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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 소설에 등장하는 지명, 인물, 단체, 사건 등은 실제와 전혀 무관한 허구입니다
륜아이 님 표지 제공♡
쁘띠망크림 님 캘리그라피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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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 . 검은 절벽
Writer . 쁜틳♡
Start . 12. 01. 10
불펌. 도용을 금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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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검은 절벽 >06
11월 18일.
얼마 전부터 고급 쇼핑몰 주차장에서 일을 시작한 고등학생 민우는 평생에 한 번 겪을까 말까한 기상천외한 일을 겪었다.
한가한 시간을 틈 타 동료 형과 모여 담뱃불을 나누고 있을 즈음이었는데, 별안간 주차장 입구 쪽에서 웬 폭탄 터지는 소리가 났다. 사실 폭탄 터지는 소리가 아니라 차가 커브길을 돌다가 기똥차게 벽을 박은 소리였다. 너무 놀라서 담뱃불이 옷에 떨어진 것도 모르고 그 괴상한 광경만 쳐다보고 있는데, 앞 범퍼가 무참히 찌그러진 차가 덜덜거리며 민우와 동료 형 앞에 멈춰 섰다. 창문이 열렸다. 운전석에 앉아있는 것은 선글라스를 멋들어지게 쓰고 있는 젊은 여자였다. 여자가 두 남자를 향해 매력적인 미소를 휘날리며 나른한 목소리로 말했다.
ㅡ 어쩌죠. 내가 벽에 흠집을 내버렸네.
당연히 앞 범퍼가 다 나가버린 차 운전자가 할 말은 아니다. 동료 형이 얼어붙어 더듬더듬 뭐라고 말하기도 전에 여자가 말허리를 똑 잘라먹더니 자기가 사장에게 알아서 잘 말씀드리겠다고 혼자 결론을 내려버렸다. 조수석에 앉아있는 남자가 뭐라고 소리를 지르니까 다시 창문을 올렸다. 창문이 완전히 닫히기 전에 민우는 그제야 이 어디서 많이 본 듯한 여자의 정체를 기억해냈다.
ㅡ 호호, 이렇게 위장까지 했는데도 알아봐주다니, 내 미모에게 나날이 감탄 또 감탄할 뿐이에요.
정상이라면 ‘이렇게 알아봐주셔서 영광’이라고 했겠지만……. 그래도 민우와 동료 형은 아무래도 좋단 식으로 두 눈을 반짝거리며 눈앞에 있는 국보급 여신님의 말 한 마디 한 마디에 열심히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사인 받을 마땅한 종이가 없어서 유니폼 등짝에다 해달라고 했더니 태라가 까르르 웃으며 흔쾌히 승낙해주었다. 동료 형은 사인 받을 때 오르가즘이라도 느끼는 사람 마냥 헉헉댔다. 다음은 민우 차례였다.
ㅡ 으음, 어디보자, 이름이…… 아, 잠깐! 말하지 말아봐. 내가 사람 이름 하나는 기가 막히게 잘 맞추거든요. 내가 맞춰볼게. 으음, 그대 이름은…… 동원?
ㅡ 아닌데요.
ㅡ 그럼 인성!
ㅡ 아니요…….
ㅡ 에이, 그대 부모님이 이름 짓는 센스가 없네. 그럼 동성으로 합의 봐요. 불만 없죠? 자, 그럼 동성 님에게…… 성은 관심 없고…… 주차장에서 한가하게 담배나 빨고 있다가 아름다움 문화재 0호를 만난 그대에게 앞으로도 더 사랑해줄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으며…… 자, 됐고. 사진 찍어요. 이거 나중에 싸이에다 올리고 그래. 그래야 여신 홍태라, 일반인 사이에서도 자체발광 포스 작렬, 이렇게라도 기자 양반들 기사 거리 만들어주지.
팬 두 명과 함께 주차장에서 열린 즉석 팬미팅은 쇼핑몰 입구에서 버럭버럭 고함을 질러대는 일행 남자 때문에 아쉽게 막을 내렸다. 민우와 동료 형은 종이 대신 사인 받은 유니폼을 부둥켜안고선 멀어지는 태라를 꿈꾸듯 지켜보았다.
ㅡ 한 걸음 옮길 때마다 날 사랑하는 팬들이 발에 치이지. 아우성치는 그들을 그냥 두고 볼 수 있겠어? 날 원하고 내 미모를 원하고 있는데, 그건 예의가 아니지.
쇼핑몰을 천천히 휘젓고 다니는 내내 태라의 발걸음을 날아갈 듯 가벼웠다. 팬미팅 덕분에 허영심에 불이 붙었는지 들르는 매장마다 쇼핑백 하나씩은 들고 나왔다. 짐은 무조건 함께 온 영운 차지였다. 처음엔 짐꾼 따위로 쓰려고 거래 어쩌고를 운운했냐고 길길이 날뛰었으나 결국엔 저 사치스런 여자의 뜻대로 충실한 짐꾼 노릇을 하게 됐다. 태라는 뒤에 쇼핑백을 한 아름 든 짐꾼을 대동하고 자신을 알아보는 사람들에게 손까지 흔들어주는 여유를 보였다.
일이 이런 식이니 영운은 태라와 정 반대로 죽을 맛이었다. 자존심 상하는 짐꾼 노릇을 하고 있는 것도 그렇지만 아까 태라가 운전하던 것을 생각하니 온몸에 절로 오한이 끼쳤다. 그가 평소에 스피드를 즐기긴 했지만 오늘 태라가 운전하는 차를 타고 가면서 난생 처음으로 교통사고에 대한 공포를 느꼈다. 게다가 아까는 그렇게나 자신만만한 기세로 주차장 벽에 차를 무참히 박살내버리다니. 젠장, 길 가다 죽지 않으려면 운전수를 자청해야하는 빌어먹을 상황에 맞닥뜨렸다.
투덜거리는 영운은 아는지 모르는지 태라는 옷걸이에 걸린 옷들을 긴 손가락으로 슥 훑으며 한창 분위기에 취해 있었다.
ㅡ 이 옷들, 구두들, 가방들은 자기들이 누구에게 걸쳐지고 신겨지고 들려질지 알고 있을까? 만약 이 애들이 말을 할 수 있다면 난 아마 귀가 아파 쇼핑조차 맘대로 할 수 없을 거야. 옷걸이 여기저기서 나한테 한 번 걸쳐지기라도 해보겠다고 아우성을 칠 테니……. 아, 이 실크 블라우스가 선택받지 못한 옷걸이에 걸린다는 건 이 블라우스한테 너무 잔인한 일이야. 봐, 벌써부터 비명소리가 들리지 않아?
태라가 흐느적거리는 손가락으로 가리킨 곳엔 옷의 비명 따위야 들을 수 있을 리가 없는 귀를 가진 영운에게도 충분히 처절한 절규 소리가 들려오는 장면이 벌어지고 있었다. 옷이 뜯어질 것 같은데도 말리질 못해 얼굴이 시퍼렇게 질린 여직원은 보이지도 않는지 거울 양 옆으로 삐져나온 몸뚱이에 억지로 파란색 블라우스를 끼워 넣고 있는 저 여자, 태종그룹 둘째 며느리 신봉숙 여사였다.
ㅡ 어머, 신 여사님! 여기서 뵙네요? 그간 안녕하셨어요?
우악스럽게도 몸을 옷 안에 밀어 넣고 있던 신 여사에게 태라가 모른 척 흐느적거리며 다가갔다. 이런 꼴을 보인 게 영 마음에 안 드는지 신 여사는 썩 반겨하는 기색이 아니었다. 자기 말에 따르면 ‘이 세상 모든 옷들이 입을 모아 칭송하는’ 만인의 옷걸이의 등장에 오히려 여직원만 호들갑을 떨며 반색했다. 그 뒤 쇼핑몰 구석구석을 누비며 영운이 목격한 광경이란 실로 희극 그 자체였다. 매장마다 신 여사가 고르는 옷은 안타깝게도 신 여사의 넉넉한 몸을 견뎌내지 못했고, 직원은 신 여사 옆의 국보급 옷걸이님에게 어떻게든 옷 한 번 입혀보려고 신 여사를 거부한 옷들을 자꾸만 태라에게 권해대고, 맞지도 않는 옷을 너무 잘 어울린다고 신 여사에게 입에 발린 아첨이나 해대던 태라가 직원의 칭찬에 눈이 멀어 신 여사가 못 입은 옷들을 그 어느 모델보다도 잘 입고 나와 눈치 없이 쇼윈도에 제 모습을 비춰보고 있으면, 홀로 남은 신 여사는 시뻘개진 얼굴을 애써 감추며 안 올라가는 애꿎은 지퍼만 괴롭혀대는 것이다. 돼지처럼 우스운 신 여사의 꼴이나 칭찬에 눈이 멀어 제 본분조차 잊은 태라의 꼬락서니에 결국 영운이 나설 수밖에 없었다.
