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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재상 열전 9 | 정인지(鄭麟趾)전
관리보다 학자로 능력 발휘한 조선 제1호 장원급제 출신 정승
⊙ 세종이 길러낸 김종서와 정인지… 김종서는 강직함과 행정 능력, 정인지는 학문적 능력 발휘 ⊙ 문종·단종 때 득세했던 김종서는 수양대군의 쿠데타 때 피살… 정인지는 정난 후 정승 자리에 올라 ⊙ “자질이 호걸스럽고 특출 나며 마음이 활달하고 학문이 해박하여 통하지 않는 바가 없었다”(실록) ⊙ 임금에게 아부할 줄 몰라 直諫했으나, 나이 든 후에는 재산 늘리기에 몰두 이한우 1961년생. 고려대 영문학과 졸업, 同 대학원 철학과 석사, 한국외국어대 철학과 박사 과정 수료 / 前 《조선일보》 문화부장, 단국대 인문아카데미 주임교수 역임 |
정인지
정인지(鄭麟趾·1396~1478년)는 경상도 하동 사람으로 석성현감 정흥인(鄭興仁)의 아들이다.
조선이 세워진 후인 1396년 태어났다. 그러고 태종 14년(1414년) 18세 때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했다.
이해 3월 11일 춘추관 영사 하륜, 지사 정탁, 예조판서 설미수 등이 의논하여 급제자들 답안지 중 가장 뛰어난 3인을 태종에게 올렸다. 태종이 다시 한 번 “3개의 시권(試券·답안지) 중에는 잘되고 못된 것을 가릴 수 없는가?”라고 묻자 신하들은 “두 개는 비슷하고 하나는 조금 처집니다”고 답했다.
태종은 “그렇다면 내가 집는 것이 장원이다”며 두 개의 시권을 내밀게 한 다음 하나를 골라 집었다.
정인지의 시권이었다.
세종 즉위년인 1418년 8월 27일 상왕 태종은 직접 세종에게 “대임을 맡길 만한 인물이니 중용하라”며 정인지를 병조좌랑에 임명한다. 반면 세종 1년(1419년) 1월 19일 병조좌랑 정인지는 명(明)나라로부터 세종의 즉위를 승인하는 외교문서 고명(誥命)을 맞는 의식을 행할 때 황색 의장(儀仗)을 빼놓았다가 예조좌랑 김영, 병조정랑 김장 등과 함께 의금부에 투옥된다.
주 책임자로 밝혀진 정인지는 열흘 후 장(杖) 40대를 맞고 병조좌랑에 복귀한다.
세종 3년 3월 28일에 정5품 병조정랑 정인지는 또다시 투옥된다. 상왕 태종의 지시였다.
병사들의 비상조치에 대비한 출동 훈련을 지시했는데 정인지가 이를 태만히 했다가 처벌을 받은 것이다. 이후에도 정인지는 사소한 잘못으로 자주 견책을 당하곤 했다.
이는 정인지에게 관리로서의 재주, 즉 이재(吏才)가 없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그런데 학문적 재능, 즉 학재(學才)가 뛰어난 정인지는 집현전이 자리를 잡아가면서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기 시작한다. 세종은 종종 극비를 요하는 심부름을 자신의 비서실장인 지신사(知申事·후일의 도승지) 대신 신뢰하는 집현전 관원에게 시키기를 좋아했는데 실록을 보면 세종 7년부터 정인지가 주로 그 임무를 맡았다. 이런 점에서 아버지 태종의 신하가 아니고 사실상 세종 자신이 키워낸 신하로 정인지는 김종서와 더불어 제1세대의 대표주자였다. 세종 9년 3월 20일 정인지는 이미 관직에 나온 신하들을 대상으로 하는 중시(重試)에서 문과 장원급제자의 문재(文才)를 다시 한 번 보여줌으로써 정4품 직전(直殿)을 뛰어넘어 종3품 직제학에 오른다. 그러고 9월 7일 정인지는 세자(훗날의 문종)의 교육을 맡는 좌필선으로 임명된다. 세종 10년 12월 20일에는 집현전 전담 관리 중에서는 최고위직인 정3품 부제학에 오른다.
