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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득 돌아본 ‘그때 그곳’] 명동 오디오숍
서울 용산전자랜드 2층에 위치한 오디오매장 마이웨이에서 한 고객이 오디오를 사기 위해 주인과 얘기를 나누고 있다. 진공관 앰프가 즐비한 이곳은 오디오 마니아들의 아날로그와 빈티지 기기에 대한 향수를 자극하는 공간이다.
살아오면서 무엇에 열광해 보았던가. 열광의 긴 밤을 지새운 새벽녘, 유령 같은 몰골로 거울을 보며 ‘으허허허’ 자조의 웃음을 터뜨리던 기억이 있었던가. 있었다면 그것은 무엇일까.
소설인가 영화였나 혹은 그녀에게 쓰는 편지의 시간이었던가. 그런데 인간의 분류 중에는 소리에 사생결단하는 종(種)도 있다. 소리는 명료하게 파악되지 않는 것을 특징으로 한다. 또한 소리는 소리를 담고 있는 음악과도 일정하게 구분되는, 소노리티(sonority)라고 하는 별개의 영역이다.
그 모호함으로 인해 턱없는 신비와 환상이 싹튼다. 신비종자, 환상종자, 이런 종의 기원이 되는 장소가 있었다. 명동이 그곳이다. 신세계 건너편 골목에서 명동성당 앞 라인으로 죽 이어지는, 통상 ‘충무로길’이라고 부르는 곳. 그리고 종로 세운상가, 용산전자랜드 등이 있다. 바로 거기에 은밀하게 위대하게 소리의 신세계가 있었다.
1980년대 중반쯤의 기억이다. 변영일 사장이 경영하던 명동 영일전자 진열창 앞. 나는 언제나 진열창 앞에서만 우두커니 오디오를 구경했다. 오랜 세운상가 키드 생활로 이미 몸이 달아 있었지만 그때 형편으로는 꿈도 꿀 수 없는 고가의 기기들이 쇼윈도를 채우고 있었으니까.
어느 날 변 사장이 문을 열고 안으로 나를 초대했다. “부담 없이 커피 마시고 음악도 들으세요.” 그는 내 이글거리는 눈빛에서 미래의 고객을 읽었으리라.
다른 손님들도 있었다. 대화 내용으로 보아 교수, 의사, 변호사 등인 듯한데 골프 화제가 한창이었다. 골프를 모르기도 하지만 그때 자취생 처지의 내 남루한 운동화, 빨지 못한 티셔츠가 의식돼 잔뜩 주눅이 들었다. 다들 친절했고, 그 대화 속의 음악 상식, 오디오 지식이 내게도 넘쳐나게 있었건만 한 마디도 끼어들지 못했다.
좌중은 아마도 나를 매우 과묵한 청년으로 보았으리라. 그때의 속생각이 지금도 떠오른다. 얼마나 많은 개털 청춘들이 ‘과묵하고 과묵하게’ 눈빛만 이글이글 태우면서 이 명동 거리를 배회하고 있을 건가.
당시 30여 만 원의 출판사 월급을 받던 나에게 몇 백만, 몇 천만 원을 호가하는 기기들은 고통이었다. 뉴욕소리사, 명동오디오, 원형사운드, 우주전자, 은하오디오, 신성전자 등지를 전전하며 과묵한 청년이 했던 고민은 음악과 예술과 문화가 아니라 돈, 돈이었다. ‘돈만 있다면 그저 저놈을 확!’
굶을지언정 절대로 돈을 빌리지 않는 습성을 지녔던 내가 단 한번 금기를 깨고 그때의 여친에게 몇 백만 원을 빌렸던 사연도 ‘저 앰프가 아니면 차라리 죽음을!’이라는 몸살의 결과였다.