ㅡ 지퍼에 옷자락이 끼었습니다, 여사님.
신 여사의 등 뒤로 다가간 영운이 그렇게 말하며 신 여사의 지퍼를 무자비하게 올려버렸다. 신 여사의 몸뚱이를 간신히 감싼 블라우스에서 비명이 터지는 것과 동시에 비싼 옷이 찢어질까 염려해 조심성 없이 진짜 비명을 지르는 직원의 소리가 이어졌다. 난데없는 광경에 모두 말을 잃고 입이 벌어졌다. 신 여사만큼은 자기 몸이 불어서가 아니라 이 남정네 말처럼 지퍼에 옷자락이 끼어 올라가지 않았다는 사실에 대단히 흡족해하며 거울에 비친 자기 모습을 이리 둘러보고 저리 둘러보느라 바빴다. 태라도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얼른 신 여사 팔에 매달려 갖가지 칭찬을 입이 마르도록 했다. 태라가 영운에게 몰래 눈을 찡긋했지만 영운은 가볍게 무시해버렸다.
영운의 발 빠른 대처 덕분인지 쇼핑 내내 신 여사의 기분은 처음보다 무척이나 좋아보였다. 그렇다고 영운도 함께 기분이 좋아진 것은 결코 아니다. 함께 신이 난 태라가 들르는 매장마다 닥치는 대로 물건을 집어 드는 통에 쇼핑백을 낑낑거리며 나르는 짐꾼 노릇을 더욱 처절하게 해야 했던 것이다. 손이 모자라서 급기야는 쇼핑백을 목에 걸어야하는 참사까지 벌어졌다. 미칠 노릇이었지만 상황이 상황인지라 성격대로 쇼핑백을 패대기치고 난동을 부릴 수도 없었다.
ㅡ 처음 봤을 때부터 느꼈던 거지만 난 네가 끔찍하게도 싫어.
ㅡ 그대 아니어도 날 좋아하는 사람은 차고 넘치니 그대 같은 놈 하나 없어도 돼. 어머, 신 여사님! 신 여사님!
일 분이라도 빨리 이 끔찍한 짐꾼 노릇에서 벗어나고 싶어서 차 쪽으로 걸어가는 영운을 태라가 잽싸게 잡아버렸다. 쇼핑백을 양 손에 든 신 여사가 주차장 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태라가 옆구리를 쿡쿡 찔러서 신 여사 짐도 짐꾼 영운 차지가 됐다.
ㅡ 왜? 안 가구.
ㅡ 실은 차가 박살이 나버려서…….
태라가 말끝을 흐리며 가리킨 곳에는 앞 범퍼가 무참히 깨진 차가 처량하게 서 있었다. 그럼 자기 차를 타고 가라고 흔쾌히 말하는 신 여사를 보고 영운도 그제야 이 여자의 속셈이 뭔지 조금씩 알게 됐다. 하, 신 여사를 졸졸 쫓아가면서 영운에게 눈을 찡긋하는 태라를 보고는 기가 차서 말도 나오지 않았다.
짐을 다 싣고 와보니 이번엔 신 여사 쪽에서 문제가 발생했다.
ㅡ 뭐? 김 기사, 그럼 지금 나보고 어쩌란 소리야? 손님도 계신데 이렇게 말도 없이 가버리는 경우가 어디 있어? 아무리 아버님 지시라고는 하지만! 아, 알겠어. 아무튼 알겠고, 이따 집에서 나 좀 보지. …… 아니,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말이야……
ㅡ 지금쯤 김 기사님은 부른 적도 없는 회장님이랑 실랑이 하느라고 진땀 좀 뺄 거야. 불쌍한 김 기사. 잘리면 나라도 고용해줘야 하나?
태라가 영운에게 속삭인 말이었다. 그 주도면밀함에 영운이 눈살을 찌푸릴 사이 태라가 재빨리 전화를 끊은 신 여사에게 매달렸다.
ㅡ 여사님, 저희 쪽 기사가 있으니까 저희가 운전해서 가면 되죠.
ㅡ 그래도 말이야, 어쩜 이럴 수가 있어? 아버님도 그래. 사람이 하나 있는 것도 아니고 어쩜 며느리 기사를 빼앗아가? 진짜 서러워서 어디 둘째 며느리 하겠어?
ㅡ 기분 푸세요, 여사님. 저희도 태워주시는 거 감사해서 보답하는 거니까 마음 쓰지 않으셔도 돼요.
그러면서 태라가 눈짓을 하니 영운도 운전석에 앉아 운전대를 잡을 수밖에 없었다. 오늘 참, 여러모로 알차게 써먹히는군. 일부러 태라 보라고 냉랭한 조소를 지으며 시동을 걸었다. 무참하게 부서진 태라의 차를 뒤로한 채 계획대로 신 여사의 차가 주차장을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차가 도로를 달려가는 동안 뒷좌석에서는 오만가지 쓸 데 없는 얘기들이 오고갔다. 한남동 오 여사님이 또 아들 애인 찾아가서 물 뿌리고 지랄발광을 부렸다더라, 김 사장 댁 첫째 딸이 애를 낳았는데 애가 아빠를 하나도 닮질 않아서 난데없는 친자확인 소동이 벌어졌다더라 등등. 영운도 묵묵히 운전을 하는 한편으로는 머릿속으로 수만 가지 생각을 하고 있었다. 생각의 주인공은 지금 뒷좌석에 앉아 여느 유부녀처럼 수다 삼매경에 빠져있는 태라였다. 겉모습은 나르시시즘에 빠져 허영심을 주체 못하는 철부지 같은데도 돌아서면 의중을 알 수 없는 음흉한 흉계들로 가득 차 있다. 전에 거래를 운운하면서 영운의 뜻을 꺾은 것이나 오늘처럼 신 여사를 계획대로 끌어들이기 위해 일부러 차를 박살내고 신 여사의 기사를 다른 데로 보내버린 것만 봐도, 절대 만만한 여자가 아니란 것만큼은 충분히 느낄 수 있다. 아까 운전도 일부러 못 하는 척 한 게 아닐까? 이 정도로 주도면밀한 여자라면 충분히 그럴 지도 몰라. 한창 생각에 빠져있는 사이 듣는 이 없는 라디오는 혼자서 잘도 울어대고 있었다. 연이어 계속되고 있는 청와대 연쇄폭탄테러미수사건이 민자련 잔류 세력의 소행으로 좁혀지고 있는 가운데…… 영운은 신경질적인 동작으로 라디오를 꺼버렸다.
한참을 달린 차가 신 여사의 자택 방향에서 벗어나 멈춘 곳은 어느 외진 한식당 앞이었다.
ㅡ 미세스 홍, 뭐야? 왜 여기서 멈춰?
ㅡ 차 태워주셨잖아요. 같이 저녁 들어요. 제가 살게요.
태라가 내리기 전 영운에게 살짝 눈짓을 했다. 여기서 기다리고 있으라는 뜻이다. 계획대로라면 영운은 이쯤에서 빠져줘야 했다. 얌전히 두 여자가 밥을 먹고 나올 때까지 차 안에서 기다리고 있으면, 태라가 또 그 매혹적인 미소와 은근한 말솜씨로 신 여사를 홀리는 것이다. 두 여자의 뒷모습이 식당 안으로 사라졌다.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영운이 별안간 입술을 말아 올리고는 운전대를 잡았다. 차는 슬슬 달려 주차장 안으로 들어섰다.
영운이 다시 모습을 드러낸 것은 태라와 신 여사가 들어간 방이었다.
ㅡ 무슨 일이야?
영운은 태라의 물음에도 아랑곳없이 그녀의 옆에 당당하게 가 앉았다. 태라가 당황한 얼굴을 애써 숨기기 위해 소리 내어 웃고 신 여사가 눈살을 찌푸리는 데도 전혀 개의치 않는다. 고작 운전수라고 하기엔 너무나도 느긋하고 태연자약한 표정이 신 여사로 하여금 쉽사리 이 남자를 힐난할 수 없게 만들었다. 엉망이 된 분위기를 즐기기라도 하듯 영운은 일부러 느릿한 동작으로 잔을 홀짝였다. 물에 젖은 입술이 조명 빛에 반짝 빛이 났다.
ㅡ 제대로 인사드리겠습니다. 김근학 의원님 밑에서 일하고 있는 이성진이라고 합니다.
