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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라면식탁에 평화를... 원문보기 글쓴이: 이안드레아
2012년 5월 19일 부활 제6주간 토요일
나는 아버지에게서 나와 세상에 왔다가,
다시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 간다
(요한 16,23ㄴ-28)
I came from the Father
and have come into the world.
Now I am leaving the world
and going back to the Father."
말씀의 초대
바오로의 새로운 선교 여행이 계속된다. 바오로는 여러 지방을 돌면서 예수님의 제자가 된 이들을 격려한다. 특히 바오로 일행은 이미 예수님을 알고 가르치고 있던 아폴로라는 사람을 만나자 그를 격려하며 하느님의 길을 더 정확하게 알려 주고 아카이아로 파견한다(제1독서). 주님께서는 주님의 이름으로 청하면 무엇이든 들어주신다고 말씀하신다. 주님께서는 믿고 따르면 사랑으로 응답해 주신다. 주님을 믿고 청하는 이들은 충만한 기쁨을 누릴 수 있다(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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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하느님께 행복하게 해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랬더니 하느님께서 나의 건강도 재물도 재능도 오히려 다 거두어 가셨습니다. 결국 모든 것이 절실해졌고 간절해졌습니다. 숨 쉬며 걸을 수 있는 것도, 한 조각의 빵을 구할 수 있는 것도 어느새 감사하게 되었습니다. 작은 것 하나하나를 모두 감사하게 되니 행복이 찾아왔습니다.”
어느 인터넷 게시판에서 읽은 내용입니다. 우리는 많은 것이 부족하다고 느끼며 살고 있지만, 사실은 엄청난 은총을 얻어 누리며 살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하는 글입니다. 우리가 이런 은총은 깨닫지 못하고 우리의 부족함만을 바라보며 살기 때문에 행복은 우리 곁을 떠나고 만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께 행복을 청원하고 싶다면 기도드릴 때도 삶의 부족함을 채워 주십사고 하기보다 우리에게 주어진 은총을 깨닫고 그 기쁨을 누리게 해 주십사고 하여야 합니다.
우리는 날마다 삶의 어떤 것에 목이 마르고 무언가가 부족한 것 같지만, 주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은총만이라도 다 헤아리고 감사드릴 수 있어도 우리의 부족함은 사라질 것입니다. 오히려 세상 것을 바라기보다 주님을 더 깊이 깨닫고 알기를 바라게 됩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청하는 것은 단순히 주님의 호칭으로 청하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의 마음이 되어 ‘주님의 마음으로 청하는 것’을 말합니다. 사실 우리가 마음 깊은 곳에서 진정으로 바라는 것은 세상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우리에게 간절히 바라시는 것을 우리가 목말라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청원 기도가 주님 마음을 헤아리는 기도로 더 성숙하고 깊어져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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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청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그분께서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참으로 놀라운 말씀입니다. 그만큼 예수님의 이름에는 힘이 담겨 있다는 가르침입니다. 그러기에 교회는 처음부터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를 끝맺어 왔습니다. 그것은 또한 그분의 죽음과 부활에 동참한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어린이들은 부모를 찾습니다. 기쁜 일이 있어도 찾고, 어려운 일이 생겨도 찾습니다. 다급하면 부모 생각을 먼저 하도록 길들여져 있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청하라는 것도 주님과 ‘그러한 관계’를 만들며 살라는 가르침입니다.
사람들은 보이는 것만 믿으려 합니다. 그렇지만 ‘중요한 것’은 잘 보이지 않는 법입니다. 미끼가 먹음직스러워 보이기에, ‘보이지 않는’ 사람에게 물고기가 잡힙니다. 걱정만 보이는 것 같더라도, 어딘가에 있을 희망을 찾아야 합니다. 어린 시절처럼 부모님 생각으로 돌아가는 것이지요.
신앙인의 부모님은 예수님이십니다. 그분을 부르는 것은 부모님을 부르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기에 수많은 ‘좋은 관계’를 그분께서 맺어 주셨습니다. 자녀인 우리가 행복하게 살도록 은총을 베푸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할 때는 자신에게 일어난 ‘좋은 일’을 먼저 떠올려 봐야 합니다.
“내가 진실로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청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그분께서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지금까지 너희는 내 이름으로 아무것도 청하지 않았다. 청하여라. 받을 것이다. 그리하여 너희 기쁨이 충만해질 것이다.”
-양승국신부-
<희망으로 가득 찬 청사진 한 장>
용두사미란 말이 있습니다. 출발은 거창하고 대단한데 끝마무리가 보잘 것 없고 형편없는 경우를 일컫습니다.
요즘 프로야구가 한창인데, 가끔 그런 팀이 있습니다. 시작 때 분위기는 너무 좋습니다. 선수들 기세가 등등합니다. 선두타자 안타에 이은 번트, 적시타로 즉시 선취점을 뽑아냅니다. 그러나 그게 다입니다. 회를 거듭할수록 뒷심이 딸립니다. 5회, 6회를 넘어가면서 역전을 허용하더니 7회, 8회 수비 실수에 이은, 투수 난조로 대량 득점을 허용합니다. 치욕적인 수모를 겪으면서 대역전패당합니다. 다들 기분이 참 ‘거시기’합니다.
그런가 하면 고진감래라 말이 있습니다. 혹독한 고통 끝에 알차고 행복한 결실을 거둠을 의미합니다. 시작은 부진하고 미약합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체계가 잡히고 탄탄해지며 안정됩니다. 결국 기분 좋은 승리로 이어집니다.
요즘 계속되는 복음의 어투는 철저하게도 미래형입니다. ‘∼할것이다’라는 식의 미래형인데, 그냥 미래형, 혹은 암울하고 두려운 미래형이 아니라 희망과 긍정으로 가득 찬 미래형입니다. 사실 우리 그리스도교 신앙, 현재에도 충실할 것, 현재에 큰 의미를 부여할 것을 강조하기도 하지만, 그 보다 더 중요한 것, 미래형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예수님께서 앞으로 어떻게 될 것인지, 희망으로 가득 찬 청사진 한 장을 우리 앞에 제시하고 계십니다. “청하여라. 받을 것이다. 그리하여 너희 기쁨이 충만해질 것이다.”
가끔씩 살짝 그릇된 가르침을 외치고 다니는 분들이 계십니다. 자신이 내세우는 교리를 따르면 현세 천국뿐만 아니라 내세 천국도 100% 보장된다, 자기들한테로 오면 끝도 없는 현세에서의 하느님 축복을 넘치도록 받을 것이다.
그런데 우리 인간 네 삶이란 것이 어디 그렇습니까? 이랬다저랬다, 오르락내리락 마치 놀이공원의 바이킹 타는 것과 별반 다를 바가 없습니다. 지속적인 현세적 축복, 그것은 신기루와 같습니다. 뿐만 아니라 세월이 흐르고 흘러 정해진 시간이 다가오면 그간 우리가 쌓아온 모든 것들 다 버려두고 떠나가야 할 우리들입니다. 이런 우리들에게 끝도 없는 성공과 축복은 말도 안 되는 소리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늘 축복만 하시는 하느님이라면 저토록 혹독한 고통을 감내하고 있는 우리들의 이웃들에게 어떻게, 무엇을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그들 모두 무슨 큰 죄를 지은 사람들이란 말입니까?
우리 그리스도교는 현실을 중요시여기지만 현실에 모든 것을 걸지 않습니다. 참 신앙인들은 이 지상에서의 삶에 최선을 다하지만, 지상 것에 목숨까지 걸지 않습니다.
그보다는 세상을 넘어섭니다. 현실을 초월합니다. 우리 인간이 지닌 어쩔 수 없는 한계, 무력함, 나약함을 간과하지도 않습니다. 그래서 늘 겸손하게 하느님의 도움과 자비를 간구합니다. 폭풍우 속 같은 인생을 살아가면서도 절망하거나 의기소침하지 않습니다. 희망의 하느님께서 베푸시는 사랑과 자비에 의탁하며 하루하루 기쁘게 살아갑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 강은희 수녀-
오늘 예수님께서는 참으로 놀라운 말씀을 하십니다. 당신의 이름으로 청하면 |
아버지께서 너희를 사랑하신다
- 강희재 신부-
기도를 어떻게 해야 합니까 ? 무엇을 청해야 합니까 ?’ 라는 질문을 우리는 자주 자신에게 던집니다. 그런데 기도방법을 묻기 전에 기도가 무엇인지를 알아야 하는 것이 우선순위라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저도 성체조배 때 처음에는 청원기도만 잔뜩 하면서 시간을 보냈고, 그다음에는 이대로는 안 되겠다는 생각에 신학교에서 배운 대로 호흡과 자세, 거룩한 독서와 묵상법 등에 집중했는데, 그것도 사실은 하느님께 다가가기 위한 준비일 뿐입니다. 지금 저한테 기도는 어린아이의 모습일 뿐입니다. “내가 사랑하는 이여, 내가 너를 사랑한다.” “나의 주님, 나의 사랑.” 그저 그 정도로 충분합니다.
사제로 살면서 많은 사람, 크고 작은 일, 날마다 반복되는 성무에 온통 신경을 쓰다 보면 자연히 지치고 피곤해집니다. 그러다 신경이 날카로워지거나 무력감에 젖다가 마침내 자신과 사람들에 대한 실망과 미움도 생기게 됩니다. 곧 사랑이 메말라 갑니다. 실수 · 잘못 · 죄 · 부족함 · 무능력의 문제가 아니라 ‘사랑의 결핍 (缺乏)’ 이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주님의 일을 해 뜰 때부터 해 질 때까지 하는 사제에게 사랑의 결핍은 죄 이상으로 자신과 모두에게 독 (毒) 이 됩니다.
그러나 사랑하게 되고 사랑을 받고 있음을 알게 되면 뭔가를 청한다는 생각보다는 믿음이 생기고, 그 믿음은 의탁에까지 이르게 됩니다. 곧 사랑으로 충만해지고 만족한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우리가 뭔가를 청하는 것은 아우구스티노 성인의 말씀대로 “하느님께 의지하는 것을 배우고 나에게 필요한 것을 알아차리는 데 있습니다.” 그러므로 “청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그분께서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하신 예수님의 은총 충만한 약속의 근거가 되는 한 가지 말씀이 있습니다. “아버지께서 너희를 사랑하신다.” 는 사실, 아니 진리입니다. 이 진리를 의심 없이 믿으면 절대로 실망하거나 포기하는 일이 없습니다.
모든 것이 은총이고 선물이다
- 정순옥 수녀-
수도회에 입회하고 지금까지 주어진 소명에 응답하면서 살았다. 지부장의 임기를 마쳤을 때는 총장수녀님한테서 인도 공동체에서 3개월의 휴식시간을 가지라는 제안을 받았다. 그때는 약 7년간 이주노동자들과 함께하면서 아시아의 여러 교회에 대해 알고 싶다는 갈망이 있었다. 그래서 인도보다는 아시아 여러 나라에서 온 사목자들이 모이는 필리핀 사목센터에서 1년간 안식년을 보내고 싶다는 청원서를 보냈다. 다행히 받아들여져 수도생활 20년 만에 특별한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그동안 사도직과 공동체 일을 겸임하면서 바쁘게 살았던 내가 마닐라 메리놀수녀원에 머물면서 언어공부에만 전념하게 되었을 때, 마치 꿈만 같았고 동기부여에 대한 어떤 내적 부르심을 느끼며 정말 감사하고 행복했다.