오디오는 숙명처럼 바꿈질을 하는 동네다. 1980년대, 날만 새면 출몰하는 하이엔드 명기들을 끝없이 순례했던 내 개인 오디오사는 이렇듯 지지리 궁상의 역사였고 또래의 대다수 젊은 친구들도 다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컴퓨터와 반도체 이전의 최첨단 산업은 소리를 만드는 분야였다. 1920년대 후반, 미국의 웨스턴일렉트릭사에서 진공관을 통한 사운드 시스템을 개발하기 시작한 이래 독일, 영국 등지에서 천재급 엔지니어들이 쏟아져 나왔다.
회로와 부품에서 엄청난 혁신을 보이며 방송 스튜디오, 극장 설비 등을 개발해 나가다가 1950년대에 이르러 가정용 오디오 기기가 출현한다.
집안 거실에 콘서트홀을 꾸밀 수 있다니! 미국, 유럽의 중산층에 오디오는 환상의 대체물이었다. 일본도 일찍이 1960년대부터 뒤를 이었다. 전쟁으로 산산조각 난 이 땅이라고 같은 꿈, 같은 환상을 지닌 사람들이 없었을까.
한국의 오디오는 1960년대 후반부터 세운상가와 명동 일대를 중심으로 ‘전파사’ 명칭을 달고 개막된다. 라디오가 주력기인 가게 수준이었지만 세운상가에서는 미군부대에서 쏟아져 나오는 부품들을 그러모아 뚝딱뚝딱 조립 전축을 만들어 팔기도 했다.
그러나 전축과는 급수가 다른 이른바 ‘꿈의 오디오’는 세운상가표 조립품이나 1970년대 중산층 욕망을 상징했던 인켈 오디오와는 궤를 달리했다. 꿈과 환상을 대변했던 물건 아닌 물건. 그것은 수입 외제 명품 오디오를 뜻한다.
하이엔드! 탄성을 자아내는 최고급 오디오를 일컬어 하이엔드라고 불렀고 그 번쩍번쩍한 하이엔드 예술품이 1980년대 접어들자 오디오숍으로 개명한 상가들에 진열되기 시작한 것이다.
한국은 극성스러운 나라다. 다른 나라에서 볼 수 없는 진풍경이 우리에게 꽤 있다. 물론 오디오도 예외가 아니다. 가령 뉴욕에 가서 골드문트 같은 최상급 앰프를 사려고 해보라. 어디를 가야 할지 막막할 따름이다.
유럽 대도시도 마찬가지고 일본 아키하바라를 돌아다닌들 싸구려 전자기기만 즐비할 뿐이다. 오디오 본고장에서 이른바 하이엔드 명품은 구매 자체부터 쉬운 일이 아니다. 고급 주택가 한 귀퉁이쯤에 갤러리 같은 분위기의 매장을 차려놓고 차와 대화, 음악감상이 어우러지며 여러 날이 걸리는 절차 끝에 구매하는 것이 통례다.
그러나 다이내믹 코리아의 위용이 있다. 전문상가를 가면 잡지에서 눈을 휘둥그레 뜨고 바라보던 명품들이 산처럼 탑처럼 층층이 쌓여 있는 풍경이 한국에서만 벌어졌다. 몇 천만 원짜리 앰프를 당일 뚝딱 구매해 버리는 일도 다반사였다.
그런 풍토가 신기했는지 외국 잡지의 기삿거리가 되기도 했다. 생산지 본바닥에서는 어디서 파는지 알기도 쉽지 않은 하이엔드 고가품이 매장마다 층층이 쌓여 있던 곳이 바로 명동 오디오 거리였다.
그 거리에서 마크 레빈슨, 크렐, 제프 로랜드 등의 브랜드를 찾는다. 탄노이, 골드문트, 자디스 등에 제정신을 못 차린다. 이들 브랜드에 열광하는 이들은 파이오니어, 켄우드, 심지어 매킨토시 앰프를 찾는 사람들과는 급수와 차원이 다르다고 자부했다. 9층 위의 옥상 같이 저 멀리 아득한 경지의 진짜 최상급 앰프, 스피커, 플레이어들이 따로 존재했던 것이다.