물론 가명이다. 태라가 식탁 밑에서 재빨리 영운의 손을 꼬집었으나 이미 말은 뱉어진 뒤였다. 계획이 어그러졌다. 원래대로라면 태라가 적당히 기회를 봐서 슬슬 강종우에 관련된 이야기를 꺼냈어야 했다. 갈팡질팡하는 신 여사에게 적당히 당근을 쥐어주어서 이쪽으로 돌아서게 회유해야 했다. 지금 이놈은 여기 있어서는 안 됐다. 그냥 얌전히 시다바리답게 일을 마치고 승전보를 울리며 돌아올 때까지 차 안에 박혀 있어야만 했다. 입술만 잘근잘근 씹고 있던 태라는 그 순간 자신에게 향한 영운의 조소를 보았다. 아아, 저놈이 결국엔 일을 어그러뜨리려고 작정한 게로구나. 그제야 태라는 영운의 모든 속셈을 간파했다. 간파했다 해도 이미 너무 늦었다.
ㅡ 김 의원님? 왜 그런 사람이 미세스 홍 운전수 노릇이나 하고 있는 거지?
ㅡ 이 여자와 모 회장의 계획을 성공시키는 데 일조하라는 김 의원님의 명령을 받았기 때문이죠.
ㅡ 계획?
살에 파묻혀있던 신 여사의 작은 눈이 찌푸려졌다. 지금 들은 말과 상황을 종합해 결론을 내리느라 머리를 굴리고 있는 것 같았다. 욕심과 허영심, 그리고 살로 가득 찬 머리가 그래도 돌아가긴 했는지 한참 만에 신 여사가 험악한 얼굴로 한 말은 이랬다.
ㅡ 오호라? 그런 거였군? 미세스 홍, 실망이야. 설마 했는데 정말로 뭔가 목적이 있어서 나한테 그렇게 사탕발림이나 늘어놨던 거야?
ㅡ 여사님 말대로 이 여자가 여사님께 마음에도 없는 사탕발림을 한 건 맞지만, 우리가 여사님께 전혀 해가 되는 제안을 하러 여기까지 온 게 아닙니다.
신 여사가 조롱 섞인 얼굴로 영운을 노려보았다.
ㅡ 아, 그래? 대체 얼마나 대단한 제안을 하시려고? 참고로 먼저 말해두겠는데, 미세스 홍이나 그쪽, 미스터 리가 뭘 듣고 온 건진 모르겠지만, 혹시라도 우리 남편한테 줄을 대러 왔다든가 뭐 그런 얘기들을 나한테 부탁하러 온 거면 맘 접어. 듣자 하니 모 회장님께서 이번 총선에 출마하시기로 했다면서? 남편이 이미 그런 쪽엔 관여하지 않겠다고 못 박았으니 날 설득하려고 해봤자 소용없을 거야.
ㅡ 설득하러 온 게 아닙니다. 우린 단지 여사님께 독이 든 잔과 꿀이 든 잔을 두고 어떤 것을 선택할 것인지 물을 뿐이죠.
ㅡ 뭐야?
앙칼진 고함이 영운에게로 곧장 날아들었다.
ㅡ 미스터 리, 날 지금 협박하는 거야? 당신네들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독잔을 먹여버리겠다는 거야, 뭐야?
ㅡ 무슨 그런 섭섭한 말씀을. 여사님과 여사님 바깥어른께서는 이미 독이 든 잔을 손에 쥐셨습니다. 이대로 내버려 둔다면 여사님 부부는 손에 든 게 달콤한 꿀물인 줄로만 알고 기쁘게 독약을 마시겠지요.
ㅡ 지금 강 이사를 독잔이라고 말하는 거야!
신 여사가 결국 분에 못 이겨 버럭 성을 내고 말았다. 뒤늦게 입방정을 후회했지만 이미 벌어진 일이었다. 이로써 강종우와 태종 가(家) 둘째 아들 간의 접촉이 확실시된 셈이다. 어디 가서 이런 얘기 일절 하지 말라고 남편이 주의 또 주의를 줬었겠지만 애석하게도 남편의 야심찬 계획은 부인의 경솔함으로 인해 폭로되고 말았다. 자기도 자기가 일을 그르쳐버렸다는 걸 아는지 신 여사는 한동안 안절부절못하며 어쩔 줄을 몰라 했다. 그러다 곧 생각을 고쳐먹고는 도리어 더 당당한 얼굴을 했다.
ㅡ 그래, 들었는지 모르겠지만 바깥양반이 강종우 이사와 손잡았어. 아버님께서 치사하게 아주버님을 후계로 내정해두셨으니 우리 쪽에서 이 정도 선수 친대도 누가 뭐라고 하겠어? 아, 강 이사와 미세스 홍 아버님이 서로 절친한 사이니 이미 알고 있을 거 아냐? 강 이사도 지금 총선 선거 출마 준비 중인 거. 모 회장님도 만만찮지만 강 이사 역시 무시 못 할 거야. 포스트 유도균! 이 한 마디면 모든 게 다 정리가 되지. 후에 우리 남편이 사장, 아니, 태종그룹의 주인이 되고 강 이사가 성공적으로 정계 입문을 하게 되면 그 뒤의 일은 탄탄대로를 달리게 될 거야. 투표권을 가진 이사들도 멍청이가 아닌 이상에야 그 사실을 알고 있을 텐데, 과연 어느 누가 회사를 위한답시고 아버님의 결정에만 따를까? 이미 결과는 결정 난 거야. 지금 남편이 이사들 설득 중에 있어. 거의 확정 난 거나 다름없다고. 지금 이런 상황을 두고 독잔이라고 하는 건가? 미스터 리, 지금 미쳤어?
ㅡ 중요한 사실 한 가지를 짚어드리도록 하죠.
영운은 신 여사의 말에서 즉시 어폐를 짚어주는 것 대신 젓가락으로 별로 맛있어 보이지 않는 생선 부위를 집어 들었다. 그걸 입으로 가져가지 않고 허공에 빙빙 돌리기만 했다.
ㅡ 일단 바깥어른께서 애초에 좋은 패가 아니었단 사실을 명심해주시길 바랍니다. 그러니까, 강 이사와 손을 잡기 전에는 별 볼일 없는 밑반찬이었던 셈이죠. 마치 이 생선처럼. 그렇지만 바깥양반께서 강 이사를 만나면서부터 위치가 기하급수적으로 돌변하기 시작합니다. 여기까지 듣기엔 바깥어른께 굉장히 좋은 일 같지만, 얘기를 한 번 뒤집어볼까요? 바깥어른께서 지금처럼 유리한 고지에 서 있게 된 건 강 이사와 접촉한 이후지 이전이 아니었습니다. 그건 여사님께서도 인정하시죠? 네, 그렇다면 강 이사는 왜 맛도 없고 영양가도 없을 것 같은 이 생선처럼 효용 가치 없는 바깥어른을 정계 진출의 파트너로 삼았을까요? 분명 그보다 더 쉽고 빠른 길이 있었을 텐데.
ㅡ 그건,
ㅡ 제가 보기엔, 강 이사에겐 또 다른 음흉한 흉계가 숨겨져 있다고 봅니다.
말을 잇는 영운의 목소리는, 이 순간만큼은 태라도 모든 것을 잊고 주의를 집중하게 할 정도로 흡입력이 있었다. 무서운 얘기를 해달라고 졸라대는 손자에게 얘기를 꺼낼 듯 말듯 애를 태우는 할아버지처럼 적당히 긴장을 조성하면서도, 불필요한 이야기는 적당히 생략하고 놓쳐선 안 되는 이야기는 부풀려서 강조하며 필요할 때에는 사실이 아닌 것을 마치 사실인 것 마냥 말하고 있다. 모 회장의 계획을 어그러뜨리려고 난입한 걸로만 생각했는데 전개가 의외로 좋게 흘러가고 있었다. 태라는 안심하는 한편 마음 한 구석으로는 문득 서늘한 두려움 같은 것을 느꼈다. 만약 이 남자와 이 남자가 모시고 있는 김근학을 동지가 아닌 적으로 만났다면.
ㅡ 효용 가치 없는 패를 자신 있게 집어 드는 경우는 딱 한 가지뿐이죠. 원하는 대로 써먹다가 목적을 이루면 버림돌로 내던질 수 있는 개가 필요할 때. 이런 걸 사자성어론 토사구팽이라고 한다죠? 유방이 천하통일을 이룩하고 나서 개국공신 한신을 목 베어버렸던 것처럼, 강종우도 원하던 정계 진출이 끝나면 바깥어른을 확, 잡아먹어버릴 겁니다.
영운은 말을 마치고는 진짜로 젓가락에 집고 있던 생선을 씹어 삼켜버렸다. 생선이 영운의 입 안에서 무참히 씹혀 목구멍으로 넘어가는 동안 신 여사는 생선이 마치 자기 남편이라도 되는 양 얼굴을 일그러뜨리고 있었다. 곧 신 여사가 다급한 얼굴을 했다. 이제 협상의 테이블은 신 여사 쪽에서 영운 쪽으로 위세가 기울어있었다. 이 모든 것의 일등공신은, 단연 이 사내다. 이 오만방자한 시한폭탄 같은, 아니, 시계조차 고장이 나서 언제 터질지 모르는 위험한 폭탄 같은 남자.