사목코스에서는 지나온 시간을 돌아보며 자신을 좀더 알게 되었고, 또 프라도 수녀로서 가난한 사람과 노동자, 이주민, 그리고 실직자들과 함께 살아온 사도적 삶을 보증받았다. 그리고 힘들었던 시간의 의미도 알게 되었다. 그 어려움은 주님께 건너가는 징검다리 역할을 해주었고 또 주님의 사람으로 성장되게 했음을 깨달았다. 이 모든 것이 은총이고 선물이었다.
처음으로 청해 얻은 은혜로운 시간, 안식년의 체험을 통해 나는 더 깊이 성소를 살게 되었고 기쁨과 여유로움을 더해 받은 것에 감사드린다. 하느님의 자비를 믿으면서 청하자. 분명 오늘보다 더 나은 내일이 되게 해주실 것이다.
나는 아버지에게서 나와 세상에 왔다가, 다시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 간다.
석남동에 ‘온정의 집’이 있습니다.
갈 곳 없는 할머님들과 수녀님들이 함께 사시는데,
저는 한 달에 한 번씩 그곳에 가서 미사를 봉헌합니다.
처음에는 월요일마다 봉사활동을 하려고 온정의 집을 찾았는데, 생각처럼 시간이 안 나고,
또 제가 게을러서 매 주 가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초반에 몇 번 봉사를 하다가, 한 달에 한 번 미사를 가는 것으로 계획을 수정했습니다.
한 달에 한 번이긴 하지만, 일 년 정도 온정의 집에 드나들다 보니,
할머님들의 얼굴을 대충은 다 알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달에 가보면 제가 알고 있는 그 할머님이 보이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수녀님께 물어보면, 돌아가셨다는 이야기를 해 주십니다.
연세가 많으시고 몸이 불편하신 분들이 많이 계셔서,
요번 달에 봤다고 해서 다음달에 또 볼 수 있다는 장담을 못 합니다.
언제 가실지 아무도 모릅니다. 갑자기 밥을 안 드시거나, 갑자기 말이 없어 지시거나,
갑자기 이상한 행동들을 하시고 나서, 힘없이 누워계시다가 가시는 경우가 많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런지 온정의 집을 찾을 때마다, 죽음에 대해서 묵상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거창한 묵상이 아니라, 나도 언
젠가 죽게 된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기억하고 새기는 시간을 갖게 되는 것 같습니다. ‘죽음을 받아들일 수 있을까...
세상에 집착하고 있는 건 없나... 얼마 안 있어 죽는 다면 무엇을 해야 할까... 죽을 때 후회하지 않으려면 어떻게 살
아야 할까...’ 라는 생각들이 가볍게 지나갑니다.
그런 생각들이 지나가면 ‘기도해야겠다. 사랑해야겠다. 감사해야겠다.’ 라는 감각들이 깨어나는 느낌이 듭니다. 어
제는 ‘감사해야겠다.’ 는 감각이 살아났습니다. 그래서 집에 가는 동안 ‘걸을 수 있어서 감사합니다. 아무 데도 아프
지 않아서 감사합니다. 미사를 봉헌할 수 있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무 사고 없이 집에 도착하게 해 주셔서 감사
합니다. 점심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반찬을 많이 주셔서 감사합니다. 할 일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라는 생각을 했습
니다. 지금도 계속 ‘감사, 감사, 감사...’ 라고 주문(?)을 외우고 다닙니다.
여러분들도 죽음에 대해서 잊어버리거나 외면하고 있다가, 문득 죽음을 대면하게 되는 경우가 있었을 겁니다. ‘병에
걸렸다던가, 절망적인 상황을 체험했다든가, 깊은 외로움을 느꼈다든가, 가까운 사람의 죽음을 겪었다든가...’ 했을
때, 죽음에 대해서 생각해 보는 시간을 가지셨을 겁니다. 그 고민의 수준과 강도에 따라 삶의 변화에도 차이가 있다
는 생각이 듭니다. 정말 죽음을 깊이 체험한 사람은 하루하루를 소중하게 살아가고 업적에 신경 쓰기보다는 의미 있
는 일을 하기 위해서 노력하겠죠. 반대로 죽음에 대한 깊은 고민을 해 보지 않은 사람은 ‘그냥 살던 대로...’, ‘그저
하던 대로...’, ‘이렇게 살다 죽는 거지 뭐...’ 하며 변화 없이 살아가리라는 생각이 듭니다.
오늘 하루, 죽음을 바라보고 대면해 보는 시간을 가질 수 있으셨으면 좋겠습니다.
성령을 통한 지복직관
-이준석신부-
예수님께서는 지상 활동 중에 자주 ‘비유’를 들어 말씀하셨습니다. 비유의
사전적 의미는 “어떤 현상이나 사물을 직접 설명하지 아니하고 다른 비슷한
현상이나 사물에 빗대어서 설명하는 일”입니다. 사람들이 경험해보지 못한
‘하느님 나라’를 예수님께서는 쉬운 예화를 통해 자주 설명하십니다. 이렇게
보면 예수님 자신도 하느님께서 당신의 존재를 알리기 위해 보내신 ‘비유의
말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인간이 이해하고 받아들이기에는 너무나도 크신
하느님의 모습을 ‘인간’의 모습으로 보여주시는 분이 바로 예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비유로 말씀하지 않으시고
드러내놓고 알려주실 때가 온다고 하십니다. 즉 제자들이 비유를 통해 하느님의
가르침을 듣는 게 아니라, ‘하느님의 비유 말씀’이신 예수님이 아버지께로
돌아가신 뒤에도 하느님을 알아뵐 때가 온다는 것입니다. 즉 그 어느 것도
거쳐갈 필요 없이 하느님의 뜻을 직접 대면할 ‘지복직관’의 때가 온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느님을 직접 대면하게 되는 은총은 예수님이 말씀하신 대로
그들이 성령을 받은 후에 이루어집니다. 이러한 은총이 우리에게 주어진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이제 우리 모두 성령을 구할 때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구하면 받으리라는 믿음으로 아버지께 성령을 보내주시기를 청할 때입니다.
그 날엔
-김찬선신부-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청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그분께서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지금까지 너희는 내 이름으로 아무것도 청하지 않았다.
청하여라. 받을 것이다. 그리하여 너희 기쁨이 충만해질 것이다."
요즘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하고 기도하지만
옛날 우리의 기도 정식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비나이다.”였습니다.
그런데 주님의 이름으로 기도하고 청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입니까?
임금에게 무엇을 청하면 그 청이 전달되지도 않을 뿐 아니라
전달은 되더라도 그 청이 가납되지 않기 때문에
임금님과 잘 아는 사람의 이름으로 청하는 그런 것입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지 않고 하느님 아버지께 직접 청하면,
하느님 문턱이 너무 높아 가납되지 않는다는 그런 뜻이라면,
그것은 ‘아니올시다!’일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이어서 말씀하십니다.
“그날에 너희는 내 이름으로 청할 것이다.
내가 너희를 위하여 아버지께 청하겠다는 말이 아니다.
바로 아버지께서 너희를 사랑하신다.”
주님께선 아버지께서 친히 우리를 사랑하신다고 하십니다.
그러니 하느님께서 우리의 바람을 모르실 리가 없으시고,
우리가 청한다면 그 청을 거절하실 리도 없으십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의 뜻은 삼위일체적 사랑의 차원입니다.
지금은 주님의 이름으로 청하지 않지만
“그날”에는 주님의 이름으로 청할 것이라고 하는데
“그날”은 바로 성령께서 우리에게 오시는 때이고,
성령께서 오시면 성령께서는 사랑의 성령이시기에
우리로 하여금 주님을 진정 사랑하고 믿게 하실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또 이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나를 사랑하고,
또 내가 하느님에게서 나왔다는 것을 믿었기 때문이다.”
성령께서 오시면
하느님께 대한 우리의 사랑이 비로소 완성될 것입니다.
성령께서 오시면
하느님께 대한 우리의 믿음이 비로소 완성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는
하느님 사랑의 현현(顯現)이요 육화(肉化)임을 우리가 믿고,
하느님 사랑에 대한 우리 사랑으로서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가 사랑하여
이제 모든 것을 예수 그리스도 없이는 하지 않습니다.
하느님과 하느님 사랑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에게 왔기에
우리와 우리의 사랑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느님께 가게 되고
우리의 청원도 사랑의 차원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갑니다.
성령께서 오시면
아들을 사랑하지 않고 아버지를 결코 사랑치 않을 것이며
아들을 제켜 놓고 아버지와 직접 쏙딱거리지 않을 것이라는,
오늘 말씀은 그런 말씀이 아닐까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구하는 것이면 아버지께서 무엇이든지 주실 것이다."
-양승국신부-
<꺼진 오르간>
우리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 생각할수록 참으로 대단한 분이십니다. 80을 넘긴 나이, 불편하신 몸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당신을 필요로 하는 곳이라면 세8상 그 어디든 찾아가십니다. 극도로 노쇠한 몸으로 2-3시간 이산 걸리는 그 숱한 행사에 끝까지 참여하십니다.
대희년 기간 중 지척에서 그분을 뵙고 그분의 말씀을 들어본 적이 있습니다. 겨우겨우 이어가시는 그분의 말씀, 비록 힘이 없는 목소리였지만 말씀 한마디 한 마디는 참으로 감동적인 것이었습니다.
"대희년 기간 내내 베드로 대성전 문을 통과하기 위해 인내로이 기다리는 여러분들을 흐뭇한 마음으로 바라봅니다. 그러나 동시에 저는 여러분 각자 안에 깃들어 있는 여러분들의 걱정과 고통, 불안과 희망, 지난 삶의 역사를 바라보면서 이런 자세를 지닐 것을 권고합니다.
1. 영원하신 하느님의 사랑을 노래하십시오.
2. 그분 자비의 활동에 겸손되이 시선을 집중하십시오.
3. 침묵과 흠숭으로 그분께 감사 드리십시오.
한마디로 요약해서 기도하라는 당부셨습니다.
기도는 우리가 잘 알고있는 것처럼 하나의 고된 영적 임무입니다. 때로 저희 같은 수도자들도 기도가 잘 안되 미칠 지경입니다. 아무리 기도해도 더 허전하고 무미건조한 상태가 계속될 때도 있습니다.
그래서 필요한 것이 "공동체"인 것입니다. 우리의 가정공동체, 수도공동체는 다른 무엇에 앞서 "기도의 학교"가 되어야 합니다. 수도공동체에서는 영적으로 앞선 선배들이 자신들이 쌓아온 기도에 관한 노하우를 후배들에게 삶을 통해 전수해주어야 합니다. 가정공동체에서는 부모들이 진지하고 규칙적인 매일의 기도를 통해 자녀들에게 기도의 방법을 알려주어야 합니다. 이렇게 구성원 상호간에 영적으로 서로 지지하고 하느님 체험의 방법을 서로 나누고 배우는 장이 바로 그리스도인 공동체여야 할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이 그분을 노래하지 않는다면 이는 꺼진 오르간입니다. 우리의 지성이 그분을 보지 못하고 그분을 찬미하지 않는다면 이는 장님이며 암흑인 것입니다"(끼아라 루빅).