세간에 ‘고급 오디오는 집 한 채 값’이라는 신화가 떠돌았다. 그럴 만한 가격대 기기들도 실제로 꽤 있었다. 그래 봤자 음악을 재생해 주는 도구일 뿐인 하이엔드 오디오가 우리나라에서는 최고로 비싼 문화비용을 상징하게 됐다.
오디오는 때로 똥을 만지게 만든다. 생전 사용치 않던 프라이팬과 씨름하는 일도 생겨난다. 집 천장이나 벽에 계란판을 덕지덕지 붙여 놓는 일도 생긴다. 똥의 경우, 과거에 노이즈 잡는 접지법으로 유행했던 비법인데 전선에 철판을 붙여 집마당에 묻는다. 그때 반드시 철판을 똥에 담가야 부식이 잘돼 효과가 좋다는 것이다.
명동 오디오숍에서 만나는 초로의 신사들이 ‘자기 똥이 가장 효과적이다, 아니다. 똥은 다 똑같다’라는 학설을 놓고 논쟁하는 광경을 떠올려 보라. 그 논쟁에서 외교관을 지낸 분의 ‘자기 똥’ 우위론이 대세였는데 지금 생각하면 말도 안 된다. 모래볶기는 스피커 받침 스탠드용인데 나중에 아예 상품으로 볶은 모래가 나와 온 집안 프라이팬을 다 작살냈던 나로서는 허탈한 기분을 감출 수 없었다.
세운상가와 명동 충무로길로 양분됐던 오디오계 지형을 바꾼 것이 1988년에 개장한 용산전자랜드의 출범이다. 수입 오디오 전문상가 전자랜드 2층은 때깔부터 달라서 은은한 할로겐 조명이 분위기를 돋우며 매장의 대형화를 선도했다.
명동에서 아이쇼핑을 하고 비교적 저렴한 세운상가에서 주인과 심리학적 격투를 벌이며 구매하던 온갖 유형의 꾼들이 용산에 죄다 모여들었다. 명동 퇴락의 시작이다. 용산이 대세를 이루면서 세운상가는 갈수록 저가품, 중고품, 빈티지 고물로, 명동은 더욱더 고가품, 하이엔드 신품으로 내용물을 바꿔 나갔다.
그래도 1990년대 10여 년간 한국의 오디오 애호가들은 전 세계 어디도 부럽지 않은 호사를 누릴 수 있었다. 스테레오사운드, 스테레오파일, 월간 오디오 같은 전문잡지에서 보았던 명기를 대부분 실시간으로 만날 수 있었던 것이다.
이제 세계적으로 하이엔드 시장의 99%가 죽었다는 통계가 나와 있다. 그나마 출시되는 최신 개발품들은 상위 1%를 겨냥한 고가품들뿐인데 모두 디자인 경쟁의 산물이라 쳐다보기도 싫다.
영상물이나 IT기기들에 점령당하고 있는 용산은 그래도 여러 집이 버티고 있지만 지금 명동은 원형사운드, 우주전자 단 두 집만 남아 명맥을 잇고 있다.
세태와 관심사가 이동하는 것은 어쩔 수 없다고 여기지만 오디오로 광분하던 시절의 환상과 신비마저 함께 추방되는 것은 아닌지 쓸쓸한 심경이 든다.
지금 나는 14조의 스피커와 그만큼의 앰프를 소유하고 있는데 대학생 아들 녀석은 거들떠보지도 않는다. 더 늙으면 저 스피커 통들을 쪼개 장작으로 써야 할지 모르겠다.
김갑수 시인·문화평론가
70년대 곗돈 타면 장만하고 싶은 물건 1위 ‘별표전축’
■ 국산 전축의 계보
중년 남성의 로망은 멋진 자동차와 오디오다. 명품 자동차는 신모델을 뽑은 뒤 날아갈 듯한 기분을 맛보지만 오디오는 케케묵은 빈티지(옛물건) 탐닉에 빠져야 제격이다.