당상관이 된 것이다. 그의 승진 배경에는 이처럼 고비고비에서 학재가 큰 역할을 했다.
세종이 기른 두 신하
정인지가 잡은 아버지 정흥인 묘(원 안) 앞 와영담(蛙泳潭). 사진=김두규 |
김종서(金宗瑞)는 1383년(고려 우왕 9년) 충청도 공주에서 태어났다.
정인지는 1396년 경상도 하동에서 태어났다. 나이로는 13세 차이다.
김종서는 얼마 후 한양으로 올라와 서대문 밖에서 살았고 태종 5년 문과에 급제했다. 23세 때였다.
정인지는 권근의 동생인 권우에게서 배우고 태종 14년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했다. 18세 때였다.
김종서의 기록은 뒷날 참화를 당하는 바람에 별로 없다.
두 사람 다 집안 배경은 그저 그런 편이었다. 문과 급제 후에도 하위직을 맴돌던 김종서는 10년 후인 태종 15년 상서원(尙瑞院) 직장(直長)으로 임명을 받았다.
상서원이란 국왕의 옥새와 인장 등을 관리하는 기관으로 도승지 지휘하에 종5품 판관 1명, 종7품 직장 1명, 정8품 부직장 2명 등으로 구성돼 있었다. 김종서가 처음으로 정7품직에 오른 것이다.
반면 장원급제한 인지는 곧바로 예빈시(禮賓寺) 주부로 발령을 받았다. 예빈시란 조정을 방문하는 빈객의 접대를 전담하는 기관이며 주부는 종6품이었다. ‘장원’의 파워는 그만큼 컸다.
김종서가 상서원 직장에 임명되던 무렵 정인지는 승문원 부교리였다. 정6품이었으니 김종서보다 한 등급 높았다. 그러나 지신사 유사눌이 요동에 보낼 자문(咨文·외교문서)을 검토하던 중에 승문원 지사 윤회와 부교리 정인지가 날인을 잘못한 것을 찾아내 두 사람 모두 의금부에 하옥되었다.
김종서는 종6품인 죽산현감을 거쳐 세종 즉위년인 1418년 병조좌랑에 오른다. 정6품이다.
김종서와 정인지는 같은 해에 같은 직위를 역임한 것이다. 순서는 간발의 차로 김종서가 먼저였다.
보통 인연이 아니다. 바로 이때의 일과 관련해 성현(成俔)의 《용재총화(慵齋叢話)》는 김종서에 대한 일화를 다음과 같이 전한다.
〈최홍효 제학이 이조낭청으로 입시하여 사람들의 고신(告身)을 쓰는데 붓을 꼼지락대며 오래도록 이루어내지 못하자 김종서가 병조낭청(좌랑)으로 옆에 있다가 한 붓으로 수십 장을 휘둘러 써내고 쓰기를 마친 다음 옥새를 찍는데 글씨와 옥새 자국이 모두 단정하였다. 태종이 좌우를 돌아보며 말하기를 ‘이는 참으로 쓸 만한 인재구나’라고 하니 김종서는 이로 말미암아 피어나기 시작했다.〉
강직함으로 인정받은 김종서
세종 |
세종 즉위년 11월 29일 사헌부 감찰(정6품)로 옮긴 김종서에게 세종은 특명을 내린다.
강원도 관찰사 이종선은 흉년으로 백성들이 고통을 겪고 있으니 세금을 감면해달라 했고 경차관(敬差官·임시파견요원) 김습은 풍년이라고 보고했다. 세종은 엇갈리는 두 사람의 보고를 확인하기 위해 강직한 인물을 찾던 중 김종서에게 일종의 암행어사 임무를 맡긴 것이다.