청탁
-김찬선신부-
청탁(請託)
요즘 우리에게는 별로 좋은 말이 아닙니다.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첫째는 내용이 문제입니다.
다른 사람이 잘 되게 해달라고 청하면 무엇이 문제겠습니까?
자기를 위해 청하더라도 청할 것을 청하면 무엇이 문제겠습니까?
나쁜 것을 청하는 것이 문제이고
옳지 않은 것을 청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마약을 얻어 달라고 부탁하거나
나쁜 짓을 하고는 무마해달라고 부탁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둘째는 대상도 문제입니다.
신앙인이라면 예수님께 청탁을 드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이런 청탁을 예수님께 드리면 예수님은 받지 않으십니다.
예수님은 이런 청을 하느님께 전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사람들은 예수님께 청탁을 드리지 않고
사람에게,
그것도 이런 청을 들어줄 만한 사람에게 청탁을 합니다.
청을 하는 사람이나 청탁을 받는 사람이나
청탁을 들어주는 최종 권한자나 다 한통속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청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그분께서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지금까지 너희는 내 이름으로 아무 것도 청하지 않았다.
청하여라. 받을 것이다.
그리하여 너희 기쁨이 충만해질 것이다.”하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니 주님께 청하면 받을 것이고,
받으면 기쁠 텐데 왜 청하지 않습니까?
아직은 청하는 것에 대한 자신(自信),
즉 자기 믿음이 없기 때문이고
청하는 것을 들어주시리라는 하느님 믿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날에 너희는 내 이름으로 청할 것이다.”하십니다.
그날이 어떤 날입니까?
탐욕에서 정화되었을 때이고,
우리를 사랑하시는 주님의 사랑을 우리가 믿고 사랑할 때이겠지요.
그래서 주님은 “너희가 나를 사랑하고
내가 아버지께로부터 나왔다는 것을 믿었기 때문이다.”고 하십니다.
칼은 칼집보다 오래 가고, 영혼은 가슴보다 오래 간다(조지 고든 바이런).
진실한 회개가 완벽한 청원
-김우성 신부-
우리는 하느님께 무엇인가 요청하기 위해 청원기도를 드립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청원기도는 그분의 뜻을 간절히 받아들이고자 하는 원의의
표현입니다. 그분의 뜻을 철저히 따르기 위한 우리의 순수한 응답의 길이기도
합니다. 믿음 안에서의 응답은 먼저 자기 비움을 전제하는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청원기도를 드리기 전에 우리의 회개가 절실히 요구되는
것입니다. 회개는 ‘회복’의 의미도 지닙니다. 죄를 벗어버림으로써 우리가
본래 지닌 마음을 회복할 때 하느님의 자녀로 하느님께 청할 수 있습니다.
믿음을 바탕으로 한 청원기도는 우리를 온전한 주님의 자녀, 주님의 도구가
되게 합니다. 따라서 진지한 청함은 바로 주님 자녀로서의 몫을
깨닫는 것입니다. 온전한 내어맡김과 섬김의 행위가 청원의 내용이
되어야 합니다. 한마디로 내 자신의 의지적 뜻을 청함이 아니라, 주님의 뜻 안에
나의 모든 것을 내려놓음이 참된 청함의 지혜가 될 것입니다. 하느님의
사랑 안에 하나 되는 봉헌이 됩니다. 그래서 믿음 안에서의 청함이란
주님께서 걸으신 모든 사랑과 진리의 길에, 하느님 백성의 회개를 위한
수난의 길에 우리 자신을 내어드리는 것입니다. 또한 세상 안에서 나 자신을
찾고자 함이 아니라, 하느님의 진리 안에서 나 자신을 잊어버리는 것입니다.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것
- 이영석 신부-
엄마 아빠에게 뭘 해 달라거나 뭘 사 달라고 조르는 아이들을 심심찮게 봅니다. 어느 부모가 자녀의 청을 들어주고 싶지 않겠습니까만, 자녀의 모든 청을 다 들어주는 부모는 없습니다. 자녀를 진정 아끼고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는 예수님의 모든 청을 다 들어주셨을까요? 제가 보기에는 아닌 것 같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실 단 한 번도 당신이 원하는 것을 아버지께 청하신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죽음의 순간에도 예수님께서는 “제가 원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것을 하십시오.”라고 말씀하셨을 정도였습니다.
단 한 번도 당신이 원하는 것을 하느님께 청하신 적이 없으신 예수님께서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청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그분께서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라고 약속하십니다. 이 약속에는 우리에게 기도하는 법을 일러주고 싶어하는 예수님의 간절한 바람이 담겨 있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하느님께 청하는 것, 예수님께서 하셨듯이 그렇게 아버지께 청하는 것, 그것이 바로 기도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 무엇을 원하시고 무엇을 원하지 않으시는지를 분별하는 것이 기도입니다. 우리가 내면 깊은 곳에서 들려오는 하느님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그리하여 참된 분별력을 가지고 살아간다면 우리의 기도 안에서, 우리의 마음 안에서 이루어지는 예수님의 재림으로 인해 우리는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큰 기쁨을 선물로 받게 될 것입니다. 우리 주위에는 기도하는 법을 몰라 길을 잃고 헤매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하느님께서 무엇을 원하시는 것인지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우리가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돌아가는지를 모르는 사람입니다.
사랑과 기쁨
-전삼용신부-
저는 한 때 가족을 버리고 당신을 따르라고 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이 사적인 감정을 버리고 모든 사람을 똑 같이 사랑하라는 뜻인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어느 순간에 하느님도 편애를 하신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하느님은 당신을 사랑하는 사람에게 그 사랑하는 만큼만 기쁨과 평화를 돌려주십니다. 그러나 조금만 생각해보면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을 더 사랑하고 더 잘해주게 되는 것이 편애가 아닌 정의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에스테르기를 읽으면 임금에게 사랑을 받았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왕비 자신과 자신의 모든 민족을 구원하는 내용이 나옵니다.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모든 것을 주고 싶은 것이 사람의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런 것이 항상 좋은 일에만 쓰이는 것은 아닙니다.
헤로데의 아내 헤로디아는 자신의 딸이 헤로데의 생일잔치에서 춤을 아주 잘 추어 왕을 기쁘게 하자 바로 자신이 그렇게 꼴 보기 싫어하던 세례자 요한의 목을 청합니다. 헤로디아의 힘만으로는 세례자 요한의 목을 얻을 수 없었겠지만 왕을 기쁘게 한 딸의 어머니인 이유로 목적을 달성한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지니고 있는 무엇을 얻어내는 방법은 그 무엇을 줄 수 있는 사람의 마음에 들도록 노력하는 것뿐입니다.
성경에는 예수님으로부터 많은 기적의 은총을 받아낸 사람들이 나옵니다. 특별히 하혈 병을 앓던 여인의 치유는 우리에게 많은 것을 일깨워줍니다. 예수님은 그 여인을 치유해 줄 아무런 원의도 없으셨지만 그 여인이 예수님의 옷자락만 만져도 치유될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으로 은총을 하느님으로부터 빼앗아낸 것입니다. 믿음은 곧 사랑입니다. 사랑하면 은총을 빼앗아낼 수도 있는 것입니다. 옷자락을 만져서 저 정도인데 우리가 조금만 더 사랑하면 그 분의 몸을 영하는 우리들은 얼마나 더 큰 은총을 얻어낼 수 있겠습니까?
왜 나에게 은총을 주시지 않느냐고 불평할 것이 아닙니다. 은총은 그 여인처럼 빼앗아내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느님으로부터 은총을 얻고 기쁨에 넘치게 될까요?
우리는 이것을 신앙의 모범인 성모님을 보고 배워야 할 것입니다.
가나의 혼인잔치에서 예수님은 첫 번째 기적을 원하시지도 않는데 어머니 때문에 행해야 했습니다. 그 이유는 바로 성모님이 청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아직 때가 이르지도 않았다고 말씀하시며 “그것이 당신과 나에게 무엇입니까?”고 어머니께 반문하십니다.
어쩌면 어머니는, “아직, 때가 이르지 않았지만 그게 뭐라고 어머니께서 저에게 청하시는 것을 제가 물리칠 수 있겠습니까?”라고 받아들였을 것입니다. 그래서 두 말 없이 곧바로 시중드는 사람들에게 “이 사람이 시키는 대로 하여라.”하시며 잔치에 모인 사람들을 위해서 기적을 만들어내십니다.
어머니는 어떤 청을 하든 들어줄 수밖에 없을 만큼 아들에게 사랑받는 분이셨던 것입니다. 만약 포도주를 만드는 기적을 해 달라고 다른 사람이 청했다면 예수님께서 들어주셨을까요? 예수님은 그 때까지 한 번도 기적을 행하신 적이 없으므로 누구도 그런 기적을 청할 믿음도 없었을 뿐더러 성모님이 아니었으면 누구도 그 기적을 얻어내지 못했을 것입니다.
이렇게 하느님은 당신을 사랑하는 만큼 우리에게 은총을 주십니다. 그 은총이 곧 성령님이고 성령님이 누구도 빼앗을 수 없는 기쁨을 우리에게 주시는 것입니다.
성모님은 아들이 한 번도 기적을 행하는 것을 본 일이 없으십니다. 왜냐하면 가나의 기적이 첫 기적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청하실 줄 알았습니다. 그리고 당신이 청하면 아들은 당연히 들어주어야 할 만큼 당신이 아들과 하느님을 사랑하고 있다는 것도 알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불가능한 것까지도 얻어내실 수 있으셨던 것입니다.
우리는 행복해지기 위해서 일도 하고 공부도 하고 놀기도 합니다. 그러나 유일한 행복을 받을 수 있는 방법인 예수님을 사랑하기 위해서는 얼마나 시간을 투자하고 있을까요? 또 기복신앙이니 뭐니 하면서 우리가 합당히 청해야 하는 것까지도 청하지 못하고 주저하며 살고 있지는 않습니까?
“지금까지 너희는 내 이름으로 아무것도 청하지 않았다. 청하여라. 받을 것이다. 그리하여 너희 기쁨이 충만해질 것이다.”
새벽을 열며
2002년, 미국에서는 역사상 가장 큰 3천여억 원의 복권 당첨자가 탄생했다고 합니다. 3천억. 상상도 하기 힘든 액수인데요, 이 복권의 주인공은 텍사스에서 건설 회사를 운영하던 잭 휘태커라고 합니다. 그는 이미 상당한 재산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은 ‘거액 당첨자들은 대부분 불행에 빠진다.’는 복권의 저주에서 안전할 것이라고 생각했답니다. 그런데 과연 이 사람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그는 가족과 친구들에게 무분별하게 돈을 뿌렸고, 수십억 원대의 스포츠카를 사들였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스트립바와 경마장 그리고 도박장을 전전하면서 툭하면 소송에 휩싸였다고 하네요. 결국 그가 운영하던 회사는 파산하였고, 그는 무일푼의 알코올 중독자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참으로 이상하죠? 분명히 상상도 하기 힘든 거액의 당첨금인데, 그래서 평생을 펑펑 써도 다 쓰기 힘들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데 오히려 무일푼의 알코올 중독자가 되다니요.
