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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바드대 박사
2006년, 59세의 나이에 하버드대 박사학위를 받은 그녀는 얼마 전 ‘희망’에 관한 세 번째 책을 발간하고 강연가로도 활발히 활동하고 있다. “제 이야기를 듣고 죽음까지 생각했던 사람이 다시 희망을 갖게 되었다며 ‘다시 살아보겠다’는 분도 있었고, 유학은 꿈도 못 꾸던 분이 용기를 얻어 유학도 가고 이제는 원하는 일을 하고 있다며 찾아온 분들도 많아요.
그런 분들을 만나면서 내가 누군가에게 희망을 갖게 해준다는 게 인생의 가장 큰 보람이 되었지요.” 그녀는 누구를 만나든 모든 건 선택이고 마음먹기에 달렸다고 강조한다. 마음이 바뀌면 세상이 달라지고 똑같은 현실도 달라 보이기 때문이다. “언제 어디서 태어날지는 선택할 수 없지만 어떻게 사느냐는 선택할 수 있잖아요.
그 핵심은 절망적인 상황에 닥치고, 분노와 오기가 생겼을 때, 그것을 어떻게 풀어가느냐에 달린 것 같아요. 저 역시 그런 선택을 하나씩 해온 것 같습니다. ‘씰데없는 가시나’에서 시작해서 말이죠.”(웃음)
가시나도 씰데 있다는 것 보여주고 싶었다
‘박사로 성공해서 딱 나타나는 거야. 그러니까 딸이라고 구박하던 엄마가 막 미안해하는 거야. 술집 딸이라고 놀리던 애들도 막 쩔쩔매겠지. 나한테 꼼짝도 못하고….’
“가시나! 또 혼자 실실 쪼개고 앉았네! 퍼뜩 정신 못 차리나!” 엄마의 호통에 열두 살 진규의 행복한 상상은 끝이 난다. 현실에서의 진규는 당장에 벌떡 일어나 밥하고 빨래하고 설거지를 해야 하는 구박데기 딸이다.
서진규씨는 1948년 경남 동래군의 작은 어촌에서 엿장수를 하는 부모님의 육남매 중 셋째로 태어났다. ‘가시나는 씰데없다’는 남아선호사상이 강한 집안. 열한 살 때 충북 제천으로 이사 간 후 그 불만은 더욱 커졌다.
먹고살기 위해 뭐든지 해야 했던 어머니는 술집을 시작했고 집안일은 시집간 언니 대신 진규의 차지가 된 것이다. “오빠도 있는데 왜 나만 시키느냐 불만을 쏟아내면 어머니는 매부터 드셨어요.
그때부터 차별과 편견에 대한 오기, 분노 같은 게 생겼던 것 같아요. ‘가시나도 씰데 있다’는 것을 보여주려면 꼭 성공해야겠다고 결심했지요.”
어린 진규에게 ‘박사’란 곧 성공한 사람을 지칭하는 말이었다. 그녀는 틈만 나면 공부했고, 단식투쟁을 해가며 부모님을 설득해 서울에 있는 고등학교까지 들어간다.
가정교사 같은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우등생을 놓치지 않았던 고교시절. 하지만 언감생심 대학은 엄두도 낼 수 없었다. 대학생이 아니라 가발공장 직원이 되어야 했던 때, 그녀에게 세상은 암흑이었다.
“친척언니 소개로 가발공장에 취직했는데, 너무 속상해서 매일 울다시피 했어요. 소질도 없어서 만드는 것마다 퇴짜를 맞으니 이러다 굶어 죽겠다 싶었어요. 그래서 골프장 식당의 종업원으로 취직했습니다.
식당에 가면 최소한 굶어 죽지는 않을 것 같아서요.” 서진규씨는 그 무렵 죽음에 대한 생각을 가장 많이 한 것 같다고 한다. 가발을 붙들고 앉아 있을 땐 좌절뿐이었고, 식당에서 서빙을 할 때는 또 다른 분노와 반항이 생겼다.
종업원을 무시하는 부자들을 볼 때마다 “뭐 하러 사나, 죽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 아무도 기댈 데도 없고, 누군가 상담해줄 사람도 없었다. 자신에게 힘이 된 건 오직 자신뿐이었다.
“내가 내 자신하고 대화를 나누는 거예요. ‘서진규, 가난도 차별도 네 죄는 아니다. 너는 큰일을 해낼 것이고, 지금 겪는 것은 다 그 일을 위한 과정이다, 반드시 성공해서 너를 무시하는 사람들 보란 듯이 성공할 날이 꼭 온다.