김종서의 보고는 흉년에 기민(飢民)까지 발생했으니 조세를 감면해야 한다는 것이었고 이에 세종은 변계량의 반대를 물리치고 감면 조치를 취했다.
동시에 김습을 국문(鞫問)해 거짓 보고의 진상을 밝혀내도록 사헌부에 엄명을 내린다.
[[鞠問 ( 鞫問 ) 국문 -국문(鞫問). 임금이 중대(重大)한 죄인(罪人)을 국청(鞠廳)에서 신문(訊問)하던 일.]]
김종서의 직무 수행에 크게 만족한 세종은 세종 1년 3월 전국적으로 기근이 발생해 백성들이 유리걸식을 하고 있다는 보고에 따라 각도에 행대(行臺·임시)감찰을 파견할 때 다시 김종서를 충청도 행대감찰로 명했다. 굶주린 백성이 12만249명이고 이들을 구휼하기 위해 지급된 쌀은 1만1311석, 장(醬)은 949석이라는 보고가 올라왔다. 직접 현장을 확인하지 않고서는 올릴 수 없는 보고였다.
늘 지방 수령들의 전횡을 우려했던 세종은 세종 2년 윤1월 김종서를 정5품직인 광주(廣州)판관으로
승진시켜 지방 행정 일을 맡긴다. 여기서 김종서는 세종 5년 5월까지 3년 4개월 동안 근무한다.
반면 정인지의 시련은 계속된다. 앞서 본 대로 세종 3년 3월 28일 정5품 병조정랑을 맡고 있다가 병사들의 비상조치에 대비한 출동 훈련을 태만히 했다가 태종의 명으로 처벌을 받은 것이다.
이미 김종서는 강직한 면으로 세종의 인정을 받아가고 있는 반면 정인지는 행정이나 일처리에서 허점을 보이고 본인도 최선을 다하려 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사방 100리를 맡길 만하면 군자”
세종시 장군면에 있는 김종서의 묘. 사진=한국학중앙연구원 |
김종서가 외직인 광주판관을 마치고 내직으로 돌아오기 두 달 전인 세종 5년 3월 23일 정인지는 집현전 학사를 거쳐 응교(종4품)에 올라 있다. 행정에는 미숙했으나 학술에는 일찍부터 재능을 보인 정인지였다. 세종은 정인지의 행정 능력은 버리고 학술 재능을 취한 것이었다.
김종서는 같은 해 5월 27일 내직으로 복귀해 모두 정5품으로 핵심 요직인 사간원 우헌납, 사헌부 지평, 이조정랑을 거친 다음 세종 9년(1427년) 1월 18일 오늘날의 국무조정실장이나 국무총리비서실장에 해당하는 의정부 사인(舍人)으로 승진한다. 정4품직이다. 그해 2월 황해도에서 문제가 발생하자 세종은 김종서를 경차관으로 임명해 실정을 파악해서 보고토록 명했다.
이처럼 자신의 뜻을 받들어 현장의 일을 처리해야 할 일이 있을 때면 세종은 늘 김종서를 찾았다. 강직했고 발로 현장을 뛰어 확인하는 인물됨 때문이었다. 《논어》 태백(泰伯)편에 나오는 말이다.
“사방 100리를 맡길 만하면 군자로다.”
바로 김종서를 두고 하는 말이다.
이 무렵 정인지도 다른 방면에서 세종의 총애를 얻어가고 있었다. 집현전이 자리를 잡아가면서 세종은 종종 극비를 요하는 심부름을 자신의 비서실장인 지신사 대신 신뢰하는 집현전 관원에게 시키기를 좋아했는데 실록을 보면 세종 7년부터 정인지가 주로 그 임무를 맡았다. 세종의 본격적인 신임은 이때부터 시작된 것으로 보인다. 세종 7년이면 세종이 양녕대군이나 불교 문제를 끌어들인 신하들의 무차별 공세를 극복하고 본격적인 정국 주도권을 장악한 해다.
