도 안 계시고 아직 결혼도 하지 아니한 젊은이가 있다가
대신 자원해서 전쟁터에 나가겠다고 그 징발하는 책임자에게 말하니까
그도 감격해서 대신 그 젊은이로 하여금 전쟁터에 나가도록 허락하였다고 합니다.
자기 동네에서 자기 가족을 부양하고 있는 이 사람이 자기 대신 나간 사람에 대한 감격이 얼마나 깊었던가는 말로 다 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언제든지 신문을 보면 얼른 전쟁 뉴스부터 먼저 보고
특별히 어떤 곳에 격전이 있다고 하면 거기 혹 자기 친구가 들지 않았는가 해서 먼저 그것부터 살펴보고
또 이따금 죽은 사람의 명단이 나게 되어도 행여 자기 친구가 전사하지 않았나 제일 먼저 그것만 보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불행히 한 번은 큰 격전이 있게 되었는데
그만 자기 친구가 그 격전 가운데서 싸울 수밖에 없었고,
그 다음에 신문에 나는 것을 보니까 죽은 사람의 명단 가운데 그 사람의 이름이 나타났다고 합니다.
그런 신문을 보고 이 사람이 앞이 아득했습니다.
곧 그 싸움터에 나가서 자기 대신 죽은 그 시체를 친히 모셔다가 자기 가족 공동묘지에 그 시체를 묻고
그의 이름을 쓰고 그 아래는 간단히 “그는 나를 위하여 죽었다”라는 묘비를 세웠다고 합니다.
“그는 나를 위하여 죽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열매를 맺지 못한다고 하십니다.
이는 당신의 운명을 미리 예언하시는 말씀입니다.
당신은 열매 맺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분의 죽음으로 맺은 열매는 무엇일까요?
바로 교회입니다.
교회를 탄생시키셨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교회 안에 함께 머무십니다.
교회 안에 당신 무덤을 만드시기 위해 교회를 위하여 돌아가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또한 그런 삶을 살라고 재촉하고 계십니다.
큰 가시고기의 父情은 유명합니다.
큰 가시고기는 둥지를 짓는 유일한 물고기라고도 합니다.
암컷은 둥지에 알을 낳고 떠나갑니다.
그러면 수컷은 알 냄새를 막기 위해 수풀과 돌들로 방어막을 칩니다.
그리고 수천 개에 해당하는 알들을 일일이 뒤집어주고 바람을 쏘여줍니다.
큰 가시고기는 알들에게 계속 부채질을 해 주고 알을 훔치러 온 녀석들과 싸웁니다.
그래서 먹지도 않고 잠을 자지도 않습니다.
사흘이 지나면 부화가 시작됩니다.
그러면 큰 가시고기는 더욱 바빠집니다.
먼저 깨어난 새끼들을 돌보고 늦게 깨어나는 고기들을 위해 계속 지느러미로 산소를 공급해줍니다.
그렇게 하다보면 어느새 몸은 푸른색으로 변하고 지느러미는 갈라져 더 이상 물에 뜰 수 없게 됩니다.
새끼를 모두 탄생시킨 5일째, 아비 물고기는 힘이 빠져 가라앉아 죽음을 맞이합니다.
그러면 새끼들이 아비 가시고기의 살을 먹으며 바다로 나갈 힘을 얻습니다.
그리스도께서도 그러하셨듯이, 우리 삶의 목적은 죽음입니다.
죽음으로 땅을 차지하는 것입니다.
아벨이 죽음으로 땅을 차지하고 카인을 쫓아냈듯이,
땅을 차지하는 유일한 힘은 피입니다.
그 땅이 곧 교회입니다.
그 땅이 곧 가나안 땅이고 하느님나라입니다.
모세는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한 것이 아닙니다.
이스라엘 백성 안으로 묻힌 것입니다.
모세는 교회 안에 자신의 무덤을 만든 것입니다.
하느님나라에 들어간 것입니다.
이를 더 잘 이해시키시기 위해 그리스도께서는 약삭빠른 청지기의 비유를 들려주십니다.
청지기는 주인의 재산으로 자신을 맞아줄 친구들을 사귀기 시작합니다.
주인도 칭찬해주고 예수님도 칭찬해주십니다.
분명히 주인의 재산을 도둑질하며 친구를 사귀었는데 칭찬해 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도 부정한 재물로 친구를 사귀어라.”
우리가 가진 모든 것들은 다 주인의 것입니다.
