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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명 정도(saṭṭhimatta)라는 상징적인 數
8. aggikkhandhopamasuttaṃ (AN 7.72) 불[火] 경(A7:68)460) Aggi-sutta
460) 6차결집본의 경제목은 '불무더기의 비유'(Aggikkhandhopama-sutta)이다. DPPN에도 Aggikkhandhopama-sutta로 언급되고 있다. 『청정도론』I.154에서는 '불의 무더기의 가르침 (Aggikkhandha-pariyāya)으로 언급되고 있으며 『청정도론』I.150~157에는 본경에서 세존께서 비유로써 비구들에게 질문을 하시는 내용이 모두 인용되고 있다. 상좌부 불교를 스리랑카로 전한 마힌다(Mahinda) 장로도 스리랑카에서 이 경을 설한 것으로 전해온다.(Mhy.xv.176)
“ārocayāmi vo, bhikkhave, paṭivedayāmi vo, bhikkhave,
yathā etadeva tassa varaṃ dussīlassa pāpadhammassa asucisaṅkassarasamācārassa
paṭicchannakammantassa assamaṇassa samaṇapaṭiññassa abrahmacārissa brahmacāripaṭiññassa
antopūtikassa avassutassa kasambujātassa
yaṃ amuṃ mahantaṃ aggikkhandhaṃ ādittaṃ sampajjalitaṃ sajotibhūtaṃ āliṅgetvā
upanisīdeyya vā upanipajjeyya vā.
“비구들이여, 그대들에게 고하고 선언하나니 계를 지키지 않고,
사악한 법을 가지고, 불결한 행위를 하고, 의심하는 습관을 가지고, 자신의 행위를 숨기고,
사문이 아니면서 사문이라 주장하고, 청정범행을 닦지 않으면서 청정범행을 닦는다고 주장하고,
[썩은 업에 의해] 안이 썩었고, [여섯 감각의 문을 통해 탐욕 등 오염원들이] 흐르고,
[탐욕 등의] 쓰레기를 가진 자에게는 불꽃을 튀기면서 시뻘겋게 불타오르는 저 큰 불무더기를
껴안고 앉아있거나 누워있는 것이 더 나을 것이다.
idamavoca bhagavā .
imasmiñca pana veyyākaraṇasmiṃ bhaññamāne saṭṭhimattānaṃ bhikkhūnaṃ
uṇhaṃ lohitaṃ mukhato uggañchi .
saṭṭhimattā bhikkhū sikkhaṃ paccakkhāya hīnāyāvattiṃsu —
“sudukkaraṃ bhagavā, sudukkaraṃ bhagavā”ti.
세존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 상세한 설명[記別, 授記]이 설해지자 60명 정도의 비구는 입으로부터 뜨거운 피를 토했다.
60명 정도의 비구는
'행하기 어렵습니다, 세존이시여. 너무나 행하기 어렵습니다, 세존이시여.'라고 하면서
공부지음을 버리고 낮은 [재가자의] 삶으로 되돌아갔다.
saṭṭhimattānaṃ bhikkhūnaṃ anupādāya āsavehi cittāni vimucciṃsūti.
60명 정도의 비구는 취착이 없어져서 번뇌들로부터 마음이 해탈하였다.
Majjhima Nikāya uparipaṇṇāsapāḷi 1. devadahavaggo 9. mahāpuṇṇamasuttaṃ (MN 109)
보름밤의 긴 경784) Mahāpuṇṇama Sutta(M109)
784) 본경은 『상윳따 니까야』제3권 「보름밤 경」 (Puṇṇama-sutta, S22:82)과 동일하다.
“kathaṃ pana, bhante, jānato kathaṃ passato
imasmiñca saviññāṇake kāye
bahiddhāca sabbanimittesu
ahaṃkāramamaṃkāramānānusayā na hontī”ti?
세존이시여, 어떻게 알고 어떻게 보아야 알음알이를 가진 이 몸과
외부의 모든 표상들 가운데서 나라는 생각과 내 것이라는 생각과
자만의 잠재성향이 생기지 않겠습니까?