이런 점에서 아버지 태종의 신하가 아니고 사실상 세종 자신이 키워낸 신하로 정인지는 김종서와 함께 제1세대 대표주자였던 셈이다. 김종서가 사인으로 발탁되던 세종 9년 3월 20일 정인지는 이미 관직에 나온 신하들을 대상으로 하는 중시(重試)에서 문과 장원급제자의 문재(文才)를 다시 한 번 보여줌으로써 정4품 직전(直殿)을 뛰어넘어 종3품 직제학에 오른다. 그러고 9월 7일 정인지는 세자(훗날의 문종)의 교육을 맡는 좌필선으로 임명된다. 정인지가 김종서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간 것이다. 그러나 김종서도 황해도 사건 처리의 공으로 3개월여 후인 7월 4일 종3품인 사헌부 집의로 진급한다.
“정인지는 政事에 경험 없어”(세종)
세종 10년 사헌부 집의 시절 계속 불법을 자행하던 양녕대군에 대한 김종서의 탄핵은 집요했다. 15차례나 상소를 올려 양녕대군의 대군 작위를 회수하고 도성 출입을 금지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가 일시적으로 세종으로부터 노여움을 사 전농시(典農寺)윤으로 좌천당하기까지 했다. 전농시란 국가의 제사용품을 관리하던 기관이다. 그러나 세종은 세종 11년 9월 30일 정3품인 우부대언(右副代言·훗날의 우부승지)으로 김종서를 불러들인다. 여기서 김종서는 훗날 함께 세상을 떠나게 되는 좌부대언 황보인(皇甫仁)과 깊은 인연을 맺게 된다. 김종서를 정3품 당상관에 올렸을 뿐만 아니라 오늘날의 대통령비서실 수석비서관에 해당하는 자리를 맡긴 것이다. 다음 해 7월 좌부대언으로, 12월에는 우대언으로 승진한다. 이때 황보인도 승정원 최고위직인 지신사에 오른다. 이때 김종서의 나이 47세, 정인지의 나이 34세였다.
한편 정인지는 김종서보다 10개월쯤 빠른 세종 10년 12월 20일 집현전 전담 관리 중에서는 최고위직인 정3품 부제학에 오른다. 당상관이 된 것이다. 비슷한 시기에 김종서는 대언으로, 정인지는 부제학으로 지근(至近)거리에서 세종을 보좌하고 있다.
그러나 정인지는 관리로서 재능에 여전히 문제가 있었다. 세종 17년 6월 29일 충청도 관찰사가 되어 지방행정을 맡은 적이 있었다. 그해 12월 17일 영의정 황희(黃喜)는 “충청도 감사와 수령들이 농정에 실패하고 현장조사를 제대로 하지 않아 과거에 비옥했던 땅들을 황폐하게 만들었으니 징계하지 않을 수 없다”고 말한다. 이에 세종은 “정인지는 내직에 있을 때에도 문학만을 전담했고 정사에 경험이 없어 그렇게 되었다. 그러나 정인지도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이 많다고 하니 죄를 묻지 마라”고 답한다. 다음 해 7월 21일에도 정인지가 나름대로 흉년 구제책을 올렸는데 황희는 현실성이 없음을 조목조목 지적하며 정인지의 구제책을 기각(棄却)시켜버렸다. 사실 이렇게 되면 정승은 말할 것도 없고 판서에 오르는데도 큰 약점이 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충청도 관찰사에서 예문관 제학과 집현전 제학을 거쳐 마침내 1440년(세종 22년) 5월 형조판서에 오른다.