내가 남에게 무엇을 줄 때나 하느님께 무언가를 봉헌한다고 할 때
다 주님의 것으로 하기 때문에 의롭지 못한 재물인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라도 하게 되면 나중에 그들이 우리를 받아들이게 될 터인데
그 곳이 곧 교회요 천상 예루살렘이요 하느님 나라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아버지로부터 받은 생명을 우리를 위해 바치셨습니다.
이는 우리 안에 당신 처소를 만들기 위함이셨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성전이 되고 그리스도는 또 우리의 성전이 되어주시는 것입니다.
내가 누군가의 안으로 들어갈 수 있어야, 또 누군가가 내 안에 살게 되는 것입니다.
온유한 자는 땅을 차지하게 됩니다.
온유는 그리스도의 멍에를 메고 그분의 뜻인 우리 자신을 이웃을 위해 내어주는 마음입니다.
그 마음만이 우리가 장차 머물게 될 땅을 차지할 수 우리의 죄 때문만이 아니라
당신 몸을 우리 안에 심기 위해서 돌아가신 것입니다.
제주도에서 한 아파트에 불이 났을 때아버지가 남겨진 아들을 구하기 위해 아무 보호 장비도
갖추지 않고 불길 속으로 뛰어들어 아들을 구해오는 동영상이 있습니다.
그 아버지는 아들의 마음 안에 영원히 살게 됩니다.
목숨으로 자신이 갈 곳을 마련해 놓은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갈 곳이 없어 구천을 떠돌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지옥입니다.
전재용 선장은 바다 위에서 죽어가는 베트남 난민 96명의 생명을 구해줌으로써
이 세상에서는 보잘 것 없는 사람이 되어버렸지만 나중에는 그들에 의해 미국으로 초청을 받습니다.
결국 하느님 나라에서 우리를 맞아주는 이들은 우리가 친구를 맺은 이들입니다.
왜냐하면 그 가장 보잘 것 없는 이들이 결국 하느님 나라의 주인이신 그리스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가장 보잘 것 없는 이들과 당신을 동일시 하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당신 무덤을 만드시려고 했던 것처럼,
이웃 안에 우리의 무덤을 만드는 길만이 우리 참 구원의 길입니다.
이것이 진정한 전례입니다.
착한 사마리아인처럼 가진 것으로 친구를 만듭시다.
이것이 전례에 참여하기 위해 강도당한 이를 스쳐 지나간 이들이 얻지 못하는 구원을 차지하는 길입니다.
가장 보잘 것 없는 형제들을 위해 우리 자신을 내어줍시다.
그렇게 부정한 재물인 우리 생명으로 친구를 만들었을 때야만
앞으로 우리가 머물 거처가 마련되는 것입니다.
사순절의 마지막 주일입니다.
다음 주에는 성주간이 시작 됩니다.
오늘 우리는 파스카에 대한 고통스러움과 기쁨을 함께 만나게 됩니다.
곧 고통과 승리의 이중 교훈을 만나게 됩니다.
오늘 <제1독서>는 ‘위로의 책’이라 불리는 <예레미아서>의 말씀입니다.
예레미아는 시나이 계약과는 다른 ‘새 계약’을 맺을 날이 올 것을 예고하는데,
‘주님께서는 당신의 백성에게 가슴에 당신의 법을 넣어주고, 마음에 법을 새겨줄 것이며, 그들의 허물을 용서하고 그들의 죄를 더 이상 기억하지 않겠다.’ (예레 31,33-34)고 선포합니다.
곧 ‘새 계약’으로 당신의 법이 마음과 정신에 새겨지고 허물이 용서되고 당신의 백성과 영원히 결합될 것을 예고합니다.
오늘 <제2독서>는 이 ‘새 계약’이 어떻게 이루어지게 되었는지를 증언해 줍니다.
곧 ‘예수님께서는 큰 소리로 부르짖고 눈물을 흘리며 기도와 탄원을 올리셨고
하느님께서는 그 경외심 때문에 들어주셨으며,
또한 아드님이시지만 고난을 겪으심으로써 순종하셨고,
그리하여 모든 이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셨음’(히브 5,7-9)을 상기시켜 줍니다.
오늘<복음>은 공관복음의 ‘겟세마니에서의 기도’ 장면을 떠올려줍니다.
예수님께서는 빠스카를 지내시기 위해 예루살렘에 와 계셨는데,
순례하러온 그리스인들이 제자에게 “예수님을 뵙고 싶습니다.”(요한 12,21)하고 청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직접적인 응답을 주시지는 않지만, 당신 자신을 분명하게 드러내십니다.