“yaṃ kiñci, bhikkhu, rūpaṃ — atītānāgatapaccuppannaṃ ajjhattaṃ vā bahiddhā vā oḷārikaṃ vā
sukhumaṃ vā hīnaṃ vā paṇītaṃ vā yaṃ dūre santike vā —
sabbaṃ rūpaṃ ‘netaṃ mama, nesohamasmi, na meso attā’ti —
evametaṃ yathābhūtaṃ sammappaññāya passati.
비구여, 물질이라고 하는 것은 그 어떤 것이, 그것이 과거의 것이든 미래의 것이든 현재의 것이든,
안의 것이든 밖의 것이든, 거칠든 섬세하든, 저열하든 수승하든, 멀리 있건 가까이 있건,
'이것은 내 것이 아니고, 이것은 내가 아니며, 이것은 나의 자아가 아니다.'라고
있는 그대로 바른 통찰지로 본다.
yā kāci vedanā... yā kāci saññā... ye keci saṅkhārā... yaṃ kiñci viññāṇaṃ —
atītānāgatapaccuppannaṃ ajjhattaṃ vā bahiddhā vā oḷārikaṃ vā sukhumaṃ vā
hīnaṃ vā paṇītaṃ vā yaṃ dūre santike vā —
sabbaṃ viññāṇaṃ ‘netaṃ mama, nesohamasmi, na meso attā’ti —
evametaṃ yathābhūtaṃ sammappaññāya passati.
evaṃ kho, bhikkhu, jānato evaṃ passato imasmiñca saviññāṇake kāye bahiddhā ca sabbanimittesu
ahaṃkāramamaṃkāramānānusayā na hontī”ti.
느낌이라고 하는 것은 그 어떤 것이든 … 인식이라고 하는 것은 그 어떤 것이든 …
심리현상들이라고 하는 것은 그 어떤 것이든 …
알음알이라고 하는 것은 그 어떤 것이든, 그것이 과거의 것이든 미래의 것이든 현재의 것이든,
안의 것이든 밖의 것이든, 거칠든 섬세하든, 저열하든 수승하든, 멀리 있건 가까이 있건,
'이것은 내 것이 아니고, 이것은 내가 아니며, 이것은 나의 자아가 아니다.'라고
이것을 있는 그대로 바른 통찰지로 본다.
비구여, 이렇게 알고 이렇게 보는 자에게 알음알이를 가진 이 몸과 외부의 모든 표상들 가운데서
나라는 생각과 내 것이라는 생각과 자만의 잠재성향이 생기지 않는다.”
evaṃ passaṃ, bhikkhave, sutavā ariyasāvako rūpasmimpi nibbindati,
vedanāyapi nibbindati, saññāyapi nibbindati, saṅkhāresupi nibbindati, viññāṇasmimpi nibbindati;
비구들이여, 이와 같이 보면서 잘 배운 성스러운 제자는 물질을 염오하고 느낌을 염오하고
인식을 염오하고 심리현상들을 염오하고 알음알이를 염오한다.”
nibbindaṃ virajjati, virāgā vimuccati. vimuttasmiṃ vimuttamiti ñāṇaṃ hoti.
‘khīṇā jāti, vusitaṃ brahmacariyaṃ, kataṃ karaṇīyaṃ, nāparaṃ itthattāyā’ti pajānātī”ti.
염오하면서 탐욕이 빛바래고, 탐욕이 빛바래기 때문에 해탈한다.
해탈하면 해탈했다는 지혜가 생긴다.
'태어남은 다했다. 청정 범행은 성취되었다. 할 일을 다 해 마쳤다.
다시는 어떤 존재로도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라고 꿰뚫어 안다.”
idamavoca bhagavā. attamanā te bhikkhū bhagavato bhāsitaṃ abhinandunti.
imasmiñca pana veyyākaraṇasmiṃ bhaññamāne
saṭṭhimattānaṃ bhikkhūnaṃ anupādāya āsavehi cittāni vimucciṃsūti.
세존께서는 이와 같이 설하셨다. 그 비구들은 흡족한 마음으로 세존의 말씀을 크게 기뻐하였다.
이 가르침이 설해졌을 때 60명의 비구들은 취착 없이 마음이 번뇌에서 해탈했다.