김종서의 북방 개척
김종서가 승정원에서 차근차근 진급을 하고 있던 세종 12년(1430년) 11월 15일 정인지는 우군동지총제(右軍同知總制)로 임명을 받았다. 요즘 식으로 보자면 군사령관 정도의 직위다. 그러나 전형적인 문사(文士)였던 그는 군사 분야의 일보다 주로 세종을 도와 음악, 도량형, 천문, 역법 심지어 아악(雅樂) 등을 정리하는 작업에 힘을 쏟았다. 세종 14년 3월 18일에는 예문관 제학 겸 춘추관 동지사를 지낸다. 역사 편찬과 관련된 첫 번째 직위를 맡은 것이다.
세종 15년 12월 김종서는 함길도(함경도) 관찰사로 제수받았다. 김종서는 22개월 전인 세종 14년 2월 25일 세종이 좌대언인 자신을 불러 활과 화살을 하사하면서 “항상 차고 있다가 짐승을 보거든 쏴라”고 했던 말뜻을 마침내 깨달았다. 또 그해 6월에는 “경은 최윤덕(崔潤德)을 아는가?”라고 물어본 적이 있었다. 세종의 북방 개척 구상은 이미 오래전에 시작되었고 세종 14년 들어 문신 김종서와 무신 최윤덕을 투톱으로 해서 자신의 구상을 실현키로 가닥을 잡아가고 있었던 것이다. 최윤덕은 세종 15년 1월 이미 평안도 절제사로 임명을 받았다.
예문과 제학 겸 춘추관 동지사 시절 정인지는 여러 차례에 걸쳐 연로한 아버지를 모셔야 한다며 지방수령직을 내려줄 것을 요청, 세종 17년 충청도 관찰사로 내려갔다. 하지만 앞에서 본 것처럼 관리로서의 실적은 좋지 못했다.
그동안 김종서는 자신의 일생에서 가장 힘들면서도 보람 있는 기간을 보내고 있었다. 6년 이상을 지금의 함경북도(6진) 개척에 쏟아부었다. 그러고 1440년 12월 3일 정인지에 이어 형조판서에 오른다. 병조좌랑에 이어 두 번째로 같은 해에 같은 직위를 맡는 우연이 겹친 것이다.
김종서는 1441년(세종 23년) 11월 14일 예조판서로 자리를 옮겨 장장 5년 동안 재직하면서 국가의 중대 길흉사를 무리 없이 처리해 세종의 더없는 총애를 받았다. 그러면서도 북방 문제에 관한 조언도 수시로 했다. 그러다 세종 28년(1446년) 1월 24일 김종서는 의정부 우찬성(종1품) 겸 예조판서로 승진한다. 예조판서 때 북방의 일을 겸하도록 한 것처럼 우찬성이 되어서도 예조의 일을 맡길 만큼 김종서의 예조판서 5년에 대한 세종의 평가는 후했던 것이다.
김종서가 우찬성이 되었을 때 정인지는 같은 의정부의 우찬참(종2품)이었다. 마침내 김종서가 정인지를 제치고 반발 앞섰다. 그런데 또 우연이 겹친다. 김종서가 물러난 예조판서 자리가 정갑손에게 갔다가 3개월 만에 사직하는 바람에 4월 25일 정인지가 예조판서가 된 것이다. 김종서와 정인지, 두 사람의 지독한 인연이다.
세종이 기대한 모습, ‘역사가’ 정인지
세종이 정인지에게 역사가의 길을 걷게 한 것은 아주 오래전부터다. 이 점에서 김종서와는 구별된다. 세종 5년(1423년) 3월 23일 세종은 집현전 응교인 정인지 등을 불러 사마광의 《자치통감》 중에서 범조우(范祖禹)가 쓴 ‘당감(唐鑑)’ 부분을 필사(筆寫)하도록 지시한다. 필사는 당시 최고의 학습법이기도 했다.
세종은 같은 해 6월 24일 《고려사》가 중국의 《통감강목》에 비해 너무 소략하다고 지적하면서 그 이유 중의 하나로 사관(史官)의 부족을 꼽았다. 그러면서 집현전 관원들로 하여금 사관의 업무도 병행하도록 지시한다.
