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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의 명령을 지키라
전 8:1-8
1 누가 지혜자와 같으며 누가 사물의 이치를 아는 자이냐 사람의 지혜는 그의 얼굴에 광채가 나게 하나니 그의 얼굴의 사나운 것이 변하느니라
2 내가 권하노라 왕의 명령을 지키라 이미 하나님을 가리켜 맹세하였음이니라
3 왕 앞에서 물러가기를 급하게 하지 말며 악한 것을 일삼지 말라 왕은 자기가 하고자 하는 것을 다 행함이니라
4 왕의 말은 권능이 있나니 누가 그에게 이르기를 왕께서 무엇을 하시나이까 할 수 있으랴
5 명령을 지키는 자는 불행을 알지 못하리라 지혜자의 마음은 때와 판단을 분변하나니
6 무슨 일에든지 때와 판단이 있으므로 사람에게 임하는 화가 심함이니라
7 사람이 장래 일을 알지 못하나니 장래 일을 가르칠 자가 누구이랴
8 바람을 주장하여 바람을 움직이게 할 사람도 없고 죽는 날을 주장할 사람도 없으며 전쟁할 때를 모면할 사람도 없으니 악이 그의 주민들을 건져낼 수는 없느니라
전 8:1-8 / 과연 지혜로운 사람은 어떤 사람이며 세상 이치를 깨달아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은 누구인가? 지혜는 사람의 얼굴을 빛나게 하며 굳어진 표정도 풀어지게 한다. 2) [왕과 신하] 하나님 앞에서 한 서약대로 왕의 명령을 지켜라. 3) 비록 너의 임무가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거역하지 말아라. 왕을 불쾌하게 하는 일이거든 고집하지 말고 왕 앞에서 물러서라. 왕이란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은 무엇이든지 하는 사람이다. 4) 왕의 명령은 큰 권력을 뒤에 두고 있으므로 그 명령에 맞서거나 시비를 가려 볼 수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 5) 왕의 명령에 순순히 따르는 사람은 벌을 받지 않으리니 슬기로운 사람은 말하고 행동할 때와 그 방법을 가릴 줄 안다. 6) 그렇다, 세상만사는 하나님이 정해 놓으신 때가 있다. 그러나 그 가운데에는 모르는 시기도 있어서 인간에게 무거운 짐이 된다. 7) 그러므로 사람들은 언제 불운이 닥쳐올지 몰라 불안에 떨면서 산다. 과연 그 불운을 미리 알려 줄 수 있는 사람이 누가 있으랴? 8) 인간은 바람을 붙잡아 둘 수 없듯이 자기의 죽는 날을 미룰 수 없다. 군인이 전쟁할 때에 혼자만 빠져 나갈 수 없듯이 죄가 있는 사람은 자신의 그 죄과에서 벗어날 수 없다.
지혜에는 그 사람의 얼굴에 광채가 나게 할 만큼 변화의 능력이 있습니다. 전도자는 왕의 명령을 지켜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권세를 허락하셨기 때문입니다. 또한 인간의 지혜는 유한하기에 사람이 장래 일을 알지 못한다고 가르칩니다. 겸손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왕의 명령을 지키라(1-4) 권력은 하나님께서 위임한 것입니다. 이에 전도자는 “왕의 명령을 지키라”고 권면합니다(2). 하나님이 세우신 왕을 통해 결정된 법률을 백성이 준수할 때 세상 질서가 유지되기 때문입니다. 왕 앞에 설 때 조심할 태도가 있습니다. 첫째, 왕 앞에서 서둘러 물러 나오지 말아야 합니다. 이는 왕의 정책에 동의할 수 없다는 이유로 경솔하게 불만을 하지 말라는 교훈입니다. 둘째, 악한 일에 끼어들지 말아야 합니다. 이는 왕을 비방하거나 권력 찬탈의 야망을 갖지 말라는 경고입니다. 왕의 말은 막강하기에 자신이 원하는 것을 다 할 수 있습니다(3-4). 심지어 사람을 죽일 수도 있습니다(잠 20:2). 세상의 평화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권력자와 그 권력을 존중하는 백성이 협력할 때 이뤄집니다.
사람은 시기와 방법에 대한 지혜가 없다(5-8) 사람에게 미래는 감추어져 있습니다. 그리고 감추어진 미래는 하나님의 시간표에 따라 진행됩니다. 따라서 전도자는 모든 일에 하나님이 정하신 시기와 방법이 있다고 말합니다(6). 비록 지혜자가 부분적으로 시기와 방법을 분별하는 능력이 있을지라도, 궁극적으로는 미래 일을 알지 못합니다(7). 사람의 지혜와 능력에도 한계가 있습니다. 사람은 바람을 움직일 권세도 없고, 자신이 죽는 날을 결정할 힘도 없으며, 전쟁 때 피할 지혜도 없는 연약한 존재입니다(8). 그러나 하나님을 의지하는 사람은 필요할 때 도우시는 은혜를 입고 살아갑니다(히 4:16). 이 은혜를 아는 성도는 범사에 감사하는 삶을 선택합니다.
적용: 왕의 명령에 복종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요? 하나님이 세우신 권위자 앞에서 내가 주의해야 할 행동은 무엇인가요? 모든 일에 주어지는 시기와 방법은 누가 정하는 것인가요? 시기와 방법에 대한 지혜가 부족한 내게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요?
우리의 삶에 있어 가장 파괴적인 단어는 ‘나중에’입니다. 가장 생산적인 단어는 ‘지금’이지요. 대부분의 사람들은 욕망과 욕심의 그릇은 보는 대로 키우지만 그것을 이룰만한 자신의 경쟁력은 쉽게 키우지 않습니다. 부러움의 대상이 되는 상대가 그것을 갖기 위해 얼마나 많은 시간과 노력을 쏟았는지는 생각하지 않고, 팔짱을 낀 채 입으로만 중얼거리며 그것을 얻으려고 할 때가 많습니다. 결과는 좋아하면서 결과를 가능하게 하는 과정은 싫어합니다. 움직이지 않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 설 교 >
온유해지고 겸손해지라
전도서 8장 7~8절 / 이한규목사
누가 믿음이 좋은지 사람은 정확하게 몰라도 믿음이 좋은 사람의 대략적인 공통점이 있다. 그것은 부드럽다는 것이다. 성령이 찾아오시면 딱딱한 얼굴이 부드럽게 변화된다. 더 나아가 언행과 성품도 부드러워진다. 사람도 어린아이 때는 부드럽다가 나이가 들면 점점 굳어지고 딱딱해지다가 결국 죽는다. 부드러운 것이 사는 길이고 이기는 길이다.
자동차에는 2만개의 딱딱한 철로 된 부속품이 있다. 그 딱딱한 것들이 모여 어떻게 자동차를 나가게 하는가? 사이사이마다 윤활유가 있기 때문이다. 많은 교인들이 어떻게 천성을 향해 아름답게 달려갈 수 있는가? 소수의 가족도 싸우는데 대가족인 교회에서는 얼마나 싸움이 많겠는가? 그래도 큰 어려움 없이 행복하고 건강한 교회가 될 수 있는 이유는 윤활유와 같은 온유한 성도 때문이다. 모든 것을 넓은 마음으로 품는 온유함이 있을 때 공동체에 선한 변화의 역사가 나타난다.
특히 리더는 하나님이 세우시기에 기본적으로 리더의 권위에 유순하게 순종하라. 리더의 권위에 순종하려는 것은 하나님께 순종하려는 것과 같다. 리더의 잘못을 방관하라는 말이 아니라 그 잘못을 지적하면서도 기본적으로 리더의 권위에 순종하려고 하라는 뜻이다. 리더가 잘못된 길로 가면 시기와 판단을 잘 선택해서 가장 적절할 때 실상을 말해주되 기본적으로 겸손하게 충성하려는 마음만은 잃지 말라.
사람은 내일 일을 알 수 없다(7절). 그런 상황에서 하나님의 시간과 때를 기다리면 말할 때도 오고 행동할 때도 오고 축복의 때도 온다. 그처럼 때와 시기를 분변하는 것이 무엇보다 큰 지혜다. 내일 일어날 일은 아무도 예측하거나 통제할 수 없다(8절). 그러므로 하나님과 역사 앞에서 겸손해야 한다. 겸손한 태도로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면 문제의 장벽도 순식간에 무너지고 찬란한 축복의 때가 온다.
< 겸손한 사람이 되라 >
겸손이란 자신이 아무 것도 아님을 인정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자신이 꽤 괜찮은 존재인줄 알다가 은혜를 받으면 자신이 아무 가치가 없는 존재인 줄 깨닫는다. 그처럼 은혜 받고 겸손하게 되어야 축복의 문이 열린다. 예수님은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고 하셨다. 그 말씀에는 겸손해야 한다는 뜻도 내포되어 있다. 좁은 문은 대개 문 높이도 낮기에 머리를 숙여야 들어갈 수 있다.
왜 하나님이 가끔 어려운 기도제목을 주시는가? 겸손하라는 뜻이다. 고난은 축복을 결정적으로 막는 내면의 뿌리 깊은 교만을 치유해 준다. 교만한 사람은 자기 힘을 자랑하지만 사실상 세상에서 제일 불행한 사람은 교만한 사람이다. 힘이 생기면 자신이 하나님인 줄 알면서 결국 망하는 길로 가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형상을 닮으려는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처럼 되려는 것은 가장 추구해야 할 일이지만 하나님의 위치에 올라서려는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처럼 되려는 것은 가장 삼가야 할 일이다.
교만하면 뱀의 유혹에 넘어간다. 뱀의 유혹은 달콤하지만 선악과에 손을 대면 곧 지옥에 들어선다. 그래서 하나님은 때로 고난과 기도제목을 허락하신다. 고난은 한없이 높아지다가 망하는 길로 가는 사람의 마음을 낮추시려는 하나님의 배려다. 깊은 고난의 때에는 소유가 아무런 도움이 못될 때가 많다. 하나님 앞에 설 때는 소유를 가지고 서지 않고 믿음을 가지고 서게 된다.
고난을 통해 겸손한 믿음을 얻을 수 있다면 그 고난도 축복이 된다. 그러므로 시련과 기도제목이 생길 때 그것도 하나님의 은총으로 받아들이고 세상에는 내 뜻대로 될 수 없는 일들도 많음을 겸손히 자각하라. 그처럼 자신을 낮출 때 하나님의 높여주시는 은혜와 축복을 덧입는다. 항상 온유하고 겸손한 태도로 복 받고 공동체를 살리고 세상을 변화시키는 은혜의 진원지가 되라.
말씀대로 장래 일을 가르쳐 행하게 합시다.
전도서 8장 7절 / 강성찬목사(전주동부교회)
미국의 골짜기 사이에 작은 도시가 하나 있었다고 합니다. 정부에서 그곳에 수력발전소를 세울 것이라는 계획이 발표되었는데 그렇게 되면 그 댐에서 나오는 물로 이 조그마한 도시는 잠기게 될 것이어서 관계 당국에서 그곳 주민들에게 편지를 보냈다고 합니다. "일년 반 후에 이 도시는 물에 잠기게 될 것입니다. 그 전에 이사를 해야 합니다. " 그 소식을 받은 후부터 도시는 황폐해지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사람들이 집 곳곳의 지저분한 부분에 페인트칠을 하지 않았고 관리를 하지 않았고 고장난 것은 그대로 방치해 두었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 도시를 떠나갔고 떠날 수 없는 형편에 있는 사람들만이 그 도시에 살고 있었다합니다. 발전소 건설 계획은 자꾸만 미뤄졌고 어느 날 한 신문 기자가 그 도시를 방문했더니 도시의 형편이 말이 아니어서 기자가 한 주민에게 "왜 도시가 이렇게 형편없이 되도록 내버려두는 겁니까?"라고 물었더니 그 주민은 "미래가 없는 곳에는 현재를 사는 능력이 없습니다.”라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전도자는 수사 의문문을 사용하여 미래에 일어날 일을 미리 경고하여 줄 자는 아무도 없다는 사실을 강조하여 전달하며 왕의 명령을 지키지 않는 자는 그 어느 누구도 예측하지 못할 만큼 급격히 징벌을 당할 수 있다는 말로 왕 앞에서 사람이 스스로 지혜롭게 처신해야 함을 교훈합니다.
왕에게 순복하고 그 앞에서 겸손할 것을 권면하는 내용으로 왕의 명령을 지키지 않는 자에게 왕이 어떤 결정을 내릴지 그로인해 어떤 결과가 있을지 없다는 의미를 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왕의 의중(意中)을 파악하고 또 왕의 결정을 예측하여 그에 대해 어떻게 대비해야 할지를 가르칠 자는 아무도 없으며,따라서 왕이 행할 심판이나 그로 인한 재난,어려움이 임하지 않도록 피하게 할 자가 아무도 없음을 지적합니다. 다시 말해 왕의 명령을 지키지 않은 자가 왕의 심판 앞에 철저히 홀로 서서 그 형벌을 당해야 함을 지적한다 할 수 있습니다.
한비자(韓非子) 세난편(說難篇)에 나오는 이야기에 전국시대, 위(衛)나라에 왕의 총애를 받는 미자하(彌子瑕)란 미동(美童)이 있었다고 합니다. 어느 날 어머니가 병이 났다는 전갈을 받은 미자하는 허락 없이 임금의 수레를 타고 집으로 달려갔다 합니다. 당시 허락 없이 임금의 수레를 타는 사람은 발뒤꿈치를 자르는 형벌인 월형이라는 중벌을 받게 되어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미자하의 이야기를 들은 왕은 오히려 “실로 효자로다. 어미를 위해 월형도 두려워하지 않다니…….”라고 효심을 칭찬하고 용서했다 합니다.
또 한 번은 미자하가 왕과 과수원을 거닐다가 복숭아를 따서 한 입 먹어 보니 아주 달고 맛이 있어서 왕에게 바쳤다고 합니다. 왕은 기뻐하며 “제가 먹을 것도 잊고 ‘과인에게 먹이다니…….”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흐르는 세월과 더불어 미자하의 자태는 점점 빛을 잃었고 왕의 총애도 엷어지던 어느 날, 미자하가 처벌을 받게 되자 왕은 지난 일을 상기하고 “이놈은 언젠가 몰래 과인의 수레를 탔고, 게다가 ‘먹다 남은 복숭아[餘桃]’를 과인에게 먹인 일도 있다.”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왕에게 순복하고 그 앞에서 겸손할 것을 권면하는 말씀을 통해 왕이 하나님의 대리자임을 감안할 때 이는 특별한 의미를 함축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즉 이는 하나님의 심판을 우리로 상기케 하는 내용이라 하겠습니다.
전도자는 사람은 장래 일을 알지 못한다고 합니다.
(전 7:14) 형통한 날에는 기뻐하고 곤고한 날에는 되돌아 보아라 이 두 가지를 하나님이 병행하게 하사 사람이 그의 장래 일을 능히 헤아려 알지 못하게 하셨느니라
(전 10:14) 우매한 자는 말을 많이 하거니와 사람은 장래 일을 알지 못하나니 나중에 일어날 일을 누가 그에게 알리리요
자기의 죽는 날을 아는 자는 없습니다. 그래서 인간들은 재물과 향락을 추구하지만 반대로 생각한다면 죽는 날을 모르기 때문에 하루하루를 열심히, 또 정직하게 살아야만 하는 것입니다.
종말이란 누구에게나 찾아오는 필연적 사건입니다. 이 땅에 태어난 사람이면 누구나 다 예외 없이 이 길을 가야 합니다.
(히 9:27)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왕후 장상(王侯將相)도 영웅 열사 열녀도 이 길만은 피할 수 없습니다.
일찍이 덴마크의 철학자 키에르케고르는 말하기를 '사람이란 유한한 존재이며,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이며, 또한 종말을 가진 존재이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러한 종말이 개인에게만 다가오는 것이 아니라 가정에도 다가오며 어떤 단체나 국가에도 종말이 다가옴을 알아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우주적인 종말이 우리 앞에 다가오고 있음을 성경은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성경은 여러 곳에서 우리에게 늘 종말 의식을 느끼며 살아가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장래 일을 감추신 것은 우리에게 성실함을 요구하시기 위함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장래 일을 미리 안다면 우리는 게을러질 수 있습니다.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예수님은 장차 예루살렘이 멸망할 것을 아시고 우셨습니다. 예루살렘은 유대인의 정신생활의 중심인 성전이 있는 신성한 성읍이었습니다. 이러한 도성이 하나님을 배역하고 선지자를 죽이는 일을 했으며, 하나님께서 보내신 독생자까지 죽이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을 배반하여 뉘우쳐 회개하지 않고 점점 강퍅해져 가는 예루살렘을 보시고 주님께서는 하나님의 심판으로 멸망케 될 것을 아시고 탄식하셨던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예루살렘을 정확하게 바라보셨습니다. 그리고 유능한 의사가 환자를 첫눈에 바라보고 단번에 환자의 상태를 알 듯 예루살렘의 상태를 아셨습니다. 그들의 과거의 불의함과 현재의 부도덕함을 아셨습니다. 그들의 위선과 교만을 아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장래를 아셨습니다. 계속해서 그들이 회개치 않을 때 임할 하나님의 심판을 아셨습니다. 그래서 눈물을 흘리시며 우셨습니다.
눈물은 지극한 감정의 분비물입니다. 인간은 지극한 감정에 자극을 받을 때 눈물을 흘리게 됩니다. 예수께서는 예루살렘의 멸망을 바라보시면서 이러한 감정의 자극을 받으셨습니다. 이 감정은 인간에 대한 사랑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자기민족에 대한 사랑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신실한 성도라면 죄에 대한 분노와 함께 이와 같이 연민의 눈물도 함께 흘릴 줄 알아야 합니다. 이와 같은 사랑의 눈물이 없는 불의와 죄에 대한 분노는 미움일 뿐 더 이상 의로운 분노일 수 없습니다.
그러나 당시 종교 지도자들을 많이 가지고 있던 예루살렘의 사정은 눈 뜬 장님과도 같은 신세였습니다. 예루살렘 지도자의 눈은 세속적인 눈입니다. 그들은 그 눈을 가지고 세속의 일을 매우 정확하게 바라보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반대로 영안이 가려졌습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정말로 바라보아야 할 예수님을 정확하게 바라보지 못하였습니다. 예수님을 정확하게 바라보지 못함으로써 그들은 '평화에 관한 일'도 알지를 못하였습니다. 코앞에 닥친 멸망을 바라보지 못하였습니다.
예루살렘의 멸망에 관한 예수님의 예언은 단 반세기가 지나지 않아 주후(A.D.) 70년에 로마의 티투스(Titus) 장군에 의해 성취되었습니다. 그러나 물욕, 권세욕에 의해 눈이 어두워진 예루살렘의 지도자들은 이를 알지 못하였습니다. 한낱 미물들도 죽음이 가까워오면 그것을 아는데, 예루살렘의 지도자들은 이를 몰랐을 것입니다.
사실 범죄 한 자가 언제 하나님 앞에 심판을 당할지 또 그 심판이 어떠할지는 아무도 모르며, 또 그 누구라 해도 심판을 피하기 위해 그에 적합한 심판을 모면하는 방법이나 처세술을 가르칠 자가 없습니다. 철저히 하나님 앞에 홀로 서야 하고 하나님께서 정하신 심판 날 주어진 심판을 다 당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는 참으로 두려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아니 그것은 단지 두렵다고만 말하기에는 너무나 혹독하고 고통스런 심판의 날입니다. 더군다나 죄인은 이날에 아무도 함께하는 이 없이 하나님 앞에 서야 합니다. 이는 일면 너나 할 것 없이 모든 사람들이 당면한 실존적 상황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재림을 날마다 기대하면서 사는 우리들은 하루하루를 인생 최후의 날로 여기면서 신중하게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통치에는 정한 목적이 있고 불변하는 어떤 계획이 있음을 아는 사람은 감추어진 장래를 인식하며 살아야 합니다.