그것은 그들이 예수님을 뵙고자 한 것은 단순히 호기심으로 얼굴을 보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진정 누구신지 어떤 분이신지, 그래서 섬기고 따를 만 한지를 알아보고자 한 것임을 아신 까닭입니다.
사실, 여기에 쓰인 “보다”라는 동사는 단지 물리적인 외적인 형태를 보는 것을 넘어 내면적인 의미를 파악하다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그러니, 그들은 예수님 안에 간직된 비밀, 곧 그리스도의 신비를 보고자 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사람의 아들이 영광스럽게 될 때가 왔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그대로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누구든지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라야 한다.”
(요한 12,23-26)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분명하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당신이 “사람의 아들”임을, 그런데 타인을 위해 죽을 것임을,
그리고 당신을 섬기려면 당신을 따라 그 죽음의 길을 가야 함을 말입니다.
그러니, 예수님께서는 그리스인들을 실망시키지 않으시고 그들의 갈망을 채워주신 것입니다.
곧 당신의 신비를 드러내 주신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예수님께서는 이때를 맞이하여 “마음이 산란합니다.” (요한 12,27)라고 고뇌의 마음을 털어놓으십니다.
그렇지만, 겟세마니에서
“아빠 아버지, 아버지께서는 무엇이든지 하실 수 있으시니, 이 잔을 저에게서 거두어 주십시오.” (마르 14,36) 하시면서도
“아버지 제가 원하는 것을 하지 마시고 아버지께서 원하신 것을 하십시오.” (마르 14,36)라고 하신 것처럼,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십시오.” (요한 12,28) 하고 아버지의 뜻에 순명의 응답을 하십니다.
그러자 하늘에서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나는 이미 그것을 영광스럽게 하였고 또다시 영광스럽게 하겠다.”
(요한 12,28)
그렇습니다.
이처럼, 아버지의 뜻에 순명함이 곧 아버지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저의 하느님, 저의 하느님! 어찌하여 저를 버리셨습니까?” (마르 15,34) 하시면서도
“아버지, 제 영을 아버지 손에 맡깁니다.” (루카 23,46)라고 순명하심으로써
아버지의 이름을 또다시 영광스럽게 하실 것입니다.
결국, 이는 십자가의 현양을 통해서 이루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나는 땅에서 들어 올려지면 모든 사람을 나에게 이끌어 들일 것이다.”
(요한 12,32)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당신께서 어떻게 죽임을 당하실 것인지를 가리켜주시면서,
마침내는 십자가의 순명으로 승리를 거두실 것을 알려주십니다.
그리하여,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빛나시며”라는 당신께서 가르쳐주신 ‘주님의 기도’의 첫 구절을 이루십니다.
이처럼, 당신께서는 아버지께서 영광을 입으시기만을 바라시며, 바
로 당신의 죽으심으로 아버지의 영광이 드러내시기를 바라십니다.
지금, 우리에게는 바로 그 빠스카의 때가 다가오고 있습니다.
십자가와 함께 빠스카를 맞을 준비를 해야 할 일입니다.
그때가 오면, 우리를 당신과 결합시켜주실 것입니다.
당신의 고통과 영광에 우리를 참여시키심으로써,
우리 마음에 당신의 법을 새겨주시고 우리의 허물을 지워주실 것입니다.
우리를 아버지의 품 안으로 불러 모으시고,
우리도 아버지의 영광을 드러내도록 하실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을 십자가의 승리를 통하여 이루실 것입니다.
아멘.
-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 서공석 요한 세례자 신부님의 묵상글
오늘 복음에는 그리스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만나게 해달라고 제자들에게 청하고, 제자들은 그 말을 예수님에게 전합니다.
복음은 예수님이 그들을 실제로 만나셨는지는 알려주지 않고, 예수님의 말씀만 전합니다.
‘사람의 아들이 영광스럽게 될 때가 왔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자기 목숨을 사랑하는 사람은 잃을 것이며, 자기 목숨을 미워하는 사람은 보전할 것이다.’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라야 한다.’
이런 말씀들입니다.
「요한복음서」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시고 육칠십 년이 지난 후에 기록되었습니다.
그 「복음서」는 그리스도신앙에 대한 일종의 명상록(暝想錄)입니다.
오늘 복음이 그리스 사람을 등장시킨 동기가 있습니다.