집현전 관원이 항상 궐내에 있었으니, 사관의 업무 또한 맡을 수 있었으리라.
그러면서 세종은 (집현전 관원 중에서) 신장·김상직·어변갑·정인지·유상지를 지정하여 모두 춘추를 겸직시켰다.
정인지에게 춘추 업무를 보게 한 것이 역사 서술의 실무를 익히도록 한 것이었다면 세종 7년 11월 29일 기사는 정인지가 역사 이론가로서의 자질을 갖추도록 하는 계기를 보여준다.
“대제학 변계량에게 명하여 사학(史學)을 읽을 만한 자를 뽑아 올리라고 하였다. 변계량이 집현전의 정인지와 설순, 인동현감 김빈을 천거했다. 임금이 즉시 김빈에게 집현전 수찬을 제수하여, 3인으로 하여금 모든 사서를 나누어 읽게 하고, 임금의 고문에 대비하게 하였다.”
세종 12년경 세종은 경연에서 《자치통감 속편》을 강독하고 있었는데 가장 빈번하게 세종의 물음에 답하는 신하는 정인지였다. 이것은 적어도 역사 분야에 관한 한 세종과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수준에 이르렀다는 뜻이다. 그중 한 장면으로 들어가 보자. 세종 12년 윤 12월 23일 자 기사다.
《용비어천가》에 관여
〈경연에 나아가서 《자치통감 속편》을 강하다가 요나라 임금인 분와사열(奔訛沙烈)의 대목에 이르러 임금이 말하기를 “이적(夷狄)은 마음이 본시 순후(純厚)하므로, 그들이 대우하는 것도 이렇게 후하다. 지금 왜인(倭人)이 매우 강악(强惡)하지만, 윗사람을 섬김에 있어서 절조(節操)를 위하여 죽는 사람이 상당히 많이 있다” 하니, 정인지가 대답하기를 “그들의 마음이 단순하기 때문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중국 사람은 행동거지도 똑똑하고 말도 재치 있다. 그러나 그 마음 씀씀이가 좋지 못하고 풍속이 박하여, 한 사람도 임금을 사랑하는 자가 없다. 내관(內官) 같은 것들은 책망할 가치조차 없다. 김만(金滿)이 요동에 가서 태종 황제께서 돌아가셨다는 말을 듣고도 술을 마시고 고기를 먹으며 일어나서 춤을 추고 조금도 애통해하는 심정이 없어 보였고, 그는 ‘황제의 명령이 아직 이르지 않았다’고 하니, 그가 이렇게 못되었다. 어쩌면 중국 사람이 이 모양일까. 아마도 북경에는 사람이 많아서 그런 것이 아닌가” 하니, 정인지가 아뢰기를, “우리나라만 가지고 보더라도 시골 백성은 순박하고 도시 사람은 똑똑합니다” 하였다.〉
세종 14년(1432년) 3월 정인지는 예문관 제학 겸 춘추관 동지사에 오른다. 이에 앞서 정인지는 대제학 정초(鄭招)를 도와 《칠정산내편(七政算內篇)》을 지어 역법(曆法)을 개정한 바 있다. 그리고 12월 10일 세종은 대제학 정초와 제학 정인지 등을 불러 자신이 명했던 태조와 태종의 공덕을 기리는 악장(樂章)을 보고받는다. 내용은 ‘아름다울사 빛나는 태조시여, 천명에 응하시고 인심에 순하시와 문득 대동(大東)을 두셨도다.… 아름다울사 밝으신 태종이시여, 차례를 이어 공(功)을 더하셨도다. 덕은 공경으로 밝히셨고, 다스림은 어짊으로 높이셨도다’는 식이다. 여기서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의 싹을 보게 된다. 이 악장과 훗날의 《용비어천가》 모두에 정인지는 깊이 관여했다.