2004년 독일의 도르트문트에서는 약 130억 원의 복권 당첨자가 탄생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당첨자가 좀처럼 나타나지 않았고 사람들의 궁금증은 점점 커졌지요. 10주가 지나서야 드디어 모습을 드러낸 당첨자는 50대의 평범한 남자였습니다. 그는 당첨금 전액을 자선단체에 기부하겠다고 말하면서, “갑작스럽게 생긴 큰돈이 두렵고, 쓸 준비가 안 돼 있기 때문이다.”라는 이유를 밝혔답니다. 그리고 자신의 신원을 밝히지 말아 줄 것을 당부하면서 사라졌습니다.
과연 이 둘 중에서 누가 더 행복한 사람일까요?
사실 저 역시 소위 ‘대박’의 꿈을 가졌던 적이 있었습니다. 몇 년 전, 갑곶성지로 발령받아 한겨울에 보일러 없이 살아가는 재정적인 어려움을 체험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 너무 춥고, 빨리 성지를 키워야 한다는 생각에 남몰래 로또 복권을 구입했었지요. 그리고 정말로 예수님 발등을 잡고서 ‘예수님, 제가 사심이 있어서 그런 것은 아니고요. 성지를 위해서 그리고 당신을 위해서 그런 것이니까……. 로또 복권 좀 맞게 해주세요.’라고 기도까지 했었습니다. 물론 예수님께서는 저에게 그런 ‘대박’은 주시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더 큰 믿음과 당신께 무조건 매달리면 더 좋은 은총을 주신다는 확신을 제게 주셨지요.
많은 이들이 물질적인 ‘대박’을 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물질적인 대박이 과연 얼마나 오래 갈까요? 앞선 잭 휘태커의 경우처럼 순간의 기쁨이 있을 뿐, 오히려 불행의 길로 빠질 수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나를 항상 기쁘게 하고, 마음의 평화를 가져오게 하는 진정한 ‘대박’이 바로 주님이십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오늘도 우리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지금까지 너희는 내 이름으로 아무것도 청하지 않았다. 청하여라. 받을 것이다. 그리하여 너희 기쁨이 충만해질 것이다.”
진정한 ‘대박’인 주님께 의지하면서 두 손 모아 기도합시다.
빠다킹신부
특별한 이야기
-김동하 신부 -
둘 이상의 사람이 모여서 이야기를 나눌 때는 차례가 있어야 합니다.
생각을 말한 만큼 귀를 세우고 마음을 다하여 들어야 합니다.
서로의 생각을 알고 나누어야 이야기에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기도는 예수님과 나누는 이야기입니다. 이야기이면서도 말이 필요 없는
특별한 이야기입니다. 그분께서는 말이 필요 없는 친구처럼(요한 15,15 참조)
우리의 속내를 너무나 속속들이 아시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그분과 나누는 이야기에서는 정성을 다하여 듣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특별한 이야기에서는 그분의 뜻을 찾는 것이 전부이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굳이 우리의 생각과 바람을 말씀드리고자 한다면 지혜로워야 합니다.
그분의 이름으로 시작하여 그분의 이름으로 청하고 그분의 이름으로 끝맺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분의 이름이라야 어긋난 생각과 바람으로 흐르지 않고
그분의 뜻이라는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진정한 기쁨
-윤영수 수녀-
기쁨을 저해시키는 마음 아픈 이야기가 있습니다.
첫째, 가출 및 성매매 청소년들과 함께 생활하는 수녀님이 어느 날 "도대체 진정한 가족 사랑이 무엇이기에 그 사랑 하나가 잘못돼서 저토록 문제가 심각한지 알 수가 없네요."라고 한참 하소연을 했습니다. 내용인즉, 아이가 어릴 때 엄마는 가출하고 아버지는 술주정을 하며 어린 딸을 학대했습니다. 나중에는 딸이 동네 아저씨한테 성폭행을 당하는데도 보호는커녕 모른 척하는 통에 결국 어린 딸도 가출하여 떠도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결국 그 딸은 쉼터에 와서 사는데, 문제는 그곳의 사소한 생활규칙조차 지키는 것을 너무 힘들어한다고 합니다. 생활교육이 왜 중요한지, 그걸로 인한 기쁨이 어떤 건지 아무리 설명하고 실천하도록 도우려 해도 방법이 없다는 얘기였습니다. 그 소녀는 가정의 사랑과 기쁨이 어떤 건지 한번도 체험해 보지 못한 탓에 공동체 생활을 위해 지켜야 하는 최소한의 규칙도 짐이고, 고통으로만 느낀다고 했습니다. 그 소녀는 진정한 부모의 사랑을 모른 채 살아오다 보니 기쁨을 잃고, 고통의 시간 속에 너무 오래 길들여져 있었던 탓에 기쁨을 느끼는 마음마저 굳어진 것 같다고 합니다.
둘째, `44분마다 1명, 매일 33명, 1년에 1만2047명의 자살자. OECD 회원국 중 우리나라가 2006년 이후 자살률이 1위여서 자살 공화국`(2007.3.11.동아일보)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진정한 기쁨을 간직하고 체험한다면 이런 슬픈 사회문제가 만연되지 않을 거라고 봅니다. 진정으로 주님을 알고 주님의 말씀에 기쁨을 느낄 줄 아는 사람들이 많아진다면 이런 아픈 일들도 더 이상 일어나지 않겠지요? 참으로 이 세상에 속한 사람들에게 아버지의 진정한 기쁨이 채워지도록 간절히 기도해야겠습니다.
부활 제6주간 토요일
- 도정호 신부-
지금 우리는 부활의 막바지 즈음에 와 있는데, 오늘 우리에게 들려진 복음은 예수님 당신의 수난과 죽음 이전의 상황입니다. 굳이 예수님의 수난과 부활 이전의 복음을 부활기간 마지막 즈음에 와서 우리에게 들려주는 이유는 내일이면 우리가 기념하게 될 주님의 승천을 미리 준비하게 도와주면서, 제자들 곁을 떠나시는 주님의 심정을 조금이나마 헤아릴 수 있는 부분이기에 교회가 들려주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 수난과 죽임을 당할 때까지, 또 부활사건이 있기 전까지만 해도, 제자들은 스승 예수님이 누구인지, 하느님과 어떤 관계에 있는 분이신지를 완전히 알아듣지 못했습니다. 하느님께는 기도할 줄은 알았지만 하느님이신 예수님이 곁에 있어도 예수님께는 기도할 줄 몰랐을 정도였습니다. “지금까지 너희는 내 이름으로 아무것도 청하지 않았다.”는 말씀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이러한 제자들의 영성상태를, 당신을 향한 신앙을 헤아리고 계셨기에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비유로 말할 수밖에 없었다고 하십니다.
예수님께서 계셨던 당시의 종교지도자들은 사람들에게 하느님을 가르치면서 죄악에 가득 찬 세상을 벌하시는 분으로, 세상과 인간의 죄에 분노하고, 심판하시는 분으로, 무서운 분으로 가르쳤습니다. 그러지만 예수님은 사랑으로 이 세상을 창조하신 하느님, 인간을 영원토록 살게 하고자 하시는 하느님, 인자하고 기다려주시고 자비로운 하느님을 사람들에게 알려주시고자 하셨습니다. 그렇게 하기 위한 방법이 제자들과 사람들에게 비유로 말씀하셨다는 것인데, 비유의 목적은 하느님 아버지를 알아듣도록 하기 위해서....하느님 나라를 알아듣도록 하기 위해서였고, 비유의 방식이나 내용에 있어서는 우리의 눈높이에 맞추어 우리가 알아듣기 쉬운 말들과, 살아가면서 얼마든지 목격할 수 있는 것들을 인간적인 방식으로, 인간의 언어로...우리가 알아듣기 쉬운 내용으로 설명해 주셨습니다. 지금까지의 가르침과는 너무도 달랐기 때문에 사람들을 모이게 만들었고, 완전히 사로잡으실 수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비유로 알려주신 당신이 누구인지, 어떤 분이신지는 수난과 죽음 부활 이후에는 제자들이 명백히 알게 될 것이기에 비유로 이야기할 필요가 없을 것이라는 점을 미리 말씀해 주고 계십니다. 그러면서 지금껏 하느님께만 청했던 기도들도 이제부터는 당신을 통해서도 하느님께 청하게 될 것이라고 제자들에게 알려주십니다.
우리는 오늘 복음의 제자들의 도움으로 예수님이 누구신지, 어떤 분이신지, 하느님과 어떤 관계에 있는 분이신지 교회를 통해서 알게 된 그리스도인입니다. 누구를 통해서 기도해야 할지도 알고, 성인들과 함께 기도할 줄도 알고, 누구에게 기도해야 할지도 알고 있습니다.
예수님 당신의 승천을 앞두고 제자들에게 분명하게 알려주고 인식시켜주신 말씀은 아버지께서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당신께서 인간을 사랑하시는 하느님에게서 와서 하느님의 뜻을 전해주고 원래 계셨던 곳으로 다시 돌아가신다고 사실입니다.
<독서> : 적대자들을 위하여 아폴로를 준비하신 하느님
-경규봉 신부-
한편 에페소(로마 제국 아시아 주의 수도)에는 알렉산드리아(B.C 332년 알렉산더 대왕이 세운 해양 도시로 상업의 중심지이며, 지식과 학문의 중심지)에서 온 아폴로라는 유대인이 와 있었다. 그는 천부적인 언변과 풍부한 학식을 가지고 있었으며, 성경에 정통한 사람이었다. 그는 주님의 세례에 대해서는 알지 못하고 요한의 세례만을 받았지만 주님의 가르침을 전하고 있었다.
그가 회당에서 복음을 전하는 것을 들은 브리스킬라와 아퀼라는 그가 복음의 진수에 대해 무지한 것을 발견하고 그에게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 오순절 성령강림을 통해서 이루어진 모든 일들을 자세히 가르쳐주었다.
이리하여 아폴로는 복음의 핵심을 온전히 깨닫게 되었다. 그 후 아폴로는 아카이아 지방으로 가서 고린토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도록 하였다. 고린토의 유대인들은 마음이 완고하여 그리스도교를 거부하며 박해하였기 때문이다. 고린토에 온 아폴로는 능통한 성경 지식을 바탕으로 유대인들의 주장을 논박하며 예수님께서 메시아이심을 더욱더 설득력 있게 유대인들에게 전하였다.
고린토에 살고 있는 율법에 얽매여 살았고, 율법을 주신 하느님까지도 거부하였다. 그리하여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고 복음을 전하는 사도 바울로와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하였다. 그처럼 율법에 매어있는 완고한 그들을 위해서 하느님께서는 아폴로를 선택하셨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을 거부하는 사람까지도 사랑하시기 때문에 그들을 위하여 아폴로를 선택하셨다.
아폴로는 철학과 성경의 도시라고 할 수 있는 알렉산드리아에서 철학과 성경을 깊이 연구한 사람이었다. 그는 천부적인 재능을 타고나 뛰어난 언변과 박학한 학식을 지니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성서에도 능통하였다. 때문에 그는 성경에서 예언한 메시아가 곧 예수님이심을 이내 알고 주님을 믿을 수 있었다. 그는 하느님의 섭리로 에페소에 가서 브리스킬라 부부를 만났고, 그들로부터 복음의 진수를 전하여들은 다음 복음전파의 열정에 불타 고린토로 갔다.