율법과 예언서들을 전혀 모르고, 합리적(合理的) 사고를 하는 비유대인이 예수님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는 지를 알리려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이 영광을 받으실 때가 왔다고 말합니다.
「요한복음서」가 영광이라고 말할 때는 예수님의 죽음을 의미합니다.
어떤 인물이 영광스럽게 되었다는 말은
사람들이 그 인물의 중요성에 공감하며, 그것을 큰 감동으로 받아들였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셔서 영광스럽게 되었다는 말은
그 죽음으로 그분의 특별함이 나타났고, 사람들이 그 사실에 크게 감동하였다는 뜻입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죽음이 왜 그리 중요하고, 감동스런 사실인지를「구약성서」언어를 사용하지 않고 설명합니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썩어서 열매를 맺듯이”,
예수님의 삶은 그분의 죽음 후, 제자들 안에 많은 열매를 맺었습니다.
십자가의 죽음은 하나의 실패를 의미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그 죽음의 의미를 알아듣고, 그분의 삶을 배워 실천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오늘 복음은 또한 예수님의 입을 빌려
“누구든지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라야 한다.
내가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사람도 함께 있을 것이다.”
라고도 말합니다.
예수님을 섬기는 사람은 그리스도 신앙인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뒤를 이어 그분의 삶을 실천합니다.
예수님이 그들의 실천 안에 살아 계시기에,
이제부터 예수님을 만나려면, 그분을 따르는 신앙인들의 삶을 보아야 합니다.
그 삶의 특징은 제 목숨만을 소중히 아끼지 않고, 예수님이 하셨던 실천을 하는 데에 있습니다.
십자가는 실패와 죽음의 비극이었습니다.
그리스도 신앙인은 모두 그렇게 실패하고 죽어야 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목숨을 아끼지 않고,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을 실천하다가 죽음을 맞이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의 죽음’이라는 실패의 최후를 맞이한 것은
그 시대 유대교 사회의 실세(實勢)들이 가르치던 것과는 다른 하느님을 그분이 믿었고,
그 하느님의 일을 공공연히 실천하였기 때문입니다.
율사와 사제들은 율법의 문자(文字)에 얽매여 살았습니다.
그들은 율법을 지키지 못하면, 벌을 주는 엄한 하느님이라고 상상하였습니다.
그들이 상상하던 하느님은 자비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비하고 용서하시는 하느님을 믿고 가르쳤습니다.
‘하늘의 새를 보아라.’ ‘들의 백합꽃을 보아라.’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새와 꽃도 돌보아주는 하느님이십니다.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하느님께서 의롭게 여기시는 것을 구하여라.” (마태 6,33)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자기 한 사람의 목숨만을 소중히 생각하지 않고,
자비하신 하느님에게 신뢰하면서 그 자비를 자기 주변에 실천하여,
하느님의 나라를 사는 사람이 되라는 말씀입니다.
유대교는 이스라엘 백성만이 구원 받을 수 있다고 가르쳤습니다.
물론 율법을 잘 지켜야 한다는 조건이 붙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런 믿음을 거부하셨습니다.
인간과 함께 계시며, 돌보아주고 사랑하시는 하느님이라는 의미에서 예수님은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셨습니다.
예수님은 그 아버지이신 하느님의 생명을 이어받아 그 생명이 하는 일을 몸소 실천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병든 이를 고쳐주셨습니다.
유대교가 말하듯이, 병은 하느님이 주시는 벌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이교도(異敎徒)인 백인대장의 종(루가 7,1-10)과 시로페니키아 여인의 딸(마르 7,24,30)도 고쳐주셨습니다.
예수님이 믿고 계신 하느님은 종교가 다르다고 사람을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예수님은 가난한 사람, 우는 사람, 병든 사람, 죄인으로 낙인찍힌 사람, 그런 불행한 생명들을 당신 한 몸보다 더 소중히 생각하셨습니다.
그것이 하느님이 하시는 일이었습니다.
그들도 모두 하느님의 자녀들입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내 아버지께서 일하고 계시니 나도 일하는 것이다.” (요한 5,17)
인간은 자유를 지녔습니다.
자기 한 사람만을 소중히 생각하며 살 수 있습니다.
가족들도 직장 동료들도 모두 자기 한 사람을 위해 있다고 착각하며 살 수 있습니다.
자기 자신의 가족만을 소중히 생각하며, 자기 가족 외의 모든 다른 인연(因緣)을 외면하고, 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또한 하느님과의 인연을 가장 소중히 생각하고 살 수도 있습니다.