ㅡ 그, 그럼 우리 양반은 어떻게……
ㅡ 잊으셨습니까? 여사님과 바깥어른 앞엔 아직 꿀물이 든 잔이 남아 있습니다. 자, 이제 우리가 왜 여사님을 굳이 찾아왔는지 납득이 되시죠?
ㅡ 모 회장님께 협조하란 뜻이겠지? 원하는 게 뭐야? 구체적으로 설명 좀 해봐요.
이렇게 상대가 안달을 낼수록 함께 서둘러선 안 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영운은 신 여사가 흥분으로 일을 그르쳐버리는 일이 없게 시간을 두고 인내심 깊게 기다렸다. 어느 정도 시간이 됐다 싶을 즈음에, 천천히 입술을 뗐다.
ㅡ 여사님이 해주십사 하는 일은 바깥어른을 강종우에게서 돌아서고 우리 쪽에 협력하도록 설득하는 것입니다. 아까까지 비린내 나는 생선 취급하던 바깥어른을 이제 와서 우리 편으로 끌어들이려하는 이유가 뭐냐고 물으시면, 이렇게 답하겠습니다. 지금 강종우가 필요한 것은 자신을 떠받쳐줄 기둥이지만, 우리 쪽에서 필요로 하는 건 기둥이 아닌 지붕에 얹을 기왓장이라고. 우리 쪽엔 이미 밑바탕이 충분합니다. 부족한 건 바깥어른과 같은 인맥이죠. 자, 그럼 이제 어쩌시겠습니까. 강종우 열차에 타고 있다가 모르는 사이에 바깥으로 내쫓겨 치욕스런 미아 신세가 될 겁니까, 아니면 우리 쪽과 함께 있으면서 영광스런 킹메이커가 되겠습니까?
ㅡ 할게! 내가 남편을 설득하도록 하지. 우리 양반은 내 말이라면 껌뻑 죽으니까 걱정일랑 붙들어 매요.
이 일은 이미 저 자신만만한 사내가 뛰어들었을 때부터 결론이 정해져있던 것일지도 모른다. 태라는 턱을 괴고 영운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다가, 픽 웃음을 터뜨렸다. 문득 영운이 말했던 ‘토사구팽’이란 말이 목구멍에 넘어가지 않고 걸렸다. 토사구팽이라. 태라는 어쩐지 지금 이 상황이 그 말과 너무나도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여전히 두 눈에 가득 들어찬 것은 승리에 도취해 또 다른 계획에 골몰하고 있는 사내였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훤히 보인다고 생각하면서도 가끔 이런 식으로 뒤통수를 날려서 자꾸만 흥미가 샘솟는 남자. 태라는 절레절레 고개를 저으며 신 여사의 제안에 따라 축배를 들었다. 토사구팽, 토사구팽. 그 말을 입속으로 되뇌고 또 되뇌면서.
ㅡ
11월 20일. 유도균 전(前) 대통령 20주기 추모식 당일.
식이 시작되기 전부터 추적추적 때 이른 비가 내렸다. 천막을 두들기는 겨울비가 고인의 생전을 추모하기라도 하듯 꽤나 짙었다. 식에 참석한 모든 이들은 이 지루하게 길고 을씨년스럽기까지 한 빗소리를 고인의 목소리라도 되는 양 경건한 자세로 귀담아 들었다. 재임에서 사망까지 5년간, 수 천만 국민들을 가슴에 안고 누구보다도 나라의 부국강병과 안일에 몸과 마음을 바쳤던 사람이다. 한 사람의 몸으로 수백 명의 일을 했으며 수백 명의 마음을 한 사람의 마음으로 헤아렸던 사람이었다. 엄숙한 분위기와 빗소리를 양분 삼아 사람들은 고인에 대한 저마다의 기억들을 회상하며 슬픔을 억눌렀다.
식에 참석했던 사람들이 회상하길 개중 가장 끓어오르는 슬픔을 가누기 어려워했던 자는 당연 강종우였다. 고인의 대통령 재임 시절 스물다섯의 젊은 나이로 고인의 이상에 누구보다도 몸이 부서져라 충성했던 심복이자, 고인의 하나뿐인 아들의 절친한 친우였으며, 이제는 고인의 영광의 뒤안길에 홀로 남은 가여운 외손녀를 이날 이때까지 먼 타국 러시아에서 훌륭하게 길러 낸 후견인으로서, 이 순간 그가 회상하고 있는 고인에 대한 추억은 그 크기부터가 남다를 것이다. 고인에 대한 송사를 낭독할 때 그의 목소리는 슬픔을 넘어서 어떤 비장함까지 느껴졌고, 식에 참석했던 모든 이들은 이 울음소리와도 같은 빗소리와 더불어 그의 강단 있고 감동적인 목소리를 인상 깊게 기억할 수 있었다. 그랬기 때문에, 그렇게도 고인에 대한 바래지 않은 충절로 모든 이를 감복시켰던 강종우가 식이 끝나기 무섭게 모 호텔에서 화려한 환영회를 열었다는 사실은 주변을 알쏭달쏭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불과 몇 시간 전 고인을 추모하며 슬픔을 억누르던 자라고는 믿을 수 없게 환영회 내내 강종우의 얼굴은 멀끔했다. 유 전 대통령 재임 당시 미남 측근이라고 불렸었다는 명성답게 오십 줄을 목전에 두고 있다 해도 얼굴은 서른 살의 그것처럼 젊고 인상이 훤했다. 추모식에 참석했던 몇몇 인사들 뿐 아니라 환영회에 따로 초대 받은 손님들 역시 화려하게 옷을 차려입고 입을 모아 강종우를 마치 죽은 유 전 대통령이 살아 돌아온 것처럼 칭송했다. 그러나 흥겹고 유쾌하던 파티 분위기도 그가 들어서면서부터 눈 깜짝할 사이에 기하급수적으로 돌변하기 시작했다.
초대받지 않은 손님. 미래물산 모수화 회장이었다.
현재 강종우가 암암리에 총선 준비에 박차를 가하고 있고 모 회장의 유일한 대항마로서 급부상하고 있지만, 한때는 미래물산 재무이사로서 모 회장을 충실히 보필해왔던 자였다. 현재 라이벌 구도를 형성하고 있는 두 사람의 상황을 놓고 보면 부하가 상사와 맞서는 하극상이라고도 할 수 있겠으나, 이미 강종우가 모 회장의 품을 떠난 지 오래고 오히려 유 전 대통령의 맥을 잇고 있다고 하는 게 옳기 때문에 마냥 비난만 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그런 애매모호한 관계를 뒤로한 채, 두 사람이 맞닥뜨렸다. 파티에 참석한 사람들도 이 두 사람의 조우에 아닌 척 해도 온 신경을 집중하고 있었다.
먼저 손을 내민 것은 강종우였다.
ㅡ 오랜만에 뵙겠습니다, 회장님. 그간 안녕하셨는지요.
모 회장은 강종우가 악수를 청한 손을 잡지 않고 일단 강종우의 얼굴만 빤히 살펴보고 있었다. 이 의례적이고 짧은 인사말에도 어떤 셈이 숨어있는지 간파해내겠다는 의도다. 모 회장이 악수를 거절하자 강종우도 손을 거두고는 다른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오늘 파티엔 몇 년 전 사별한 모 회장의 부인 대신 태라가 파트너로 참석했다. 강종우가 그녀에게 눈길을 맞추며 유들유들하고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태라 역시 살짝 목례를 하고 아름다운 미소로 화답했다.
ㅡ 결혼 소식은 들었습니다만, 늦게야 결혼을 축하드리는 걸 용서해주십시오.
ㅡ 자네는 말이야, 내가 명예이사 씩이나 시켜줬으면 간단한 안부라도 전하는 게 도리 아닌가? 일 그만뒀다고 그렇게 남남처럼 구는 게야 그래?
ㅡ 죄송합니다, 회장님. 마음이야 늘 회장님 곁에 있었지만 여러 가지 일들이 겹쳐 마음대로 되질 않더군요. 너그러이 봐주십시오.
이 자리엔 오늘 영운도 모 회장의 수행원 자격으로 참석했다. 이번엔 태라 쪽에서 오는 것을 꺼려했지만 영운이 원해서 합류하게 되었다. 영운은 별 내용 없는 인사치레 하나하나에도 예리한 긴장감이 감도는 두 사람의 대화나, 이들을 둘러싸고 이 재미있는 광경에 빨려들고 있는 관중들을 눈으로 훑으며 재빨리 머리를 굴려댔다. 강종우. 과거엔 모 회장의 충직한 하수인이었다고는 하나 현재는 전혀 그렇지가 않다. 자기 밑에만 있을 줄 알았던 이가 이젠 자기의 머리를 노리려고 하니 모 회장으로서는 기가 막히고 코가 막히는 노릇이겠지. 슬쩍 총선 얘기를 들먹거리면서 서로의 의중을 떠보는 두 사람 사이에서 영운은 문득 이상한 느낌 같은 것을 받았다. 겉보기엔 강종우가 과거의 예를 차려 모 회장을 대하고 있는 것 같지만 까 뒤집어보면 실상은 정 반대였다. 그러니까, 영운은 알 수 없는 어떤 이유들로 인해서 모 회장이 강종우 앞에서 점점 작아지고 있는 것만 같은…….