계유정난으로 엇갈린 운명
충북 괴산에 있는 정인지 부부의 묘. 앞의 무덤이 정인지, 뒤의 무덤은 그 부인 묘. 사진=김두규 |
1450년 2월 17일 세종이 훙(薨)했다. 5일 후 문종이 즉위했다. 다음 해인 문종 1년 10월 정인지의 라이벌 김종서는 우의정에 제수된다. 같은 날 김종서의 콤비인 황보인은 영의정에 오른다. 반면 정인지는 좌찬성으로 김종서의 바로 아래 직급이었다. 그러나 문종은 김종서-정인지를 투톱으로 생각했고 심지어 수양대군도 품어 안았다. 문종 1년 6월 19일 기록이다.
문종은 자신이 직접 지은 진법서(陳法書)를 내놓으며 수양대군과 정인지, 김종서 등에게 교정을 명한다. 진법서 교정을 이 세 사람에게 맡겼다는 것은 그만큼 이들에 대한 총애가 깊었다는 뜻이다.
문종이 즉위 2년 만인 1452년 5월 14일 훙하고 4일 후 단종이 왕위에 올랐다. 이때부터 김종서와 정인지는 전혀 다른 길을 가게 된다. 단종 즉위년(1452년)에 정인지는 병조판서에 오르지만 당대 실력자인 영의정 황보인과 좌의정 김종서의 배척을 받아 한직(閑職)인 중추부 판사로 밀려나게 된다. 그러고 1년 후인 1453년 10월 8일 수양대군이 정난(靖難)을 일으켜 황보인과 김종서 등을 죽이고 정권을 잡는다. 계유정난(癸酉靖難)이다.
아마도 이 정난이 없었다면 정인지는 이후 한직을 맴돌다가 관직을 마쳤을 것이 분명했다. 정난은 모든 것을 바꿔놓았다. 김종서는 죽어 대역죄인이 됐고 정난공신에 오른 정인지는 하동부원군(河東府院君)에 봉해지면서 좌의정이 됐다. 사실 정인지는 정난에 관여하지 않았고 신망이 있는 중신(重臣)으로 정난에 반대하지 않은 공로였다고 할 것이다. 2등 공신에 책록된 것도 이 때문일 것이다. 실권은 한명회를 중심으로 한 정난공신들이 쥐고 있었다.
3년 후인 1456년 9월 세조는 흔히 사육신 사건으로 알려진 상왕(단종)복위 기도 사건이 실패로 끝난 후 다음과 같은 충격적인 명(命)을 내린다. 사건 관련 주모자들의 부인이나 딸들을 정난공신들에게 나눠주도록 한 것이다. 그중에 김종서의 아들 김승규의 아내 내은비, 딸 내은금, 첩의 딸 한금은 ‘영의정’ 정인지에게 귀속되었다.
세조에게 “너”라고 하기도
정인지는 1458년(세조 4년) 공신연(功臣宴)을 베풀 때 세조의 불서(佛書) 간행을 반대한 일로 세조의 노여움을 사서 논죄(論罪)되면서 고신(告身)이 몰수되었으나 곧 고신을 돌려받고 하동부원군에 제수됐다. 이런 점에서 정인지는 유학자로서의 기개를 잃지 않았다고 할 수 있다. 1459년에는 취중에 직간(直諫)한 일이 국왕에게 무례를 범했다고 논죄되면서 다시 고신을 몰수당하고 외방에 종편(從便)됐다. 그러나 그해에 다시 소환되어 고신을 돌려받고, 그 이듬해 하동부원군에 복직됐다. 조금은 위태로운 처신이었다.
정인지는 성종 9년에 83세의 나이로 천수를 누리고 세상을 떠났다. 흥미로운 것은 실록 졸기(卒記)에 그의 행적과 관련해서는 주로 세종 때의 일만 기록돼 있고 세조, 예종, 성종 때의 일은 거의 없다는 점이다. 아부를 몰라 심지어 취중이긴 하지만 임금 세조에게 “너[爾]”라고 했다가 봉변을 당할 뻔하기도 했던 성품의 소유자였으니 세상과 비켜 지낸 것으로 보인다. 대신 그가 관심을 보인 쪽은 재산 모으기였다. 《논어》에 나오는 공자 말 그대로이다.