그것이 그리스도신앙인의 삶입니다.
신앙인은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면서 하느님이 아끼시는 모든 생명을 소중히 생각하고 사랑합니다.
그것이 오늘 복음이 말하는, ‘밀알이 땅에 떨어져 썩어서 열매를 맺는’ 삶입니다.
그것이 예수님의 삶이었고, 예수님을 따르는 그리스도인이 사는 삶입니다.
예수님은 혁명을 하지도 않으셨고, 사회의 양극화(兩極化)를 비난하고, 정의를 부르짖으면서 사람들 간의 대립(對立)과 갈등(葛藤)을 조장하지도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무엇을 강요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분은 제자들을 ‘종이 아니라, 벗’이라 부르면서(요한 15,15),
그들이 떠나가서 각자 자유로이 열매 맺을 것을 원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존경스런 호칭(呼稱)이나 복장(服裝)으로 제자들 위에 군림하지도 않으셨으며, 그들의 벗이 되어 사셨습니다.
예수님 안에 하느님의 일을 알아보고, 그것을 실천하며 살아서, 그분과 같은 열매를 맺겠다고 약속한 그리스도 신앙인입니다.
신앙은 자기 한 사람 잘 되고, 존경과 찬양을 받는 길이 아닙니다.
신앙은 강자 앞에 약하고, 약자 앞에 강하게 처세(處世)하여 입신출세(立身出世)하고, 그것을 하느님이 베푸셨다고 주장하는 속물(俗物)들의 처세술도 아닙니다.
그런 것은 예수님을 따라 맺은 열매가 아닙니다.
예수님을 따라 실천하여 하느님의 나라를 오게 하고, 그 나라의 질서를 사는 그리스도 신앙인입니다.
예수님과 같이 하느님의 자녀로 사는 사람은
자기 주변의 연약한 생명들, 외로운 생명들, 고통 받는 생명들을 특별히 보살핍니다.
하느님이 그들도 행복할 것을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자기 자신을 위해 열심히 기도하면서, 버려진 자기의 이웃들을 백안시(白眼視)하는 것은 예수님을 따라 열매 맺는 신앙이 아닙니다.
주변의 생명들이 우리와의 인연으로 기뻐하고 행복해야 합니다.
그것이 예수님이 가르치고 실천하신 일이었습니다.
오늘 복음이 전하는 예수님 말씀입니다.
“누구든지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라야 한다.
내가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사람도 함께 있을 것이다.”
- 부산교구
♣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의 묵상글
<영광스런 삶과 죽음 - 예수님이 답이다>
오늘은 사순 제5주일, 우리의 삶과 죽음에 대해 총체적으로 점검해 보고 싶습니다.
어떻게 살아야 영광스럽게 잘 사는지 말입니다.
‘영광스런 삶과 죽음–바로 예수님이 답이다’
오늘 강론 주제입니다.
영광스런 삶에 영광스런 죽음입니다.
잘 살아야 잘 죽습니다.
삶과 죽음은 하나입니다.
20여년 전 어느 개신교 목사님과 주고 받는 문답도 생각납니다.
“신부님의 소원은 무엇입니까?”
“잘 살다가 잘 죽는 것입니다.”
일언지하의 대답에 내심 흡족했던 기억이 새롭습니다.
이보다 더 좋은 소원도 없을 것입니다.
죽음은 삶의 요약이자 결론입니다.
좋은 죽음보다 더 좋은 선물도 없습니다.
답은 파스카의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을 닮아 예수님처럼 살다가 예수님처럼 죽으면 잘 살다다 잘 죽는 것입니다.
어제 두 일간 신문 1면에 이어 두 면을 할애한 죽음에 대한 기사가 참 인상적이었습니다.
우연의 일치치곤 참 신기하다 생각되었습니다. 비정非情스런 사회일면을 보는 듯 했습니다.
한 신문은 ‘고스트ghost 스토리-죽음이 하는 말’이라는 제하의 무연고-고독사를 다루고 있었습니다.
한 도시에서 ‘포기’되고 ‘처리’된 195명의 죽음에 대한 압축적 기사였습니다.
세상에 남모르게 죽는 완전 고립단절상태의 죽음보다 외로운 것은 없을 것입니다.
‘고스트ghost 스토리’, 바로 ‘유령의 이야기’입니다.
죽어서만 아니라 이미 살았을 때부터 존재감 전무한 유령의 삶을 살았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1인 가구의 증가 추세와 더불어 살아있으나 유령같은 죽음의 삶을 사는 이들도 아마 점차 늘어날 것입니다.
