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시를 보는 눈 2 / 이종수 시인
시는 우연한 발견으로 시작되기도 하지만 그 발견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해준다. 시는 새로운 종류의 생명체인 셈이다. 살아서 자신의 이야기를 해달라고 하는 낱말이거나 이미지, 리듬이기도 하다. 정신은 그 부분들 모두가 함께 움직일 때 그 속에 있는 생명이라고 했다. 우리가 시를 읽을 때 낱말이나 이미지나 리듬들이 뛰어올라 살지 못한다면 그 생명체는 상한 것이고 그 정신은 병든 것(테드 휴즈)이라고 했다. 마치 각각이 눈과 귀와 혀를, 혹은 귀와 손가락과 움직일 수 있는 몸체를 갖고 있기라도 한 것처럼 동시에 여러 개의 감각에 속하는 것이라고 했다.
쓰고자 하는 것을 마음 속으로 글려보라, 그것을 바라보며 그것과 더불어 살아보라. 바라보고 만지고 냄새를 맡고 귀 기울여 보고, 스스로 그것의 속으로 스며들면 새로운 발견을 하게 될 것이다.
나는 상상한다, 이 한 밤의 순간의 숲을.
무엇인가가 살아 있다
시계의 고독 곁에서
그리고 내 손가락이 움직이고 있는 이 텅 빈 백지 곁에서.
창 밖에는 어떠한 별도 보이지 않는다
한결 가까운 무엇인가가
어둠 속 더욱 깊은 곳에서
고독 속으로 들어오고 있다.
차갑게, 어둠 속의 눈발처럼 섬세하게,
여우의 코가 스친다, 가지를, 잎새를.
두 눈이 하나의 동작을 돕는다, 지금
지금, 지금, 지금
나무 사이 눈 속에 깨끗한 자국을 찍으며.
그리고 조심스레 개간지를 대담하게 가로질러 온
절름거리는 그림자가
그루터기 곁에 움푹 들어간 곳에서
꾸물거린다. 하나의 눈
넓어지며 깊어지는 녹색,
번쩍거리며, 집중하여,
자신의 과업을 완수하며
그때, 갑작스레 코를 찌르는 악취가 나고
여우는 머리의 어두운 구멍 속으로 들어온다.
창에는 여전히 별이 없다, 시계가 째깍거린다,
백지는 채워졌다.
- 테드 휴즈, <생각 속의 여우>
여기서 “째깍” 은 소리만을 줄 뿐만이 아니라 혀로 “째깍”이라고 발음할 때와 같은 날카로운 동작에 대한 개념을 주기도 하고, 작은 나뭇가지처럼 가볍고도 부서지기 쉬운 어떤 물체에 대한 느낌도 준다고 했다. 시에 몰입하게 하는 상상 속의 여우가 금방이라도 살아나올 듯한 느낌을 주는 것처럼 자기가 새롭게 쓰기 나름인 것이다. 여우의 동작 하나하나, 미세한 떨림을 이야기하지 않고도 어둠 속에서 나와 시인의 머리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여우를 만나게 되는 것이다.
새하얀 눈밭을 잇던
새의 발자국 급히 끊겼다
새는 전후좌우
어디로 마음을 낮추고 갔나
오도 가도 못하는 마음은 걸어서
얼룩만을 남겼으니
발자국도 화가 나면 자기가 끌고 온 삶을
허공 속에 꽁꽁 처박아버린다
- 이안, <성난 발자국>
골목길에서 만나든 처음 밟아보는 눈밭에서 만나든 새 발자국에서 시작된 시인의 물음을 보라. 왜 발자국은 자신이 끌고 온 삶을 허공에 처박아 버릴 만큼 화가 난 것일까? 오도 가도 못하는 마음, 얼룩을 지나 허공까지 생각하면 매 순간이 긴장이자 여백이다. 저 발자국이 새의 발자국이 아니라 내 발자국인 것처럼 몸은 없고 발자국만 남긴 상황을 떠올려 보라. 얼룩만 남기고 떠나버린 또 다른 삶을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너의 삶이 아름다워도 발자국과 흔적, 얼룩으로 남는다면 어쩔 것인가, 하고 묻는 것 같기도 하다.
시인은 또 묻다가 다시 호통을 친다.
식전 산책 마치고 돌아오다가
칡잎과 찔레 가지에 친 거미줄을 보았는데요
그게 참 예술입디다
들고 있던 칡꽃 하나
아나 받아라, 향(香)이 죽인다
던져주었더니만
칡잎 뒤에 숨어 있던 쥔 양반
조르륵 내려와 보곤 다짜고짜
이런 시벌헐, 시벌헐
둘레를 단박에 오려내어
톡!
떨어뜨리고는 제 왔던 자리로 식식
돌아가는 것이었습니다
식전 댓바람에 꽃놀음이 다 무어야?
일생일대 가장 큰 모욕을 당한 자의 표정으로
저의 얼굴을 동그랗게 오려내어
바닥에 내동댕이치고는
퉤에!