그러니까 희망을 가지자’라고 스스로에게 그런 이야기를 참 많이 해주었어요.” 미국 가정에서 식모를 구한다는 신문광고를 봤을 때도 그랬다. 그녀는 자기 자신에게 물었고, ‘기회가 될 것’이라는 답을 얻자, 1971년 무조건 미국으로 떠났다.
연민도 자포자기할 시간도 없었던 처절한 순간들
하지만 가정부 생활을 하지는 않았다. 미국에 도착하기까지 수속만 2년이 걸린 탓에 광고를 낸 집에서 이미 다른 가정부를 구한 것. 그녀는 대신 한국 식당에 취직하는 것으로 미국생활을 시작한다.
그리고 다음 해에는 ‘퀸스 칼리지’에 입학, 꿈에 그리던 여대생도 된다. 돈도 벌고 대학생도 되고, 이제 열심히 노력만 하면 순탄한 길이 열릴 것 같았다. 하지만 그녀에게는 또 다른 고통의 시간들이 남아 있었다.
한국에서 온 합기도 사범과의 만남. 서로 사랑한다고 믿어 결혼했는데, 남편은 시도 때도 없이 폭력을 쓰는 사람이었다. “엄마한테 맞는 것과 남편한테 맞는 건 다르죠. 이대로 가다가는 내가 남편한테 무슨 짓을 할지 모를 거라는 생각에 두려웠어요.
차라리 떨어져 있어야겠다 싶어서 미군에 자원입대를 했습니다. 첫애를 낳은 지 8개월, 그리고 유산한 지 한 달이 되었을 때였지요.” 아이를 봐줄 사람이 없어 8개월 된 딸아이를 남의 품에 안겨 한국 친정으로 보낼 때는 머릿속이 하얘지는 것 같았다 한다.
도피처로 들어간 군대, 훈련을 받기에는 몸도 마음도 만신창이 상태였다. 밤마다 아이를 잃어버리는 악몽에 시달렸다. 매일 눈물로 지새웠지만 그녀는 이를 악물었다. 아이를 위해서도 꼭 해내야 했다.
포기하고 싶을 때면, ‘자신을 무시했던 사람들이 그럴 줄 알았다며 손가락질하는’ 상상을 해가며 자신을 일으켜 세웠다. 결국 그녀는 200명 중 1등으로 훈련 과정을 졸업한다.
그 후 유능한 사병에서, 인정받는 장교가 되며 안정된 군대생활을 해나가지만 개인적으로는 여전히 숱한 어려움이 있었다. 둘째를 낳으며 결혼생활을 지켜보려 했으나 남편의 폭행은 점점 심해졌고 결국 1982년 이혼을 했다.
이후 미국인 장교와 재혼했다가 또 한 번 이혼하는 아픔도 겪는다. 하지만 그녀는 자신을 연민하며 안일하게 살지 않았다. 군인으로서의 잦은 근무지 이동과 생활고, 가정의 불화 등 힘겨운 상황에서도 학업을 포기하지 않았던 것.
이윽고 1987년, 그녀는 ‘퀸스 칼리지’ 입학을 시작으로 모두 6개 대학을 거쳐, 15년 만에 대학졸업을 한다. 실로 오랜 세월, 분노와 절망의 시간을 넘어 이루어낸 결과였다. 그녀가 하버드에 가게 된 것도 차별과 무관하지 않다고 한다.
당시 우수 장교로서 ‘동북아 지역전문가’에 지원했다가 떨어진 서진규씨는 그 이유가 ‘남존여비 사상이 강한 일본과 한국 남자들이 여자와 협상을 하게 되면 업신여길 수도 있기 때문에 아예 보내지 않는다’라는 사실에 분노했다.
그녀는 군 본부를 설득해 일단 시범 케이스로라도 보내달라고 요청했고 어떻게 하면 무시당하지 않을까 고민하다가 하버드 학위를 생각해냈다.
그렇게 1990년 마흔셋의 나이에 하버드 석사 과정을 시작했다. 그리고 그 후 동북아 지역 전문가로서 제도 자체를 바꾸게 만든다. 1996년 그녀는 소령으로 전역하고 박사과정에 입학하여 학문에만 전념하기로 한다. 그리고 몇 년 후, 박사 논문을 준비할 때였다.
어느 날부턴가 식욕이 없고, 온몸에서 기운이 빠져나가는 듯 피로가 극심해졌다. 병원에서는 C형 간염의 보균자인데 너무 무리를 해서 악성화됐다고 했다. 간암이 될 확률이 높으니, 빨리 쉬면서 치료하라 했다.
