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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나 지금이나 말 잘듣는 측근만 중용하다가 패망한 군주는 셀 수 없이 많아도,정적을 중용해 큰 업적을 남긴 군주는 찾기가 쉽지 않다.건국 전'상승장군'이라 불렀던 당태종의 유일한 패배는 고구려를 침략했다가 연개소문에게 패한 것인데,이 때는 위 징이 사망한 후였다. '신당서''위징열전'은 고구려에서 돌아온 당태종이 크게 탄식하면서 ''위 징이 살아있었다면 내가 어찌 이 행차를 했겠는가.''라면서 그의 묘지를 다시 수리하고 가족들을 후하게 대접했다고 전한다.조선에서 정적을 중용해 많은 업적을 남긴 인물이 세종이다.세종과 황 희가 그런 관계인데,황희는 태종이 세자 양녕대군을 폐위시키려는 뜻을 알고도 세자폐위를 반대한 인물이었다.세자폐위를 반대했다는 것은 곧 세종의 즉위를 반대했다는 뜻이다. 양녕대군이 태종18년(1418)전 중추 곽 선의 첩 어리를 납치하는 사건까지 일으키자 태종은 세자 교체의사를 대신들에게 알렸다.대신들은 즉각 폐위를 요청하는 공동상소를 올려 왕의 뜻에 동조했다.그러나 태종이 이 문제를 먼저 황 희에게 상의했을 때 황희는 ''세자의 실덕은 나이가 어리기 때문입니다.''라고 두번씩이나 양녕대군을 옹호하며 교체에 반대했다. 대간에서는 연일 황 희를 성토하고 나섰다.태종은 황희를 서인으로 강등시켜 고향인 경기도 교하로 쫒아냈다가 다시 전라도 남원으로 내쳤다.황 희의 처형을 주청하는 상소문이 계속 올라오는 와중에 태종은 재위18년(1418)6월,양녕대군을 세자에서 폐하고 8월에는 왕위까지 충녕대군에게 물러주었다. 부왕을 위해서 불충한 자를 베어야한다.''고 황 희의 사형을 거듭 주장했다.그러나 세종은 황희를 처벌하지 않았다.그러기는 커녕 황희를 경시서 제조에 임명했다가 가뭄이든 강원도 관찰사로 보내 능력을 시험했는데,적극적인 구황정책으로 백성들을 살려 내자 의정부 찬성으로 승진시켰다. 세상을 떠난 재위4년(1422)이후에도 계속 중용한 것은 오로지 세종의 의지였다.세종은 재위8년(1426)5월에 우의정으로 승진시켰는데,이때부터 황희는 만 89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 문종2년(1452)까지 26년동안 '직업이 정승'이었다.세종이 자신의 즉위를 반대했던 황희를 얼마나 중용했는지는 재위 18년(1436)4월'육조 직계제'를 '의정부 서사제'로 바꾼데서도 알 수 있다.태종이 22년전인 재위 14년(1414)에 단행했던 육조 직계제는 집행부 서인육조에서 국왕에게 직접 업무를 보고하는 제도였다.반면 의정부 서사제는 육조에서 의정부에 먼저 보고해서 1차 심의를 받은후 국왕에게 보고하는 제도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