(마 24:43) 너희도 아는 바니 만일 집 주인이 도둑이 어느 시각에 올 줄을 알았더라면 깨어 있어 그 집을 뚫지 못하게 하였으리라
주님은 말세의 때에 방탕하지 말고 예비하는 삶을 살 것을 권면하고 계십니다.
(막 13:35)그러므로 깨어 있으라 집 주인이 언제 올는지 혹 저물 때일는지, 밤중일는지, 닭 울 때일는지, 새벽일는지 너희가 알지 못함이라
우리가 믿는 성삼위 하나님에게는 신성의 질서가 있습니다. 즉 성부는 계획자, 성자는 계시자, 성령은 보존자이십니다. 아울러 재림의 시기를 작정하는 일은 성부의 사역에 속하고 성자 예수님은 그날에 재림하셔서 심판하시고 성부의 계획을 성취하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때는 아버지만 아실 일입니다.
(막 13:32) 그러나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하늘에 있는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아버지만 아시느니라
마찬가지로 신자에게는 신자의 직무와 질서가 있습니다. 신자의 직무는 예수를 구주로 믿고 그날을 대망하는 일인 것입니다. 그런데 성자 예수님조차도 모르는 엄청난 비밀에 싸인 그날을 우리가 알려 하고, 또 아는 체하고 소동하는 것은 크게 잘못된 것입니다. 그런고로 우리는 항상 경계하여 깨어 있어야만 합니다.
인간의 육체는 일정한 휴식과 수면을 취해야 건강이 유지되기 때문에 잠이 필요하나 성경은 깨어 있으라고 하는데 이는 육체의 잠을 깨라는 뜻보다는 우리가 주님을 언제라도 만날 수 있도록 우리의 영혼이 깨어 있고, 생기 있고, 영적으로 늘 긴장해 있는 상태를 유지하라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영적인 무감각과 태만을 조심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우리로 하여금 그날을 망각하도록 유혹하는 친구와 모임, 그리고 그런 식으로 시간을 보내는 것을 주의하고 피해야 하겠습니다. 종말의 섭리에 대한 성도의 긴장이 풀어지는 일처럼 위험스러운 일은 없을 것입니다. 성도들은 성경에 예고된 종말의 징조를 분별하고 경계하는 생활을 해야 합니다. '자지 말고 오직 깨어 근신할지라'(살전 5:6).
마지막 심판의 날은 아무도 모르는 가운데 돌연 일어날 것입니다. 그리고 그때까지의 삶에 따라 심판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느 때에 그 일이 있든지 하나님 보시기에 합당하도록 준비하는 의로운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장래 일을 가르칠 자 역시 없다고 합니다.
‘가르치다’는 ‘가르치다’(삼상 9:6)라는 의미보다는 ‘고하다’(에 6:2), ‘선포하다’(시 97:6; 렘50:28),‘알려주다'(삼상 19:3; 에4:8)라는 의미로 더 널리 사용됩니다.
이같은 현실 앞에서 우리가 취해야 할 자세가 무었입니까?
이와 관련해 우리가 기억해야 할 주님의 말씀이 있습니다. 바로 그런즉 깨어 있으라 너희는 그 날과 그 때를 알지 못하느니라(마 25:13)는 말씀입니다.
신랑을 맞이하지 못한 미련한 다섯 처녀들에 대한 말씀입니다. 열 처녀 가운데 다섯 처녀가 미련했던 것은 그들이 신랑을 맞으러 나갈 때에 기름이 든 등만 들고 갔을 뿐 여분의 기름을 준비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여분의 기름을 준비하지 않은 다섯 처녀와 달리 여분의 기름을 준비한 다섯 처녀가 슬기로웠던 것은 그들은 신랑이 언제 올 줄 알지 못했기 때문에 언제 신랑이 오더라도 등불을 밝힐 만반의 준비를 갖추었기에 혼인 잔치에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여분의 기름을 준비하지 않음으로써 정작 신랑이 올 때에 기름이 떨어져 혼인 잔치에 들어가지 못한 다섯 처녀와 기름을 넉넉히 준비함으로 신랑이 올 때에 불을 밝혀 혼인 잔치에 들어간 다섯 처녀의 비유는, 언제 오실지 모르는 재림의 주님을 언제라도 맞이할 수 있도록 깨어 있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을 교훈해 줍니다. 실제로 주님이 오신 뒤에는 때가 늦습니다. 아직 오시지 않은 바로 지금이 오실 주님을 기쁨으로 맞이할 수 있도록 우리에게 주어진 준비 기간입니다.
그리스도의 초림이 구원과 회개의 선포를 위한 것이었다면 그리스도의 재림은 심판과 멸망의 선언을 위한 것입니다.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곳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마 3:12; 눅 3:17).
그리스도의 재림은 알곡과 쭉정이를 가르는 심판의 재림입니다. 그때에는 한 편의 즐거움과 환희의 찬송, 그리고 또 다른 한 편의 회한과 눈물로 갈리는 두 종류의 구분이 있을 뿐입니다.
심판의 주님, 공의로 타작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과 쭉정이를 구분하시는 그분의 재림이 언제 있을지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우리는 깨어 있어야 합니다.
주님의 재림 후에 있을 회한의 눈물을 흘리지 않기 위해 깨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두 번 다시 없을 구원의 때를 놓치지 않으며 주의 재림을 준비하기 위해 우리는 깨어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언제 오실지 모르는 주님을 맞이하기 위해 깨어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잠들어 있을 때 주의 재림이 임하는 불행을 막기 위해 우리는 깨어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설 날, 그 분의 심판대 앞에 서서 선 악 간에 행한 일에 대해 심판을 받을 것은 확실하지만 그때가 언제인지 알지 못하므로 그날이 임하기까지 깨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미국의 훌륭한 정치적 지도자이자 신실한 그리스도인인 윌리암 브라이언은 주일이면 하던 일을 멈추고 교회에서 예배를 드리며, 성경을 공부하고 묵상하는 일로 하루를 보냈다고 합니다. 심지어는 그가 세계 일주 여행을 하고 있을 때 그의 추종자가 그를 위한 환영회를 열어 초대하려 하자, 그는 '죄송합니다. 그날은 주일이어서 교회에 가야 합니다.'라고 정중히 사양했다고 합니다.
깨어 있으라는 것은 바울 사도가 깨어 의를 행하고 죄를 짓지 말라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가 있기로 내가 너희를 부끄럽게 하기 위하여 말하노라(고전 15:34)고 권고한 말씀에서 알 수 있듯이 의를 행하고 죄를 짓지 않는 것이며 더 구체적으로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하거나 술 취하지 말며 음란하거나 호색하지 말며 다투거나 시기하지 말고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롬 13:13-14)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어둠에 속한 방탕한 일, 음란한 일, 악한 일,파괴적인 일 등을 모두 버리고 주님과 동행하는 삶, 육신의 일, 세상 정욕을 채우는 일이 아닌 하나님의 일, 깨끗하고 정결한 일을 행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의 욕심과 생각을 따라 하나님을 거스르는 악을 자행한다면 결국 우리는 홀연히 임할 심판의 자리에서 누구의 도움도 받지 못하고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가 되어 감당할 수 없는 심판과 형벌을 받게 될 것입니다.
(눅 21:34)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그렇지 않으면 방탕함과 술취함과 생활의 염려로 마음이 둔하여지고 뜻밖에 그 날이 덫과 같이 너희에게 임하리라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깨어 의를 행한다면 결코 심판날 홀로 서서 죄인의 자리,형벌의 자리에 떨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눅 12:42) 주께서 이르시되 지혜 있고 진실한 청지기가 되어 주인에게 그 집 종들을 맡아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누어 줄 자가 누구냐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유업을 맡기실 자로 지혜와 함께 진실한 자를 찾고 계십니다. 약삭빠른 지혜로 주인의 재산을 유용하여 자신의 부를 축적하는 것이 아니라, 두 달란트, 다섯 달란트 받은 자가 그 배의 이익을 남겼던 것처럼 오히려 주인의 재산을 더욱 불리는 그러한 진실한 종을 원하고 계십니다.
진실한 자는 꾸밈이 없습니다. 속이지 않습니다. 성실하게 일합니다. 자기의 원대로 일하지 아니하고 맡기신 주인의 뜻대로 일합니다. 자기를 기쁘고 편하게 하지 않고 주인을 기쁘고 편하게 해줍니다.
청지기에게는 영적인 권위와 함께 도덕적인 권위가 있어야 합니다. '그 집을 맡은' 청지기는 그 집의 온 가족들을 위해 때를 따라, 그리고 균형 있는 음식을 제공해 줄 수 있어야 합니다.
(엡 4:17) 그러므로 내가 이것을 말하며 주 안에서 증언하노니 이제부터 너희는 이방인이 그 마음의 허망한 것으로 행함 같이 행하지 말라
바로 주님이 곁에 서서 하나님 앞에 죄와 반역을 일삼는 자가 아니라 순종의 자녀로 살았음을 증거해 주시고 구원과 복,영생의 길로 인도하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언제 임할지 모르나 반드시 닥칠 심판 날을 기억하고 그 날을 준비하여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행하며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며 끊임없이 의를 지켜 행함으로 그 날을 준비하는 복된 성도들이 다 되어야 할 줄 믿습니다.
교육하고 선교하고 봉사하며 말씀을 그대로 지켜 행하며 끝까지 지켜 행하되 장래 일을 가르쳐 지켜 행하게 하는 모두가 되어야 할 줄 믿습니다.
마지막 날의 현상과 역설
전도서 8장 6절 / 이성희목사
핵전쟁으로 인한 인류의 파멸과 위협을 상징하는 것으로 ‘운명의 날 시계(Doomsday Clock)’가 있습니다. 1947년 미국 핵과학자협회가 만든 지구의 종말을 예고하는 시계입니다. 지난 1월 17일 북한의 핵개발과 여러 가지 변수로 이 시계가 오후 11시 55분까지 당겨졌습니다. 이 시계가 가장 자정 가까이 간 때는 1953년 미국이 수소폭탄 실험에 성공했을 때입니다. 이때는 오후 11시 58분이었습니다. 이후 1991년 냉전이 끝난 뒤에 다시 뒤로 돌려져서 11시 43분이 되었습니다. 미국의 911사태 이후 2002년에는 11시 53분이었는데 이제 11시 55분이라고 합니다. 이 시계는 만들어진 다음 모두 17차례나 조정이 되었습니다. 어쨌든 운명의 날이 거의 다가왔음을 말합니다. 이 시계 때문이 아니라 우리는 성경을 통하여 마지막 날이 가까웠음을 알고 있고 그래서 늘 각성하고 살아야 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우리의 당면한 시간에 민감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성경은 이것이 지혜라고 가르치기 때문입니다. 전도서 3:2-8을 보세요. “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으며, 심을 때가 있고 심은 것을 뽑을 때가 있으며, 죽일 때가 있고 치료할 때가 있으며, 헐 때가 있고 세울 때가 있으며, 울 때가 있고 웃을 때가 있으며, 슬퍼할 때가 있고 춤출 때가 있으며, 돌을 던져 버릴 때가 있고 돌을 거둘 때가 있으며, 안을 때가 있고 안는 일을 멀리 할 때가 있으며, 찾을 때가 있고 잃을 때가 있으며, 지킬 때가 있고 버릴 때가 있으며, 찢을 때가 있고 꿰맬 때가 있으며, 잠잠할 때가 있고 말할 때가 있으며, 사랑할 때가 있고 미워할 때가 있으며, 전쟁할 때가 있고 평화할 때가 있느니라.” 모든 것에 때가 있는데 때를 잘 아는 것이 지혜이고 승리자입니다.
예수님은 가나 혼인 잔치에서 어머니께서 포도주가 없다고 하시자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내 때가 이르지 아니 하였나이다”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활동의 때가 아직 아니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공생애를 마치고 잡히시기 전에 제자들과 함께 만찬을 드시기 전에는 “내 때가 가까이 왔으니 유월절을 지키자”고 하셨습니다. 내 때가 되었는지 아닌지를 잘 알아야 합니다. 이번 대선에서도 보니 이것이 자기 때인지 아닌지 모르고 출마한 사람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때를 모르면 고생합니다. 자기만 고생하는 것이 아니라 주변의 다른 사람까지 고생을 시킵니다.
우리는 때를 잘 알아야 합니다. 태안의 기름띠를 제거하는 일은 우리에게 시급한 일입니다. 봉사하는 것도 필요하지만 중요한 것은 물때를 잘 맞춰가야 합니다. 우리교회에서도 매 주간 가서 봉사합니다. 그런데 이번 주간은 가고 싶어도 못갑니다. 물때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번 주간은 물이 차서 가도 일을 할 수가 없습니다. 물때를 못 맞추면 가도 물이 차서 일을 못합니다. 모든 일에는 때가 있습니다. 때를 아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사무엘상 17:14에는 “다윗은 말째라”고 다윗을 소개합니다. ‘말째’라는 말의 히브리어는 ‘학카톤’입니다. 이 말은 단순한 나이의 개념을 넘어 등급을 의미합니다. 가장 늦게 태어났을 뿐만 아니라 제일 변변치 못한 형제라는 말입니다. 우리말로 꼬마, 꼴찌라는 뜻입니다. 당시에 양을 지키는 일은 ‘학카톤’의 몫이었습니다.
우리의 시간 개념도 마찬가지입니다. 마지막 날이란 시간 개념이 아니라 오히려 시간의 질이며 인격의 개념입니다. 마지막 때란 시간 개념이 아니라 종말 의식의 개념이기도 합니다. 어떤 이에게는 매일이 마지막 날입니다. 어떤 이에게는 매일이 새로운 날입니다. 이런 시간을 가진 사람이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매일은 ‘남은 인생의 첫날’(The first day of the rest of your life)입니다. 이런 희망을 가지고 삽시다. 동시에 매튜 헨리가 말한 대로 “우리의 마지막 날을 준비하는 것이 매일의 일이 되어야 한다.”는 심정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마태복음 16:2-3에는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저녁에 하늘이 붉으면 날이 좋겠다 하고 아침에 하늘이 붉고 흐리면 오늘은 날이 궂겠다 하나니 너희가 날씨는 분별할 줄 알면서 시대의 표적은 분별할 수 없느냐”고 하십니다. 시대를 분별하는 능력, 때를 알고 준비하는 지혜를 가지고 마지막 주일을 맞이하기를 바랍니다.
첫째, 마지막 날은 모든 것이 끝나는 죽음의 날입니다.
한 해의 마지막 주일입니다. 한 해의 마지막 날이 내일입니다. 우리 모두는 개인의 종말을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 인류의 종말도 분명히 언젠가 오게 될 것입니다. 모든 것은 마지막이 있습니다. 마지막 날은 끝 날입니다. 죽음의 날입니다.
과거라는 시간은 죽은 시간입니다. 더 이상 기대할 수 없는 시간입니다. 죽은 시간과 죽은 날을 기대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오늘 성경은 “죽는 날을 주장할 사람도 없으며”라고 합니다. 마지막 날, 끝 날에 대하여 인간은 속수무책입니다. 인간의 힘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시간입니다.
성경이 가르치는 마지막 때는 성취하는 때입니다. 열매를 거두는 기회입니다. 세상의 모든 것은 끝나야 성취합니다. 끝나야 열매를 맺습니다. 사람도 죽기 전에는 참 열매가 없습니다. 죽어봐야 참 열매를 압니다. “죽어야 많은 열매를 맺는다”는 성경의 말씀이 진리입니다. 벼가 익어 쌀을 추수하면 벼는 볏단으로 변합니다.
신학적인 시간으로는 ‘크로노스’와 ‘카이로스’가 있습니다. ‘크로노스’는 물리적이고 객관적인 시간입니다. 하루가 24시간이라는 시간입니다. ‘카이로스’는 영적이고 주관적인 시간입니다. 사람마다 시간의 개념은 다 다릅니다. 그리고 그 외에 ‘플레루’(pleroo)라는 시간이 있습니다. 갈라디아서 4:4에 “때가 차매”라는 말씀이 그 말입니다. 이 말은 어떤 것이 완전히 완성되거나 끝났음을 가리킵니다. 카이로스는 어떠한 과업이나 열매를 결실하기 위한 기회를 가리키는 반면, 플레루는 그것이 성취됨을 의미합니다. 아기를 가지고 뱃속에서 자라서 해산하는 과정을 겪습니다. 죽을 만큼 고생한 끝에 아기를 낳습니다. 끝나는 시간은 죽음의 시간입니다. 죽지 않고 죽을만해야 열매가 있고 성취감이 있습니다.
부부가 함께 오래 사는 것은 큰 축복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짝 지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저는 하늘나라에 가면 꼭 물어보고 싶은 게 하나 있습니다. 하나님이 짝지었다고 했는데 그런데 왜 짝을 지었으면 같이 오래 살게 하지 한쪽을 먼저 일찍 데려가 짝을 잃게 합니까? ‘사별’이란 단어는 bereavement인데 이 말은 ‘강탈하다’는 뜻을 가진 ‘reave’에서 나온 말입니다. 억지로 빼앗다, 약탈하다, 박탈하다는 뜻입니다.
마지막 시간은 하나님이 억지로 빼앗는 시간입니다. 아무리 가지고 싶어도 가질 수 없는 시간입니다. 사실은 하나님께 빼앗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을 다시 가지고 가시는 것입니다. 언제 내 생명이나 시간이 내 것인 적이 있었습니까? 빼앗기기 전에 드려야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나의 시간 드리니 주여 받아주셔서 평생토록 주 위해 봉사하게 하소서.” 참 지혜로운 자의 찬송입니다.
인간이 끝나는 시간은 하나님이 시작하시는 시간입니다. 인간의 시간이 끝나면 하나님의 시간이 시작됩니다. 우리 자신이 끝나는 지점이 바로 하나님의 출발점입니다. 죽어야 사는 것이 우리의 비밀이며, 끝나야 시작하는 것이 우리의 비결입니다.
이삭은 모리아산에 올라가면서 자신이 제물이 될 것도 알지 못하고 아브라함에게 묻습니다. “아버지 몇 시간 더 올라가야 하나요?” “더 이상 갈 데가 없을 때까지 가야지. 끝까지 가야 한다” “누구의 끝이요?” “너의 끝이란다. 더 이상 갈 데가 없을 때까지 가라. 그 지점이 바로 너의 문제가 하나님의 해답을 만나는 곳이란다.” 이런 대화를 하면서 같을 것입니다. 끝까지 가야 하나님을 만납니다. 모든 끝은 하나님이 계신 곳입니다. 우리의 삶 가운데 한 해의 끝이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자리였으면 좋겠습니다. 미국의 전설적인 야구선수인 요기 베라는 “끝날 때까지는 끝난 게 아니다”라는 말을 남겼습니다. 마지막이지만 끝난 게 아닙니다. 죽었지만 죽은 게 아닙니다. 마지막 날은 끝입니다. 그러나 끝난 것이 아닙니다. 이것이 마지막 날의 역설입니다.
둘째, 마지막 날은 잃어버리지 않고 다시 사는 날입니다.
요한복음 6:39에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 하시니라”고 합니다. 마지막 날은 잃어버리고 끝난 것이 아니라 다시 사는 날입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6:40에는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고 합니다. 마지막은 또 다른 시작입니다. 다시 사는 날입니다. 마지막은 끝이고 죽음일 뿐만 아니라 다시 사는 날이고 다시 시작하는 날입니다.