그러니 죽은 다음에도 잊지 않고 연미사를 드려 줄 수 있는 지인들을 지닌 고인들은 얼마나 행복한 사람들인지요.
다른 일간신문 기사 역시 1면에 이은 두 면이 어느 초등학교 교사의 ‘죽음교육’을 커버스토리로 한 기사였습니다.
‘죽는다는 것’에서 배우는 ‘산다는 것’이란 요지의 죽음교육입니다.
‘죽음은 왜 태어났을까?’ 답은 ‘하루하루 삶을 사랑하게 하려구요.’라는 기사 제목도 한눈에 들어왔습니다.
마지막까지 하루하루 하느님의 선물로 알아 감사하며 기쁘게 사는 것보다 더 좋은 죽음 준비도 없을 것입니다.
죽음 있어 삶이 참 귀한 선물임을 깨닫습니다.
어떻게 죽을 것인가의 문제는 어떻게 살 것인가의 문제로 직결됩니다.
삶과 죽음은 하나입니다.
하여 피정지도 때마다 단골로 드는 예가 있습니다.
‘우리 믿는 이들의 삶은 하느님 본향집을 향한 순례여정의 삶이다.
죽음은 무無에의 환원還元이 아니라 아버지의 집으로의 귀가歸家이다.
내 인생이 어느 지점에 와 있는지 수시로 확인해 보며 귀가 준비를 잘 하라.’고 강조하곤 합니다.
한 번 확인해 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인생여정을 일일일생一日一生 하루로 압축하면 오전입니까, 혹은 오후라면 오후 몇시쯤 되겠는지요.
봄-여름-가을-겨울, 일년사계一年四季의 계절로 압축하면 지금 어느 지점의 계절에 와 있겠는지요.
지상에서 영원한 삶은 없습니다.
언젠가는 죽습니다.
쏜살같이, 강물처럼 흐르는 세월입니다.
하루가 다 끝나듯, 사계절이 다 끝나듯 죽음도 그렇게 올 것입니다.
하여 사막교부들은 물론이요 분도 성인도 ‘날마다 죽음을 눈앞에 환히 두고 살라.’하였습니다.
일일일생, 일년사계로 내 삶의 여정을 압축하여 묵상하면서 귀가 준비하듯 죽음을 준비하며 살 때 하루하루가 참 고마운 선물임을 깨달을 것입니다.
사랑의 관계가 중요합니다.
행복한 삶, 영광스런 삶에 절대적 요소가 관계입니다.
관계는 존재입니다.
관계는 삶입니다.
환경이 좋아서가 아니라 관계가 좋아야 천국입니다.
고립단절의 삶보다 외로운 것은 없습니다.
그대로 유령같은 삶입니다.
참으로 외로움의 결정적 상징이 유령입니다.
외롭게 뿌리없이 떠도는 삶, 유령같은 삶입니다.
그러니 사랑의 관계부터 회복하고 날로 관계를 깊이하는 것이 유일무이한 대안입니다.
무엇보다 주님과의 관계입니다.
예레미야의 새계약은 예수님을 통해 실현되었고 우리 모두 그 혜택을 받고 있습니다.
예수님 안에서 하느님과의 관계를 날로 깊이할 수 있는 구원의 길, 영광스런 삶의 길이 활짝 열린 것입니다.
바로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실현되고 있는 새계약입니다.
“나는 그들의 가슴에 내 법을 넣어주고, 그들의 마음에 그 법을 새겨 주겠다.
그리하여 나는 그들의 하느님이 되고 그들은 나의 백성이 될 것이다.
그들이 모두 나를 알 것이다.
나는 그들의 허물을 용서하고, 그들의 죄를 더 이상 기억하지 않겠다.”
인간이 물음이라면 하느님은 답입니다.
바로 예수님 안에서 우리에게 실현된 새 계약입니다. 예수님과의 관계와 더불어 깊어져가는 하느님과의 관계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혼자가 아닙니다.
주님은 우리 하느님이시고 우리는 하느님의 백성입니다. 하여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가 되고 믿는 이들은 주님 안에서 형제자매의 한가족이 되는 것입니다.
바로 우리 교회의 이 거룩한 성체성사가 주님과 형제들과 하나로 결속된 우리의 신원을 늘 새롭게 확인해주고 강화해줍니다.
영광스런 삶과 죽음에 대한 답은 예수님께 있습니다.
