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득 돌아본 '그 때 그 곳'>
서울 종로1가 르네쌍스 음악감상실
추억은 비린내가 난다. 비에 홀딱 젖어버린 외투에서 풍기는 그 큼큼한 물비린내. 혹시 추억에도 맛이 있다면 그것은 아린 맛이다. 혀의 감각을 넘어 몸 깊숙이 느껴지는 약간 아픈 통감 같은 것.
현재의 삶이 팍팍하거나 막연한 불안이 엄습할 때 지나간 추억의 아프고 비리고 아린 느낌이 위로가 되는 것은 왜일까. 추억에 닿는 일은 흡사 따끈하게 덥힌 온돌에 몸을 누이는 것과 같다.
인터넷에서 르네쌍스를 검색하면 문예부흥 대신 꽤 많은 분량의 추억담이 사이버 공간을 떠돈다. 그 글을 쓴 사람들은 죄다 늙었고 어린 날 자신의 문화적 허영기를 귀여워하며 기억을 되새긴다. 세계사의 르네상스가 아닌 추억담 속의 그 옛날 '르네쌍스'는 어떤 장소를 가리키는 고유명사다.
1960, 1970년대 지금의 홍대앞이나 강남역 사거리 같은 역할을 했던 곳이 서울 무교동과 종로1가인데 그 한복판에 고전음악 감상실 '르네쌍스'가 있었다.
통상 줄여서 '쌍스'라고 불렀던 그곳에는 언제나 지친 표정의 주인장 박용찬 선생이 드문드문 얼굴을 비치며 곡 해설을 했고 유일한 종업원 미스 양 누나가 걸레를 쥐어짠 듯한 원두커피를 무릎에 놓아주고 갔다. 걸레 짠 물을 마시며 베토벤, 브람스, 차이콥스키를 듣던 사람들은 식물처럼 조용하고 음울해 보였고 차림새가 우중충했다.
내 기억 속의 그곳은 세련된 문화살롱이 아니라 세기말풍 데카당스가 지배하고 있었다. 이미 인생이 아프거나 장차 아플 태세가 역력한 문화한량들이 달력과 시계를 내던져 버린 듯 '하냥' 죽치고 세월을 보냈다. 저 자는 도대체 뭘 먹고 살아갈까 싶은 인간이 뜬금없이 미국유학을 간다고 인사를 한다거나 대기업 취업소식을 전하면 멍한 기분이 들고는 했다.
세상을 버릴 듯이 심각한 표정을 연출했지만 또 어떻게든 살아갈 도리를 하고야 마는 방황기 인생들의 집합처. '르네쌍스'는 막 성장통이 시작된 신생국의 청년들이 내면에서 꿈틀거리는 자아팽창, 자아 정체감의 혼란을 감당하지 못해 웅성이던 상징공간이었다.
지금 '르네쌍스'는 역사가 되어 서초동 국립예술자료원의 한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예술을 사랑하던 궁핍한 한량들은 사라지고 유흥객들만 흥청거리는 분위기로 세상이 변해 버린 탓이다.
텅 빈 감상실을 유지할 수 없어 몇 차례나 문을 닫으려는 시도 끝에 지난 1987년 마침내 영원히 종언을 고했다. 감상실을 채웠던 수천 장의 LP, SP 원반들과 하츠필드 스피커, 매킨토시 앰프가 덕수궁을 거쳐 서초동 예술자료원에 놓이게 된 내력이다. 그 출발점에서 최후까지 호남 출신의 부잣집 도련님 박용찬이 있었다.
그는 1951년 전쟁의 와중에 대구 향촌동에 최초의 '르네쌍스'를 열었다. '전쟁의 폐허 속에서 바흐가 들린다'며 외신이 놀라움을 전했다는 그 장소다. 피란을 가면서도 트럭에 음반만 싣고 떠났다는 철없던 그 청년의 '르네쌍스' 전설을 본격적으로 꽃피운 것이 1959년 종로 1가 영안빌딩 4층 '르네쌍스' 시대의 개막이다.