Majjhima Nikāya uparipaṇṇāsapāḷi 5. saḷāyatanavaggo 6. chachakkasuttaṃ (MN 148)
여섯씩 여섯[六六] 경 Chachakka Sutta(M148)
“‘taṇhā attā’ti yo vadeyya taṃ na upapajjati. taṇhāya uppādopi vayopi paññāyati.
yassa kho pana uppādopi vayopi paññāyati,
‘attā me uppajjati ca veti cā’ti iccassa evamāgataṃ hoti.
tasmā taṃ na upapajjati — ‘taṇhā attā’ti yo vadeyya.
iti mano anattā, dhammā anattā, manoviññāṇaṃ anattā,
manosamphasso anattā, vedanā anattā, taṇhā anattā.
만일 '마노[意]가 자아다.' … '법들이 자아다.' … '마노의 알음알이가 자아다.' …
'마노의 감각접촉이 자아다.' … '느낌이 자아다.' … [284] …
'갈애가 자아다.'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타당하지 않다. 갈애의 일어남과 사라짐은 알 수 있다.
일어남과 사라짐을 알 수 있기 때문에 '갈애가 자아다.'라고 말하면
'나의 자아가 일어나고 사라진다.'는 말이 되어버린다.
그러므로 ‘갈애가 자아다.'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타당하지 않다.
그러므로 마노는 자아가 아니다. 법들은 자아가 아니다. 마노의 알음알이는 자아가 아니다.
마노의 감각접촉은 자아가 아니다. 느낌은 자아가 아니다. 갈애는 자아가 아니다.”
“ayaṃ kho pana, bhikkhave, sakkāyasamudayagāminī paṭipadā —
비구들이여, 이것이 존재 더미[有身]의 일어남으로 인도하는 도닦음이다.
cakkhuṃ ‘etaṃ mama, esohamasmi, eso me attā’ti samanupassati;
rūpe ‘etaṃ mama, esohamasmi, eso me attā’ti samanupassati;
cakkhuviññāṇaṃ ‘etaṃ mama, esohamasmi, eso me attā’ti samanupassati;
cakkhusamphassaṃ ‘etaṃ mama, esohamasmi, eso me attā’ti samanupassati;
vedanaṃ ‘etaṃ mama, esohamasmi, eso me attā’ti samanupassati;
taṇhaṃ ‘etaṃ mama, esohamasmi, eso me attā’ti samanupassati;
눈을 두고 '이것은 내 것이다. 이것은 나다. 이것은 나의 자아다.'라고 여긴다.
형색들을 두고 … 눈의 알음알이를 두고 … 눈의 감각접촉을 두고 … 느낌을 두고 …
갈애를 두고 '이것은 내 것이다. 이것은 나다. 이것은 나의 자아다.'라고 여긴다.
... manasmiṃ nibbindati, dhammesu nibbindati, manoviññāṇe nibbindati, manosamphasse nibbindati,
vedanāya nibbindati, taṇhāya nibbindati.
… 마노에 대해서도 염오하고 법들에 대해서도 염오하고 마노의 알음알이에 대해서도 염오하고
마노의 감각접촉에 대해서도 염오하고 느낌에 대해서도 염오하고 갈애에 대해서도 염오한다.
nibbindaṃ virajjati, virāgā vimuccati. vimuttasmiṃ vimuttamiti ñāṇaṃ hoti.
‘khīṇā jāti, vusitaṃ brahmacariyaṃ, kataṃ karaṇīyaṃ, nāparaṃ itthattāyā’ti pajānātī”ti.
염오하면서 탐욕이 빛바랜다. 탐욕이 빛바래므로 해탈한다.
해탈할 때 해탈했다는 지혜가 생긴다.
'태어남은 다했다. 청정 범행은 성취되었다. 할 일을 다 해 마쳤다.
다시는 어떤 존재로도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라고 꿰뚫어 안다.”
idamavoca bhagavā. attamanā te bhikkhū bhagavato bhāsitaṃ abhinandunti.
imasmiṃ kho pana veyyākaraṇasmiṃ bhaññamāne
saṭṭhimattānaṃ bhikkhūnaṃ anupādāya āsavehi cittāni vimucciṃsūti.
세존께서는 이와 같이 설하셨다. 그 비구들은 흡족한 마음으로 세존의 말씀을 크게 기뻐하였다.
이 가르침이 설해졌을 때 60명의 비구들은 취착 없이 번뇌에서 마음이 해탈했다.