ㅡ 참, 회장님. 민이가 안부 전해달라고 했습니다. 직접 찾아뵙지 못해 죄송하단 말도.
또 한 가지,
ㅡ 아닙니다. 오히려 회장님 덕에 빨리 나을 것 같다고, 하루 빨리 회장님을 뵙고 싶다고 하더군요.
강종우가, 아까부터 계속 영운을 주시하고 있는 것만 같은 기분 나쁜 느낌도.
몇 마디를 더 주고받다가 결국 모 회장은 전화를 핑계로 서둘러 자리를 벗어나버렸다. 태라가 뒤쫓아 가고 영운도 뒤따라가려고 했으나, 강종우가 여전히 제자리에 못 박혀 있는 것을 보고 도로 자리에서 멈춰버렸다. 그 기분 나쁜 시선이 착각이 아니었다는 걸 몸소 증명이라도 해주려는 듯 강종우가 아예 노골적으로 영운을 위아래로 훑어보고 있었다.
ㅡ 김 의원님의 양아들이라고?
영운은 대꾸 대신 대놓고 눈살을 찌푸렸다. 초면부터 말이 반토막이었다.
ㅡ 이상하네, 난 이렇게 생긴 아들을 본 기억이 없는데.
ㅡ 김 의원님을 아십니까?
ㅡ 친구의 친구였지. 몇 번 밥도 같이 먹었어. 집에도 찾아간 적이 있는데, 그 때가 아마…… 응, 그래. 첫째 정혜가 막 중학교 입학할 무렵이었군. 그래서 내가 용돈도 주고 그랬는데. 어린 것이 꽤 새침데기였지. 지금도 그러나? 정현이는 어때? 둘째였지, 아마? 그 땐 하루라도 사고를 안 치면 몸에 좀이 쑤시던 녀석이었는데. 으음, 또 누가 있더라. 아, 막내딸. 이름이…… 세린이라고 들었어. 내가 마지막으로 봤을 땐 박 여사님 뱃속에 있었는데 말이지.
영운에겐 하염없이 낯설기만 한 그 이름들이 익숙하게도 되살아 나오고 있었다. 강종우는 말끝을 흐리며 영운의 얼굴 구석구석을 살폈다. 원하는 반응을 기대하기라도 하는 눈치다. 알고 있는 것이다. 강종우가 말하는 저 가족 속에서 영운은 14년 째 이방인이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는 것을. 그렇게 조롱하지만 그것을 능숙하게 감추고선 영운을 기만하고 있는 것이다. 첫인상은 언제나 틀린 법이 없다. 그것이 강렬하면 강렬할수록 더더욱 그렇다.
ㅡ 호구 조사는 그쯤 하시죠.
ㅡ 아, 미안. 혹시 기분 나빴나? 그렇다면 사과하지.
ㅡ 그럼 이만.
영운이 목례도 생략하고 자리를 벗어나려는 순간 강종우가 영운을 불러 세웠다.
ㅡ 께름칙한 냄새가 나는군.
ㅡ …….
ㅡ 눈빛 말이야. 내가 그런 눈빛을 아주 잘 알고 있지. 비슷한 눈을 가진 사람을 알거든. 삶에 일말의 미련도 없는 자의 눈.
강종우가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영운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손은 묵직했다. 단지 어깨에 손을 얹어놓은 것 외에 영운은 알지 못하는 어떤 의도가 있는 것만 같았다.
ㅡ 좀 더 미련을 갖고 살아봐. 어차피 사람의 목숨은 한 개 뿐이니.
영운이 거칠게 손을 쳐내려고 했으나 그보다 강종우가 더 빨랐다. 그렇게 기분 나쁜 말을 남겨 놓는 것과 함께 강종우는 등을 돌려 어디론가 가버리고 말았다.
‘좀 더 미련을 갖고 살아봐. 어차피 사람의 목숨은 한 개 뿐이니.’
ㅡ 기쁜 소식 하나 알려줄까?
테라스로 도망 온 영운을 누가 뒤에서 불렀다. 보지 않아도 태라라는 것을 알 수 있다. 태라가 영운의 어깨를 톡톡 건드리며 장난스럽게 웃고 있었다. 영운은 난간에 몸을 기댄 채 웃지도 않고 입 끝만 슬쩍 올렸다 내렸다. 테라스 아래로 내려다보이는 도심의 풍경은 인정하긴 싫지만 아름다웠다. 검은 밤하늘 아래 건물마다 밝혀진 불빛은 이제는 도시 속 하늘에서 자취를 감춰버린 별을 대신하고 있는 듯했다. 기쁜 소식을 알려주겠다며 테라스까지 쫓아 나온 태라도 도시의 밤 풍경에 취한 건지 말을 잇지 않았다.
ㅡ 말을 걸었으면 말을 해.
ㅡ 아, 그래. 기쁜 소식이야. 태종그룹 둘째 내외가 오늘 환영회에 참석하지 않았어. 완전히 강종우에게서 등 돌리겠단 소리지. 강종우는 지금 벼랑 끝으로 몰리고 있는 제 상황도 모르고 거만하게 웃어대느라 바쁘지만.
ㅡ 벼랑 끝에 몰린 게 아니라는 사실을 알기 때문일지도 모르지.
ㅡ 응?
영운은 회상했다. 시종일관 여유가 넘치고 자신만만하던 강종우의 얼굴을. 영운 앞에 김근학 일가의 얘기를 꺼내며 느긋한 손길로 영운의 어깨를 다독이던 것을. 그가 남긴 마지막 말까지. 그건 태라 말처럼 벼랑 끝에 몰려 한순간에라도 나락으로 떨어질지 모르는 자가 풍길 수 있는 태연함이 아니었다. 강종우 정도 되는 인물이 상황파악 하나 제대로 못할 병신일리 만무하고, 그러니까 먼젓번의 그 당당함도 무지에서 나온 허세가 아니었단 소리다. 그러나 지금 강종우가 모 회장에 의해 점점 낭떠러지 아래로 몰리고 있는 것만은 명백한 사실이었다. 강종우가 태종과의 연줄을 위해 잡고 있던 둘째 아들이란 끈은 이미 태라와 영운이 끊어버렸고, 강종우는 다시금 후방 세력을 찾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에 직면해있었다. 대체 뭘까. 영운이 알지 못하는 강종우의 이면은. 모 회장과 인사를 나누던 강종우를 떠올렸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영운만큼은 알 수 있었다. 그 때 벼랑 끝에 몰려있던 사람은, 강종우가 아니라 오히려 모 회장이었다는 것. 적어도 그 순간만큼은.
ㅡ 아무튼 생각 외로 일이 잘 풀려서 다행이야. 둘째 부부가 똑같이 멍청했으니 망정이지 조금이라도 판단력이란 게 있었다면 그렇게 감정적으로 휘둘리는 일도 없었을 거야. 난 말이지, 그 날 생각했잖아. 절대로 신 여사처럼 멍청한 여자가 되지 않겠다고.
ㅡ 유도균의 외손녀와 잘 아는 사이였나?
대뜸 던져진 물음에 조잘대던 태라의 입이 딱 붙었다. 별로 달갑지 않은 화제라는 건 태라의 굳어진 표정에서부터 느껴졌다. 그러나 더 이상 발뺌할 수도 없는 일이라고 판단했는지 곧 한숨을 내쉬며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입술을 떼기 전 옆에 선 사내의 옆얼굴을 흘깃 돌아보았다. 무심하게 툭 던져놓은 물음 같아도 눈동자에서만큼은 집착이 느껴졌다. 타인은 감히 짐작조차 할 수 없는, 아마도 본인조차 제대로 자각하고 있지 않을, 끝없는 분노와 내밀한 집착.
ㅡ 유민을 길러낸 강종우가 한때는 아버님 측근이었어. 아버님이 가끔씩 러시아에 가셨을 때 몇 번 만났었지. 그래서 우리 쪽에서도 강종우, 아니, 유민의 속셈을 간파할 수 있었던 거야. 이 나라 권력의 정점이 되겠다는 허무맹랑한 이상이나 그걸 위해 반년 전 유민이 국내에 위장입국을 했던 것도.
영운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 흔한 끄덕임조차, 하지 않았다.
ㅡ 더 물어보지 않을 거야? 반년 전 유민이 왜 위장입국을 했냐든가…….
ㅡ 궁금하지 않아.