그는 오직 성경에 근거하여 고린토에 살고 있는 유대인들의 잘못을 낱낱이 지적하였다. 그들에게 성경을 해석해 주고, 성경이 전하는 주님을 선포하였다. 성경을 통하여 그들이 올바른 길을 걸을 수 있도록 도와준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마음이 완고하여 당신을 거부하는 당신 백성을 위하여 성서에 능통한 아폴로를 그처럼 준비하시어 당신의 도구로 삼으셨던 것이다.
인류를 구원하시려는 하느님의 계획과 섭리는 변함이 없다. 어떤 악과 방해에도 불구하고 인류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은 변함이 없다. 그 어떤 죄와 잘못을 저지른 사람도 하느님께서는 변함없이 사랑하신다. 하느님께서는 “나는 너의 악행을 먹구름처럼 흩어버렸고 너의 죄를 뜬구름처럼 날려 보냈다. 나에게 돌아오너라. 내가 너를 구해 내었다.”(이사 44,22)라고 부르신다.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인을 박해하는 사울을 미리부터 준비하셔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사도가 되게 하셨고, 아폴로를 예비하셔서 그리스도인을 박해하는 유대인들이 회개할 수 있도록 하셨다.
오늘, 우리를 변함없이 사랑하시는 하느님, 우리를 애타게 부르시는 하느님, 우리를 위하여 그토록 배려하시는 하느님의 마음을 느끼는 하루가 되자.....◆
"그리스도 안에서"
-이수철신부-
“나는 주님의 이름을 전하리니,
우리 주 하느님께 영광을 드려라.”
“하느님 내 주시여,
온 땅에 당신 이름 어이 이리 묘하신고.”
꽃다우신 주님 이름을 찬미하는 것이
수도자들은 물론 믿는 이들의 자랑스럽고 고귀한 사명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있어야 할 제자리에서
제 모습, 제 색깔, 제 향기로 살 때 아름답고 행복합니다.
‘하느님의 집’이라 불리는 수도원,
우리가 있어야 할 제자리를 상징합니다.
하여 많은 이들이 고향 집을 찾듯이
영혼의 보금자리, 수도원을 찾습니다.
얼마 전 수도원이 꼭
하느님의 살아있는 숲 같다는 생각에 써놓은,
‘살아있는 숲’이라는 글입니다.
새들이 없는 숲은
죽은 숲이다
수도원은
하느님의 숲이다
새처럼
날아 왔다 날아 가는
무수한 사람들!
하느님의 새되어
날마다
찬미노래 부르는 수도자들!
하느님의
살아있는 숲 수도원이다.
우리 수도자들이 있어야 할 제자리가 여기 수도원이요,
이것이 바로 정주가 의미하는 바입니다.
눈에 보이는 가시적 수도 공동체를 통해
보이지 않는 ‘그리스도 안에’, ‘하느님 안에’
정주의 삶을 사는 우리 수도자들입니다.
사실 이 정주의 삶은
믿음의 가정 공동체들 모두에 해당되는
보편적 영성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 역시 보이는 제자들의 공동체를 통해
보이지 않는 ‘아버지 안에’
깊이 뿌리내린 정주의 삶이셨음을 깨닫습니다.
“나는 아버지에게서 나와 세상에 왔다가,
다시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 간다.”
아버지에게서 나와
평생 아버지 안에 정주의 삶을 살다가
아버지께 가신, 주님의 평생 삶이셨습니다.
우리 역시
그리스도를 통해서,
그리스도와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
평생 정주의 삶을 통해 아버지께 갑니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청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그분께서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청하여라. 받을 것이다.
그리하여 너희 기쁨이 충만해질 것이다.”
‘내 이름으로’,
바로 그리스도와의 깊은 결속의 관계를,
그리스도 안에서의 정주의 삶을 암시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정주의 삶을 살 때
아버지께서는
그의 기도를 들어주시고 충만한 기쁨을 주십니다.
진정 그리스도 안에서 정주할 때
참 행복이요 충만한 기쁨입니다.
사도행전에서 바오로 역시
보이는 안티오키아 교회공동체가 그의 정주처가 되고,
보이지 않는 부활하신 주님이
늘 그의 정주처가 됐음을 봅니다.
바로 이 ‘정주의 샘’
부활하신 주님으로부터 샘솟는 힘으로
바오로 사도는 끝까지
선교활동중인 제자들을 격려할 수 있었습니다.
매일의 이 거룩한 미사시간
우리의 제자리 정주처는
바로 부활하신 그리스도임을 새롭게 확인하는 시간입니다.
늘 그리스도를 통해서,
그리스도와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 정주의 삶을 사는 우리들입니다.
아멘.
전구
-노성호 신부-
저희 어머니께서는 위급한 상황이 닥쳤을 때 외마디 비명을 지르시듯
“성모 마리아!” 하고 잽싸게 화살기도를 하십니다. 그러고 나면 잠시 후 평정을
되찾게 되시는지, 하시던 일에 몰두하시게 됩니다. 그런데 어릴 적에는 어머니께서
기왕이면 하느님이나 예수님을 찾으시지 왜 하필 성모님을 찾으시나 궁금했습니다.
하지만 어머니는 성모님을 찾으시면서 동시에 하느님과 예수님을 함께 찾고
계셨음을 나중에 알게 되었습니다. 바로 더욱 높으신 분께 직접적으로
말씀드리기는 어렵고 송구스러운 일이 될 수 있기 때문에 편한 상대인 하늘의
어머니께 대신해서 말씀 좀 전해달라는 간청으로 성모님을 찾으셨던 모양입니다.
우리는 기도할 때 기도 말미에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라는
말을 붙이는데, 이 말의 의미는 바로 ‘전구(轉求)’입니다. 아버지께 직접
말씀드리기는 좀 어려운 일이 될 수 있기 때문에 일단 아버지와 가장 친하신
아드님께 우리의 간청을 말씀드리고, 아버지께 대신해서 말씀해 주시기를 바라는
것이지요.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이름으로 아버지께 청하는 것은 무엇이든
들어주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 모두의 전구자로서 우리와 함께 계시는
예수님처럼 우리도 서로의 청을 하느님께 전구해 줄 수 있는 전령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모두의 바람이 하늘에 닿길 바랍니다.
“청하여라. 받을 것이다. 그리하여 너희 기쁨이 충만해질 것이다.”
-양승국신부-
<내 부끄러움을 연민의 눈으로>
미사 끝에 있었던 일입니다. 한 할머님께서 저에게 안수를 청하시더군요. 저는 별로 ‘효과’가 없다고 말씀드려도 꼭 해달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보통 안수는 머리에 하게 되는데, 그 할머님께 하시는 말씀, “요즘 내가 여기 무릎이 많이 저려서 그러니 이왕 안수하시는 것, 여기 무릎에다 안수 좀 해주시오.”
할머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무릎에다 정성껏 안수해드리고 나서 보니 문제가 한 가지 생겼습니다. 어느 틈엔가 많은 자매님들이 ‘잽싸게’ 줄을 서셨더군요. 그리고는 하시는 말씀 “나는 여기 어깨가 결리는데, 여기다가...” “나는 요즘 손목이 안 좋은데, 여기다가...”
또 어떤 자매님께서는 “시장 안에 조그만 가게 터를 소유하고 있는데, 그게 장사도 잘 안되고, 사려는 사람도 없고, 애물단지도 그런 애물단지가 없어요. 신부님이 기도 좀 많이 해주세요. 이것만 잘 해결되면 내가 후원금 많이 내놓을게요.”라며 협상까지 제안하십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청하여라. 받을 것이다. 그리하여 너희 기쁨이 충만해질 것이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맞은 말씀이십니다. 아버지께 우리는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귀염둥이 같은 존재이기에, 아버지께서는 자녀들인 우리가 청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지 기꺼이 들어주십니다.
그러나 무엇을 청할 것인가가 관건입니다. 우리가 청하는 것이 너무 허무맹랑한 것, 상식 밖의 것이 되어서는 곤란합니다. 아버지께서 기쁘게 들어주시는 청은 다른 무엇에 앞서 우리 영혼의 유익을 위한 것입니다. 이웃에게 기쁨을 주고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는 청이라면 그 어떤 청이라도 다 들어주실 것입니다.
때로 아버지께서는 우리가 죽기 살기로 청해도 모르는 체 하시는 기도가 있습니다. 지나치게 유아기적인 기도가 그렇습니다. 너무도 자기중심적인 기도가 여기에 해당됩니다. 해도 해도 너무한 기복적인 기도 역시 해당됩니다.
기복적인 기도, 사실 어느 정도 필요합니다. 특히 신앙생활의 초기 단계에 필요합니다. 신앙의 성장을 위해 필요합니다. 그러나 지나치면 문제가 됩니다.
로또 복권을 사놓고, 당첨되면 어려운 사람 위해서 반은 헌금하겠으니, 무슨 일이 있더라도 꼭 당첨되게 해달라는 기도, 성적은 가장 바닥이면서 이름만 들어도 위축되는 최상위권 대학에 붙게 해달라고 청하는 기도, 이런 기도는 기도가 아니라 강요이고 흥정입니다. 하느님을 괴롭혀드리는 기도도 아닌 맹목적인 졸라댐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우리는 어떤 기도를 드려야 할까요?
많은 우리 순교자들, 박해의 칼날 앞에서도 절대 굴하지 않고 순교의 영예를 입게 해달라고 간절히 기도하셨습니다.
우리 선배 선교사들, 무슨 일이 있더라도 선교사라면 누구나 꿈꾸는, 선교사로서 가장 영광스러운 일인 선교지에 뼈를 묻게 해달라고 간절히 청하셨습니다.
한 환자께서는 자신의 병에 대한 치유보다는 자신이 겪고 있는 이 고통을 통해서 조금이나마 예수님의 고통에 참여할 수 있게 해달라고 간절히 기도하셨습니다.
오늘 저는 이렇게 기도합니다.
“제 문제에 지나치게 집착하기보다 세상을 향해 마음을 열게 도와주십시오. 오늘 제가 처한 상황이 아무리 비참할지라도 다시 한 번 제 자신을 소중히 여기고, 제 삶을 사랑하게 도와주십시오. 제가 왜 살아야하는지 잘 알고 있기에 어떤 상황도 견뎌낼 수 있는 용기를 주십시오.
제 자신을 넘어설 수 있는 힘을 주십시오. 저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 제 부족함과 부끄러움을 연민의 눈으로 바라볼 수 있게, 제 실수를 바라보며 웃을 수 있는 여유를 주십시오.
수시로 제게 다가오는 이 모든 고통들은 저를 보다 강건하게, 그리고 보다 가치 있게 만드는 도구이자 축복임을 알게 하여 주십시오. 고통과 좌절로 인한 패배감으로 과거를 곱씹지 말고 현재에 충실하게 도와주십시오.”
예수의 이름으로
-강영구신부-
당신의 이름은 무엇입니까?
부모님께서 당신을 낳아 이름을 지어주실 때의 그 염원(念願)과 기도(祈禱)를 생각해보신 적이 있습니까?