끈적한 침을 뱉어놓는 것이었습니다
- 이안, <치워라, 꽃!>
식전 댓바람부터 무슨 꽃놀음이냐고 제 얼굴을 댕강 오려내고 내동댕이치는 거미는 ‘성난 발자국’을 떠올리게 한다. 식전 댓바람부터 꽃 가지고 장난하는 이에게 보란 듯이 퉤에! 하고 침을 뱉어놓는 뱃심이 우리의 정신을 번쩍 들게 한다. 어려운 시로 읽힐 수 있지만 읽고 또 읽어보면 자신의 내면에서 꿈틀대던 물음이자 내지른 탄성이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내 친구 중의 한 놈은 자동차 사고로 뻗었다
또 다른 놈은 빚쟁이에게 당했다
목숨이란 마지막의 것
잘해야 본전인 것
나는 빚쟁이에게 불어 가는
내 살덩이를 떼어 줄 수는 없다
도마뱀을 보라
그 놈은 벌써 목숨이 거래의 대상이라는
절대불변의 진리를 알고 있는 것이다
그날 밤 내 손을 빠져나간 놈의 칼자국이
도마뱀의 꼬리 모양을 하고 있다
가끔 가렵다
여차하면 도마뱀의 꼬리는 떼어 버릴 수가 있지만
이것을 어찌한다?
마음이 켕기는 날이면 가끔
쥐고 있는 주먹 속에서 파닥거리는
이놈이 나는 미꾸라지가 빠져나가듯
사라지는 것을 보고 싶다
그놈이 미수금未收金한 나의 인생을
잔고 0에 저축하고 싶다
- 최종천, <도마뱀의 꼬리>
식전 댓바람의 거미가 그렇듯 도마뱀의 꼬리에서 시작한 잔고 0의 통장 이야기는 시큰하다. 마지막이자 잘해야 본전이라는 소리에 웃음이 나오다가 목숨이 거래의 대상이라는 것을 벌써 알고 있는 도마뱀의 꼬리에서 ‘이것’은 목숨이자 자신의 영혼이 들고 나는 ‘0’의 의미라는 것을 거듭 밝히고 있는 듯 보인다.
어제 해지한 통장의 잔액은 0이다
0은 1이 아니다
존재가 발아하는 근원이며
존재가 돌아가는 궁극이다
그것은 땅의 본질이다
탄생과 죽음이 0에서 만난다
나의 본질과 나의 근원에 대하여
다른 무엇도 아닌 0에게 물어보자
0에서는 빛과 어둠이 솟아난다
모든 것의 시작이자 종점인 0
0은 거름이 되는 것만을 받아들인다
낙타가 통과해야 할 바늘구멍인 0
무덤이며 자궁인 0
나는 성녀보다 창녀를 더 사랑한다
성녀를 데리고 사는 사내는 고자일 것이다
무에서 유를 창조할 수는 없다
0은 무가 아닌 근원이다
우리는 자궁에서
시간을 길어올릴 수밖에 없는
인간이다
- 최종천, <0>
그런데 흔해빠진 그리움 타령을 하고 있는 시를 보면 지나친 엄살과 과욕으로 보인다. 그저 흥만 남아서 시인 척하고 있는 듯한 시. 읽어내면서 자신의 근원과 궁극을 생각하게 하는 ‘0’의 발견 같은 것이 있어야 하는데 다들 거쳐간 자리에 앉아 자동기술적으로 읊고 있는 것은 시의 직무유기처럼 보인다.
아침에 오는 새는
배고파 울고
저녁에 우는 새는 님 그리워
운다는데
나는
배고프지도 않고
그리워 할 님
하나도 없어도
웬일로
종일토록
눈물이 나노
- 정해룡, <그리움>
그리움의 실체를 밝혀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저 거미일 뿐인 거미가 아니라 자신과 대화를 나누듯 끈적끈적하면서도 이야기가 있는 시를 써야 한다.
거미가
잠자리를 먹고 있다
낮에 똥구멍에서 뽑은 실로
돌돌 말아 놓은 잠자리를
해질녘 맛있게 먹고 있다
잠자리는
눈을 휘둥그레 뜨고 있다
-저런!
자기 집에 놀러 온 친구를 먹다니
- 오순택, <저녁 식사>
동시풍으로 썼을 법한 “저런!”에 담긴 뜻은 충분히 알겠지만 자기 집에 놀러온 친구를 먹다니, 가 아니라 자기 늪에 빠진 시를 늘어놓다니! 로 들린다.