태라의 시선이 영운에게 향했다. 그는 여전히 아름다운 도심 풍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지상으로 추락한 별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어쩌면 그 너머 손닿지 않는 오래된 기억들을 차갑게 식은 눈으로만 더듬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문득 영운이 킥 소리 내어 웃었다. 태라가 돌아봤다.
ㅡ 목숨이 하나뿐이니 미련을 갖고 살아보라고 하더군.
ㅡ 무슨 소리야?
ㅡ 똑같은 말을 했어. 최태상을 죽인 날. 목숨이 하나라는 걸 염두에 두고 행동하라고.
으레 그 여자를 회상할 때면 손이라도 베일 듯이 날 서 있던 것과 달리 영운의 목소리는 편안했다. 눈앞에 펼쳐진 검은색 도화지 위로 반 년 전 그 여자의 목소리며, 눈빛이며, 숨소리며, 그 모든 것들이 한꺼번에 되살아났다. 문득 눈이 아파왔다. 그 날 자신을 걱정하는 그 여자를 놀랍게 생각했었다. 우습지만 일말의 두려움마저 느꼈다. 어쩐지 이러다가 절대 빠져나올 수 없는 늪에라도 빠질 것만 같아서. 아, 아. 정말, 정말이지 우습다. 만일 그 날 이 모든 것들이 다 꾸며진 연극 나부랭이였단 사실을 알았더라면, 저도 모르는 새에 잠깐이나마 그 여자에게 물이 들어버리는 일이 있었을까. 죽일 듯이 위협하는 사내에게, 거침없이 담뱃불을 들이밀던 살인마에게 눈물을 흘리던 것도, 공포로 인해 맥박이 몰아치던 것도, 그러나 뒤돌아서면 병신같이 걱정하던 것도. 그 모든 것들이 그저 그 여자의 정교한 장난감 놀이였다는 사실을 알아버렸다면.
죽여 버렸을 거야. 아아, 그래. 넌 역시 그 때 죽었어야만 했어.
ㅡ 난 가끔씩 궁금해져. 도대체 그대의 그 눈동자 속엔 어떤 감정들이 살아 숨 쉬고 있는지…….
영운은 대꾸 대신 시니컬하게 웃었다. 충돌 없이 오랜만에 편안한 분위기였다. 나른함이 전신을 감싸는 게 느껴지자 영운은 난간에 더 깊이 몸을 기댔다. 고개를 떨구고 보니 문득 신경을 쓰지 않았던 1층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호텔 앞에 차가 서 있는 것을 보니 누군가 벌써 돌아가려는 것 같았다.
ㅡ 강종우 차인데? 벌써 돌아가려는 건가?
태라 역시 같은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어둠에 익숙한 영운의 눈은 금세 차 쪽으로 부축을 받아 걸어가고 있는 강종우와, 그를 기다리고 있는 검은색 자동차를 어둠 속에서 구별해냈다. 헤드라이트가 번쩍거리며 영운의 눈을 아프게 했다. 영운은 눈을 찌푸리며 거기로부터 시선을 거뒀다.
ㅡ 어두워서 잘 안 보이는걸. 차 안에 또 누가 타고 있는 것 같은데?
영운은 관심 없다는 표정으로 아예 등을 돌려버렸다. 주인공이 사라지고 나니 파티도 거의 파장 분위기였다. 탁 문이 닫히는 소리와 함께 차가 시동을 걸었다. 차가 슬슬 앞으로 달려가려고 할 즈음, 영운의 시선이 다시 1층으로 돌아갔다.
차에 탄 또 하나의 그림자를 보았다.
ㅡ 어머!
태라의 비명은 순식간에 등 뒤로 흩어졌다. 여긴 2층이야! 바락 고함을 치는 소리도 허공에 맥없이 사라져버렸다. 지금 영운의 귓가에 들려오는 것은 매서운 바람소리 밖에는 없었다. 요령 좋게 아래로 뛰어 내리고, 미친 듯이 질주했다. 오로지 눈에 박힌 것은 멀어지고 있는 차 뒤꽁무니였다. 취한 강종우 옆에 얌전히 앉아있는 그림자였다.
그 여자였다.
다리가 뽑힐 정도로 이를 악물고 달렸으나 차는 곧 속력을 내어 저 멀리까지 달려가 버렸다. 숨이 턱 끝까지 닿도록 달리다가 다리가 우뚝 멈춰 섰다. 차는 그를 조롱이라도 하듯 멈추지 않고 달렸다. 사라졌다. 아니, 별안간 차 창문이 열리고 차 안에서 머리가 내밀어졌다. 바람결에 부서지는 머리카락. 그 사이로, 눈동자가 멀리서 그를 꿰뚫고 있는 것 같았다. 멀리서도 단번에 알아볼 수 있다. 차는 금세 그의 시야에서 사라져버렸다.
ㅡ 미쳤어? 갑자기 왜 이래!
겨우 뒤따라온 태라가 영운을 붙들었다. 여기까지 전속력으로 달렸는데도 영운은 숨 하나 차지 않은 사람처럼 꼿꼿이 서서 차가 사라진 쪽을 노려보고 있었다. 태라는 2층에서 단숨에 뛰어내린 영운의 두 다리가 부서지진 않았는지 걱정했지만 그는 미동조차 없었다. 사라지기 전, 그 여자가 머리를 내밀고 그에게 어떤 말인가를 한 것만 같았다.
들리지는 않았으나 바로 귓가에서 속삭이고 있는 것만 같은 그 말……
그 날 이후 영운은 뭔가 작정이라도 한 사람처럼 기를 쓰고 강종우 타도에 열을 올렸다. 무엇이 그를 이렇게도 불이 붙게 만들었는지는 모르지만 태라로서는 좋은 신호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열성적인 것을 넘어서 헌신적이기까지 한 그의 노력 덕분인지 상황은 나날이 좋아졌다. 태종그룹 둘째 아들은 모 회장의 선거 준비를 도우며 쓸모 있는 킹메이커로 급부상했고, 그와 반대로 강종우의 활동은 나날이 위축되어갔다. 일이 이토록이나 술술 풀리는 것에 대해 가끔 태라가 우려를 표했지만 그 때마다 승리에 도취돼 기뻐하는 영운을 보고는 그런 우려도 접고야 말았다. 우려보다도 저 사내에 대한 두려움이 앞섰기 때문이다. 강종우의 파괴, 더 나아가 그 뒤에 있는 어떤 것마저도 난도질하고 악랄하게 파괴해버리겠다는 데 미쳐버린 것만 같은 저 사내의 광기 때문이었다.
ㅡ
12월 초.
오랜만에 일도 없겠다 태라와 영운은 태라의 별장에서 함께 점심 식사를 하고 있었다. 요즘은 일이라고 하기도 민망할 정도로 업무가 없었다. 일이 나날이 잘 풀려주는 덕에 더 이상 강종우에 대한 뒷 공작을 할 건수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ㅡ 이상할 정도로 조용해, 요즘은. 일도 별로 없고, 신문을 펼쳐 봐도 별 재미난 기삿거리 하나 없고…….
태라가 영운에게 눈짓을 했지만 영운은 포크로 스파게티 면을 돌돌 마는 데 온 신경을 집중하느라 별로 귀 기울여 듣고 있는 것 같지 않았다. 여자와 단 둘이서 얌전히 스파게티를 먹은 적은 없었는데. 영운은 대꾸 대신에 맞은편에 앉은 태라를 보고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충분히 성욕을 부채질 하는 매력적인 외모에 몸매이지만, 이쪽에서 먼저 그러고 싶은 마음이 없어지는 것도 참 신기한 일이다.
ㅡ 그렇게나 뉴스를 달구던 청와대 연쇄폭탄테러미수사건도 요즘은 잠잠하군. 설마 범인이 잡히기라도 한 건가? 으음, 그럴 리는 없을 텐데…….
영운을 한 번 떠보려고 한 말인데도 반응이 없으니 이쪽에선 민망할 노릇이었다. 반응 좀 보려고 기를 쓰던 태라도 결국엔 제 풀에 지쳐 뚱한 얼굴로 스파게티를 입으로 가져다 넣는 데에만 열중했다. 특별히 그녀가 직접 만든 요리다. 이제껏 가족도, 사랑하는 사람도, 심지어 남편에게도 한 번 해준 일 없는 요리를 이 남자에게 처음으로 해줄 줄이야.
ㅡ 내가 전에 이상한 얘길 들었거든?
ㅡ 입에 있는 거나 다 씹고 말 해. 튀잖아.
ㅡ 강종우 말이야, 놀고 있는 게 아니었더라고.
아무 반응이 없던 남자가 역시나 강종우란 말에는 눈썹을 1센티 쯤 꿈틀 움직였다.
ㅡ 백 퍼센트 믿을 만 한 정보는 아닌데, 11월 중순부터 강종우가 태종그룹 아들과 자주 만나고 있었다는 정보를 입수했어.