이름은 단순히 누구를 부르기 위한 방편(方便)이 아닙니다.
당신의 이름 안에는 이름을 지어주신 부모님들의 간절한 기도와 소망,
그리고 당신의 운명과 인격이 담겨있고, 당신이 성취시켜야 할 인생 목표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자신의 이름에 걸맞은 아름다운 인생을 삽니다.
어떤 사람은 도무지 자기 이름에 어울리지 않는 말과 처신과 행동으로 부끄러운 인생을 삽니다.
저는 지금의 제 이름과 저의 삶을 곰곰이 생각해봅니다.
그리고 제 이름에 걸맞은 인생을 살아야겠다고 스스로 다짐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은 대천사 가브리엘이 요셉과 마리아에게 통보한 이름입니다(마태1,21; 루가1,31). ‘예수’란 ‘주님께서 구원하신다.’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당신 이름에 걸맞은 일생을 사셨고,
우리들은 그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자녀가 되었습니다.
‘예수’라는 이름은 예수님의 인격과 권능이 드러나는 자리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예루살렘 성전 ‘아름다운 문’ 곁에서 구걸하는 앉은뱅이를 일으켜 세웁니다. “나는 돈이 없습니다. 그러나 내가 줄 수 있는 것은 이것입니다. 나자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어가시오.”(사도3,6) 그러자 앉은뱅이는 일어나 걷기도 하고 껑충껑충 뛰기도 하며 하느님을 찬양합니다. 베드로는 유대인들의 법정에 끌려가서 이렇게 증언합니다. “사람에게 주신 이름 가운데 우리를 구원할 수 있는 이름은 이 이름 밖에는 없습니다.”(사도4,12)
당신의 매일의 삶이 예수님의 이름을 거룩히 빛내는 삶이 되기를 기도합니다.(一明)
예수님의 이름으로 - 100% 보장
-박상대신부-
예수님의 죽음이 초래할 세상의 기쁨과 제자들의 슬픔이 부활이라는 뜻밖의 사건으로 완전히 뒤바뀌어질 대 역전극이 예고된 가운데, 예수님의 부활이 가져올 제자들의 기쁨은 성령의 강림으로 아무도 빼앗아 갈 수 없는 영원한 기쁨이 될 것이라는 사실이 시사되었다. 성령 하느님은 부활하신 예수님의 영속성을 보장해 주실 분이다. 이는 제자들이 세상 끝 날까지 그리스도의 복음을 선포하는 사명에 성령께서 보호자로서, 그리고 진리를 일깨워주시는 자로서 함께 해 주실 것이기 때문이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청함’과 ‘얻음’에 대하여 하신 말씀으로 시작된다. 청함과 얻음에 대한 말씀은 2차 고별사 중에 이미 한 번 있었다. 처음은 예수님께서 포도나무와 가지의 비유를 마무리하시던 즈음에 당신의 이름으로 아버지께 청하는 것은 무엇이든 다 들어주신다고 하신 말씀이다.(15,16) 정말 청하는 것이 무엇이든 예수님의 이름을 통하면 간청하면 다 받아들여지는 것인가? 딱 잘라 말하면 꼭 그렇지는 않다. 청하는 대로 들어주시는 데는 나름대로 조건이 있다. 그 조건은 바로 세상에 나가 섞지 않고 영원히 남을 열매를 맺는 것, 즉 “서로 사랑하라.”는 새 계명을 말로서가 아니라 행동으로 지키는 것이며(13,34; 15,16-17), 동시에 그 행동으로 예수님의 말씀 안에 머무르는 것이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아버지께 청하는 것이 무엇이든 다 수용되는 조건은 곧 구체적인 ‘사랑’과 ‘믿음’에 근거하는 것이며, 나아가 ‘아버지로부터 오신 예수님께서 다시 아버지께로 돌아가시는 사실’에 근거한다. 이는 곧 예수님을 통하여 세상과 하느님 아버지 사이에 직항로(直航路)가 개설된다는 말이다. 구체적으로 본다면, 예수님을 통하여 어떤 길이 마련된 것이 아니라, 예수님 스스로가 바로 그 직항로의 길이신 것이다. 물론 예수님께서 가시적으로는 이 세상을 떠나신다. 그러나 세상의 배경에 비가시적으로 머물러 계신다. 하느님 아버지와 성령 하느님, 그리고 아들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세상은 더욱 더 밝아졌고 따뜻하게 된다. 그것은 예수님의 말씀이 더 이상 질문을 필요로 하지 않을 만큼 명확해졌으며, 보호자이시고 진리이신 성령의 약속도 두터워졌기 때문이다.
이제 하느님의 충만한 기쁨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제자들이 구하는 모든 것 안에 경험될 수 있는 그 무엇으로 보장되었다. ‘예수님의 이름’은 세상의 그 무엇보다도 높은 이름이 되었다. 이 ‘이름’을 통하여 하느님은 자신을 세상에 계시하셨으며, 세상을 위하여 자신을 내어놓으셨다. 따라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구하는 모든 것은 하느님에 의해 주어질 것이며, 이것이 하느님께는 기쁨과 영광이 되며, 우리에게는 하느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확신이 된다. 그 안에서 우리의 기쁨도 충만히 성취될 것이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한다는 것은 하느님께서 아들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 인간성(人間性)을 수용하셨음을 의미하는 것이며, 하느님께서 우리 인간 안에 자신의 거처(居處)를 마련하셨음을 의미한다. 이는 다름 아닌 성령께서 우리 안에 자신의 궁전을 마련하셨음을 뜻한다. 이 모든 것은 하느님의 예수님 안에 이루신 육화(肉化)로 가능하게 된 것이다. 하느님은 지속적으로 우리 안에서 자신의 얼굴을 가지려 하신다. 그것은 바로 우리의 생명이 그분 자체가 되시는 것과 같다. 이제 인간의 모든 정신과 영혼과 육체의 원동력은 하느님 성령이시다. 우리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는 모든 것이 바로 이러한 신비스러운 과정을 수행하는 것이며, 나아가 성령 안에서 새로 태어남을 의미하는 것이다.
아버지께 간다(요한 16, 23-28)
-유광수 신부-
"나는 아버지에게서 나와 세상에 왔다가,
다시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 간다."
* * * * * * *
오늘 복음에서 "나는 아버지에게서 나와 세상에 왔다가, 다시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 간다."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은 당신이 어디에서 왔고 또 어디로 가시는 지를 분명히 알고 생활하셨다는 것을 말한다.
이 짧은 말씀 속에 예수님의 일생이 담겨져 있고 예수님이 걸어가신 길이 있다. 예수님이 걸어가신 길은 곧 우리의 삶이어야 한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신 것은 당신 자신을 위해서 오신 것이 아니라 우리들을 위해서 오셨고 아버지께 가신 것도 우리를 아버지께 데려가기 위해 가신 것이기 때문이다.
아버지께로부터 왔다가 아버지께로 가는 것, 그것이 곧 우리 삶의 방향이어야 하고 목표이어야 한다. 그것은 알파요 오메가이시며 시작이요, 마침이신 예수님 안에서 걸을 때만이 그 길을 걸을 수 있다. 따라서 우리는 매일 그냥 살아가는 삶이 아니라 아버지께로 한 걸음씩 다가 가는 삶이어야 하며 그렇게 함으로서 우리 자신을 완성시켜 나가야 한다. 완성되어져야 할 우리의 모습은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마태 5, 48)라고 말씀하신 대로 아버지를 닮아 완전한 사람이 되어 가는 것이다.
만물유도(萬物有道)라는 말이 있다. 즉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다 길이 있다."는 뜻이다. 어디에서 왔고 또 어디로 가야하는지 각자 그 길이 있다는 것이다. 길을 "道"라고 하고 그 길을 찾아 나서는 사람을 가르쳐 구도자(求道者)라고 한다. 또 그 길을 찾아 나아가려고 노력하는 사람을 수도자(修道者)라고 부른다. 그리고 그런 훈련을 닦는 장소를 도장(道場)이라고 부른다. 이런 면에서 우리 모두는 길을 찾고 있는 구도자요,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완전한 사람이 되기 위해 완덕을 닦아야할 수도자이며, 이 세상은 도를 닦는 장소이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그 길을 찾아 나서지 않고 있다. 자신이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 또 생각해 보려고도 하지 않는다. 그래서 세상은 어수선하고 혼란스럽다. 인간이 가야할 길을 가지 않기 때문이다. 각자 자기가 가야할 길을 간다면 이런 어수선함이 없을 것이다. 자동차가 많아도 각자 자기가 가야할 목적지를 향해 달리기 때문에 질서있게 움직이는 것이다. 질서가 무너지면 혼란이 온다. 우왕좌왕 한다.
오늘 날 우리 사회는 길을 잃어버렸다. 아니 길을 잃고 헤메는 사람들이 너무 많다. 그래서 온갖 비리들이 저지러지고 폭력이 난무하고 대형사건들이 많이 일어난다. 길을 가지 않으면 충돌이 일어나고 사고가 나는 법이다. "자아를 잃어버린 현대인"이라는 책이 오래 전에 나왔지만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자아를 잃어버린 사람들이 너무나 많이 있다. 이런 인간에게 길을 찾아 주러 오신 분이 예수님이시다. 그래서 예수님은 "나는 길이다."(요한 14, 6)이라고 말씀하셨고 "나는 세상의 빛이다. 나를 따르는 이는 어둠 속을 걷지 않고 생명의 빛을 얻을 것이다."(요한 8,12)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나는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 것인가? 내 인생의 기원과 목적지를 아는가?
크리스챤은 "나는 아버지에게서 나와 세상에 왔다가, 다시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 간다."고 말씀하신 예수님이 걸어가신 그 길을 걸어가는 사람이다.
그 길은 좁은 길이다. 다른 사람들이 제시해준 길은 많이 있지만 아버지께 가는 길을 제시해주신 분은 오직 한 분 즉 예수님만이 제시해주셨기 때문에 단 하나의 길만이 있을 뿐이다. 그래서 좁은 길이다. 그렇지만 그 길을 우리는 가야 한다. 아버지께 가는 유일한 길이기 때문이다. 선택의 여지가 없는 길이기 때문이다. 이 길이 아닌 다른 길을 갈려고 하면 그마만큼 우리는 헤메일 것이며 아버지께 가는 길로 들어서는 시간이 늦어 질 것이다.
1978년에 많은 사람으로부터 사랑을 받았던 작가 첸타 마우리나가 80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저는 이 작가에 대해서 잘 모르지만 책을 보니까 이 작가는 독자들에게 많은 감명을 주었던 사람이고, 특히 자신의 삶에 갈피를 잡지 못하고 이리 저리 배회하는 사람들에게 감명을 주었던 작가라고 한다. 이 작가는 장애인으로 태어나 삶의 처음부터 휠체어의 신세를 져야만 했고 장애자의 신세와 또 이 때문에 덤으로 겪는 사람들의 불친절과 차가운 시선을 그녀는 자신의 신앙으로 극복한 훌륭한 신앙인이기도 했다고 한다.