그 시절 서구예술은 유럽과 미국이라는 공간적 거리로 존재하지 않았다. 그저 아련한 환상의 원더랜드 같은 곳. 그러나 허리우드극장에서 감상하는 할리우드 영화와는 품격이 다르다고 믿는 정신적 허영쟁이들이 '르네쌍스'의 좌석을 메웠다. 카뮈의 '전락'이나 사르트르의 '존재와 무'를 옆구리에 낀 이들에게 바흐, 베토벤의 선율은 전존재를 뒤흔드는 위력이 있었다.
울었다는 사람이 많았다. 처음으로 차이콥스키의 비창 교향곡을 들으며 너무 슬퍼서 눈물이 철철 흘러내렸다는 고백이 있었고 일생토록 브람스 음악만을 듣겠노라는 순정파도 있었다. 소련 작곡가 쇼스타코비치의 교향곡 5번에는 '혁명'이라는 부제가 붙어있어 마치 위험한 거사를 벌이듯이 술렁거리는 분위기 속에 곡이 흘렀다.
실제로 '혁명 교향곡'을 틀 때는 출입구에 보초가 섰다. 겉멋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진지한, 그러나 지금 기준으로 보면 소박하고 변방적인 문화적 식견이 실내에 떠돌았다. '르네쌍스'의 식물들은 팝과 록을 틀던 아래층 무아다방, 희다방에 절대로 발걸음을 하지 않았다.
나의 '르네쌍스' 출입은 1974년 고등학교에 입학하면서 시작된다. 문예반에 들어갔는데 교지, 신문, 문학발표회, 시화전, 백일장 등 연간 6개의 학교행사를 문예반원들이 다 주관했다. 지도교사의 간섭을 수치로 아는 전통이 있었고 학교에서도 내놓은 자식 취급을 해줬다. 도대체 수업시간에 들어가 본 것이 얼마나 되려나. 성적은 더 내려갈 곳이 없었고 집에서는 아침 저녁으로 밥상이 엎어지는 불화의 연속이었다.
거북이라 불리던 문예반장 형이 어떤 오후에 담배를 피우자며 종로통으로 이끌고 갔다. '르네쌍스'였다. 맨 앞자리에 머리가 긴 청년과 조금 나이 먹은 아저씨 두 사람이 거센 에너지를 뿜으며 지휘를 하고 있었는데 신기하게도 곡의 흐름과 손동작이 착착 맞았다. 세상에 이렇게 멋진 곳이 있다니! 그때 나는 클래식 음악이란 걸 처음 들어봤다.
무엇보다 플레이어라고 부르는 유리박스 안의 DJ가 진짜 예술가처럼 보였다. 집 장롱보다 커보이는 양 스피커 가운데 화분을 겸한 하얀 조각물이 있었고 그 앞에 칠판이 놓였다. 곡이 끝나면 플레이어가 분필을 들고 나와 긴 곡, 막간의 짧은 곡, 또 긴 곡, 이렇게 세 곡을 써놓고는 했다.
쵸핀으로 읽은 작곡가는 쇼팽(CHOPIN)이었고, 카잘스라고 알고 있던 첼리스트를 이곳 사람들은 한결같이 '캇싸알스'라고 발음했다. 여러 고교 문예반이 모이는 문학회의 여학생 '맑음이'에게 편지를 썼다. '나는 마침내 예술의 향기를 맡고야 말았노라...'
그 시절 음악이 흐르는 가운데 남들에게 들킬세라 숨죽여 꺽꺽 울었던 것은 다름아닌 나였다. 랭보의 뒤를 이을 조숙한 천재시인인지라 일찍 죽을 운명임에는 틀림없지만 절대로 대학에 들어갈 수 없는 학과성적이 서러웠다.
대책없는 가정불화는 끝이 없었다. 설움이 복받쳐 홀로 눈물을 철철 흘리던 음악감상실 속의 담배 피우는 까까머리 소년, 그윽하게 '죽음' '존재' 뭐 이딴 소리를 흩날리던 자가 열 일곱 살 고교 1학년생이었다니!