ㅡ 둘째 아들?
ㅡ 아니, 막내 말이야.
영운의 양미간이 보기 좋게 일그러졌다. 태라가 스파게티 면을 포크로 뒤적이면서 턱을 괴었다.
ㅡ 이상한 일이지. 이게 사실이라면 말이야. 11월 말 쯤이라고 하면 강종우가 새로운 파트너를 물색하느라 그랬다고 넘길 수 있겠지만, 11월 중순이라고. 우리가 신 여사에게 접근하기도 전이야.
ㅡ …….
ㅡ 태종과의 관계를 위해 애초부터 연줄을 하나만 마련해 놓은 게 아니었던 건가? 만일을 대비해서였다면 그럴 수도 있었겠지. 우리 같은 훼방꾼한테도 흔들리는 일 없게 미리 또 하나의 패를 숨겨둔 거라면……. 아, 그래서 그 날 강종우가 파티장에서도 그렇게 당당했던 건가?
생각이 이어지면 이어질수록 머리가 아파오는 모양이었다. 영운도 스파게티 면을 말던 것을 멈추고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다. 테러미수사건 범인의 잠적, 태종그룹 둘째․셋째 아들 모두에게 접근했던 강종우, 그리고 지난날 파티에서 보였던 그 여유. 사건들이 이어지지 않는다. 아직 뭔가가 부족하다.
ㅡ 태종건설 사장직 임명 투표가 언제랬지?
ㅡ 어디 보자…… 앞으로 다섯 시간 쯤 남았어. 결과가 어떻게 될 지는 두고 볼 일이지. 예정대로 맏아들이 될 지, 둘째 아들이 될 지. 아니면…… 생각하긴 싫지만 강종우의 농간에 예정에도 없던 막내가 덜컥 사장자리에 앉게 될 지.
나른하게 중얼거리던 말이 그친 것은 태라에게 걸려온 전화 때문이었다. 통화를 위해 자리를 비킨 태라는 한참 만에 넋을 잃은 얼굴이 되어 돌아왔다. 태라는 한동안 초점 잃은 눈으로 말을 잇지 못했다.
ㅡ 뭐야? 무슨 일인데?
ㅡ 테러미수사건 범인이 잡혔어…….
ㅡ 그럴 일은 없을 거라며? 자세히 좀 말해 봐. 유도균의 외손녀가,
ㅡ 그 계집애가 아냐!
태라가 분을 이기지 못하고 테이블을 주먹으로 쾅 내리쳤다. 입술을 잘근잘근 씹으며 신랄한 웃음을 터뜨렸다. 이제야 모든 상황이 정리 된 듯했다.
ㅡ 그럼 처음부터 네 추측이 틀렸다는 거야?
ㅡ 아니지. 오히려 그 반대지.
ㅡ …….
ㅡ 내 추측은 정확히 들어맞았어. 단 하나의 오차조차 없이.
뒤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 줄도 모르고 한가롭게 스파게티나 뒤적거리던 때가 도리어 자랑스러워질 지경이다. 태라의 눈길이 애꿎은 스파게티 접시를 깨뜨릴 듯 노려보고 있었다. 잠시 어떠한 말도 뱉어지지 않았으나 영운도 차츰 태라의 말이 무엇인지 알게 됐다. 그의 양미간이 대답이라도 들은 것처럼 찌그러졌다.
ㅡ 범인으로 잡힌 자가 민자련 측이 아니란 건 밝혀졌지만, 더 기가 막힌 사실이 밝혀지고 말았어. 범인에게 테러를 지시한 건 민자련의 잔류세력이 아니라 전혀 다른 인물이었다는 거야. 그게 누군지 알겠어? 바로 태종그룹 둘째․셋째 아들이야!
범인이 자백하기를 태종건설 사장직에 맏아들을 내정한 유의범 회장의 조처에 앙심을 품고 나머지 두 아들들이 상황 반전을 위해 연막작전을 편 것이라고 했다. 실제로 두 아들들에게서 주가 조작, 횡령, 금품 제공 등 여러 불법 혐의가 나왔기 때문에 빼도 박도 못 할 상황이었다. 이미 민자련 잔류세력의 소행으로 낙인찍힌 사건에 배후랍시고 범인이 자백했다면, 비록 죄가 없다 해도 빠져나오긴 어려울 것이다.
잠시 후 정보원 측으로부터 태종건설 사장직으로 맏아들이 만장일치로 결정됐다는 정보가 들어왔다. 테러 및 불법 혐의로 나머지 아들들이 잡혀가고 없으니 당연한 결과였다. 이밖에도 둘째․셋째 아들들과 수시로 만났던 것으로 추정되는 강종우가 참고인으로 조사를 받았으나, 무혐의로 곧 풀려났다는 정보도 속속들이 들어왔다. 강종우의 무혐의에 다름 아닌 태종그룹 맏아들, 아니, 이제는 태종건설의 사장이 일조를 했다는 사실도.
ㅡ 이게 의미하는 게 뭐라고 생각해? 처음부터 강종우의 뒷배를 봐주고 있던 건 무능력한 둘째도, 셋째도 아닌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인간이었단 뜻이야. 아니, 생각은 했지만 그럴 리 없다고 단정 지었지. 아…… 아니야. 그래. 어느 것보다도 가장 확실하고 명백한 패였지만 기만으로 인해 눈앞에 있는 정답조차 제대로 읽어내질 못했어. 명백한 내 불찰이야.
생각해보면 힌트는 얼마든지 있었다. 유능한 기업인이라면 누구라도 탐낼 강종우란 카드를 맏아들이 청렴결백하단 이유만으로 거부하는 것도 의아했고, 이미 후계로 내정된 맏아들을 내버려두고 나머지 두 아들들에게 다리를 걸친 강종우도 이상했다. 두 아들들과 강종우의 접촉을 그렇게도 허술하게 드러낸 것도, 이쪽에서 둘째 아들을 빼앗아갔는데도 아무런 조치조차 취하지 않은 것도, 벼랑 끝에 몰렸음에도 그토록 자신만만하게 웃던 것도, 그 모든 것도. 모든 가능성을 면밀히 살펴보지 않은 채 그대로 강종우의 손에서 재롱잔치를 펼친 꼴이었다. 이제야 알 수 있다. 그 날 파티 때 강종우가 지었던 미소의 의미를.
ㅡ 검은 거래가 오고 갔던 데는 따로 있었던 거야……. 맏아들 쪽에서도 잠정적으로 인정을 받고 있다고는 하지만 나머지 아들들이 혹시라도 성가신 일을 벌인다면 귀찮아졌을 테니까. 그래, 이제야 꼭 들어맞는군. 처음부터 이상하다 싶었어. 그렇게 주도면밀한 강종우가 테러미수사건이라는 위험도 큰 무리수를 둔다고? 처음엔 정부에게 미운털 박힌 민자련에게 소행을 뒤집어 씌워 경찰과 언론의 시선을 돌린 뒤 뒤에서 비밀리에 태종과 접촉하려는 연막작전이라고 추측했었지만 곧 생각을 접었지. 그럴 리는 없다고 생각했어. 주도면밀한 강종우가 그런 위험한 수를 두는 것도, 그 일에 하나 남은 유도균의 혈육을 써먹는 것도. 하, 그 여우새끼한테 제대로 놀아난 꼴이 됐지! 내가 그럴 리 없다고 단정 지었던 건 애초에 가정부터가 잘못 됐기 때문이야! 연막작전이라고? 웃기는 소리!
그로써 믿을 수 없었던 가정은 진실이 되고 말았다.
ㅡ 이로써 뼈저리게 느끼게 되는 거지……. 강종우는 이딴 더러운 정치 수작거리에 머리에 피도 안 마른 계집앨 써먹을 정도로 썩어빠졌고, 거기에 순순히 총알받이가 되어준 그 계집애도 똑같이 돌았다는 거……
진실이 되었으나, 가장 지독한 진실이었다.
몇 시간 후, 강종우가 공식적으로 총선 출마 의사를 밝혔다는 기사가 속보로 날아들었다. 누구보다도 분에 겨워하고 있어야 할 영운은 기사를 읽고 있는 태라 옆에 앉아 아까부터 의미심장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태라가 영운을 돌아보았다.
ㅡ 지금 상황이 정말이지 거지같이 돌아가고 있거든? 뭐가 좋아서 나사 빠진 사람처럼 웃고 있는 거야?
ㅡ 아아.
영운이 어깨를 으쓱하고는 탁자에 다리를 쭉 뻗었다. 태라가 눈살을 찌푸렸으나 영운은 개의치 않고 가볍게 입술을 뗐다.
ㅡ 내가 이때까지 모 회장이나 너에게 개처럼 일해 줬던 게 순전히 내가 병신 머저리라서 라고 생각해?
ㅡ 뭐?
ㅡ 그랬다면 오산이야.