〈군자에게는 세 가지 경계함이 있다. 어려서는 혈기가 안정되지 않으니 경계함이 색(色)에 있고 장성해서는 혈기가 바야흐로 한창이니 경계함이 다툼에 있고 늙어서는 혈기가 이미 쇠하였으니 경계함이 (이득을) 얻으려 함에 있다.〉
정인지는 다툼에 있어 임금도 꺼리지 않았고 나이가 들어서는 이득을 얻는 데만 힘썼다. 먼저 실록은 그의 장점을 이렇게 말한다.
〈정인지는 타고난 자질이 호걸스럽고 특출 나며 마음이 활달하고 학문이 해박하여 통하지 않는 바가 없었다.〉
그는 이런 자질로 천문과 역법에 달통하였고 역사를 익혀 《치평요람(治平要覽)》 《역대병요(歷代兵要)》 《고려사》 발간을 주도적으로 이끌었고 《세종실록》 편찬을 책임졌다. 그의 학재가 빛나는 대목이다.
나이 들어서는 이득 얻는 데 힘써
그러나 졸기에 있는 그에 관한 평가는 따뜻하지만은 않다.
〈정인지는 성품이 검소하여 자신의 생활도 매우 박하게 하였다. 그러나 재산 늘리기를 좋아하여 여러 만석(萬石)이 되었다. 전원(田園)을 널리 차지했으며 심지어는 이웃에 사는 사람들의 것까지 많이 점유했으므로 당시의 의논이 이를 그르다고 하였다. 그의 아들 정숭조는 아비의 그늘을 바탕으로 벼슬이 재상(宰相)에 이렀으며, 그 재물을 늘림도 그의 아비보다 더하였다.〉
그에게는 정현조(鄭顯祖·1440~ 1504년), 정숭조(鄭崇祖·1442~ 1503년), 정경조(鄭敬祖·1455~ 1498년), 정상조(鄭尙祖) 네 아들이 있었다. 그중 정현조는 세조의 딸인 의숙공주(懿淑公主)에게 장가들었고 예종을 사실상 독살하고 성종을 세운 좌리공신(佐理功臣)에 참여해 하성군(河城君)에 봉해졌다. 《경국대전》 편찬에 참여했으나 말년에 첩을 많이 두고 불교에 심취해 대간으로부터 자주 탄핵을 받기도 했다.
정숭조도 좌리공신에 참여해 하남군(河南君)에 봉해졌다. 성종 때 형조참판, 한성부판윤, 호조판서를 지냈으나 수뢰 혐의로 파직되었다. 경사(經史)에 밝았다고 한다.
정경조는 성종 16년(1458년) 문과에 급제해 사헌부 대사헌을 거쳐 1497년 평안도 관찰사로 부임했다가 이듬해 사망했다.
그리고 막내 정상조의 아들 정세호(鄭世虎·1486~1563년)의 딸은 중종 서자인 덕흥군과 혼인했는데 그사이에서 난 셋째 아들이 훗날 왕위에 오르게 되는 선조(宣祖)다. 사족(蛇足)이지만 왕위에 오르기 전 선조의 군호도 정현조와 같은 하성군(河城君)이었다. 하성은 하동을 달리 부르는 명칭이다.⊙
[출처] 조선 재상 열전 9 | 정인지(鄭麟趾)전 -관리보다 학자로 능력 발휘한 조선 제1호 장원급제 출신 정승
[출처] 조선 재상 열전 9 | 정인지(鄭麟趾)전 -관리보다 학자로 능력 발휘한 조선 제1호 장원급제 출신 정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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