은퇴하다(Retire)란 말은 타이어(tire)를 다시(re) 갈아 끼우고 시작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실제로 인생에서 은퇴란 없습니다. 죽어야 모든 것이 끝나는 것입니다. 살아 있다는 자체가 무엇인가 소명이 남아 있다는 증거입니다. 바퀴를 갈아 끼울 수 있게 바퀴를 준비해 둬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창조하신 다음 마지막 날에 안식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안식일은 창조 상으로는 마지막입니다. 그러나 의도 상으로는 첫째입니다. 하나님의 시작은 창조이지만 인간은 창조되자마자 안식부터 하였습니다. 인간을 위한 천지창조의 목적은 안식입니다. 마지막 날에 목적이 있는 것입니다.
영원한 안식은 제 8일에 계속 됩니다. 우리에게 제 8일은 끝나지 않습니다. 7일 이후의 날인 8일은 영원한 안식의 날입니다. 그래서 오랜 기독교 전통에서 8은 영원을 상징하는 숫자입니다. 8을 옆으로 눕혀 놓으면 무한대입니다. 언제나 마지막 후에는 영원한 시작이 있다는 것입니다.
7세기의 영성가 존 클리마쿠스는 “당신이 오늘 하루를 마지막 날로 생각하지 않는다면 그날을 경건하게 보낼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항상 마지막을 생각하며 살아야 참다운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리고 매일을 마지막 날로 생각하고 사는 사람에게는 끝은 없습니다. 매일 새롭고 영원한 삶을 사는 것입니다. 매일을 마지막으로 살 수 있다면, 마지막을 아름답게 살 수 있다면 모든 날이 경건한 삶입니다. 하루하루가 보람 있는 삶입니다.
생텍쥐페리의 ‘어린왕자’에 보면 “네가 오후 네 시에 온다면 난 세 시부터 행복해지겠지”라는 말이 나옵니다. 기대감이란 인간의 특권입니다. 마지막은 또 다른 새로움의 기대감을 줍니다. 2007년은 이제 마지막입니다. 그렇다고 절망입니까? 모든 것을 포기합니까? 아닙니다! 2008년이 어떻게 다가올까? 기대감과 행복감이 함께 밀려옵니다.
마지막 날은 결코 잃어버리는 시간이 아니라 얻고, 살고, 다시 시작하는 시간입니다. 저는 대선 기간 동안 “잃어버린 10년”이란 말을 많이 들었습니다. 이 말은 참 듣기 거북한 말이었습니다. 지난 10년은 쓸데없는 시간은 아니었습니다. 많은 것을 배우고 익혔습니다. 학습 대가를 너무 많이 지불해서 그렇지 잃은 시간이라고 보진 않습니다. 시간은 잃어지지 않습니다. 학습효과를 얻은 시간입니다.
욥기 5:24에는 “네가 네 장막의 평안함을 알고 네 우리를 살펴도 잃은 것이 없을 것이며”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절대로 우리의 것을 잃게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에게는 뒤를 돌아보아도 절대로 잃은 것이 없습니다. 악에서도 선을 배웁니다. 실수에서도 유익을 배웁니다.
궁극적으로 죽음은 다 잃은 것 같지만 아무 것도 잃은 것이 없는 것입니다. 살아서는 도저히 얻지 못하는 것들을 얻고 살게 될 것입니다. 끝난 것 같지만 시작한 것입니다. 순간을 잃고 영원을 얻는 것이 죽음입니다. 우리 모든 마지막 때가 마찬가지입니다. 잃은 것 같지만 얻고, 끝난 것 같지만 또 다른 시작이 있습니다.
나는 죽지만 내 자손이 번성합니다. 나무는 죽는 듯하지만 새싹이 납니다. 산불로 폐허가 된 것 같지만 다시 생태계가 소생합니다. 그래서 끝은 또 다른 시작이고, 마지막 시간은 시작하는 시간입니다. 전도서 1:4에는 “한 세대는 가고 한 세대는 오되 땅은 영원히 있도다”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시간은 영원히 다시 시작되는 시간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시간이 아니라 하나님의 시간 안에 살고 있습니다.
2002년 월드컵 이후에 이런 인생을 비유하는 말이 생겼습니다. 인생의 30년은 배우는 시간입니다. 전반전입니다. 그 다음 30년은 일하는 시간입니다. 후반전입니다. 후반전이 끝나면 다 끝나는 것이 아니라 연장전이 있습니다. 그 후의 30년은 인생을 마무리하는 시간입니다. 연장전이 끝나면 끝나는 것이 아니라 승부차기가 있답니다. 10년은 더 살아야지요? 요즘은 아예 죽을 생각을 안 하는 것 같아요. 짧은 인생을 길게 사는 비결은 또 다른 새로운 시도를 하는 것입니다.
결론
우리는 마지막을 준비하는 신앙으로 살아야 합니다. ‘마라나타’의 신앙이 있어야 합니다. “주 예수여 어서 오시옵소서”라는 말입니다. 작은 종말을 생각하는 삶입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종말 신앙으로 살았습니다. 이런 그들의 종말적 신앙, 마라나타의 신앙이 그들로 하여금 역동적인 삶을 살게 하였고 선교의 삶을 살게 하였습니다. 예수님의 재림을 기다리며 마지막 날을 학수고대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들의 인사도 ‘샬롬’에서 ‘마라나타’로 바뀌었습니다. 종말을 기다리는 기대감에서 인사도 바뀐 것입니다.
제가 초등학교에 다닐 때입니다. 아버지께서는 미국에 유학을 가시고 어머니와 우리 사남매가 아버지 오시기만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어머니는 우리가 무엇을 사달라고 할 때마다 “아버지 오시면 사줄게” 하셨습니다. 아버지 오시면 좋은 크레파스도 생기고, 손목시계도 생기고, 좋은 신발도 생기는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아버지가 오셨지만 아무 것도 생기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아버지께서 오시니까 크레파스도, 손목시계도, 좋은 신발도 별로 필요가 없었습니다. 아버지가 오셨다는 것이 그냥 좋았습니다.
그때 제가 초등학교 2학년, 3학년 때였는데 저의 어머니는 가정예배 드릴 때마다 재림에 관한 찬송을 부르고 성경 말씀도 온통 재림이 주제였습니다. “대속하신 구주께서 구름타고 오실 때”, 요즘 찬송가에는 없지만 “천지가 진동하며 햇빛 흐리고”라는 찬송이 우리 가정예배의 주제가였습니다. 성경말씀도 온통 별이 떨어지고, 하늘이 종이 축같이 접히고, 땅이 갈라지는 말씀이었습니다. 장성하고 나서 어머니께 여쭈어봤습니다. “왜 그 때 매일 밤 공포의 분위기로 몰아넣었습니까?” 어머니는 그 때 한국전쟁 직후에 사회가 혼란할 때인데 아버지는 미국에 가고 안 계시고 언제 또 전쟁이 날지 모르는데 목사 자녀라고 공산당의 핍박이 올까봐 미리 단련하시느라 그렇게 하셨답니다. 그래서 지금도 제일 좋아하는 찬송 중의 하나가 “하나님의 나팔 소리 천지 진동할 때에”입니다. 저는 재림의 신앙을 어릴 때부터 마음에 간직한 것이 지금은 너무 감사한 일입니다.
전도서 8:7에는 말씀합니다. “사람이 장래 일을 알지 못하나니 장래 일을 가르칠 자가 누구이랴”. 사람은 장래의 일을 가르치지 못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미 말씀하고 있습니다. 마지막을 준비하는 사람은 마지막이 두렵지 않습니다. 마지막은 끝입니다. 그러나 또 다른 시작이 있습니다. 이것이 마지막의 역설적 의미입니다.
오늘은 올해의 마지막 주일입니다. 마지막 시간에 대한 지혜를 배우기를 바랍니다. 마지막을 잘 준비하며 살기를 바랍니다. 마지막을 기대하며 살기를 바랍니다. 농구에서는 버저가 울리는 순간 손에서 벗어난 공이 그물을 출렁이며 골대에 들어가 승리하는 ‘버저비터’가 있습니다. 축구에서는 경기 시간이 종료되었지만 심판의 재량으로 3분 정도 주는 ‘인저리타임’에 골이 터져 승패가 바뀌는 경우도 있습니다. 아직 우리에게는 끝이 오지 않았습니다. 마지막 순간까지 최선을 다하여 마지막 순간에 승부를 바꾸고, 인생을 바꾸는 멋진 삶을 살기를 바랍니다.
사람이 할 수 없는 것
전도서 8:1-8 / 염두철목사
전도서 7장 말미에서 전도자는 하나님께서 완벽하게 사람을 창조하셨지만 인간의 근본적인 부패성이 인간의 생각을 악하게 한다는 사실을 지적한 바 있습니다. 이것은 인간의 부패성으로 말미암아 지적으로나 도덕적으로나 실천적으로나 이 세상을 변화시킬 수 없다는 능력의 한계를 지적하는 것입니다.
그 결과 인간 세상에서는 장래 일이 어떻게 변하게 될지 아무도 예측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에 전도자는 이 세상에서 지혜자를 찾아 볼 수 없다는 아쉬움과 더불어 지혜의 근원인 하나님께 시선을 돌립니다.
전도자가 하나님께 시선을 돌리는 것은 이 세상에서는 미래를 예측할 수 있는 지혜자를 찾을 수 없다는 사실에 대한 자연스런 결과입니다.
전도자는 8장에서 지혜를 찬양합니다. 이것은 인간의 한계를 말한 것과 모순되는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전도자의 의도는 무엇일까요? 비록 인간의 부패성으로 말미암아 지혜가 온전히 그 능력을 발휘하지는 않지만 희미하게나마 지혜의 능력을 발휘할 수 있음을 말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1절 누가 지혜자와 같으며 누가 사물의 이치는 아는 자이냐 사람의 지혜는 그의 얼굴에 광채가 나게 하나니 그의 얼굴의 사나운 것이 변하느니라
사람의 얼굴은 속마음을 그대로 드러내기 마련입니다. 물론 산전수전 다 겪은 나이든 분이나 노련한 사람일수록 속마음을 잘 드러내지 않습니다. 처한 환경이나 형편에 따라 안색이 변하는 일이 드뭅니다.
분명 그러하기는 하나 얼굴은 속마음을 드러냅니다. 이것은 숨기려고 해도 숨길 수 없고, 감추려고 해도 감출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얼굴에는 내 형편과 내 처지가 그대로 드러나는 것입니다.
환자는 병색으로 가득합니다. 근심 걱정이 있는 사람은 수심이 가득합니다. 될 것도 안 되고 매사 가로막히면 짜증과 신경질로 자기도 모르게 우거지상을 하게 됩니다. 배신을 당하면 격분하여 얼굴을 붉힙니다. 상처로 고통스러울 땐 얼굴이 일그러집니다.
하지만 일이 술술 풀리고 잘되는 사람은 얼굴에 미소가 가득합니다. 더욱이 속을 썩이던 문제가 해결되면 앓던 이가 빠진 듯 시원하고 통쾌하여 마음은 날아갈 듯 가볍고 얼굴도 그렇게 훤할 수 없습니다.
이처럼 사람의 마음 상태는 얼굴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이에 대해 성경은 잠언 15장 13절에서는 “마음의 즐거움은 얼굴을 빛나게 하여도 마음의 근심은 심령을 상하게 하느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미국 서부개척 당시 많은 이들이 앞 다퉈 서부를 향해 떠났습니다. 어떤 이들은 부지런한 손을 놀려 광활한 지역을 차지했으나 어떤 이들은 노다지를 꿈꾸다 영영 돌아오지 못했습니다. 비명횡사하거나 객사했고, 심지어 인디언과의 충돌 속에 죽임을 당하기까지 했습니다.
이러한 와중에 몬태나 주 배노크에 살던 몇몇 사람들도 금광을 찾아 나섰다가 실패하고서 힘없이 고향으로 돌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때 이상한 돌 하나를 주웠는데, 그게 금이었고 주변엔 사금이 널려 있었습니다. 노다지를 발견한 것입니다.
며칠 동안 정신없이 사금을 채취했으나 음식이 떨어지고 장비도 부족해서 더 어찌할 방법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모든 것을 비밀에 부치고 배노크의 집으로 돌아가 음식과 장비를 새롭게 챙겨서 다시 오기로 단단히 약속을 했습니다.
그런데 떠나는 날, 약속된 장소에 백여 명의 사람들이 따라나섰습니다. 누가 비밀을 누설했는지 모두 알고 따라나선 것입니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비밀을 누설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도 모두 알게 된 것은 그들의 얼굴이 이미 말하고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얼굴에서 유난히 빛이 나는 사람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에게서 빛이 날까요? 전도자는 사물의 이치를 아는 지혜자의 얼굴에서 광채가 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어려움이 다가와도 거기에 담긴 하나님의 뜻을 알고, 하나님께서 보고 계심을 알면 걱정할 일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물의 이치를 모르면 모든 것이 불만스럽고, 원망이 끊이지 않습니다. 그러다보면 마음이 거칠어지고 얼굴도 사나와지고 매사에 싸우려고만 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빛나는 얼굴을 만들기 위해서 비싼 화장품을 사용하지만 아무리 비싼 것을 발라도 하룻밤 자고 나면 광채가 다 없어집니다.
학자나 현인의 이미지가 거의 비슷하고, 그들의 얼굴에 나타나는 광채는 사물의 이치를 깨달아 아는 지혜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사리를 아는 것 중 최고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뜻과 섭리 가운데 움직이고 있음을 아는 것입니다. 이런 이치를 아는 사람을 하나님을 경외합니다. 하나님은 이런 자의 심령에 거하시며 그의 얼굴을 빛나게 해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얼굴만 보면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있습니다. 얼굴에 빛이 나면 기도 많이 한 사람이고, 얼굴에 기름기가 좔좔 흐르는 사람은 잘 먹은 사람입니다.
하나님과 함께 했던 모세의 얼굴에서는 사람들이 두려워서 쳐다볼 수 없을 정도로 광채가 났습니다. 지혜는 사람의 얼굴을 변화시킬 정도로 큰 힘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전에 그의 얼굴이 욕망과 죄악으로 사나운 얼굴이었어도 하나님의 지혜를 지니게 되면 그 지혜는 그의 얼굴을 빛나게 하는 것입니다.
2절 내가 권하노라 왕의 명령을 지키라 이미 하나님을 가리켜 맹세하였음이니라
전도자는 2절부터 계속해서 왕에 대한 자세를 교훈하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 상황에서는 왕 대신에 대통령이나 지도자를 대상으로 적용하면 되겠습니다.
왕의 명령을 지켜야 하는 하나님께서 왕을 세우셨기 때문입니다. 모든 권세는 위로부터 주어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이 세운 왕의 권세 앞에 잠잠해야 하고, 왕의 명령을 지켜야 합니다.
왕의 명령을 지켜야 하는 또 하나의 이유는 왕을 세울 때에 그 앞에서 충성하겠다고 맹세를 하였기 때문입니다. 어느 나라이든 누가 그 나라의 왕으로 세워 졌다면 이는 하나님께서 세우신 바요, 백성들은 그 왕의 지도를 따르기로 맹세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 명령을 지켜야 한다는 것입니다.
3절 왕 앞에서 물러가기를 급하게 하지 말며 악한 것을 일삼지 말라 왕은 자기가 하고자 하는 것을 다 행함이니라
왕 앞에서 물러간다는 말은 왕의 말에 불복종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전도자는 왕에게 쉽게 등 돌리는 일을 하지 말고 악한 것을 일삼지 말라고 말합니다. 이 말을 바꾸어 말하면 왕의 명령을 따르지 아니하거나 거스르거나 반항하는 것이 악한 일이 된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상황에서 말하자면 대통령과 정부의 정책을 반대하는 반정부 시위나 데모 같은 일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시위나 데모를 하는 이유는 권력이 국민들에게 있다는 생각을 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자신들이 지도자를 뽑아 권력을 부여한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마음에 들지 않으면 권력을 되돌려 받으려 합니다. 그러나 지도자의 통치권은 궁극적으로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전도자는 절대적 통치권자인 왕의 배후에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염두에 두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4절 왕의 말은 권능이 있나니 누가 그에게 이르기를 왕께서 무엇을 하시나이까 할 수 있으랴
왕의 말에 권능이 있다는 것은 곧 왕이 하나님으로부터 세움을 입었다는 증거입니다. 왕의 자리에 올라서기만 하면 왕의 실력이 나오는 것 역시 하나님께서 그 자리에 올라선 자에게 권능을 주시기 때문에 그렇게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아무라도 왕에게 “무엇을 하시나이까”라고 항의를 하여서는 안 되는 것은 왕은 그 나라에서 누구보다도 큰 권능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누구라도 왕보다 나을 수가 없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를 왕으로 세우시고 그에게 왕이 될 만한 권능을 주시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그러므로 왕을 대항하는 것은 하나님께 대항하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대항하여 이길 수가 없듯이 왕을 대항하여 이길 수는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국가에는 왕이 된 자에게 능력과 권한을 주시고, 교회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목사에게, 가정에는 가장에게 권한과 능력을 주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세우신 질서요, 통치의 법입니다.
그러므로 그것을 떠나서도 안 되고 무시해서도 안 되면 그것을 인정하지 아니하는 것은 월권이요, 하나님을 무시하는 행위에 속하는 것입니다.
5절 명령을 지키는 자는 불행을 알지 못하리라 지혜자의 마음은 때와 판단을 분변하나니
명령을 지키는 자는 불행을 알지 못하리라는 하심은 명령을 지키지 아니하는 자는 불행을 당하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명령을 지키는 자가 불행을 알지 못하리라는 말씀과 지혜자를 결부시킨 것을 볼 때 왕의 명령을 거스리는 것은 지혜 없는 우매자의 행동임을 우회적으로 지적한 것입니다.
지혜자는 이와 같이 때와 판단을 분변하여 지혜롭게 살아가지만 우매자는 명령을 거스려 불행을 자초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왕을 세우시되 시기에 맞추어서 적절하게 이끌도록 왕에게 나라의 전권을 맡기십니다. 지혜자는 그것을 분변하여 왕을 보조하지만 우매자는 외면하다가 넘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6절 무슨 일에든지 때와 판단이 있으므로 사람에게 임하는 화가 심함이니라
모든 일에는 때와 판단이 있기 마련입니다. 매번 만나는 일에 대하여 옳고 그름을 가려내어 결정하고 선택하며 사는 것이 인생사이기 때문에 반드시 때와 판단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 판단이 다 적중하는 것이 아닙니다.
때에 적중하지 못하는 판단의 실패로 인하여 어려움을 당하게 되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무릇 무슨 일에든지 때에 맞춰 정확한 판단을 해야 하지만 그럴만한 능력이 없기 때문에 사람들은 화를 면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7절 사람이 장래 일을 알지 못하나니 장래 일을 가르칠 자가 누구이랴
사람이 화를 면하지 못하는 이유 중의 하나가 바로 사람이 장래 일을 알지 못하는 한계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에게 장래 일을 알 수 있도록 지으시지 아니하셨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사람이 장차 무슨 일을 만날는지 모르고 사는 것입니다.
만약 누가 그것을 안다고 하면 다 거짓이요, 속이는 것이요, 또 속고 있는 것입니다. 장래 일을 알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장래 일을 알고 계신 이는 오직 하나님 한 분 뿐이십니다.
사람들이 장래를 알고 싶어서 사주도 보고 관상도 보고 점도치고 예언도 받아 보고 하지만 정확한 것은 아무도 모릅니다. 하나님께서 감추어 놓으신 사람의 장래사를 사람이 알려고 파고드는 것은 참람된 것이요, 그것을 말하는 것은 거짓된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사람의 장래사를 철저하게 가려 놓으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하나님을 경외하도록 하시려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장래 일을 알지 못하면 불안해하는 것이고, 의지할 신적 존재가 필요하여 하나님을 찾게 되는 것입니다.
