맑은 가난 속의 판사들
엄상익(변호사) 2024-12-02, 19:55
"아래로 내려가 거리 사람들과 눈높이를 같이 하니 편하고 좋은 것 같아."
헌법재판관은 상당한 권한을 가진 것 같다. 박근혜 대통령도 파면시켰다. 지금도 정부 고관들이 줄줄이 탄핵 심판을 기다리고 있다. 헌법재판관은 어때야 할까. 청렴하고 공정해야 할 것 같다. 정치를 재판하지만 거기에 휘말려서는 안될 것 같다. 헌법재판관을 형으로 둔 친구가 홍콩에 살고 있었다. 그 친구는 형에 대해 이런 말을 했었다.
“한국에 갔을 때 형이 헌법재판소를 구경시켜 줬어. 법정도 웅장하고 형의 집무실도 대단해 보이더라구. 형은 네 명의 대통령을 재판했다고 그래. 판사로 있을 때 전두환 대통령의 항소심 재판장이 되서 사형을 무기징역으로 감형을 했대. 그러니까 광주 사람들을 비롯해서 엄청나게 항의가 들어오더래. 한 달 동안 집에도 못 들어가고 핸드폰도 꺼놨대. 헌법재판관으로 노무현 탄핵 심판을 할 때도 그랬다는 거야. 그런데 그런 집단적인 항의가 어느 순간 썰물같이 사라지는 걸 보고 단순한 게 아니라 배경에 조직적인 움직임이 있는 걸 느꼈다는 거야. 전두환에 대해서도 형은 감경해 줬지만 행위의 위법성은 판결문에 준엄하게 썼다는 거야. 그랬더니 고마워하던 전두환 측에서 한 달 후 그 판결문을 받아 읽어보더니 태도가 달라지더래. 형은 소신껏 재판을 하지 정치에 영향을 받는 법관이 아니야.”
전두환 대통령은 죽을까 봐 상당히 겁을 먹고 있었던 것 같다. 친구가 법관생활을 오래 한 형에 대해 이렇게 얘기를 계속했다.
“홍콩에 온 형을 골프장으로 데려갔는데 판사의 답답함이 그대로 나타나더구만. 골프장 안의 목욕탕을 갈 때도 남이 하는 거 보고 적당히 따라서 하면 될 텐데 나한테 하나하나 규정을 물어보는 거야. 타월을 가지고 가야 하는지 아닌지 락카룸은 몇 미터를 가야 하는지 등등을 말이야. 형이 입고 있는 쟘바를 봤더니 동대문시장에서 파는 싸구려야. 내가 섬유 장사를 해서 잘 알지. 형은 내년이면 정년퇴직을 하는 데 재산이 없어. 낡은 아파트에서 죽 살아왔는데 얼마 전 그걸 팔고 일산으로 옮겼어.”
흉보는 듯한 동생의 말에서 나는 드러나지 않던 법관의 반듯한 태도와 맑은 가난을 발견했다. 나와 가장 친한 두 친구가 판사 생활을 하다가 도중에 그만두었다. 그중 한 명은 내게 이런 말을 한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판사 생활을 십오년쯤 했을 때야. 재산을 신고하라는 문서가 책상 위에 올라왔었어. 신고하려고 보니까 거기에 적을 재산이 하나도 없는 거야. 내가 참 가난하구나라는 자각이 들더라구. 그래서 사표를 내고 변호사가 됐지.”
그 다음부터 그는 가족을 돌보았다. 장모까지 모시고 살면서 세 딸을 유학 보내 가르치고 결혼시켰다. 이제는 은빛머리가 휘날리는 그에게서는 헌신적이고 인자한 아버지의 모습이 보인다. 인천의 법원에서 판사로 근무하던 또 다른 친구도 사표를 낼 때 이런 말을 했었다.
“지하철을 타고 출근을 하던 어느 날 갑자기 텅텅 빈 내 빈 지갑이 자각이 되는 거야. 살던 집의 전세보증금도 보증을 서주는 바람에 가압류당했을 때였어. 그래서 사표를 냈지. 법률사무소를 차리고 밥도 제때 못먹고 잠도 못 자면서 이년 동안 열심히 일했지. 그렇게 번 돈을 이번에는 몽땅 사기당한 거야. 속에서 불이 일어나서 한밤중을 끝없이 걸어다닌 적이 있어.”
그는 남편으로서 아버지로서 열심히 일을 했다. 세월이 흐르고 자식들이 다 결혼하고 부모로서의 의무를 마쳤다.
그는 십여년 전부터 오카리나를 배워 프로급이 됐다. 대학시절부터 옆에서 지켜보면 워낙 집중력이 강하고 노력하는 타입이었다. 그는 요즈음 변호사 일을 접고 거리에서 버스킹 연주를 하며 다닌다. 요양원도 가고 탑골공원 부근의 실버극장에서도 공연을 했다. 내가 묵는 실버타운에 와서도 연주를 했었다. 얼마 전 친구는 내게 이런 말을 했다.
“아래로 내려가 거리의 사람들과 눈높이를 같이 하니까 마음이 열리고 통하는 느낌이 들어. 편하고 좋은 것 같아. 부장판사로 지냈을 때는 전혀 만날 일이 없던 사람들이지.”
나는 친구들의 모습에서 많은 것을 배웠다. 지위에 연연하지 않고 내려오는 그들의 내면에는 향기로운 꽃이 피어있는 것 같았다. 우리들은 노인이 된 지금도 주어진 상황을 그대로 받아들이면서 자족하려고 노력한다.
Leopold Mozart Concerto In D Major For Trumpet & Orchestr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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