7. khemakasuttaṃ (SN 22.89) 케마까 경(S22:89) Khemaka-sutta
evameva kho, āvuso, kiñcāpi ariyasāvakassa pañcorambhāgiyāni saṃyojanāni pahīnāni bhavanti,
atha khvassa hoti yeva pañcasu upādānakkhandhesu
anusahagato ‘asmī’ti, māno ‘asmī’ti, chando ‘asmī’ti anusayo asamūhato.
so aparena samayena pañcasu upādānakkhandhesu udayabbayānupassī viharati.
‘iti rūpaṃ, iti rūpassa samudayo, iti rūpassa atthaṅgamo;
iti vedanā... iti saññā... iti saṅkhārā...
iti viññāṇaṃ, iti viññāṇassa samudayo, iti viññāṇassa atthaṅgamo’ti.
tassa imesu pañcasu upādānakkhandhesu udayabbayānupassino viharato
yopissa hoti pañcasu upādānakkhandhesu anusahagato ‘asmī’ti, māno ‘asmī’ti,
chando ‘asmī’ti anusayo asamūhato, sopi samugghātaṃ gacchatī”ti.
도반들이여, 그와 같이 성스러운 제자에게
다섯 가지 낮은 단계의 족쇄[下分結]가 제거 되었다 하더라도,
취착의 [대상이 되는] 다섯 가지 무더기에 대한 ‘나는 있다.'라는 미세한 자만과
'나는 있다.'라는 [미세한] 욕구와 '나는 있다.'라는 [미세한] 잠재성향이
완전히 뿌리 뽑히지는 않습니다.
그는 나중에 취착의 [대상이 되는] 다섯 가지 무더기들의 일어나고 사라짐을 관찰하며 머뭅니다.
'이것이 물질이다. 이것이 물질의 일어남이다. 이것이 물질의 사라짐이다.
이것이 느낌이다 .… 인식이다 … 심리현상들이다 …
이것이 알음알이다. 이것이 알음알이의 일어남이다. 이것이 알음알이의 사라짐이다.'라고.
그가 취착의 [대상이 되는] 다섯 가지 무더기들의 일어나고 사라짐을 관찰하며 머물 때
취착의 [대상이 되는] 다섯 가지 무더기에 대한 '나는 있다.'라는 미세한 자만과
'나는 있다.'라는 [미세한] 욕구와 '나는 있다.'라는
[미세한] 잠재성향은 완전히 뿌리 뽑히게 됩니다.
imasmiñca pana veyyākaraṇasmiṃ bhaññamāne
saṭṭhimattānaṃ therānaṃ bhikkhūnaṃ anupādāya āsavehi cittāni vimucciṃsu,
āyasmato khemakassa cāti.
이 상세한 설명[授記]이 설해졌을 때
60명의 장로 비구와 케마까 존자는 취착이 없어져서 번뇌들로부터 마음이 해탈하였다.
Khuddaka Nikāya, suttanipātapāḷi, 3. mahāvaggo 12. dvayatānupassanāsuttaṃ (KN 5.38)
두 가지 관찰의 경 [Sn. 3-12]
(1) “idaṃ dukkhaṃ, ayaṃ dukkhasamudayoti ayamekānupassanā.
ayaṃ dukkhanirodho, ayaṃ dukkhanirodhagāminī paṭipadāti, ayaṃ dutiyānupassanā.
‘이것은 괴로움이다. 이것은 괴로움의 발생이다.’하는 것이 관찰의 한 원리이고,
‘이것은 괴로움의 소멸이다.
이것은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이다.’라고 하는 것이 관찰의 두 번째 원리이다.
idamavoca bhagavā. attamanā te bhikkhū bhagavato bhāsitaṃ abhinandunti.
imasmiṃ ca pana veyyākaraṇasmiṃ bhaññamāne
saṭṭhimattānaṃ bhikkhūnaṃ anupādāya āsavehi cittāni vimucciṃsūti.
이처럼 세존께서는 말씀하셨다. 그들 수행승들은 만족하여 세존께서 하신 말씀에 기뻐했다.
더구나 이러한 설법이 설해졌을 때, 예순 명의 수행승들의 마음은 집착 없이 번뇌에서 해탈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