이렇게 훌륭한 신앙으로 살았던 작가는 생을 마감하기 직전에 작은 책자를 펴냈다. 그 책의 제목은 <나의 뿌리는 하늘에 있다.>였다. 책의 제목에서 우리는 그녀의 철저한 신앙의 삶을 발견할 수 있다. 실제로 그녀는 자신의 고통스런 삶 전체를 하느님 안에서 이해하려고 했고, 자기 자신의 삶을 하늘에서 뿌리내리게 하여 성장시키려 했다.
"나의 뿌리는 하늘에 있다."는 이 말은 이 세상에 아직 살면서도 세상의 공기로 숨쉬지 아니하고, 세상의 공기와는 전혀 다른 공기로 숨쉬고 살아가는 모습을 가리킨다. 영원의 상태가 아니라 세상의 시간 안에 살면서도, 이 세상의 공기가 아닌, 하느님의 호흡으로 살아가는 사람이 바로 하늘에 뿌리를 내리고 살아가는 사람일 것이다.
그러니까 이 세상에 있으면서도 이 세상에 의해 살아가지 않고 하늘에 의해 살아가는 사람이 하늘에 뿌리를 두고 살아가는 사람이다. 사실 우리 삶이 위에서가 아니라면 우리는 어디에서 밝은 빛을 찾을 수 있겠는가? 우리가 낙담하여 절망에 빠져 있을 때 하늘에서가 아니라면 우리는 그 무엇으로부터 그 어려운 시간을 견디어 낼 수 있겠는가? 삶이 온통 뒤죽박죽 되었을 경우 하느님의 사랑에서가 아니라면 자기 자신에 대한 신뢰를 어디에서 되찾을 수 있겠는가?
첸타 마우리나가 말하는 "하늘에 자기 자신의 뿌리를 내리는 일"은 우리 안에 하나의 법칙을 상기시켜 준다. 그 법칙은 우리의 삶에 새겨져 있는 법칙이다. 즉 우리가 시선을 두는 곳을 향하여 우리는 살아가게 되어 있다는 법칙을 말한다.
아래를 자꾸만 바라보는 사람은 아래로 내려가게 되어 있고 위를 자꾸만 바라보는 사람은 그 위를 향하여 살아가게 되어 있다. 우리의 시선을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 우리의 삶과 그 방향이 달라지는 법이다.
우리 신앙인의 스승이신 예수님이 걸어가신 그 길을 바라보자. 예수님께서 당신의 삶 가운데 항상 시선을 두셨던 곳은 하늘 즉 아버지이셨다. 열 두 제자를 뽑으실 때에 하늘을 향해 기도를 드리시고, 병자에게 도움을 베푸실 때에 하늘을 우러러 보셨고, 당신 수난에 직면하여 올리브 동산에서 하느님께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를 드리셨다. 예수님은 당신 삶의 모든 국면에서 항상 하늘에 시선을 두셨고, 그 하늘의 힘에 의해 살아가셨다. 세상에 살면서도 세상의 힘으로 살지 아니하고 하늘의 힘으로 사셨던 것이다.
이런 예수님의 삶을 우리 자신에게도 적용시킨다면 우리 역시 하느님께 시선을 보다 분명하게 돌리면 돌릴수록 세상 만물을 대하는 태도에 있어 자신감이 넘쳐날 것이다. 하느님께 시선을 떼지 않는 사람은 세상 재화나 권력의 단맛에 넘어가지 않고 그 재화와 권력을 다스릴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이웃을 자신감 있게 대할 수 있다. 그리고 자신이 가장 큰 원수로 생각하는 이웃까지도 용서할 수 있다. 아버지를 향하여 걸어가지 않기 때문에 자기 자신에 대한 용기를 잃는 것이며 세상과 이웃의 도전에 불안해하며, 세상을 다스리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 의해 지배를 받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아버지를 향하여 걸어 보라. 우리의 발걸음에는 힘이 들어가 있고, 어떤 어려움 앞에서도 절망하지 않으며, 늘 희망을 갖고 살아갈 것이다.
<보나와 함께하는 묵상> : † 아픈 만큼 성숙해지는 기쁨의 삶 †
오늘복음은 요한복음이 전하는 그 긴 고별의 장면에서 마지막 부분으로서, 참으로 슬프면서도 장엄한 느낌이 드는 내용들입니다. 우리의 주님은 그 길고 긴 고난의 길을 어버지의 뜻에 따라 감내하면서 이 땅에서 복음을 전햐주시던 예수님께서 이제 본향인 하늘나라로 다시 가십니다. 오늘복음의 끝말은 "나는 아버지께로부터 나와서 세상에 왔다가 이제 세상을 떠나 다시 아버지께 돌아간다." 입니다.
성서에서 보는 예수님은 단한번도 진정한 섬김을 받지 못하신 분이십니다. 가장 높으시고, 가장 귀하시고, 가장 거룩하시고, 가장 성스러운신 그분은 태생부터 가장 천한 공간인 마굿간에서 탄생하신 불행한 분이셨습니다. 또 태어나자마자 세상의 권력자들의 죽임의 대상이 되는 불행한 분이셨습니다. 헤로데 집단의 박해를 피하기 위해 이집트로 도망쳐야 하는 분이셨습니다. 그 이후 30년이라는 침묵의 세월 속에 목수의 아들로서 목공소의 유약냄새를 맞고 하루의 삶을 살아야 하는 가난한 노동자로 사셨습니다. 그 이후 예수님의 때가 되어 공생활을 하시면서도 단한번도 하느님으로서 존경과 믿음을 받지 못한 외로운 분이셨습니다. 심지어 가족들로 부터도 미친사람으로 취급 당할 정도로 그분은 철저히 이 땅의 사람들로 부터 배척당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단한번도 당신 스스로의 섬겨달라고 요구하신 적도 없습니다. 오로지 아버지에 대한 영광을 실현시키려고만 했습니다. 그렇게 고난의 길 33년을 지내오신 예수님은 결국 갈바리아 십자가상에서 참혹한 모습으로, 군인들의 폭력과 군중의 조롱도 모두다 받아들이면서 '아버지께 세상의 죄에 대한 용서'를 청하시고, 하느님의 침묵 앞에 목숨까지 내 놓으시고 맙니다.
가난한 이들의 사표이신 예수님, 죄인들까지도 인간의 존엄성을 인정하시고 바라시이파 집단으로 부터 위협당하는 이들을 보호해 주신 예수님, 유다종교집단의 잔혹한 불의에 맞서 당당하게 질책하시던 예수님. 산헤드린과 로마군정의 폭력과 억압으로 희생당하는 이들의 고통을 대신 해 주시던 예수님, 그리고 어머니를 세상에 의탁시키면서 마지막 효성을 다 하신 예수님..., 세상의 모든 죄를 모두다 한몸에 지고 어바지께 용서를 청하며 목숨까지 바치신 그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영광을 만천하에 알리는 부활의 영광을 드러내시고, 드디어 내일이면 이 세상을 떠나 본향인 하늘나라로 승천하시게 됩니다.
나는 오늘 주님의 마지막 모습을 뵈오면서 진실로 진실로 참회하는 글을 올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참회록입니다.
수없는 날들이 나에게 주어졌지만
이제와 돌아보니 모두 허무함 뿐이라
수많은 재물들 부귀 권세도
어느 것 하나 나에게 행복을 주지 못해
이제와 후회하여 용서 비오니
불쌍한 이 몸을 주여 용서하소서
수없는 많은 사람 만나고 헤어졌지만
아무도 나에게 영원한 만족주지 못해
이 한몸 위하여 젊음 바쳐도
어느 것 하나 나에게 참 기쁨 주지 못해
이제야 돌아와 엎드리오니
부끄런 이 죄인 주여 용서하소서
주앞에 엎드려 나의 인생길 돌아보니
눈물만 하염없이 나의 무릎을 적시네
불쌍한 이웃들 가난한 이들
아무리 그들 보아도 내 것만 찾은 인생
주님께 엎드려 용서비오니
영, 죽을 이 영혼 주여 용서하소서.......아멘
이런 죄인에게 어제복음에서 주님은 기쁨의 복음, 한없는 사랑의 약속을 주셨습니다.
“지금은 너희도 근심에 싸여 있지만 내가 다시 너희와 만나게 될 때에는 너희의 마음은 기쁨에 넘칠 것이며 그 기쁨은 아무도 빼앗아 가지 못할 것이다.”(요한 16,20-23ㄱ)...아멘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많은 것을 추구합니다. 그중에서도 진정으로 행복해지기 원합니다. 나날이 행복으로 이루어지고 기쁜 날들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혹 지금은 아니더라도 언젠가는 우리가 소망하는 기쁨과 행복한 날이 있기를 기대하며 지금의 고통을 감내하며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또 나 아닌 누군가를 위해서 현재의 나 자신을 희생하며 살아가는 기쁨과 행복도 있습니다.
주님은 떠나시기 전에 우리에게 축복의 말씀을 주셨습니다. "내가 다시 너희와 만나게 될 때에는 너희의 마음은 기쁨에 넘칠 것이며 그 기쁨은 아무도 빼앗아 가지 못할 것이다."입니다. 이 복음은 우리에게 주신 가장 위대한 복음 중의 하나로서, 이 위로와 희망의 메시지는 바로 우리기 장차 영원히 받을 행복이며 기쁨인 것입니다. 다시말하면 잠시 찾아왔다 사라져버리는 기쁨이나 행복이 아니라, 영원히 간직하게 될 기쁨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 기쁨의 약속으로 인해 어떠한 고난의 환경도 받아들일 수 있는 것입니다.
재회(再會)의 기쁨, 이 기쁨은 예수님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자신의 희생을 감내하면서도 끝까지 그 길을 걷는 이에게 주어지는 하느님의 선물입니다. 더욱이 믿음으로 얻게 되는 하느님의 성령의 은총은 그 믿음의 길을 더욱 용감하게 계속해서 걸어가게 하는 힘이 되어 줄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이 시간을 살아가면서 어떤 형태로든지 재회의 기쁨을 간직하고 살아가고 있을 것입니다. 반가운 사람, 소중한 사람, 사랑하는 사람을 기다리며 사는 사람의 현재는 그 만남에 대한 기대와 희망으로 가득할 것입니다. 더욱이 그 대상이 나를 알아주고 인정해주고 위로해 줄 사람이면 그 때를 기다리는 마음은 더없이 간절할 것입니다. 그 때를 기다리는 희망과 기쁨은 현재의 어떠한 고통스러움도 이겨내게 하는 힘이 되는 것입니다. 사도 바오로가 전도 여행 중에 가지게 된 그 확신처럼 자신의 믿음에 대한 확신은 어떠한 고난의 상황도 이겨내게 합니다. 복음 말씀에 따라 살며 일상 중에 만나게 되는 하느님의 현존 체험이 우리에게 주는 선물은 기쁨입니다.
그러면 그 기쁨으로 가는 우리의 신앙 길은 어떤 것인지 David Hawkins의 <의식혁명 pp.67-68)에서 묵상해 보겠습니다.
기쁨으로 가는 열쇠는, 자신을 포함한 모든 생명 있는 것들에게
조건 없이 친절을 베풀고 자비심을 갖는 데에 있다.
이러한 자비심이 없다면 인간의 어떠한 노력도 아무런 의미가 없다.
자신과 다른 사람들을 향한 자비심 없이는 어떠한 환자도 진실로,
또 근본적으로 치유될 수 없다는 바로 이 점에서,
개인의 치유는 나아가서는 곧 사회의 건강과 통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니 '치유받은 사람'이 곧 '치유하는 사람'일 수도 있는 것이다.