8절 바람을 주장하여 바람을 움직이게 할 사람도 없고 죽는 날을 주장할 자도 없으며 전쟁할 때에 모면할 사람도 없으니 악이 그의 주민들을 건져낼 수는 없느니라
사람이 할 수 없는 일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바람을 주장할 수 없고, 죽는 날을 주장할 수 없습니다. 전쟁이 덮쳐오면 모면할 자가 없고 재난의 날에 피할 자가 없습니다. 악한 일을 하고 살아날 길도 없습니다. 악에게 넘겨진 자들을 악이 구해 내지도 못합니다.
인생은 누군가에 이끌려서 이 세상에 와서 누군가의 기운에 이끌려 살다가 누군가의 손에 이끌려 그 정하시는 곳으로 가게 됩니다. 누군가의 주장에 의해서만 되어져 가는 것, 이것이 인생입니다.
인간은 죽음의 날을 연기시킬 수 없습니다. 모든 권세를 지닌 왕이라도 자기 신하들 중의 가장 고귀한 자의 수명을 연장시킬 수는 없습니다. 의사도 약사도 죽음을 막을 수 없습니다. 우리의 날들은 정해져 있어서 지정된 시각이 닥쳐오면 누구도 죽음의 일격을 피할 도리가 없습니다.
누구도 자기 목숨을 마음대로 하지 못합니다. 누구도 꺼져가는 자기 숨결을 붙잡지 못합니다. 누구도 자기 죽을 날을 마음대로 주장하지 못합니다. 그러면 주장하시는 분은 누구입니까? 오직 유일하신 창조주 전지전능하신 하나님 우리 아버지요, 우리들의 구주 예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의 자연만물을 주장하시고, 우리 인간에게 생명을 주시기도 하시고 거두시기도 하십니다. 전쟁도 주장하시고, 재난이나 기근도 하나님께서 주장하시는 것입니다. 여기에 대하여 누가 이의를 제기할 수 있습니까?
로마서 9장 20절입니다. “이 사람아 네가 누구이기에 감히 하나님께 반문하느냐 지음을 받은 물건이 지은 자에게 어찌 나를 이같이 만들었느냐 말하겠느냐.” 피조물은 창조주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대해서 말 할 것이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오라고 부르시면 피하려 하지 말고 가야 합니다. 그러나 죽음을 앞에 두고 적극적으로 맞이하지 못하고 끌려가는 경우가 많습니다. 피하고 피하다가 결국에는 파도에 휩쓸러 가듯 어쩌지 못하고 끌려가는 것입니다.
기도문 하나를 소개하고 마치겠습니다.
20세기의 유명한 신학자 중 한 사람인 라인홀더 니이버라는 사람이 이런 기도를 했습니다. “고칠 수 있는 것에 대해서는 그것을 고칠 수 있는 용기를 주시고, 고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그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 냉정함을 주시옵소서. 그리고 고칠 수 있는 것과 고칠 수 없는 것을 식별할 수 있는 지혜를 주시옵소서. 저에게 세 가지의 능력을 허락하시옵소서. 하나는 용기이며, 또 하나는 냉정한 침착성, 마지막으로 지혜를 주시옵소서.”
라인홀더 니이버는 자신이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을 구분하고 할 수 없는 것은 겸허히 받아들이려 했습니다.
사람들은 흔히 우리가 ‘하면 된다. 안 되면 되게 하라’는 식으로 좀 큰 소리를 쳐보지만 죽음이라는 시간이 다가올 때 그런 것은 통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능력에 한계가 있습니다. 한계에 부딪힐 때 어떤 모양으로 수용하느냐가 중요합니다.
우리로서 어쩔 수 없는 일들이 닥쳐올 때, 고칠 수 없고 변화시킬 수 없고 그대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일들에 부딪칠 때 인간의 한계와 인간의 연약함과 무능함을 인정하고 하나님 앞에 그 모든 것을 내려놓고 맡기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을 수 있는 성도들이 됩시다.
한계에 도전하는 인생
전도서 8장 1~8절 / 이동아목사
신창원은 감옥에 있을 때부터 곤충학자인 ‘지그 지글러’의 ‘정상에서 만납시다’라는 책을 좋아했습니다. 모두 열 번 이상 읽었습니다. 그 책은 인간 능력의 한계를 극복하는 방법을 가르쳐주고 있었습니다. 그 책은 치밀한 계획, 사전답사, 신중한 방법선택, 연습, 대담한 행동과 상대방의 허를 찌르는 의도만 있다면 0.5퍼센트의 가능성을 99퍼센트까지 올릴 수 있다고 가르치고 있었습니다.
<정상에서 만납시다>라는 책은 세계적인 베스트셀러로 국내에도 수많은 독자들을 확보하고 있습니다. 작가 지그 지글러는 오늘날 가장 유명한 대중 연설가 중 한 사람이며 '최고의 동기 부여가', '자기 계발과 성공 학의 대가'로 알려져 있습니다. 3백만 명 이상의 사람들이 그의 강연을 직접 들었으며 수백만 명이 테이프와 비디오를 통해 영감을 얻었습니다.
신창원은 한번은 워낙 급하게 쫓기다가 건물 5층에서 그냥 뛰어내린 적도 있었습니다. 당연히 발목뼈가 상했을 것으로 생각했는데 의외로 발톱 하나 다치지 않았습니다. 그 다음부터는 더 높은 곳에서 뛰어내려도 아무렇지 않았습니다. 그걸 보면서 인간의 능력에는 한계가 없다는 걸 그는 실감했습니다.
신창원이 권력자, 가진 자와의 전쟁을 시작하겠다며 전두환(全斗煥),노태우(盧泰愚)전 대통령이 살고 있는 서울 연희동을 찾아간 사실이 드러났습니다.
신은 경찰에 압수된 일기장을 통해 “이제 나는 인간이기를 포기하고 전쟁을 선포한다”며 “나는 인간을 죽일 수 있는 무기를 만들고 사용하는 법을 알고 있으므로 전쟁 후의 피해는 상상을 초월할 것”이라고 썼습니다.
박남진 원장(익산신경정신과)은 신창원의 행각을 과대망상에 사로잡힌 ‘영웅심리’의 표현으로 분석했습니다. 박원장은 “신창원의 일기장에 나타난 ‘전쟁선포’와 같은 말은 자신이 사회적 지탄을 받고 있는 사람들을 응징함으로써 자신을 ‘영웅’으로 포장하려 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당시의 신창원 신드롬은 사람들이 그의 범죄행각을 통해 우리 사회의 온갖 부조리와 비리, 모순, 추태 등을 적나라하게 보면서 대리만족을 했다는데 가장 큰 원인이 있습니다. PC통신에 ‘신창원 동호회’가 생기고 중학교 1학년 70명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에서 50명 가까운 학생들이 “신창원은 좋은 사람이며, 검거돼서 안타깝다”는 반응을 보인 것이 이를 여실히 입증한 것입니다.
경찰은 전자제품 수리공인 김모(48)씨의 신고를 받고 경찰관과 전경 등 46명을 출동시켜 아파트를 에워싼 뒤 문을 열고 들어가 신을 검거했습니다. 신은 경찰이 문을 두드리자 처음에는 문을 열기를 거부하다 상황이 악화된 점을 알았는지 스스로 자신이 신임을 확인하고 문을 열어줬습니다. 이와 동시에 이만근 경사 등 베테랑 경찰관 3명은 뒷 베란다를 통해 들어가 신을 덮쳤습니다.
경찰은 신의 도주에 대비, 경찰관이 중무장하고 출동했으나 신이 "도망가지 않을 테니 걱정하지 말라고 하는 등 비교적 순수히 검거에 응했다"고 말했습니다. 신창원은 대도 조세형과 조폭 조양은 이후로 가장 유명한 범죄자의 화려한 도피행각은 이렇게 막을 내렸습니다.
그동안 동원된 연인원만 수천 명에, 수많은 시간과 노력을 들이면서도, 2년 6개월 간 200여건에 10억 이상의 강절도 행각을 벌인 신창원은 전자제품 수리공의 신고로 검거했습니다.
독일의 실존주의 철학자는 야스퍼스 이러한 상황을 "한계상황" 이란 말을 했습니다. 그 한계 상황은 인간의 힘으로 어쩔 수 없고/면할 수 없고/변화시킬 수도 없는 실존적인 현실을 말합니다. 실존적인 한계상황/출생/죄/죽음/질병/고통이 있습니다. 때문에 인간은 이 고통을 피할 수 없어 직면하여 느끼며 살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사주팔자로 알고 운영에 맞겨 살며 체념하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고통을 통해서 한계상황을 통해서 절대자인 신에게 가까이 나아갈 수 있는 길을 모색한다" 고 말했습니다..
이렇게 볼 때 신창원이는 자기의 한계를 알지 못하고 완전 범죄를 행하여 자신을 영웅시하였고 지그 지글러의 사상을 온전히 신앙처럼 신뢰한 것입니다. 잘못된 사상 잘못된 이론을 믿고 신뢰하여 결국은 지그 지글러의 설이 진리가 아님을 깨달았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잘못된 지식 잘못된 신념 잘못된 이론을 쫓을 땐 온전히 패가망신을 당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의 인생을 책임지지 않습니다.
오늘 본문의 솔로몬은 하나님 앞에 인간의 유한한 한계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인간 모두는 이 한계적인 상황을 깨닫게 될 때에 겸손하게 되고 여기서부터 우리는 한계를 뛰어넘는 십자가의 복음을 예수 그리스도를 요청하게 되는 것입니다. 아직도 자기 힘을 믿고 자신을 의지하면서 사는 인간은 주님의 말씀을 신뢰하지 않습니다 .
당신은 지금 무엇을 신뢰하며 살고 있습니까?
건강 젊음 물질 재능 사람 그 무엇입니까? 바로 그것이 신뢰할만한 가치가 있는 것입니까? 목숨을 걸어도 되는 것입니까?
본문의 솔로몬은 세 가지 면에서 인간의 한계성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1. 인생의 권세의 한계
인간의 권세나 권력의 한계가 있습니다. 2절에 "왕의 명령을 지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대통령 중심제에서 대통령의 권한은 막강합니다. 인간은 권력이나 권세가 무한하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권세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1)권력자가 다 개인적인 종말을 맞습니다.
레이건이 금년 90세입니다. 렌시 여사가 인터뷰한 기사를 보니까 레이건 자신이 대통령이었던 것도 알지 못합니다. 자신의 기억 속에도 그 당당한 권세가 안개처럼 사라져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100세까지는 동반자로 살았으면 한다고 소망했습니다. 언젠가는 죽습니다. 모든 사람의 뇌리에서 사라져 가고 있습니다.
2)권력은 이양되게 마련입니다.
임기가 끝나면 권좌에서 물러나야 합니다.
인간세상에서 절대 권력자는 왕입니다. 왕은 하고자 하면 무엇이든지 합니다.
권력에 저항하는 자는 견디지 못합니다. 꺾이든지 쿠테타를 일으켜 정권을 잡든지 하는 것입니다.
이승만 정권의 3.15 부정선거가 기폭제가 되어 4.19 학생 의거가 일어나고 이승만은 당시 "국민이 원한다면" 이라는 말을 남기고 실각하게 됩니다. 그 후 장면 내각이 들어서지만 무능함을 보이다가 1961년 5.16혁명으로 단명하게 됩니다. 윤보선 정권도 4.19의거로 무릎을 꿇고
박정희가 5.16군사혁명으로 정권을 잡은 뒤 1979년 10월 26일 김재규에 의해 박정희 전대통령이 시해되면서 18년 간의 독재와 유신체재가 막을 내리게 됩니다. 최규화 대통령은 전두환에 의해서 권좌를 물리고 전두환 정권도 노태우 정권에 권좌를 내어주고 백담사로 유배를 갔으며 노태우 정권도 김영삼 정권에 의해서 감옥을 갔었습니다. 김영삼 정권도 김대중 정권에 의해 권자를 내어주고 이젠 김대중 정권이 권좌에서 내려올 시간이 다가오고 있는 것입니다.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이요, 권불십년(權不十年)이라. 절대권력은 없는 것입니다.
필리핀 아로요 대통령은 전 대통령 에스트라다를 탄핵제판을 통해 구치소에 수감하였습니다. 뇌물수수, 부정부패, 헌법위반, 국민 기만.. 아시아 지도자 중 처음으로 탄핵재판에 회부된 필리핀 에스트라다 대통령의 혐의 내용입니다. 부통령이 있던 아로요가 실권을 잡으니까 법과 지시대로 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녀는 시민혁명으로 쫓겨난 에스트라다 정권의 부통령이었고, 코라손 아키노 대통령에 이어 2번째 필리핀 여성 대통령이기도 합니다. 아로요 대통령으로 말할 것 같으면 150cm도 안 되는 단신의 여성으로 그 권세를 누리는 것입니다.
이렇게 절대권력이 아닌 인간의 왕에게 권력에 명령을 지켜야 하고 거역할 수 없는 것인데 하물며 왕이신 하나님께 거역하고 그 말씀을 불순종한다면 어떻게 되겠느냐는 것입니다.
시편5:2 "나의 왕, 나의 하나님이여!"라고 했고 시10:16"여호와께서는 영원무궁하도록 왕이시니" 시44:4 "주는 나의 왕이시니"라고 했습니다.
이스라엘의 전성기에 다윗 왕의 입으로 "하나님은 나의 왕이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3번째 왕인 솔로몬 왕은 하나님은 왕이시니 너희는 그 왕의 명령을 따르라"고 말합니다.
권력 위에 권력이 있고 왕위에 왕이 있음을 깨닫게 되면 모든 권력자들이 겸손해 질 수 있는 것입니다
하늘나라를 다스리시는 주님의 주권에 삶을 맡기고 살아야 합니다.
하늘과 땅의 권세를 가시신 우리 주님 외에는 어느 권세도 영원하지 않습니다. 그분은 영원히 다스리실 만왕의 왕이신 것입니다. 우리는 영원한 하나님의 자녀인 황태자인 것입니다. 영원히 썩지 않고 쇠하지 아니할 기업을 무를 자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능력의 말씀에 순종하여 겸손하게 주의 뜻을 쫓아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2. 인생의 예지의 한계
"무릇 명령을 지키는 자는 화를 모르리라 지혜자의 마음은 시기와 판단을 분변하나니 무론 무슨 일에든지 시기와 판단이 있으므로 사람에게 임하는 화가 심함이니라 사람이 장래 일을 알지 못하나니 장래 일을 가르칠 자가 누구이랴"(전8:5-7)
(약 4:14)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 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뇨 너희는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
전3:11)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고 또 사람에게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 그러나 하나님의 하시는 일의 시종을 사람으로 측량할 수 없게 하셨도다"
(전7:14) "형통한 날에는 기뻐하고 곤 고한 날에는 생각하라 하나님이 이 두 가지를 병행하게 하사 사람으로 그 장래 일을 능히 헤아려 알지 못하게 하셨느니라"
인간은 내일 일을 알지 못합니다. 한순간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릅니다. 그러므로 주님을 의지합니다. 기도합니다. 말씀을 붙듭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말씀을 통하여 성령의 하심을 통하여 시기를 압니다. 판단을 압니다. 날마다 주시는 에언의 말씀으로 시기를 분별하게 하십니다.
지혜자는 지금이 무슨 일을 해야 할 시기인지, 어떤 때인지를 압니다. 아무리 지혜로운 척해도 때와 장소를 분별할 줄 모르는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천하에 범사가 기한이 있고 모든 목적이 이룰 때가 있나니 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으며 심을 때가 있고 심은 것을 뽑을 때가 있으며 죽일 때가 있고 치료시킬 때가 있으며 헐 때가 있고 세울 때가 있으며 울 때가 있고 웃을 때가 있으며 슬퍼할 때가 있고 춤출 때가 있으며 돌을 던져 버릴 때가 있고 돌을 거둘 때가 있으며 안을 때가 있고 안는 일을 멀리 할 때가 있으며 찾을 때가 있고 잃을 때가 있으며 지킬 때가 있고 버릴 때가 있으며 찢을 때가 있고 꿰맬 때가 있으며 잠잠할 때가 있고 말할 때가 있으며 사랑할 때가 있고 미워할 때가 있으며 전쟁할 때가 있고 평화할 때가 있느니라"(전 3:1-8)
각각 주어진 때에는 그 일을 해야 합니다. 지나가 버린 뒤에 그 일을 하려면 불가능하기도 하고 설사 가능하다해도 몇 갑절의 더 큰 수고를 감내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배울 때 배우십시오. 일할 때 일하십시오. 헌신할 때 헌신하십시오. 봉사할 때 봉사하십시오. 돈벌 때 돈을 버십시오. 범사에 때가 있는 것입니다.
7절 사람의 장래 일을 알지 못하나니 장래 일을 가르칠 자 누구이랴 솔로몬의 그 말의 결론은 오직 세상을 창조하시고 다스리시며 섭리하시는 우리 주님의 손안에 미래가 약속된 내일이 있다는 말입니다.
3. 인생의 능력의 한계
(전 8:8) 생기를 주장하여 생기로 머무르게 할 사람도 없고 죽는 날을 주장할 자도 없고 전쟁할 때에 모면할 자도 없으며 악이 행악자를 건져낼 수도 없느니라
누가 생명을 주장하며 머물게 할 수 있느냐 / 달려가는 기차는 세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생명의 생기는 주장하지 못합니다.
죽는 날을 주장할 수 없고 인간의 능력은 한계가 있는 것입니다.
김우중이 누구입니까? ‘세계경영의 전도사’ ‘재계 서열 2위의 재벌총수’ ‘한국 최고의 비즈니스맨’이라고 불리던 사람입니다. 1967년 서울 충무로 뒷골목의 10평 남짓한 사무실에서 자본금 500만원에 5명의 직원으로 출발한 지 30년 만에 정말 ‘꿈’같은 신화를 창조한 사람입니다. 대우는 IMF 직전까지만 해도 고용인원 32만(국내 10만, 해외 22만)명, 해외지사·현지법인·연구소·건설현장 등 글로벌 네트워크 590개(110개국), 총매출 71조원, 총수출 151억달러라는 경이로운 실적을 쌓아왔던 기업이었습니다. 그 기업의 총수가 바로 김우중입니다.
그는 한때 젊은이들과 샐러리맨들의 살아 있는 신화이자 우상이었으며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는 화두로 세인의 찬사와 이목을 집중시킨 인물이었습니다. 그런 사람이 이제는 ‘세계는 넓고 숨을 곳은 많다’는 식의 조롱을 받으며 도피자 신세로 전락한 것입니다. 그 원인을 그의 무능한 자신을 신뢰한 사례인 것입니다.
첫째는 김우중은 팽창된 자신감 또는 과대 망상적 사고자입니다. 그가 자서전에서 언급한 ‘도사론’은 그가 자신을 얼마나 과대 포장하고 있는가를 보여줍니다.
“100m 높이의 산을 마음대로 넘나드는 도사가 있습니다. 그도 처음에는 우리처럼 1m밖에 뛰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100m의 산을 뛰어넘을 목표를 세우고 날마다 조금씩 장대 높이를 높여가며 높이뛰기 연습을 했을 것입니다. 사람의 능력은 무한합니다. 요는 그 잠재된 능력을 끄집어내 사용하느냐, 않느냐에 달려 있을 뿐입니다. 도사와 범인의 차이도 따지고 보면 거기서 생깁니다. 겸연쩍은 얘기지만 내 별명이 ‘도사’다고 자신 있게 말했던 그였습니다.
