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선생님 시민의 한국사를 읽어보던중 의문이 생겨질문드립니다. 선위한 406p에서는 1898.03.06 제 22회 토론회에서 러시아의 절영도 조차에 대해 반대하는 논의가 이루어졌다고 나와있는데 시민한국사2권 64p에서는 1898.02.13 제 21회 토론회에서 러시아 절영도 조차를 강력하게 반대하는 의견을 상주하는 구국선언상소를 결정하고이 시점을 기분으로 독립협회의 활동의 성격이 변화했다고 나와있습니다.
제 21회 토론회부터 제22회 토론회까지 러시아의 절영도 조차에 대한 반대 논의가 계속된것인지 아니면 시민한국사 서술이 잘못되었는지 궁금합니다.
첫댓글 안녕하세요. 21회 22회 모두 러시아 절영도 조차와 관련한 논의가 나옵니다. 정확히 보자면, 2월 13일 토론회 이후 2월 21일 구국선언상소문을 올리게 됩니다. 그리고 3월 1일에는 한러은행을 개설됩니다. 이에 독립협회에서는 3월 6일 독립관에서 회의를 개최하여 한러은행의 철수 요구 등까지 요구하게 되고, 다음 날 항의문을 탁지부에 발송합니다.. 이에 3월 7일 러시아에서는 "대한제국 황제의 요청에 따라 士官과 고문관을 파견하였지만 황제와 정부가 이를 필요없다고 여기면 러시아정부는 곧 철수할 용의가 있으므로 24시간 이내에 그 여부를 회신해 달라."라는 조회를 대한제국 외부에 보내옵니다.
다만 교과서에서는 1898년 2월 부분보다는 3월을 자세히 서술해놓아, 저도 3월 부분 위주로 말씀드렸습니다.
친절한 답변 감사드립니다.