기쁨으로 가는 열쇠는 문이시고, 생명이신 그리스도입니다.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이 그 분이 누구이신가를 세상에 알릴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주신 성소를 따라서 오늘도 살아가는 용기가 가득하시길 빕니다.
그렇습니다. 기쁨으로 가는 열쇠는 문에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요한복음 10장에서 '당신이 바로 문'이라고 했습니다. 열쇠는 문에 달려 있습니다. 집으로 들어가려면 가장 먼저 문을 통과하야 합니다. 그런데 그 문에는 열쇠가 있습니다. 따라서 그 문을 통과하려는 키가 있어야 합니다. 내가 키를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두리리기만 하면 됩니다. 그러면 청함을 듣고, 함당한 자이면 주인이 문을 열어주시겠다는 뜻입니다. 주님은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정말 잘 들어 두어라. 나는 문이다. 누구든지 나를 거쳐서 들어오면 안전할 뿐더러 마음대로 드나들며 좋은 풀을 먹을 수 있다. 도둑은 다만 양을 훔쳐다가 죽여서 없애려고 오지만 나는 양들이 생명을 얻고 더 얻어 풍성하게 하려고 왔다.”
오늘 복음은 우리가 신앙생활을 함에 있어서 최종적으로 추구하고자 하는 하느님 체험, 곧 재회의 기쁨을 누리기 위해서는 자신의 일상 안에서 끊임없이 하느님 말씀에 따라 자기부정과 자기희생의 길(십자가의 길)을 걸어...주님의 문전에 와서 "구하여야 한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우리 일상도 마찬가지입니다. 누군가가를 찾아가서 부탁하려 한다면, 그 집 문에 가서 먼저 두드려야 합니다. 문을 두드려야지만 집안에 있는 주인이 누구인가하고 확인하고는 문을 열어줄 것입니다. 문을 두드리는 것이 바로 "구하는 행위, 청하는 행위"일 것입니다. 문제는 '그 문을 두드릴만한 자격이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그 문을 두드릴 수 있는 자의 자격과 문을 두드리는 방법을 설명하고 계십니다.
오늘 복음에서 "아직까지 그대들이 아무 것도 내 이름으로 청하지 않았습니다. 청하시오, 받을 것입니다."(요한 16장24절)라고 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4장에서도 예수께서는 필립보에게 이렇게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청하면 이루어 주겠습니다"(요한14,14).
이 복음에서 묵상할 주제는 "청함"과 "내이름" 입니다.
우선 청한다는 것이 무슨 뜻이며, 청하는 자의 자격은 무엇인지...를 묵상해 보겠습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청함의 자격은 예수님의 계명을 지키는 자입니다. 아무나 청한다고 문을 열어주지 않겠다고 이미 "양이 드나드는 문"이라는 비유 말씀에서 우리에게 명확히 해 주셨습니다.
오늘복음의 "청함"에 대한 말씀은 고별사 중, "포도나무와 가지의 비유"를 마무리하시던 즈음에 "당신의 이름으로 아버지께 청하는 것은 무엇이든 다 들어주신다"(15,16)고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그러면 여기서 "누구든지와 무엇이든지"라는 말이...무엇이든간에 예수의 이름으로 청하면 모두 다 받아들여지는 것으로 오해해서는 안됩니다. 청하는 대로 들어주시는 데는 나름대로 조건이 있습니다. 그 조건은 바로 "세상에 나가 영원히 썩지 않을 열매를 맺는 것", 즉 "서로 사랑하라"는 새계명을 지키는 것입니다.(15,16-17)
예수의 이름으로 아버지께 청하는 것이 무엇이든 다 수용되는 조건은 곧 구체적인 '사랑'과 '믿음'에 근거하는 것이며, 더 구체적으로는 '아버지로부터 오신 예수님께서 다시 아버지께로 돌아가는 것'에 근거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자식을 키우다보면, 애들이“아빠 이거 사줘.” 그리고는 며칠 뒤에 또 “이게 먹고 싶어” 하는 등 끊임없이 졸라대는 아이의 요구를 받습니다. 그 때 한두번 둘어주다가 너무 심하면 부모는 그만 지치고 맙니다. 한없이 예쁘고 귀여운 자녀에게 무엇이든 주어도 아까울 것이 없지만 때론 그것은 좋지 못하다는 것과 좀더 좋은 것을 줄려고 하는 부모의 의지와는 달리 자신이 원하는 것을 달라는 아이의 고집에 판단력이 흐려질 때도 있습니다. 대체로 “안돼”라고 말하면서 아이들에게 “아빠는 무조건 안된다”는 인식을 심어주게 됩니다. 그럴 때 현명한 부모는 자식에게 설명해 주어야 합니다. 무엇은 되고, 무엇은 안되는 것인지를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무엇이든지 다 들어준다는 의미는 '조건이 맞음'을 전제로 한 것입니다. 그런 훈련이 되어 있는 아이들은 다음에 또 어떤 요구가 생기더라도 '이미 안되는 조건'을 알기 때문에 떼를 쓰지 않을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느님은 우리가 떼를 쓴다고 불쌍해서 들어주시는 분은 절대 아닙니다. 서로 충분한 교감이 되어 상호 필요충분조건이 될 때에는 그 청하는 것이 무엇이든지간에 들어주시는 것입니다.
따라서 "청함"에 있어서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상호간의 교감을 통해서 서로의 마음을 들여다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즉 일방통행은 서로를 힘들게 하고 그 의미를 깨닫는 데는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지만 상호 대화나 교감을 통해 서로를 잘 알게 된다면 이심전심으로 알게 될 것입니다. 아무리 옳다고 해도 인자함이 없이 너무나 차갑고 냉정하다면 사람들은 옳고 그름을 떠나서 그에게 다가가지 않을 것입니다. 또 자신이 옳다 하더라도 일방적이라면 사람들은 거부감을 느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제자들과 함께 지내면서 많은 이야기를 통해 교감을 나누었고, 그러면서 당신에 대한 신뢰심을 갖도록 인식시켜 주셨습니다. “너희는 이미 나를 사랑하고 또 내가 아버지께로부터 왔다는 것을 믿고 있다”라는 예수님의 말씀처럼 이미 예수님과 제자 사이에는 벌써 상호 교감이 형성되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과의 상호교감을 통해 하느님을 볼 수 있도록 이끌으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제자들이 뛰어넘어야 할 마지막 신뢰는 예수님 자신이 죽었다가 다시 부활하리라는 것이었습니다. 마치 아무것도 모르는 자식의 끊임없는 자기 위주의 요구에 당황해하는 부모처럼 예수님도 난감해 했을지도 모르지만 상호 연결된 고리 안에서의 예수님의 말씀은 제자들에게 하나의 신뢰감을 주도록 합니다.
여러분은 이제 주님께 "청하는 자'들이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과연 여러분은 이웃에게 얼마나 신뢰감을 주고 있습니까? 상호교감을 이루고 있습니까? 그럴듯한 언변으로 이웃을 대하지만 사실 그들의 마음속에는 자신만의 이기심으로 꽉차 있고, 또 자신 안에는 나 외에는 이웃에 대한 사랑이 없는 것이 아닐까요?
사랑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언제나 자신의 방식대로만 사랑하려고 하다가 상대가 거부반응을 보이면 ‘저 사람은 내 마음을 몰라’라고 이야기 하지만, 실제로 자신 역시 그의 마음을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자신이 모르는 만큼 언제나 답답하게 마련입니다. 그가 상대의 마음을 잘 안다면 그에 맞추어서 행동하고 말하지 않겠습니까? 그에게 위로의 말이 없어도 어깨를 두드려 주는 것만으로도 상대방의 마음을 이해 한다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결국 좋아했던 것과 사랑했던 것을 혼동하고 마는 경우도 생겨나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느님을 믿고 따른다고 하면서 너무나 자기 위주의 삶에 하느님을 불러들임으로써 가끔은 하느님이 자신에게 너무 관심이 없거나 혹시 하느님이 부재중이 아닐까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내가 하느님께 무리한 부탁을 한 것도 아닌데, 나라면 들어주겠다고 여기면서 하느님을 옹졸한 분으로 몰아세울 수도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나를 통해서 구하는 것이면 무엇이든지 들어주시겠다고 하십니다. 즉 그 말씀은 이미 나와 함께 생활하면서 내 뜻을 깨달은 바대로 하느님 아버지께 구하면 무엇이든지 이루게 될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우리 다시 한번 마음을 통해 내가 원하는 것과 하느님이 주시고자 하는 것, 그리고 이웃이 원하는 것을 먼저 들여다보고 내가 줄 것과 내가 구할 것을 결정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두번째 "청함'의 방법으로 주님은 "내 이름'으로 라고 분명히 못을 박았습니다.
우리가 청할 때 그 분의 이름으로 청한다는 것이 무슨 뜻일까?...하고 잠시 생각해 봅니다. 우리의 일상생활에서도 이름은 매우 소중한 것입니다. 우리가 부모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는 것은 곧 부모님을 욕되게 하는 것입니다. 부모님의 이름을 드높이는 행위를 했으면 그것은 곧 부모님을 드높인 것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로서, 그리스도인으로서 올바르게 살면, 그러한 우리를 통하여 하느님께서 영광을 받으시고, 그리스도께서 찬미를 받으시게 되지만, 그렇지 못하면 하느님을 욕되게 하고, 그리스도와 그 공동체(교회)를 욕되게 할 수 있습니다. 이름에는 그 이름을 가지고 있는 사람의 뜻과 성품, 인격이 반영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여기서 "주님의 이름으로" 청하는 것은 곧 그 분의 인격으로 대표되는 그 분의 본성, 그분의 뜻(意志)을 생각하고 그 뜻에 맞추어 청한다는 의미가 담겨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아무 생각 없이 무턱대고 분별없는 욕심을 충족시키기 위하여 그 무엇을 청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 그 분의 뜻을 헤아리며 살아가는 성숙한 신앙인(信仰人)의 태도(態度)라고 하겠습니다. 왜냐하면 그분은 그분의 본성(本性), 그분의 뜻(意志)에 스스로 거스르며 일을 하실 수 없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마치 마술사에게 기대하는 것과 같은 일을 거지고, 그분의 이름으로 그분께 청해서는 안됩니다. 자기 사리사욕에 어두워서 욕망을 채우는 도구로 그분의 이름을 사용하면 안됩니다. 우리가 그분의 이름으로 청해야 하는 것은 그분의 뜻과 공동체의 공동선(共同善)을 이루는 목적으로 그분의 이름을 사용해야 합니다.
우리가 주님의 계명에 따라 온마음을 다하여 성실하고 진실하게 하느님을 뜻(願意)에 따라 살아간다면, 그리고 그런 마음가짐으로 그 분이 원하는 것을 분별(分別)하고 식별(識別)해 내어 청한다면, 그 때 그분은 흔쾌히 그분의 이름으로 청하는 것을 들어주실 것입니다. 우리는 다만, 기도할 때 자신의 아집(我執)의 굴레에서 벗어나서, 마음을 활짝 열고 선의(善意)를 가지고 아버지(하느님)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도록 기도해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