둘째 특징은 생각과 말, 행동 속도가 타의 추종을 불허할 만큼 앞서갔습니다. 김우중과 대화한 소감을 한 기자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김회장의 말은 말보다 생각이 앞선다. 그래서 한 문장이 끝나기도 전에 다음 문장이 시작되는 까닭에 말이 겹쳐 나오는 경우가 많다.”
아이디어가 넘치다 보니 말이 그 아이디어를 담아내기에도 바쁜 것입니다. 이때는 말을 한다기보다 ‘말이 밀려나오는(pressure of speech)’ 형국이 된다는 것이지요.
김우중은 잠을 4시간 이상 자지 않고, 식사를 해도 가장 빨리 나오고 빨리 먹을 수 있다는 이유로 항상 설렁탕과 비빔밥만 시켜 먹었습니다. 낮에도 30분마다 사람을 바꿔 만날 만큼 바쁘게 움직여서, 체력 좋고 기력이 왕성한 총각만을 수행비서로 쓰는데도 그들의 체력이 달려 1∼2년 단위로 비서가 바뀌었다고 합니다.
지난 연말 김우중은 대우직원 모두에게 작별 서한을 보냈다. 그의 마지막 작별인사는 회한과 허무로 얼룩진다.
“여러분과 함께 했던 꿈과 이상 또한 이제 가눌 수 없는 고독이 돼 제 여생의 반려로 남게 되었습니다. (중략) 제가 기억 속에 묻히는 이 순간을 계기로 대우와 임직원 여러분이 과거로부터 자유로워지고…”
결과적으로 김우중은 실패했습니다. 실패해서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문제가 있었기 때문에 실패한 것입니다. 인간의 능력의 한계를 인정하지 않고 자신을 믿고 그 생각과 계획이 수포로 돌아간 것은 인간의 능력의 한계를 들어낸 대표적인 사례인 것입니다. 인간의 능력의 한계를 모르고 자만하고 교만하여 말씀보다 기도보다 앞선 불신앙은 이러한 패망과 실패로 우리의 삶을 인도합니다.
메이어 박사 / "문제를 붙잡은 당신은 손을 하나님의 손안에 집어넣으시오 그리고 문제 때문에 고민하지 말고 문제와 당신 사이에 하나님이 개입하게 하십시오 그렇게 되면 나의 문제가 하나님의 문제가 되고 나의 고민이 하나님의 고민이 되고, 나의 기쁨이 하나님의 기쁨이 되며 하나님의 기쁨이 나의 기쁨이 되는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4. 우리의 한계를 극복할 우리의 왕 / 전능하신 하나님
(전 8:1-2) "지혜 자와 같은 자 누구며 사리의 해석을 아는 자 누구냐 사람의 지혜는 그 사람 의 얼굴에 광채가 나게 하나니 그 얼굴의 사나운 것이 변하느니라(2) 내가 권하노니 왕의 명령을 지키라 이미 하나님을 가리켜 맹세하였음이니라"
1) 세상을 살아갈 능력을 주십니다.
빌4:13/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부활이요 생명이신 주님을 믿고 신뢰할 때 약속의 말씀을 붙들고 승리 한다.
2) 환난 속에서도 건지십니다.
(사 43:1)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이제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조성하신 자가 이제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사 43:2) 네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에 내가 함께할 것이라 강을 건널 때에 물이 너를 침몰치 못할 것이며 네가 불 가운데로 행할 때에 타지도 아니할 것이요 불꽃이 너를 사르지도 못하리니
3) 죄사함의 은총을 주십니다.
(엡1:6-7) "이는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榮光)을 찬미(讚美)하게 하려는 것이라(7)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 사함을 받았으니"
(시85:2) "주의 백성의 죄악을 사하시고 저희 모든 죄를 덮으셨나이다(셀라)"
(사1:18)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辯論)하자 너희 죄가 주홍 같을찌 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같이 붉을찌라도 양털같이 되리라"
4) 모든 질병에서 우리를 치유하십니다.
(사53:5)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눅6:19) "온 무리가 예수를 만지려고 힘쓰니 이는 능력이 예수께로 나서 모든 사람을 낫 게 함이러라"
(시103:3) "저가 네 모든 죄악을 사하시며 네 모든 병을 고치시며"
5) 우리를 도와주십니다.
(사41:10)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니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니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 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
"지혜 자와 같은 자 누구며 사리의 해석을 아는 자 누구냐 사람의 지혜는 그 사람의 얼굴에 광채가 나게 하나니 그 얼굴의 사나운 것이 변하느니라"(전8:1)
얼굴이 빛나는 사람이 지혜자라고 말합니다. 어떤 경우에 사람은 얼굴이 빛나게 됩니까? 잠언 15:13을 보면 "마음의 즐거움은 얼굴을 빛나게 하여도 마음의 근심은 심령을 상하게 한다"고 했습니다. 얼굴이 빛나는 사람은 마음에 늘 즐거움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항상 기뻐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바울도 "주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빌4:4)고 했습니다. 우리는 왜 기뻐해야만 합니다. 그리고 기뻐할 때 우리에게는 어떤 유익이 있습니까? 기쁨은 사람에게 약이 되지만 심령의 근심은 뼈까지 마르게 합니다. 근심은 마음의 고통으로만 끝나는 것이 아니라 건강까지도 해치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마다 기뻐하기 싫어서 기뻐하지 않는 사람은 없습니다. 상황과 환경을 바라볼 때 걱정과 염려가 앞섬으로 근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똑같은 입장이라도 장래에 대하여 소망과 좋아질 것이라는 확신을 가진 사람은 기뻐할 수 있습니다. 현실 때문에 기쁜 것이 아니라 앞으로 좋아질 미래의 상황을 내다보면서 오늘 기뻐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지혜자는 좋은 여건을 주셨으면 그 조건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며 기뻐합니다. 나쁜 형편 속에서도 이제 앞으로 하나님이 주실 축복을 바라보며 기뻐합니다. 결국 사람이 즐거워하거나 근심하는 것은 상황의 문제가 아니라 믿음의 차이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가진 지혜자의 얼굴은 항상 광채가 나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이런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에게도 희망과 용기를 주게 됩니다. 내가 적극적이고 소망적일 때 나와 비슷한 처지의 사람들이 나를 보고 힘을 얻을 수 있습니다. 내가 적극적이고 소망적일 수 있는 이유를 묻게 되고 우리는 그들을 주님 앞으로 인도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감사와 불평은 다같이 강력한 전염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결론
인간의 능력의 한계 권세의 한계 예지의 한계를 깨닫고 살아야 합니다. 사람에게 여러 가지 능력이 있습니다. 지적 능력 판단의 능력 경제적인 능력 성취능력 자제능력 등 많은 능력을 행사할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능력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능력을 주셔야 시련도, 세상을 이기고 사단을 이길 수 있습니다. 주의 영이 인도하셔야 옳고 그름을 판단할 수 잇는 지혜가 주어집니다.
내 인생의 왕되신 주님께 전폭적인 순종과 약속을 믿음으로 우리는 권세의 한계 예지의 한계 능력의 한계를 극복하여 승리할 수 있습니다.
권위에 복종하라
전도서 8장 1~8절 / 김상복목사
오늘 본문에 보면 사람의 얼굴에는 두 가지가 있답니다. 환한 얼굴과 굳은 얼굴입니다. 인생을 살수록 밝고 환해지는 얼굴이 있는 반면 굳고 딱딱해지는 얼굴이 있습니다. 환한 얼굴은 물론 행복하게 산 사람들의 얼굴이겠지요. 인생이 보람차고 즐겁고 만족스럽게 전개된 사람들의 얼굴일 것입니다. 반면 굳은 얼굴은 인생이 불행과 짜증과 불만으로 가득했던 사람들의 얼굴일 것입니다.
1절에 “지혜자와 같은 자 누구며 사리의 해석을 아는 자 누구냐? 사람의 지혜는 그 사람의 얼굴에 광채가 나게 하나니”라고 하였습니다. 지혜롭게 산 사람들은 얼굴에 광채가 나지만 어리석게 산 사람들은 얼굴이 사나와집니다. 그래서 여러분은 이 둘 중 하나를 날마다 선택해야 합니다. 광채 나는 얼굴입니까, 사나운 얼굴입니까? 그냥 되는 것은 없습니다. 제가 늘 말씀드렸듯이 “행복은 선택”입니다. “인생은 해석”입니다. 1절에 이 두 가지가 다 나옵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사리를 해석할 줄 아는 사람입니다. 좋게 해석한다는 것입니다. 복되게, 즐겁게, 보람 있게, 행복하게, 성공적으로 해석한다는 것입니다. 지혜롭게 살면 얼굴에 광채가 납니다.
그러나 인생을 제대로 해석하지 못하고 지속적으로 행복을 선택하지 못한 사람의 얼굴은 자꾸 굳어지고 사나워집니다. 영어성경은 이것을 “hard appearance"라고 표현했습니다. 왜 얼굴이 굳어집니까? 가슴에 스트레스와 어두움이 많으면 똑같은 사건을 놓고도 좋게 해석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내 밖에서 일어난 사건은 똑같은 것인데 그 사건을 해석하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바로 ‘나’입니다. 내가 어떻게 해석하고, 어떤 선택을 하고, 어떤 결정을 내리는가에 따라서 얼굴이 광채가 날 수도 있고 굳어질 수도 있습니다. 그것이 한 번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일평생 매일같이 사사건건 어떻게 해석하고 행동하느냐에 따라 점차적으로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어떤 얼굴을 만들어 가느냐는 여러분의 선택에 달려 있습니다.
지금까지 어떤 얼굴을 만들어 오셨습니까? 만약 그 동안 얼굴이 많이 굳어졌다면 오늘 방향을 돌이킬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침마다 우리에게 햇빛을 주시는 것처럼 날마다 우리에게 새로운 기회를 주십니다. 그동안 내 얼굴이 굳어지는 경향이 있었고, 굳어지는 방법으로 해석을 했고, 그런 방법으로 반응해 왔다면 오늘 중단하시고, 이 예배를 마친 후로는 다시 인생을 잘 해석하기 시작하셔서 얼굴이 환해지는 축복이 여러분과 저에게 있기를 원합니다.
그런데 얼굴이 환해지는 방법 중에 하나는 윗사람을 어떻게 대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본문 2절에 보면 “내가 권하노니 왕의 명령을 지키라. 이미 하나님을 가리켜 맹세하였음이니라. 왕 앞에서 물러가기를 급거히 말며 악한 것을 일삼지 말라. 왕은 그 하고자 하는 것을 다 행함이니라. 왕의 말은 권능이 있나니 누가 이르기를 왕께서 무엇을 하시나이까 할 수 있으랴” 하였습니다. 반드시 왕만이 아니라 윗사람을 말합니다. 나라에는 왕이, 회사에는 사장이, 교회에는 목사님들과 장로님들이 계십니다. 가정에는 아버지와 어머니,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계십니다. 대학교에는 총장과 학장과 교수가 있습니다. 아이들 중에도 큰 아이, 둘째, 셋째가 있습니다. 즉 이 세상에는 하나님께서 당신의 뜻을 이루시기 위하여 친히 제정하신 권위의 구조가 있고 힘의 균형이 있습니다. 그래서 정부의 관리들을 가리켜 ‘하나님의 사역자’(Ministers of God)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구조를 통해서 사람들을 보호하시고, 하나님의 뜻을 전달하시고, 삶을 감독하십니다. 사람들에게 가장 효과적인 인생을 살게 하고 또 하나님의 뜻을 가장 효과적으로 이루시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므로 이 권위자들 앞에서 우리가 어떻게 행동하는가에 따라서 우리의 행복과 얼굴이 결정된다는 것입니다.
첫째로, 가정 이야기부터 해 보십시다. “자녀들아 네 부모를 공경하라. 이것이 옳으니라. 약속 있는 첫 계명이니 네가 이 땅에서 잘되고 장수하리라.” 부모를 공경하면 이 땅에서 잘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땅에서 보람과 즐거움과 만족과 행복을 느껴서 얼굴이 환하게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부모들이 자녀를 잘 키워서 부모와 윗사람을 잘 받들고 기쁘게 하는 자녀들을 만들면 그들이 이 땅에서 잘되고 장수할 뿐만 아니라 행복하고 성공적인 삶을 살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부모를 불순종하고 괴롭히는 자녀는 최소한 25-6년 동안 집에서 힘들게 하고 밖에 나가서도 그런 삶을 살게 됩니다. 학교에 가면 선생님들과 충돌하고, 직장에 가면 윗사람과 충돌하고, 사회에 덕이 되기는커녕 문제를 일으키게 됩니다. 그러면 본인은 편안한가요? 그렇지 않지요. 그러니까 자연히 마음이 불편하여 얼굴이 굳어질 수밖에 없지요. 행복한 삶을 살 수가 없어요.
지금 우리 사회는 이런 문제를 안고 있습니다. 우리 사회에 권위가 없어졌습니다. 권위자들이 모든 권위를 잃어버렸으며, 윗사람을 존중하고 존경하는 풍토가 점점 사라지고 있습니다. 대단히 큰 걱정입니다. 망하는 길이니까요. 요즘은 나이가 많은 사람을 우습게 보는 경향이 있어요. 나이가 많은 사람을 무시하는 시대가 되었어요. 그래서 서열을 파괴하고라도 나이가 젊은 사람을 세우려고 합니다. 나이가 젊어야 지혜롭습니까? 나이가 어려야 더 잘한다는 것입니까? 나이하고 무슨 상관이에요? 물론 나이만 가지고 권위가 서는 것은 아닙니다. 성경에도 “네 연소함을 업신여기지 못하게 하라”고 하였습니다. 즉 존경을 받는 사람은 존경받게 살아온 것입니다. 그러나 존경받게 살아오지 않았으면 아무리 나이가 많아도 존경을 받지 못하지요. 존경은 자기가 얻는 것이지 다른 사람에게 강요해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또 이상한 문화가 생겼습니다. 반항과 반대를 하고 데모를 해야 지성적인 것으로 오인되는 문화입니다. 최근에도 화물대란이 있고, 한총련의 시위가 있고, 날이면 날마다 그룹으로 모여서 법을 무시해 버립니다. 그 그룹이 강성이니까 정부가 꼼짝을 못해요. 아무리 법을 어겨도 속수무책입니다. 제가 제일 기가 막히게 생각하는 것이 데모할 때 경찰을 향해 화염병을 던지고 몽둥이로 때리는 것입니다. 전경들은 국방의 의무를 하기 위해서 나온 젊은이들입니다. 국가의 질서 안에서 행동하기 위해서 자기를 희생하고 나가있는 젊은이들을 향해 화염병을 던지면 어떻게 하자는 것입니까? 자기 자식 같은 아이들이요, 친구들이요, 동창생들이 아닙니까?
우리는 지금 뭔가 이상하게 되가는 현상들을 보고 있습니다. 윗사람이 뭘 하라고 하면 일종의 반항적인 기질이 있어야 개혁적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법을 어겨 감옥에 들락날락해야 경력에 도움이 된다고 말합니다. 그것 때문에 결국은 이름도 나고 출세도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젊은 국회의원을 인터뷰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어떻게 국회의원이 되었느냐고 물었더니, 대학생 때 학생회장을 했는데 엄청난 데모를 해서 감옥에 들어가게 되었고 그것 때문에 이제는 사회의 저명인사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만약에 이런 전통이 계속된다면 앞으로 국회의원이 되려면 데모를 하는 것이 가장 빠르다고 생각하겠지요. 이런 반항심만 키워서 결국 이 땅에는 권위에 복종하려는 사람들이 사라지고 있습니다. 즉 얼굴이 딱딱해질 수밖에 없는 문화가 이 땅에 있다는 것입니다. 왜 사람들이 화를 잘 냅니까? 속상한 일이 많으니까요. 아침에 신문을 보면 속상하고 화나는 일뿐입니다. 그러니까 서로 인내심이 없어지고 화를 내고 짜증을 내게 됩니다. 그러니까 환한 얼굴을 보기가 어렵습니다.
이 세상에서 자식의 축복과 장래와 행복을 위해 가장 헌신하는 사람이 부모님입니다. 부모님은 자기 자식이 어떻게 하면 잘되는지를 가장 잘 압니다. 그래서 부모가 지시하는 것에는 긍정적으로 따르는 것이 좋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못하는 자녀는 학교에 가서도, 나중에 직장에 가서도 문제 거리가 됩니다. 다른 사람들의 얼굴을 굳어지게 하는 사람이 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어려서부터 아이들이 부모에게 순종하도록 훈련하십시오. 갓난아기 때부터 훈련을 해서 그 아이들이 어른을 기쁘게 하고 어른의 말이면 지체 없이 순종하는 아이로 키워야 됩니다. 제가 성공한 사람들의 이야기 150 가지를 조사해 보았더니 그들에게 공통적인 특징 하나가 있더군요. 어릴 때부터 어른들에게 인정을 받아 본 경험이 있다는 것입니다. 집에서는 부모님께 인정을 받았고, 학교에서는 선생님께 인정을 받았고, 계속해서 윗사람들이 좋아하는 사람들이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계속되면서 사회에 나가서도 칭찬과 인정을 받는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윗사람을 괴롭히는 사람은 잘 될 수가 없습니다. 부모를 괴롭히는 자식이 잘 될 수가 없지요. 하나님께서 이 땅에 가정이라는 제도를 만들어 놓으셨고 권위자를 세워놓으셨으면, 설령 내가 원하는 사람이 아니더라도 순종해야 합니다. 대통령을 위해서 왜 기도합니까? 우리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하나님께서 세우신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윗사람에게 말하고 싶은 것이 있으면 지혜롭게, 때에 맞게, 적절하게 해야 합니다. 5절에 보면 “지혜자의 마음은 시기와 판단을 분변하나니”라고 합니다. 똑같은 말을 해도 언제, 어떻게 할 것인지를 잘 판단해서 합니다. 아무 때나 하고 싶다고 말을 내뱉어 놓으면 문제만 일으키고 상처만 남깁니다. 지혜롭게 사는 사람들은 똑같은 말도 언제 하는 것이 좋고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은지 분별해서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지혜로운 사람은 대들지 않습니다. 본문에 보면 “왕의 말은 권능이 있나니 누가 이르기를 왕께서 무엇을 하시나이까 할 수 있으랴.” 하나님께서 섭리 가운데 공동체들을 만드셨습니다. 그 공동체에는 내 마음에 드는 사람도 있고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습니다. 내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이 윗사람으로 있다고 할지라도 “그를 통해 하나님께서 나에게 인내를 훈련하시는구나” 라고 생각하면서, 그 사람의 단점을 통해서 나의 장점이 생기도록 배우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장하면 그 사람의 얼굴은 환해질 것입니다. 속상하고 짜증만 내면 얼굴이 굳어질 것입니다. 말을 하는 것, 행동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어떻게 지혜롭게, 분별력 있게 하는가가 중요합니다.
제가 군대에 갔을 때의 일입니다. 저를 전방에 보내더군요. 깊은 산 속 화기중대의 서무계가 되었습니다. 제일 졸병이지요. 가보니까 중대장이 계신데 그 분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져 있었습니다. 사납고 무서워 보이는 그런 얼굴입니다. 너무 딱딱하니까 중대본부에 있는 사람들이 그 중대장만 보면 발발 떠는 것입니다. 이렇게 살면서 앞으로 군대생활을 어떻게 하나 하는 걱정이 들더군요. 가만 보니까 그렇게 악한 사람도 아닌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제가 사람들을 모아놓고 이런 제안을 했습니다. “우리가 그 사람을 그렇게 만드는 것 같습니다. 우리가 딱딱하게 하니까 그 쪽에서도 그렇게 반응할 수밖에요. 이제 제가 하는 것을 보십시오!” 그리고는 중대장이 들어올 때 거수경례를 붙이며 “안녕하십니까! 잘 오셨습니다” 하고 웃으며 반갑게 맞이했습니다. 처음에는 당황하더니 웃으며 받아주더군요. 다음에 왔을 때도 또 그랬지요. 몇 번 그러니까 그 중대장이 들어올 때 웃으며 들어옵니다. 그 딱딱하던 사람이 보들보들해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중대본부의 분위기가 바뀌고 군대생활이 재미있어지는 겁니다. 우리가 하기에 달린 것이지요.