거미가 허공을 짚고 내려온다
걸으면 걷는 대로 길이 된다
허나 헛발질 다음에야 길을 열어주는
공중의 길, 아슬아슬하게 늘려간다
한 사내가 가느다란 줄을 타고 내려간 뒤
그 사내는 다른 사람에 의해 끌려 올라와야 했다
목격자에 의하면 사내는
거미줄에 걸린 끼니처럼 옥탑 밑에 떠 있었다
곤충의 마지막 날갯짓이 그물에 걸려 멈춰 있듯
사내의 맨 나중 생이 공중에 늘어져 있었다
그 사내의 눈은 양조장 사택을 겨누고 있었는데
금방이라도 당겨질 기세였다
유서의 첫 문장을 차지했던 주인공은
사흘 만에 유령거미같이 모습을 드러냈다
양조장 뜰에 남편을 묻겠다던 그 사내의 아내는
일주일이 넘어서야 장례를 치렀고
어디론가 떠났다 하는데 소문만 무성했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아이들은
그 사내의 집을 거미집이라 불렀다
거미는 스스로 제 목에 줄을 감지 않는다
- 박성우, <거미>
‘걸으면 걷는 대로 길이 된다’는 말은 단순하면서도 거미를 지켜본 전 생애를 담은 말처럼 들린다. 누군가의 인생을 지켜본 이야기와 함께 단칼에 댕강 잘라버리는 이안 시의 거미처럼 ‘스스로 제 목에 줄을 감지 않는’ 새로운 거미의 발견이 시를 읽는 눈을 뜨이게 하고 시를 쓰는 긴장감을 새롭게 해준다.
바다가 쌓아 논
수만 권의 책,
파도가 달려와
책갈피를 넘기면
갈매기가 끼륵끼륵
읽는다
- 오순택, <채석강>
흔히 시의 소재가 되는 채석강을 놓고도 대조를 이루는 시를 들어본다. 닳고 닳아서 너덜너덜해진 듯한, 이름뿐인 채석강, ‘갈매기가 끼륵끼륵/읽는다’로 마무리한 시에서 단순대입 이외에 어떤 이야기도 읽어낼 수 없다. 너무 짧은 시의 매력에 스스로 입단속을 한 것은 아닌지 거기까지가 시라고 말하려는 의도적인 것으로밖에 읽히지 않는다. 그만큼 수많은 이가 다녀가면서 그곳만이 말해줄 수 있는 낯설고도 새롭게 읽히는 깊은 맛을 보여주지 못하는 때가 많다.
채석강 암벽 한구석에
종석♡진영 왔다 간다
비뚤비뚤 새겨져 있다
옳다 눈이 참 밝구나
만 권의 서책이라 할지라도 이 한 문장이면 족하다
사내가 맥가이버칼 끝으로 글자를 새기는 동안
그녀의 두 눈엔 바다가 가득 넘쳐났으리라
왔다 갔다는 것
자명한 것이 이밖에 더 있을까
한 생애 요약하면 이 한 문장이다
설령 그것이 마지막 묘비명이라 할지라도
사랑하였으므로
이미 그 생애는 명편인 것이다
- 복효근, <명편名篇>
한 문장에 비하면 이것도 너무 긴 듯하지만 이모티콘 문자를 사이에 둔 두 사랑하는 남녀를 떠올리는 시는 마치 바닷가 모래밭에 썼다는 “00아, 허벌나게 사랑한다” 는 낙서를 보는 듯하다. 그것을 가늘고 길게 빼면 무엇하리, 딱 그 말이면 괜찮을 것을, 하면서 만 권의 책을 생각하게 하는 역발상이 좋다.
변산반도를 읽고 싶을 때가 있다
격포로 가는 길의 책갈피를 열어볼 때가 있다
뽕짝 메들리 왁자한 리어카에 기대어
서산서 온 노파는
고동 살을 받아먹으며 시부렁거렸다
앞 절만 부르소 앞 절만 부르소
청 좋은 내 아들 부르게 뒷 절은 냉개두소
맥없이 부러진 이쑤시개를 주워들고
소금 한 주먹 삼키듯
개심사 명부전 주춧돌이 실하다고 했다
페이지가 낱낱이 암전인 바위를 옆으로 걸어가던
어린 게가
없는 강을 비추는 낮달의 이마에 손을 얹으면
황도십이궁 들고 나는
그리움이 칼 맞은 자리처럼 읽힐 때가 있다
- 조정, <채석강>
만권의 책을 읽어 보려다가 ‘그리움이 칼 맞은 자리’를 발견한 시인의 말은 계속해서 그 곳에 가면 그저 풍경에만 취하지 말고 그곳이 건네는 밀서니 비책 같은 것을 찾아야 한다고 말하는 듯하다.
민박집 바람벽에 기대앉아 잠 오지 않는다
밤마다 파도 소리가 자꾸 등 떠밀기 때문이다
무너진 힘으로 이는 파도 소리는
넘겨도 넘겨도 다음 페이지가 나오지 않는다
아, 너라는 책
깜깜한 갈기의 이 무진장한 그리움
- 문인수, <바다책, 다시 채석강>
무진장한 그리움은 배워도 배워도 깨우치기 어려운 것이라는 것을 말하려는 것일까, 정말 밤새우면서 만 권의 책과 파도 소리 사이에서 헤맨 느낌이 그대로 전달된다. 이렇듯 곳곳의 장소 또한 어떤 책을 대하고 있는 것처럼 발견과 배움의 소리로 가득 차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