그때 그 눈물의 사운드트랙이 브람스 4번 교향곡 1악장이었고 영원히 나만의 레퍼토리로 자리잡았다. 그 후 몇 십년이 흐르는 동안 취향도 기질도 신세도 변해갔지만 브람스를, 아니 클래식 음악의 손아귀를 벗어나 보지 못했다. 골프장도, 강남 룸살롱도 가본 적이 없다. 그런 건 시시해 보여서였다.
1970년대 당시 '르네쌍스'의 맞수가 있었다. 명동에 소재한 '필하모니'. '필하모니'는 우선 휴게실이 따로 있었고 헤드폰으로 개인 감상을 할 수 있는 시설도 있었다. 무엇보다 주감상실이 훨씬 넓고 화려했다.
우중충한 '르네쌍스'에 비해 여러모로 세련된 감상실이었는데도 그곳 출입을 일종의 배신으로 여기는 진종 '쌍스파'가 꽤 많았다.(나중에 르네쌍스도 내부공사를 해서 휴게실을 만들었는데 영영 이전 분위기로 돌아가지 못했다.)
쌍스파들끼리 기수를 정해 저녁이면 청진동 국밥집을 전전했는데 한결같이 빈털터리였건만 어떻게 밥값을 조달하는지 신기했다. 나와 같은 또래 기수들이 어느 겨울날 대성리로 나들이를 다녀온 기억이 새롭다. 그때 우리는 무슨 대화를 나눴을까. 아마도 경희를 사랑한 병주의 고백을 들었겠지?
문화는 때로 장소와 물건의 기억이다. 우리는 지난 30여년 동안 그 기억을 부수고 아파트와 고층건물을 지어 올렸다. 그 덕에 몹시 배가 부르고 해외여행을 무시로 다니게 되었지만 청소년들은 자꾸만 옥상에서 뛰어내린다. 아기들은 잘 태어나지 않고 모든 세대가 불안에 잠식당한 영혼으로 산다.
삶이란 어찌 이리도 쌤쌤이더냐. 속성으로 달성한 풍요와 거침없는 반문화의 대가를 치르고 있는 것이다. 미화된 옛날 이야기로 현재의 삶을 비하하는 것이 늙은이들의 습관이라면 차라리 늙은이가 되고 말겠다.
왜 그러한가. 문화예술에 대한 존중, 열망, 선망이 죄다 사라지고 가격만 남아버린 탓이다. 오로지 잘 팔리는 것만이 살아남고 어디선가 고독하게 자기세계를 추구하는 예술행위는 거리의 돌멩이 취급을 받는다.
그래서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바로 르네쌍스다. 괴로운 성찰과 벅찬 감동이 살아서 자아가 널뛰기하는 공간. 가격 대신 멋이, 능력보다는 진실이 존중받는 공간. 백 년, 이백 년 전 예술가의 고뇌를 오늘의 호흡으로 일치시킬 수 있는 초시간적 공간. 지금 이 세상 어딘가에 르네쌍스는 없는가.
김갑수 시인·문화평론가
브람스 교향곡 4번 1악장
첫댓글 춘수방장님 덕분에 잠시 그때의 감회를,
동감에 한표던집니다
저도 한참 피가 끓던시절이라 실내악이나 성악보다
역동성이 강한 심퍼니를 편애했었고
당시에 칠판에 간결히
휘갈겨 쓴 곡명을 메모하던 기억으로 코플란드에
엘 살롱 인 멕시코, 랄로에 스페인 교향곡, 거쉬인에 랲소디 인 블루.. 등
통금전 11시쯤 클로징으로 브람스에 자장가 함께하고 집으로 내달려오곤 했었고 보로딘에 녹턴을 흥얼대던 나름 고개가 15도로 기울어진 진중파 고민생 이였었씀을..
무교동에 르네상스 클래식 음악감상실
유명햇었지요
그런데 저는 그때 르네상스는
안가봤어요
명동을 자주 드나드니
필 하모니나 바로크 크래식 음악
감상실을 자주 갔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