윗사람을 어떻게 대하는가에 따라서 그 사람이 달라질 수 있습니다. 심지어 내 마음에 불만이 있어도 적절하게 방법을 찾아서 말하는 것입니다. 한번은 제 아내와 제가 논쟁이 붙었습니다. 제 아내는 자기의 주장이 옳다고 하고 저는 또 제 의견이 옳다고 생각하는 것이지요. 그런 경우 있지요? 제 아내는 원래 자기주장이 없는 사람이었는데 언젠가부터 자기 의견을 주장하기 시작하더군요. 그래서 서로 굽히지 않고 의견이 하나가 되지 않는 상태가 되었습니다. 그랬더니 제 아내가 “나는 할 말 다 했으니까 이제는 당신이 알아서 결정하세요”라고 하는 겁니다. 만약에 제가 윽박질렀다면 할 말을 다 못했겠지요. 하지만 자신의 의견을 다 말하고도 남편의 권위를 인정해주는 것입니다. 누군가 이 가정에서 마지막 결정을 해 주어야 하는데 그 결정을 하도록 인정하는 것이지요. “맘대로 해!” 하고 끝났다면 우리 두 사람 사이는 참 어려웠을 것입니다. 한 사람은 이겼고 한 사람은 졌으니까요. “지혜자의 마음은 시기와 판단을 분별하느니라”는 말씀이 바로 그것입니다.
먼저 하나님과의 사이에서 그분의 말씀과 뜻에 철저하게 순종하려고 하는 기본적인 훈련이 여러분 각자마다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하라고 하시면 기쁘고 즐겁게, 지체 없이 순종하려고 할 때 하나님이 좋아하십니다. 하나님이 좋아하시면 여러분의 삶에 반드시 축복이 있습니다. 그 속에는 기쁨이 있고, 만족이 있고, 결과가 성공적입니다. 행복이 여러분에게 나타날 것이고 얼굴이 환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거부하고 자기 멋대로 하면 하나님하고의 관계가 나빠지니까 어쩔 수 없이 여러분의 삶에 불행이 올 것이고 얼굴이 굳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나라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국가가 악법을 가지고 있으면 국민이 일어나서 고쳐야 됩니다. 그러나 고칠 때까지는 순종해야 합니다. 회사도 그렇지요. 내가 사장에게 고용되었을 때는 그의 사업을 도우려고 들어간 것입니다. 내가 사장으로 들어간 것이 아니고, 사장을 밀어내려고 들어간 것도 아닙니다. 사장이 나를 고용해 주었으면 그 사람이 무엇을 원하는지 알아야지요. 그래서 그 회사가 잘되도록 만드는데 하나님의 지혜를 구해서 사장을 기쁘게 해줌으로써 여러분들이 그 회사에서 승승장구하고 반드시 필요한 인물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나, 회사에서나, 교회에서나, 가정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과 제가 하나님의 지혜를 찾아서 윗사람을 잘 섬김으로 이 땅에서 장수하며 여러분의 얼굴이 환한 얼굴로 변하게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예수님 닮은 얼굴
전도서 8장 1~8절 / 박조준목사
오늘 우리가 사는 이 시대를 가리켜 소위 지식 홍수의 시대라고 합니다. 혹은 정보화 시대라고 합니다. 우리는 인터넷을 통해서 세계 각국에 있는 정보를 얼마든지 입수할 수가 있는 시대입니다. 그런데 지식과 정보는 홍수처럼 넘쳐흐르지만 지혜는 많지 못한 것이 이 시대의 특징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디서 지혜를 얻을 수 있습니까? 잠언 9장 10절에 보면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요 거룩한 자를 아는 것이 명철이라"고 정의했습니다. 왜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지혜라고 합니까? 하나님은 인간의 모든 것을 초월하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모든 것이 그치는 곳에서 하나님의 역사가 시작됩니다. 철학자들도 인간의 이성(理性)이 끝나는 곳에서 하나님을 믿는 신앙이 시작된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의지하고 경외하며 그 뜻에 따르려고 하는 사람은 지혜의 사람입니다.
그렇게 생각할 때 우리가 신앙생활 하는 것은 말하자면 지혜의 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왜요? 내 힘, 내 지식, 내 능력을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을 의지하기 때문입니다. 의지한다는 말은 바라본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에베소교회에 편지하면서 이런 말씀을 했습니다.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
그리스도인의 신앙생활은 한마디로 예수님을 닮는 생활입니다. 우리의 마음이 주님의 마음을 닮아가고 그래서 주님의 모습을 닮아가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을 디모데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바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망령되고 허탄한 신화를 버리고 오직 경건에 이르기를 연습하라 육체의 연습은 약간의 유익이 있으나 경건은 범사에 유익하니 금생과 내생에 약속이 있느니라."
경건은 무엇입니까?
쉽게 말하면 하나님을 닮는 생활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하루아침에 이루어집니까? 경건에 이르는 연습이 필요합니다. 연습이란 말을 영어로 'exercise' 혹은 'training'이란 말을 쓰는데, 말하자면 '연마하여 익힌다', '습득한다'는 뜻이 있는 말입니다. 연습이란 같은 일의 반복입니다. 성경에 보면 우리의 신앙생활을 가리켜 풀무에 연단한 금으로 비유한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연습을 통해서 그 믿음이 더 성숙한 자리로 나아가고 그 믿음이 빛난다는 뜻입니다. 믿음을 갈고 닦는 연마를 의미합니다. 이렇게 주님을 닮은 삶을 살려면 끊임없는 연습이 필요합니다. 이렇게 하나님 앞에 나아와 예배하는 것도 말하자면 경건에 이르는 연습의 일부분입니다.
그러면 언제까지 이 연습을 해야 합니까?
이 세상을 떠날 때까지 해야 합니다. 날마다 거듭해야 합니다. 물론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에 이르게 되고, 우리 영혼이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심령은 말하자면 어린아이의 상태와 같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자녀인 우리가 장성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도 "너희는 지혜에 어린아이가 되지 말고 장성한 사람이 되라"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지혜가 어린아이와 같다면 유혹을 받기 쉽습니다. 어린아이는 지나가는 사람이 사탕만 주어도 고맙게 생각하며 졸졸 좇아갑니다. 그러나 어른이 지나가는 사람이 지나치게 친절하게 한다고 좇아갑니까? 안 갑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었지만, 완전한 흠이 없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려면 계속 연습하고, 계속 성장하는 자리에 이르러야 합니다. 은혜와 진리에서 자라가야 합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까지 이르러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언제나 바라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그대로 닮은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는 "믿음의 창시자요 완성자이신 예수를 바라보자"고 했습니다.
신앙생활이 무엇입니까?
주님을 바라보는 생활입니다. 오늘 여러분이 누구를 바라보기 위해서 예배당에 나오셨습니까? 목사 바라보기 위해 나오셨습니까? 아닙니다. 목사를 바라보다가는 실망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완전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을 바라보지 않아야 합니다. 물론 신앙생활 하는데 교회의 지도자를 바라보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교역자의 책임이 중한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은 본의 아니게 잘못할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잘못하는 법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을 바라보는 동안 절대로 실망할 필요가 없습니다. 아니 주님을 바라보는 동안 나도 모르는 사이에 주님을 닮아갑니다.
긴 세월 동안 부부가 해로하면서 사시는 분들을 보세요, 자신들도 모르게 남편은 아내를, 아내는 남편을 닮아갑니다. 가정을 이루고 처음 생활을 할 때는 아무리 뜨겁게 연애해서 결혼을 했다고 하지만 서로 성격 맞지 않는 것이 발견되고, 취미가 맞지 않는 것이 드러나고, 그래서 티격태격 다툽니다. 그러나 이러기를 10년, 20년, 30년, 40년 함께 살다보면 남편은 아내를 닮아가게 되고, 아내는 남편을 닮아갑니다.
식성도 닮게 됩니다. 저는 평안남도 태생이고, 제 아내는 평안북도 산입니다. 같은 평안도인데도 북도와 남도의 식사가 달라서 서로가 고생했습니다. 그런데 오랜 세월 같이 지나는 동안 이제는 어디 가서 식사를 해도 제 아내가 한 것만큼 입에 맞는 식사가 없습니다. 바라보면 닮습니다.
미국의 소설가 나다니엘 호오도온이 쓴 {위대한 바위얼굴}(The Great Stone Face)이라는 책의 이야기를 다 들으셨으리라고 생각합니다. 그 책 이야기의 줄거리는 이렇습니다.
어느 계곡에 평화와 번영과 행복의 마을이 있었습니다. 이 마을에서 멀리 바라보이는 산이 있는데, 그 산의 바위가 꼭 사람의 모양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 바위는 대자연의 신비로운 조화의 산물로 멀리서 바라볼 때 어딘지 모르게 지혜로워 보이고, 자비스러워 보이고, 평화스러워 보이고, 고귀한 사람의 얼굴같이 보였습니다. 그런데 이 마을 사람들이 대대손손 살아온 것은 저 멀리 바라보이는 그 위대한 바위얼굴 때문이고, 그 돌의 얼굴과 똑같은 인물이 언젠가는 이 마을에서 나오게 될 것이라는 전설이 내려오고 있었습니다.
그 마을에는 가난하지만 정직한 어네스트라는 소년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는 어머니한테서 큰 바위얼굴의 전설을 듣고 기쁨이 넘치고, 꿈이 생기고, 감격스러운 마음으로 가슴이 부풀어올랐습니다. 그는 날마다 나아가서 그 산을 바라보며 먼데서 그 큰 바위얼굴을 바라볼 때마다 말할 수 없는 기쁨과 마음의 평화를 느끼게 되었습니다.
'언제 저 훌륭한 예언의 인물이 우리 동네에 나타날까? 그게 누굴까?' 그는 가난하기 때문에 학교도 별로 못 다녔습니다. 그러나 그 큰 바위얼굴을 바라보면서 열심히 일하고 스스로 공부하고 성장했습니다.
여러 해가 지났습니다. 그 큰 바위얼굴과 똑같이 생긴 예언의 인물이 드디어 나타났다는 소문이 떠돌았습니다. 어떤 사람이 이 마을의 사람으로서 외지에 나아가 많은 돈을 벌어서 갑부가 되어 온다는 것입니다. 그 예언의 인물이 드디어 그 마을에 돌아왔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호기심에 차서 기대를 가지고 나가보았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은 마을 사람들의 기대와는 너무 어긋났습니다. 그래서 모두가 실망했습니다. 그 사람은 저 큰 바위얼굴하고는 조금도 같은 데가 없었습니다. 어네스트는 섭섭했지만 기다릴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일하던 손을 멈추고 그 큰바위 얼굴을 바라볼 때마다 어네스트의 마음은 흥분되곤 했습니다. 그는 즐거웠고 행복했습니다.
또 몇 해가 지났습니다. 이번에는 틀림없이 예언의 인물이 금의환향한다는 소문이 들려왔습니다. 그는 유명한 장군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장군에게서 강철같은 의지는 보였지만 그 큰 바위 얼굴과 같은 고귀하고 인자한 빛이 조금도 없었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실망했습니다. 그리고 또 기다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몇 해가 또 지났습니다. 이번에는 예언의 인물로 위대한 정치가가 나타났습니다. 그는 웅변으로 사람을 심취시키는 힘은 있었지만 정말 예언의 인물은 아니라는 판단이 생겼습니다.
어네스트는 어느덧 중년이 지나 노년이 되었습니다.
그는 큰 바위 얼굴을 바라보면서 열심히 일했습니다. 성실하게 살았습니다. 부지런히 배웠습니다. 깊은 사색에 잠기곤 했습니다. 또 시간이 있는 대로 마을 사람들을 모아놓고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습니다.
이제 백발이 된 어네스트는 성실하고 순수하기가 천사와 같았고 그의 평화스러운 얼굴에는 언제나 지혜와 기쁨이 넘쳐 있었습니다. 그 큰 바위얼굴이 그의 스승이요, 그의 친구요, 감격과 기쁨의 원천이었습니다. 그 날도 어네스트는 마을 사람들을 모아놓고 석양녘에 일을 끝마친 후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습니다.
어느 시인이 지나가다가 어네스트를 쳐다보았습니다. 석양에 서 있는 어네스트의 얼굴에 위대하고 고귀한 빛이 넘치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어네스트의 얼굴이 바로 저 큰 바위얼굴과 똑같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시인은 놀라서 소리쳤습니다. "여러분, 여러분, 보세요. 저 어네스트야말로 큰 바위얼굴과 똑같은 분입니다. 예언이 말한 사람이 저 어네스트입니다." 모두는 깜짝 놀랐습니다.
그러고 보니까 저 어네스트의 얼굴이 저 석양에 미치는 큰 바위얼굴과 어쩌면 그렇게 똑같을 수가 없었습니다. 어네스트 자신도 그 사실을 몰랐습니다. 어네스트는 위대한 바위얼굴을 바라보는 동안에, 1년도 아니고 10년도 아니고 수십년, 노인이 될 때까지 바라보면서 '나도 저런 얼굴의 소유자가 되었으면'하고 바라보는 동안에 어네스트 자신이 그 위대한 바위 얼굴의 소유자가 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호오도온의 이 이야기는 물론 하나의 상징적인 소설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또한 진실일 수도 있습니다. 이 이야기는 우리가 날마다 자기 자신의 얼굴을 조각하며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늘 바라보면 닮아갑니다.
바라보는 것은 사모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주님의 얼굴을 닮으려면 주님을 사모해야 합니다. 주님의 성품을 사모해야 합니다. 주님의 인격을 사모해야 합니다. 주님의 생활을 사모해야 합니다. 주님을 사모하는 생활이 바로 신앙생활입니다.
사람은 바라보는 데 따라서 그 생활이 달라집니다.
옛날 롯은 소돔과 고모라 지방의 푸른 풀밭과 비옥한 땅만 바라보았습니다. 그 속에 얼마나 죄악이 넘친다는 사실은 보지 못했습니다. 바라보면 자연히 따라가게 됩니다. 세상의 영광을 바라보면 자연히 세상 영광 따라갑니다. 세상의 향락을 바라보면 자연히 세상 향락을 따라갑니다. 우리가 무엇을 바라보느냐 하는 것은 정말 중요합니다.
이스라엘 민족의 영도자 모세는 시내산에서 하나님께 기도하며 그의 신령한 눈으로 하나님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리고 산에서 내려왔는데 그 얼굴이 환하게 빛났습니다. 사람들이 마주 대해 볼 수 없을 정도로 광채가 났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바라보면 우리 얼굴에 광채가 납니다. 오늘 여러분 한 분 한 분이 하나님을 바라보시므로 예배가 끝나고 돌아가실 때는 광채가 나는 얼굴로 돌아가게 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세상 바라보면 우리 얼굴의 광채가 없어집니다. 돈을 바라보면 욕심이 생겨서 얼굴이 어두워집니다. 명예나 권세를 바라보면 권세욕이 생겨서 얼굴에서 빛이 없어집니다. 육신의 쾌락을 바라보면 정욕이 생겨서 얼굴이 어두워집니다. 주님을 바라보십시다.
그리고, 어떤 사람의 얼굴에 광채가 납니까?
히브리서에 보면 주님을 바라볼 뿐만 아니라 늘 주님을 생각하라고 했습니다. 길을 갈 때도 주님을 생각해야 합니다. 일을 할 때도 주님을 생각해야 합니다. 말을 할 때도 주님을 생각하며 말해야 합니다. 공부를 할 때도 주님을 생각하며 해야 합니다. 장사를 할 때도 주님을 생각해야 합니다. 학생들을 가르칠 때도 주님을 생각하며 가르쳐야 합니다. 환자를 치료 할 때도 주님을 생각해야 합니다 .밥을 지을 때도 주님을 생각해야 합니다. 사무를 볼 때도 주님을 생각해야 합니다.
파스칼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인간은 갈대와 같다." 갈대와 같은 인생, 약한 것을 의미합니다.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입니다. 그런데 그 다음 말이 중요합니다. "생각하는 갈대다." 약한 것임에는 틀림이 없지만 인간은 생각하는 존재입니다. 생각이 중요합니다. 생각하는 데 따라서 사람이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잠언에 뭐랬어요? "사람의 생각이 어떠하면 그 위인도 그러하다"고 했습니다.
생각하는 것이 사람에게 있어서 얼마나 중요합니까? 장사하는 사람은 언제나 장사해서 돈 버는 생각을 합니다. 도둑놈은 밤이나 낮이나 남의 물건 훔칠 생각만 합니다. 사기꾼은 거짓으로 다른 사람을 속일 생각만 합니다. 목사는 언제나 하나님께 기도하고 말씀만 생각해야 합니다. 목사가 장사하는 생각을 하면 목사 하기는 틀린 겁니다. 생각이 중요합니다.
마음에 사랑이 없고, 기쁨과 평화가 없는 사람은 밤낮 다른 사람을 미워하는 생각, 원망하는 생각을 품고 있으니까 그 얼굴이 쭈그러집니다. 불평하는 사람, 원망하는 사람, 시기하는 사람의 얼굴을 보셨어요? 얼굴에서 빛이 사라집니다.
그러나 마음속에 언제나 선한 생각,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으면 어떻게 됩니까? 마음속에 기쁨과 만족과 감사와 찬송이 있는 사람의 얼굴은 어떻습니까? 그 얼굴에 광채가 납니다.
토마스 아켐피스라는 사람이 {그리스도를 본받아}라는 책을 썼습니다. 아주 유명한 고전문학입니다. 주님을 생각하며 주님이 만일 이 일을 하신다면 하는 생각으로 사람의 생각을 기록한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본받으려고 애쓰면 자연히 주님을 닮게 됩니다. 무슨 일을 하든지 '예수님이시면 어떻게 하실까?'하는 것을 생각해보며 주님을 닮으려고 힘쓰는 생활, 그것이 곧 신앙생활입니다.
우리 찬송가에도 "너 성결키 위해 네 머리 숙여 저 은밀히 계신 네 주께 빌라. 주 사귀어 살면 주 닮으리니 널 보는 이마다 주 생각하리" 하는 가사가 있습니다. 우리가 이렇게 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한번은 미국의 에이브라함 링컨 대통령이 친구를 만나서 이야기하는 중에 유능하고 훌륭한 보좌관을 소개하겠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그러라고 하고 약속한 시간에 소개받은 사람을 만나 인터뷰를 하고, 링컨은 그 사람을 채용 안 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그래서 그 친구가 "내가 보기에는 그만한 능력을 가진 사람이 쉽지 않은데 왜 채용 안 했나?" 그때 링컨이 "글쎄, 다는 모르겠지만 내가 볼 때 자네가 소개해준 그 사람의 얼굴이 나는 마음에 안 들어"라고 대답했습니다. "아니, 사람의 얼굴이야 어떻게 하겠나?" 링컨은 웃으면서 "적어도 사람의 나이 40쯤 되면 자기 얼굴에 대해서 책임질 수 있어야지"라고 하더랍니다.