이 거룩한 주님의 성체성사안에 있습니다.
그러니 예수님처럼 고난을 통해 순종하는 것을 배우고, 평범한 일상에서 섬기는 것을 배우는 것입니다.
믿는 이들에게 삶은 순종을 배우는 학교요 섬김을 배우는 학교입니다.
삶에서 오는 모든 고난을 예수님의 고난에 합류시키는 것입니다.
예수님 친히 우리가 겪을 모든 고통을 겪으셨습니다.
죽음을 예견하고 당황해 하는 예수님을 보십시오.
“이제 제 마음이 산란합니다.
무슨 말씀을 드려야 합니까?”
심히 불안한 마음을 고백하셨고,
당신을 죽음에서 구하실 수 있는 분께 큰 소리로 부르짖고 눈물을 흘리며 기도와 탄원을 올리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그 경외심 때문에 들어주셨습니다.
기도가 답입니다.
기도는 하느님과 생명과 사랑의 소통이요 관계입니다.
기도를 통해 순종할 수 있는 힘도, 섬길 수 있는 힘도 생깁니다. 예수님처럼 기도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드님이시지만 고난을 겪으심으로써 순종을 배우셨습니다. 그리고 완전하게 되신 뒤에는 당신께 순종하는 우리 모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셨습니다.
사랑의 순종, 사랑의 섬김입니다.
인생은 평생 순종을 배우는 순종의 학교요, 평생 섬김을 배우는 섬김의 학교입니다.
예수님께 순종하는 삶, 예수님을 섬기는 삶이 바로 영광스런 삶이요 영원한 삶의 보장입니다.
예수님의 삶이 영광스럽기에 죽음도 영광스럽습니다.
영광스런 죽음을 예견하신 주님의 유언같은 고백이 감동적입니다.
우리 모두 죽어 많은 열매를 맺는 밀알 하나처럼 순종과 섬김의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자기 목숨을 사랑하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이 세상에서 자기 목숨을 미워하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에 이르도록 목숨을 간직할 것이다.”
그대로 예수님의 삶을 요약한 말씀이요 모두 이렇게 살라는 유언같은 당부입니다.
죽음이 마지막이 아니라 풍요한 부활의 열매들로 드러나는 삶입니다.
그러니 끊임없이 주님께 순종하고 주님을 섬겨야 합니다.
주님을 섬기려면 주님께 순종함으로 따라야 합니다.
이렇게 예수님을 섬기고 따르는 순종의 사람들을 아버지께서도 존중해 주십니다.
믿는 이들에게는 예수님처럼 죽음의 때는 영광의 때이기도 합니다.
영광스런 삶에 영광스런 죽음입니다.
평소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온 예수님의 고백이 감동적입니다.
“저는 이때를 위하여 온 것입니다.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십시오.”
이에 대한 아버지의 화답입니다.
“나는 이미 그것을 영광스럽게 하였고 또 다시 영광스럽게 하겠다.”
죽음을 앞둔 예수님의 결정적 승리의 선언입니다.
세상은 심판을 받고 세상의 우두머리는 쫓겨납니다.
세상 악에의 결정적 승리요 영광스런 부활의 예표가 땅에서 들어올려진 주님의 십자가입니다.
주님의 십자가 넘어 영광으로 빛나는 부활의 주님이 우리의 영원한 희망입니다.
우리 모두를 향한 예수님 말씀입니다.
“나는 땅에서 들어 올려지면 모든 사람을 나에게 이끌어 들일 것이다.”
바로 우리의 영광스런 미래요 이미 지금 여기 거룩한 미사를 통해 실현됩니다.
죽으시고 부활하신 영광의 주님은 우리를 부단히 당신께로 이끌어 들이심으로 당신과의 일치는 물론 형제들과의 일치도 날로 깊게 해주십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당신과 사랑의 관계를 날로 깊게 하시며 하느님을 영광스럽게 하는 삶을 살게 하십니다.
하느님의 영광은 우리의 영광입니다.
살아있는 우리는 모두가 하느님의 영광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처럼 영광스럽게 살다가 영광스럽게 죽어야 합니다.
영광스러운 삶에 영광스러운 죽음입니다.
우리를 사랑하시는 영광스러우신 주님의 은총이 이렇게 해주십니다.
끝으로 잘 살다가 잘 죽을 수 있는, 영광스럽게 살다가 영광스럽게 죽을 수 있는 유일한 영생永生의 길을 소개해 드립니다.