영운이 꺼내든 것은 핸드폰이었다. 그것을 태라의 얼굴 앞에 여유롭게 흔들어 보이며 입가에 냉랭한 웃음을 머금었다.
ㅡ 플랜 B 개시다.
쪼꼬맛리본 님 이름표 제공♡
아마 제가 오늘 올 거라고 예상한 분은..
아무도 없겠죠?
허.. 허허.. 1편부터 쭉 함께 해오셨던 독자분이면 이미 알고 계시겟지만
저 이런 여자입니다.. 한입가지고 두말하는 여자..
다음주에 온다 해놓고 바로 다음날 올릴지도 몰라여..ㅋㅋ..
뭐.. 오늘 또 삘이 딱! 왔다기보단
하루라도 빨리 검은 절벽을 보여드리는 게 더 좋을 것 같아서요
검은 절벽을 무한애정해주시는 독자분들께도
기다리게 해선 안 될 것 같구요..ㅎㅎ
아무튼! 오늘도 스크롤바 쩔지욬ㅋㅋ 죄송합니다 이게 다
적당한 데서 끊지못한 제 능력 탓입니다..허허
그치만 검은 절벽 역사상 처음으로
제가 생각하는 명장면이 나온 것 같습니다
아무도 공감안해주실지 모르지만.. 저는
마지막에 태라랑 영운이랑 별장에서 스파게티 먹는 거..
그 장면이 좋앗거든요.. 네.. 제가 이런 나른한 분위기 좋아합니다
뭔가 두 사람한테 오래된 커플 내지는 부부 느낌 나지 않으세요?ㅎㅎ 그래그래 너네끼리 로맨스 다해먹어라.. 하고 혼자 망상을 펼치다가 겨우 자제햇습죸ㅋㅋㅋ
오우 영운이 마지막 대사, 쓰고 나서도
올 까리한데?
이랫엇답니닼ㅋㅋㅋ 독자분들께도 제가 느낀 느낌 그대로 전해졋음 좋겟어욯ㅎㅎ
자! 그럼 저는 7편가지러 가겟습니당
왠지 연재 속도가 1장때랑 비슷해져만 가는 것 같은데..
암튼 다음주쯤에 올게여!!
아참
검은 절벽 애독자분들께 하트애정백만개!!!!! 쏩니다!!!
업쪽 = B 또는 댓글!!!!!
(댓글에 쩜 하나만 남겨도 저는 업쪽날립니다..ㅋㅋㅋㅋㅋ)
※ 추가
검은 절벽1~5
링크입니다용
클릭클릭
첫댓글 헐 제가 일빠찍을꺼예여
ㅋㅋㅋㅋ뜬금없이 업쪽이 와서 순간적으로 리턴되셧나... 이생각....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힣 5편본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6편이 역시나 어마어마한 분량으로 뙇오니.... 쁜틳님은 하루종일 글만 쓰시나여?.......... ㅋㅋㅋㅋㅋ 진짜 대단하십니당ㅋㅋㅋㅋㅋ 이번편은 더러운 술수(..) 가 난무하는 편이군녀...... 처음에 태라가 왜저러나 했는뎈ㅋㅋㅋㅋ 다 생각이 있었어요.... 그리고 강종우... 진짜 뭐지 저 근자감은 이러고 있었는데....... 핳 첫째아들이였다니... 반전이엿슴니닼ㅋㅋㅋㅋ 뭐 이게 진짜는 아니지만 정치가 참 골때린다는 생각이....들어요.... 막 읽는 도중에 혼란오면 다시 보고 이해하는 머리 나쁜 녀자라서
...핳 열심히 쎃는데 오빠가 삐끗해서 날려버렷서용ㅠㅠㅠ 폰으로 왔는데 뭘쓰려했던건지 기억이 안남니닼ㅋㅋ큐ㅠㅠ쨋든 다음편 기대할께욧♥
ㅋㅋㅋㅋ 아엘렌님 넘귀여우세옄ㅋㅋㅋ 제가 생각보다 느무 빨리오긴햇죠?ㅋㅋ 방학하고 노는것도 질리다보니 틈만나면 검은절벽에 손댄답니닼ㅋㅋㅋ 마음처럼 글이잘나오면참 좋을텐데 그러지 못해서 슬프지만..ㅠ.ㅠ 암튼! 이렇게 늘 댓글남겨주시는 엘렌님을 보며 열심히 달리는 것이지요!호호 2장이 1장에 비해 좀 골때리긴 하지요?허허 뭔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파트라 그런건데 앞으론 이렇게 복잡하게 안나올거여요.. 허허헣 2장 지금까지 내용을 한마디로 정리하자면 강종우가 제대로 뒤통수를 날린셈이져 그리고 영운이가 빡쳐서 플랜비!!!! 라고 외치는데서 끝나는.. ㅋㅋ 암튼! 열심히 써서 7편갖고오겟습니당 7편에서 뵈어요~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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ㅠ.ㅠ 이렇게 폭풍댓글로 날 감동시키다니.. 크윽ㅠㅠㅠ 나날이 자신감이 떨어지는데 이렇게 칭찬해주고 기를 북돋워주니 언니는 그저 기쁠뿐이다.ㅠ.ㅠ 게다가 가상까지 만들어주겟다니ㅠ.ㅠ 넘넘고마워 근데 문제가 생겨버렷서.. 민이랑 영운이랑 가캐인물은 그럭저럭 찾앗는데.. 다른사람은 도저히 싱크맞는 인물을 찾을 수가 없지 뭐니..ㅋ큐ㅠㅠ 암튼 바쁠텐데 이렇게챙겨주다니 마음만으로도 넘고맙다이유ㅠㅠ 오! 팜므파탈! 좋은 표현이야 뭔가 검은 절벽은 나오는 여자들마다 기가 쎈것가튼 기분이 드는데..ㅋㅋ 암튼! 추천100번짜리 소설로 봐줘서 언니는 기쁘고 행복하고 몸둘바를 모르겟어!!ㅎㅎ 아 지금 해품달 ost 들으며 답댓쓰고
잇는데 또 해품달의 여운이 슬슬 되살아나려고하는구나..ㅋㅋ 아무튼 동생 공부하느라 힘들겟지만 열씨미해!!ㅠㅠ 언니가늘 응원한다잉♡
B 까리한데ㅋㅋㅋ이 말 보고 빵 터졌어요 저도 영운이 대사보고 오 멋있는데 하고 생각했었는데 역시ㅋㅋㅋ태라는 예쁘고 성격도 마음에 들지만 뭔가 찜찜한 구석이 있네요ㅋㅋ 그리고 강종우 진짜 머리 좋네요ㅋㅋㅋ깜짝 놀랐어요 저도 별장에서 장면 좋았어요!! 특히 태라가 직접 스파게티를 만들었다고 해서 조금 설렜내요ㅎㅎ 이번편은 민이 분량이 지못미 흡ㅜㅅㅜ 그래도 내용이 너무 좋았으니 괜찮아요!
예민님!흡..ㅠ.ㅠ 죄송합니더 로맨스소설 최초로 2편째 여주가 등장하지 않는 참사가 일어낫네여..허허 덕분에 태라가 여주마냥 군림하는 지경까지...^^; 예민님을 위해 예고 한편 때리자면 앞으로 더더더 까리한 영운님 대사가 나옵니닼ㅋㅋㅋㅋ 조금 무서울지도 몰라여 영운이가 빡돌아서.. 좀.. 그렇더라구요?ㅎㅎ 스포방지를 위해 여기까지 말을 아끼겟습니닿ㅎㅎ 저는 그럼 열심히 7편을 가지로 가겠습니다! 7편에서 뵈어요 예민님~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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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나 감사드립니다!!!!ㅎㅎ
B 와우우우, 반전이네용 ㅋㅋㅋ 맏아들 이런...
감사합뉘당!!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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빼꼼곰님을 위해 예고를 하나 해드리자면.. 민과 영운은 조만간 만납니다.. 조만간..ㅎㅎ 주인공들이 평생 안만나면 로맨스가 안이루어지니깐요..ㅋㅋ 앞으로 태라도 매력덩어리 캐릭터로 예뻐해주셔요 제가 아끼는 캐릭터랍니다 호홍ㅋㅋ 암튼! 그럼 7편에서 뵙겠습니다!ㅎㅎ
B/역시반전이..대단해요진짜!! 영운이랑 민이 만나는 모습은 언제 나오나요?ㅠㅠ 빨리 보고싶어효 ㅎㅎ
조만간..만날것이어요 ㅎ흐 언제나감사드리고 7편에서뵙겟습니다!
B 민이ㅏㅇ영운빨리만낫으면좋겟네요!ㅠㅠㅠ재밋게봣어요다음편기다릴게요!!
10분뒤에 7편올립니당..ㅋㅋㅋ
민아 빨리좀 나와줘 ~
다음푠에서 나옵니다!!!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