뜻이 있는 말입니다. 40이 될 때까지 생각하고 생각하노라면 사람의 얼굴이 생각하는 모습대로 달라집니다. 이 자리에는 젊은이들이 많으신데, 여러분 바라고, 생각하는 것을 언제나 조심하시기 바랍니다. 다른 사람을 시기하는 생각을 늘 하면 그 얼굴이 시기에 가득 찬 얼굴이 되어 버립니다. 다른 사람을 미워하고 헐뜯는 생각을 늘 하면 나도 모르는 사이에 얼굴의 빛은 사라지고 미움이 가득한 얼굴로 변해 버리고 맙니다.
여러분, 어린애들의 눈을 보셨어요? 조용한 호수같이 잔잔하고 맑습니다. 그런데 사람이 살아가면서 나쁜 것 보고 좋지 않은 것 생각하는 동안에 이 맑은 눈이 점점 흐려지기 시작합니다. 한번 화를 내면 눈에 핏줄이 더 생깁니다. 그래서 그렇게 아름답고 깨끗하고 잔잔한 호수 같던 눈이 충혈이 됩니다. 마음에 사랑을 품으세요. 평화를 누리세요. 기쁨을 가지세요. 그때 여러분의 얼굴이 빛나게 될 줄 믿습니다.
이 세상에 제일 불쌍한 사람은 얼굴에 빛을 잃은 사람입니다. 우리가 세상에 살면 얼마나 살려고 얼굴에 핏대를 내고 빛을 잃어버린 생활을 하겠습니까? 내려오는 말에도 '일소일소 일노일노(一笑一少 一怒一老)'라는 말이 있잖습니까? 한 번 웃으면 한 번 젊어지고, 한 번 화내면 한 번 늙어진다는 말입니다.
전에 우리 민족의 정신적인 지도자였던 도산 안창호 선생님이 웃음을 잃어버린 우리 국민에게 입버릇처럼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여러분, 벙글벙글 웃으며 삽시다." 참 재미있는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마음에 기쁨과 감사가 있으면 그 얼굴에 벙글벙글 화기가 돈다는 말입니다. "웃는 얼굴에 침 못 뱉는다"는 말도 있습니다. 여러분, 웃어보세요. 마음에는 여유가 생기고, 웃으면 웬만한 걱정은 다물러가고 맙니다. 반면에 얼굴을 찡그리면 별 것 아닌데 심각해집니다. 그러기에 잠언에 보면 "마음의 즐거움은 얼굴을 빛나게 하여도 마음의 근심은 심령으로 상하게 하느니라"고 했습니다.
끝으로, 주님의 얼굴을 닮으려면 주님의 마음을 배워야 합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온유와 겸손은 주님의 근본 성품입니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제자라고 하는 우리가 주님의 성품을 배우는 것은 너무 당연한 일이 아닙니까? 우리는 온유와 겸손의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교만하고 강퍅한 사람의 얼굴에는 빛이 없습니다. 그러나 온유하고 겸손한 사람에게는 그 얼굴에 빛이 있습니다. 내 얼굴이 빛나는 것을 내가 아는 것 아니고 다른 사람이 볼 때 주님의 얼굴을 닮아야지요. '저 분을 뵈면 참 하나님을 뵌 것 같애. 저 분을 만나면 예수님 만난 것 같애.' 이렇게 되면 얼마나 복입니까?
전에 아시시의 성 프랜시스는 모든 사람이 그 분을 보면 하루 종일 예수님을 뵌 것 같은 마음을 가지게 되었다고 합니다. 스데반 집사는 돌에 맞아 순교하면서도 하나님을 바라보았더니 그 얼굴이 천사처럼 되었다고 하지 않습니까?
정말 우리는 태양처럼 빛나지는 못해도, 태양 광선을 반사하는 달빛처럼 그리스도의 그 위대한 사랑의 빛, 온유의 빛, 겸손의 빛, 봉사의 빛을 이 세상에 반사할 수 있는 그리스도를 닮은 얼굴의 소유자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그리스도인은 악한 세상에서 어떻게 살 것인가
전도서 8장 1~17절 / 안병호목사
이 땅에 하나님의 역사가 시작 되었지만 아직도 사단의 꼬리가 파닥 거리고 있기 때문에 이 세상은 도처에 악이 기승을 부리고 있다. 이런 세상에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 악한 세상을 어떻게 살아 갈 것인가 하는 것은 항상 많은 스트레스를 준다.
이와 같은 세상에서 그리스도인이 지혜롭게 살아가는 방법을 지혜로운 솔로몬은 우리에게 제시한다. 그것은 악의 존재를 인정하되 하나님의 권능을 제한하지 말아야하는 것이다.
솔로몬은 하나님의 존재나 악의 실제를 부인하지 않으면서도 하나님의 권능을 제한하려 하지도 않는다. 솔로몬은 악이라는 사실들을 확정하고 또 이것들에 대해 적절한 관점을 유지 하면서 악의 문제를 해결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하나의 중요한 악의 근원이 타락한 인간과 그의 '많은 고안물들'이란 것을 잊지 말아야한다. 이로 인해 선과 악에관한 여러 종류문제들이 생겨 난 것이다. 분명히 하나님은 그것 때문에 비난 받을 수 없다.
우리는 본문을 통해서 우리가 직면하게 된 3가지 경우를 마음에 두고 여기에서 어떻게 하나님의 권능으로 악을 극복할 것인가를 생각해 보고자 한다.
1. 권세자들을 어떻게 섬길 것인가(1-9)?
니므롯으로부터 시작해서, 바로, 산헤립, 느부갓네살,다리우스, 시저, 그리고 김일성, 김정일, 박정희, 전두환등 최근의 대단치 않는 지배자들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선한 사람들이 불의한 통치자들에 의해 억압 받아왔다. 유대인들은 외부 압제자들의 손아귀에서 고통 받았으며, 솔로몬 자신도 그의 백성들을 압제의 속박속에 처하게 하는 죄를 지었다(왕상 4: 7-28, 12:1 하반절). 우리는 크고 작은 악의 권세자들 밑에서 시달린 삶을 살고 있다. 직장에서 쥐꼬리만한 권세로 괴롭힙을 주는 상사로부터 시작하여 도무지 참을 수 없는 많은 압제자를 만난다. 이런 경우에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어떻게 이 악한 권세자들을 감당하며 살 것인가?
먼저 우리는 지혜자로서의 마음의 자세를 가져야한다.
지혜자와 같은 자 누구며 사리의 해석을 아는 자 누구냐 사람의 지혜는 그 사람의 얼굴에 광채가 나게 하나니 그 얼굴의 사나운 것이 변하느니라 (굳은 표정을 바꾸어 준다: 표준 새번역).
본문에서 솔로몬은 궁정 안에 있는 어떤 관원, 전제 군주의 명령을 수행해야 했던 어떤 관원을 묘사했다. 그는 지혜가 있었다. 그 얼굴에 광채가 나고 항상 굳은 표정을 지은 것이 아니고 부드러운 표정을 갖고 있었다. 그리스도인들은 먼저 마음을 항상 지혜롭게 다스려야한다. 표정 관리를 항상 밝게 가져야한다. 굳은 얼굴을 부드러운 얼굴로 바꾸어 주어야한다. 우리가 악한 세상에서 힘든 일을 많이 만날 때 우리의 얼굴은 무거워지고 항상 부담스러운 인상을 갖기 쉽다. 그래서 세상에서 그리스도인들은 너무 심각한 사람들로 치부해 버리고 가까이 하기를 꺼려 할 수 있다. 지혜로운 자는 어떤 일을 만나도 그의 얼굴에 광체가 나야하고 부드러운 얼굴을 가져야한다.
느혜미야가 이방 나라에서 어떻게 왕을 모셨는가를 우리는 엿볼 수 있다.
2:1 아닥사스다 왕 이십 년 니산 월에 왕의 앞에 술이 있기로 내가 들어 왕에게 드렸는데 이전에는 내가 왕의 앞에서 수색(愁色)이 없었더니
2:2 왕이 내게 이르시되 네가 병이 없거늘 어찌하여 얼굴에 수색이 있느냐 이는 필연 네 마음에 근심이 있음이로다 그 때에 내가 크게 두려워하여
분명히 느혜미야는 어떤 경우에도 슬픈 얼굴을 보이지 않으며 살았다는 것을 알 수 있고, 또한 그의 슬픈 얼굴이 왕에게 밝혀 졌을 대 어떤 무서운 벌이 내려질 것으로 생각하여 두려워 했던 것을 볼 수 있다. 지혜로운 자는 권세자 앞에서 항상 밝은 얼굴을 가져야한다. 부담 스러운 얼굴은 그 자체가 권세자에 대한 도전으로 오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다음으로 우리가 실제적으로 악한 권세자들을 어떻게 대해야할 것인가?
첫째, 권세자의 명령에 복종해야한다.
내가 권하노니 왕의 명령을 지키라 이미 하나님을 가리켜 맹세하였음 이니라(2)
지혜자는 왕의 명령에 불 복종해서는 안된다. 아무리 권세자가 인격적이 아니고 비열하다고 해도 나는 그 권세자에게 복종해야한다. 그렇다고 그의 고결함을 버리는 것도 아니고, 꼭 비굴한 것도 아니다. 기회주의 자로 오해 받을 지도 모르지만 그런 것은 아니다.
내가 권하노니 왕의 명령을 지키라 이미 하나님을 가리켜 맹세하였음 이니라
고대에는 왕의 신하는 충성을 맹세 하는 것이 하나이 습관이었다. 성경은 모든 권세는 다 위로부터 왔다고 말한다. 현재 내가 누구 밑에 있든지 그분은 하나님이 나에게 복종하고 순종하도록 허락하신 분이라는 것을 우리는 받아 들여야한다. 하나님의 섭리를 믿는 신자라면 이것을 부인해서는 안된다. 거기에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하나님의 섭리가 반드시 있기 때문이다.
또한 왕의 말은 종의 말보다 더 권위가 있다.
왕의 말은 권능이 있나니 누가 이르기를 왕께서 무엇을 하시나이까 할 수 있으랴(4)
비록 권세자가 반대의견을 묵살할지라도 그런 권한이 주어져 있는 것이다. 어는 누구도 그의 결정에 의문을 제기할 수 없다. 어떤 법도 왕의 죄를 규정할 수 없다. 권세자에게 항의하고 대드는 것은 성경적이 아니다. 함부로 권세자에게 항의 하다가 큰 피해를 당하는 경우가 많이 있다.
무릇 명령을 지키는 자는 화를 모르리라(5)
그러나 하나님께 충성하는 사람은 왕궁에서 일할 때나 왕에게 복종할 때도 먼저 하나님께 순종한다는 한계를 두어야한다. 그러나 그는 위험한 상황을 판단 하고(3), 행동을 할 때 그 과정이 중요하다.
둘째, 충동적으로 사표를 내서는 안된다.
왕 앞에서 물러가기를 급거히 말며 악한 것을 일삼지 말라 왕은 그 하고자 하는 것을 다 행함이니라(3)
비 인격적이고 강제로 대하는 권세자 밑에서 늘 부당하게 압제 받느니 차라리 사표쓰면 되지 않는가? 이런 생각이 하루면도 수 없이 많이 일어나는 경우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본문에서 그렇게 하지 말라고 하였다. 왕 앞에서 물러가기를 급거히 말며. 이러한 행동은 왕에게 어떤 벌을 받을지도 모를 일이다. 항상 이런 태도로 인생을 사는 사람은 어디에도 적응하지 못하고 결국은 패인이 되고 마는 경우가 많이 있다. 이들은 정직한 삶을 살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것이라고 말하지만 이 세상이 악이 지배하고 있는 세상이라는 것을 포괄적으로 이해 하지 못한 지극히 자기 중심적인 사람이다. 또한 그 가운데 두신 하나님의 뜻을 생각하지 않고 사는 자요, 그 가운데서 하나님이 어떤 선한 역사를 이루실 것인가 하는 하나님의 권능을 믿지 못한 처사이다.
셋째, 정면 도전해서는 안된다.
8:3 왕 앞에서 물러가기를 급거히 말며 악한 것을 일삼지 말라 왕은 그 하고자 하는 것을 다 행함이니라
악한 것을 일삼지 말라 이 말은 왕에게 정면 도전해서 왕을 제거하려는 음모를 꾸미지 말라는 뜻이다. 그리스도인은 설령 마음에 맞지 않는 권세자가 있다고 해서 무력이나 인간적인 방법으로 그를 제거하려는 생각을 갖는 것은 옳지 않는 것이다. 우리는 가끔 기업체내에서 회장 몰아 내는 운동, 학교에서는, 교장, 총장 퇴진 운동을 벌이는 경우가 많이 있고, 교회에서는 목사 몰아 내는 운동을 벌이는 교회들이 더러 있다. 이런 경우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상처를 받고 사단의 독무대를 만들고 마는가? 이런 일에 가담한 사람치고 그의 장래가 좋은 사람 별로 보지 못했다. 우리는 조용한 가운데 하나님이 어떻게 하실 것인가를 바라보며 기도하면서 권능의 하나님을 믿어야할 것인다.
그러나 우리가 불의한 독재자를 그대로 방치한다는 것은 과연 옳은 일인가 한번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토마스 제퍼슨 같은 분은 '폭군에게 저항하는 것은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베드로 역시 사람보다 하나님 순종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하여 종교 당국자들의 명령을 담대히 거부했다(행 5:29).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독제자들과 싸우다가 순교하기도 했다. 그러나 여기서 전도자가 말하는 것은 사소한 문제를 가지고 악한 정부를 무너뜨리고자 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이 악한 세상을 살아 가기 위하여 때와 과정을 알아야한다.
무릇 명령을 지키는 자는 화를 모르리라 지혜자의 시기와 판단을 분변하나니 무론 무슨 일에든지 시기와 판단이 있으므로 사람에게 임하는 화가 심함이니라(5,6)
여기서 시기와 판단이란 때를 분별하고 그 과정이 지혜로워야한다는 의미이다. 왕의 명령에 불복종한다든가, 관직을 버리고 떠난다든가, 불의의 권세에 도전한다던가 하는 것은 때로 필요할 때가 있다. 그러나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때를 잘 살펴야 되고 그 과정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아무리 자기가 옳고 권위를 가진자가 나쁘다고 할지라도 때를 봐 가면서 대항해야한다는 것이다. 정말 어리석은 자는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웃사람에게 함부로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 사람은 어디가서나 사람들의 미움을 받고 따돌림을 받기 마련이다. 그렇다고 항상 눈치만 보고 할말을 분명히 하지 못하고 머뭇 하면서 사는 것도 우유 부단한 사람, 기회주의 자로 오해 받기 쉽다. 그러므로 지혜자는 그것에 대하여 분명한 분별력이 있어야하고 중용을 잘 지켜 나가야한다.
우리는 이와 같은 지혜로운 모습을 요셉, 느헤미야, 다니엘등에게서 잘 배울 수 있다.
2. 불공정한 세상을 어떻게 생각하며 살 것인가(10-14)?
세상에서는 우리가 감당할 수 없는 부정이 있다. 스페인 격언에 다음과 같은 격언이 있다. '법이란 거미줄과 같아서 파리만 잡고 매는 놓친다.'
세상에 행하는 헛된 일이 있나니 곧 악인의 행위대로 받는 의인도 있고 의인의 행위대로 받은 악인도 있는 것이라(14).
이런 일을 보고 사는 우리의 심정은 어떠한가? 마땅히 악인은 벌을 받아야하는데 오히려 칭찬과 축복을 받고, 마땅히 의인은 칭찬과 축복을 받아야하는데 오히려 부당한 대우를 받는 일이 우리가운데 허다하게 일어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세상이 견딜만한 세상인가?
10절에 솔로몬은 도무지 받아 들일 수 없는 불공정을 본다.
내가 본즉 악인은 장사 지낸 바 되어 무덤에 들어갔고 선을 행한 자는 거룩한 곳에서 떠나 성읍 사람의 잊어버린 바 되었으니 이것도 헛되도다
표준 새 번역을 보면 '나는 악한 사람이 죽어서 무덤에 묻힌 것을 보았다. 그런데 사람들은 장지에서 돌아온 길에 그 악한 사람들을 칭찬한다. 그것도 다른 곳이 아닌, 바로 그 악한 사람들이 평소에 악한 일을 하던 바로 그 성읍에서, 사람들은 그를 칭찬한다. 이런 것을 보고 듣노라면 허탄한 마음을 가눌 수 없다.'
우리는 악한 사람은 반드시 벌을 맏고 세상 사람들로부터 매장 당해야 마당하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그들이 죽기까지 아니 죽은 후에도 칭찬을 받고 선한 사람들은 전혀 세상에서 빛을 보지 않고 고생만 하면 살다가 죽고 죽은 후에도 잊어 버린바 된다고 생각해 보시라. 얼마나 열받는 일인가? 그러나 그런 일이 우리가 살고 있는 도처에 일어나고 있다.
11, 12절 / 악한 일에 징벌이 속히 실행되지 않으므로 인생들이 악을 행하기에 마음이 담대하도다 죄인이 백 번 악을 행하고도 장수하거니와
우리가 이런 일을 볼 때마다 얼마나 낙심하고 힘을 잃게 되는 가? 내가 참되고 진실하게 사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다는 말인가? 모든 것을 다 포기하고 싶다. 그러나 바울은 피곤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면 거두리라고 하였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은 감당할 수 없지만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하나님이 알고 계시기 때문에 오히려 그 가운데 만족할 수 있다.
12, 13절을 보자 / 내가 정녕히 아노니 하나님을 경외하여 그 앞에서 경외하는 자가 잘 될것이요 악인은 잘 되지 못하며 장수하지 못하고 그 날이 그림자와 같으리니 이는 하나님 앞에 경외하지 아니함이니라
그러나 인간의 눈으로 볼 때 그런 억울함이 있지만 하나님의 눈으로 보면 반드시 최후에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만이 복을 받게 된다는 것이다. 우리는 이것을 믿을 수 있다. 우리는 일시적으로 사람앞에서 인정 맏는 것으로 만족하지 말고 하나님 앞에서 인정 받는 것을 기뻐해야한다. 사람 앞에서 비록 인정을 받지 못해도 하나님 앞에서 우리는 인정 받기 위해서 최선을 다해야할 것이다.
지혜 있는 자는 불평등하고 부정한 세상에 대해 어떻게 대응해야할까? 분명히 우리는 좋은 법이 통과 되도록 촉진하고, 능력 있는 사람들에 의해 그것이 실행 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해야만 한다. 하지만 이것으로 문제를 완벽하게 해결 할 수 없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왕국을 세우시기 전까지는 우리의 세상에 불의는 항상 있을 것이다. 그것은 삶의 무익함 중의 하나이다. 그러나 우리는 비관적 또는 냉소적 자세를 취할 것이 아니라 그것을 받아 들여야 할 것이다. 종말을 내다 보는 비전을 가지고 살아야할 것이다.
3. 불가사의한 일들을 어떻게 이해 할 것인가?(15-17)
모든 것을 알려고 하는 사람, 모든 것을 안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 이 세상은 실망만 안겨 준다. 많은 고통스런 날들과 잠들지 못하는 밤을 지내면서, 전도자는 삶의 불가사의 한 것들에 온 힘을 기울여 보았다. 결국 그는 '해아래서 하시는 일을 사람이 능히 깨달을 수 없도다'(17, 3:11, 7:14,24,27-28)라고 결론을 내렸다. 아마도 우리는 여기저기 있는 수수깨기를 해결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사물의 이치를 모두 알 수 없으며, 하나님이 하시는 모든 일을 설명해 낼 수는 없다. 역사가 듀란트는 '우리가 알면 알수록 무지라는 사막은 확장되어가고, 지식이라는 신기루는 점차 희미하게 뒤로 멀어져 간다'라고 말했다.