1970년대 첫 월급을 타서 별표전축을 산 뒤 베토벤의 교향곡이나 이미자·나훈아의 노래를 마르고 닳도록 듣는 직장인들이 많았다. 오디오가 전축으로 불리던 시절이었다. 곗돈을 부어 장만하고 싶은 1호 제품이 별표전축이었다. 1960년대와 1970년대 인기를 끈 천일사의 별표전축은 우리나라 전축의 원조격이다. “우리 기술, 우리 상표, 우리 힘으로 수출하는 별표전축!”이라는 타이틀을 내건 1976년 별표전축 신문광고에서는 현찰가격 16만6500원, 할부가격 18만5000원이라는 가격 정보까지 수록했다.
1960년대 부잣집 거실에서는 으레 번쩍이는 호마이카 장에 진공관으로 된 10W앰프와 8인치의 풀레인지 스피커로 이뤄진 콘솔형 천일전축이 자리 잡고 있었다. 전원을 켜면 진공관에 빨간 불이 서서히 들어왔다. 흑백 TV와 함께 부잣집 거실의 자존심이었다. 하지만 이들 제품이 가장 높은 인기를 누린 곳은 고급 요정이나 술집이었다고 한다.
이에 대응한 성우전자의 독수리표 전축이 있었지만 별표전축의 인기를 따라잡지는 못했다. 별표전축은 태광산업으로 바뀌면서 에로이카, 쾨헬 등의 브랜드로 이어졌지만 결국 과거의 영화는 되찾지 못했다.
1980년대 컴포넌트 오디오 붐이 확산됐다. 인켈 오디오를 소유하는 것은 중산층의 꿈이었다. 태광, 인켈, 롯데 등의 업체가 경쟁했지만 주도권을 잡은 것은 인켈이었다. 어지간한 집에서는 ‘inkel’ 마크를 볼 수 있을 만큼 한 시대를 풍미했다. 오디오 전문 브랜드라는 점 때문에 음질에 대한 기대가 높았다.
인켈의 CS-8000은 외국 오디오에만 선망의 눈길을 보냈던 국내 오디오 팬들에게 국산도 좋은 소리를 들을 수 있다는 희망을 안겨준 제품이었다. 본격 하이파이 오디오 시스템이었다. 국내 최초의 디지털 신시사이저 튜너 TD 1000, 프리앰프 PD1100으로 구성됐다. 최초의 티타늄 제품이었던 인켈 IS 8135T 모델도 직장인들 사이에서 인기를 모았다. 인켈의 기술력을 한 단계 높여준 제품은 SAE였다.
오디오 고수의 길은 대개 국산 오디오나 리시버형 오디오에서 그 물꼬를 튼다. 바꿈질이 계속 이어지면서 하이엔드 기기를 사기 시작하면 1000만 원짜리 스피커를 사는 게 아무렇지도 않게 느껴진다. 1000만 원을 100만 원으로, 500만 원을 50만 원 정도로 느끼는 돈 가치에 대한 착종의 순간이 온다.
오디오 몰입은 나이가 들수록 더욱 깊어지는 불치병이다. 혼자 놀 수 있는 기기라는 점이 매력 포인트다. 투자하고 또 질러도 채워지지 않는 새로운 기기에 대한 욕구가 오디오 열병을 악화시킨다.
Get Ready - Rare Earth
첫댓글 나는 중고 진공관식 앰프로 디스크음악을 들었은데 그 저력이 오늘의 나를 만든것 같습니다.백판 팝송 등등...엘피 앨범이 한500장 되는것 같았는데 몇번이사하고 관리못해 다 없어졌어요.
저처럼 로우 엔드 수준의
음향기기 사용자는 머나먼 이야기네요..ㅎ
라디오로 팝을 듣다가
위에 오빠가 종로에 가서 바이킹이라는
오디오를 사와서 얼마나 좋았던지
그동안 라디오에 의존햇던 음악을
빽판 라이센스 디스크를 구입해서
듣는게 얼마나 좋았던지요
후에 인켈 오디오 비싸게 구입해서
음악을 계속 들었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