바로 제 좌우명 자작시 ‘하루하루 살았습니다’의 마지막 연이 그 답을 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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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하루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날마다 자기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일일일생(一日一生)
하루를 평생처럼, 처음처럼, 마지막처럼 살았습니다.
저에겐 하루하루가 영원이었습니다.
어제도 오늘도 이렇게 살았고 내일도 이렇게 살 것입니다.
하느님은 영원토록 영광과 찬미 받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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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멘.
- 성 베네딕도회 요셉수도원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님의 묵상글
<내가 죽어 모두를 살리는 거룩한 삶>
축제 때에 유다교로 개종한 그리스 사람 몇이, 예배를 드리러 예루살렘에 올라왔습니다.
하느님을 경외하던 그들은 필립보에게 다가가, 예수님을 "뵙고 싶다고" 청합니다.
그들은 그저 그분의 얼굴을 보고 인사를 드리려는 것이 아니라, 구원의 신비를 알려는 갈망을 드러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의 갈망을 채워주시려고 말씀하십니다. “사람의 아들이 영광스럽게 될 때가 왔다."
곧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 영광에 이를 때가 다가오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어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자발적인 십자가 죽음으로 이르게 되는 영광의 길을 알려주십니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자기 목숨을 사랑하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이 세상에서 자기 목숨을 미워하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에 이르도록 목숨을 간직할 것이다.”
(12,24-25)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목숨까지도 남김없이 봉헌하신 당신의 죽음과 부활의 의미를 요약하여 가르쳐주시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가야 할 참 생명의 길이 여기에 있습니다.
영성생활의 목표는 거룩하신 하느님처럼 거룩해지는 것이지요.
그러나 그것은 세상의 문제나 이웃의 아픔을 외면한 채 내적 고요와 평화 상태에 들어가는 것을 말하지 않습니다.
거룩함은 내적 일치와 더불어 철저한 사랑의 실천을 요구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 모든 것을 유보하는 거룩한 삶은,
예수님께서 ‘고난을 겪으심으로써 순종을 배우셨듯이’(히브 5,8) ‘겪어냄’과 ‘내어놓음’, 곧 인내와 희생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자신의 시간이나 재물 일부를 떼어 다른 이를 위해 내놓는 것만으로는 결코 '예수님의 영광의 때'에 참여할 수 없습니다.
주님께서는 사랑으로 기꺼이, 그리고 지속적으로 모두를 내놓음으로써 남을 살리는 사람을 존중해주시며, 그를 영원한 생명으로 이끄실 것입니다(12,25.26).
이런 삶은 사랑 때문에 내가 죽어 없어짐으로써 남을 살리는 삶이기에 매우 어려운 길입니다.
그러나 어쩌면 그 길은 가까운데서부터 시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나 스스로 이기심을 버리고, 고집부리지 않으며, 내 뜻을 내려놓는 것입니다.
이는 나를 넘어 하느님과 이웃과 사랑의 관계를 맺을 수 있는 출발점이 될 것입니다.
나를 떠나 모든 사람과 피조물과 세상사를 좋음과 애정을 마음에 품고 바라보면, 더불어 살아가는 이들이 행복해질 것입니다.
그러나 나만 좋고 아무 일 없으면 된다는 식의 태도로는 결코 함께 행복해질 수 없겠지요.
예수님께서는 내가 먼저 고통을 견뎌내고 힘든 일을 감당하면, 모두가 행복해진다는 진리를 온몸으로 보여주신 것입니다.
우리도 자기 목숨을 아끼지 않고 불의와 차별, 그릇된 사회제도와 편견에 저항하며 사랑을 실천하셨던 예수님을 따르는, 참 섬김의 사람이 되어야겠습니다.
십자가는 실패와 죽음의 비극이 다가온다 하여도, 묵묵히 하느님의 자비를 실천해야겠습니다.
제 한 목숨만 귀하게 여기지 말고, 모든 이에게 항구히 자비를 실천함으로써, 모두를 행복의 나라로 이끌도록 힘써야겠습니다.
오늘도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 억압과 차별을 받는 이들, 외롭고 고통받는 이들을 '먼저', '더' 사랑함으로써,
많은 열매를 맺는 한 톨의 밀이 되었으면 합니다.
자신을 땅에 떨어뜨리는 겸손, 묻히는 의탁, 썩는 자기 비움과 자아 이탈이야말로 생명과 기쁨의 씨앗임을 기억하면서...
- 작은형제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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