신 29:29 / 오묘한 일은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속하였거니와 나타난 일은 영구히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속하였나니 이는 우리로 이 율법의 모든 말씀을 행하게 하심이니라
하나님은 우리가 알 수 없는 것을 알기를 기대하지 않으신다. 그는 우리가 배울 수 있는 한 배우되 그분이 가르쳐 주신 것을 순종하기를 원하신다. 사실 우리가 순종하면 순종할수록 그분은 우리에게 더 많은 것을 가르쳐 주실 것이다(요 7:17).
무지의 고백은 참된 지식을 얻기 위한 첫 단계이다. '만일 누구든지 무엇을 아는 줄로 생각하면 마땅히 알 것을 알지 못함이요'(고전 8:2). 하나님의 진리를 알고자 하는 자는 정직과 겸손을 가져야 한다. 하바드 대학의 철학자 화이트헤드는 이렇게 말했다. '무지가 아니라 무지에 대한 무지가 지식의 사망을 가져온다.'
솔로몬은 네 번째로 삶을 누리고, 수고의 열매로 인한 기쁨을 누리라고 말한다(15, 2;24, 3:12-15, 5:18-20).
이에 내가 희락을 칭찬하노니 이는 사람이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는 것보다 해 아래서 나은 것이 없음이라 하나님이 사람으로 해 아래서 살게 하신 날 동안 수고하는 중에 이것이 항상 함께 있을 것이니라(15)
기억할 것은 이 훈계가 '먹고, 마시고, 즐기자'라는 불신앙적 쾌락주의 자의 철학이 아니라는 것이다. 오히려 그것은 삶을 하나님의 선물로 받아들이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누리도록 모든 것을 후히 주시는 분이다'(딤전 6:17)는 것을 알고, 하나님의 자녀로서 적극적인 신앙관을 가지라는 것이다. 가지고 있지 않는 것에 대하여 불평하는 대신에 우리는 가지고 있는 것에 대해 감사하면서 그것을 누려야 할 것이다. 아무리 억울하고 가슴 답답한일이 많아도 한편으로 생각하면 우리는 감사하고 기뻐해야할 것이 있다. 그것은 생각하면서 감사 할 수 있어야한다. 그리고 항상 기뻐해야한다고 하였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우리의 기도가 필요하다. 억울하고 분하고 속이 상해서 견디지 못할 때 우리는 조용히 골방에 들어가서 몇시간이고 엎드려 기도해야한다. 하나님이 새로운 힘과 용기와 기쁨을 주시는 것을 체험 할 것이다. 이것이 악한 세상에서 그리스도인의 삶이다.
무엇보다도 만사가 하나님의 장중에 달려 있는 줄 알고 순종하는 마음으로
책임을 위하여 수고하면서 살아가는 것을 가리킨다. 이와 같은 해석은 특별히 2:24-26의 말씀이 잘 밝혀준다. 잠 10:28;전 3:12-13, 5:18-19 참조.
'지혜의 무상함'(1:12-18)에 대한 솔로몬의 재고는 여기서 결론을 맺는다. 지혜를 거부하는 대신 그는 삶에 최선을 다하려는 사람에게 지혜가 중요한 것임을 확인한다. 지헤는 모든 불가사의를 해결할 수 없다. 그러나 우리가 결정을 해야할 때, 분별력을 가지고 할 수 있도록 돕는다. '그렇다. 모든 것은 때와 방법이 있다'(8:6). 지혜로운 자는 가장 적절할 때에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안다.
광채나는 얼굴
조학환목사(하강교회) / 전 8:1
1. 얼굴이 밝아야 합니다.
오늘은 제가 설교를 하려니까 좀 위축이 됩니다. 왜냐하면 ‘광채 나는 얼굴’이라는 제목으로 설교를 하려면 얼굴에 광채가 좀 나야 되는데 그렇지 못해서 말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제 얼굴이 예수님 믿고 정말 많이 좋아진 겁니다. 옛날에 거의 그랬지만 저도 솔직히 어렸을 때에 가정이나 마을이나 그렇게 좋은 환경에서 자란 것이 아니라서 사회에 대한 불만도 많고 생각하는 것이 부정적인 것이 많아 얼굴에 그늘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 믿고 정말 하나님의 놀라우신 은총을 깨닫고 정말 감사하고 기뻐하며 살아가기를 힘쓰고 있습니다. 그래서 지금은 이게 굉장히 밝아지고 좋아진 거니까 그런 줄 아시고 설교를 들으시면 좋겠습니다.
여하튼 여러분, 우리는 밝게 살아야 합니다. 감사와 기쁨과 은혜가운데 살아야 합니다. 물론 우리가 아무리 믿음 안에서 거듭났어도 과거의 잔재를 완전히 털어버리고 또 현재의 상황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는 없겠지만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말 우리가 하나님을 알고 믿고 거듭났다면 이제는 좀 달라져야 합니다. 긍정적이고 희망적으로 생각해야 합니다. 감사와 긍정의 말을 해야 합니다. 다른 사람이나 세상도 감사와 사랑의 관점으로 보아야 합니다. 그러면 자연스럽게 얼굴이 밝아지고 사는 모습이 밝게 되는 것입니다.
안 그렇습니까? 우리는 예수님의 생명과 사랑과 은혜와 평안을 받은 사람들이 아닙니까? 영원한 영광의 나라를 소유한 사람들이 아닙니까? 그렇게 주님이 주시는 생명의 기쁨과 평안과 위로와 소망과 자유가 있고, 영원한 영광의 나라에 대한 소망이 있다면 당연히 우리의 얼굴에 밝고 기쁘고 은혜로워야 되지 않겠습니까? 혹시 살아온 과정이 순탄치 않았고, 현재의 상황이 좋지 않다해도 예수님을 믿고 5년 10년 20년 30년 40년 지나면 사는 모습이 환하게 바뀌어야 하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여러분, 행6:15절을 보십시오. “공회 중에 앉은 사람들이 다 스데반을 주목하여 보니 그 얼굴이 천사의 얼굴과 같더라.” 여러분, 이때는 유대종교지도자들이 스데반에게 모세와 하나님을 모독했다는 죄목을 씌워 산헤드린공회 법정에 세웠을 때입니다. 그러니까 이때의 스데반은 죄수 아닌 죄수의 몸으로 끌려와 잘못하면 죽을지도 모르는 상황이었던 것입니다. 아니 잘못하면 죽을지도 모르는 상황이 아니라 그는 이 종교재판에서 사형선고를 받고 실제로 돌에 맞아 죽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법정에 앉아 있는 스데반의 얼굴이 천사와 같이 밝게 빛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성령으로 충만하니까 성령께서 기쁨을 주시고 평안을 주시고 소망을 주시고 영광의 나라를 환하게 보여주시니까 그 심령 속에 기쁨이 넘쳐 얼굴이 밝게 빛나고 있었던 것입니다.
당연하지 않습니까? 마음에 천국이 이루어져 있는데 인상을 잔뜩 쓰고 있다면 뭔가 마음에 원망과 불평과 미움과 근심 걱정이 있다는 이야기가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주님이 주시는 생명의 기쁨과 평안과 위로를 받고 영광의 나라에 대한 소망이 있는 사람은 그래서는 안되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어찌하든지 예수님을 심령 속에 온전히 모셔 들이고 예수님이 주시는 생명과 기쁨과 평안과 위로와 소망을 마음껏 누리며 그래서 다른 사람에게도 생명의 기쁨과 평안과 위로와 소망을 주는 빛나고 아름다운 삶이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러면 어떻게 그런 삶을 살 수 있습니까?
2. 예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가 정말 빛과 같이 밝은 삶을 살려면 무엇보다도 예수님을 바라보며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을 바라본다는 것은 예수님께 소망을 두고 예수님 안에 있는 그 온갖 좋은 것들을 사모하는 마음으로 주님을 가까이 하는 삶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당연히 예수님이 주시는 은혜로서 얼굴에 밝은 빛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너무나 당연한 말씀 아니겠습니까? 예수님이 누구십니까?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시며 세상의 유일한 참 빛이십니다. 예수님은 사랑과 은혜와 평안과 기쁨과 소망의 주님이십니다. 그러면 당연히 이런 예수님을 바라보며 따라가면 예수님 안에 있는 은혜들로 충만하게 되고 그러면 우리 모습이 밝고 깨끗하고 희망차고 소망이 넘치게 되지 않겠느냐는 말씀입니다.
히12:2절에서는 말씀을 보겠습니다.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여러분, 보세요. 믿음의 주시오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믿음의 주이십니다. 우리를 온전케 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그 예수님을 바라보면 우리 믿음과 삶이 점점 온전케 되어 생명의 기쁨과 능력과 은혜 가운데 살다가 영광의 나라에 들어가는 복되고 아름답도 멋있고 빛나는 인생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가 무엇을 바라보느냐에 따라 그 사람의 삶의 모습이 결정됩니다. 자꾸 나쁜 것, 안 좋은 것, 악한 것, 부정적인 것, 어두운 것을 생각하며 그것을 바라보면 결국 부정적이고 어두운 인생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열악하고 부족하고 힘들고 어렵고 고통스러운 현실만 바라보면 자꾸 불평불만만 생기고 의욕도 없어지고 그러면 인생이 점점 어두워질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늘 좋은 것, 아름다운 것, 이미 가지고 있는 것, 할 수 있는 것, 소망이 있는 그것을 바라보면 긍정적이고 밝고 활기가 있고 의욕적이고 적극적이 되어 그 삶이 점점 정오의 빛과 같이 밝아지는 것입니다.
그러면 정말로 우리에게 생명을 주고 기쁨과 평안과 위로와 소망과 평안을 주고 능력과 지혜를 주시는 분이 누구입니까? 물론 온 인류의 유일한 생명이며 소망이며 위로이며 희망이며 빛이신 예수님이 아니십니까? 그러므로 그 예수님을 바라보며 살아가면 빛과 같은 은혜가 넘치게 되는 것은 당연하지 않습니까?
여러분, 요8:12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또 말씀하여 이르시되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여러분, 보십시오. 나는 세상의 빛이라고 하셨습니다. 빛이 뭡니까? 모든 어둠을 밝혀주는 것을 말합니다. 생명과 기쁨과 평안과 위로와 소망을 주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러한 예수님 믿고 바라보며 살아가는 사람이 어찌 빛과 같은 은혜를 누리지 못하겠습니까?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요15:11절에서는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니라.’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시며 빛이십니다. 그래서 예수님 안에는 그 어떤 어둠의 그림자도 없이 오직 생명과 평안과 위로와 소망만이 넘칩니다. 영원한 영광의 나라가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을 바라보는 사람은 감사와 기쁨과 은혜로 현재적인 천국을 누리며 주님과 동행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얼굴이 밝아지고 삶이 밝아지고 생각이 밝아지고 긍정적이고 소망이 넘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영원한 영광의 나라는 물론 여기서 누려야 할 하나님의 나라도 마음껏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의 것을 바라보면 어떻습니까? 여러분, 세상의 돈이나 명예나 권세나 지식이나 세상 즐거움을 바라보는 사람은 결국은 실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사람을 바라보아도 마찬가지입니다. 실망하고 낙심할 수 밖에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세상이 본래 죄와 무지 속에 있기 때문입니다. 나도 너도 우리 모두가 다 죄인이요 연약한 자요 부족한 자요 허물투성이 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돈도 명예도 권력도 그 어떤 세상의 부귀영화도 결국은 다 썩어 없어질 것들이기 때문입니다. 동시에 돈이나 권세를 바라보면 자꾸 욕심이 생기고 그러면 결국 시기 질투 원망 불평 미움 싸움이 생기고 그래서 얼굴이 어두워지고 삶이 어두워 질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만약 그렇게 살면서도 기쁘고 즐겁게 산다면 그건 마약이나 환각제나 술을 마시고 정신이 혼미해지고 감각이 무디어져서 누리는 왜곡된 기쁨이요, 순식간에 사라질 가짜 기쁨인 것입니다. 아니 그냥 가짜 기쁨만이 아니라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만을 초래하는 어리석고 불쌍한 인생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오직 유일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님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오직 예수님께 소망을 두고 목적을 두고 예수님의 삶을 모델로 삼아 주님과 동행하시기 바랍니다. 주님 안에 있는 그 생명 기쁨 은혜 사랑 소망 위로를 사모하며 주님을 가까이하며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주님이 주시는 그 놀라운 진짜 참 영원하고 온전한 생명과 기쁨과 은혜와 소망과 위로 가운데 할렐루야 찬양하며 영원한 영광의 나라를 향하여 힘차게 달려감으로 해처럼 밝고 아름답게 빛나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 예수님을 생각해야 합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가 정말 정오의 빛과 같이 빛나는 인생이 되기 위하여 주님을 바라본다면 주님을 늘 생각해야 합니다. 그러니까 주님을 바라본다는 것은 우리 인생의 목적을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시며 빛이신 주님께 둔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고, 주님을 생각한다는 것은 그렇게 주님을 소망과 목적으로 삼고 달려가려면 주님의 뜻을 늘 생각하며 그 뜻을 바르게 알고 그 뜻을 따라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어떤 목적지에 잘 도착하려면 일단은 목적지를 바르게 알아야 하고, 그 다음에는 올바른 방법과 코스로 달려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마라톤에서 승리하려면 골인지점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그 다음에는 올바른 코스를 따라 정해진 규칙대로 달려야 하는 것입니다. 만약 목표지점을 정확하게 알고 열심히 달려가 일찍 도착을 했어도 그 과정에서 규칙을 지키지 않으면 실격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주님을 생각한다는 것은 바로 이겁니다. 주님을 목표로 삼고 그 다음에는 주님의 뜻과 방법을 따라 살아가라는 말씀인 것입니다. 목표만 주님으로 정해 놓고 주님을 생각하지 않으면 목표지점을 향하여 잘 가지도 못할뿐더러 자신의 잘난 경험과 이성과 지식을 따라 왜곡된 길로 가기 십상이고 더 적극적으로는 악과 불의를 행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아무리 주님을 향해 가도 주님께 인정받지 못해 실격패 당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히3:1절에서는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함께 하늘의 부르심을 받은 거룩한 형제들아 우리가 믿는 도리의 사도이시며 대제사장이신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 오직 유일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님을 생각하라. 우리를 위해 십자가까지 지신 예수님의 사랑과 은혜를 생각하라. 예수님께서 그러한 십자가의 죽으심을 통하여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셨던 영원한 영광의 나라를 생각하라. 그래서 그 예수님을 바라보며 예수님의 말씀과 생각과 방법을 따라 예수님과 동행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무슨 일이 있어도 주님을 향하여 힘차게 나아가게 되고 그럴 때 주님을 닮아가며 빛과 같은 은혜를 누리며 그 주님의 빛을 세상에 비추며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가 무엇을 생각하느냐가 중요합니다. 돈만 생각하면 돈 따라 갑니다. 명예를 생각하면 명예 따라 갑니다. 술을 생각하고 도박을 생각하고 향락을 생각하면 결국 그걸 따라가게 되어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을 생각하고 영광의 나라를 생각하면 진리의 길 생명의 길로 가게 됩니다. 그러면 당연히 생명의 사람, 진리의 사람, 은혜의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잠23:7절에서는 “대저 그 마음의 생각이 어떠하면 그 위인도 그러한즉 그가 네게 먹고 마시라 할지라도 그의 마음은 너와 함께 하지 아니함이라.”고 하셨습니다. 또한 렘6:19절에서는 “땅이여 들으라 내가 이 백성에게 재앙을 내리리니 이것이 그들의 생각의 결과라. 그들이 내 말을 듣지 아니하며 내 율법을 거절하였음이니라.”고 하였습니다. 생각대로 된다는 것입니다. 현재의 우리의 모습은 우리의 생각의 결과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우리는 좋은 것을 생각하고, 의를 생각하고, 진리를 생각하고 거룩한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물론 먹고 사는 것도 생각해야 합니다. 자식도 생각해야 하고, 부모님도 생각해야 하고, 농사일도 생각하고 연구도 해야 합니다. 직장인은 직장생활에도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보다 먼저 주님을 생각해야 합니다. 주님의 뜻을 생각해야 합니다. 주님을 기쁘시게 할 일을 생각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주님이 우리의 생명의 주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구세주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거기에 진리가 있고 생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방법대로 주님의 뜻대로 자녀도 사랑하고 부모님도 공경하고 공부도 하고 장사도 하고 농사도 짓고 사업도 하고 직장생활도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세상에서 해야 할 일들을 지혜롭게 성실하게 은혜 가운데 기쁨으로 할 수 있게 되고, 그럴 때 최상의 결과를 가져오고 그래서 생명의 기쁨과 은혜가 넘치고 얼굴에 빛이 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을 생각하지 않고 생각이 온통 세상의 것에 집중되면 엉뚱한 길로 가게 되는 것입니다. 정직하게 깨끗하고 바르고 성실하게 할 수가 없어지는 것입니다. 도리어 자기 욕심을 따라 하게 되고, 시기와 질투에 빠지기 쉽고 실망하고 낙심하고 원망과 불평과 시기와 질투가 생기기 쉽습니다. 심지어 악을 행하고 남에게 상처와 고통과 아픔을 주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얼굴에 빛이 나지 않고 어둠이 깔리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 전8:1절을 보겠습니다. “누가 지혜자와 같으며 누가 사물의 이치를 아는 자이냐 사람의 지혜는 그의 얼굴에 광채가 나게 하나니 그의 얼굴의 사나운 것이 변하느니라.” 지혜는 얼굴에 광채를 내게 한다. 사나운 것을 비롯한 모든 어두운 것을 물러가게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지혜가 뭡니까? 지혜는 하나님이 지혜이고 그 말씀이 지혜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믿고 생명이시며 빛이시며 진리이신 예수님을 바라보며 그 말씀을 따라 주님과 동행하는 자는 빛과 같은 인생이 된다는 것입니다. 뭐 당연하지 않습니까? 예수님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시오 빛이신데 우리가 그 예수님 안에 있고 예수님이 우리 안에 있으면 그 인생이 어찌 밝게 빛나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여러분, 그렇게 밝게 빛나는 사람은 사나운 것이 사라진다고 하였습니다. 당연하지 않습니까? 마음 속에 평안과 기쁨과 사랑과 은혜가 넘치는데 어떻게 사납겠습니까?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는 정말 불평 불만하면 안됩니다. 추한 말, 악한 말, 독한 말, 모진 말을 하면 안됩니다. 자꾸 싸우려고 대들면 안됩니다. 어찌 하든지 부드러운 말, 사랑의 말, 은혜의 말, 깨끗한 말을 해야 합니다. 갈등을 유발시키지 말고 화해자가 되어야 합니다. 아니 당연하잖아요. 우리 가운데 예수님의 사랑과 빛과 은혜와 생명과 기쁨과 평안이 있는데 어찌 추하고 악하고 독하고 모질고 싸우려고 대들겠습니까? 여러분, 마5:5절을 보십시오.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또 마5:9절을 보십시오.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이제 말씀을 마칩니다. 저와 여러분은 예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진정 믿음과 선과 진리와 의 가운데 살아감으로 자신도 생명의 기쁨과 은혜를 누리며 남에게도 생명의 기쁨을 가져다주는데 가운데 얼굴에 광채와 윤기가 나는 삶이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러기 위하여 세상의 왜곡되고 부패한 가치관을 따라 살아가지 말고, 언제 어디서 무엇을 하든지 주님의 뜻을 생각하고 주님의 방법을 생각하며 주님과 동행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점점 주님을 닮아감으로 진실로 여러분의 심령이 밝아지고 얼굴이 밝아져 생명의 은혜를 마음껏 누리며 세상에 빛을 비추며 주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