하지만 그녀는 학업에 계속 매진하기로 한다. “치료 확률이 50프로라는 거예요. 그래서 운명에 맡겼어요. 무엇보다 제 이야기가 알려지면서 희망을 얻었다는 사람들이 많은데, 내가 포기하면 안 된다고 생각했어요.” 그녀에게서 희망을 얻은 사람들이 이번에는 그녀에게 힘이 되고 있었다.
제가 강하다구요? 저 역시 매번 두렵고 막막했어요
2006년 그녀는 드디어 ‘서박사’가 된다. 어릴 때의 상상이 정말로 이루어진 것이다. 오랜만에 긴 휴식을 취하며 그녀는 미뤄두었던 C형 간염도 치료했다. 돌아보면 지난 몇 년 사이에도 많은 일들이 있었다.
무엇보다 감사한 것은 이혼하며 헤어졌던 아들을 다시 품에 안아본 것이었다. 어느덧 스무 살이 된 아들에게 그녀는 비로소 용서를 빌 수 있었다. 그리고 그녀가 홀로 키워낸 딸….
성아는 하버드대에 입학하여 하버드 최초 모녀 재학생이라는 기록을 세우게 하더니, 엄마를 따라 미군이 되었다. ‘엄마를 닮고 싶다’는 성아는 언제나 그녀의 첫 번째 ‘희망의 증거’로서 함께해 주었다.
흔히들 사람들은 서진규니까 해낼 수 있었다고 말한다. ‘당신은 강한 사람이다. 강하니까 그런 것들을 해낼 수 있었다’고. 하지만 정작 서진규씨의 생각은 그렇지 않다. “저 역시 매번 겁나고 두려웠습니다.
자격지심, 열등감, 막막함에 혼자 눈물도 많이 흘리던 약하고 여린 사람이에요. 다만 모든 건 마음먹기에 달렸다고 믿었을 뿐입니다.” 서진규씨는 ‘마음이란 내가 버릴 수도 있고 바꿀 수도 있고 키울 수도 있고 줄일 수도 있는 것’이라고 요약했다. “‘서진규’라는 내 이름은 진짜 ‘나’가 아니에요.
그냥 부르기 위한 이름일 뿐이죠. 그래서 언제든지 버릴 수 있고 바꿀 수 있듯이 마음도 마찬가지입니다. 명예, 욕심, 무겁다, 힘들다, 하는 문제들도 나한테 잠시 다니러 온 것뿐 진짜 나는 아닌 겁니다.
때문에 괴로움이 온다 해도 우리는 이것을 활용할 수도 없앨 수도 있어요. 예를 들어 차별, 분노, 반항, 이런 것들이 오면 이것을 오히려 활용해서 포기하고 싶은 나를 일으켜 세우는 도구로 삼는 겁니다.”
아무 기댈 데도 없고 용기도 없을 때 그녀가 찾아낸 해답은 바로 상상이었다. 그녀에게 상상은 곧 비전이며 ‘마음먹기’였다. 역경을 긍정으로 풀어내는 마음, 절망을 희망으로 바꾸는 마음. 그 마음의 힘이 오늘의 서진규 박사를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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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 진 규 박사는 1948년 경남 동래군에서 태어났습니다. 서울 풍문여고 졸업 후, 가발 공장과 식당 종업원으로 일하던 님은 1971년 가정부 모집 광고를 보고 미국으로 향합니다.
1976년 미 육군에 자원입대를 한 님은 1987년 ‘메릴랜드대 경영학과’를 졸업합니다. 1996년 소령으로 예편, 20년 만에 군 생활을 마감하고 2006년에는 59세의 나이로 하버드대 ‘국제외교사 동아시아언어학과’ 박사 학위를 받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나쁜 것은 힘든 것이 아니라 희망이 없는 것’이라고 강조하는 님은 ‘미 국무장관’과 ‘세계평등상’제정이라는 새로운 꿈에 도전하고 있습니다. 펴낸 책으로 <나는 희망의 증거가 되고 싶다> <희망은 또 다른 희망을 낳는다> <서진규의 희망>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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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대구까지 진출하셨어요? 교수님^^
오후 7시에 시작하여 9시 반까지 강의 듣고, 출판사 들렸다 상주오니 12시가 되었더군......
교수님 대구 오셧나요?...서진규의 인생사 다시 읽어봅니다...요즘 책 <시크릿>을 읽고 잇는데 책내용과 상통하는 면도 잇군요...
전 아침부터 읽어도 아직 다 못읽었어요..ㅡ..ㅡ
어려운역경난관을 잘딛 고 서니, 희망의열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